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식광대(Ein Hungerkünstler, en. A Hunger Artist, fr. Un champion de jeûne, 1922)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 권혁준,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3.
in 카프카 단편집, pp. 163-183 .
{[역주] 단식 광대: 이 작품의 제목은 독일어로 Ein Hungerkünstler, 영어로는 A Hunger Artist로 옮겨지는 데, 1900년대 말에서 제1차대전 이전 시기에 장기간 단식하는 행위를 일종의 기예로 여기며 공연한 인물들을 지칭하는 단어다 국내에서는 「굶은 광대」, 「단식 광대」, 「단식 예술가」 등으로 반역되고 있는데, 여기서 「단식광대」로 옮긴 것은 ‘광대’라는 말에 판소리 같이 전통 공연예술의 기예를 갖춘 예인의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136)}
#### [내용]
지난 몇 십 년에 걸쳐 단식 광대에 대한 흥미는 매우 즐어 들었다. 전에는 이러한 종류의 대형 공연을 독자적으로 개최하는 것이 해 볼 만했는데, 오늘날에는 그것이 완전히 불가능하다. 지금과는 다른 시절이 있었다. 그 때는 도시 전체가 단식 광대 대해 관심을 보였다. 단식하는 날이 하루하루 늘어날수록 관심은 더욱 높아졌다. 모두가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단식 광대를 보고자 했다. 나중에 가서는 종일 조그만 격자 창살 우리 앞에 죽치고 앉은 예약 신청자들도 있었다. 밤에도 효과를 높이기 위해 횃불을 켠 상태에서 관람하게 했다. 날씨가 좋을 때는 우리를 야외에 옮겨 놓았으며, 이럴 때는 단식 광대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관람거리가 되었다. 단식 광대는 유행 따라 관람하게 되는 어른들에게는 단지 흥밋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 어린이들은 깜짝 놀라 입을 딱 벌리고 또 안전을 위해 서로의 손을 꼭잡고서 단식광대를 바라보았다. ... (165, 시작 문장이다)
... 그러니까 40일째가 되는 날에는 꽃으로 장식된 우리[울타리]의 문이 열리고, 열광하는 관중이 원형극장을 가득 채웠으며, 군악대가 음악을 연주했다. 두 명의 의사가 우리 안으로 들어가 단식 광대에게 필요한 검진을 했고, 그 결과가 확성기를 통해 장내에 울려 퍼졌다.(170) ... ...그가 참고 버티면서 계속 단식을 하겠다는데, 왜 대중은 이를 참지 못하겠다는 것인가? 그는 또한 지쳐 있었고, 짚 위에 편안하게 주저앉아 있었는데, 이제 벌떡 일어나서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 음식이 있는 곳으로 가야 했다. (171) ... ... 이제 단식광대는 이 모든 것을 참아냈다. 머리는 아래로 굴러 내릴 것처럼 가슴 위로 축 늘어져 있어 그곳에 붙어 있는 것이 이해되지 않을 정도였다. 몸은 속이 텅 빈 껍데기 같았다. 두 다리는 자기 보존 본능에서 무릎에 꼭 붙어 있었지만, 발을 디고 있는 지면이 마치 진짜 땅이 아닌 것처럼 헛발질을 하면서 진짜 땅을 찾고 있었다. (171-172)
“단식은 제가 해야만 하는 것이고, 저로서는 달리 어쩔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단식 광대가 말했다. / “그것은 또 무슨 말인가?” 감독이 물었다. “왜 달리 어쩔 도리가 없다는 건가?” ...“왜냐하면 저는 제 입에 맞는 음식을 찾아냈다면, 이런 이목을 끄는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고 당신이나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배불리 먹었을 것입니다.” / 이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다. 그런데 그의 지친 눈에서는 여전히 더 이상 자부심이 넘치는 확신은 아니지만 계속 단식하겠다는 굳은 확신이 담겨 있었다. / “자 이제 처리하지!” / 감독이 말했고, 사람들은 단식광대를 짚더니와 더불어 묻어 버렸다. 그가 있던 우리에는 젊은 표범 한 마리를 집어 놓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황폐한 상태에 있던 우리에 이런 맹수가 이리저리 딩구는 것을 보는 것은 아무리 무딘 감각을 가진 사람에게도 기분전환이 되었다. 표범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었다. 감시인들은 오래 생각하지 않고 표범의 입에 맞는 음식을 가져다 주었다. 표범은 자유조차도 그립지 않은 모양이었다. 팽팽해서 거의 찢어질 정도로 모든 필요한 것을 갖추고 있는 표범의 고상한 몸뚱이는 자유까지도 함께 지니고 다니는 것 같았다. 그 자유는 이빨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표범의 목구멍에서는 관중으로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의 뜨거운 열기와 더불어 삶에 대한 기쁨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관중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울타리] 주변에 몰려들었으며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182-183 마지막 문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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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이진경, 동문선) 제3장 「소수적인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이런 이야기가 있다. [카프카에서 「단식광대」에 대한 견해는 이 문장 하나 뿐이다.]
<풍부하든 빈약하든 각각의 언어 활동은 언제나 입, 혀, 이빨의 탈영토화를 함축한다. 입, 혀, 이빨은 음식물에서 자신의 일차적 영토성을 발견한다. 소리의 분절에 몰두함으로써 입, 혀, 이빨은 탈영토화된다. 따라서 먹는 것과 말하는 것 사이에는 {이것이나 저것이냐라는} 어떤 이접(離接, 선택)이 존재한다. 더 나아가 겉보기에는 그렇지 않지만, 먹는 것과 글쓰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먹으면서 글쓰고, 나아가 쉽사리 먹으면서 말하는 것은 의심할 바 없지만, 글쓰기는 무엇보다도 우선 단어들을 음식물과 경쟁적인 것으로 변환시킨다. 내용과 표현간의 이접, 말하기 특히 글쓰기는 먹지 않는 것[먹는 것이 아닌 것]이다. 카프카는 음식물에 대해, 특히 동물성의 음식물 내지 고기에 대해, 그리고 백정에 대해, 이빨에 대해, 더러운 또는 금을 씌운 이빨에 대해 항상적인 강박을 보여주고 있다.(주1) 그것은 펠리체와 카프카 사이에 있던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먹지 않는 것은 또한 카프카가 쓴 글들 안에서 항상적인 주제다. 그 글들은 단식에 대한 기나긴 이야기다. 백정에 의해 감시당하는 「단식광대(Ein Hungerkünstler, fr. Un champion de jeûne, 1922)」는 자신의 이력의 마지막을 날고기를 먹는 야수 옆에서 – 이로써 관객들을 짜증나는 선택지 앞에 서게 하는데 – 마치게 된다. (51-52)
(50QLB)
(주1) 카프카에게 이빨은 항상적인 주제다. 백정이었던 할아버지, 정육업에 대한 어깨 너머식 교육, 펠리체의 턱뼈, 마리엔바트에서 펠리체와 잘 때를 제외하곤 지속되었던 육식의 거부. Nouvel Observateur(72년 4월 17일)의 꾸르노(Michel Cournot, 1922–2007, [프랑스 기자 영화감독])의 글 “Toi qui as de si grandes dents”을 참조. 이는 카프카에 대한 아름다운 텍스트다. 우리는 먹는 것과 말하는 것 간의 유사한 대립을, 그리고 무의미라는 비슷한 출구를 루이스 캐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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