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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호(1984). 교육학의 학문적 성격: 경험과학적 접근방법을 중심으로.교육개발, 30, 11-16. 한국교육개발원.
교육학의 학문적 성격
-경험과학적 접근 방법을 중심으로-
장상호
1.
교육학을 한다는 학도로서 나는 하나의 순환론, 즉 교육학은 교육학자들에 의해서 탐구되는 학문이며, 교육학자는 교육에 대해서 연구하는 학자이며, 교육은 교육학자의 연구대상이라는 식의 해결 속에 명백하지 않은 많은 것이 은폐되어 있음을 새삼스럽게 느끼고 있다. 문제의식은 있으되 해답을 얻기에는 학문이 모자라니 답답할 수밖에 없다.
하나의 자율적인 학문은 그 나름의 고유한 개념적 체계와 방법론을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교육학이 그런 요건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나는 정직하게 봐서 그렇지 못하다고 본다. 솔직히 말하면 교육학은 타학문의 지식을 차용하는 기생 학문의 성격을 띠고 있는 실정이다. 몇 가지를 지적해 보자. 널리 인정받고 있는 이른바 '교육이론'이라는 것들이 대부분 신학자, 철학자, 화학자, 의사, 생리학자, 심리학자, 사회학자들의 여러 활동에서 얻어진 소산이다. 중요한 '교육적인 문제'가 대두될 때마다 이른바 '기초 학문 분야'의 학자들이 초청된다. 그들은 자신이 교육학자라고 하지는 않는다. 대개 잠시 자리를 빛내주거나 자문비를 받아내고 본래의 학문으로 되돌아간다. 그렇다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교육학자들이란 누구인가? 자세히 돌아보면 거기에는 교육철학자, 교육심리학자, 교육사회학자, 교육행정학자, 교육경제학자 등이 있을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기초 학문의 교육적 응용을 자처하고 있다. 그렇다면 교육학은 어디에 있는가?
요즘 이른바 '학문간의 연구(interdisciplinary research)'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교육학이 다른 학문에 개방적인 태도를 갖는 것은 그것 자체로서 문제될 바 아니다. 문제는 그런 학문간의 교류가 일방적이라는 데 있다. X학문이 Y학문에 접근하고 Y학문이 X학문에 접근하여 서로의 학문이 풍부해지고 'XY의 학문'이 탄생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데 그 숱한 교육 ㅇㅇ학의 경우는 그런 것이 아니다. 과문한 탓인지 나는 교육학이 ㅇㅇ학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는 사례를 별로 들 수 없다. 그래서 실정 그대로를 밝힌다면 '교육 ㅇㅇ학'의 한편에는 '교육학'이 아니라 '교육'이 있고, 그 다른 한편에는 교육에까지 그들의 학문적인 개념과 방법론을 확장시켜 적용하고 있는 'ㅇㅇ학'이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렇게 비위를 건드리는 방식으로 교육학의 처지를 드러내 놓고 만약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몰매를 맞기가 십상일 것이다. 그러나, 이미 고백한 바와 같이 나는 그 대안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나는 실정을 내가 본대로 당돌하게 밝히고 이에 대한 상이한 견해, 강도 있는 논쟁, 그리고 건설적인 제안을 초청하고 있을 뿐이다. 새로운 교육학의 영역은 넓고 거기에 이르는 길을 험난할 것으로 예상된다.
비록 만족한 해결은 되지 못하지만 나는 이 글의 나머지에서 경험과학으로서 새로운 교육학을 모색해 보는 과제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 말은 좀 어색하게 들린다. 우선 연구 문제가 있고 거기에 방법론이 뒤따르는 것이 순서인데, 이 경우는 방법론이 먼저 고정되고 이에 따라 교육학의 문제가 규정되는 꼴을 하고 있다. 이것은 원고 청탁을 그렇게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논의 자체가 어느 면에서 아직 열려 있는 교육학의 성격을 한 측면에서 제한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접근이 하나의 잠정적인 대안으로 고려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사회과학의 많은 분야가 애초에는 규범적인 성격을 띠었다가 경험과학으로 그들의 독자적인 학문을 전환시켜 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예컨대, 정치학은 왕도와 군주의 윤리를 규정하는 데서부터, 경제학은 왕도와 군주의 윤리를 규정하는 데서부터, 사회학은 형이상학적인 사회철학으로부터 점차 오늘날의 객관적인 경험과학으로 변모하여 왔다. 이들은 인간사 가운데 그들 나름의 정치 현상, 경제 현상, 사회 현상을 개념적으로 각각 분할해 내고 그 현상들을 자율적으로 설명하는 상당한 정도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육학도 인간사에서 다른 학문이 아직 탐색하지 않은 고유한 교육현상을 뽑아내고 그에 대한 일단의 체계적이고 객관적인 지식을 구성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이 말은 교육학이 경험과학이 아닌 다른 형태로도 성립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 않음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이 작업에는 해결되지 않은 많은 문제가 남아있다. 그 가운데 구체적으로 나는 다음의 세 가지 문제를 논의하고자 한다. 교육이라는 현상을 어떻게 고유한 방식으로 규정할 것인가? 교육연구에서 경험주의의 한계를 어느 범위까지 확장시킬 수 있는가? 경험적 교육연구와 교육실천 간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2.
경험연구에서는 통상 연구되어지는 대상과 그것에 대한 개념화가 전혀 별개의 것으로 상정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관찰하는 현실과 그것에 대한 개념화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현실 속의 무수한 측면과 자료를 한꺼번에 탐구할 방도는 없다. 이 때문에 우리는 어떤 관점을 택해서 그 가운데 특별한 국면만을 탐구하게 된다. 그 관점이 개념들이며 이론들인 것이다. 말하자면 관찰되어지는 현실은 대부분 애초부터 어떤 개념이나 이론에 의해서 잉태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래서 어떤 개념으로 현실을 구획하고 탐색하느냐 하는 문제가 경험과학의 자율성을 살리는 관건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험과학의 각 학문은 현실의 모든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어떤 특징있는 부면만을 학문활동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를테면 이 글을 쓰는 필자는 물리학적, 생물학적, 심리학적인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들은 결코 필자의 전체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물리학적, 생물학적, 혹은 심리학적으로 포착되어지는 부면만을 특징있게 탐구한다. 이는 바꾸어 말해서 물리학, 생물학, 심리학이 각각 그들의 고유한 개념에 의해서 필자의 어떤 것을 분할해 내고 그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을 창출하는 데 성공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교육학은 그런 창조적인 작업을 해 나가는 일에 등한하였다. 교육학은 대부분 상식적이거나 공식적인 용어를 학문 안에 받아들이고 있다. 예컨대, 학교는 '교육하는 장소'로 규정된다. 이 기관에서는 특정한 사람이 '학습자'라거나 '교육자'로 간주된다. 특정한 경험을 조직하여 '교육과정'이라는 명칭을 부여하고 그 과정을 마친 사람을 '교육받은 사람'으로 취급한다.
그런데 이런 명분상의 개념은 경험적 사실과 불일치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예컨대, 오늘날 학교가 그것이 명분상으로 표방하고 있는 교육적인 기능 이외에 온갖 부류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를테면, 현대 산업 사회에서 학교는 의무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사회적 통제와 조작, 기존 사회의 현상 유지, 그리고 불균등한 사회적 선발 기능을 하고 있다는 고발이 있다. 그 고발에 전적으로 동조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만약 거기에 부분적인 진실이 있다고 한다면, '학교교육'이라는 말은 크게 사태를 왜곡시키거나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학교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학교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거기에는 교육적인 현상과 비교육적인 현상이 있을 수 있다. 교육학자들은 그런 구분이 가능한 이론적인 개념화를 서둘렀어야 한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그들은 충분할 정도의 학문적인 상상력을 발휘한 것 같지 않다.
교육학자들이 공식적인 용어에 자족하고 있는 동안 타 학문이 그 개념적 공백 상태를 대신하여 메꾸었다. 그것이 이른바 '교육 ㅇㅇ학'에 자주 나타나는 ㅇㅇ학적 개념들인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교육 ㅇㅇ학'이 활발히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ㅇㅇ학적 안목의 확장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교육학의 고유한 개념에 의해서 포착되어지기를 기다리는 현실의 어떤 국면은 아직까지 처녀지로 남아 있는 셈이다.
만약 교육학이 경험과학으로서 그것의 특징있는 진로를 택하려면 이제부터라도 교육학자들은 학교라는 공식 기관과 그에 부여되는 예우상의 개념을 초월하는 보다 이론적이고 독자적인 개념을 스스로 발전시키는 고역을 감내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학교가 있기 이전에 교육이라는 말이 있었다. 요즘에는 '탈학교교육'이라거나 '평생교육'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이는 교육이라는 것이 학교라는 특정한 시공적 차원을 넘어선 범인간적인 현상을 지칭하고 있고 또한 지칭해야 함을 함축한다. 이 개념에 따른다면 오히려 학교 밖의 어떤 현상이 교육학자들의 주된 관심사로 발전될 수 있다. 학교현상(schooling)은 관점의 선택에 따라 심리학적 현상일 수도 있고, 사회학적 현상일 수도 있고, 교육학적 현상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때의 교육학적 현상은 교육학자가 심리학자나 사회학자와는 다른 안목을 가졌을 때, 다시 말하면, 이제까지의 교육심리학이나 교육사회학의 개념과는 구분되는 어떤 독자적 개념체계의 창출에 성공하였을 때에 한해서 비로소 그 고유한 정체가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
무엇이 교육이라는 개념과 그 설명적 체제의 고유성과 자율성을 보장해 줄 것인가? 그 하나의 힌트는 '교육적 가치'의 발견에서 찾아질지 모른다. 대부분의 과학적인 개념은 현실의 어떤 국면을 지칭하는 데 불과하지만 대부분 그것이 그런 방식으로 창출되었던 배후에는 특수한 가치 선택의 여과 작용이 있었다고 보아진다. 예컨대, 경제학의 상당한 용어가 '경제적 가치'의 차원을 주축으로 형성되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약 교육학자들이 '교육적 가치'를 경제적 가치, 정치적 가치, 사회적 가치, 문화적 가치와 구분되는 방식으로 정립할 수 있다면 그들은 그 가치를 고양시키는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특이한 개념과 설명적 체제를 구성하는 데 유리한 기반을 확보하게 된다.
'교육적 가치'란 무엇일까? 여기에는 온갖 이견과 가치론적 논쟁이 있을 수 있지만 어느 정도의 일반적 합의가 없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인류 역사를 통해서 인간은 '지금-여기'에 주어진 여러 제약 조건에도 불구하고 이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의 인간적인 성질을 능동적으로 향상시키는 일에 그 내재적 가치를 부여하여 왔다. '지식과 지혜의 습득', '인격도야', '자아실현', '인간성의 주체적 선택'이라는 말은 물질적 풍요, 지위, 혹은 권력의 획득과는 무관하게 인생의 참된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인정되어 왔다. 그런데 이제 이런 국면들이 산업 사회가 갖는 대량 생산의 메카니즘에 의해서 점차 퇴색되어 가고 있다는 경고도 있다. 이 즈음 우리는 인간이 스스로의 속성을 충실하게 주체적으로 선택하여 조성하고 성장시키는 과정과 결부시켜 교육과 교육적 가치를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교육학도들은 예컨대, 이런 새롭고 경이롭고 벅찬 질문들과 마주하게 된다. 그런 과정이나 인간사의 국면이 어떤 기본적인 구조와 질서 속에서 진행되는가? 무엇이 그것을 방해하거나 촉진시키는 요인인가? 우리의 현장은 그 가운데 어느 위치에 처해 있는가? 그 원인은 무엇인가?
3.
나는 교육의 경험과학적 연구가 '좁은 의미의 경험주의'의 한계를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좁은 의미의 경험주의란 영국의 경험주의적 인식론, 콩트의 실중주의, 그리고 이른바 '비엔나 학파'의 논리실증주의에 이르는 사상적 계열을 뜻한다. 이들은 경험적 인식의 문제 이외의 보다 한정된 전통과 안목을 대표하고 있다. 예컨대, 감각 자료가 지식의 원천이라는 것, 세상은 낱낱이 원소적으로 분해되어 설명될 수 있다는 것, 수학이나 논리라는 형식 언어가 지식의 가장 정확하게 의미있는 형식이라는 것, 지식과 가치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 그리고 세계가 공학적으로 통제될 수 있다는 것 따위가 이 사상의 흐름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나는 이런 관점이 교육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을 폭넓게 탐색하고 창조해 나가는 길잡이가 되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것으로 느낀다.
실증주의의 과학관이 자연과학을 그 전형으로 삼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자연과학의 방법과 안목이 사회과학에 도입될 때 학자들은 자연과학의 눈부신 성취가 사회과학에서도 조만간에 이루어지리라고 낙관하였다. 그러나 그 예상은 맞지 않았다. 이 사실을 두고 사회과학의 연륜이 짧다느니, 혹은 아직도 그것이 자연과학의 방법을 충분할 정도로 소화시키지 못했다느니 하는 변명을 드는 것은 이제 구차하게 보인다.
요즘에는 사회과학 내에서 다른 하나의 반성이 일어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인간 현상에 대해서 자연과학적인 엄격성과 형식성을 조급하게 도입하기 전에 그 대상의 특이성에 대해서 좀 더 신중하고 개방적인 탐색의 기회를 갖자는 것이다. 연구되는 대상의 속성에 따라 그것을 개념화하고 거기로부터 관찰적 자료를 끌어내는 방법에 차이가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이런 반성은 아직까지 경험과학으로서 자율성을 확보하지 못한 교육학의 경우에 유익한 예보적 참조사항이 되어야 하리라고 본다.
그 가운데 몇 가지만을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종전의 실증주의적 연구는 연구하는 사람과 연구되는 대상을 엄격히 구분하였고, 그들간에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더 높은 객관성을 보장해 주리라는 가정을 택했다. 그러나, 이런 가정이나 접근 방법은 주관적인 의미의 세계를 포함하는 사회 현상의 경우에 적절하지 못한 것으로 비판받고 있다. 그 주관적인 세계를 무시하는 것 자체가 비과학적이고 비객관적인 태도라는 것이다. 사회 안의 인간은 누구나 현실에 대해서 어떤 해석과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사회과학자도 그 중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고 보면 그들 간의 구분은 그렇게 엄격할 수 없다. 말하자면 사회과학자는 연구대상자의 주관적인 의미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하고 그들이 구성한 현실에 대한 신념을 자신의 것과 경합하는 많은 가설로서 참조할 수도 있다.
교육현상이 어떻게 정의되든 거기에는 주관적 의미의 영역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리라고 본다. 교육적인 체험 자체가 주관적인 것이다. 동일한 사건이 개인에 따라 다른 교육적인 의미나 가치를 가질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이 교육에 몸담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의 공감, 대화, 참여적 관찰에 의해서 풍부하게 탐색되어야 한다. 또한 모든 사람이 교육에 대한 모종의 신념을 가지고 그것에 가담하고 있다고 보면 그들의 풍부한 상상력이 교육학적인 가설과 이론의 발전에 이용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가설과 이론들은 체계적인 검증 과정을 거치기 전까지 과학적인 지식으로 인정받을 수는 없다.
둘째, 종전의 실증주의적 연구는 기본적으로 연구대상의 피동성을 전제하고 있다. 물체의 경우 그 전제는 타당하다. 하등 생물의 경우도 동일한 자극에 대한 기계적인 반응을 상정하는 모형이 어느 정도의 설명력과 예언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소수의 조건 반사를 제외하고 자극에 거의 제약받지 않은 융통성 있고 창의적인 행동 유형을 산출해 낸다. 인간은 바로 그 비예언성, 고유성, 그리고 자유를 그들이 추구해야 할 가치 항목으로 떠받들고 있다. 이런 연구대상에게 자연과학적 도식이 그대로 맞아들어 갈 리가 없다. 요즘 사회과학자들을 당황하게 하는 이른바 '자기 충족적 예언'이나 '자살적 예언'의 현상은 인간에 관한 어떤 예언이나 법칙도 그 안에 숙명적으로 배반의 씨앗을 내포하고 있다는 방증이 되고 있다.
교육은 본질상 인간의 적극성과 주체성을 전제하고 있다. 인간의 속성이 이미 고정된 것으로 주어졌다면 교육은 애초부터 성립되지 않는다. 또한 만약 인간성이 완전히 예속된 코스를 밟아 변화한다면 교육적 기대가 있을 수 없다. 인간은 환경과의 적극적인 교섭을 통해서 이전에 발견할 수 없었던 새로운 가능성을 시험하고 실현하여 왔다. 교육은 인간이 인간을, 그리고 개인이 스스로를 창조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다른 사회적 과정과 구분된다. 따라서 교육에 대한 경험연구는 인간 생활의 적극성과 주체성을 부각시키는 시각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셋째, 종전의 실증주의적 연구는 분석적 접근 방법을 주로 택하였다. 연구대상을 잘게 썰어 분할하고 그것의 하나하나를 밝히면 전체에 대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가정이 여기에 있었다. 벽돌쌓기 식의 이 같은 접근 방법은 자연의 기계적인 측면을 설명하는 데 다소의 성공적인 사례를 보여 왔지만 사회과학에서의 소득은 극히 의문시되고 있다. 비교적 측정이 용이한 변인들을 포함시킨 연구들이 자질구질한 경험적 정보를 폭발적으로 누적시키고 있지만 이것들은 인간을 보는 전반적인 안목을 오히려 흐려 놓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여러 가지 변인을 동시에 고려하는 체계적 접근 방법과 표면 현상의 배면에 작용하는 심층적인 맥락의 파악에 유의하는 구조주의적 접근 방법이 점차 도입되고 있는 것이다.
교육학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경험연구의 경우도 별다른 소득도 없는 혼잡스러움이 같은 맥락에서 벌어지고 있다. 아무 관련도 없는 연구들의 집적과 연구들 간의 불일치한 결과만을 개탄하기에 앞서 이제 우리는 우리가 탐구하고 있는 대상 자체가 변인들 간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내포하고 있지나 않은지를 자성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부분으로 환원시킬 수 없는 유기체이며, 그것의 행동은 그가 처한 환경과 분리시켜 파악할 수 없다. 교육은 바로 그런 전반적인 상호작용의 전형적인 형태이기 때문에 그 동적인 전체 구조를 파악하는 통찰력이 교육학도들에게 시급히 요청되고 있다.
이상에서 지적한 사회과학의 새로운 방법론적인 안목 이외에도 교육학자가 교육현상을 밝히는 고유한 안목이 또한 추가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이제부터 탐색되어 할 열린 주제이기 때문에 다음 기회를 기약할 도리 밖에 없다.
4.
교육의 경험과학적 연구는 왜 필요한가? 이제 마지막으로 그 가치문제를 잠시 따져 보기로 하자. 이에 대한 가장 순수한 해답은 '거기에 아직 해명되어야 할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만약 뉴튼이 그가 하는 일의 실용적 가치에만 눈이 어두웠다면 그는 사과가 땅에 떨어지는 이유를 밝히는 것보다는 차라리 사과가 썩지 않는 방법을 연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지적 호기심의 만족에 우위를 둠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물리학의 발전에 든든한 초석을 쌓았다. 이런 순수한 동기가 교육학 분야에서 일어날 때 교육의 진면목에 있는 그대로 균형있게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경험연구를 단지 그것의 순수한 동기만을 따져 평가하는 것은 잘못인 듯 하다. 경험연구는 현실 속에서 단지 경험연구로서의 역할만을 하지 않는다. 일찍이 논리실증주의는 사실과 가치의 문제를 별개로 구분하고 과학은 단지 사실적인 명제만을 해명할 수 있다고 함으로써 이른바 경험연구의 '가치중립성'을 표방하였다. 그러나, 그런 입장은 장기적인 역사의 맥락에서 볼 때 결국 기존의 사회 질서를 시인하고 강화시켜 주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근거있는 비판이 있다. 따라서 이제 과학자들은 자기가 생산해 내는 지식의 결과에 무관하게 그의 사회적 책임을 수행할 수 있다는 안이한 태도를 갖기 어렵게 되었다.
나는 차제에 경험적인 교육연구와 교육실천과의 관계에 있어 다음의 몇 가지를 유의하였으면 하는 제안을 해 보고 싶다.
첫째, 현 단계로서 교육실천에 대한 과학적인 지원은 너무 과장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대부분 교육실천이 장기간의 시행착오와 직관적인 경험을 통해서 발전되어 왔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과학적 지식은 그 가운데 어떤 것이 사실과는 다른 편견이나 신념을 토대로 이루어 왔다는 점을 지적하여 그것의 부분적인 개선을 요청할 수는 있지만 교육의 전반적인 실천을 지원할 만한 위치에 있지는 않다. 과학적 지식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리라는 과학주의의 가정은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다.
둘째, 교육의 경험연구자는 자신의 연구가 가져올 미묘한 실천적 영향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연구비를 지원하는 집단의 가치와 이해관계가 연구의 과정과 결과의 보고에 편파적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연구자는 자신의 보고서가 일반적인 가치나 자신의 가치관에 비추어 악용될 소지가 있을 때 보고서의 일부에 자신의 견해를 밝힐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도 가능한 한 발견된 사실과 가치의 문제는 구분해야 한다. 연구자는 연구 결과의 어떤 것을 보고하지 말도록 압력을 받을 때 자신이 이해관계의 소용돌이 속에 있음을 예리하게 의식하고 결단을 내려야 한다. 지적 정직성과 침묵의 음모 간의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다.
셋째, 아직 해결된 문제는 아니지만 나는 교육학자들이 교육에 대한 경험적 지식이나 정보를 교육적 가치의 실현에 공헌하는 방향으로 이용하는데 과감하게 앞장섰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미 이 글의 서두에서 지적했듯이 경험과학적 현상의 개념화, 설명 체제 및 연구 방법의 선택에는 모종의 가치관이 작용하기 마련이다. 이제까지 교육정책은 심리학적, 사회학적, 정치학적, 경제학적 안목에 의해서 좌우되어 왔으며, 따라서 그들 학문의 가치 선호가 교육현실에 지배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제 우리는 교육적 가치가 인간사의 일반적 가치의 수준으로 끌어 올려져서 그것이 교육현상을 교도하는 주된 방향계의 역할을 하도록 하는 어떤 합의점을 모색해야 할 때를 맞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