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말씀배경
시편 127편은 표제가 “솔로몬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과 궁궐을 건축하고 부귀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을 염두에 두면서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누릴 수 없는 많은 것을 누렸습니다. 지혜도 부도 그와 같이 누린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삶을 살고도 헛되다고 고백한 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런 질문과 배경을 가지고 오늘 말씀을 보기 원합니다.
2. 시편 127편
1절, 두 개의 조건절이 있습니다.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성을 지키시지 아니하시면”입니다. 주어는 “여호와”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할 때, 성을 지키지 아니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을 가정법, 미완료형으로 표현한 것으로 “계속 세우지 아니하시면, 계속 지키지 아니하시면”입니다.
여호와께서 계속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고 성을 계속 지키지 아니하시면 지키는 파수꾼의 깨어 있음도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이 헛되다고 고백하는 삶이 어떤 삶인지 여기서도 답이 보이는 것입니다.
헤롯성전을 46년동안 지었지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46년의 의미는 4와 6의 합이 10 이므로 충만수가 되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입니다. 완벽하고 완전한 성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에는 무너질 수 없는 성입니다. 그러나 죄악의 도성이 될 때 여호와로부터 지킴받지 못하여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요 2: 20). 아무리 튼튼한 성벽이 이중 삼중으로 있고 수비를 겹겹이 하여도 무너지는 것입니다.
죄 안에 있는 자나 죄의 도성은 보호를 받을 수 없습니다. 지킴 받을 수 없습니다. 합법적으로 사탄의 권세 아래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사탄의 송사거리와 비방거리가 되고 맙니다. 이것이 영적 원리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의 성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는 성벽에 구멍을 내는 치명적인 원인입니다.
▶ 집이나 성이나 그것을 세우는 자가 전문가가 아니라서 헛된 것이 아닙니다. 부실공사를 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원어적으로 세우는 자는 “바나”인데 건축업자의 뜻이 있습니다. 전문가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없이 그들의 수고와 애씀으로 세우고 지키는 것은 공허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집을 세우다는 것은 건축물인 집을 짓는 것도 포함되지만 한 가정, 집안, 가계를 일으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3~5절에서는 자식과 관련된 말씀으로 연결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할 수 있는 노력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노력으로 이것 저것 어느정도 이루어 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세우고 지키지 아니하시면 다 “헛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헛되며, 헛되도다”는 동사가 아니라 명사입니다. “허무, 공허”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헛되이 수고했다” “그들이 헛되이 성을 지켰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불교는 허무, 공허 종교입니다. 불교에서 나오는 용어가 “인생무상”, “색즉시공” 이 있습니다. 결국 눈에 보이는 것은 마치 비어 있는 것과 같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에게 딱 맞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면 허무함이 공허함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 처음에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가득했습니다 (창 1:2). 세상의 시작이 그러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창조물들로 채워넣어시고 질서를 잡으시고 빛이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도 원래는 죄로 인하여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 가운데 놓여 있는 존재이지만 채우시고 질서있게 하시는 하나님 안에 들어오면 혼돈이 질서로 공허가 채워짐으로 어둠이 빛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가정도 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집도 세워고 성도 지켜야 헛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 열심히 바벨탑을 쌓습니다. 결국 무너지는 공허만 남을 뿐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아무리 돈으로, 명예로, 권력으로 집을 짓고 성을 쌓아도 결국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것은 영원하지도 않습니다.
2절, 사람들은 집을 세우기 위하여 성을 지키기 위하여 잠도 자지 않습니다. 2절 말씀과 같이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눕는다는 것은 잠도 자지 않고 그만큼 인간들이 애쓰고 수고한다는 표현입니다. 그렇게 해서 수고의 떡을 먹어도 헛되다는 것입니다.
헛되다 (히,샤우/텅빔, 공허, 허무)는 단어를 1~2절에서 세 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강조이며 확실히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가 기록한 전도서 1:2절에서는 다섯 번이나 헛되다고 했습니다.
[전도서 1: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2:8]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솔로몬은 그의 경험을 통하여 헛된 삶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그래서 전도서의 처음과 끝에서 헛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결국 여호와 안에서만 헛되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세우시고 지키지 않으시면 그들이 밤낮 잠을 자지 않고 일을 해도그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수고한 떡을 먹으면 먹을 때는 좋지만 더러운 배설물로 나오는 것과 같이 헛된 것입니다.
▶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 곧 다르게 표현하면 여호와께서 그의 집을 세우시고 그가 사는 성을 지켜주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잠을 자지 않는 것과 잠을 자는 것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열매도 헛되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이 대조를 이룹니다.
여호와께서 사랑하시지 않는 자는 밤잠을 자지 않고 수고를 해도 헛되나, 여호와께서 사랑하는 자는 잠을 자 가면서 수고를 덜해도 헛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잠도 자지 않고 수고를 했는데 그 열매가 헛되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반대로 잘 것 다 자고 적게 수고를 했는데 그 열매가 헛되지 않다면 얼마나 복된 자입니까?
영적으로 믿는자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도 이와 같습니다. 로마서 4:6절에서는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이 복이 있고 했습니다.
[롬 4:6]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KEY는 여호와의 도우심입니다. 함께 하심입니다. 여호와의 사랑을 입는 것입니다.
▶ 솔로몬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입니다. 그래서 이런 고백을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통해 주신 솔로몬의 이름이 “여호와께 사랑을 입음”이라는 뜻의 “여디디야”입니다.
[사무엘하 12:25]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
그래서 오늘 말씀 2절에, 그의 “사랑하시는 자”의 원어가 “예디드”인 것입니다.
▶ 다윗에게는 솔로몬보다 형인 여러 명의 자식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 이 왕이 되는 것은 왕위 서열로 본다면 매우 어렵습니다.
압살롬의 반역이나 (삼하 15:7-18:18) 아도니야가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해서 요압장군과 제사장 아비아달 등과 모의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왕상 1:7-53).
그들은 인간적인 힘과 계산으로 왕이 되고자 했으나 여호와의 사랑을 받는 자 솔로몬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인간적인 힘과 지혜와 노력으로 왕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입으니 자연스럽게 왕위가 자기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압살롬과 아도니야는 헛되엇지만 솔로몬은 노력하지 않았는데 헛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랑을 입은 자에게 베푸시는 은혜인 것입니다.
여호와의 도우심이 없이 잠도 자지 아니하면서 수고의 떡을 먹었지만 그 결과가 허무하다면 그 인생 불쌍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런 인생에 빠지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3절, 여기서 자식, 태의 열매는 1절에서의 말씀하신 집이나 성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1절에서 집(히, 바이트)는 가정, 가문을 의미합니다. 집에 자식이 없으면 가정도 가문도 있을 수 없습니다.
집을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식들이 번성해야 합니다. 또 성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각 가정에서 자식들이 번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땅만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자손도 바닷가의 모래 같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창 22:17, 창 26:4)
자손의 번성은 집을 세우고 성을 세우는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야 나라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집을 세우고 성을 지키기 위해서 자녀들의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라 했습니다.
기업 (히, 나할라)은 상속, 재산, 유산, 소유입니다. 그러므로 자식들은 여호와를 사랑하는 자에게 물려주시는 여호와의 상속이요, 재산이요, 유산이요, 선물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과거에는 더더욱 자식이 많은 것이 그들의 복이었고 재산이었습니다.
같은 의미로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라 했습니다. 상급(히, 사카르)는 삯, 임금, 보수, 상급입니다.
그러므로 태의 열매가 자식이니까 자식은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수고의 삯이요 임금이요 보수인 것입니다.
결국 자녀를 통해서 믿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기업을 주시고 상급을 주시는데 다르게 표현하면, 자식을 주심으로 우리들에게 유산을 주시고 삯을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4-5절과 같은 자식은 믿는 자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입니다.
▶ 하나님께서 태를 막으시면 한명의 자식도 가질 수 없습니다. 반대로 태를 여시면 경수가 끊어진 90세의 사라에게도 100세가 다 된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삭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설령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살고 죽은 것이 하나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키시지 아니하면 어느 한 순간에 씨가 마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식은 여호와께서 주신 기업이요 그가 주시는 상급인 것입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자의 자식은 그들에게 기업이요 상급이 되지만 그것은 무너지는 기업이요 상급인 것입니다. 악인들이 번성해도 결국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잠언 12:7] 악인은 엎드러져서 소멸되려니와 의인의 집은 서 있으리라
하나님 안에서의 망하지 않습니다.
4절, 자식이 기업이 되고 상급이 되는데 그가 어떤 자식이기에 그렇게 될까요? 그 내용이 4~5절에 나옵니다.
젊은 자는 하반절의 “장사”와 연결됩니다. 장사는 “깁보르”입니다. 룻의 남편이 된 보아스에게 “유력한”으로 번역된 단어이기도 합니다. 사울의 아버지 기스도 유력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젊은 자의 자식 곧 장사의 자식은 다윗과 사울과 같은 왕적 존재들입니다. 화살과 같이 대적의 심장을 뚫을 수 있는 힘이 있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식들이 화살통에 가득한 화살처럼 있다면 누구도 당할 자 없는 것입니다. 집을 세우고 성을 지키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5절, 그래서 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문에서 원수와 담판을 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 과거에는 사람들이 출입이 있는 성문에 앉아서 재판을 했습니다. 그래야 증인들을 많기 세울수 있기 때문입니다.
재판의 자리에서 왕 같은 자녀들이 많은 사람에게는 누가 거짓증거를 하겠습니까? 자식이 없으면 자신이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거짓증인들 앞에서 무력하게 억울하게 수치를 당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은 재판에서도 억울함을 당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원수들이 실제 성문과 마음의 성문을 쳐서 부수고 들어오고자 하나 대적의 공격에서 이긴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성이 지켜지고 가정이 지켜진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사랑받는 자녀를 많이 두세요. 그것이 복입니다. 다음에 묵상할 시편 128편에도 아내가 결실한 포도나무와 같이 자녀를 많이 두어 자식들이 어린 감람나무와 같이 식탁에 둘러앉아 있는 것이 복되다 했습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자식이 많아도 하나님 보시기에 복(히, 에셰르)되다 하지 않습니다. 주님 밖에서는 자식도 모두가 헛된 바벨탑이 되고 맙니다.
많은 식구가 다 예수를 믿고 함께 여호와께 예배하고 찬송하며 살아감으로 오늘 말씀처럼 가정이 지켜지고 마음의 성전과 교회가 지켜지고, 우리가 사는 성읍, 나라가 지킴을 받고 사는 복된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