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 대부분 비닐하우스 속에서 사철 농사를 지니까 시골생활에 겨울이라고 한가할 리 없겠지만 40년 전만 해도 겨울은 농한기였다. 어른들은 이때 뒷방에 모여 막걸리를 드시며 화투를 치거나 새끼줄을 꼬고 가마니를 짜면서 지루한 겨울을 보내셨지만 우리에겐 신나는 계절이었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농한기가 되면 아버지는 우리를 위해서 썰매와 연을 만들어주셨다.
아버지는 손재주가 탁월하셨다. 아버지가 만든 방패연은 동네 연 중에 항상 최고였다. 벼를 모두 베어서 휑한 느낌마저 주는 텅 빈 논에는 하이얀 살얼음이 드문드문 얼어 있고 칼바람이 휘파람소리를 내며 불 때마다 앙상하게 마른 풀잎들이 허리를 뒤로 젖히며 누웠다. 볼을 트게 하는 바람도 마다 않고 언니와 나는 아버지가 만들어준 연을 가지고 들녘으로 달려나갔다. 찬바람을 가르며 연은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손끝에 연줄이 팽팽해지는 느낌이 오면 나는 연줄이 끊어질 새라 신나게 얼레를 돌려 연을 더 높이 높이 날려보냈다. 동네 친구들과 연줄 끊기 시합을 하면 항상 아버지가 만든 연이 오래도록 하늘가를 맴돌며 하얀 구름 속을 날아다녔다.
아버지가 만들어 준 썰매는 또 어떻고... 널빤지랑 굵은 철사 줄을 가지고 잠시 뚝딱 소리만 나면 아버지의 손에선 씽씽 잘 달리는 썰매가 만들어져 나왔다. 언니와 나는 아버지가 만들어 준 썰매를 가지고 꽁꽁 언 강과 논에서 기진한 해가 서녘 하늘에 걸터앉아 밤을 맞이하고 엄마가 밥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썰매를 지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찬바람에 볼이 벌겋게 얼고 손등이 터서 쓰라려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때는 왜 그렇게 코가 많이 나왔는지... “훌쩍” 하면 누우런 코가 후루룩 말려 코 속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면 또 다시 외출. 손목으로 쓱 문질러 닦아내고 혀끝을 말아 올려 한 번 빨아먹고... 그래서 겨울에는 스웨터의 팔목 부분이 말라붙은 코로 인해 반들반들 윤이 나기도 했다. 그때 개구쟁이 악동이었던 우리들의 모습을 떠올리면 우습기만 하다.
이렇게 잘 노는 우리를 위해 엄마는 겨울이 오기 전에 벙어리 장갑을 몇 켤레 짜 놓으셨다. 자투리 털실을 모아 모양새는 없지만 두툼하게 짜서 혹시 놀다가 한 짝을 잃어버릴까 꼭 두 짝을 뜨개실로 묶어 목에 걸어주셨다. 앙고라 털실로 짠 것이 아니라 따뜻하지도 않고 볼품 없는 것이기는 해도 겨울놀이를 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방한용품이었다. 이 장갑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도록 우리는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을 하며 눈 속의 겨울을 즐겼다.
아! 참, 겨울이면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또 하나 있다. 이것은 아무나 경험할 수 없는, 내게 있어선 아주 소중하고도 재미있고 진귀한 추억이다.
등이 동그랗게 굽은 산 위에 하얀 눈이 차곡차곡 쌓이고 굽이굽이 돌아 흐르는 계곡의 크고 작은 조약돌이 긴 수면을 취하는 겨울이 오면 골짜기의 냇물도 하얗게 얼어 산 속엔 적막만이 감돌았다.
아버지는 가끔 언니와 나를 데리고 겨울 사냥을 나가시곤 했다.
"돼지야, 막내야, 깨구리 사냥 가자!"
아버지가 우렁찬 목소리로 우리를 부르시면 언니와 나는 신이 나서 미끄럼을 지치며 따라 나섰다. 계곡에는 두터운 얼음이 얼어 있고 윤기 없는 커다란 회색 돌들도 긴 겨울잠을 자고 있다가 우리들의 고함소리에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아버지는 신기하게도 개구리가 잠을 잘만한 바위 밑을 잘 골라내셨다. 아무리 커다란 바위라도 길다란 작대기를 바위 밑에 집어넣고 들썩들썩거리면 등이 검고 아랫배가 뻘건 식용개구리가 잠이 덜 깬 눈을 끔벅이며 도망갈 생각도 없이 뒤뚱거리며 걸어나왔다. 그러면 아버지는 뒷다리를 덥석 잡아서 개구리의 아래턱을 철사로 꿰셨다. 개구리가 잡힐 때마다 우리들은 소리를 지르며 손뼉을 치면서 좋아했다. 큰놈은 아버지 손바닥만큼이나 컸다. 철사 줄에 제법 많은 개구리가 줄줄이 달리면 아버지는 강가 주변 풀숲에서 마른 가지들을 주워 불을 지피고 잡힌 개구리를 구워 개구리 바비큐 파티를 열어 주셨다.
작은언니는 참 몸이 약했다. 그래서 별명도 돼지라고 붙여주었다. 그 당시엔 먹을 것이 없어서 어린아이들은 늘 영양이 부족해 얼굴이 누렇고 배가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진흙으로 이겨 만든 흙담을 손톱으로 긁으면 고운 흙가루가 부서져 나왔는데 하루는 작은 언니가 그것을 긁어먹다 엄마한테 무진장 혼이 난 적이 있었다. 때문에 겨울잠을 위해서 영양을 비축해둔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식용개구리는 훌륭한 보약이며 영양간식이었다. 겨울에 잡은 개구리를 바짝 말려서 나뭇가지에 꿰어 내다 파는 사람도 있었다.
맛나게 구운 통통하고 쫄깃쫄깃한 개구리 뒷다리는 잔병이 많고 삐쩍 마른 작은언니 차지였다. 나는 주로 개구리 알을 먹었는데 커다란 개구리 알이 입에서 톡톡 터지는 맛이란... 그리고 한 번 씨익~ 웃으면 하얀 이빨 사이에 개구리 알이 끼여 내 이빨은 까맣게 변해 있었다. 그러면 작은언니는 깔깔 웃으며 나를 놀려대고 나는 무턱대고 신이 나서 웃고 아버지는 이러한 두 딸을 바라보며 흐뭇해서 웃으시고...
세 부녀의 맑고 행복한 웃음소리가 방울소리처럼 울려 퍼지고 시린 겨울 하늘을 따뜻하게 녹이면서 먼데 산 넘어 까지 날아갔다.
내 유년의 추억을 떠올리면 거기에는 항상 털보라 불려졌던 사랑이 많고 우리들과 함께 놀기를 즐겨하셨던 아버지가 그림처럼 그려져 있다.
아! 아버지! 그리운 내 아버지!
(동은)
첫댓글 동은님의 글을 읽으니 마치 제가 다시 유년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일으킵니다.왜 그땐 그리 추웠고 손등과 볼은 항상 트고 그랬는지.썰매타다 엉덩방아라도 찧으면 모닥불을 펴서 말리곤 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근데 저도 개구리 뒷다리는 먹어보았지만 알까지도 먹습니까? 계속되는 동은님의 추억담 기다리겠습니다.
저는 동네 큰 오빠들(커봤자 초딩3~4학년정도?) 따라 논 같은곳에서 태양빛에 구워진 메뚜기를 아주 쬐곰씩 얻어먹어본 기억이 다 랍니다.40년도 훨씬 지난 일이지요. 그땐 웬만한 서울지역 어느곳에서나 논밭을 볼 수 있었고..쇠달구지도 있었고 한강도 맑고 수영도 하던때 였으니까..
저는 연과 썰매를 오빠가 만들어 주었습니다. 연을 만드는 오빠 옆에서 다 쓴 공책을 잘라 꼬리를 붙이느라 끙끙...개구리 잡아 바바큐 해먹던 일만 빼면 동은님의 추억과 제 추억이 거의 붕어빵입니다. 제기차기, 자치기, 구슬치기도 생각납니다... 아!~ 낮달도 아버지가 몹시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