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오페라의 대가’ 헨델, 권태에 빠진 귀족들을 열광시키다
기사입력 | 2020-02-03 10:22
김학민의 오페라 문화사 - ⑤ 환상과 일탈로서의 오페라
■ 예술 미학
중세 기사문학에 모험·마법 이야기 섞은 다양한 바로크오페라 탄생… 카스트라토 노래대결 일색에 비판 받기도
허무맹랑한 스토리 탓에 200년간 외면당했지만, 20세기 들어 신선한 소재로 여겨지며 부활
오페라는 기본적으로 현실로부터의 일탈과 환상에 대한 인간 욕구를 반영한다. 17∼18세기 유럽에 세워진 화려한 오페라하우스의 모습과 19세기 낭만주의 시절 프랑스에서 유행한 그랑오페라, 게르만 민족의 신화 세계를 재현한 바그너의 무지크드라마는 오페라에서 일탈과 환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확인시켜주는 수만, 수천 가지 역사적 사례 중 일부에 불과하다.
환상의 요소는 바로크 시절 오페라에서도 필수적인 요소였다. 16세기 말∼17세기 초 유럽의 돈 많은 귀족들에게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마드리갈 코미디, 인테르메디 등의 여흥물과 초기 오페라에서 자주 등장했던 그리스로마 신화 속 신과 영웅의 이야기, 그리고 이를 재현하기 위해 동원된 스펙터클들, 가령 구름기구를 타고 하늘을 내려오는 신의 모습, 수백 명 병사의 전쟁 모습 등은 귀족 후원자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며 일상의 권태로움을 잊게 했다.
◇중세 기사문학의 환상 소재=르네상스 시절 이탈리아 시인이던 토르콰토 타소(1544∼1595), 루도비코 아리오스토(1474∼1533) 등이 남긴 중세 기사문학의 소재는 그리스로마 신화만큼이나 바로크 오페라의 인기 레퍼토리였다. 초기 오페라의 대가, 몬테베르디(1567∼1643)가 후기 베네치아 시절에 쓴 오페라 ‘탄크레디와 클로린다의 전투’(1624)는 타소의 기사문학 ‘해방된 예루살렘’(1581)을 토대로 한 전쟁, 사랑, 마법의 환상 드라마로 베네치아 시민들을 열광시켰고, 이후 타소의 같은 소재가 로시(1633·로마), 륄리(1686·파리), 캉프라(1701·파리), 헨델(1711·런던), 비발디(1718·베네치아), 알비노니(1726·베네치아), 좀멜리(1770·나폴리), 살리에리(1771·빈) 등 수많은 작곡가에 의해 바로크 시절 유럽 여러 나라의 주요 도시에서 새로운 작품으로 재탄생됐다.
바로크 오페라의 소재로 타소만큼이나 널리 애용됐던 아리오스토의 기사문학, ‘광란의 오를란도’(1532 출판)는 모험심 많은 기사 오를란도가 이교도 공주 안젤리카를 마녀 알치나로부터 구출해내는 등의 모험과 마법의 이야기로, 초기 오페라 작곡가 카치니의 ‘루지에로의 탈출’(1625·피렌체)에서 시작해 로시(1642·로마), 비발디(1713·1714·1727, 베네치아 삼부작), 헨델(1733·1735·1735, 런던 삼부작), 륄리(1685·베르사유), 라무(파리·1760), 하세(1711·밀라노) 등의 오페라를 낳았다.
◇환상 오페라의 대가, 헨델 = 수많은 바로크 오페라 작곡가 중에서 헨델(1685∼1759)은 ‘환상’ 오페라의 진정한 대가였다. 런던 귀족들을 대상으로 한 이탈리아 오페라의 인기몰이는 26세 젊은 나이로 런던을 처음 방문한 헨델이 선보였던 오페라 ‘리날도’(1711)의 성공을 계기로 시작됐다. 앞에서 소개한 타소의 중세 기사문학, ‘해방된 예루살렘’이 담고 있는 흥미진진한 전쟁과 모험, 사랑 이야기는 런던의 부유한 중산층 시민들의 일탈 욕구를 충족시켰다. 런던 시민들은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리날도 장군이 이슬람 마술사 아르미다에 의해 마법의 성에 갇힌 알미레나 공주를 구출해내는 일련의 과정과 바다의 요정 사이렌들의 유혹 장면, 영화 ‘파리넬리’에 나와 유명해진 공주의 아리아 ‘울게 하소서’에 탄복해 박수를 쳤다.
‘리날도’의 인기로 런던에 정착하게 된 헨델은 ‘테세오’(1713), ‘가울라의 아마디지’(1715) 등 영웅의 모험담과 마법사가 나오는 환상 소재 오페라를 연이어 발표해 인기를 독차지했다. 하지만, 정작 귀족들과 조지 왕의 후원으로 큰 권력을 누리던 왕립음악아카데미 시절(1720∼1734)에는 역사·정치 소재 및 도덕적 주제로 된 오페라를 주로 썼기 때문에, 앞선 시기의 마법·신화·스펙터클은 거의 없어졌다. 숫자가 적긴 하지만, 유럽 대륙에서 오페라 세리아 개혁의 핵심 주창자 역할을 맡던 제노와 메타스타시오의 대본들도 이 시기에 헨델 오페라로 태어났다(제노 대본 - 파라몬드 1738, 알레산드로 세베로 1738; 메타스타시오 대본 - 시로에 1728, 포로 1731, 에지오 1732). 이 시기에 쓰인 오늘날 헨델 최고 인기 오페라, ‘줄리오 체사레’(1724)에는 역사·정치 소재 오페라를 통해 왕과 귀족 후원자들의 관심을 충족시켜야 했던 헨델의 사연이 녹아들어 있다.
묘하게도 헨델 오페라의 정점은 그가 작곡가·흥행주로서의 생명에 최고의 위기를 맞이한 시기에 이루어졌다. 잘나가던 왕립음악아카데미의 폐쇄(1734), 가수·작가를 빼앗기는 등 경쟁오페라단 ‘귀족오페라’의 횡포, 오페라 세리아 인기의 쇠락, 존 게이의 ‘거지 오페라’ 같은 영국 오페라의 돌풍 등으로 큰 곤경에 처한 헨델은 딱딱한 역사·영웅 소재에서 벗어나 런던 청중들이 좋아할 만한 환상 소재로 승부수를 던졌다.
이렇게 해서 탄생된 헨델 최고의 명작인 ‘오를란도 삼부작’(오를란도·1733, 아리오단테·1735, 알치나·1735)은 프랑스 문학의 큰 뿌리인 ‘롱랑의 노래’에 버금가는 이탈리아 중세 기사문학, ‘광란의 오를란도’(루도비코 아리오스토·1532 출판)를 토대로 한 것으로, 기사 오를란도와 이교도 공주 안젤리카, 마녀 알치나 등이 나오는 환상과 모험, 사랑, 전쟁 이야기를 다루어 대중적 흥미를 자아낸다.
◇런던의 ‘콘서트’ 오페라와 이탈리아 가수 영입 = 오페라 청중의 환상에 대한 취미는 바로크 시절, 오페라가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는 여흥 거리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이끌기도 했다. 영국 작가 에드워드 덴트(1876∼1957)가 꼬집었듯이, 바로크 시절 이탈리아 오페라는 ‘무대의상을 입고 나와 노래를 부르는 콘서트’였다(Kivy, 1988, 133). 오늘날 바로크 오페라의 아이콘이 된 헨델의 오페라는 이탈리아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런던 시민들을 위해 공연됐는데, 자막도 없던 시절 이들의 주된 관심은 어떤 가수가 얼마나 노래를 잘하느냐였다.
작곡가로서뿐 아니라 제작자, 흥행사로서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던 헨델은 스타 이탈리아 성악가들을 바로 영입해옴으로써 런던 청중들에게 오페라 세리아의 인기몰이 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당시 유럽 대륙에서 최고의 주가를 날리던 소프라노 프란체스카 쿠조니와 또 다른 소프라노 파우스티나 보르도니를 한 무대의 두 주인공으로 세우는 헨델의 전략은 런던 청중을 매료시켰다. 헨델은 쿠조니를 스타 카스트라토(여자의 고음과 남자의 폐활량을 가진 거세한 남자 가수), 세네시노와 짝으로 세우기도 했다. 헨델의 성공 사례를 지켜본 다른 오페라단들도 경쟁적으로 다른 스타 소프라노와 카스트라토를 이탈리아에서 영입해 무대에 올리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카스트라토로 대변되는 스타 가수들의 폭발적 인기 현상은 콘서트로서 오페라의 한 단면을 드러낸다. 바로크 오페라의 핵심 중 하나인 카스트라토 문화는 오페라를 드라마의 내용과 상관없이 가수의 노래 솜씨 대결의 재미로 감상했던 바로크 청중의 태도를 그대로 보여준다.
카스트라토는 금기와 인기의 이중성을 담은 바로크 시절의 잔인하고도 흥미로운 문화였다. 카스트라토가 된 사연은 형벌, 가족 경제의 몰락, 스타 욕망 등 다양했다. 동성애와 사회의 멸시 대상이 되기도 했으나, 운과 실력이 따를 경우 부와 명성, 그리고 수많은 여자 광팬을 거느린 최고의 슈퍼스타가 될 수 있었다. 영화 ‘파리넬리’에 나오는 카스트라토 가수 ‘파리넬리’의 본명은 카를로 브로스키(1705∼1782)로, 아버지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한 몰락의 위기에서 가족을 살리기 위해 카스트라토가 됐다.
가수들의 배틀과 카스트라토의 인기에서 가늠할 수 있듯이, 이탈리아 오페라(오페라 세리아)는 식자들에 의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당시 런던 최고의 문화적 취향을 가졌던 민감한 예술가들은 헨델이 작곡한 이탈리아 오페라를 은근히 비꼬았는데, 비판의 핵심은 헨델 오페라라기보다는 헨델 오페라가 취했던 오페라 세리아의 기이한 관습에 대한 것이었다.
헨델과 동시대의 영국 작곡가, 찰스 아비슨은 노래의 “첫 부분으로 다시 돌아가 반복하는 악명 높은 불합리성”이라는 이유로 이탈리아 오페라의 다카포 아리아를 비판했고, 스코틀랜드 출신의 시인·철학가, 제임스 비티는 “터무니없이 복잡한 미궁 같은 줄거리”와 “가수 마음대로 한 음표를 잘게 나누는” 레치타티보의 관습을 비판했다. 동시대 영국 시인·평론가, 새뮤얼 존슨은 헨델 오페라를 포함한 이탈리아 오페라를 “이국주의적이고 비합리적인 여흥물”이라 비아냥거렸고, 아일랜드 출신의 동시대 시인·소설가, 조너선 스위프트는 “북방민의 정서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황당한 이탈리아 음악 취미”라 비꼬았다(Schimidgall, 1977, 32-33).
◇바로크 오페라의 부활 = 외국어 가사로 부르는 스타 가수의 노래 배틀과 카스트라토의 잔인한 관습이 말해주는 바로크 오페라의 ‘비합리적 여흥물’의 특성(Kivy, 1988, 133-177)은 신비한 환상의 영역으로 소풍(消風) 가고 싶은 판타지 욕구에 대한 동전의 양면이었다. 그 시절 오페라는 실제 삶의 크기보다 훨씬 더 큰 인물과 더 큰 세상의 판타지를 통해 통치자와 귀족뿐 아니라 부유한 중산층에게 커다란 일탈의 기쁨을 선사했다.
바로크 오페라는 스토리의 허무맹랑함과 스타 가수 의존, 느리고 부자연스러운 전개를 재미없게 느낀 19세기 청중에게는 외면당했으나, 20세기 초중반 이후 새롭게 부각하기 시작했다. 당시 음악학자들과 일부 지적 호기심을 가진 지휘자들은 흔해 빠진 고전, 낭만 오페라에서 벗어난 신선한 소재를 찾았는데, 이들이 찾아낸 것이 바로 바로크 오페라였다.
바로크 오페라의 새로운 부상에는 옥스퍼드대 등 유럽 명문대의 음악학자들과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오스트리아·1929∼), 조르디 사발(스페인·1941∼), 엘리엇 가디너(영국·1943∼) 등의 힘이 지대했다. 이들은 비올라 다 감바, 소르디노, 테오르보 등 사라진 고악기들을 복원하고 연주법을 개발했으며, 카스트라토의 대안(조옮김, 카운터테너, 메조소프라노 등)을 연구해 옛 오페라를 새롭게 재현했다. 200년도 넘는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바로크 오페라는 새로운 레퍼토리에 목말라하는 오페라 마니아들의 입맛을 제대로 충족시켜주고 있다.
경희대 연극영화학과 교수
■ 용어설명
그랑오페라 : 발레 등의 스펙터클이 포함된 19세기 프랑스의 대형 오페라.
무지크드라마 : 음악과 드라마를 총체적으로 어울리게 한 바그너 특유의 오페라.
카스트라토 : 여자가 성가대에서 노래 부를 수 없었던 중세 시절 비잔틴 성가대에서 유래한 거세한 남자 성악가로, 여자의 고음과 남자의 폐활량을 가져 큰 인기를 누림.
헨델 오페라 ‘오를란도’에 나오는 이방인 공주 안젤리카와 메도로의 모습(이탈리아 화가 시모네 페테르차노 그림, 1580년).
타소의 기사문학 ‘해방된 예루살렘’ 중, 기사 리날도와 마술사 아르미다(프랑스 화가 프랑수아 부셰 그림, 1734년).
카스트라토, 파리넬리 초상화(이탈리아 화가 자코포 아미고니 그림, 1752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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