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행복, 행복, 하면서 행복하기를 원하는데 도대체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내가 인생 65년을 살아 오면서 가장 행복했던 때는 언제였을까?
내 마음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본다.
지난 세월 꿈만 같은데 그마저 바람에 다 날아가 버리고 빈 하늘만 동그라니 남았다.
그러나 아직도 잊을 수 없는 몇가지 진한 행복이 상처처럼 남아 있다.
내 고향은 광양시 진월면이다. 섬진강 하구쪽이다.
가난한 동네였다.
항상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시골의 6~7월은 더욱 먹을게 귀할 때다.
국민학교 저학년 때 혹 먹을게 없나 하여 나는 친구와 함께 뒷산을 뒤졌다.
한참 헤매던 우리는 너무 기뻐 부둥켜 안고 펄쩍펄쩍 뛰었다.
새빨간 산딸기가 밭처럼 넓게 퍼져 있었다.
우리는 허겁지겁 그 빨간 열매를 배 터지게 먹었다.
나는 지금도 그 강렬한 빨간색을 잊을 수 없다.
나는 광주에 살면서 이런저런 삶에 시달렸다.
피곤해도 쉬지 못하고 밤이 되도 편히 잠 한번 자보지 못한 나날이었다.
어느 때 부산에 친척 결혼식이 있어 참석했다가 오는 길에 고향에 들려 하룻밤 자게 되었다.
어렸을 때 자던 그 방에서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잠을 잤다.
깨어났을 때 나는 놀랐다.
30년만에 처음 잠을 자고 난 기분이었다.
아침의 싱그러운 공기가 온 몸을 감싸고 몸은 날아갈 듯 가볍고 정신은 칼날처럼 또렷했다.
전혀 기억에 없는 새롭고 낯선 내가 거기 환하게 웃고 있엇다.
나는 지금도 아침마다 그러한 낯선 나를 기다린다.
나는 40대 중반까지 남의 집 2층에 세들어 살았다.
부모님 두 분, 딸 둘, 그리고 우리 부부 6명이 함께 살았다.
그러다 집사람이 저질러 집을 샀다.
농성동 삼익 아파트 32평형이었다.
나는 세상에 기적이 일어났다고 감탄했다.
세상의 모든 걱정거리가 다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사오기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분은 한 번도 자기 집에 살아 보지 못하고 돌아 가셨다.
지금은 살 집이 있고, 먹을 것, 입을 것, 다 있어도 아무 재미가 없다.
배고프지 않아도 막 먹어댄다. 그래서 먹는 기쁨을 다 잊어 버렸다.
사는 것이 그저 덤덤하다.
사는기쁨은 다 어디로 갔을까?
배고품을 빼앗는 것은 큰 잘못이다.
가난을 빼앗는 것도 큰 잘못이다.
첫댓글 행복은 찿지 않아도 항상 자기 곁에 있습니다.
연탄 화덕 옆에 석유곤로 하나 더 있는 것도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남편이 세수할 때 그 공간을 넓혀주기 한쪽으로 물러나 있어야 할때 좁다란 부엌에서
밥하고 빨래하고 씻고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신발도 벗어놓고...
그랬던 시절이 제게도 있었습니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나 그립다거나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저는 두 아이들에게 자주 이야기합니다
그런 시절도 있었기에 아빠 엄마는 열심히 생활했고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더 열심히 살아겠다고 다짐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