이번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이 주최한 한국교회사연구 국제 심포지움에 초청된 것을 큰 영광으로 여깁니다. 이 발제에 앞서 저는 크게 두 가지 점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일본인으로서 기독교 신앙을 가진다는 일이 어떤 것일까를 고민하다가 근대 일본기독교사를 연구해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발견한 일은 일본이 장기간 한국을 침략하고 지배 한 일, 그리고 일본의 기독교가 거기에 대해서 정신적으로 가담해 온 일입니다. 저는 일본 기독교의 한 사람으로서 그와 같은 사실에 대하 진심으로 사죄를 드립니다. 우리들 일본기독교인들은 누구도 지울 수 없는 과거의 진실을 마음에 새겨, 그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의 도를 쫓아 최선을 다해 나가지 않으면 안되리라 믿습니다. 연세대학교의 여러분들이 그와 같은 화해의 자리를 마련하신 것으로 믿어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또 한 가지는 대단히 죄송한 말씀이지만, 제가 한국어를 읽고, 말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사람은 한국교회사를 논의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행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바로 이 연세대학교에서 수학한 바 있는 사와 마사히코 선생, 구라타 마사히코 선생을 비롯한 여러 분들이 한국 연구자의 한국교회사 연구성과를 일본어로 번역하였고, 또한 그들 스스로 연구한 한국교회사 연구성과를 출판한 바 있습니다. 또한 지명관 선생, 유동식 선생, 조재국 선생 등과 같은 이들이 일제에 의해 강제된 치욕의 일본어이지만, 한글을 모르고 그 일본어를 쓸 수밖에 없는 일본인들을 위해 한국교회사 혹은 한국기독교사에 대한 연구를 일본어로 출판해 주었습니다. 저는 그 덕택에 몇 권의 책을 읽고 한국교회사를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기초로 한국교회사에 대해 말씀 드리고, 또한 끝으로 한일기독교관계사에 대해서 구체적인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1) 민경배 선생의 한국교회사 연구
한국교회사라고 하면, 나의 학우이자, 연세대학교의 명예교수인 민경배 선생의 연구가 일본에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선생의 저작 중 일본어로 번역된 것을 보면, {한국기독교사}(원저 1968년판, 사와 마사히코 번역, 일본기독교단 출판국, 1974년 간행), {한국의 기독교}("Christianity in Asia, Ⅰ North-East Asia", CCA, 1979, 사와 마사히코 번역, 교문관, 1981년 간행), {한국기독교회사}(원저 제3판, 1975년 증보, 김충일 번역, 신교출판사, 1981년 간행), {하나님의 영광 뿐-순교자 주기철 목사전}(윤종은·사와 마사히코 번역, 수구서방, 1989년 간행) 등이 있습니다. 선생의 주저 {한국기독교회사}를 번역한 김충일 씨는 도시샤대학 문학부 출신으로 오사카에 있는 재일 한국인 고등학교의 교사입니다. 신학교육을 받지 않은 분이지만, 한국에서 진행된 교회의 발자취를 일본인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하여 이 대작을 일본어로 번역한 재일한국인 기독교인입니다. 한일간 교회교류에 있어 재일 한국인 기독교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사실이 여기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여기서 에피소드 한 가지를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1962년 여름이었다고 생각이 드는데, 당시 EACC(동아시아기독교협의회-역주)가 싱가포르에서 아시아의 젊은 교회사 연구자들을 위하여 40일간 연수회를 개최한 바 있습니다. 그 모임에 민경배 선생도, 저도 함께 참여했습니다. 그 때, 어느 집회에서 민성생은 "일본기독교단은 일제의 'puppet'(꼭두각시-역주)다"고 이야기했습니다. 'puppet'는 '꼭두각시 인형'이나 '괴뢰'등을 의미하는데, 상당히 지나친 감이 있는 표현이어서, 제게는 얼른 그 뜻이 수긍되지 않았습니다. 거기다 당시는 별로 일본기독교단에 대한 역사연구가 진행되지 못한 상황으로 선생의 표현에 대한 대응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그 일본기독교단사를 연구할 수 있는 계기를 얻은 지금에 와서 보면, 싱가포르에서 한 선생의 표현은 대단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선생께 감사한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언젠가 제가 이 일은 선생께 말씀 드렸더니 선생께서는 잘 기억하지 못하셨습니다. 아마 선생께서는 그 말을 그렇게 중요한 주제로 생각해 오지 않으셨던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아무튼 그 연수회가 출발이 되어, 앞서 말씀 드린 영문 아시아 기독교사가 CCA(아시아기독교교회협의회-역주)로부터 출판되고, 거기에 선생과 제 논문이 함께 수록되었습니다.
민경배 선생의 입장은, 민족교회사관으로 불립니다. 앞서 선생의 주저서 부제는 [한국민족교회형성과정]으로 되어 있습니다. 선생은 한국교회사를 선교부나 그 선교사들이 주도한 교회사로 보지 않고 한국인의 민족적 주체성을 기반으로 형성한 기독교인들의 신앙적 당위를 논술하는 교회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근대 한국이 일제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을 때 교회는 민족의 수난과 저항에 함께하며 그 주체성을 구현해 나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될 때 이 사관은 한국 민족전체의 문제가 중심이 되어, 한국사회 내부의 문제가 간과된다, 즉 민중부재의 정치체제 중심의 사관이 되고 만다는 비판이, 민족교회사관에 대한 민중교회사관으로부터 제기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도 있습니다.
저는 민경배 선생의 민족교회사관에 대립하는 민중교회사관 입장의 한국교회사 연구, 예를 들면, 주재용 선생 등의 연구내용을 알지 못하는 관계로 여기에 관해서 무어라고 언급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양자의 입장이 양자택일의 문제가 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민중이라고 하는 것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보면, 비특권계급, 비지배층이지만, 자기가 처한 장소와 범주 속에서 삶의 목표와 지혜를 발견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일제의 지배기에는 한국민족 전체가 민중의 위치에 놓여졌었습니다. 그들은 그 가혹한 살아내기 위하여 자기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한국인으로 세우는 자생의 민족의식을 지향하고, 그것을 처처곳곳 일상생활 속에서 적용시켜 일제 세력과 대항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선택이 외에 다른 방도는 없엇습니다. 한국교회는 1890년대에 시작된 '네비어스 선교방책' 이래 민중 속에 뿌리를 내려 왔습니다. 그 민중이 일제에 의해 생활권을 침해당하고 각자 자신의 분수대로 지니고 있던 민족성마저 빼앗길 때 민중의 교회였던 한국교회는 성서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임을 인식하고, 거기서부터 한국인으로서의 민족의식을 환기시켰으며 민중의 기쁨과 희망을 선포한 것입니다. 백의를 걸친 한국 민중들은 어쩔 수 없이 신사에 참배하였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과감히 도전하여 순교의 죽음을 맞이한 교회지도자들을 자신과 아무 관계도 없는 지식인 엘리트의 일로 방관했겠습니까. 민중에게 있어 그들의 신사참배 거부는 자신들의 소원을 실현한 상징적 행위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민족교회사관과 민중교회사관은 상호 이질적인 것이 아니고 필히 공감할 수 있는 접점이 있습니다. 양자는 공통의 역사적 소재를 발견하여 공동연구를 진행하는 일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제는 생각하는 바입니다.
2)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의 한국교회사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의 {한국기독교의 수난과 저항: 한국기독교사 1919-1945}(한석희, 구라타 마사히코 감역, 신교출판사, 1995)가 일본어로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는 동 연구소가 간행한 {한국기독교의 역사} 두 권 중 제2권 [수난](기독교문사, 1990)을 번역한 것입니다. 제2권이 먼저 선정 번역된 이유는 3·1운동으로부터 신사참배 강요에 이르기까지 일본인들로서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시기의 한국기독교 역사가 서술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번역 감수자자의 한 사람인 한석희 씨는 재일한국인 실업가로서 일제하 일본교회의 조선전도 연구를 일고, 그와 관련한 {일본기독교 해외전도사 연구}를 집필하여 1997년 77세에 도시샤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한 바 있습니다. 한석희 씨의 지도하에 연세대학교에 유학 후 모모야마학원대학에서 한일관계사를 연구하던 구라타 마사히코선생을 중심으로 칸사이지역의 연구자들이 힘을 모아 번역을 완성시킨 것입니다. 애석하게도 이 책의 번역의 두 공헌자인 두 사람은 모두 별세하여 한일교류가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 일을 일본에서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면, 이 책의 내용으로 돌아와 보도록 하겠습니다. 민경배 선생의 저작은 문학적인 문체와 섬세한 논리를 구사하여 집필하였기 때문에, 외국인인 제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책은 평이하여, 읽기가 우선 쉽고, 그러면서도 견실한 논증을 시도한 연구서라는 것이 제 첫 인상이었습니다. 이 책의 집필에 가담한 연구자들은 공으로 자료를 발굴하고, 자의적인 역사해석을 피하여 상호 토의를 통한 연구들 목표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정기간행물 일람표, 교회조직 및 임원일람, 여러 교파의 교세변천표 등 오랜 기간 치밀한 연구조사를 진행한 것으로 생각되며 자료연구나 여러 교회에 대한 객관적 실태 변화를 아는 데 귀중한 근거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교회재정에 관한 통계나 분석을 보면 대단히 좋은 연구결과라고 생각됩니다. 이와 같은 연구조사를 하는 일은 여간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을 줄 아나, 이는 한국교회가 선교부로부터의 독립, 자급과정을 고찰하는데 있어 대단히 중요한 근거가 되는 일임에 어김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첫 부분에는 3·1운동에 관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운동의 발단, 전개, 그리고 교회의 관련문제가 상세히 정리되어 있으나, 3·1 독립선언 자체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본인으로서 살피고자 아니할 수 없는 것은 그 선언이, 조선의 독립은 "정의인도, 생존존영을 위한 민족적 요구"인 동시에 "일본국으로서는 사악한 길에서 나와 동양의 맹주로서 중요한 책무를 다하는 데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주창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민청학련사건에 관련되어 투옥되었던 시인 김지하씨는 출옥직후인 1975년 3월 1일 [일본민중에게 보내는 제언]을 발표하고, "그 때 우리들은 당신들 일본민족을 단순히 원수로서 미워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주권과 독립을 비폭력적, 평화적인 운동형식으로 선포하는 것을 통해, 피해자로서 자민족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잔인무도한 가해자로서의 그대 일본민족 역시 동시에 구하고자 하는 신념을 지녔던 것이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는 십자가 복음에 근거한 삶의 방식을 간결하게 보여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이 책은 기독교인이 "성서를 토대로 한 신앙을 기초로 항일민족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일본어 역 42면)고 기록한 바, 이덕주의 [3·1운동에 대한 신앙운동사적 이해](<기독교사상> 1990. 3, 일본어 역 <복음과 세계> 1990. 4)의 내용을 주 45로 인용하고 있다. 이덕주 선생은 3·1운동에 대한 비폭력적 평화론이나 기독교인의 운동 참가 동기를 1907년 대부흥운동에 유래로 보고, 성서에 근거한 시앙적 확신에 따른 것으로 역사적 논증에 임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보수적 성서주의나 선교사들의 정교분리주의를 생각할 때, 기독교인들이 정치적, 민족적 독립론이 아니라 성서에 기초한 신앙을 표명하는 것으로서 운동에 참가한 것이라는 주장은 조금 더 상세하게 서술해도 좋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바입니다.
3) 한국과 일본 교회에 있어서 '선교로부터 교회에'의 문제
여기서 화제를 조금 바꾸고자 합니다. 민경배 선생은 {한국기독교회사}의 일본어판 서문에서 동북아시아에 있어서 교회의 역사적 이해는, 일본, 중국, 한국의 비교연구를 통해 상호이해를 더욱 깊이 가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바, CCA에서 발행된 영문저작도 비교연구의 예증이 나타나 있다고 했습니다. 저 역시 거기에 찬성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한국과 일본 교회에 공통되는 '키 워드'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 하나로서, '선교로부터 교회에'라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이는 스테펜 니일(Stephen Neill)의 용어입니다. 그는 "19세기 프로테스탄트 선교는, 비서구세계에 대한 서구세계의 우위과 지도성을 과시한 범유럽주의와 결합하여 '식민지주의 전성기'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서 서구적 기독교세계의 붕괴, 민족주의, 공산주의 등의 발흥에 의해 범유럽주의가 무너지고 에큐메니칼운동과 상호의존한, '선교로부터 교회에'라는 움직임이 강하게 일어나, 독립자치교회의 형성, 선교부와 교회가 대등한 협력관계를 이루기에 이르렀다"고 했습니다.(S. Neill, A History of Christian Missions, 1965, pp. 243 ff.) 그의 접근방식이, 일본교회에는 어느 정도 들어맞는지 모르겠으나, 한국교회에 대해서는 적용될 수 없는 부분이 상당히 있다고 볼 수 잇습니다. 한국에서는 범유럽주의가 아니라, 그 모조품이라고 할 수 있는 천황제국가주의가 횡행되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서구 선교세력과 연동하여 일제에 대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였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차이점은 있지만, 한국교회가 독립 민족교회, 즉 자전, 자치, 자급의 교회로서 세워지기 위해서는 선교세력과의 관계는 어떻든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의 사례로서 예수교장로회의 경우와 일본기독교회의 경우를 논의토록 하겠습니다.
우선 예수교장로회의 경우인데, 1884년 이후 미국의 남북장로회,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장로회 등 4개의 장로교회파 선교부가 선교활동을 진행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네비어스 선교방책을 기초로, 평신도 전도자를 중심으로 한 자전, 자치, 자급의 지역교회를 설립하고 1907년 대부흥을 계기로 전국적인 조직으로서 4개의 선교부와 한국인교회에 의한 예수교장로회 독노회(Presbytery), 나아가 1912년에는 총회(General Assembly)의 창설을 보았습니다. 여기에 간과되기 쉬운 몇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1) 독립자치의 민족교회로서 진로를 생각할 때, 1905년 선교부공의회는 독노회 창립의 때에 맞추어 한국독자의 신조를 작성치 않고, 인도 장로교회의 신조 12개조를 채택하고, 명확한 장로제 교회정치제도를 채용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2) 명칭으로서도, 침례교회의 경우처럼, '대한기독교회' 등의 이름을 사용치 않고, 예수교장로회라고 이름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덧붙이면, 민경배 선생의 {한국기독교회사}에는 1907년에 [대한국예수교장로회](독노회)가 조직되었다고 되어 있습니다.(일본어 역 236면) 그러나 그 후에는 여러 가지 명칭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저작의 제2권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일본어 역 73면 등). (3) 독노회에는 초대회장으로 S. 마펫이, 장로회 총회에서는 초대 회장에 H. G. 언더우드, 그 회계에 W. H. 블레어가 선출된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그 이후의 역사에서 이와 같은 임원직이 어느 시기에 한국 기독교인에게 이양되고 있습니까. (4) 이와 같이 선교사들이나 선교부가 예수교장로회의 제도에 있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얼마마한 권한을 행사한 것일까요. (5) 한국인 기독교인들은 서구교회의 상황으로부터 배태된 장로제가 자신의 선교나 교회형성에 있어서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해 왔을까요. (6)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 원인을 역시 예수교 장로회의 자급 문제와 연관지어 생각해 보게 되는데, 헌금에 있어서 열심을 다하는 전통을 계승, 독노회 창설 당시 7 만명에 가까운 교인을 확보한 교회가 어느 정도까지 교회의 자급을 달성한 것일까요.
제가 이상과 같은 질문을 하는 것은, 일본기독교회의 발자취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859년 이후 미국 북장로회, 후에 남장로회, 네덜란드계, 후에는 독일계 개혁파 등의 선교부가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1877년에 일본기독일치교회라고 하는 명칭으로 중회(Presbytery), 1881년에 대회(General Assembly)를 창설했습니다. 앞서의 (1), (2)의 질문과 비교해서 말한다면, 일본기독일치교회는 두 개의 개혁파, 하나의 장로파 선교부와 그 관계교회, 거기에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파가 가담하여 설립된 것으로서, 일치교회라고 불렀으나, 그 계통의 4신조를 집어넣어, 명확한 장로제 교회정치제도를 채용하였습니다. 그런데 1890년 일치교회는 일본기독교회라고 개칭하고 사도신경과 프로테스탄트 교리를 진술한 간결한 독자의 신앙고백을 제정하였으며, 일본교회의 실정에 맞는 장로정치를 시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즉 장로제 교회이긴 하지만, 일본 독자의 교회라는 의미입니다. (3) 1877년부터 중회의장은 선교사, 서기는 일본인 목사가 맡아왔으나, 1879년부터 일본인 의장이 출현하기 시작하여 1885년 이후는 의장, 서기 모두 일본인이 맡아 왔습니다. (4) 선교사는, 일치교회에 시대에는 중회, 대회 모두에서 정회원이었으나, 일본기독교회시대에 이르러서는 그 수가 제한되었습니다. 그러나 전도자금의 제공자로서 그 영향력은 대단했습니다. 이에 일본기독교회는 대회의 전도국을 선교부의 보조를 받지 않는 기관으로 만든다든가, 선교부의 보조를 받는 교회의 위상을 격하시킨다든지, 선교부의 보조금이나 인사를 관할하는 위원의 수를 선교부와 교회 동수로 하는 등의 노력을 해 왔습니다. 교회가 선교부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한 것은 1940년 일본교회 전체가 교파합동문제를 처리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때입니다. (5) 일본교회에 장로파 제도의 타당성 문제와 관련하여 이 파 최고의 유력한 지도자였던 우에무라는 대단히 흥미로운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교회합동문제가 제기되었던 1910년대 후반 그는 교회정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습니다. "어느 교회의 정치가 성서를 기반으로 한 것인가를 논하는 것은 과거의 이야기이다. 상호 편견을 버리고 또한 자신이 속한 교파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어떻든 교회정치가 일본 전도에 보탬이 되고, 하나님 나라의 건전한 확장을 발전을 위해 얼마나 적당한가를 연구하여, 그 최선의 것을 생각하면 된다"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합동] 4 <복음신보> 1918. 9. 19). 그가 여기에서 문제로 삼은 것은 장로교제도에 대한 시비가 아니라 교회정치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이와 같은 우에무라의 생각에 대해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6) 일본기독교회는 독립자치의 교회였지만, 완전자급을 달성하지는 못했습니다. 신도수는 1890년에 9,000명, 가장 많았던 1940년에도 55,000명이었습니다. 그 수는 예수교장로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는 숫자입니다. 이 정도로 이 교회의 자급 독립을 향한 노력을 평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4) 유동식 선생의 한국기독교사 연구
오늘날 한국에 있어 기독교는 가장 유력한 종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여 그렇게 되었을까 하는 점은 한국교회사 연구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일 것입니다. 19세기 후반에 프로테스탄트 기독교가 한국에 전래되었을 무렵, 유교, 도교, 불교 등 기성종교가 약화되었다거나, 당시의 정치적, 사상적 상황이 개화종교로서의 기독교에 유리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외면적 이유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3·1운동에 있어 기독교인들의 활발한 활동으로 상징되듯이, 기독교는 한국의 민족종교로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든가, 1970년대부터 80년대의 한국민주화운동에서 기독교인들의 희생이 한국민중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등의 말도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만으로 사람들이 기독교에 입교하겠습니까. 역시 기독교 신앙이 한국인의 심성(mentality)을 내면적으로 사로잡았기 때문에 기독교가 확장되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분이 이 대학의 퇴임교수이신 유동식 선생입니다. 선생은 일본에서, {한국종교와 기독교}(김충일 역, 1975), {조선의 샤머니즘}(학생사, 1976), {한국기독교신학사상사}(원저명, 한국신학의 광맥, 사와 마사히코·김영 공역, 교문관, 1986), {한국의 기독교}(도쿄대학 출판회, 1987) 등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선생은 1980년대 국제기독교대학 객원교수로서 [한국사상사]를 강의했고, 1996년 5월에는 도시샤대학의 특별강좌로서 [풍류도와 기독교]를 강의한 바 있습니다. 저는 간행된 선생의 강연록에, 선생의 프로필을 집필했는데, "선생의 프로필을 말하고자 함에, 먼저 선생의 풍모가 떠오른다. 선생은 미간을 찌푸리고, 기세등등 엄격하여 상대방으로 하여금 위압을 느끼게 하는 타입이 절대로 아니다. 한량없이 온화하고, 물정을 오랫동안 생각한 것을 차근차근 설명하는 분이다"고 적은 바 있습니다. 저의 인상이 틀렸습니까. 선생은 강좌에서, "나는, 한국인으로 태어났습니다. 한국의 피와 문화를 이어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인으로서의 자랑스럼움을 지니고 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분으로, 한국인의 심성, 또한 거기에서 자라난 기독교인의 사상을 말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다음에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구라타 마사히코 선생이 저서 {이웃으로서의 아시아}(한글판 번역, 서정민·윤경로 역, {내 선한 이웃 아시아, 그리고 한국}, 이레, 1995)에 소개되어 잇는 내용입니다. "유동식 선생은 {민족종교와 한국문화}에서 식문화를 통해 한국인의 토착적 신앙을 이야기했다. 한국의 비빔밥은 땅의 수확물인 쌀밥을 근간으로, 하늘과 땅의 어우러진 은혜인 산채, 해초, 알, 고기를 얹고, 고추장과 참기름을 섞어 비비는 독특한 음식이다. 한국인은 이를 혼합하여 먹는다. 그렇게 하면 새로운 맛이 생겨난다. 유동식 선생은 그 맛을 '천지가 나뉘기 이전의 창조적 세계를 재현'하는 것이라고 했다. 한국문화라는 것은 그토록 근원적인 것이며, 기독교 역시 그 안에 용해되는 것을 통해 한국 독자의 것으로 태어난 것이다"라고 말하였음을 적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선생의 한국인의 심성과 기독교의 접합에 대한 입장을 알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빔밥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유동식 선생은 한국에 있어서 무교(샤머니즘)을 기반으로 하여, 유교, 도교, 불교를 포괄하고, 그 종교, 문화, 사회를 형성하는 정신적 원리가 된 것으로 한국고유의 영성(얼)을 생각하였고, 그 원형으로 9세기 신라에서 성행된 풍류도에서 발견했으며, 거기에는 3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첫째는 종교적 개념으로서의 '한'(韓)이며, 초월적인 인격신인 동시에 내재적인 도입니다. 한국인의 신개념으로서 '한님', '하나님'은 그것을 일컫는 것입니다. 둘째는 문화적 개념으로서 '멋'(풍류)인데, 한국인은 노래와 춤 속에서 신과 하나가 되는 자유를 얻고, 풍류로서 예술, 문화를 창출했습니다. 셋째는 생물적 개념이며, 사회적 개념인 '삶'(생명, 생활)인데, 이를 통해 한국인 사회를 이루고, 변혁을 일으키며, 윤리를 확립해 왔습니다. 기독교도 한국인의 영성 중에 포괄되어 풍류도를 살아가는 것을 통해 이 세 가지 요소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교회에 있어 성령의 약동이 나타나는 영적 신비주의, 교회가 담당해야 할 인간교육, 한글의 보급, 청년, 여성들의 새로운 문화활동, 민족의 독립이나 한국민주화를 목표로 하는 정치적 사회적 활동 속에 각각 반영되었다고 유동식 선생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유동식 선생은 이와 같은 한국기독교가 한국인의 심성 중에 깊이 침투하여 풍부한 열매를 맺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독교는 성서적 신앙에 뿌리박은 엄격한 신앙과 어떤 차이가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신도들이 화를 면하고, 복을 빌기 위해 목사가 하나님께 축수하는 식의 신앙행위가 샤머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닐까 등의 의문이 제기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성서의 널리 알려진 말씀, 곧 요한복음 12장 24절을 생각하게ㅡ됩니다. 한 알의 밀 알이 그대로 있으면, 그것으로 그치고 마침내 말라 버립니다. 그러나 그 것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 한 알의 밀 알은 생명의 근원이며, 그것으로부터 많은 열매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처음의 한 알 밀 알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 성서의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한 구원의 복음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 복음의 역설적인 진리가 이 한 알의 밀 알을 통해 증거된 것입니다. 한국에서 싹터나고 열매를 맺은 기독교가 지금까지 전파되어 왔던 기독교와 다른 점이 있고 해도 그것이 한 알 밀 알로부터 솟아난 생명의 복음인 이라고 한다면 그것으로 옳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유동식 선생이 주장한 한국기독교를 보면, 우선 그러한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저는 또한 산상수훈에 나타나 있는 저명한 교훈, 곧 마태복음 5장 13절의 말씀을 생각하게 됩니다. 기독교인은 세상의 소금이며,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게 되고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짠맛을 일으키는 것은 인간적 당위에 대한 그리스도 복음의 이질성인 것입니다. 한국인도 일본인도 구미의 기독교를 받아들였을 때 스스로의 정신적 전통 속에 흘러내리는 어떤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한 통로로 삼아 기독교를 수용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복음은 구미에서나, 아시아에서나 그 지역의 정신적 전통과 이질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음 또한 사실입니다. 그 복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복음정신에 어울리는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 스스로의 정신적 전통을 변형시켜 새로운 정신적 전통을 세워 나가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측면이 없다면, 기독교는 그 지역의 정신적 전통 속에 용해되어 스스로의 짠맛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한국의 정신적 전통에 관한 유동식 선생의 선명한 정리모형을 볼 때 이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5) 한국과 일본의 교회사 연구자들의 교류를 위하여
끝으로 한국과 일본 교회사 연구자들 간의 교류에 대하여 논하고, 거기에 대한 구체적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각자 교회사를 연구해 나간다고 해도 거기에 공통의 문제가 차례차례 등장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일제의 한국침략과 지배라고 하는 정치적 이유에 연원하는 것인데, 그 공통되는 문제의 연구를 통해 양국 교회의 관계가 어떠했는가를 아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거기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통해 각각의 교회가 지닌 특징, 기독교 이해의 독특한 측면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과 일본교회, 나아가 기독교 관계사 연구는 각자의 교회사연구에 있어 큰 유익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양국 기독교사 연구자들은 1990년 2월에 [3·1운동과 기독교]라는 주제로 도쿄에서, 이어 1991년 8월에는 [일본의 천황제와 한국의 신사참배문제]라는 주제로 서울에서 심포지움을 개최한 바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에 참가한 분들이 다시 오늘 이 자리에도 참석하였고, 저 역시 거기서 발표한 바 있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알게된 것이지만, 한국의 연구자들 여러 분이 일본측 자료를 상세히 연구 조사하고, 일본과 그 교회의 발자취에 대해 깊은 이해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비하여 일본측 연구자들은 몇 사람의 예외가 있기는 해도, 저를 포함하여 대다수가 일본측 자료만을 섭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충분치 않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이에 필요성으로 대두된 일이 한국과 일본 교회사 연구자들 간에 자료교환, 그리고 상호 연구성과의 교류입니다. 마침내 {일한그리스도교관계사자료 1876-1922}가 도쿄여자대학비교문화연구소의 연구축척을 바탕으로, 오가와 게이치 선생과 지명관 선생의 공편으로 1984년 신교출판사에서 간행되었습니다. 이는 획기적인 간행물이기는 하지만, 애석하게도 일본측 자료만으로 편집되어 한국측 자료는 빠져 있는 점이 아쉬웠습니다. 이는 한글로 번역되어 {한일 그리스도교 관계사 사료}라는 제목으로 한국신학연구소(본문에는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로 되어 있으나 역자가 바로 잡음)에서 1990년 간행되었습니다. 이는 한국 연구자들에게는 유익이 되겠으나, 일본 연구자들로서는 불충분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후 {일한기독교관계사Ⅱ1923-1945}이 800면 이상의 방대한 책으로 1995년 신교출판사로부터 출간되었습니다. 여기에는 한국측 자료도 포함되었습니다. 이는 한국 신학자들과의 교류가 활발한 도미사카그리스도교센터라고 하는 연구단체가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의 협력을 얻어 이 일이 가능하였습니다. 당초 사와 마사히코 선생이 이 연구와 편찬을 추진하였으나, 1989년 별세하고 말았습니다. 사와 선생도 구라타 마사히코 선생도 49세라고 하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참으로 가슴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한 여름 청초한 꽃을 피고 또 피워내는 한국의 국화 무궁화 꽃을 닮아, 이다 이즈미 선생이 그들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선생은 제 세미나 출신(문하)인데 일본성공회신학원 교수를 지냈는데, 그렇게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 앞서의 간행작업을 완성했으나 심신이 과로로 인해 병을 얻고 말았습니다. 신교출판사의 모리오카 이와오 사장도 적자를 각오하고 이를 간행했습니다. 한국교회와의 교류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이들, 또한 지금도 그와 같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이들을 여러분들도 기억해 주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그 관계사 자료집Ⅱ의 '서문'을 집필한 지명관 선생은, 가능하다면 전후의 관계사를 양국 교회사가들의 공동 편찬으로 동시에 출판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라고 적었습니다. 저 역시 거기에 찬성합니다. 그것은 결코 전쟁 전의 관계를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전후의 관계를 염려하는 이유로 과거와도 깊이 연관되어 있는 관계사를 연구하고, 무엇보다 그 자료를 출판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입니다. 일본측에서 보면 그 공통의 문제와 관계사의 주제는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우선 일본의 패전과 한국의 광복이후의 제 문제, 예를 들어 일본기독교단 조선교구과 그 소속교회의 진로, 재일대한기독교회의 재건과 일본교회와의 관계, 한국 여러 교회의 재건과 신사참배 문제 등을 이유로 한 한국장로교회의 분열, 한국전쟁에 대한 한일 양 교회의 대응, 한일기본조약 체결에 대한 한일 양 교회의 대응, 일본의 교회나 기독교 단체의 죄책고백을 기초로 한국교회나 기독교기관과의 교류와 한국 측의 대응, 특히 일본기독교단과 한국의 3교단(예장 통합, 기장, 기감-역주), 재일대한기독교회와의 교류, 그리고 일본기독교협의회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의 교류 등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한국민주화투쟁의 문제에 대한 한국교회의 활동과 일본교회의 지원, 한반도의 평화통일문제에 대한 한국교회의 활동과 일본교회의 지원(일본이나 세계 여러 교회와 북한교회 간의 교류를 포함하여)등이 있습니다. 나아가 일본의 조선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와 전후보상(일본군 성노예제를 포함)의 문제에 대한 일본교회의 활동과 한국교회의 지원, 일본의 우경화, 군사화 문제에 대한 일본교회의 활동과 한국교회의 지원이 있습니다. 끝으로 재일 한국·조선인의 인권에 대한 한일 양 교회의 활동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양 교회의 관계사 자료집을 간행하기 위해서는 양국 교회사 연구자가 상호 교류하여, 거기에 관한 자료를 편찬해 나가는 일이 필요합니다. 50수년에 걸친 양국 교회의 관계사를 연구하고, 그 자료집을 간행해 나가는 작업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약 이러한 계획을 호의적으로 생각해 주신다면, 그 협력 태세를 조직하는 일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좋은 의견을 함께 나누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이상으로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보론-
1. 본문에서 언급한 연구자 이외에 한일기독교관계사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는 연구자들
모리야마(森山浩二)/ 고려대학교에 유학, 도교 게센여자고등학교 교사
미즈노(水野直樹)/ 교토대학 인문과학연구소 교수
다카사키(高崎崇司)/ 津田塾여자대학 교수
우치가이(內海愛子)/ 게센여학원대학 교수 조선B, C급 전범문제 연구
고가사(小笠原亮)/ 기독교공조회 지도자, 목사 등.
2. 본문에서 언급한 저작 이외에 일본어로 간행된 한국교회사 관련 저작들(알파벳 순/ [복음과 세계], [계간 삼천리] 등에 게재된 논문은 제외)
H. G. 언더우드, 한석희 역 {조선이 부르는 소리, 조선 프로테스탄트 개교 기록}(미래사, 1976)
안이숙,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해도}(시진당, 1972)
지명관, {한국현대사와 교회사}(신교출판사, 1975)
조재국, {한국민중종교와 그리스도교}(신교출판사, 1998)
함석헌, 김학현 역, {고난의 한국민중사}(신교출판사, 1980)
한석희, {일본의 조선지배와 종교정책}(미래사, 1988)
이인하, {기류민의 절규}(신교출판사, 1979)
이인하·기다 감수, {민중신학}(교문관, 1984)
이누마 지로·한석희, {일본제국주의하의 조선전도}(일본기독교단출판국, 1985)
이누마 지로·한석희, {전도에 살다, 재일대한기독교회와 오다 나리치}(맥추사, 1986)
한국문제그리스도교긴급회의 편, {한국민주화투쟁자료집 1973-1976}(신교출판사, 1976)
강위조, 사와 등 역, {일본통치하 조선의 종교와 정치}(성문사, 1976)
김수진, 이다 이즈미 역, {한일교회의 역사}(일본기독교단출판국, 근간)
구라타 마사히코, {천황제와 한국기독교}(신교출판사, 1991)
일본기독교단출판국 편,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기독교 시인 운동주}(일본기독교단출판국, 1995)
노평구·모리야마 편, {김교신, 일본통치하의 조선기독교인의 생애}(도서출판사, 1978)
오다 나리치, {지게꾼, 조선·한국인 전도의 기록}(일본기독교단출판국, 1977)
고가사 등, {제암리 사건과 3·1독립운동}(일본기독교단출판국, 1989)
오윤태, {일한그리스도교교류사}(신교출판사, 1968)
박경식·미즈노 등, {천황제와 조선}(코베학생청년센터출판부, 1989)
박영창, 김충일 역, {정의가 부를 때}(신교출판사, 1980)
사와 마사히코, {남북조선그리스도교사론}(일본기독교단출판국, 1982)
사와 마사히코, {서울로부터의 편지}(초풍관, 1984)
사와 마사히코, {미완의 조선그리스도교사}(일본기독교단출판국, 1991)
사와 마사히코, {한국과 일본의 가운데에서, 속죄적 구도자의 사관으로부터}(신교출판사, 1993)
서정민, 한석희·구라타 마사히코 감역, {민족을 사랑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일본기독교단출판국, 1991)
양현혜, {윤치호와 김교신, 그 친일과 항일의 논리, 근대조선에 있어서 민족적 아이덴티티와 그리스도교}(신교출판사, 1996)
윤동주시비건립위원회, {별을 노래한 시인, 윤동주의 시와 연구}(삼오관,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