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9)의 생애
매튜 폭스
김순현 옮김(남해고현교회 담임목사, 감신대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매튜 폭스,『영성 - 자비의 힘』(다산글방),『원초적 축복』(분도출판사에서 발행하여 미출판) 등 다수의 번역이 있다.)
에크하르트는 사회적 영적 격변기를 헤쳐나가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하였는가? 우리가 에크하르트의 생애에 대하여 주장할 수 있는 기초적 사실은 다음과 같다. 그는 대략 1260년경에 튀링겐 지방에서 태어났는데, 이 지방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많은 일을 했던 성 엘리자베스(1207-1231)와 베긴회 신비가였던 마그데부르크 메히틸트(1210-1297)의 고향이었다. 이 지방은 두 세기가 지난 뒤에 마르틴 루터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 에크하르트는 에르푸르트에 있는 도미니크회에 입회하였다. 에르푸르트는 그의 고향인 호크하임 인근에 있었다. 오늘날 호크하임과 에르푸르트는 구 동독에 있다. 에크하르트의 집안은 기사 가문 가운데 한 가문이었다. 때문에 우리는 그가 급진주의를 띠게 된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한 때 자랑스러웠던 이 단체의 타락을 그가 인식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그는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자기 배경의 뼈대까지도 의심하는 자유와 용기를 갖추어나갔다. 그는 단 한 번도 이토록 철저한 비판능력을 잃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다른 단체만 비판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속해 있는 단체도 비판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그는 이러한 자세를 영적 여정에 꼭 필요한 차원으로 포함시킨다.
에크하르트는 도미니크회의 설교자가 되기 위하여 정규 훈련과정을 밟았다. 이 과정은 견습 기간으로 1년, 성무 일과와 그 수도회의 회칙을 공부하는 데 2년, 철학을 공부하는 데 5년, 신학을 공부하는 데 3년이 걸렸다. 신학을 공부하는 과정은 성서를 연구하는 데에 1년, 피터 롬바르드의 [명제집Sentences]을 연구하는 데에 2년이 걸렸다. 에크하르트는 보통의 회원보다 더 뛰어난 지적 능력을 보였다. 그리하여 에크하르트는 보다 나은 연구를 위해 쾰른에 위치한 스투디움 제네랄레(studium generale)로 보내어졌다. 이 학교는 위대한 스승이었던 알베르투스 마그누스가 1248년에 세운 학교였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가 서거하기(1280년) 몇 달 전에 에크하르트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알베르투스의 정신이 살아 있었음에 틀림없다. 1293년, 에크하르트는 파리로 보내어졌다. 그는 파리에 세 번 체류했는데, 이 때가 첫 번째 체류였다. 1294년, 대학교에서 행한 부활절 설교에서, 에크하르트는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를 언급함으로써, 그가 서거하기 전 몇 달 동안 그의 문하에서 자신이 직접 수학했음을 넌지시 알린다. 1294년에 독일로 돌아온 그는 에르푸르트 도미니크회의 수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튀링겐 지방의 주교대리로 임명되었다. 그는 세기가 바뀔 무렵에 파리로 돌아갔다. 1302년, 그는 그곳에서 프랑스 사람이 아닌 자를 위해 남겨두었던 신학 교수직을 수락했다. 이것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차지한 것과 동일한 교수직이었다. 그는 성 자끄 대학의 교수, 파리 대학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로 알려졌다. 세기의 전환기에 에크하르트는 파리 대학에서 무엇을 발견하는가?
진 앤슬릿 허스타쉬는 에크하르트의 시대에 파리가 차지했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로마에는 교황이 있었고, 독일에는 황제가 있었지만, 샤를마뉴 대제의 유산인 프랑스에는 이와 다른 지적인 주권이 주어져 있었다." 도미니크회의 수도사들은 파리에 둥지를 틀었고, 공식적으로 수도회가 조직되던 그 해에 지적인 활동의 중심이 되어 있었다. 1217년 9월 이래로, 그들은 파리에서 살았으며, 파리시의 남쪽 끝에 있는 성 자끄 요새 근처에 정착했다. 에크하르트가 살았던 소(小) 수도원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살았고, 이보다 앞서서는 알베르투스 마그누스가 살았던 곳이다. 당대의 지적인 흐름과 접촉을 유지했던 이 설교자 수도회의 창시자인 성 도미니크 역시 1219년 파리를 방문했을 때 그곳에 머물렀다. 에크하르트가 살던 시대의 주된 논쟁은 파리 대학에서 반세기 전에 일어났던 것과 같은 것으로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영적인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사이의 논쟁이었다. 수세기 동안 기독교 신학을 지배했었던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플라톤주의였다. 하지만 12세기에 아벨라르두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변증법적 방법론을 소개한 이래로, 상당수의 현상(現狀) 수호자들은 보다 세계 내적이고 자연에 입각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온건 실재론을 아방가르드(전위대), 갑자기 나타난 이론, 신앙에 대한 이성의 위험한 습격이라고 간주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파리에서 마지막으로 했던 일은 세속주의자이자 아리스토텔레스 지지자였던 브라반트의 시거에게 맞서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신앙의 도구로 이용하는 것을 옹호하는 일이었다. 아퀴나스와 같은 신학자들은 "새로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신학적인 쟁점을 해결할 만큼 통찰력이 넘치고 유용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두 개의 전선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한 편으로는 이원론 성향의 아우구스티누스 교의에 맞서 싸웠고, 다른 한 편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만을 원하고 신앙은 전혀 원하지 않는 세속주의자들에 맞서 싸웠다. 1277년 3월 7일, 파리의 대주교 스테판 템피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 219개를 단죄하였다. 이 명제들 가운데 몇 개는 이미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 사상과 신학 사상에 결정적으로 반영된 상태였다. 이것은 아퀴나스의 신학에 가해진 세 가지 단죄들, 곧 에크하르트의 성년기에 파리에서 가해졌거나 아니면 옥스퍼드에서 가해진 단죄들 가운데 첫 번째 단죄였다. 우리는 에크하르트가 동료 아퀴나스에게 내려진 단죄들의 끊임없는 먹구름 아래서 자신의 지적인 생애를 보냈다는 것을, 그리고 이 단죄들은 1276년부터 1292년까지 파리에서 신학 교수직에 몸담았던 겐트에게는 물론이고 둔스 스코투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둔스 스코투스는 1300년부터 1302년까지 그리고 1302년부터 1304년까지 옥스퍼드 대학에서 교수직에 몸담았으며, 1302년부터 1303년까지 그리고 1304년에 파리에서 교수직에 몸담았다.
에크하르트는 파리에서 잠시 체류한 뒤 독일로 다시 불려가서, 행정 임무를 맡았다. 이 시기에 그는 새로이 형성된 작센 관구의 초대 관구장으로 선출되었다. 작센 관구는 북쪽의 네덜란드에서 동쪽의 프라하에 이르는 영역을 관할하였고, 쉰 개의 남자 수도회와 아홉 개의 수녀원을 거느린 관구였다. 네덜란드가 베긴회 운동의 탄생지였던 점으로 보건대(베긴회는 지금도 여전히 네덜란드에 현존하고 있다), 에크하르트는 이 시기에 평신도 위주의 이 여성 운동과 교류했을 가능성이 높다. 1307년, 에크하르트는 보헤미아의 주교대리로 임명되었다. 이로부터 65년이 지난 후에 교회 개혁자 요한 후스를 배출하게 될 보헤미아는 사회적·영적으로 심각한 갈등과 창조성이 뒤섞인 지역이기도 했다. 에크하르트는 책상 뒤에 앉아 있는 관료처럼 행정가로 세월을 보내지 않았다. 그는 지역에서 지역으로 장거리 도보 여행을 해야 했을 뿐 아니라, 그런 와중에도 자기 시대의 불행에 다양하게 반응하기 위해 끊임없이 배우고 있었다. 에크하르트는 안정된 생활 방식 내지 대학 사회의 보장된 교육을 택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삶이야말로 최고의 스승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렇게 10년 동안 국제적인 운동들, 사회적·영적 운동들 그리고 페미니스트 영성 운동들을 양성한 뒤에, 에크하르트는 파리로 되돌아가서 1311년부터 1313년까지 세 번째 대학 생활을 보냈다. 이 시기에 에크하르트는 지적인 연구 과제, 곧 [삼부작Opus Tripartitum]을 구상하였다. 에크하르트는 그것을 완성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현재 우리는 총론(General Prologue)과 제1부 [명제집Opus Propositionum]의 프롤로그, 그리고 제3부 [주석집Opus Expositionum]만을 갖고 있을 따름이다.
1314년, 독일로 돌아온 에크하르트는 인생의 전기를 맞이하였다. 그 해에 그는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수도원장, 교수, 설교자가 되었다. 슈트라스부르크는 쾰른과 더불어 에크하르트의 생애와 활동을 에크하르트가 죽을 때까지 사로잡은 곳이었다. 이 두 도시는 "라인강 유역의 신비주의"로 알려진 영적 갱신 운동의 온상이었다. 대중의 영적인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에크하르트가 설교자와 영적 상담역으로서의 소명을 발견한 것도 이곳에서였다. 그는 대중적인 설교자, 실로 이름난 설교자, 그 세기의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격변기의 영적 통찰력에 관한 한, 그 세기는 대학인들이나 행정가들의 세기가 아니라 설교자들의 세기였다. 1323년 무렵에 에크하르트는 쾰른으로 이주하였다. 쾰른은 서유럽과 동유럽을 잇는 무역의 중심지이자 영적, 경제적, 정치적 소요의 또 다른 온상이었다. 그는 한 때 자신이 공부했던 도미니크회 소속의 스투디움 제네랄레에서 설교와 교육을 담당했다. 에크하르트가 쾰른에 도착하고, 아퀴나스가 시성(諡聖)된 지 3년이 못 되어, 프란체스코회의 일원이었던 쾰른의 대주교가 에크하르트를 이단으로 고발하는 유언비어와 질투심에 굴복하고 말았다. 에크하르트는 1326년에 행해진 이 재판에서 교황의 법정에서 재판 받을 기회를 요구하였다. 그는 이 기회를 승인 받고, 아비뇽으로 가서, 자신을 변호하였다. 익히 알려진 대로, 에크하르트는 교황의 법정에 출두한 뒤에 서거하였다. 그의 서거는 교황 요한 22세가 1329년 3월 27일에 [In Argo Dominico]라는 교서를 내리기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 교서는 에크하르트의 논제들 가운데 열 일곱 개를 이단으로 단죄하였고, 다른 아홉 개에는 이단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는 꼬리표를 달았다. (혐의가 붙여졌던 두 개의 논제는 에크하르트가 자신은 그것들을 결코 설교한 적이 없다고 말하자 탈락되었다.) 에크하르트는 떳떳하게 교회의 품에서 죽었다. 왜냐하면 그는 죽기 전에 자기의 사상을 교회의 신앙에 복종시켰다고 썼기 때문이다. 교황의 교서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에크하르트는 숨지는 순간에 공교회의 신앙을 고백하고, 스물 여섯 개의 논제를 철회하였으며...학교와 설교에서 쓰고 가르쳤던 것, 곧 참된 신앙에 위배되는 이단적인 생각이나 잘못된 것을 신자들의 마음속에 심어줄 수 있는 것을 철회하였다.
그가 언제 죽었으며, 어디에서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또한 그가 어디에 묻혔는지도 알 수 없다. 그가 아비뇽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죽었다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격동의 37년 간 큰 노력을 요하는 임무들을 해결하면서 교회를 섬겨왔건만, 교회가 자신을 단죄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그가 상심으로 죽었다고 말하는 자들도 있다. 하지만 금세기에 에프 펠스터가 복원한 재판 사본들은 다른 시나리오를 암시한다. 그 사본들은 자신이 받고 있는 재판의 정치적 성격을 잘 알고 있는 한 사람을 제시한다. 그 사람은 자신을 고소한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킨다. 말하자면 그들은 토마스 아퀴나스를 세 번이나 단죄하고, 바로 3년 전에 아퀴나스를 시성(諡聖)한 장본인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에크하르트는 자신이 겪고 있는 시련을 자신과 같은 도미니크회의 형제인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의 그것에 견주기도 하였다. 에크하르트는 성을 내었고, 질투심을 그 재판의 핵심 요인으로 꼽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질투심에 사로잡힌 자들이 나에게 덮어씌우려고 하는 오류들을 비난하고 혐오한다..." 또한 그는 자신을 고소한 자들의 무지를 고발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오류로 간주하고, 모든 오류를 이단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오류를 집요하게 파헤치는 것은 이단과 이단자를 만들어 낼 따름이다." 토마스 머튼은 에크하르트가 받은 재판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말했다:
그는 자신을 파멸시키려고 마음먹은 비열한 자들에 의해 끌어내려진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들은 에크하르트를 아비뇽으로 불러 올릴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를 전혀 신임하지 않았다. 에크하르트는 자신의 작품 어딘가에 들어 있었을 스물 여덟 개의 논제로 인해 사후에 단죄되었다. 하지만 이 단죄는 그의 기쁨, 그의 에너지, 그의 자유를 앗아가지는 못했다...에크하르트는 콤마를 찍을 때마다 조심스럽게 찍어 시간을 낭비하는 성향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사람들을 신뢰하였고, 자기가 보았던 것을 그들도 볼 권리가 있다고 인정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보았던 것은 생명과 기쁨이라는 확실한 열매를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그것만이 중요했다.
에크하르트가 말하는 버림의 신학은 거의 심리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단죄를 버리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그는 설교 24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이 우리가 단죄 받는 것을 정하셨다면, 그것은 우리의 본질이 더럽혀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때에도 우리는 우리가 받는 단죄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우리가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듯이, 하느님께서 그것을 떠맡으시게 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에크하르트가 목숨을 버리겠다고 결심할 만큼 충만한 삶을 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어쩌면 그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죽은 육신을 단죄하게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지도 모른다. 웃음은 실로 심오한 버림의 표현이다. 그러하기에 그는 웃으면서 죽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의 유머감각이 대단히 잘 발달되어 있었다고 알고 있다. 그를 고소한 자들은 남을 학대하는 것과 같은 유머감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에크하르트의 유머감각에는 가학증이 없었다. 왜냐하면 에크하르트는 자신을 보고 웃을 수 있을 만큼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오늘날 학자들은 에크하르트가 부당하게 단죄되었다는 데에 일반적으로 의견이 일치한다. 엠 디 노울즈는 이렇게 말한다: "그가 전통주의와 정통성을 철저하게 고수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에크하르트를 고소했던 자들이 그의 라틴어 저작을 읽어보기만 했어도, 그리고 영성의 역사를 에크하르트의 절반만이라도 알았더라면, 그들은 서양이 그 때까지 배출한 영성 신학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신학자를 정치가 단죄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단죄로 말미암아 손해를 본 자는 에크하르트가 아니었다. 손해를 본 자는 기독교의 교회였다. 왜냐하면 교회는 지금까지도 에크하르트가 지녔던 것만큼의 통전적이고 영적인 비전을 찾아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