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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독(菜毒)’에 얽힌 사연들
우리들이 어린시절 에는 ‘채독(菜毒)’이라는 질환이 있었다. 사전적 의미의 ‘채독’이란 ‘남새’에 섞여 있는 독기 또는 ‘남새’에 섞여 있는 독기의 중독으로 생기는 병증으로 ‘십이지장충병(十二指腸蟲病)’ 또는 ‘채독증’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채독’은 표준어이기도 하고, 사투리이기도 하다.
위에서 말한 ‘남새’는 심어서 가꾸는 나물로 무·배추·상추·마늘·고추 따위로 동의어로 소채, 야채, 채마, 채소라고도 한다. 그리고 산나물은 ‘멧남새’라고도 하고, ‘남새밭’은 남새를 심는 밭으로 전포(田圃), 채마밭, 채마전, 채소밭, 채전(菜田), 포장(圃場), 포전(圃田)이라고도 한다.
우리 고향 에서는 주로 ‘채전’ 또는 ‘채전밭’이라고 했었다. “야야, 니 채전밭에 가가 상추 쫌 뜯어 오나라(얘야, 너 남새밭에 가서 상추 좀 뜯어 오너라)”라는 용례가 있다.
채전과 남새
‘채독(菜毒)’은 십이지장충(十二指腸蟲)이 십이지장(十二指腸)에 기생함으로써 일어나는 병으로, 주로 빈혈·식욕부진·헛배 부른 느낌 따위의 증세가 나타나는데, 흔히 인분(人糞)을 준 채소를 생식하거나, 인분 또는 인분을 뿌린 밭의 흙이 몸에 닿아서 감염된다. 채소나 밭 흙에 십이지장충의 유충(幼蟲)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십이지장(十二指腸)은 소장 가운데 위의 ‘유문(幽門)’에 이어지는 부분으로 길이 약 30cm이며, C자 모양으로 굽은 장기(臟器)이다.
점액과 소화액(消化液)을 분비하며, 이곳에 수담관·췌관이 개구(開口 ; 입을 벌림)하여 쓸개즙과 이자액이 보내진다. ‘샘창자’라고도 하는데, 십이지장은 손가락 마디 열 두 개의 길이만큼 길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십이지장
여기에서 말하는 ‘유문(幽門)’은 위와 십이지장과의 경계 부분으로 괄약근이 있어 늘 닫혀 있다가 때때로 열려 음식물을 창자로 보내는데, 분문(噴門)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십이지장충(十二指腸蟲)’은 대형동물 선충류 구충과(鉤蟲科)의 기생충으로 몸길이 약 1cm로 몸빛은 젖빛이고, 길쭉한데 약간 굽었다. ‘십이지장충’은 ‘십이지장(十二指腸)’에 기생(寄生)한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십이지장충
십이지장충(十二指腸蟲)은 입이나 피부를 통하여 체내에 들어가는데, 처음에는 사람의 십이지장에서 발견되었으나, 보통 공장(空腸 ; 빈창자)에 기생한다. 십이지장충은 촌충(寸蟲)과도 달라서 구충(驅蟲)을 하는데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십이지장충(十二指腸蟲)을 일부 지방에서는 ‘촌채이’ 또는 ‘촌치이’라고도 한다. ‘촌채이’의 표준어는 ‘촌충(寸蟲)’인데, 당시의 시골사람들은 ‘십이지장충’을 ‘촌충’으로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촌 충
촌충(寸蟲)은 편형동물 촌충류인 기생충의 총칭으로 무수한 마디가 잇닿아 자라고, 자라는 대로 그 마디가 끊어져 번식하며, 대개는 척추동물의 장에 기생하여 체벽(體壁)으로부터 양분을 섭취한다.
인간에게 기생하는 촌충(寸蟲)으로는 갈고리촌충, 민촌충 등이 있다. 촌충은 백충(白蟲), 조충, 촌백충(寸白蟲)이라고도 한다.
촌 충
촌충(寸蟲) 얘기가 나왔으니 촌충을 조금 더 알아본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긴 동물(動物)로 흰 긴수염고래를 지목하고 있으나, 흰 긴수염고래는 가장 거대(巨大)한 동물이지 가장 긴 동물은 아니다.
세상에서 기장 긴 동물은 바로 촌충(寸蟲)이다. 의학계(醫學界)에 보고된 케이스로는 최장 12m까지 자라난 예가 있고, 고래에게서 발견된 촌충은 무려 40m까지 자라난다고 한다. 고래뱃속에 고래보다도 긴 ‘촌충’이 자라고 있는 것이다.
흰 긴수염고래
지금은 인분(人糞)을 비료로 사용하는 농가가 거의 없어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채소(菜蔬) 농사를 비롯한 밭농사에는 거의 인분을 사용하였다. 때문에 당시의 시골에서는 소위 ‘채독(菜毒)’이라고 불리는 십이지장충(十二指腸蟲)의 감염이 많았었다.
필자들이 향리에 거주하던 당시에는 ‘요소’나 ‘유안’ 같은 화학비료(化學肥料)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값이 너무 비싸 선뜻 구입(購入)할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인분으로 키우던 채소
당시에는 비료 공장이 충주비료공장(忠州肥料工場)과 호남비료공장 두 곳 뿐이어서 전국적인 수요(需要)를 충당하기엔 어림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값이 그만큼 비쌌고, 이 때문에 거의 모든 밭작물에는 인분이 유일한 비료이기도 했다.
그 당시엔 화학비료(化學肥料)가 너무 비쌌기 때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상추든 배추든 모든 야채작물(野菜作物)을 인분으로 키울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당시에는 비료가 너무 귀해 돈을 주고도 필요한 양을 구입할 수 없었다.
당시의 요소비료
마을 구장(區長)을 통해 비료(肥料) 구입 신청을 한다 해도 신청량(申請量) 그대로 나오는 법이 없었다. 가령 ‘요소’비료 네 부대를 신청하면 겨우 두 부대가 나오는 식이었다.
때문에 당시의 농민들은 비싼 화학비료(化學肥料) 대신 볏짚을 태운 재를 잿간에다 산처럼 수북하게 모아뒀다가 거름으로 쓰기도 했고, 여름 내내 산에서 풀을 베어다가 발효(醱酵)시킨 퇴비를 거름으로 사용하곤 했었다.
인분(人糞)을 퍼서 ‘똥지게’나 ‘똥장군’으로 져다가 거름 대신 뿌리는 일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호박이나 배추, 무 등 밭작물에는 분뇨(糞尿)보다 확실하게 거름발이 나는 것도 없었다.
‘똥장군’으로 인분을 나르는 할아버지
그러나 인분(人糞)은 냄새 때문에 져 나르기도 여간 고역(苦役)스러운 일이 아니었지만, 밭에 뿌린 후에도 문제가 많았다.
인분(人糞)이 채 삭아 내리지 않은 밭에서 맨손으로 밭을 매거나, 새참거리로 무나 배추를 뽑아 먹다가 재수 없이 ‘채독(菜毒)’에라도 걸리는 날엔 두고두고 고생거리였다.
때문에 인분(人糞)을 뿌린 밭에서 나는 채소(菜蔬)는 반드시 씻어 먹어야 하고, 그런 밭에서 나는 열무나 배추로는 ‘생절이(겉절이)’를 해먹어서는 안 된다.
인분으로 키운 무
그러나 이런 감염경로(感染經路)를 알지 못하고, 위생관념조차 희박했던 지난 세기의 농촌에서는 인분(人糞)을 뒤집어 씌워 키운 무 배추로 쌈을 싸먹고, 열무김치를 만들어 먹었다.
아이들도 하학(下學) 길에 출출하면 ‘무서리’를 해 먹었고, 처녀총각들도 마실 다니면서 ‘무 서리’를 해서 먹곤 했었다. 이때는 흙이 묻은 무의 껍질을 입으로 벗겨 먹는데, 흙이 입술에 묻기도 한다. 십이지장충의 알이나 유충(幼蟲)이 입속으로 들어가기 십상이었다.
그냥 뽑아서 이빨로 껍질 벗겨 깨물어 먹던 무밭과 무
이 뿐이 아니었다. 커다란 옹기 ‘독’ 하나만 추녀 밑 땅을 파고 묻으면 변소(便所)가 되었던 당시의 시골에서는 ‘똥독(항아리)’에 빠지는 경우도 자주 있었고, 이로 인해 ‘똥독(毒)’에 걸리기도 했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똥독’은 ‘채독’을 말한다.
주의력(注意力)이 부족한 어린이들의 경우가 그랬고, 남의 집 손님으로 갔다가 재래식(在來式) 화장실에서 발을 헛디뎌 낭패(狼狽)를 당하는 수도 가끔 있었다.
남의 집에 가면 우선 변소(便所)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 제대로 알 수도 없었고, 전깃불도 없어 밤이면 칠흑같이 어두워 ‘똥독(항아리)’의 위치나 모양을 정확(正確)하게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화장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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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독’ 얘기를 하다 보니 초등학교(初等學校) 6학년 때 가을에 일어난 이웃집 꼬맹이 얘기가 생각난다. 학교(學校)에서부터 오줌을 참고 온 꼬맹이는 책보를 방안에 던지자마자 ‘정랑(변소)’으로 달음질쳤다.
그러나 잽싸게 뛰어 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만 꼬맹이는 높이가 자기 키보다 조금 더 큰 ‘똥독(항아리)’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엄마! 엄마!” 꼬맹이는 목이 터져라 엄마를 불러댔고, 마침 우물가에서 열무를 씻고 있던 꼬맹이엄마는 꼬맹이가 ‘똥독’에 빠진 것을 알고 질겁을 하면서 뛰어갔다. 마당구석에서 콩깍지를 손질하시던 할머니도 지팡이를 짚고 함께 뛰어 오셨다.
당시의 ‘정랑’
허겁지겁 달려오신 엄마는 꼬맹이를 독에서 건져냈다. 다행히 ‘똥독(똥항아리)’이 반쯤밖에 차지 않아 큰 사고는 없었다. 쌀쌀한 가을 날씨에 꼬맹이는 인분(人糞)투성이 옷을 입은 채로 우물가에서 얼음 같은 찬물을 10여분이나 두레박 채로 뒤집어 써야 했다.
발을 동동 구르는 꼬맹이 엄마는 연신 물을 퍼 올리고, 할머니는 물바가지를 계속 끼얹으면서 “큰일 났다. ‘똥독(毒)’ 오르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하시며, 안절부절하신다.
우물가 목욕
‘똥독(毒)’이 무엇인지 모르는 꼬맹이는 겁에 질려 온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울어댔다. 할머니가 말씀하신 ‘똥독’은 ‘채독(菜毒)’의 전 단계인 피부염증(皮膚炎症)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마지막 단계인 ‘채독증(菜毒症)’을 말씀하신 것이다.
할머니의 손에 의해 꼬맹이는 몇 번이고 비누칠을 한 뒤에야 방으로 들어와 이불을 뒤집어썼다. 지금 같으면 더운물 쓰는 일이야 일도 아니지만, 그 때만 해도 아궁이에 불을 지펴야 더운물을 쓸 수가 있었던 시절이라 찬물을 뒤집어 쓴 꼬맹이는 이불 속에서 덜덜덜 떨었다. 물을 덥힐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멀쩡한 아가씨들도 ‘칙간’에 빠져 곤욕(困辱)을 치르기도 했었다. 소변을 너무 오래 참고 있다가 부리나케 뛰어가서 변기(便器 ; 그냥 구덩이와 구멍에 불과하지만)에 쪼그리고 앉으려다 좁은 버팀목이 뒤집어지기 때문이다.
칙간에 빠진 아가씨
어쨌든 그 날 저녁, 할머니는 ‘똥독’에 빠지면 ‘똥독(毒)’이 오르지 말라고 떡을 하는 거라며 떡을 만드셨고, 이웃집에까지 떡을 돌리셨다. 이 떡을 ‘똥떡’이라고 하는데, ‘똥떡’은 가급적(可及的) 많은 이웃에게 조금씩 돌리는 것이 관례였다.
그리고 할머니께서 ‘똥떡’을 돌린 덕분에 온 동네에 꼬맹이가 ‘똥독’에 빠진 것이 소문(所聞)으로 날아 다녔다. 할머니께서 동네방네 ‘똥떡’을 돌리셨기 때문이다.
똥 떡
그러나 할머니께서 그렇게 ‘똥떡’을 돌린 덕분인지 꼬맹이는 ‘똥독(毒)’에 걸리지 않았다. ‘채독벌레’가 피부(皮膚)를 뚫고 들어가기 전에 재빨리 온몸을 씻어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얘기가 나온 김에 ‘똥떡’ 얘기를 조급 더 보탠다. 옛날에는 화장실(化粧室)을 ‘측간’ 또는 ‘뒷간’이라 불렀는데, 예나 지금이나 재래식 화장실은 무서운 존재로 어린아이들에게는 위험(危險)한 곳이었다.
재래식 측간에서 용변을 보는 어린이
전에는 아이들이 뒷간에서 일을 보다 발을 헛디디거나 잘못해 인분(人糞) 구덩이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옛날 사람들은 뒷간에 빠지면 며칠 안에 죽거나, 재액(災厄)을 얻게 된다고 믿었는데 아이가 뒷간에 빠지는 것은 뒷간귀신을 화나게 했기 때문에 귀신(鬼神)이 심통을 부린 것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뒷간귀신의 화(禍)를 진정시켜야만 아이가 탈 없이 잘 자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뒷간에 빠진 아이의 부모들은 뒷간귀신이 좋아한다는 ‘똥떡’을 만들었다.
측간에 빠진 아이
이것은 쌀가루로 송편 크기만 한 떡 100여 개를 만들어 뒷간 앞에 놓고, ‘뒷간귀신’을 달래어 아이가 아무 탈 없이 오래 살기를 기원(祈願)한 후 그 떡을 아이의 나이 수만큼 먹였다.
그리고 나머지 ‘똥떡’은 소쿠리에 담아 이웃에게 골고루 나누어 먹여 액운(厄運)을 면하게 하였다. 또한 뒷간에 빠졌던 아이는 온 동네를 다니며 “똥떡! 똥떡!”이라 외치고 다니면서 액땜을 했다.
똥떡 만들기
‘똥떡’은 똥통에 빠진 아이의 무병장수(無病長壽)를 기원하고 또 먹을 것이 풍족(豊足)하지 못하던 시대에 이웃에게 ‘액막이떡’을 만들어 돌림으로써 주린 배를 채워 주던 복(福)떡 이었다.
지금은 시골에서도 재래식(在來式) 화장실을 찾아보기 쉽지 않은데 지저분하고 냄새도 많이 나는 뒷간이었지만, ‘똥떡’과 같이 우리에게 재미있는 추억(追憶)과 이야기를 안겨 주었다.
똥떡 나누어 주기
여기에서 잠시 채독(菜毒)에 걸린 고모(姑母)와 민중(民衆)의 실체를 풀어 쓴 어느 무명시인(無名詩人)의 ‘재 너머 고모’를 잠시 음미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당시에는 어른들도 가끔 ‘똥물’을 뒤집어쓰는 경우가 있었다. ‘똥통’에 인분(人糞)을 퍼 담아 똥지게나 똥장군으로 밭에 내다가 ‘똥통’이 일그러져 바지를 걷어 올리고, 양말도 신지 않은 종아리와 발등이 온통 똥물투성이가 되는 경우이다.
그리고 무지게(물지게)나 똥지게를 져본지 얼마 되지 않아 중심과 균형을 잡지 못해 인분(人糞)이 통에서 넘치게 되면, 발등이 똥물투성이가 되기도 한다.
여기에다 드문 일이기는 하나, ‘똥지게’를 지고 도랑을 건너뛰다가 뒤로 넘어지거나, ‘똥통’이 일그러질 때는 온 몸에 ‘똥물’을 뒤집어쓰기도 한다.
똥지게질
(플라스틱 똥통이 개발되었을 때)
필자도 이런 경험(經驗)을 여러 번 겪은 일이 있다. ‘똥통’이 일그러지는 경우는 오랫동안 ‘똥통’을 쓰지 않을 경우 ‘똥통’의 나무 조각들이 수축(收縮)되어 힘을 받지 못하는데다 통에 가득 담은 인분(人糞)의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밑바닥이 빠지면서 통 전체가 순식간에 분해(分解)되는 경우이다.
여름이나 봄가을이면 가까운 논이나 개울에 뛰어들어 씻고 닦을 수도 있지만, 온통 얼어붙은 겨울 보리밭에 인분(人糞)을 내다가 이 난리를 당하면, 부리나케 집으로 뛰어 와 마구간에서 얼음 같은 우물물로 대충 행구고, 가마솥에 물을 덥혀 씻어 내는 수밖에 없었다.
똥장군 지게(1945년)
이런 경우 시간을 지체하게 되면 ‘똥독(毒)’ 즉, ‘채독(菜毒)’에 걸리게 된다. ‘채독’에 걸리는 경우는 주로 이런 경우와 인분(人糞)을 사용한 채소밭이나 보리밭을 맨발과 맨손으로 맬 때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똥독(항아리)’에서 똥의 김을 쐬거나 더운 똥을 밟았을 때도 제때에 씻어내지 않으면, 그 부분이 가렵고 오돌오돌하게 부르터 터지는 현상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똥독(毒)’ 즉, ‘채독’이다. 십이지장충(十二指腸蟲)의 유충이 피부를 뚫고 몸속으로 들어간 자국이다.
측 간
필자들이 향리에 거주할 때는 장갑이나 장화(長靴) 등과 같은 보호장구(保護裝具)도 없던 시절이라 논에서든 밭에서든 언제나 맨발과 맨손으로 일을 했다.
때문에 인분(人糞)을 사용한 밭에서 맨손과 맨발로 밭을 매면 ‘똥독(毒)’에 오를 가능성은 그만큼 높아진다. 인분(人糞)에 섞여 나온 구충(鉤蟲)이 흙 속에서 감염유충(感染幼蟲)으로 잠복해 있다가 사람이 그 흙을 밟거나, 만지면 피부를 뚫고 몸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보리밭 매기
(이들은 장갑을 끼었다)
70여 년 전 밭농사를 많이 짓는 산골로 시집가신 필자의 고모님은 이 ‘똥독(毒)’ 때문에 이십여 년을 넘게 고생을 하셨다. 사람의 똥이 귀한 거름으로 쓰이던 시대의 슬픈 사연(事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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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의에 의해 똥물을 뒤집어썼을 때도 바로 몸을 씻지 않으면 ‘채독’에 걸릴 수 있다. 회원님들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제6대 국회 당시인 1966년 9월 22일 작고한 김두한(金斗漢) 의원은 국회에서 ‘사카린밀수사건’이 논란중일 때 국무위원에게 ‘똥물’을 뒤집어씌운 일이 있었다.
국무위원들에게 똥물을 뒤집어 씌우는 김두한 전 의원
이때 ‘똥물’을 뒤집어 쓴 이들은 국무위원석(國務委員席)에 앉아 있던 정일권 국무총리(國務總理), 장기영 부총리 등 수 명의 각료(閣僚)들이었다. 물론 이들은 잽싸게 목욕을 하는 등 ‘채독벌레’가 몸 안에 침입하기 전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여 ‘채독’에 걸렸다는 얘기는 없었다.
어쨌든 이른바 ‘국회오물투척사건’으로 불리던 이때의 사건은 삼성그룹의 한국비료주식회사(韓國肥料株式會社)가 사카린을 밀수한 일로 국회(國會)에서 논란이 되고 있던 시기에 김두한 의원이 대정부 질문 중 미리 준비한 인분을 국무위원(國務委員)들에게 투척한 사건이다.
울산 한국비료공장
당시 한국비료주식회사의 ‘사카린 밀수사건’은 국내 굴지의 재벌인 삼성 재벌(三星財閥)의 한국비료주식회사가 건설자재를 가장해서 ‘사카린’을 밀수(密輸)했다는 것이 1966년 9월 15일 경향신문(京鄕新聞)을 통해 폭로되면서 언론계와 정치계(政治界)에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사건 당일 이병철 한국비료 사장(삼성그룹회장)은 ‘사카린 밀수사건’과 관련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獻納)하고 언론 및 학원사업에서 손 뗄 것을 선언하였다.
이병철 회장
그 후 이병철 사장은 헌납교섭을 맡았던 장기영 부총리(副總理)가 해임되자 개각(改閣) 1주일 만인 1967년 10월 11일 한국비료 주식(柱式)의 51%를 국가에 헌납(獻納)했었다.
김두한(金斗漢) 의원의 얘기가 나왔으니 그의 인생역정의 한 부분을 조금 더 알아본다. 김두한 전 의원은 1954년 서울 종로을(鐘路乙) 선거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제3대 민의원(民議院)에 당선되었고, 1965년에도 제6대 국회의원 보궐선거(補闕選擧)에서 당선되는 등 정치사에도 특이한 행적을 남겼다.
제6대 국회 당시 김두한 전 국회의원
그는 또 용산구(龍山區)의 보궐선거로 제6대 국회에 등원하자마자 한독당 내란음모사건(內亂陰謀事件)과 관련되어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으나, 야당은 물론 여당인 민주공화당(民主共和黨) 소속의 국회의원까지 석방결의안에 106표의 찬성표를 던져 석방되었으나, 외물투척사건 이후 국회에서 제명되어 다시 형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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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으로 돌아간다. ‘채독(菜毒)’이란 ‘똥독(毒)’이 오른 뒤의 질병현상으로 인분(人糞)에 섞여있던 십이지장충(十二指腸蟲)의 유충이 피부를 통해 사람의 소장(小腸) 위쪽 십이지장에 붙어 있으면서 피를 빨아 먹어 빈혈(貧血)을 비롯한 여러 가지 소화기증상을 일으키는 기생충병이다.
개의 십이지장충
대변과 함께 밖으로 나온 십이지장충(十二指腸蟲)의 알은 적당한 온도와 습도(濕度)가 보장되면, 자라서 3~5일 만에 감염성(感染性)을 가지는 제3기 새끼벌레로 자라 입 또는 피부를 통해 사람 몸 안으로 들어간다.
제3기 새끼벌레가 몸 안에 들어와서 한 달 정도 지나면, 십이지장충(十二指腸蟲)의 기본증상들이 나타난다. 소화기증상(消化器症狀)으로서의 ‘채독’은 옮아서 40일~3개월 정도 지난 이후에 그 증상이 나타난다. 메스꺼움, 설사(泄瀉) 또는 변비가 생기며 입맛이 떨어지고 윗배가 자주 아프다.
전신증상으로는 빈혈(貧血)이 생기면서 온몸이 나른하고, 숨이 차고, 가슴이 활랑거리는 증상이 생긴다. 어린이들은 잘 자라지 못하고 지능발달(知能發達)이 떨어진다.
채독증 환자
진단(診斷)은 대변에서 십이지장충란(十二指腸蟲卵)이 검출된 것으로 확증되지만, 옛적에 필자들이 채독(菜毒)에 걸렸을 때는 손톱모양을 보고 가늠하기도 했었다.
빈혈(貧血)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 때였고, 메스꺼운 것이나, 설사와 변비가 생기고 가슴이 활랑거리는 것은 매일 같이 달고 사는 증상(症狀)들이라 병으로 취급하지도 않았을 때였다. 그리고 그들 증상들이 ‘채독(菜毒)’의 증상이라는 것도 전혀 모를 때였다.
채독환자의 손톱
‘채독(菜毒)’에 걸리면 우선 손톱의 앞쪽과 좌우는 그대로 있고, 볼록한 가운데 부분이 반대로 오목하게 내려앉으면서 손톱이 새로로 갈라진다. 그리고 어느 정도 진행되면 손톱 안쪽에 있던 반달 같은 흰 부분이 사라진다.
결론적으로 ‘똥독(毒)’은 똥에 섞인 십이지장충(十二指腸蟲)의 유충이 사람의 피부(皮膚)로 침투하면서 일으키는 피부병의 일종이고, ‘채독(菜毒)’은 그 유충이 십이지장에 침투(浸透)하여 피를 빨아먹는 질병이다.
‘채독증(菜毒症)’은 기생충병 또는 약채병(若菜病)이라고도 하는데, 기생종(寄生種)은 주로 십이지장충(채독벌레)과 아메리카 구충(鉤蟲)이다.
‘채독증’은 그 원인 기생종의 이름을 따서 ‘십이지장충병’ 또는 ‘구충증(鉤蟲症)’이라고도 한다. 원래 ‘채독증’은 채소를 날것으로 먹어서 생기는 원인 불분명의 증상(症狀)들이라는 뜻으로 통용되었으나, 지금은 이 증후군(症候群)이 일부 구충의 기생에 의한 것임이 밝혀짐으로써 기생충병의 하나로 정의하고 있다.
채독벌레가 기생하는 배추
‘채독증’은 개와 고양이 등에서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십이지장충·아메리카구충 등은 세계 각지에 널리 분포하며, 모충(毛蟲)의 체내에서 형성된 수정란(受精卵)은 난할(卵割) 단계의 상태로 대변에 섞여 인체 밖으로 배출된다.
이어서 수정란이 부화(孵化)되어 나온 유충은 흙 속에서 살다가 경구적·경피적으로 인체에 침입하여 소장에 기생하다가 체순환·폐순환 경로를 거치는 동안에 성충(成蟲)이 되어 십이지장에 정착·기생한다.
구체적으로 십이지장충은 주로 경구적(經口的)으로 인체에 침입(侵入)하고, 아메리카구충은 경피적(經皮的)으로 인체에 침입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 구충(鉤蟲)은 각각 독특한 치아와 치판(齒板)으로 십이지장의 점막에 교착하여 흡혈하며 사는데, 흡혈량(吸血量)은 하루에 십이지장충은 약 0.2㎖를, 아메리카구충은 약 0.07㎖ 정도이다.
‘채독증’의 기생종(寄生種)으로는 이들 십이지장충과 아메리카 구충 외에도 열대지방의 스리랑카(실론)구충, 말레이시아구충, 브라질구충 등이 있다.
‘채독증’의 진단은 부유법·배양법에 의한 검변(檢便) 방식이 있는데, 특히 배양법은 기생종의 판정이 가능하다. 또한 치료법은 원인요법으로서 사염화에틸렌·브롬나프톨·베페늄제 등의 구충제가 쓰이며, 빈혈 치료에는 철제(鐵劑)가 쓰인다.
여기에서는 ‘채독증’을 일으키는 십이지장충의 체내 감염경로(感染經路)와 증세, 그리고 일반적인 치료법과 예방법(豫防法)을 앞서 소개한 것과는 다른 측면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채독의 원충(原蟲)인 십이지장충은 주로 소장(小腸) 위쪽 십이지장에 붙어산다. 어미 벌레가 낳은 알은 대변과 함께 재래식(在來式) 화장실 인분(人糞)통으로 나와 있다가 농부가 그 인분을 밭에 뿌리면, 그 밭에서 적당한 온도(溫度)와 습도하에서 자라 필라리아 모양의 새끼벌레로 자란다.
맨발 농부
이 벌레가 밭일을 하는 농부(農夫)나 그 밭에서 노는 아이들의 발이나 살에 붙으면 살을 뚫고 들어오거나, 혹은 채소(菜蔬)에 붙어 있다가 입을 통하여 사람의 몸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몸속으로 들어오게 되면 폐장(肺腸)으로 가서 일정한 기간을 자라다가 다시 소장(小腸)으로 와서 감염 후 5주일이면 큰 벌레가 되어 기생(寄生)하게 된다.
특히 농촌(農村)에서는 첫여름에 다 자라지 않은 채소를 ‘생절이’해서 먹는 수가 많은데, 이때에 ‘채독’벌레가 몸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때문에 이때의 채소는 반드시 익혀 먹거나 잘 씻어 먹도록 해야 한다. ‘생절이’는 ‘겉절이’를 말한다.
생절이
다음은 ‘채독’의 증세를 알아본다. 십이지장충(十二指腸蟲)의 세끼 벌레가 살을 뚫고 들어가게 되면 그 부분이 가렵고 잠시 피부염(皮膚炎)이 생긴다. 그리고 이 벌레가 입으로 들어가게 되면 구역질이나 구토(嘔吐)가 생기며, 기침이 나고 숨이 가빠진다.
병이 생기게 되면, 빈혈(貧血)이 되고 소화가 잘 안되어 숨이 가빠져 고개나 계단(階段)을 오르기가 어려워진다. 그리고 어린이에게 ‘채독’벌레가 들어가 병이 되면 지능과 신체발육(身體發育)이 잘 안된다.
밭에 인분 뿌리기
다음은 일반적(一般的)인 치료방법을 알아본다. 약을 먹기 전날은 되도록 경한 식사를 하고 ‘솔스(硫麻)’를 약10g 정도 복용하여 장(腸)을 비게 한 후 다음날 아침 사염화 에칠렌 2.0~4.0g을 30분 간격으로 두 번에 나누어 복용(服用)하고 2시간 후 ‘솔스’ 20g을 많은 물과 함께 복용한다.
이 약을 먹었을 때는 기름진 것이나 알콜(술) 등을 마시지 않아야 한다. 이 외에도 사염화탄소(四鹽化炭素), 워밍네마톨 등 여러가지가 있다.
똥지게
다음은 ‘채독(菜毒)’을 예방하는 방법이다. ‘채독증(菜毒症)’에 걸리지 않으려면, 우선 채소를 충분히 씻거나, 약물로 씻어서 안전하게 먹어야 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채소는 ‘생절이’해서 먹지 말고 김치를 담은 지 적어도 2주일 후에 먹는 것이 좋다.
그리고 지금은 채소재배에 인분(人糞)을 거의 쓰지 않고 있기는 하나, 농촌에서 혹시 인분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인분 속에 있는 십이지장충(十二指腸蟲) 벌레의 알이 죽은 다음에 비료(肥料)로 써야한다.
익은 김치
밭에 인분(人糞)구덩이를 파고 2주일 쯤 담아 두면, 채독벌레의 알이 죽게 된다. 그리고 농촌에서는 농부(農夫)들이 아침 일찍 들에 나가서 일하는 것이 보통인데, 특히 채소밭에는 아침 이슬이 마르기 전에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
채소(菜蔬) 잎에 붙어 있는 채독벌레의 유충(幼蟲)이 떨어지는 이슬과 함께 발등이나 다리, 손과 팔에 그만큼 쉽게 옮겨 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옛적 우리들의 조상들은 어혈(瘀血)이 들었을 때 인분(人糞)을 마시기도 했었다. 관아(官衙)에 끌려가 장(杖)을 맞았을 때도 그랬고, 왜놈순사들에게 잡혀가서나, 6.25때 악질(惡質) 경찰관들에게 끌려가서 전기고문이나 뭇매를 맞았을 때도 그랬다.
그리고 높은 나무에서나 지붕에서 일하다 떨어져 온 몸이 퍼렇게 멍이든 경우에도 인분(人糞)을 마시면서 응급처치(應急處置)를 했었다. 돈도, 병원(病院)도, 약방도 없는 시골에서는 인분을 마시는 치료방법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랑(화장실 항아리)에서 위쪽에 있는 숙성(熟成)되지 않은 인분(人糞)을 한쪽으로 밀어내고, 묵은 ‘똥물’을 퍼먹는 것이었다. 이때는 ‘똥물’을 그냥 먹기 어려워 술과 함께 억지로 마셨다. ‘채독(菜毒)’의 원충인 십이지장충의 알까지 함께 마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인분(人糞)을 마시고나면, 신기하게도 몸이 금방 회복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똥물’이고 술이냐고 하겠지만, 똥물은 인간의 담즙이 많이 모인 것이니 그 만큼 혈분의 해독력(解毒力)이 강하고, 술 또한 혈액순환(血液循環)을 증진시키니 역시 말초에 담즙을 빨리 보내는 데에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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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에는 또 판소리 명창(名唱)들도 인분(人糞)을 마셨다. 아시는 바와 같이 노래 한 구절에도 혼을 담았던 우리 판소리 명창(名唱)들에게는 종종 전설과도 같은 일화(逸話)들이 따라다닌다.
‘득음(得音)’을 할 때까지 산 속에 들어가서 십 년을 수련(修鍊)했다든가, 소리가 십 리 밖에서도 들렸다든가, 귀신(鬼神)에게서 소리를 배웠다든가 하는 얘기들이다.
판소리 명창
그런데 이런 일화(逸話)들 중에는 그다지 명예롭지 못한 이야기도 섞여있다. 바로 소리를 내기 위해 판소리 명창(名唱)들이 ‘똥물’을 마셨다는 것이다. 아무리 소리를 위해서라지만, 정말 명창들이 ‘똥물’까지 마셨을까.
실제(實際)로 수많은 판소리 명창들이 ‘똥물’을 마신 경험이 있다고 한다. 판소리는 소리를 내는 방법이 다른 음악(音樂)과 다르다. 소리를 연마(硏磨)하기 위해 너무 무리하면 열이 나고 온몸이 퉁퉁 붓기도 한다.
뱃속 깊은 곳에서 소리를 끌어내려고 기를 쓰다 보면 몸이 아플 수밖에 없었고, 의학(醫學)이 발달하지 않은 옛적에는 열과 붓기를 없애기 위해 인분(人糞)을 마시는 민간요법(民間療法)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어혈(瘀血)이 들고 심한 타박상(打撲傷)을 입은 이들이 인분을 마시고, 거뜬하게 회복(回復)되는 것을 보아온 터라 혹시나 해서 마시기 시작한 것이 전래(傳來)된 것이다.
타박상
그러나 아무리 약이 된다고 해도 비위상 ‘똥물’을 그냥 마실 수는 없었다. 별도의 여과(濾過) 과정을 거친 추출액(抽出液)을 마셨다. 그 방식을 알아본다.
먼저 대나무 통이나 병의 주둥이를 솔잎이나 지푸라기로 막고 돌에 매달아 ‘똥통’에 담가 둔다. 그러면 빈 통 속에 맑은 물이 고이는데 그것을 삼베로 걸러서 마시면, 정말 열이 내리고 붓기가 빠졌다고 한다.
약용 인분
그러면 그 맛은 과연 어떠했을까. 마셔본 이들의 말에 따르면 신맛, 짠맛, 쓴맛, 단맛, 매운맛 등 다섯 가지 맛이 고루 느껴지는 오묘(奧妙)한 맛이란다. 그 맛이 역겹긴 해도 다시 목으로 넘어오는 일은 절대 없다고 한다.
명창(名唱)이 되기 위해 ‘똥물’까지 마셔가며 소리를 냈다니, 얼핏 우습게 들릴지 몰라도 득음(得音)을 향한 소리꾼들의 집념(執念)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것을 바친 소리꾼의 삶 속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소리가 태어났다.
최근에는 가수(歌手) 조관우가 국악인(國樂人) 아버지 조통달이 과거 소리를 내기 위해 인분(人糞)을 마셨던 사연을 고백해 화제가 된 일이 있기도 했다.
조통달 명창
역시 인분(人糞)을 그냥 퍼서 마신 것은 아니고, 깨끗한 액체(液體)를 골라 병에 담아두고, 마셨다고 한다. 그래도 인분(人糞)은 인분이었다.
이후 몰래 온 손님으로 깜짝 출연한 조통달은 인분(人糞)을 먹은 이유에 대해 “인분이 냄새나고, 더러운 것이지만, 옛날 민간요법에는 특효약(特效藥)으로 썼다”며 “소리를 많이 하게 되면 골병이 들기 마련인데, 인분(人糞)을 먹으면 치료가 된다고 믿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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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에는 또 골절(骨折)이나, 어혈이 들면 인분(人糞)으로 술을 만들어 약으로 마시곤 했었다. ‘인분’을 베자루에 넣어 막걸리나 소주에 만 하루 동안(24시간) 담가 두었다가 자루를 건져낸 뒤 인분(人糞)이 우러나온 술을 마시는데 아주 취하도록 마신다.
배합비율(配合比率)은 막걸리 한 되에 한번 본 인분(人糞)의 양을 넣는다고 한다. 이때 생마늘을 하나 씹어 먹은 뒤에 마시면, 비위가 덜 상한다고 했다. 세 번만 만들어 마시게 되면 골절(骨折), 어혈(瘀血), 타박상 치료에 뛰어난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인분주
‘인분(人糞)’은 10세 이하의 어린이 것으로 특히 병 없고 건강한 어린이 것을 사용해야 한다. 허리를 다쳐 꼼짝 못할 때는 ‘인분술’에다 생지황(生地黃) 한 근을 짓찧어 넣어서 사흘 후에 건더기는 건져버리고 술만 마신다. 취하도록 마시면서 네다섯 번만 만들어 마시면 완전히 일어서서 걸어 다닐 수 있다고도 했었다.
그 시절에는 ‘인분술’만 아니라 ‘개똥술’과 ‘닭똥술’도 약으로 만들어 마셨다. 물론 병원(病院)에도, 약방에도 갈 형편이 못되는 영세서민(零細庶民)들의 경우를 말한다.
개똥술
‘개똥술’은 말린 개똥을 불에 볶아 베자루에 담아 막걸리에 담가 하루가 지난 후에 마시는데, 주로 어혈(瘀血)이나 타박상(打撲傷)으로 꼼짝 못할 때 마신다.
환자(患者)가 아닌 사람은 먹지 못하며, 2~3일간 먹어보아 효과(效果)가 없으면 중단한다. 막걸리는 재료(材料 ; 개똥)의 2~3배 정도 잡으면 된다.
그리고 ‘닭똥술’은 닭똥의 흰 부분을 불에 볶아 자루에 담아 재료량(材料量)의 2~3배 정도의 독한 술을 붓고 밀봉(密封)하여 1개월 후에 마신다. 전신이 붓는 증세(부종), 대소변 불통(不通)에 효과가 큰데, 매일 3회 1회에 한 컵씩 복용(服用)한다.
닭똥술
설사(泄瀉)를 하면 먹지 말고, 설사가 멎고 나면 다시 마신다. 반드시 큰 효과를 본다고 한다. 그렇다고 회원님들도 그렇게 만들어 마시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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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독’ 얘기를 쓰고 있으려니 어린 시절 생각이 떠오른다. 필자의 생가(生家) 바로 뒤쪽에는 주로 채소농사(菜蔬農事)를 짓는 밭이 있었다. 무와 배추를 심어 김장철에는 동네 아줌마들이 모여 배추를 뽑으면, 필자는 배추꼬리를 달라며 할머니를 졸졸 따라다니던 기억이 난다.
흙이 약간 묻어있기도 하지만 그 땐 그 것이 왜 그리도 고소하고 맛이 있었는지, 할머니가 잎을 잘라 내고 배추뿌리의 파란 부분을 손톱으로 쓱쓱 벗겨내면, 한 입 베어 먹고는 달기도 하고, 맵기도 해서 속이 쓰렸던 기억이 난다. 채독벌레의 유충(幼蟲)을 함께 먹은 셈이다.
배추꼬리(배추 뿔거지)
먹다가 도저히 안 되겠으면 옆에 놓아두고, ‘까마중’을 찾아 배추사이를 헤집고 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인분(人糞)을 비료로 삼아 무와 배추농사를 지었던 그 때, 1년에 한 번인가 학교에서는 기생충(寄生蟲)을 검사한다고 채변봉투(採便封套)를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검사결과(檢査結果)가 나오고 학생이름을 불러 결과에 맞는 약을 나누어주면, 어느 때는 선생님이 그 자리에서 약을 먹도록 했다. 집에 가지고 가면 먹지 않고 버리는 일이 생길까봐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 시절 채변봉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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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독’은 또 곡식(穀食)을 갈무리하는 그릇이기도 하다. 채그릇의 한 가지로 싸릿개비나 버들가지 따위의 나뭇가지를 결어서 독처럼 만들고 안팎으로 종이를 발라 만드는데, 오지그릇이 귀한 산간지방(山間地方)에서 콩·감자·고구마 등 마른 곡식을 갈무리할 때 많이 쓴다.
채 독
아가리는 둥글고 바닥은 네모꼴이며, 안쪽에는 섬유질(纖維質)이 많은 쇠똥을 바른 다음 진흙을 덧바르거나, 아예 보릿겨와 진흙의 반죽을 바르기도 한다.
큰 것은 헛간으로 이용되는 경우도 있는데, 일정한 장소에 고정(固定)시키고, 문과 지붕을 만들어 사용한다. 물에 젖지 않으면 10여 년은 쓸 수 있다.
‘채독’에는 다음과 같은 애달픈 사연(事緣)도 담겨 있다. 옛날에 양반 집에서, 여자는 일부종사(一夫從事)를 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으므로, 남편이 죽고 과부가 되어도 재혼(再婚)하는 법이 없었다.
채 독
평민(平民)들은 밤에 과부를 업으로 간다. 물론 미리 과부(寡婦)를 업으로 간다는 것을 내통(內通)해 놓고, 밤에 동네 사람들이 모르게 몰래 가서 과부를 등에 업고 치마를 씌워서 데려갔었다. 이른바 ‘보쌈’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반 집 딸이나 며느리는 그렇게 데려갈 수는 없었다. 최소한 가마를 갖고 가서 모셔 가야할 일이지만, 그렇게 하면 동서남북(東西南北) 모든 마을에서 알게 된다. 이때 사용하는 것이 ‘채독’이다.
가마 대신 ‘채독’을 가져가서, 종들이 과부(寡婦)를 보고 “마님, 가마로 모시지 못하는 것이 죄송합니다. 잠시 불편해도 이 안에 드시지요”하고, ‘채독’에 넣어서 데려가곤 했었다.
비옥한 배추밭
여기에서도 이쯤 해서 파일을 덮고자 하는데, 배경음악(背景音樂)이 또 문제가 된다. ‘채독(菜毒)’에 대한 노래도, 보쌈에 관한 무슨 가요(歌謠)도 떠오르는 게 없으니 난감하기만 하다.
‘니나노’ 한 가락조차 없으면, 딱딱한 글을 회원님들이 참고 읽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그 시절 배추심고 무 심던 ‘비알밭’과 기름진 문전옥답(門前沃畓)마다 잡초(雜草)만 무성하게 자라는 지금의 농촌실정을 탄식(歎息)하고 있는 오기택의 ‘고향무정’을 대신 게재하여 들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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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옜것을 생각케하는 여러가지 모두 잘 보고가요!
꺼시~~ 어휴 지금도 끔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