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대순진리회의 신앙 입장
(3) 사람에 대한 믿음 (a)
사람을 규정하기를 먹어야 사는 생리적인 동물이라고도 하고, 또
생각하는 이상적 동물이라고도 하며,「 당위적」윤리적인 존재라고도
존재라고도 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이면서도 한 차원 높은 자리에 있는 영장(靈長)의
존재입니다. 영장이란 종교적인 요구, 소망을 가진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존재란 말입니다. 먹어야 살고,
생각하고, 윤리 도덕을 지켜야 하는 존재를 넘어서 소망을 실현시켜
나가는 존재라는 뜻도 됩니다. 현세 생활을 넘어서 살려는 소망이
종교적 요구입니다.
그런데 종교적인 동기는 자기가 자신의 능력에 실망하였을 때에
생기곤 합니다. 능력에 대한 실망은 질병, 사회 불안, 가난, 그
외의 개인적인 고난에 원인이 있습니다. 석가가 노인, 병자, 죽은
사람을 보고 인간 생활의 불안과 무능력을 느낀 것이 그의 종교적인
동기였습니다. 질병에 시달려 용한 의원으로서의 상제를 찾았거나,
벼 곡식들이 가뭄이나 홍수에 시달려 수확을 잃게 되자, 상제께 가서
걱정하는 따위 등의 기록이 전경의 여기 저기의 구절에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종교적인 동기가 된 예들입니다. 쉽게 말해서 생활의
파국이 종교적 동기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따진다면 파국이
없으면 종교적인 동기는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무두 파국이 나타나지 않는 평탄한 인생을 원합니다.
그러나 인생에 파국이 전혀 없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행복한
인생을 보내며 장수한다 하여도 인생의 막바지에는 죽음이란 파국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생에 단 한번이라도 난국에 부딪히지 않고
살아가는 인생이란 없습니다. 그러니 사람이면 누구나 종교적 동기에
부딪히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동기가 생겼더라도 반드시 종교적 요구가 일어난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종교적 동기와 종교적 요구는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그것을 같은 것으로 보기 때문에 그릇된 신앙
(邪信)에 빠질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질병은 종교적 동기가
됩니다. 그 동기에서 치병(治病)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 행위가
실시됩니다. 그러나 치병은 결코 종교적인 요구가 아닙니다. 무당이나
점장이에게 불안한 인생의 예견(豫見)을 바라곤 합니다만 이것도
바람직한 종교적 태도는 아닙니다. 그러나 치병과 종교와의 관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종교적 삶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이 치병이란
결과를 얻기도 합니다.
올바른 종교적 요구란 인간이 살고 있는 의미를 아는 것이고, 자기가
존재하는 의의를 알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교적인 동기에 부딪치게 될 때 거기서 우리는 자신의
좌절을 실감하게 됩니다. 고난이나 괴로움을 넘어설 수 없는 자기의
모습을 보게될 것입니다. 그 때에 처음으로 우리는「 우리는 무엇이냐,
누구냐」고 탄식하면서 자기를 찾게 됩니다. 이 찾음은 인생의 고난이
겹치면 겹칠수록 보다 깊고 절박하게 자기에게 느껴 올 것입니다.
그 때에 절망에 빠지게 되지만, 그 절망으로 인해 죽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죽을 수 없는 괴로움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사막 속에 던져진, 혹은 대양(大洋) 속에 침몰해 가는 배 속에 갇힌
비탄(悲嘆)입니다. 이 바탄에 빠진 자기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 그 길을 찾으려는 것이 종교적인 요구입니다.
고민하는 자기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일반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잊는 길입니다. 이 길은 자기의 고민을 잊을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잊으려고 하여도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 구조상
잊는다는 가르침을 실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잊으려고 하여도
잊을 수 없으리만큼 사람과의 관계가 짙으며, 약한 경제 사정,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개인의 허약점, 협동
사회에서의 좁은 군중심리 등이 잊혀지지 않도록 합니다.
둘째의 길은 때를 기다리라는 가르침입니다. 때를 기다리노라면
괴로움을 주고 있는 사정이 자연히 변한다는 것입니다. 종교에서 흔히
쓰여지는 가르침이긴 하나, 이 자세에는 종종 단념(斷念)이니 체념
(諦念)이니 하는 태도가 깃들기 쉽습니다. 단념하면 용기가 사라지고,
새롭게 무엇을 창조하려는 의욕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눈앞에 닥친
괴로움을 없앨 수 있을뿐만 아니라, 같은 고민이나 고생이 생기는 것을
막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고, 같은 고민을 되풀이 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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