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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의 거장들 (2) Klassiker der P¨adagogik
책 소개
거장이란 “불사신” 같은 존재이며 시간의 시험을 견뎌낸 입증된 권력과 같은 것
교육학의 거장을 정의하자면
교육학의 거장이라 하면, 흔히 우리는 ‘교육이론가’와 더불어 ‘실천가’, 그리고 이미 만들어졌거나 앞으로 구성될 모든 교육관련조직 안에서 나타나는 경직성은 물론이고 ‘인간소외’의 위험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는 사려 깊고 비판적인 인물들처럼 ‘교육 관련 조직의 형성에 관여하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떠올린다.
그러나 교육학은 기예인 동시에 기예이론일 수 있으며 실천이자 실천이론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가 실천과 연관되면서도 동시에 이론의 요소를 지닌 교육학 분야의 ‘거장’을 찾는다면, 이는 교육사와 교육학적 관점과 사유에서 드러나는 위대한 인물들을 역사적으로 생생하게 그려내는 일이다.
이 책은 전문가들을 위한 개설서이자, 교육학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을 위한 입문서, 그리고 교육학에 관심을 지닌 일반인에게 손쉬운 읽을거리이자 학술적인 정황을 파악하고 더 나아간 연구가 진행되도록 고무하는 역할을 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이 책의 서술순서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시작된다.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에도 유의미한 교육학적인 전통을 다루려다 보니 ‘근대’가 시작되는 시기가 의미 있는 출발점으로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고대와 중세의 진정한 ‘고전적’ 저술가들도 흥미 있는 인물임이 틀림없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그들은 ‘교육자’가 아니다. 그들의 교육론과 교육적인 영향은 자신들의 철학, 수사학, 신학 또는 우주론에 포함되어 있었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 대화록, 아우구스티누스, 알쿠인, 라바누스 또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떠올리면 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독립적인 교육학 이론과 더불어 교회와 국가, 가족과 직업적 신분에 대한 ‘교육학’의 제도적 독자성을 지향하며 특정한 실천영역을 뚜렷하게 보여주었던 것은 근대가 시작된 이후였다.
또한 이 책에서 주목한 것은 실제로 뛰어난 교육자가 아니라, 교육학자들의 이념에 비해 행정당국과 그 관청의 권력이 뚜렷이 나타나던 19세기 복고단계에서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키워가던 전형적인 지위를 중요시했다.
누가 교육학의 거장인가
먼저 제1권에서 다룬 거장들을 살펴보자. 에라스무스, 이그나티우스, 몽테뉴, 코메니우스, 프랑케, 페늘롱, 로크, 루소, 바제도, 캄페, 트라프, 잘츠만, 콩도르세, 페스탈로치, 헤르더, 훔볼트, 슐라이어마허, 헤르바르트, 프뢰벨, 베케도르프, 디스터베크, 스펜서 등 22명의 거장이다. 북유럽 르네상스의 가장 위대한 인문학자인 에라스무스의 생년이 1469년이고, ‘진화론’을 주장했던 스펜서의 몰년이 1903년이니 15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5세기에 걸친 광범위한 인물을 다룬 셈이다.
한편 제2권에서 다룬 거장들을 살펴보면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딜타이, 듀이, 케르셴슈타이너, 오토, 몬테소리, 리츠, 뷔네켄, 게헤프, 한, 슈타이너, 페터젠, 마카렌코, 부버, 놀, 리트, 슈프랑거, 플리트너, 피아제 등 21명의 거장이다. 교육학의 거장이기보다는 교육학을 위한 거장인 마르크스의 생년이 1818년이고, 어린이가 이해력을 획득하는 과정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학자 피아제의 몰년이 1980년이니 19세기 초부터 20세기 말에 이르는 인물을 다룬 셈이다. [인터파크 제공]
작가 소개
저자 | 한스 쇼이얼
한스 쇼이얼 1919년 태어나 2004년에 사망했다. 함부르크 대학교에서 교육학, 철학, 심리학, 예술사를 공부했으며, 1952년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하고 1957년 함부르크 대학교 교육학과에서 교수자격시험을 통과한 뒤, 이후 오스나브뤼크 교육대학교, 에를랑겐 대학교, 프랑크푸르트 대학교, 함부르크 대학교의 교수를 역임했다. 1964 ~ 71년에 서독 총장회의 학교위원회를 이끌었고, 1968 ~ 72년에는 독일 교육학회장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는 <놀이>, <범례적 교수>, <독일 학교제도의 편성>, <체계적 교육학의 문제점>, <교육학 편람>, <교육인간학>, <교육의 역사> 등이 있고, 공저로 <놀이의 이론>, <교육학적 시각과 사유 입문>, <교육학 사전> 등이 있으며, 「교육학연구지」의 공동발행인으로도 활동했다. [인터파크 제공]
10 슈타이너
Rudolf Steiner , 1861∼1925
1919년 슈투트가르트에서 최초로 발도르프 학교 (Waldorfschule) 가 설립된 이후
슈타이너의 교육론에서 다양한 자극들이 생겨났다. 그렇지만 슈타이너는 일반교육학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여전히 낯선 인물로 머물러 있었다. 공적인 학교제도의 실제에서는
여기저기 발도르프학교에서 실시되는 새로운 것들, 이를테면 에포헤(집중주기-옮긴이)
수업 (Epochenunterricht) 예술분야의 교육, 공작, 수공에 실기수업과 낌은 것을
개별적으로 주목했다 그런데 교육세계의 완결성 면에서 슈타이너 교육학은 인지학
(人知學. anthroposophischen) 적 인간학에서 출발했다. 즉 인간학은 성장해나가는
젊은이에게 몰두한 것이다. 슈타이너 교육학은 수십 년이 지나도록 개혁교육의 테두리에서
또는 학문적으로 교육학적 토론에서 적절하게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사람들은 그 진면목을 보지 못했거나 또는 얄잡아 보는 투로 “교육의 변두리", “〔문제성
없는〕편안한 세계”라고 언급하면서 종파주의적 구석으로 몰아붙였다. 아동과 청소년에게
문명의 병폐와 사회병폐가 놀랍도록 급증하고,국가적 교육개혁과 “인간적인 학교”애 대한
요청이 대두되면서 슈타이너의 교육구상안에 대한 의미성 부여가 그동안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게 되었다. 발도르프 교육론과 이에 대한 기본사상에 관한 관심이 끊임없이
증가하면서 오늘날 새롭게 재고되고 있다 그 내용이 이미 수년 전부터 교육적으로 의식
있는 부모들을 움직였기에 학교설립이 기능하게 되었다. 발도르프 운동의 급격한 확장은
아직은 이론적으로 거의 정리되어 있지 않지만,슈타이너가 시작하여 계속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자극이 실제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생애와 업적
1861 년 2월 25일 슈타이너는 현재 크로아티아의 작은 마을인 크랄례비치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당시 철도역사의 전보담당자로 일했고, 나중에는 오스트리아의 남부철도청의
역장으로 근무했다. 기술적인 것, 기관차의 도착, 출발과 신호장치, 그리고 전신시설들이
벌써 어린나이의 슈타이너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철도업무에 연결되어 있는 그
모든 것들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가 나의 주의력을 자극했다. 그렇지만 특히 잔가지 속으로
나를 막 끌어당긴 그것은 자연법칙적인 것이었다.” “나는 정거장의 전신장치에서 생겨나는
전기론의 법칙성을 우선 생생하게 알게 되었다 (Steiner 1925 ,14쪽과 30쪽)."
슈타이너가 열 살이 되었을 때 마을의 가톨릭 신부는 코페르니쿠스의 우주체계,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지동설과 자전.일식과 월식에 관해 설명해주었다. 슈타이너의
아버지는 아들이 나중에 남부역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있도록 1872 년 빈의 노이슈타트에
있는 실업학교로 진학시켰다. 이 학교에서는 탁월하고 독자적인 능력을 가지고 연구하는
훌륭한 교시들이 자연과학, 수학, 기하학, 물리학과 화학과목을 실험을 통해 학생들을
분명하게 지도해주었다. 슈타이너는 대학에 진학하기로 했고,1879년 빈의 공과대학교에서
수학,자연사와 화학을 전공으로 택하여 실업학교 교직을 이수하고자 했다(같은
책.53쪽),물리학에서 라이틀링거(Edmund Reirlinger) 교수뿐 이니라 종합기하학의 학업과
슈타이너가 철저하게 연구했던 헤겔 (Ernst Haeckel) 의 유기체의 일반형태론을 만난 것은
그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슈타이너는 동시대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있는
기술적 자연과학의 체험범위에 대해 맞서 있다. 유년기부터 슈타이너는 초감각적 세계의
실재를 의식하고 있었다. 동시에 슈타이너는 사람들이 이러한 ‘정신세계”를 당연하게 말할
수 없다는 점을 알았기 때문에 기하학적인 법칙성을 가지고 정신적 체험의 본질에 관해
설명하고자 아주 일찍 부터 시도했다. 나중에 그는 이러한 탐색과 관련하여 철학적 형태를
받아들였다.
1881년 1월 13일자 편지에서 대학생인 슈타이너는 힌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쓴다.
’‘내가구하고자 노력한 것은 작년에 탐구했던 것이라네. 셸링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
도대체 진정일까 히는 의구심을 지닌 채 말일세. ‘우리 모두에게는 신비하고, 경이로운 어떤
능력이 내재해 있지만 시간의 변화 속에서도 아주 깊숙한 곳에 묻혀 있지. 무엇보다 이것
은 외부에서부터 무엇인가 부가되어 빼앗겨버린 자신을 잡아 끌어당기며,이때 불변적 형태
가운데 우리 안에 영원한 것으로 존재해 있는 것을 관조하게 된다는 것일세.’ 내가 예전에
믿었고 지금도 여전히 믿고 있는 바는 그런 내재적인 능력을 나에게서도 분명히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지. 물론 이미 이전에 그것을 어렴풋하게는 알고 있었다네. 그런데
완전한 이상주의적 철학이 본질적으로 변형된 하나의 형태로 지금 내 앞에 놓여
있으며,그와 같은 발견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이 되고 만 것이라네(Briefe, I,63쪽)!"
젊은 시절 슈타이너의 이와 유사한 종류의 표현들 속에서 그가 인간의 깨달음에 대해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여기서 자의식이란 자연지식과는 분명 상관없이 정신으로서
파악된 것을 의미한다. 피히태의 과학론에서 슈타이너는 내적 인간의 파악을 위한
출발점으로 사용 될 연습서를 찾았다. 이것을 경험한 후 슈타이너는 그 다음의 문제를
제기했다. 사람들의 내면적 활동 가운데 만들어지는 정신체험. 즉 자연인식, 신체적 체험과
문명과 문화로서 외부에서 인간에게 다가오는 모든 요소들이 정신적으로 체험되는 것으로서
어떻게 전달될 것인가?
그런 전달에 대해 슈타이너는 그 당시 괴태의 자연과학, 특히 변형(Metamorphose)에
대한 생각에서만 그 발단을 찾아낼 수 있었다. 슈타이너는 이 사고를 다음과 같이 이해했다.
즉 바뀌는 형상 속에서 정신적인 것(원형)의 변화를 우리는 주의 깊게 관찰할 수 있다.
식물의 원초적인 원형질 (Urpflanze) 이란 대략 “새겨진 형태이며. 이것은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 있으면서 자라나는 것이다 (Goethe)."
백만 번 이상 다르게 표현되고 변형되는 가운데에서도 정신적으로 동일한 원리가
작용한다는 것이다. 개념적인 열쇠는 형상 또는 모습의 변화일 뿐,그것을 통해 같은
기능들이 가장 상이한 형태들로 인식된다. 즉 같은 생명체의 식물 안에 들어 있는 어떤
원리의 변형은 그 싹이 팽창되고 응집되며, 대립과 상승을 통해 변하여 가시적이며
분명해진다는 것이다.
자라나는 아동을 이해히는 데에서 형상의 변화는 효과적이다 이 묘사의 중심테마가
슈타이너 교육의 의미를 담고 있다 대개 현대교육자들이 누차 말하는 것은 아동은 학습한
것을 변형시키지 않고 받아들인 다음 그것을 나중에 적용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반면에
슈타이너는 심오한 변화를 다른 각도에서 깊이 생각하고 있다 이를테면 오늘날 사람들이
흔히 믿고 있는 것은 일찌기 교육된 비판능력이 나중의 삶에서 비판적 시민을 배출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슈타이너의 견해는 모방하고 몰두하는 아동의 놀이가 나중의 삶에서
자유로운 행동의 기본토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놀이에 대한 몰두가 상황을
적극적으로 파악하는 것으로 변형되기 때문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런데 어린나이에
훈련된 비판능력은 하나의 일에 강력하게 결합되어 있는 것을 배우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에
나중의 삶에서 불안증과 집중력 약화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원형질의〕변형에 대한 생각은 형상이 법칙에 따라 변하는 것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된다. 변형은 인과성 대신에 유기체 속에서 나타난다. 특히
단순힌 인과성으로 설명하는 방법에는 원인이 되어 야기되는 특정에 관해 세밀하게
생각하지 않고, 흔히 원인 하나만을 말하는 위험성이 들어 있다. 사람들은 직선적으로 단
순하게 생각하게 된다. 이에 반하여 변형에 대한 사고는 복합적인 형상들이 규칙에 따라
변하는 것을 보고 이해하는 것을 배우도록 시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흔히 숨겨진 부분(씨앗)이 어떤 모습을 드러내며 여러번 변형된 모습을
띠게 됨을 의미한다(잎새,개화,열매). 인간의 영역에서 변형은 다양한 차원 안에서,
그리고 그 차원들 사이에서 변화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슈타이너 교육학에서 결정적인 것은
이러한 변형에 대한 생각을 바탕으로 유아기의 모방에서 학년기의 학습을 거쳐 자유로운
인식에 이르기까지의 학습양식에 있다. 이렇게 해서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내재화되고
정신적으로 만들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생각 또는 사고의 일정한 유형이 신체적
형상(건강,질병,직립보행)을 가정하는 데 가능요소일 수도 있다. 현대의 심신의학에서는
신체적 질병에 대한 내면적 원인을 추적하여 그와 같은 현상들을 규명해내고 있다 .이렇게
이해된 변형-사고의 의미는 통찰 위에 쌓아올린 교육론을 위해서 분명하다. 학습양식들은
정신적 형상이며. 또한 그것은 적어도 정해진 학습양식들이, 예컨대 대락 단순한 사실들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무의미하게 외우며 정해진 건강상의 결과를 가져오며 훗날 병을
유발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슈타이너는 괴테에 관한 연구에 아주 심도 있게 몰두했다. 그래서 이미 21세의 나이에
퀴르슈너(Joseph Kürschner)가 시작한 괴테의 자연과학 저작물들을 편집하는 일에
동참했다. 1890년 슈타이너는 바이마르 소피에 출판간행의 조력자로 초빙되었다. 괴테의
저작물에 대한 작업은 전체적으로 거의 15년이 소요되었다.
슈타이너는 실업학교의 교사가 되려던 에전의 목표를 이 시기쯤에 포기해야 했지만, 수년
동안(1875년부터 1890년까지) 여러 아동을 가르쳐왔다. 14세부터 과외지도는 그에게 유일한
수입원이었다. 1884년부터 1890년까지 슈타이너는 빈의 한 가정에서 가정교사로 기거했다.
그 집의 아들 넷 가운데 하나가 뇌수종으로 인해 심한 장애가 있었는데 슈타이너의 과제는
그 아동을 지도하는 일이었다.
슈타이너는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교육임무가 나에게는 학습의 풍요로운 원천이 되었다.
내가 적용했던 교육실습을 통해 나는 인간의 정신적 내면적인 것과 신체적인 것 사이의
연관성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나는 생리학과 심리학 분야의 연구에도 심도 있게
몰두했다. 교육과 수업이란 인간을 실제적으로 아는 일을 토대로 하나의 예술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 아이를 지도하는 데에 하나의 경제원리를 신중하게
적용했다. 나는 반 시간짜리 수업진행을 위해 두 시간 동안 준비했다. 정신적인 힘뿐만
아니라 가능한 한 신체적인 힘을 적게 들이고, 가장 짧은 시간만 긴장하고도 학습능력을
가장 많이 올릴 수 있도록 그렇게 수업자료를 꾸몄다. 수업과목들의 순서를 아주 신중하게
고려하고, 전체일과의 분배를 적절하게 정해야 했다(Steiner 1925, 105쪽).” 이 학생은
뇌수종을 앓아 지적으로 한참 퇴보한 상태였지만 슈타이너는 이 아동을 지도하는 데
성공해 나중에 이 학생은 제도권학교에서 인문계 대학입학자격시험에 합격했다.
바이마르의 괴테 출판에 관한 작업을 마친 후 슈타이너는 1897 년 베를린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때 리프크네히트가 설립한 베를린 노동자학교의 이사진은 슈타이너에게 이학교의
교사가 되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역사과목과 교사, 성인노동자를 위한 수사학 세미나를
이끌면서 만6년 동안 이 학교에 재직했다. 슈타이너는 교사로서뿐 아니라 젊은 노동자들이
행하는 다른 활동들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인물로 알려졌다. 무엇보다 그는 노동자에게
관심과 열광을 일깨워주는 데 성공했다. 반면에 그 자신은 당시 베를린 노동자계급의
정신적 욕구와 가능성들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표현형태로 말을
해야 했다. 학생들을 어느 정도 이해시키기 위해 나는 노동자들의 개념과 판단형태에
익숙해져야 했다(같은 책, 375쪽)."
슈타이너는 교육문제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취하기 훨씬 이전부터 두 가지 특히 어려운
과제를 세웠다. 그것은 오늘날 점차 더 의미심장하게 되었다. 즉 장애아동을 지도하며
장려하는 일과 일반시민의 저편에서 그들이 이해하는 언어를 발굴해내는 것이었다. 나중에
이 두가지는 발도르프 교육 안에 녹아들게 되었다. 발도르프 학교에서 하나의 중심테마를
이루는 것은 교사의 입장에서 가르치는 일에 전제되어야 할 사항으로 생리적이고 심리적인
측변을 고려히여 학생윤 이해히는 일이다. 또한 교사의 입장에서 생동감 있고 구체적인
언어로 그것이 감정과 의지를 사로잡는 언어에 도달하는 것이다. 언어의 장벽을 단지
머리만이 아니라,그 사람 전부가 살아 숨쉬는 언어를 통해 허물어버리는 것을 발도르프
학교에서는 끊임없는 과제로 삼게 되었다.
슈타이너는 동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학문,예술,정치와 경제적 동향에 대해서도 놀랄
만한 주의력을 가지고 면밀하게 관찰해나갔다. 상세한 자서전에서 묘사된 것은 예를 들어
브렌타노 (Franz Brentano), 니체,헤켈과 셸러(Scheler), 새롭게 등장한 심리분석과
베를린의 보헤미안 (Bohème), 칸딘스키와 슈바이처와의 만남이다. 슈타이너의 그런 만남은
20세기의 태동에서 슈타이너의 길을 뚜렷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렇지만 여기서 항상 깊이
생각해볼 것은 슈타이너가 그 시대의 어떤 사조나 학파에 속하지 않고,대단히 독자적으로
혼자 터득해 나간 점이다.
당대 개혁교육자들의 노력들을 접하긴 했지만 그것에서 슈타이너는 분명 긍정적인 인상을
받지는 못했다. 얼핏 보면 당시의 개혁교육론 가운데 많은 개별요소들, 즉
예술교육운동(Kunsterziehungsbewegung)부터 노작을 통해 배우는 것에 이르기까지
일치점이 여러 가지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출발점이 포괄적으로
상이하다는 것을 보지 못하고, 본질적인 것이 개별적으로 비슷하다고 그렇게 확정해 버
리면,개혁교육운동과 발도르프 교육 모두에 대해 올바른 평가를 제대로 못하는 셈이 된다.
슈타이너 교육학은 1906∼1907년 사이 있었던 일련의 강연회에서 나타나며,또한
소분량의 저서 『정신과학에서 바라관 아동교육』(Die Erziehuη :gdes Kindes vom
Gesichtspu nkte der Geisteswissenschιift, 1907)에 요약되어 있다. 이 책에서 묘사된 것은
처음부터 인지학적 발단이 교육에서 전제되어야 할 사항으로서 인간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을 교육의 중심테마로 강조하고 있다. 우선 슈타이너의 이런 자극은 당시 별다른 반응이
없었지만,그 후 특히 1911∼17년에 걸쳐 교육학적인 테마들과 관련하여 이 점이 여러 차례
언급되었다.
1919년은 혁명의 해로서 비로소 슈타이너가 지신의 교육적 사고를 실제 실현시킬
가능성이 생겨난 해이다. “사회적유기체의 삼중구조론”(Dreigliederung des sozialen
Organismus) 캠페인을 벌이는 동안 슈타이너는 4월 23일 슈투트가르트 근교에 있는
발도르프-아스토리아 담배공장에서 강연회를 가졌다. 여기서 현대의 노동자계급이 안고
있는 교육상의 빈곤문제를 파헤쳤다.
그의 표현이 이중적으로 옥토에 떨어진 셈이다. 노동자단체에서 인지학자인 한(Herbert
Hahn) 박사가 얼마 전부터 노동자들을 위한 교양강좌를 제공했는데, 이들이 그것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상업고문관이던 공장주몰트(Emil Molt) 역시 인지학자였다. 재정상 어려운
시기였지만 몰트는 기업체에 속한 가족과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무엇인가를 계획하고
사재뿐 아니라 회사재원으로 그 일을 후원하기로 결심했다. 그런 가운데 슈타이너의 강연이
끝난 후 이어서 근로자협의체의 회의가 그날 소집된 것이다.
지금까지의 기르침괴 교육이 이미 낡은 것이라고 느껴오던 노동지들부터 노작을 통해
배우는 것에 이르기까지 일치점이 여러 가지 있는 것 이 이 강연에서 또는 직접 잇달은
계기를 맞아 자녀들을 위한 새로운 학교설립에 대한 질문을 제기했다. 그 계획안에 관해
이미 4월 25일 슈타이너와 첫번째 대화를 할 때 그 자리에서 슈터이너는 즉시 참여의사를
밝힌다. 5월 13일 민주사회당의 문화부장관 하이만(Heymann)은 1836년부터 계속
시행해오던 뷔르템베르크 주의 학교법을 토대로 하여 통합학교의 설립형식으로 잠정적
인준을 허용한다.
6월 초 몰트는 미래의 학교부지로 당시 카페 건물자리를 매입했다. 슈타이너는 학교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으로서 교사들을 초빙하여 이미 8월 21일 개교를 목전에 둔 발도르프
학교의 초대 교사를 위한 교육을 시작한다. 9월 7일 자유 발도르프 학교(Freie
Waldorfschule)가 마침내 문을 열게 되었다. 교사교육 강죄는 매일 오전 인간학에 관한
강연으로 시작했고,이어서 교수법의 테마들이 다루어졌다. 오후에는 실제연습이 세미나
식으로 개최되었다. 이 코스에서 슈타이너는 교육학적으로 새로운 어떤 이론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교수-방법론의 모든 개별설명의 저편에서 교사는 교육적 수행에서 혼신을 다하여
준비 할 것을 설명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통찰과 독창력을 일깨우며 아동의 생활과 학습과정을 이해하는 것을
훈련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슈타이너는 교사교육 과정에서 가르침과 교육의 새로운 관점을
옮겨놓는 것에 제한을 두었다. 즉 학교에서 배우고 가르치는 것은 학습의 특별한
경우들이다. 학습은 모든 놀이에서,즉 활동하고 바라보는 가운데서도 계속 행해지고 있
다는 것이다.
이러한 학습은 삶의 과정 위에 토대를 둔 것이며 삶의 과정에 계속해서 작용하는 것이다.
행동하는 것,쉬는 것,바라보는 것,꿈꾸는 것,스스로 주력해보는 것,주의를 기울이고
긴장을 푸는 것,기억하고 또 잊어버리는 것이 삶의 과정들이며,그것은 수면 중과 잠에서
깨어날 때, 그리고 건강과 질병에도 작용한디는 것이다. 각 학교는 고도로 특화된 형태로
이런 능력을 필요로 하며,또한 교사는 거기에 무엇이 연관되어 있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
특히 교사가 염두에 두어야 히는 것은 학생의 주의력, 기억, 지적 능력을 요구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꾸고 지켜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사가 이러한 배경에서 자신의 행위를 본다면 교사란 어떤 숙달과 내용을 우선으로
전달하는 것에만 능숙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삶의 과정과 연관되어 건강과 질병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으로서 스스로를 의식해야 한다. 이와 같이 새로운 의식을 지닌 교사는 학생이
수면장애를 가지거나 과도하게 창백해 있으면 교사자신의 행동을 비춰보며 아동을
관찰하면서 스스로의 행동을 바로잡아 가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발도르프 학교는 그 당시 일련의 새로운 것을 실현했다. 첫번째는 남여 ‘성별
또는 학부모의 시회 계층과 관계없이 공동으로 교육하는 것이고,두번째는 1학년부터
8학년까지 갚은 학금을 맡아 이끌어가는 연속담임제이다. 세번째는 외국어교육을 1학년,즉
만 7세부터 시작하고,네번째는 에포헤 수업으로 몇 주에 걸쳐서 오전 2시간에 같은 과목을
다루어 그 학습소재에 대한 집중력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밖에도 성적평가,유급과 낙제제도를 완전히 폐지했다. 예능과 실습활동은 모든 학년에
걸쳐 학교생활에서 비중 있게 다룬다. 수공예, 수공업,미술,음악,문학작품 낭송과
오이리트미 (Euryrhmie)가 정규시간표에 들어가 있다. 그 다음 직조, 방적, 응급조치법,
텃밭 가꾸기, 들일하기, .그리고 연극을 추가로 배우게 된다. 또한 교사들 사이의 자치행정은
개교 첫날부터 당연하게 이루어졌다. “회의”에 관해 슈타이너는 개교일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회의는 자유로운 공호화주의적 회담이다. 여기서는 각자 모두가 주권자다.” 나아가
첫해에 이미 학교 내 전속의사를 두었고, 그는 자동적으로 교사협의체에 속했다.
발도르프 학교 설립 당시 학급 수는 8개였고. 전체교사 12명에 학생수는 256명이었다.
1924년 이미 학급 수는 23개, 교사 47명, 학생 수는 총 784 명에 달했고 학년 수를
확장해나가며 동급반을 더 설치해나갔다. 이러한 외적 성장과정 가운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수반되었다. 발도르프-아스토리아 공장은 우선 교사를 회사직원으로 채용했는데도 이렇게
성장한 학교를 재정적으로 더 이상 지원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학교는 법적으로
독립했고,학교단체는 법적이며 재정적으로 기업의 소유가 되었다.
많은 프로젝트가 착수되었다. 특수학급이 개설되었다. 매달 학교축제가 열리는데,여기서
각 학급이 배운 것을 서로 보여줌으로써 이것은 학교생활의 확고한 부분이 되었다. 학교가
새롭게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위기와 문제점들은 자연히 있게 마련이었다. 학생들의 불평,
관청과 상대하면서 발생히는 애로사항, 외국어 교육의 문제점,다수의 교사들이 강의식으로
수업을 진행하는 양태 외에 많은 다른 것들이 회의석상에서 자기비판으로 표현되었고, 이때
어려움들이 거침없이 논의되었다. 나중에 이어진 인간학에 대한 교사교육코스를 통해
슈타이너는 그 어려움들을 극복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자극을 제공했고,또한 교육적
책임감을 촉진시키며 그런 느낌을 좀 더 예민하게 만들어나갔다.
1924년 가을 슈타이너의 병세가 깊어졌을 때, 발도르프 학교는 12학년까지 늘어났다.
보고에 따르면 슈타이너는 상급학년을 다르게,즉 모든 수업에서 예술적인 변에 교육의
역점을 두는 변회를 계획했다. 슈타이너는 사망직전 학교운영을 교사협의체에 완전히 넘겨
자신의 교육적 발전이 그들의 손안에 놓이게 되었다. 슈타이너는 1925년 3월 30일
도르나흐에서 타개했다.
근본사상
아동교육
슈타이너가 설명한 학습양식과 교수방법에 관해, 그리고 개별적으로 7년 단위의
발달특성에 대한 설명은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주기적
단계이론으로 잘못 이해되고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슈타이너의 저서 『정신과학에서
바라본 아동교육』(Die Erziehμηg des Kindes ωm Gesichtψ. unkle der
Geisteswissenschajt)을 읽은 독자는 슈타이너가 바로 7년 주기를 시기별로 내적 자동화로
펼쳐지는 단계별 도식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놓치치 않는다. 슈타이너는 오히려
아동이 학습하는 전형적인 성향을 묘사하고,아동의 학습형태에 주목하고 있다. 또한
성인의 어떤 입장이 아동의 성향과 학습형태에 가장 적합한가를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일방적인 발달생리학적 측면이 아니라 어린이의 학습가능성뿐
아나라 성인의 가르침과 태도가 상호작용을 이룬다는 점이다. 아동의 특성은 말없는
요구로서, 어른의 태도는 의미 있는 답변으로 묘사된다.
슈타이너가 제시하고 있는 아통과 성인의 의미 있는 공동작용은 자주 묘사된 “인지학적
정신연구”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 제시들은 많은 경우에서 경험적으로 검토될 수 있다.
슈타이너의 개념을 도입히는 사람은 아동의 행동뿐 아니라 해부학적이고 생리학적으로,
또한 부분적으로 심리발달적 연구(대략 피아제의 경우)를 통해 그 말들을 증명해볼 수
있다.
슈타이너는 유치(乳齒)갈이 시기까지 배우고 가르치는 양식을 모범과 모방의
상호작용으로 특징지었다. 분명한 것은 아동이 특히 첫 단계 연령기 (0∼7세)에서는 도덕적
경고와 지적 가르침에 아직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유아기 아이는 감각적으로 대하고
있어 거의 모든 행위에 열려 있는 상태다. 그래서 유아는 많은소리, 자세, 언어와 행동을
끈기있게 연습하면서 모방한다. 유아가 언어를 배울 때,모방이 지극히 활동적인 양태로
나타나는 것을 가장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슈타이너는 말하기를 배우는 것은 정신적 내면적
생명활동이 여전히 신체적 내장기관형성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일어나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언어습득에서 유아는 소리의 음뿐만 아니라 뇌구조를 형성해간다. 말하기란 사회적으로
발화하고 접촉하는 일을 시작하고,나아가 세상에 대한 첫 의미를 하나씩 엮어가는 것이다.
지칠 줄 모르고 따라 말하면서 어린이는 앞서 발화된 말의 속 안을 더듬어가고 음절과
어휘를 따라서 하다가 마침내 문장구성을 흉내낸다. 이때 유아는 겨우 무엇인가를
지명해가는 데 주력하며 주변세상을 물으면서 항상 본보기에 의존해 있다. 유아는
감각적으로 현존하는 대상을 필요로 하고, 동시에 모든 감각적 인상이 몸전체에 작용하며
각인된다. 그 이유는 어린이가 아직은 주변의 과정에 대해 조용히 생각하며 바라보면서
거리를 두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치갈이 후에 이러한 성향은 변화한다. 생각과 상상력을 이제 자기 마음대로 처리 할 수
있게 된다(슈타이너는 이것을 탄생한다라고 표현함). 또한 이러한 상상력을 가지고 의미를
담은 그림, 비유,이야기를 이해한다. 그런데 아동은 배우는데 있어서 지침이 되는 어떤
관련인물(슈타이너는 권위라고 표현함)에 의존한다. 사랑, 존경심, 그리고 신뢰감이 매개물인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 이제 학년기의 아동은 교사에게서 세상에 대한 설명을 받아들일 수
있다. 상상력의 발달은 다양한 단계로 이루어지므로 발도르프의 학습지도 계획안은 여기에
방향을 맞추고 있다. 추상적이고 다른 곳으로 돌려진 생각 안에서 젊은이는 본보기와
권위에서 벗어날 수 있고 스스로 선택한 이상에 몰두하며, 그것을 통해 서서이 자유로운
판단력을 개발하는 가운데 사춘기가 나타난다. 이제는 학습이 훨씬 더 내재화되며
독립적으로 일어난다.
인지학
1917년 슈타이너는 『내면의 수수께끼에 관해』(Voη Seeleηrälseln.)라는 저서에서
자신의 인지학을 위해 인간구성의 3요소에 관한 기본적 이론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내면활동은 사고,느낌,욕구로 나뉜다. 신진대사의 체계를 떠받쳐주는 욕구는 행위로서
구체적이다. 누구나 자기행동과 사실상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모두는 행위 속에서 살아간
다. 느낌이란 모든 리듬상의 과정과 연결되어 있다. 또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감정 안에서
행위하는 욕구를 특징짓는 것과 같이 감정과 어느 정도 동일하지 않지만 다소간 뒤섞여
있다.
특별하게 말할 때, 언어의 멜로디, 말하는 자세와 강세에서 느낌이 드러난다. 생각과
상상이 신체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곳은 신경감각조직인데, 생각과 상상은 조용하게
주시하고 거리를 둔다. 욕구가 신체를 붙잡고 있는 반면, 신경감각조직은 아주 다양한
것들을 비추는 거울처럼 나타난다. 거울자체의 반영은 그 어떤 비중 있는 결과를 남기지
않는다. 모든 내면적 과정에서 3요소 모두가 함께 작용하지만, 보통은 그 가운데에서 한
가지 요소가 지배적이다. 슈타이너의 저서 『교육학의 토대로서 일반인간학』(Allgemeinen
Menschenkunde als Grundlage der Pädagogik)에서 이와 같은 인지학의 요소는
발도르프 교사양성을 위한 첫번째 코스(1919)에서 전제된 것이다.
보통의 일반 학교수업은 생각과 어휘로 무엇을 연상하는 접근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순수하게 사고하고,표면상 자주 절차가 이루어지는데,가능성을 숙고하며 개념과 법칙성을
목표로 하고,수업은 가능한 한 상당히 조용한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그렇지만 이
상태에서는 학생 스스로가 수업에 관여하는 것이 아주 조금 이루어질 뿐이다. 학생들은
과거의 것과 이미 되어진 것에 전념하게 된다. 물론 그렇게 해서 간격, 명백성과 자유를
얻게 되지만,동시에 냉담해 있고 상상만 할 뿐 그것에 별로 동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슈타이너가 『일반인간학』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거리감과 추상화하는
것은 상상에 토대를 두고 있는데,그런 경향에는 반감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의식에서는 그런 것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이와 같은 반감은 자유로운 고찰을
위해 긴요하지만 삶을 지키는 데에서,그리고 사회적 관련 속에서 구속력이 없고 접촉을
하지 않게 만들어 추진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배우고,어떤 자세나 입장 또한 학교의 숨겨진 커리률럼을 통해서 전달되고
훈련되기 때문에 생각이 일방적으로 교육된다. 이런교육에는 다른 학습형태들이 대립되므로
타인과의 접촉을 어렵게 만들고 불안증과 무책임성까지 이르는 사회적 결과가 발생된다.
이미 생각 자체의 영역에서 이와 같은 편파적 현상은 상상의 뜻에 따르고, 완전히
입체적이며 개인적 차원에서의 구체적 완성이 저지될 수 있다.
이에 반하여 수업이 생동감 있게 진행되면 학생은 상상력과 감정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다. 이때 학생은 언어로 받아들인 감각적 묘사를 자유롭게 형상화할 수 있게 된다. 만약
받아들여진 것을 대략 그림으로 그리거나 또는 행위로 옮겨보면,그 참여도는 더 강해진다.
행동과 작업은 누구에게나 신체적으로 이루어진다. 인간은 행동함으로써 어떤 일에
참여해가는 가운데 종종 감동을 느끼게 된다. 행동에서 인간은 세상과 결합한다. 생각과
개념형성이 반감의 몸짓을 보여주지만 행동은 그 일에 다가서는 가운데 좋은 감정을
나타낸다. 이 호감은 의식적으로 직접 일어나지는 않지만,모든 아동에게 행동에 대한
흥미로, 동작의 즐거움으로 관찰할 수 있다.
인류학의 이런 교육적 결과들이 무엇보다 발도르프 학교의 기본과목에 녹아있다.
포괄적으로 기계화되어버린 오늘날 어린이들은 세상에서 배울 것이 없다. 즉 실제의 행위가
스위치만 누르면 되는 그런 세상에서 발도르프 학교는 의지를 사로잡는 실질적이고
예술적인 행위들을 제공하고 있다. 수공업,직조,다양한 형태의 수공예, 목공,대장간일,
동판작업,텃밭일과 조형품 만들기,조각, 회화,스케치,그리고 음악분야, 문학작품 낭송과
오이리트미 등이 그것에 해당한다. 중요한 “이론적”과목들 또한 적어도 같은 비중으로
파고들어 실제에서 예술적으로 형상화시켜본다. 그래서 기하학은 토지측량에서 실질적으로
대략 적용해보고, 언어습득은 장면놀이 또는 연극공연을 통해 생생한 상황으로 옮겨본다.
반대로 수공예와 수작업에서 행하는 실제적인 활동은 계획하고 계산하는 설계를 통해서
정신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스며들게 한다. 결국 시간표가 그렇게 짜여 규칙화된 순서대로
하루의 일과가 전인적인 것을 요구한다. 오히려 정신적인 주요과목수업은 오전 첫 두시간에
들어 있다. 그 다음 언어과목과 예술실습이 어어지고, 그 다음 체조나 실기과목들이 들어
있다. 실기에서는 이러한 구상안을 순수하게 이행하는 데 공간과 교사가 제한되어 있어
어려울 때도 있다.
교육목표
발도르프 학교의 교육목표는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다. 슈타이너는 학교를 설립할 당시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다. “만일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경직되어 있지만 않다면,
여기 이 지구상에 있는 우리 인간은 근본적으로는 항상 삶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생을 배우는 것, 바로 그것을 우선 배워야 합니다. 죽은 개념, 그리고 그와 유사
한 것들 때문에 훗날의 존재에서 인생을 배우는 것을 중단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경직되어
있지 않아야 합니다 (Steiner 1956,58쪽)."이런 표현에서 시사하는 바는 젊은이들은
학교에서 다 만들어진 개념들과 최종적인 정의들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나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개념들은 열려 있어야 한다. 사물들을 항시 체험할 수 있게 하는 예술적
교육을 통해 의문들이 생기고,무엇을 받아들이는 인식이 일어난다. 끊임없이 두뇌와 손이
함께 작용하는 교육을 통해 사실상 실질적인 체험이 부여된다. 인생을 배우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교육의 목표가 표면상 완전히 다르게 표현될 수도 있다. 자연과학과 기술문명이 지배하고
있는 우리 세상에서 인간은 스스로가 상실되는 위협을 받고 있다. 인간의 사고와 자기이해
는 기계적이고 인공두뇌학의 모델에 의해 계획되며,인간의 의지는 기계의 취급을 통해
기계화되거나 마비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도르프 교육은 기계의 일방적 경향에 대해
균형을 취하는 데 그 과제를 두고 있으며,여기서 수업지도와 교육은 무엇보다 인간에게
방향을 두고 있다. 전적으로 위험스러운 것은 정치행정상의 조처에 의해 교육이 억압되고
기계적 자연과학적 처리들이 또한 인간을 다루는 데 투입되고 있는 점이다.
슈타이너의 교육학은 두 가지 요소에서 일반교육학과 대비를 이룬다. 한편으로 아동과
아동의 발달에 따른 수업인데,이것은 신체적, 내면적 그리고 정신적(영혼적) 가능성들이
온전하게 펼쳐지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또 다른 한편 수업내용은 모든 영역에서 인간의
인식을 의식적으로 보살피는 데 도움을 준다. 그래서 발도르프 교육은 인간관계와
실제적으로 정신적인 인간이해의 보살핌을 통해 학생들이 미래를 잘못 설계하지 않고,
인간존재의 인식을 일깨워주는 데 희망을 걸고 있다.
효과면
발도르프 학교의 설립은 제1차세계대전 이후였지만 정신적으로 열려있고 관심을 보이는
분위기에서 독일 국내외적으로 주목받고 있었다. 이미 1920년 스위스 측의 교사는
슈타이너에게 교육쇄신을 위해 바교적 긴 강좌를 끌고나가 줄 것을 청했다. 이듬해
스위스에 그 외에 세 개의 강좌가 뒤따랐다. 스위스에서 그 충격이 살아 움직여서
슈타이너가 사망한 후에도 “루돌프 슈타이너 학교”가 몇 개씩 설립되었다. 30년이 지난 후
베른 시에서는 발도르프 학교의 원칙에 따라 움직이는 일반 국공립학교의 교사들이
자유교육협회를 발족시켰다.
1922년,1923년,1924년 영국에서는 슈타이너를 강연연사로 초빙했다. 옥스퍼드에서 열린
회의인 ’‘교육에서의정신적 가치”는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고,여기서 슈타이너는 편견
없는 관중 앞에서 9차례에 걸쳐 강연회를 가지면서 자기지신의 교육학을 설명할 기회를
가졌다. 영국 언론계는 독일학자가 인류의 교육이상을 설파한다고 보도하며 자유롭고
공동으로 자치운영되는 학교에 매료당했다. 슈타이너의 사망 전 영국에서는 발도르프
학교의 원칙에 방향을 둔 두 개의 학교가 설립되었다. 또한 네덜란드에서는 1923년
자유학교가 탄생했고,아른하임에서는 일련의 교육학 강연회가 마련되었다. 1979년 현재
영국과 네덜란드에는 발도르프 학교가 총 40개에 달한다.
1923년 3월 슈투트가르트의 발도르프 학교가 처음으로 예술교육(학) 대회를 개최했다.
여기서 발도르프 교사들이 신(新)교육학을 설명했고 슈타이너는 두 개의 강연만을 맡았다.
슈투트가르트의 교육학 대회는 이듬해 1924년에도 대성황을 이루었다. 참석자 수가 1,700여
명에 달했다. 발도르프 교사들이 자신들의 특별한 활동에 관한 장을 발표했고 청중들의
환영 속에 슈타이너가 교육에 관해 다음의 발제 아래 5개의 강연을 하게 되었다. 즉
‘가르치는 방법과 교육의 생명조건들’(Die Methodik des Lehrens und die
Lebensbedingungen des Erziehens)에 관한 이 강연들이 독일에서는 마지막이 되었다.
슈타이너가 사망하던 1925년 유럽에서 발도르프 교육론에 방향을 둔 학교가 한 번에 7개씩
설립되었다.
1925년 가을 슈투트가르트의 정학사 하르트리프(Hartlieb)가 거의 4주간에 걸쳐 학교
감사를 실시하고 정부장관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발도르프 학교와 관계를 맺는 사람은
처음 보는 순간 교사협의체가 학교를 맡고 있다는 것에 강한 인상을 받는다. 교사진들의
상호연대감이 모범적으로 보인다."..“이런 연대성이 각 개인에게 가장 자유로운 움직임을
허락할 수 있다. 발도르프 학교는 감시권한을 행사하는 간부진이 없고 교과과정이 교사
개인의 행동범위를 전혀 제한하지 않는다.” “다양한 학년을 시찰하는 과정에서 내가 목격한
것은 국공립초등학교에서는 친숙해질 수 없는 학생들,즉 노동자계층의 자녀,가정환경이
아주 열악한 학생들. 아픈 어린이들조차 발도르프 학교생활에서는 건강하며 행복을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그후 발도르프 교육에 관해 이어지는 역사는 다음과 같은 수가 반영하고 있다. 1938년
독일에서 발도르프 학교금지령이 내려지기 바로 직전 전국의 학교 수는 고작 총 16개에
지나지 않았다. 이어서 8개 학교가 독일에서 폐교되자 발도르프 교사들은 영국,네델란드,
미국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일을 계속 이끌어나갔다. 히틀러 정권이 무너진 후 몇 년
동안 독일의 발도르프 학교가 25개로 늘어났다(1915년 통계). 또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영국,미국에서는 학교수가 증가했다. 발도르프 학교가 처음 개교한 이래 5년 동안
발도르프 학교는 이미 세계에 80 개 정도에 달했다. 1979년에는 180개로 늘어났고,그
가운데 60개가 서독에 있는 학교이다. 같은 시 기에 교사양성기관이 서유럽에만 8개가
되는데 그 교육기관에 “세미나”라는 소박한 이름이 붙었다. 교사와 학생에 대한 쇄도가
과도해서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고 있는 실정이다.
발도르프 학교운동의 급속한 팽창과 함께 슈타이너의 교육론에 관한 개별담화가
펼쳐졌다. 슈투트가르트 학교가 문을 연 지 50주년이 되던 해인 1969 년에 비(非)인지학자
인데도 대다수 교육정책가들은 오늘날 새롭게 토론에 붙이고 있는 많은 것들을 발도르프
학교가 벌써 1919년 선취하여 실현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1975년에는 국공립학교의 교육개
혁의 위기에 대한 표시로 발도르프 학교에 대한 일반적 관심이 강화되었다.
3년동안 비인지학적 출판사에서 발도르프교육에 관한단행본을 6권 출간했다.무엇보다
통일성을 이룬 교육의 실현화는 상급학년에서 세분화하지 않고 직업교육의 통합에
주력함으로써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루돌프 슈타이너의 영향에 관해 우리가 어떤
맺음말을 던지는 것은 시기상조가 될 수 있기에 3년 동여기서는 미래의 효력에 대한 커다란
가능성이 확실한 것만을 현재의 관점에서 지적해보았다.
| 크리스토프 린덴베르크 · 이정희 옮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