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생활생물 연구회
 
 
 
 

친구 카페

 
등록된 친구카페가 없습니다
 
카페 게시글
한국사 스크랩 멀고도 험난한 조선왕조의 근대화
임광자 추천 0 조회 102 08.06.05 17:3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멀고도 난한 조선왕조의 근대화 길목

멀고도 험난한 조선왕조의 근대화 길목
 
가. 시전(市廛)과 난전(亂廛)

프랑스 혁명정부는 몰수한 귀족의 토지와 수도원의재산을 담보로 1789년 12월, 아시냐(assignat)라는 채권을 발행하여 부족한 재정을메우고자 했다. 그러나 혁명전쟁이 시작되고, 재정부담이 늘어나자 이를 마구 남발,발행 총액이 담보가액을 훨씬 넘어서면서 결국 악성 인플레이션을 유발시킨 불환지폐의오명을 남기고 1797년, 발행 8년 만에 자취를 감추었다.

농본주의를 건국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왕조에서 농업이외의산업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상공업에 대해서는 국가가 일일이 간섭하고 통제하여그 발전을 제도적으로 막았다. 그 사람의 직업이 곧 그 사람의 신분이고, 이를 세습하므로써사회질서를 유지했던 제도하에서 과다한 국역을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대우를 받을 수 있는 양반으로의 신분상승은 모든 사람들이 추구했던 꿈이었다.

사농공상이라는 신분체계 말단에 있었던 상인들 역시국역의 일환으로 과도한 상세를 물어야 했고, 각가지 억상정책(抑商政策)에 수없이시달렸지만, 시대의 추세는 이들 세계에도 조금씩 변화의 조짐이 나타났다. 어용상인인시전에 대립해서 사상(私商)인 난전이 늘어나고, 이 난전들이 합세하여 시전에 대항했는데,그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금난전권의 제한이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다.

김홍도의 풍속화첩조선왕조(朝鮮王朝)는 고려시대의잡다한 신분제도를 양인(良人)과 노비(奴婢)로 단순화 시켰다.

따라서 노비 이외의 모든 사람들은 양인(良人)이라하여 교육(敎育)과 과거(科擧) 등 백성으로서의 권리가 있었고, 그 대가로 공납(貢納)과신역(身役)의 의무를 부담하였다. 노비는 국가에 대한 부담이 없는 반면 어떤 권리도없었다.

조선왕조가 이렇게 양인의 숫자를 늘린 것은 좋게이야기해서 백성들의 인권을 신장시킨 것이고, 다른 면에서 보면 보다 많은 세원을확보하는데 있었다. 다시 말하면 양인의 숫자를 늘렸다는 것은 수탈 대상을 늘렸다는것이다.

이렇게 단순했던 신분제도가 조선왕조가 확립되는15세기를 지나면서 그 직업의 귀천에 따라 분화되기 시작하여, 양인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서열이 만들어지고, 사(士)는 곧 양반이 되고, 농(農)·공(工)·상(商)은 상민(常民/상놈)이되어 양반, 상민, 노비의 세 단계로 신분구조가 바뀌었다.

그런데 양반에는 해당되지 않았으나 하급관리·지방행정실무자·기술관등은 하는 일이 상민들과는 달랐기 때문에 양반과 상민 사이를 비집고 끼어 들어중인(中人)이라 불렀다.

중인이란 글자 그대로 양반 보다는 한 수 아래지만상민 보다는 높은 중간계급(middle class)이라는 뜻이다. 이래서 양인은 양반, 중인, 상민의세 단계로 분화되고, 여기에 인간 이하로 취급 당했던 노비를 포함하면, 신분구조는양반, 중인, 상민, 노비의 네 단계가 된다.

그런데, 같은 국가기관이나 공공기관에 근무했으면서도글줄이나 읽고 쓸 줄 알았던 부서의 사람들은 중인으로 승차했지만, 남들이 기피했던악역(惡役)이나, 힘들고 험한 일곱 가지 일에 종사했던 사람들은반대로 상민 아래의 최하위 계급으로 전락하여 천민이 되었다. 이래서 양인은 다시양반, 중인, 상민, 천민 등 네 단계로 신분이 분화된다.

중앙관서의 경비와 고관의 경호 등을 맡았던 조례(?隸), 서울에서 고관의 시종과 죄인을 매질하고 압송했던 나장(羅將), 지방 관청에서죄인을 잡아오거나, 매질하며, 관아의 보초(步哨)와 수령의 둔전관리(屯田管理) 등의일을 맡았던 일수(日守), 조운(漕運)은 담당했던 조졸(漕卒), 봉수(烽燧)일을 보았던봉군(烽軍), 교통수단인 역(驛)의 자질구레한 일을 맡았던 역졸(驛卒) 등이 이들인데,이들의 신분은 양인이지만 하는 일이 천하다 하여 신양역천(身良役賤)이라 했고,일곱가지 천한 일에 종사한다 하여 칠천(七賤)이니 칠반천역(七般賤役)이니 해서상민과 구분하여 매우 천시했다,

조례와 나장, 일수 등은 상사의 지시에 따라 매질과고문의 악역을 맡았기 때문이고, 조졸(漕卒)이나 수군(水軍),봉군, 역졸등은 하는일이 힘들고 위험해서 사람들이 기피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어렵고 힘든 일을 치러야만했던 사람들의 노고의 보답치고는 비정하기 짝이 없지만, 이런 전통은 아는 듯 모르는듯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연면히 이어지고 있다.

한편 민간에서도 백정(白丁), 광대(廣大), 기생(妓生),혜장(鞋匠), 영인(伶人), 향리(鄕吏), 사령(使令), 승려(僧侶) 무당(巫堂) 등의 직업(職業)에종사했던 사람들은, 하는 일이 천하다 하여 천민으로 취급했고, 이들의 사회적 지위나대우가 노비와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에 양인에서 분화된 이른바 7천을 비롯한 이들전부에 노비를 포함, 최하위 계급인 천민으로 분류하였다.

이것이 조선왕조의 네 계급, 즉 양반, 중인, 상민,천민이라는 신분체계로서, 시대에 따라 그 양상이 조금씩은 달랐지만 크게 보면 조선왕조멸망 때까지 명맥이 이어졌는데, 이것은 크게 보아서 그렇다는 것이고 각 신분마다그 속에서 다시 높고 낮은 서열은 수없이 많았다..

같은 상민(常民)이라 해도 농, 공, 상의 직업 서열이있었고, 농민에 비해서 공(工) 상(商)은 상대적으로 천시했으며 그 숫자도 극히 제한했다.농민들은 공납과 군역을 담당했고 이것이 국가 재정 및 국방의 요체가 되었다. 장인(匠人)들은화약이나 무기, 기명(器皿) 등 관수품의 제조와 납품을 맡았고, 상인들은 궁중이나관청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를 무상(無償)으로 공급하여 국역(國役)에 대신 했다.

유교주의 국가의 모범생이라 할 수 조선왕조에서 단행된이런 일련의 시책들은 농본주의정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모든 백성을토지에 얽어매야 할 필요가 있었고, 따라서 농업이외의 다른 산업은 얻는 것보다는잃는 것이 많다 하여 철저하게 억압하였다.

다시 말하면 하늘의 명을 받아 땅을 지배하는 국왕으로서는,그를 보좌하는 조직적인 관료군만 필요할 뿐, 나머지는 땅을 일구고 가꾸는 일만이천명에 부합하는 동시에 인구(人口)를 먹여 살리는 유일한 수단과 방법이고, 이런일에 종사하는 농민들이야말로 진정한 백성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요즘 용어로 풀어보면 1차 산업만이 국가발전의 근본이고,2, 3차 산업은 1차 산업에 기생(寄生)하는 천덕꾸러기로서 아예 없거나 적을수록좋다는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상업이 번성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유통수단을 전혀배격할 수도 없고,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던 관습을 일시에 없애는 것도 무리였다.

1392년 태조가 즉위하면서 개경에는 고려시대의 경시서(京市暑/ 세조 12년인 1466년에는 平市暑로 개칭)를 그대로 두고 물가조절 및 상세 징수,도량형기의 단속 등 행정사무를 맡아보게 하였으며, 별도로 청제감(淸齊監)을 두어시가(市街)의 청결(淸潔)을 감독하게 하였다.

15세기 초, 도읍을 한성으로 옮긴 태종 때부터 운종가(雲從街/ 현 종로)에는 허가 받은 일정한 사람들만이 상행위를 하되 지역 한계를 정하여대시(大市)는 장통방(長通坊 / 관철동과 장교동)에서 거래가 이루도록 하였고, 미곡잡물은동서남북(東西南北)과 중앙에 각각 한 곳씩 모두 5곳을 선정하여 매매케 하였다.우마(牛馬)의 거래는 대시가 열리는 장통방의 하천에서, 야채, 과일, 일용잡화 등소소한 물품은 여항소시(閭巷小市)라 하여 각각 사는 곳의 문 앞에서 매매를 이루도록하고, 평시서(平市署)에서 이들 전부를 엄격히 지도 단속하였다.

왜란과 호란은 겪은 17세기가 되면 상품의 수요와공급이 늘어나고, 상공업은 크게 진전되지만 서울의 시전 사정은 여의치 않았다.상세(商稅)는 엄청나게 불어났는데 시전의 수입은 늘지 않았다. 시전 상인들이 물어야했던 상세란 이런 것이다.

각 관청에서 수시로 요구하는 필요 경비를 부담해야되고, 궁중이나 관청 등에서 건물 수리(修理)나·도배(塗褙)를 할 때, 소요자재 및경비를 부담하며, 왕실에서 관혼상제(冠婚喪祭)가 있을 때 필요한 물품을 적시에조달해야 되고, 중국 황실에 해마다 보내는 선물(歲幣) 등을 이들 상인들이 맡았다.이런 부담을 안게 된 시전을 유푼각전(有分各廛)이라 했고, 한푼도 내지 않는 것을무푼각전(無分各廛)이라 해서 서로 간 구별하였다.

유푼각전은 엄청난 부담을 국역이란 이름으로 부담했기때문에 정부에서는 이들에게 일정 수입을 보장해 주어야 했다. 그런데 그 보장이라는것이 상품의 독점판매권이다. 이런 독점판매권을 금난전권(禁亂廛權)이라고 하는데,17세기 이후가 되면 이것이 더욱 강화된다는 것이다.

과다한 비용을 독점판매로서 보충해야 하고 독점판매를하기 위해서는 세금 한푼 안내는 사상(私商)들, 곧 시전을 방해하는 난잡한 상인들의뜻이 담긴 난전(亂廛)을 단속할 수 권리를 시전상인들에게 주었던 이른바 금난전권이더욱 강화되어 그 폐단 또한 심각할 정도가 되었다. 결국 상인들이 지는 부담이 고스란히생산자나 소비자에게 돌아 갔던 것이다.

18세기 영·정조 시대를 조선왕조의 안정기라고 한다.오랑캐라고 멸시만 했던 청나라의 제도문물을 배워야 된다는 북학(北學)이 등장하고실학(實學)과 서민문화가 나타났고, 정조 치세기간(1776 ~ 1800)이 되면 이런 것이활짝 꽃을 피우게 된다.

화폐와 상업에 관심을 보이게 되고, 연암 박지원의허생전이라는 한문 소설을 발표한 것도 이 시기다 된다. 서울에는 이현(현 동대문시장)과 칠패(현 남대문 시장)에 시장이 들어서고 전국적으로 천 여 개의 장시(場市)가날로 번성하고 있었으며, 이를 주도했던 사상(私商)들, 즉 난전(亂廛)들도 힘을 결집하여조직화하고 그들의 이익을 공식적으로 정부에 건의하였다.

이때의 사정을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소상하게적고 있다. 그 내용을 한 자 수정 가감 없이 그대로 여기 옮김으로서 당시의 사정은독자들이 판단하기 바란다.

정조 15년(1791) 1월 25일(경자) / 저자의 백성들에게육전 이외에서도 매매할 수 있도록 허락하다.

차대를 거행하였다. 저자의 백성들에게 육전(六廛)이외에서도 함께 매매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육전은 입전(立廛 / 비단)·면포전(綿布廛)·면주전(綿紬廛)·포전(布廛)·저전(紵廛)·지전(紙廛)이다.좌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도성에 사는 백성의 고통으로 말한다면 도거리장사가 가장 심합니다. 우리 나라의 난전(亂廛)을 금하는 법은 오로지 육전이 위로나라의 일에 수응하고 그들로 하여금 이익을 독차지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빈둥거리며 노는 무뢰배들이 삼삼오오떼를 지어 스스로 가게 이름을 붙여 놓고 사람들의 일용품에 관계되는 것들을 제각기멋대로 전부 주관을 합니다. 크게는 말이나 배에 실은 물건부터 작게는 머리에 이고손에 든 물건까지 길목에서 사람을 기다렸다가 싼값으로 억지로 사는데, 만약 물건주인이 듣지를 않으면 곧 난전이라 부르면서 결박하여 형조와 한성부에 잡아넣습니다.

이 때문에 물건을 가진 사람들이 간혹 본전도 되지않는 값에 어쩔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며 팔아버리게 됩니다.

이에 제각기 가게를 벌려 놓고 배나 되는 값을 받는데,평민들이 사지 않으면 그만 이지만 만약 부득이 사지 않을 수 없는 경우에 처한 사람은그 가게를 버리고서는 다른 곳에서 물건을 살 수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그 값이나날이 올라 물건값이 비싸기가 신이 젊었을 때에 비해 3배 또는 5배나 됩니다.

근래에 이르러서는 심지어 채소나 옹기까지도 가게이름이 있어서 사사로이 서로 물건을 팔고 살 수가 없으므로 백성들이 음식을 만들때 소금이 없거나 곤궁한 선비가 조상의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일까지 자주 있습니다.

이와 같은 모든 도거리 장사를 금지한다면 그러한폐단이 중지될 것이지만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단지 원성이 자신에게 돌아올까 겁내는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한 지방이 통곡하는 것이 한집안만 통곡하는 것과 어찌 같으랴.’ 하였습니다. 간교한 무리들이 삼삼오오 떼지어남몰래 저주하는 말을 피하고자 도성의 수많은 사람들의 곤궁한 형편을 구제하지않는다면, 나라를 위해 원망을 책임지는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마땅히 평시서(平市署)로 하여금 20, 30년 사이에새로 벌인 영세한 가게 이름을 조사해 내어 모조리 혁파하도록 하고, 형조와 한성부에분부하여 육전 이외에 난전이라 하여 잡아오는 자들에게는 벌을 베풀지 말도록 할뿐만이 아니라 반좌법(反坐法)을 적용하게 하시면, 장사하는 사람들은 서로 매매하는이익이 있을 것이고 백성들도 곤궁한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그 원망은 신이 스스로 감당하겠습니다.”하였다.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모두 옳다고 하여 따랐다...

나. 천주교도의 첫 박해 진산사건

정조 시대에 와서 천주교가 신앙 운동으로 발전했다는것은 앞 글 곳곳에서 여러 차례 밝힌 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 초기 전파과정에서있었던 진산사건, 이른바 신해박해(辛亥迫害) 내용을 왕조실록의 기록을 소개하는것으로 이 단원을 마치고자 한다.

이승훈(李承薰)이 북경 천주 교회당에서 우리 나라최초의 세례 교인이 되어(1783) 돌아온 정조 8년(1784), 서울 명례동(明禮洞 / 현명동)에 있던 역관 김범우의 집에서 사제(司祭)없이 가성직제도를 채택, 이승훈이사제 대행자로서 주일미사와 영세(領洗) 등 천주고 의식을 거행하였는데 이것이 한국천주교의 출발이다.

비밀리에 시작했던 이 교회가 1년이 못되어 정조 9년(1785)관헌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교인들이 잡히고 서적과 성화(聖畵) 등이 압수되었으나,자신의 집을 교회로 제공했던 역관(譯官) 김범우(金範禹)는 벌을 받아 귀양 갔으나,양반 교인들은 모두 석방되었으며, 서적과 성화(聖畵)도 돌려 받았다.

원칙적으로는 천주교를 금지했지만 서학(西學) 혹은천주학이라 해서 정조 자신도 호기심 내지는 학문적 관심이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그러나 정조 15년(1791), 사회지도층이라 할 수 있는 진사(進士)가 조상의 제사를폐지하고 신주(神主)를 불태우는 사태가 발생하자 이를 사학(邪學) 내지는 사교(邪敎)로단정, 탄압을 가하였는데 이를 진산 사건 혹은 신해(辛亥)박해(迫害)라 한다.

이 사건의 두 주인공 윤지충(尹持忠 / 1759 ~ 1791)과권상연(權尙然 / 1751 ~ 1791)은 전라도 진산(珍山 / 현 忠南 錦山) 출신으로 윤지충은다산 정약용의 외사촌 형이고, 권상연의 외사촌 동생이다. 이들 두 사람은 정약용에의해서 천주교에 귀의, 세례를 받고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1791년 두 사람 모두 모친이 사망했을 때, 천주교의식에따라 위패(位牌)를 없애고 제사를 모시지 않았다. 이런 사실이 진산군수 신사원(申史源)에게알려지고, 신사원은 이들을 구금하고 조정에 이를 보고, 그 처분을 기다렸는데, 조정의처분에 따라 이들은 사형을 당했다.

이래서 한국 천주교사에서 첫 순교자(殉敎者)가 발생했는데,조선왕조실록에서는 당시의 내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정조 15년 11월 8일 (기묘) / 윤지충과 권상연을 사형에처하다

호남의 죄수 윤지충과 권상연을 사형에 처하고, 진산군(珍山郡)은5년을 기한으로 현(縣)으로 강등하고, 진산 군수 신사원(申史源)을 그 지방에 유배하도록명하였다. 그리고 경외에 효유하여 집안에 서양 책을 소장한 자는 관청에 자수하게하고, 묘당과 각도(各道)로 하여금 각기 글을 읽고 행실을 닦는 선비들을 천거하도록하였다.

형조가 아뢰기를, “대신에게 문의하니, 좌의정 채제공은의논드리기를 ‘윤지충과 권상연의 흉악하기 그지없는 죄가 소문에 자자하였으나,신은 생각하기를 「일단 사람의 모습을 갖췄으면 똑같은 양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들도사람인데 어찌 그렇게 심한 악행을 저질렀겠는가.」 하면서 나름대로 반신반의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지금 도신의 계문을 보니, 그 부모의 시신을버렸다는 것은 비록 낭설로 전해진 것이라 하더라도 사판(祠版)을 불태워버린 것은모두 자복을 했습니다. 이단 사설(異端邪說)이 남의 자손들을 해침이 예로부터 어찌한량이 있겠습니까마는, 이처럼 지극히 흉악하고 패륜한 일은 인류가 생긴 이래로들어보지 못한 일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극률(極律)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인심을맑게 하고 윤리를 바르게 할 수가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윤지충과 권상연 양적(兩賊)은도신에게 분부하여, 여러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부대시(不待時)로 참형에 처하고5일 동안 효수함으로써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강상(綱常)이 지극히 중요하다는 사실과사학은 절대로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대명률(大明律)의 사무 사술(師巫邪術)을금지하는 조항을 보니 ‘무릇 모든 좌도(左道)로서 정도를 어지럽히는 술수나, 혹도상(圖像)을 숨겨 보관하거나, 향을 피우고 무리를 모아 밤에 모였다가 새벽에 흩어지거나,겉으로 착한 일을 하는 체하면서 민심을 선동하고 미혹시키는 경우, 괴수는 교형(絞刑)에처한다.’ 하였고,

발총(發塚) 조에는 ‘부조(父祖)의 신주를 훼손한자는 시신을 훼손한 법률과 비례한다. 자손이 조부모나 부모의 시신을 훼손하고 버린경우에는 참수하되, 두 죄가 함께 발생한 때에는 무거운 쪽으로 논죄한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윤지충과 권상연 등을 보면 요서(妖書)의사특한 술수를 몰래 서로 전해 익히고, 심지어는 부조(父祖)의 신주를 직접 태워버렸으니,흉악하고 패륜함이 이를 데 없어 사람의 도리가 완전히 끊어졌습니다. 위의 율에따라 시행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임금이) 전교하기를,“호남의 죄수 윤지충과 권상연을사형에 처하도록 이미 옥관의 의견에 따랐는데, 그들의 지극히 흉패함은 매장하지않았다는 한 조항이 낭설이라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불에 태웠건 묻었건 따질 것없이 사당 가운데 있던 신주에 의도적으로 손을 댔으니,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자라면무슨 짓인들 차마 하지 못하겠는가. 사형에 처하는 것만도 오히려 헐한 처분이라고하겠다.

요즘 백성들의 뜻이 나날이 투박해지고 정학(正學)이나날이 황폐해가고 있지만, 그래도 이처럼 윤상(倫常)을 없애는 일이 있을 줄은 생각도못하였다. 어찌 다만 불손(不遜)하고 불친(不親)하다고만 말하겠는가.

무인년(1788) 해서(海西)의 일은 단지 촌 백성과 노파들이무지하고 부끄러움을 몰라서 범한 일이었다. 그런데 권·윤 두 사람은 더욱 천한무리들과는 다르니, 그 떳떳한 이륜(彛倫)의 변고가 마땅히 어떻다 하겠는가. 이것이형조의 문안을 판하(判下)하면서 먼저 정치의 교화가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것을 두려운 마음으로 탄식했던 까닭이다.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人心)을 바로잡는 방도로볼 때 별도로 악을 징계하는 처벌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강상(綱常)에 관계되는데어찌 격식에 구애받을 수 있겠는가.

전라도 진산군은 5년을 기한으로 현으로 강등하여53고을의 제일 끝에 두도록 하라. 그리고 해당 수령이 그 죄를 짓도록 내버려두었는데그가 감히 관청에 있어서 몰랐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가 먼저 적발했다는 것을가지고 용서할 수는 없다.

일전에 대간의 계사에 대해서 역시 일의 결말을 기다려처분하겠다고 비답하였으니, 해당 군수는 먼저 파직하고 이어 해부로 하여금 잡아다가법에 따라 무겁게 처벌토록 하라.

그리고 그 책을 태우라는 요청에 대해서는 이미 형관(刑官)이연석에서 아뢴 말에 따라 불태우도록 하였다. 그러나 어찌 한갓 법이 저절로 시행될이치가 있겠는가. 집에 소장한 자는 관청에 알려 자수하도록 하되 자수한 자는 따지지말고, 오늘 새벽으로 시행하는 시점을 설정토록 하라.

이른바 그 서책이 다시 새벽 이후에 적발되는 경우에는무거운 벌을 시행하되 가장(家長)도 함께 처벌하며 결단코 용서해주지 말도록 하라.이상의 내용을 금석 같은 법전에 기록한 뒤 묘당에서 먼저 오부(五部) 안의 마을에엄히 밝혀 알리도록 하고 외방(外方)에도 똑같이 반포토록 하라.

이제 처리를 이미 엄하게 하여 이른바 사학의 일을모두 결말 지었다. 다시 이러쿵 저러쿵하는 말을 공거(公車)에 올려 번거롭게 응수하게한다면 오히려 아예 일삼지 않는 의리가 못될 것이니, 이렇게 분부하는 것이다.

지난번 대간의 계사와 재상의 차자에 대한 비답에서‘정학을 보위하라.[衛正學]’는 세 글자로 신신당부하며 사설을 물리치는 급선무로삼도록 했었는데, 그 말이 비록 오활하고 먼 듯하지만 실로 의미심장한 것이다.

이제 두 사람을 처형한 뒤에 정학을 부식(扶植)하고천발(闡發)하는 계책을 오활하고 멀다고 하여 소홀히 할 수는 없다. 지난번 초계문신의 대책(對策) 가운데 답안지 하나를 보니 ‘산림에서 자취를 숨기고 있는 사람을먼저 낭잠(郞潛)과 읍리(邑吏)로 시험적으로 써서 바로잡는 방법으로 삼으라.’ 하였는데,매우 조리가 있는 견해여서 이번 일의 조사가 끝나 결말이 난 뒤에는 그 말을 쓰려고하였다. 그러니 현재 진산의 빈 자리에 뽑힌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을 보내도록 전조(銓曹)에분부하라.

또 연석(筵席)에서 근본을 바로잡는 방안을 말할 때,대신이 ‘경전을 학습하고 정주(程朱)를 존중하며 곤궁한 속에서도 꿋꿋이 유속(流俗)에물들지 않은 자를 특별히 뽑아서 진출시키라.’고했는데, 대신의 말이 참으로 좋다.

묘당으로 하여금 책을 읽은 선비들을 뽑아서 아뢰도록하라. 식년시(式年試)가 멀지 않으니, 지금이 그 적기이다. 몸을 신칙하고 행실을닦는 도내의 선비들에 대해서도 역시 묘당으로 하여금 각도의 방백들을 엄히 신칙하여실다운 마음으로 그 명령에 부응하도록 하라.

먼저 낭잠(郞潛)에 시험해도 능히 감당을 하고 다음에지방관으로 시험해도 적합하고 미루어 고문(顧問)의 지위에 올려도 넉넉히 감당할만한 자를 식년마다 원래 천거하는 숫자 이외에 뽑도록 하되 비록 한두 사람이라할지라도 각각 찾아서 반드시 연내에 조정에 보고 하도록 하라.

사서(邪書)를 관청에 보고하는 것은 서울은 20일을기한으로 하고, 각도는 각기 명령이 도착한 날부터 따져 20일 후를 기한으로 하라.”하였다.

탄압하면 탄압할수록 세력이 커지는 것이 종교의 속성이다.이 진산사건 후 1795년에는 중국으로부터 주문모 신부가 들어왔고, 신도수도 기하급수적으로불어났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하고, 어린 순조가 즉위 대왕대비 정순왕후(貞純王后/ 1745 ~ 1805)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시파(時派)는 모조리 축출되고, 이런정치적 이유에서 천주교에 대한 탄압도 대대적으로 가해졌다.

1801년(순조 1) 정월, 정순왕후 김씨는 천주교 금압령을내리고,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 등의 천주교도와 진보적 사상가를 대거 처형 또는유배하고, 주문모를 비롯한 천주교도 약 100명을 처형하고, 약 400명을 유배시켰는데이를 이 신유박해(辛酉迫害)라 한다.

- 다음 호에 계속 -



Natasha Dance(Chris De Burgh)

 


세계는 지금 .................2002년 9월 22일. 일요일
 

 

반갑지 않은 손님 허리케인이멕시코의 유타칸 반도 해안에 거대한 파도를 몰고 오고 있는데..

A local resident walks on thebeach of Puerto Progreso, as Hurricane Isidore approaches
thecoast in Merida, in Mexico's Yucatan Peninsula, September 22, 2002.Powerfully
but slowly, Hurricane Isidore bore down on Mexico'sYucatan Peninsula,
famous for its Mayan ruins and upscale beachresorts,
with lashing rains and huge sea swells
forcingthe evacuation of
15,500 people from coastal fishing villages.
Photo by Henry Romero/Reuters

 



이스라엘 군인들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대통령 집무실의 건물들을
폭파하고, 일체의 접근을 막기 위해 지키고있다......

A soldier looks on as the Israeliarmy continues to destroy buildings in the
compound of PalestinianPresident Yasser Arafat in the West Bank city of Ramallah
September22, 2002.The Israeli army pressed ahead with demolishing what wasleft of
Yasser Arafat's besieged compound after he vowed notto give in to Israel and surrender
wanted Palestinians holedup inside. Photo by Ammar Awad/Reuters

 

 

 

이란 - 이라크 전쟁 22주년을맞은 이란의 의용군은
총부리에 꽃을 달고 혁명의 영묘(?) 앞에서기도적인 노래 합창에 목청을 올리고...

Chanting slogans, Iranian paramilitaryvolunteers march with red flowers in their
gun barrels duringa parade to mark the 22nd anniversary of the Iran-Iraq war (1980-1988)
in front of the mausoleum of the late revolutionary founder AyatollahKhomeini in Tehran,
Sunday, Sept. 22, 2002. (AP Photo/VahidSalemi)

 

 

Click here.....more photo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