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 17, 2002. Written by C. J. Lee
<절집 비틀어진 사연에 너무 진을 뺐는지 요즘 맥이 없다. 이젠 체력도 문제다>
영감을 모시는 또 다른 중요한 사람들이 있다. 운전병.
당번병이야 행여 실수를 한다해도 영감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운전병은 사정이 다르다. 그런 의미로 보면 아주 중요한 직책이다. 이 운전병들과 영감님의 이야기.
어느 날. 갑자기 위병소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영감, 작은 영감, 기타 그 보다 높은 사람의 차가 들어올 때 보내는 신호다. 난 외출한 영감이 돌아오는 줄 알고 얼른 참모부 앞으로 뛰어나갔다. 그런데 언덕길을 올라오는 차는 눈에 익은 '작전1호'가 아니고 웬 택시였다. 어라?! 내가 어리둥절해서 경례도 못하고 어정쩡하고 있는 사이에 택시는 참모부 현관에 섰고, 놀랍게도 차에선 영감이 내리고 있었다. 어^허?!
영감님을 모시고 CP로 향하는 복도를 걸으며 그 사이 있었던 일을 말씀드리면서도 머리는 팽팽 돌았다. 이게 뭔 일인지? 이게 어디 구석에다 차 세워놓고 디비져 자다 영감을 놓친 건 아닌가? 차가 어디서 퍼진 건 아닐까? 사무실로 들어서면서 영감님은 약간 굳은 소리로,
"덤프 트럭 중대장 좀 올라오라고 해라." 고 지시했다.
"예, 알았습니다."
득달같이 DT 중대에 연락을 하고, 마침 자리에 있던 중대장도 득달 같이 CP로 뛰어 올라왔다. 무슨 일이냐는 중대장의 (예전에 나의 중대장 아닌가? 맘 좋은..) 질문에 짧게 이 이상한 사태를 설명해 드린 후 영감방으로 안내했다. 얼마 되지 않아 중대장은 영감방에서 약간 굳은 얼굴로 나왔지만, 영감방 안에서 전혀 큰 소리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호기심은 더욱 커져 갔다.
그런 한바탕 소란이 있은 잠시 후, 1호차가 들어왔다. 운전병은 묘한, 그러나 겁을 먹은 표정으로 상황을 물었고 나도 상황을 물었다. 사건의 내용은 이랬다.
당시만 해도 '운짱'들의 곤조가 있었다. 지금처럼 개도 운전면허증을 물고 다니는 세상에선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정말 '개포동'에선 개도 포니를 몰고 다닌다), 그때만 해도 운전면허는 귀한 '쯩'이었다. 운전은 기술이었고, 기술 있는 자들이 종종 그러하듯이 시도 때도 없이 성깔을 부리곤 했다. 우리 부대 운짱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더 심했으면 심했지..
이들의 곤조 대상은 곧잘 운전 못하는 상급자들이었다. 장교를 태우고 가다가 한적한 곳에서 차를 퍼뜨리고는 (어떻게 일부러 퍼뜨리는 지는 모르겠다) 뒤에서 밀어야 한다고 해서 실컷 고생을 시키곤 하는 짓궂은 장난들을 곧잘 치곤 했다. 내가 DT 중대에 있을 때에도 그런 '한 껀'을 자랑하는 고참 운짱들을 흔히 보곤 했었다.
그때 우리 '작전1호'차의 운전병과 '내빈1호'차의 운전병은 기가 막히게 닮은꼴이었다.
(영감은 차를 두 대 쓴다. 내빈차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영감의 off-hour 승용차로 쓰였다)
키도 비슷, 얼굴도 비슷, 양아치 분위기도 비슷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둘 다 부대에서 몇 킬로밖에 안 떨어진 '서면'이 집인 사병들이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집 가까이에서 군대생활을 하게 되었는지..), 밑이 타개진 바지 입고 고추 내놓고 다닐 때부터 한 동네에서 함께 자랐다고 한다. 당연히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동기였고 군대도 한날에 가서 자대까지 같이 오고, 같이 운전병이고, 영감의 차를 한 대씩 나눠서 운전하는 사이가 된 것이었다. 아마 쌍둥이 형제도 그들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두 1호차 운전병들의 특징은 한마디로 '불량기'였다. 아무리 양아치라도 군대와서야 뭘 어쩌겠느냐만, 이들은 아직도 특유의 '껄렁끼'가 있었다. 어찌 보면 한편으론 그것이 매력이던 선수들이었다. 나도 그들의 그런 끼를 좋아했었으니까. (그러나 난 껄렁이 아니다..)
이들의 껄렁끼는 영감을 모시는데 큰 몫을 하기도 했다. 개기기도 잘했으니까.
아주 만사가 평화로웠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영감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시는 낌새가 나길래 서둘러 현관에 대기하고 있는 1호차로 나갔다. 나는 늘 그렇게 좀 일찍 나가 차문을 열어놓고 대기하고 있다 영감의 퇴근을 배웅하였다. 그런데 그날 1호차를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뻘건 번호판에 커다란 별이 하나 떡하니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소위 말하는 '마이가리 별판'이었다. (사실은 '마에가리'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왜말이니까)
이건 대령인 영감님이 곧 장군으로 진급할 것이라는 아랫사람들의 아부가 담긴 장난(?)이기도 했지만, 대개 당사자들도 그렇게 싫어하지 않는 치장이기도 했다. 계급이야 어떻든 별판 달고 다니는 데 싫을 사람 있겠나? 게다가 곧 별 달 거라는데.
뒤이어 현관으로 나온 영감님도 별판을 보더니 별로 싫은 내색이 없이 말씀하셨다.
"아니.. 누가 이런 걸 달았나?"
그러자 일부러 옆에 대기하고 있던 수송부 선임하사가
"어차피 곧 별 다실 거.. 저희 수송부 전체의 성의입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시던 영감은 별 다른 말없이 퇴근을 하였다. 다음 날 영감은 수송부 선임하사를 불러 금일봉을 주었다. 고생하는 수송부 회식하라고.
당시 사령부의 대령급 지휘관들 사이에 별판을 달고 다니는 것이 일종의 유행이었다. 물론 주행 중에는 대개 별판을 드러내고 다니지 않는다. 대신 번호판에 검은 커버를 씌우고 다니는데 그 검은 커버가 곧 그 안에 별판이 있다는 의미니까 뭐 그게 그거다. 그런데 그런 불법을 너도 나도 하고 다니니까 사령관이 특별히 지시를 내렸다. '마이가리 별판'을 달고 다니지 말라고. 그러자 그 전에도 검은 커버 씌운 별판을 늘 못마땅하게 여기던 헌병들이 본격적으로 단속에 나서게 되었다.
어느 날 사령부에 영감을 모시고 들어간 우리 작전1호 운전병 <껄렁1>이 영감이 회의 할 동안 운전석에 느긋하게 기대앉아 휴식을 즐기고 있는데 '바가지' 둘이 다가 오더란다. (바가지=헌병) 일병인지 상병인지 되는 그 졸병 바가지들이 우리 1호차의 커버 씌운 별판을 시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의 양아치 <껄렁1>에게는 그런 졸병 바가지는 눈에 차지도 않았다. 그 때 사실 <껄렁1>도 상병이었지만 그는 당연히 마이가리 병장을 달고 다녔다. 게다가 하는 짓을 보면 병장도 아주 말년 고참 같아 보였다.
<껄렁1>이 운전석에 기대앉아 상대도 하지 않자 바가지들이 제법 거칠게 나오더란다. 그럴 수밖에.. 명색이 헌병인데.. 그러나 <껄렁1>이 누구인가? 서면에서도 알아주는 양아치였다는데, 게다가 '大1203'의 1호차 운짱이 아닌가? (1203은 우리 부대 이름. 흔히 '야리공삼', 줄여서 '공삼'이라고 불렀다)
<껄렁1>은 헌병들에게 '새파란 쫄다구 ㅅ끼들이 바가지를 쓰더니 계급도 안 보이냐?'고 지랄을 했고, 그 기세에 눌린 바가지들은 마지못해 물러갔다.
잠시 후 바가지들은 하사를 하나 데리고 돌아왔다. 계급에는 계급으로 눌러보려고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 때는 말뚝 박은 하사가 아닌 단기하사는 사병 취급하던 때였다. 말뚝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하사 말을 <껄렁1>이 들을 리 없었다. 결국 하도 껄렁하게 나오니까 하사도 어쩌지 못하고 헌병대 장교까지 나섰다고 한다. 소위라던가 중위라던가.. 그러나 역시 삐딱한 <껄렁1>은 별판 떼라는 헌병장교의 말에 버티고 버티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헌병대장 차 별판 떼면 우리도 떼겠습니다."
사령부 헌병대장은 중령이었다. 헌병이라고 좀 우쭐했던지 헌병대 1호차는 중령인데도 늘 별판을 달고 다녔다. 그걸 걸고넘어진 <껄렁1>. 역시 타고난 불량기와 찐드기 기질이었다.
그 후로도 한동안 별판을 달고 씽씽 달리던 1호차의 별판이 어느 날 없어졌다. 헌병대장 차의 별판을 떼었다는 소문을 들었다나.. 소문도 빠른 껄렁 운짱들.
이 껄렁 운짱 두 명은 영감을 위해선 아무에게나 개기기도 잘하고, 심지어 장교에게조차 엉기기도 잘했다. 지휘관 운전병으론 더 할 나위 없이 좋았는데.. 그만 그 까불이 습성이 터진 것이었다.
그 날 영감은 '송정'으로 가던 중이었는데, 도중에 있는 (그 동네에선) 꽤 험한 고개를 (청사포라던가?) 넘다가 그만 <껄렁1>의 장난끼가 발동하였다. 그는 차를 퍼뜨렸고, 영감에게 내려서 밀어야겠다고 말했다. 그럼 대개의 장교들이나 심지어 지휘관들도 보통은 내려서 차를 민다고 한다. 아니꼽고 말도 안되지만 어쩌겠나? 기술자 운짱이 밀라는데..
그런데 <껄렁1>은 사람을 잘못 골랐다. 영감은 '차를 밀라'는 소리를 듣자 <껄렁1>을 잠시 쳐다보더니 다짜고짜 귀싸대기를 올려붙였다. 그리곤 차에서 내려서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타고 부대로 돌아와 버린 것이었다. 그런 장난엔 이 방법이 정답인 것 같다.
<껄렁1>의 자초지종을 들은 CP에서는 한숨이 오락가락하였다. 간만에 괜찮은 운전병을 구했나 했더니 저런 쓸데없는 장난을 하다니.. 당사자 <껄렁1>도 이번 사태에 대해선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얕은 수작 부리던 사람일수록 그렇게 정공법 수비에 깨지고 나면 더 꼬리를 내리는 법이다.
'작전1호차'는 우리 '야리공삼' 수송부의 자랑인 차였다. 사령부에서 차와 중장비하면 '야리공삼', 그 '공삼'의 1호차! 거의 한 달에 한 번씩 새로 수령해 온 제일 좋은 새 엔진으로 갈아대었고, 차의 나머지 모든 부분도 늘 새차 수준을 유지했던 차였다. 수송부 선임하사의 말로는 사령부내에서 가장 좋은 차이고, 추풍령 이남에서는 상대할 차가 없다는 말 그대로 '공삼의 자부심' 그 자체였다. 그런 차가 언덕을 올라갔다가 퍼졌다는 건 기술적으로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선임하사의 자존심을 사정없이 깎아 내린 치욕적인 사건이었던 셈이었다.
<껄렁1>은 수송부에 내려가서 어떤 변명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중대장에게 뒈지게 혼나고, 수송부 선임하사에게 끌려가서 수송부의 기름 절은 마당이 뽀송뽀송해질 때까지 구르고, 그리곤 영창을 갔다. 헌병대 영창이니까 앞날의 인생살이에는 큰 지장이 없는 징벌이었지만, 그의 너무도 유명한 껄렁한 모습을 알아 본 사령부 헌병들에게 엄청나게 들볶였던 모양이었다. 사람은 평소에 누구에게나 잘해야 한다.
<껄렁1>과 닮은꼴인 내빈1호차의 <껄렁2>도 곧 바로 교체되었다. 구별도 어려웠지만 설사 구별한다 해도 그를 보면 <껄렁1>이 연상될텐데 놔둘 수가 없었다.
그 둘은 그 후에도 늘 즐겁고 껄렁한 모습으로 신나게 차를 몰고 다니며 군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종종 CP에도 놀러와 술도 한 잔씩 하곤 했다. 참 괜찮은 껄렁패들이었는데.. 조금만 진지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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