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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도량 道悟禪院 도오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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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사찰기행 스크랩 금강산 건봉사 乾鳳寺 (09/08/11,99차)
대선大仙 추천 0 조회 6 13.05.13 13:0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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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산 건봉사 乾鳳寺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금강산에 있는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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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전까지는 31본산의 하나였으나,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神興寺)의 말사이다.

 

520년(법흥왕 7) 아도(阿道)가 창건하고 원각사라 하였으며, 533년(법흥왕 20) 부속암자인 보림암(普琳庵)과 반야암(般若庵)을 창건하였다.

758년(경덕왕 17) 발징(發徵)이 중건하고 정신(貞信)·양순(良順) 등과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10,000일 동안 염불을 계속하는 모임)를 베풀었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 만일회의 효시이다.

여기에 신도 1,820명이 참여하였는데, 그 중 120명은 의복을, 1,700명은 음식을 마련하여 염불인들을 봉양하였다. 782년 염불만일회에 참여했던 31명이 아미타불의 가피를 입어 극락왕생하였고, 그 뒤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차례로 왕생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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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0년(헌덕왕 2) 승전(勝詮)이 당나라 현수(賢首)에게서 화엄학을 배우고 귀국하여

 ≪화엄경≫을 강설하였고, 845년(문성왕 7) 백화암(白華庵)을 창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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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말에 도선(道詵)이 중수한 뒤 절의 서쪽에 봉형(鳳形)의 돌이 있다고 하여 서봉사(西鳳寺)라 하였으며, 1358년(공민왕 7) 나옹(懶翁)이 중건하고 건봉사라 하였다.

1464년(세조 10) 세조가 이 절로 행차하여 자신의 원당(願堂:소원을 빌기 위한 지정 사찰)으로 삼은 뒤 어실각(御室閣)을 짓게 하고 전답을 내렸으며, 친필로 동참문을 써서 하사하였다.

이 때부터 조선왕실의 원당이 되었는데, 성종은 효령대군(孝寧大君)·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조흥수(趙興洙) 등을 파견하여 노비와 소금을 하사하고 사방 10리 안을 모두 절의 재산으로 삼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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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3년(중종 18) 보림(普琳)이 이 절과 보림암을 중수하였고,

1605년(선조 38) 유정(惟政)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오면서

불 사리와 부처님 치아를 되찾아와서 이 절에 봉안한 뒤 1606년에 중건하였으며,

혜능은 안양암(安養庵)과 적명암(寂明庵)을 중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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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3년(현종 14) 수흡(修洽)과 도율(道律)이 1,200근의 범종을 주조하여 봉안했고, 1683년(숙종 9) 명성왕후(明聖王后)가 시주한 1,000금으로 불상을 개금(改金)하였다.

이 때 명성왕후는 불장(佛帳)과 탁의(卓衣)도 시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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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8년 능파교(凌波橋)의 비(碑)를 세우고 동대암(東大庵)을 창건하였으며,

1724년(경종 4) 주지 채보(彩寶)가 구층탑을 건립하고 부처님의 치아를

봉안하자 명성왕후가 천금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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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6년(영조 2) 석가치상탑비(釋迦齒相塔碑)를 세웠으며, 육송정석교(六松亭石橋)를 중건하고 비를 세웠다. 1754년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상궁 이씨와 안씨를 보내어 석가상을 만들게 하고 팔상전을 세워 원당으로 정하였으며, 

8월에는 영조가 숙종의 어제절함도(御製折檻圖)와 어필서(御筆書)를 내려 어실각에 봉안하도록 하였다.

 

1799년 강원도 순찰사 남공철(南公轍)이 유정의 기적비(紀績碑)를 세웠고,

1802년(순조 2) 용허(聳虛)가 제2회 염불만일회를 열었으며,

1804년 왕비 김씨가 금 1,000금과 오동향로·오동화준(梧桐花樽)·양산 등을 내려 순조의 성수를 축하했다. 1805년 왕비 김씨는 나라를 위한 재(齋)를 올리고 병풍과 ≪화엄경≫ 1부를 하사하였으며, 1828년 유정의 영각(影閣)을 지었다.

 

1851년 유총(侑聰)이 제3회 염불만일회를 열었고, 1865년(고종 2) 화은(華隱)을 청하여 강원(講院)을 개설하였는데, 이 때부터 대표적인 강원의 하나로서 많은 강사들을 배출하였다.

 

1878년 4월 3일 산불이 일어나서 건물 3,183칸이 전소되었는데,

이 때 학림(鶴林)이 불 속에 뛰어들어 팔상전의 삼존불상과 오동향로·절감도 등을 꺼내었다. 1879년 개운사·중흥사(重興寺)·봉은사·봉선사(奉先寺)·용주사 등의 도움을 얻어 대웅전·어실각·사성전·명부전·범종각·향로전·보안원·낙서암·백화암·청련암을 중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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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년 관준(寬俊)이 제4회 염불만일회를 설하였고, 1885년 운파(雲坡)가 모연금으로 대웅전·관음전·명부전·사성전의 문을 개조하고 대웅전 후면을 돌로 쌓았으며, 1886년 명례궁(明禮宮)의 토지를 매입하였다. 1888년 청련암과 대원암이 불탔으며, 1889년 인파(仁坡)·관준 등이 팔상전·진영각·노전·극락전을 중건하였다.

 

1891년 신정왕후(神貞王后)의 소상재를 올렸고, 범운(梵雲)이 부처님 치아를

천안 광덕사에서 받아 와 팔상전에 봉안하였으며, 1894년 관준이 선원(禪院)을 만들었다.

1906년 사적비를 세웠고, 어산청범음계(魚山廳梵音契)에서

석가영아탑봉안비(釋迦靈牙塔奉安碑)를 세웠으며,

봉명학교(鳳鳴學校)도 설립하였다. 1908년 제4회 만일염불회를 회향한 뒤

의중(宜重)이 제5회 염불만일회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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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조선사찰령에 따라 31본산의 하나가 되었으며, 9개 말사를 관장하게 되었다. 또한 상해에서 신간 대장경 일부를 구입하여 봉안했으며,

 1914년 소신대(燒身臺)에 31명의 부도를 세우는 한편 간성군에 포교소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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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팔상전과 낙서암을 중수하였고, 1918년 능허(凌虛)와 경해(景海)가

극락전을 중수하였으며, 운파는 중종(中鐘) 5좌(坐)와 불기(佛器) 30좌를 비치하였다.

 

1919년 능허가 1,000원을 시주하여 불이문(不二門)과 영빈관·별실·문수교를 새로 세우고 산영교(山映橋)를 고쳤다. 1920년 인천 포교당과 봉림학교(鳳林學校)를 세웠으며, 한암(漢巖)을 청하여 무차선회(無遮禪會)를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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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사무소를 중수하고 극락전과 만일회의 부속건물 등을 중건하였으며,

1926년 불교전문강원을 설치하고 공비생(公費生) 30명을 양성하였으며,

불상 7위(位)를 개금하고 장구사(葬具舍)를 세웠으며,

덕성(德性)의 주재로 제5회 만일염불회를 계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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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신사리 봉안처 금강산 건봉사

 

홍천에서 인제 가는길은 좋아졌다.

과거 구불구불 좁은 도로를 달리고 시골마을을 지나면서 느끼는 정교한 멋은 없지만 편안한 길이다.

인제, 원통을 지나 진부령으로 향한다. 우리나라 최북단에있는 고개이다. 고개 넘기전 용대리 마을에서 이곳의 자랑 황태구이로 아침을 먹는다. 식당이 여러곳있지만 다른곳과 달리 서로 자기네 식당이 원조라고 자랑하는 간판은 눈에 뛰지않는다.

진부령을 넘는다. 깨끗한 계곡과 아름다운 숲이 가득한곳이다. 교통량이 적은탓인지 사람들의 활발한 모습은 찾을 수 없다.

간성방향으로 달리다보면 건봉사 5킬로미터라는 이정표가 크게 보인다. 지금은 포장이 잘되어있어 쉽게 갈수있는곳이다. 나 어렸을때 기억으로는 비포장길에 군부대만 보였고 적막한 골짜기에 지나는 사람은 군인아저씨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모습은 볼 수 없다.

건봉사 방향으로 가다보면 건봉사 일원의 홍교중에서 가장 외곽에있는 석교 육송정홍교(보물 제1337호)을 만날 수 있다.

 

 

이다리의 건립연대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건봉사 경내에있는 능파교(보물 제1336호)와 비슷한 시기로보며 자연지형을 잘이용하엿다.
건봉사 입구에 도착하면 사명대사 동상이 보이고 뒤로 부도밭이 눈앞에 펼쳐진다.
 

 

건봉사 경내를 들어가지 않아도 부도밭을 보면 대가람을 이루었다는 옛모습을 생각하게한다.

 부도의 모양도 다양하다. 원래는 지금보다 더많았는데 한국전쟁이후 많은 수가 도굴되었다고한다.

부도밭에서 건봉사 경내로 들어가는길은 500미터정도된다 가는길에 만나는 소나무는 웅장함을 보여준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제일 먼제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안내판의 1920년대 건봉사 전경 모습이다.

 

민족의 영산인 금강산이 남쪽으로 뻗어내려 끝자락을 이룬 곳에 있는 건봉사는

6.25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4대사찰의 하나로 꼽던 대찰이었다.

 

건봉사는 520년 아도(阿道) 스님이 창건하였으며, 758년(경덕왕 17)에 발징 스님이 중건하고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를 열었다. 이것이 한국에서의 만일회의 시초다. 신라 말에는 도선 국사가, 그리고 고려 말에는 나옹 스님이 중수하는 등 당대 최고의 명망 있는 고승들이 건봉사와 인연을 맺었다.이로써 건봉사는 염불과 화엄과 선(禪)의 수행을 함께 갖춘 사찰이 된 것이다.

억불정책으로 불교계가 크게 위축되었던 조선 시대에도 이 절은 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끊임없이 사세(寺勢)를 확장하였다. 그 시작은 호불왕(護佛王) 세조로부터 비롯된다. 1465년(세조 11) 이 절에 행차한 세조는 건봉사를 자신의 원찰로 삼고, 역대 왕들의 위패를 봉안하는 조선시대에서도 15세기 이래 어실각(御室閣)을 짓고 역대 임금의 원당(願堂)으로 삼았다. 그 뒤 사명(四溟) 대사가 부처님 진신사리와 치아를 봉안하였다. 이 치아와 사리는 자장(慈藏) 율사가 당나라에서 문수보살로부터 받아 온 것으로 통도사에 봉안하였던 것을 임진왜란 때 왜병이 훔쳐간 것이었다. 불치아와 사리 봉안을 계기로 삼아 이듬해에는 사명 대사와 혜능(惠能) 스님이 피폐된 절을 중건하였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절은 폐허가 되었다.

 

 

건봉사 전체가람의 정문에 해당하는 불이문(不二門)을 들어선다. 불이문은 1920년에 건립된 것으로 6. 25의 전화를 유일하게 면한 건물이다. 보통 일주문은 기둥이 2개인데 건봉사 일주문은 기둥이 4개이다.

자연형의 장대석 위에  주춧돌을 놓고 그위에  둥근 석주를 세웠다.석주의 가운데 부분은 약간 볼록한 배흘림을, 정상부에는 돌림띠를 돌출시켰으며, 앞쪽 석주의 정면에는 커다란 금강저(金剛杵)를 새겨 놓아 눈길을 끈다. 무기의 일종인 금강저를 일주문 기둥에 새겨 사악한 것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석주 위로 나무 기둥을 다시 세우고, 그 위로 다포계 겹처마의 팔작지붕을 올려놓았다. 현판은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의 글씨로 매우 단정하면서도 힘이 있다

 

불이문을 지나면 왼쪽으로 커다란 자연석 위에 세워져 있는 입석(立石)이 있다. 사각형의 석주를 3m높이로 세우고 그 위에 돌로 봉황새를 조각하여 올려 놓았다. 새는 대웅전 쪽을 바라보고있다. 석주의 동쪽면에는 한글로 ‘나무아미타불’을 북쪽면에는 한문으로 ‘南無阿彌陀佛’을 새겼으며, 남쪽면에는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불기 2955년 무진(戊辰)여름’이라는 명문도 뚜렷하다. 솟대 신앙처럼 상징석으로 생각하고 있다.


 

바로 옆에는 범종각이있고 주변에는 한국전쟁때 불타버린 건물터들이 널려있다. 주변에 아름답게 핀 배롱나무 꽃이 쓸쓸함을 대신한다. 범종각뒤에도 작은 상징석 석주가 세워져있다.

폐허가된 절터와 대웅전 사이 계곡에는 능파교(산영교. 보물 제1336호))가 놓여있다. 건봉사 일원의 4개 홍예교 중 규모가 크고 가장 견실하게 보존되어 있는 다리이다. 숙종24(1708년) 처음 건립되었고, 1745년과 1880년에 중수되었다. 다리 밑쪽에서 올려다보는 둥근 모양의 홍예가 아름답다. 본래 이름은 산영교(山映橋)이다.


 

‘능파’란 흔히 가볍고도 우아한 미인의 걸음걸이를 형용하는 말로도 사용되는데, 여기서는 고해(苦海)의 파도를 모두 헤치고 이제 해탈의 부처님 세계로 건너간다는 의미에서 능파교라 한 것으로 보인다.

능파교를 건너자마자 십바라밀이 새겨진 돌기둥이있다. 십바라밀은 이승의 번뇌를 해탈하여 열반의 세계에 도달하기위한 10단계의 수행을 가리킨다.


 

십바라밀(十波羅密) 석주는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시각적인 교육효과를 지닌 중요한 유물이다. 주변에는 돌거북이 한 마리도 엎드려있고 돌절구도있다.


 

대웅전으로 들어선다. 1957년 장병들의 신앙생활을 위해 옛 강원의 자리에 군부대에서 건립한 앞면 6칸, 옆면 4칸 규모의 건물이 있었으나 1994년 이 건물을 헐고 팔작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로 다시 지었다.


 

오른쪽으로 명부전있는데 6.25전쟁 때 산화한 군인을 비롯한 숱한 사람들의 영령을 모시고 있어 더욱 뜻이 있다.

대웅전 앞뜰 오른쪽에는 부처님 진신치아사리 친견장인 만일염불원이있다. 이곳에 5과을 모셔 일반인이 친견할수있도록 하였고 나머지 3과는 적멸보궁에 봉안하엿다. 신성한곳이라 사진은 담지않았다.

 

대웅전을 나와 적멸보궁으로 향한다.영지 입구 돌계단 좌우에는 십바리밀 석주가 있다. 상징성을 형상화한 조각이 특이하다.

 

 

산신각을 지난다. 산신각은 대웅전 구역에서 훌쩍 벗어난 적멸보궁 가는 길목 한쪽에있다.


건봉사에서 가장 위쪽에 위치한 적멸보궁으로 발길을 옮긴다 사명 대사가 모셔 놓은 진신사리를 봉안한 진신사리탑이 있고, 이 탑을 참배하기 위한 적멸보궁이 있다. 이 사리탑은 1605년(선조 38) 사명 대사가 일본에서 되찾아 온 부처님의 치아와 사리를 봉안한 탑으로, 1724년(경종 4)에 건립하였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그 자체가 불신이라 불상은 조성하지 않고 법당 내부 유리창 벽을 통해 뒤편의 사리탑이 잘보이도록하였다.

주변에는 조선시대것으로 추정되는 석종형 부도 2기와 팔각원당형 사리탑과 부도비가 각기 하나씩 서있다.

 

적멸보궁에서 나와 건물터에 앉아 대가람을 이루었던 건봉사의 옛모습을 상상해본다.
주차장으로 내려와 의승병기념관앞에 앉아 답사내용을 정리한다. 그리고 주변 모습을 다시 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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