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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궐(東闕)과 동궐도(東闕圖)를 다룬 론문들은 십수 편 이상 있지만, 왜 現在 서울에 있는 昌德宮과 昌慶宮이 東闕圖에 그려진 바와 다른지 論究한 것은 한 편도 찾지 못했다. 그렇기에, 李朝(흔히 朝鮮이라 부르는 王朝) 宮闕圖의 代表作이라 할 수 있는 東闕圖가 어떻게 半島朝鮮이 虛構임을 傍證하는지 밝히고자 한다.
東闕圖는 東闕이라 불리는 창덕궁(昌德宮, 그림 왼편), 창경궁(昌慶宮, 그림 오른편) 및 후원(後苑, 두 宮闕 북쪽)과 황단(皇壇(大報壇), 昌德宮 서북쪽 가장 깊은 곳)으로 이루어져 있다. 昌德宮은 1405년 세워져 李朝에서 가장 오래 사용된 宮闕로서, 仁政殿을 중심으로 左右(東西方向)로 殿閣들이 排置되었고 모두 南向이다. 담장 너머 린접(隣接)한 昌慶宮은 그 중심 殿閣인 明政殿이 東向으로 지어졌다. 後苑에는 山勢에 따라 樓閣, 亭子, 연못 등이 펼쳐져 있으며, “그림 상단부 왼쪽의 皇壇은 조선의 주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너른 공간에 크게 배치되었다”(東闕 特別展示 圖錄(고려대학교박물관·동아대학교박물관 교류전 기념), 고려대학교 박물관, 2012, 43쪽).
1824-1827년간에 着手하여 1830년 以前에 完成된 것으로 推定되는 東闕圖는 現在 남아있는 宮闕圖 중에서 규모(세로 273cm, 가로 584cm), 地圖를 彷佛케 하는 內容의 複合性과 描寫의 精巧性, 樣式(平行斜線構圖, 俯瞰法) 등에서 가장 돋보이는 작품인데, 그에 관한 文獻記錄이 일체 남아 있지 않다. 或者는 “아마도 극비의 작업이었기 때문에 실록이나 의궤 등으로 기록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추측”(東闕圖, 文化部 文化財管理局, 1991, 15쪽)하기도 한다. 춘방장서총목초본(春坊藏書摠目, 1905)을 보면 東闕圖壹匣拾陸帖이 표기되어 있어, 純宗이 王世子였을 당시 世子侍講院인 春坊에 東闕圖 16帖 一匣이 보관되었음을 알 수 있다.
16개 畫帖으로 구성되어 5折6面인 各幅마다 東闕圖人이라 표기되어 있는 高麗大學校 博物館 所藏本(各帖 45.7*36.3cm), 그리고 그러한 표기가 보이지 않으며 屛風으로 된 東亞大學校 博物館 所藏本, 두 작품 모두 國寶 第249號로 지정되어 있다. 東亞大 所藏本 亦是 畫帖형태였으나, 1960년대초 훼손방지와 보존을 위해 屛風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커다란 궁궐도의 몇몇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高麗大 所藏本과 東亞大 所藏本의 描寫에 分明한 差異가 드러난다. 그 一例를 보면 아래와 같다.
昌慶宮 環翠亭을 그린 위 두 그림을 比較해보면, 오른편(高麗大 所藏本) 그림의 박공(牔栱) 표현은 자연스러운 반면, 왼편(東亞大 所藏本)은 그렇지 못하다. 위편 두그루 소나무 줄기가 서로 엇갈려 있어야 함에도 왼편의 것은 그렇지 않다. 이를 볼 때, 東亞大 所藏本은 高麗大 所藏本이 만들어지고나서 언젠가 事後 만들어진 것으로 推定된다.
東闕圖에 담긴 昌德宮과 昌慶宮은 法宮인 景福宮에 대해 離宮으로 지어졌으나, 壬辰倭亂으로 인해 景福宮이 불탄 후 高宗代에 重建되기 전까지 昌德宮은 李朝 王들이 가장 모래 머물렀던 宮闕이었으므로 事實上 法宮의 機能을 하였기에 그 比重은 매우 크다. 몇몇 建物들은 實際에 맞지 않게 그려진 모습들이 언뜻 보이지만 全體的으로 事實에 立脚하여 충실하게 표현하였기에 東闕圖는 宮闕史, 繪畫史, 建築史, 造苑史, 科學史 등 여러 분야의 관점에서 重要한 史料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상당 정도 地圖의 役割을 兼하면서, 壬辰倭亂 이래 李朝 歷代 임금들이 주로 머물렀던 곳을 鳥瞰圖 형태로 寫實的으로 그렸기에 史料의 役割도 하고 있는 이 宮闕圖는 逆說的으로 半島朝鮮이 虛構임을 드러내는 하나의 강력한 證據가 된다.
1. 그 첫번째이자 決定的인 理由는, 東闕圖에 그려진 두 宮闕의 規模(後苑까지 합친 全體 規模)와 現在 半島 남녘땅 서울 종로구(각기 鐘路區 臥龍洞 2-71; 臥龍洞 2-1)에 위치한 두 宮闕(아래 그림)의 規模가 서로 비교할 수 없이 다르다는 점이다.
먼저 昌德宮을 보자.
現在 半島 서울에 만들어놓은 축소(縮小) 모조품(模造品) 宮闕이 東闕圖에 그려진 當時 實際 宮闕에 비해 얼마나 터무니없이 작은지는 아래(現在 昌德宮 案內圖 및 鳥瞰圖)를 보면 알 수 있다.
위 그림과 사진을 아래 동궐도의 왼편 昌德宮 부분과 다시 比較해 보시라.
現在 서울 鐘路區에 만들어놓은 模造品이 東闕圖 속 당시 實際 宮闕에 比할 수 없이 작은 것은 昌德宮뿐만 아니라 昌慶宮도 마찬가지다.
東闕圖에는 殿閣, 齋室, 樓亭, 廊房, 堂廳, 宮牆, 池塘 등을 비롯해 총 100개가 훨씬 넘는 施設物들이 그려져 있는데 反해, 현재 鐘路區 臥龍洞에 있는 두 宮闕內 建物들의 수효(數爻)는 다 합쳐도 그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일단 부지(敷地) 規模 自體가 다르며, 따라서 東闕圖에는 있으나 현재 서울에 같은 이름으로 만들어놓은 宮闕에는 없는 건물들이 더 많다. 례컨대, 東闕圖에 따르자면, 昌德宮 正殿이라 하는 仁政殿 뒤편에 景福殿 터를 포함하는 넓은 평평한 공간 및 여러 廊房 등 수많은 建物들이 있어야 함에도 현재 臥龍洞에 꾸며진 昌德宮 仁政殿 뒤편은 (위 사진(2012)에서 보듯) 그저 숲일 뿐이다. 이는 그 무슨 火災니 日帝强占期 이루어진 破壞니 變形이니 하는 口實로 둘러댈 수 없는 差異다.
1936년(무렵) 리왕직(李王職) 所屬 日本人 技師가 그렸다는 〈昌德宮平面圖〉를 보면 이에 따라 現 模造品 昌德宮(및 昌慶宮)이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東闕圖와 다르게 그려진 바로 이 〈昌德宮平面圖〉 存在 自體가 現 昌德宮과 昌慶宮이 本來의 昌德宮과 昌慶宮이 지어졌던 곳이 아닌 곳에 가짜로 만들어놓은 것임을 말해준다.
또한, 1930년 朝鮮總督府에서 發行한 《朝鮮古蹟圖譜 十》四七七六. 昌德宮及昌慶宮平面圖를 보면, 半島에 만들어놓은 模造品이 東闕圖가 描寫하고 있는 實物에 비해 얼마나 작은 敷地에 山勢도 맞지 않는 곳에 억지로 꾸며놓은 것인지 한눈에 알 수 있다.
2. 이제 두번째로, 具體的으로 몇몇 건물들이 어떻게 東闕圖와 다른지 살펴보자.
共通的으로 한 가지 言及할 수 있는 것은, 東闕圖에서는 殿閣들의 처마가 하늘을 향하여 솟아오른 곡선의 날렵함을 보이고 있음에 反해, 現 模造品 昌德宮, 昌慶宮 殿閣들의 처마는 하늘로 솟아오른 형태가 아니라는 점이다. 송계 선생님의 글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는 조선의 회화”(2024.2.22.)에 실린 그림 속의 樓閣 처마가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것처럼, 東闕圖 속 殿閣들의 처마도 그렇게 되어있음에도 不拘하고, 現 서울 臥龍洞에 만들어놓은 殿閣 처마들은 하나같이 그렇지 않다는 점은 單純한 失手가 아닌 構造的 差異이다.
이외, 각 건물별로 몇 가지를 따져보기로 한다.
1) 昌德宮 敦化門 및 昌慶宮 弘化門: 송계 선생님의 또다른 글 “창덕궁 대조전과 경훈각-동궐도와 비교”(2018.11.27.)에서 지적된대로, 昌德宮 正門인 敦化門 및 昌慶宮 正門인 弘化門 亦是 東闕圖에서 分明히 八作지붕으로 그려져 있음에도, 現在 우리 눈으로 보는 昌德宮 敦化門과 昌慶宮 弘化門은 아래와 같이 隅진閣지붕으로 되어있다.
講壇史學者들 중의 하나였던 한영우(韓永愚, 1938-2023)는 이를 두고 “<동궐도>에는 중층 팔작(八作) 집으로 나오는데, 이는 화원[畫員]이 잘못 그린 것으로 실제 지붕은 우진각[隅진閣]이다”(한영우, 『동궐도』, 효형출판, 2007, 12쪽)라고 줴친 바 있다. “도둑이 매를 든다”하니, 바로 이에 해당된다. 東闕圖 속 다른 殿/閣/堂들은 모두 八作지붕으로 그려져 있고, 模造品으로 만들어놓은 것들도 八作흉내라도 냈건만, 昌德宮 正門인 敦化門을 어떤 理由이든 隅진閣으로 만들어놓은 것을 보고 거꾸로 東闕圖를 그린 畫員들이 잘못 그린 것이라 우겨대니, 나름 이름있다는 者가 몰라서 그리 말했다면 寒心한 것이요, 잘못 흉내낸 것을 알면서 그리 덮어버리려 했다면 奸邪한 것이다.
또한, 1991년 文化部 文化財管理局 發行 東闕圖 圖錄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동궐도」에 묘사된 敦化門은 正面 5칸인 중층의 팔작집인데 반하여 현재 남아있는 것은 우진각집이어서 차이를 드러내고 있어 의문을 제기한다. 이러한 차이는 弘化門의 경우에도 나타난다. 아마도 「동궐도」가 완성된 뒤에 이 문들이 고쳐 지어졌거나 아니면 畫員이 잘못 그렸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나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圖畫署 畫員들이 八作지붕을 八作지붕으로 그리지 않고 隅진閣으로 그렸어야 하는가? 다른 門들은 그대로 두고 하필 이 두 正門만 고쳐 지었다는 말인가?
2) 昌德宮 仁政殿: 1층 階段과 2층 階段 사이, 그리고 1층 階段 아래 바닥은 모두 不定形의 박석(薄石)으로 되어있어야 함에도, 模造品 仁政殿에서는 모두 長方形의 반듯한 直四角形 돌로 맞추어져 있다. 건물들은 그대로 두고 바닥 薄石만 바꾸었다는 말인가?
위 두 사진에서 보듯, 한때는 품계석(品階石) 놓인 兩偏으로 잔디를 깔아두었으나(品階石은 正祖 在位1년인 1777년에 正祖의 指示에 따라 세워진 것이며(정조실록 4권, 정조 1년 9월 6일 무진 2번째기사: 立品石于仁政殿庭 朝賀班次每致紊亂 命隨品立標以定班行), 昌德宮 仁政殿 앞에만 세우고 昌慶宮 明政殿 앞에는 세우지 않았다), 2000년대 들어 잔디를 걷어내었다. 그러나 薄石을 바꾼 것은 어찌 설명할 것인가?
또한 仁政門 마당이 東闕圖에서는 長方形 直四角形임에 반해, 模造品 앞뜰은 模樣이 長方形이 아니라 사다리꼴이다(아래 조감도(鳥瞰圖) 참조). 이같은 差異는 그 무슨 火災나 人爲的 破壞에 이은 復舊/重建 등으로 說明할 수 없는 事項이다.
3) 昌德宮 景薰閣: 송계 선생님의 글(“창덕궁 대조전과 경훈각-동궐도와 비교”(2018.11.27.)에 나온대로, 굳이 하나하나 따질 필요도 없이 東闕圖에 그려진 바와 서울에 만들어놓은 것이 서로 완연(宛然)히 다르다. 景薰閣은 明朝 神宗(재위기간이 1572-1620이라고 하나, 이는 明朝라고 얽어놓은 것의 實體와 함께 따져볼 問題이다)이 내렸다는 官服과 明朝 毅宗(재위기간 1627-1644 (마찬가지로 따져보아야 한다))의 御筆을 새긴 扁額이 걸려있는 곳으로 푸른 기와를 올려 重要한 곳임을 표시했다. (便殿인 宣政殿과 함께) 그 지붕이 온전(穩全)히 푸른 색으로 되어 있는데다, 景薰閣은 宣政殿보다 훨씬 規模가 크며 2층으로 되어 있어 東闕圖 전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들 중 하나인데 그것을 전혀 다른 模樣으로 바꾸어놓았다. 위키실록사전(sillokwiki)의 "경훈각(景薰閣)" 설명(집필자: 조옥연)을 보면 "1917년 창덕궁 내전의 대화재로 다시 소실되"어 "이때 경복궁의 건물을 이건하여 대조전 등의 내전을 복구하였으나 경훈각은 중층 누각이 아닌 단층 건물로 중건되어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오늘에 이르렀다"고 써놓고 있으나, 정말로 火災가 나서 새로 세웠다한들 어찌 이렇게 푸른 기와도 없이 단층으로 바꿔놓고서 이름만 옮겨놓을 수 있는가? 毅宗의 御筆은 남아있는가?
4) 昌德宮 大造殿: 王과 王妃의 寢殿인 大造殿은 景薰閣에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그 지붕이 三段으로 나뉘어 가운데 지붕이 兩偏에 비해 더 크고 높게 되어 있으며 (이 점은 大造殿 위쪽에 있는 集祥殿도 마찬가지다), 出入門 앞으로 월대(月臺)위에 외부 시선으로부터 차폐(遮蔽)되도록 판장(板墻)과 휘장(揮帳)으로 문장(門裝)을 설치하였고, 建物 亦是 廊房들로 둘러싸여 있어 다른 건물들에 비해 더욱 눈에 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大造殿마저 그 지붕을 三段 구별없이 하나로 이어진 형태로 만들어놓았고, 月臺위 門裝마저 간데없이 보이지 않는다.
門裝이 없어진 것과 난데없이 맨홀(manhole)이 생겨난 것은 그렇다쳐도, 大造殿 오른편에 붙은 興福軒의 지붕이 大造殿 지붕 밑으로 들어가야 함에도, 현재 만들어놓기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은 興福軒 자체가 놓인 壇의 높이가 大造殿에 비해 顯著히 낮아야 함에도 模造品을 만들면서 한 段 차이밖에 두지 않았음에서 드러난다.
이를 보며, 火災에 따른 重建이라 하면서 商業用 建物도 아니고 所謂 ‘國寶’라 하는 宮闕 建物들의 標高와 構造 自體를 이렇게 바꿀 수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복궁 교태전 (景福宮 交泰殿) 설명을 보면(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2440), “1917년에 불타 없어진 창덕궁 대조전을 짓는다는 구실 아래”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복궁에 있었던 조선후기 왕비의 침전으로 지어진 궁궐건물”인 景福宮 交泰殿을 “1920년에 창덕궁으로 옮”겼다고 한다. 고려대학교 박물관 발행 동궐 도록에도 “대조전(1920년)”이라 표기하여 1920년에 다시 지었으니 당연히 다를 수 밖에 없다고 辨明하는 듯하다. 허나, 어느 누가 宮闕을 重建한다면서 元來대로 復原하거나 그에 가깝도록 하지 않고 이다지도 제멋대로 바꾸어 놓는가? 實物이 아니라는 反證 아닌가?
5) 後苑 演慶堂: 東闕圖에는 演慶堂이 宙合樓(1층 奎章閣)의 西便에 그려져 있음에도, 現 模造品 宮闕에서는 宙合樓 北便에 있다. “현재 규모의 연경당은 헌종대에 만들어졌”으며 “孝明世子 代理聽政期 연경당의 모습은 현재 연경당의 모습과 그 규모와 형태가 완전히 다르다”(이민아, “孝明世子, 憲宗代 宮闕 營建의 政治史的 의의”, 한국사론 54권, 2008, 213쪽)고 말하는 연구자도 있지만, 이는 그야말로 演慶堂이라는 건물의 크기와 모양이 다르다는 점만을 말하는 것일 뿐이요, 200년 가까이 지났다한들 크기와 모양이 어찌 하여 달라졌는지에 관한 疑問도 提起하지 않고 따라서 그 理由에 대한 論究도 없으며, 무엇보다도 演慶堂 터 자체가 宙合樓 북쪽이 아닌 서쪽이어야 한다는 점을 看過하고 있다.
6) 宙合樓(奎章閣)와 芙蓉池: 宙合樓와 芙蓉池도, 東闕圖의 다른 施設物들이 대개 그렇듯이, 똑바르게 南向이어야 함에도, 1936년무렵 日帝强占期 李王職 所屬 日本人 技師가 그려놓은 昌德宮平面圖 및 現 模造品 建物은 西北向으로 비스듬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는 亦是 火災, 破壞 따위 口實로 덮을 수 없는 差異 중의 하나다.
7) 皇壇(大報壇): 흔히 大報壇이라 불리며, 明朝 神宗의 恩惠를 기리기 위해 지었다는 皇壇일진대, 그 形體는커녕 그 터조차 남아있지 않다. 東闕圖에서는 서북쪽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 重要性을 强調하기 위해 實際보다 더 크게 그려서 昌德宮 正殿인 仁政殿 터에 버금가는 크기이건만(아래 그림), 現 서울 鐘路區 臥龍洞 敷地에는 大報壇 터조차 만들어놓지 않았다.
昌德宮平面圖에는 璿源殿 위쪽에 작게 大報壇蹟이라고 쓰여 있다. 그런데 高麗大博物館 發行 東闕 圖錄 71쪽에는 “숙종대 이후 봄이면 치러졌던 제사는 순종 즉위년(1907) 7월 23일에 폐지”되었고 “이후 황단은 어느 시기 없어졌으며 1921년 그 자리에 어진을 모시는 신선원전이 세워졌다”고 쓰고 있지만, 이는 意圖한 것이든 그렇지 않든 거짓말에 해당된다. 이 땅 半島에는 大報壇이 있었던 적이 없다고 해야 맞다. 그래서 平面圖를 그린 그 日本人 技師도 (實物이 없고 있었던 적도 없으니) 大報壇이라 하지 않고 大報壇의 “자취(蹟)”[大報壇蹟]라고 하여 어쨌든 거짓으로 얼버무렸던 것이다. 昌德宮平面圖에서 大報壇蹟은 (實際 大報壇이 그러했던 것처럼) 서북쪽 끄트머리에 있고 그 아래 璿源殿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아래 그림에서 보듯, 기실 璿源殿은 仁政殿 바로 西便에 있었으며(아래 그림 綠色 표시), 따라서 아무리 模造品일지언정 仁政殿 가까이 서쪽에 만들어놓았어야 한다. 허나, 어떤 理由에서든 그렇게 하지 않았거나 못했다.
大報壇 없는(없앤) 模造品 東闕을 본다면 李朝의 王들은 무어라 할 것인가?
8) 昌慶宮 明政殿: 東闕圖에는 分明히 品階石(品石)이 그려져있지 않은대도 (즉 昌慶宮을 지을 當時부터 줄곧 品階石을 두지 않았는대도), 서울에 만들어놓은 模造品 昌慶宮의 明政殿 앞에는 品階石이 늘어서 있다.
朝鮮古蹟圖譜 十(1930) 四七八七. 昌慶宮明政殿全景(아래 사진 첫번째)은 半島에 꾸며놓은 昌慶宮 明政殿에는 分明히 品階石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바로 다음 四七八八. 昌慶宮明政殿正面(아래 사진 두번째)을 보면, 模造 品階石 꾸며놓기 위한 準備作業인지는 몰라도 나무막대 같은 것들을 꽂아놓은 모습이 보인다.
9) 昌德宮 錦川橋, 昌慶宮 玉川橋: 昌德宮 敦化門으로 들어가서 仁政門 앞뜰로 들어서기 위해 처음으로 지나는 錦川橋와 昌慶宮 弘化門으로 들어가자마자 건너게 되는 玉川橋는 아래 그림과 사진 對照에서 보듯 돌다리 란간(欄杆) 기둥의 개수 및 개울과 돌다리의 相對的 位置(玉川橋의 경우) 등에서 서로 다르다. 錦川橋 橋脚앞에 둔 해치상(獬豸像)의 몸통이 東闕圖에서 側面을 보이고 있음에 反해, 現 模造品에서 正面(남쪽)을 向하고 있음은, 지붕 모양 다른 것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우기고 있을진대 그에 비해 작은 差異일 것이다.
10) 後苑 玉流川 근처 亭子들: 청의정(淸漪亭)이 놓인 작은 연못의 물이 말라버렸다고 한다면 그렇다쳐도, 태극정(太極亭), 소요정(逍遙亭), 취한정(翠寒亭) 등은 亭子의 模樣이나 놓인 位置 등이 東闕圖에 그려진 바와 같지 않으며, 취규정(聚奎亭)은 그것이 놓인 基壇의 높이 및 地面으로부터 標高가 確然히 다르다.
11) 昌慶宮 通明殿 연못 怪石: 東闕圖에 의하면, 通明殿 터에 있는 이 연못은 欄杆 둘레 따라 한 번 파내어진 후 가운데 長方形으로 한 번 더 파여 작은 연못을 이루었는데, 現 模造品에서는 가운데 長方形으로 한 번 더 파내어지지 않았다. 建物의 構造的 差異에 比하면 작은 差異지만, 이것이 李朝 時期 지어졌던 實物이라면 과연 이럴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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模造品일망정 眞品과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었다면 모를까, 注意깊게 살펴보면 누구나 뻔히 알 수 있는 것을 두고 누구처럼 거꾸로 東闕圖가 잘못 그려졌다느니 우기거나 “일제에 의하여 심하게 파괴되거나 훼손 변질되어 우리의 아픔을 더해준”(1991년 文化部 發行 東闕圖 圖錄, 發刊辭(당시 문화부장관 이어령))다느니 “일제[日帝]시에 변형된 때문으로 볼 수 있다”(1991년 文化部 發行 東闕圖 圖錄, 槪要 V, 16쪽)느니 하며 두루뭉술 둘러대서는 안 될 것이다. 이곳 半島땅에는 애초 있지도 않았고 있을 수도 없는 宮闕들을 터 자체가 맞지 않는 곳에 日帝가 억지로 세워놓은 것을, 겉보기에 조금 번지르르하게 발라놓고 거짓을 거짓 아닌 양 糊塗하려 해서는 안된다.
우리 亦是, 歷史文獻 記錄 및 다른 遺蹟, 遺物과 함께 檢討해야 할 것이되, 李朝 歷代 王들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宮闕이라는 昌德宮이 이처럼 東闕圖에 그려진 진짜 宮闕과 결코 같은 것이라 主張할 수 없음을 안다면, 現 半島땅에 物理的 模造品들 및 가짜 地名 典故로써 둘러씌운 李朝 歷史가, 構造的으로 그 全體로써, 거짓임을 看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첫댓글 논리적인 해석 잘 보았습니다. 일본의 기와 건축물들이 서울의 궁궐 양식과 많이 닮아 있어 종종 회화로 보는 대륙 조선의 건축 양식과 달라 이상하다 했더니 모조품을 많든 자가 은연중에 자신의 스타일로 만든 거였군요.
말씀하신대로, 朝鮮古蹟圖譜등에 담긴 (朝鮮總督府가 세운) 半島 서울의 宮闕건축물들을 당시 일본의 건축물들과 비교해보면 더 많은 示唆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漢字를 섞어쓴 것은 漢字는 우리글임을 믿기 때문이며, 따라서 우리 歷史를 밝혀내는 데에 '한글전용'으로 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네 좋은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하시죠? 반도 조선사의 허구는 유물과 유적 그리고 지명 등의 정밀한 고찰에서도 얼마든지 검증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초라한 경복궁과 덕수궁 그리고 창덕궁의 왜소한 건물들에서 우리는 우리역사의 비애를 충분히 느끼고도 남음이 있는 듯 합니다. 퍼시벌 로웰의 글에서 창덕궁 크기가 120만평에 육박했다는 기록을 참고한다면 동궐도라는 그림 자체에 의문이 많이 남기도 합니다. 장문의 글 쓰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Percival Lowell이 쓴 책이라 하는 "Chosö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A Sketch of Korea"(1886)를 보면 "the peninsular of Korea"를 반복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내용과 여기 실린 그림들을 후대에 누군가 加筆하거나 造作한 것이 아니라면, 전체는 아닐지라도 상당 정도 실제 이곳 半島땅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고 보입니다. 아래 첨부 사진이 작기는 하지만 "In The New Palace Grounds"라 되어있는데, 처마 모양이 하늘로 솟은 형태가 아님을 볼 때 東闕圖가 묘사하고 있는 양식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언급하신 昌德宮 넓이 관련 내용은 이 책 XXVII. The Palaces에서 찾지 못했는데, 앞으로 더 검토하도록 하겠습니다.
@너그러움 원문 296쪽에 나옵니다. 일천에이커라 표시되어 있습니다. 책에 실린 사진은 모두 반도것으로 대체되었다 보셔야 할 것이고...반도라는 용어는 당시 대륙의 장강과 한수로 둘러싸인 모습을 그린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송계 지적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말씀주신대로 "...The high wall, which surrounds it [the New Palace (문맥상 昌德宮, 昌慶宮, 後苑 합쳐 지칭함으로 보임)], encloses about a thousand acres. In this wall are set gates at various points, fourteen of them in all..."(296쪽)라고 나옵니다. 1,000acre=1000×43,560(square feet)×0.092903(square meter)×0.3025坪=1,224,174.067776坪, 즉 대략 122만4천坪입니다. 加筆/造作했다면 면적을 縮小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음을 볼 때, 이 부분은 손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따라서 "The high wall... encloses about a thousand acres"라는 진술은 현 서울에 둔 것이 模造品임을 증명합니다: 昌德宮+後苑=434,877m^2, 昌慶宮= 216,774m^2, 합쳐 197,124坪, 東闕圖 크기의 16%입니다. 둘러싼 壁에 있는 門의 개수도 세어보니 (大報壇의 門 1개를 포함하여) (Lowell이 쓴대로) 14개입니다.
고맙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昌慶宮 正門인 弘化門 역시 八作지붕이어야 함에도 (현 昌德宮 敦化門처럼) 隅진閣으로 만들어놓고도 '(추후) 고쳐 지었다'거나 '畵員이 잘못 그렸다'고 써놓은 점을 지적하는 부분을 추가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