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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서공 휘 길(諱 日吉) 비문
承政院左承旨贈吏曹判書兼兩館大提學尹公墓碣銘 (전면)
(승정원좌승지증이조판서겸양관대제학윤공묘갈명)
(내용=음기)
扈聖效忠於危難之際納疏直諫於睪夂 倫之日竟至廢斥而無悔以盡爲人臣
(호성효충어위난지제납소직간어역 윤지일경지폐척이무회이진위인신)
之分者承政院左承旨尹公諱日吉 字汝明是己公之系 坡平有諱威討平
(지분자승정원좌승지윤공휘길 자여명시己公之系 파평유휘위토평)
南原賊封南原伯因以爲貫生 諱克敏文戶部尙書諡文平 生諱敦文侍中
(남원적봉남원백인이위관생 휘극민문호부상서시문평 생휘돈문시중)
生諱英贊文典書 生諱守均門下評理 生諱璜典書 麗亡遯于唐津 不起
(생휘영찬문전서 생휘수균문하평리 생휘황전서 려망둔우당진 불기)
諡忠簡享松谷祠國朝 諱臨咸吉道觀察使選廉吏公六也 高祖曰訔左承旨
(시충간향송곡사국조 휘임함길도관찰사선렴리공육야 고조왈은좌승지)
贈祖曰時英 文禮曹參判 祖曰淸判官 考曰民新吏曹參判敎五子並闡
(증조왈시영 문예조참판 조왈청판관 고왈민신이조참판교오자병천)
大科歲致官廩 妣曰全州李氏忠義衛敬宗女 明宗甲子二月七日生五昆
(대과세치관름 비왈전주이씨충의위경종여 명종갑자이월칠일생오곤)
季序居三有傑特之姿英明之才與弟昆勤業連峰對起人稱三蘇八龍宣祖
(계서거삼유걸특지자영명지재여제곤근업연봉대기인칭삼소팔용선조)
癸巳全州分朝廷試 擢甲科壯元先是 嘗夢入科場以金字書公姓名試題
(계사전주분조정시 탁갑과장원선시 상몽입과장이금자서공성명시제)
不懸板而揭于院柱心甚怪之至是光海以世子分朝亂中草創試題付于
(불현판이게우원주심심괴지지시광해이세자분조난중초창시제부우)
客舍之柱一如夢中所見題則 擬晋尙書令 刁協請須還洛議郊 祀之表也
(객사지주일여몽중소견제칙 의진상서령 조협청수환낙의교 사지표야)
吳竹南竣金南窓玄成以同硏友見公作却筆曰 今日壯元在此卽赴難參
(오죽남준금남창현성이동연우견공작각필왈 금일장원재차즉부난참)
扈聖原從勳由翰林知製敎轉至 侍講院弼善 陞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
(호성원종훈유한림지제교전지 시강원필선 승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
遇事敢言以直 忤於權奸宦途抹撥壬寅抗論 王子事宣廟震怒至下長袖
(우사감언이직 오어권간환도말발임인항론 왕자사선묘진노지하장수)
善舞之敎 拜公中江收稅官 時唐將發恚於我國將有甘心於稅官人皆危
(선무지교 배공중강수세관 시당장발에어아국장유감심어세관인개위)
公公承命卽行辨理得宜唐將釋然還公 光海乙卯凶徒將廢母后公承旨
(공공승명즉행변리득의당장석연환공 광해을묘흉도장폐모후공승지)
捧納儒生趙峻疏而 沮之賊筠謂趙疏出自公手至發鞠問光海猶知其妄
(봉납유생조준소이 저지적균위조소출자공수지발국문광해유지기망)
而只罷職不舍讜直屢發言議以其年十月二十五日病卒于 家壽五十二葬
(이지파직불사당직루발언의이기년십월이십오일병졸우 가수오십이장)
京畿之新林黔芝山巳坐原 公天分甚方直望之可嚴卽之也 溫不事生業貧
(경기지신림검지산사좌원 공천분심방직망지가엄즉지야 온불사생업빈)
窶任他孝友出先妣病革斷指無效 爲終身痛居常靜黙不妄出入 嘗曰
(구임타효우출선비병혁단지무효 위종신통거상정묵불망출입 상왈)
趨得美官非士大夫事 癸亥改玉特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兩館
(추득미관비사대부사 계해개옥특증자헌대부이조판서겸지경연양관)
大提學世子左賓客隱卒之典 可謂至矣 配全州李氏參判世良女生 四男
(대제학세자좌빈객은졸지전 가위지의 배전주이씨참판세양여생 사남)
二女 男衡正吏曹參議 衡覺參靖社勳至 星州牧使 衡志文直長 衡聖文
(이녀 남형정이조참의 형각참정사훈지 성주목사 형지문직장 형성문)
牧使 女爲牧使朴炳縣監洪有一妻 孫樸吏議 策郡守 彙孝箸世棠實
(목사 여위목사박병현감홍유일처 손박이의 책군수 휘효저세당실)
縣監 葉工參長房出 彬文吏參疏救尤翁謫南海 楙通德郞 權耘領相
(현감 엽공참장방출 빈문이참소구우옹적남해 무통덕랑 권운영상)
金壽興妻二房出 梅府使 栢通德 松郡守 三房出 耒參奉 尤翁門人
(김수흥처이방출 매부사 백통덕 송군수 삼방출 뢰참봉 우옹문인)
來 柬東通德 季房出朴壻男世基郡守 世址縣監世周參判 世封郡守
(래 간동통덕 계방출박서남세기군수 세지현감세주참판 세봉군수)
洪壻男齊亨至亨進士 曾玄以下今十餘世 文學宦第克世趾美
(홍서남제형지형진사 증현이하금십여세 문학환제극세지미)
嗚呼 公歿三百有載墓表之公 子牧使衡覺所撰尹石湖文擧 吳竹南竣
(오호 공몰삼백유재묘표지공 자목사형각소찬윤석호문거 오죽남준)
前後書 不止屢數百言而石泐不記官歷事行莫得而詳惟納疏敢諫之實
(전후서 불지루수백언이석륵불기관력사행막득이상유납소감간지실)
見於譜大節旣輝然矣 世行不須論也 殺永昌廢母之日群凶之毒焰熏天矣
(견어보대절기휘연의 세행불수론야 살영창폐모지일군흉지독염훈천의)
除漢陰白沙數公之外能 呈疏敢言視死如歸者 幾人哉惟公以承宣能行
(제한음백사수공지외능 정소감언시사여귀자 기인재유공이승선능행)
人所不能行置死生於 度外以盡匡救之責者 非忠義之根於性能然乎
(인소불능행치사생어 도외이진광구지책자 비충의지근어성능연호)
今於後孫平燮興燮在興之請銘顯刻也 不以人文而辭 樂爲銘者以寓
(금어후손평섭흥섭재흥지청명현각야 불이인문이사 낙위명자이우)
高景之忱也 銘曰 維公之系南原右閥嵬勳碩德輝映史策
(고경지침야 명왈 유공지계남원우벌외훈석덕휘영사책)
五子大闡爲世難及揭揭 我公英明傑特扈聖 廢母以忠以直廢斥靡
(오자대천위세난급게게 아공영명걸특호성 폐모이충이직폐척미)
悔以盡臣職長陵嘉尙特贈崇秩大節偉然小德可略新林之原
(회이진신직장릉가상특증숭질대절위연소덕가략신림지원)
牲石屹屹昭刻銘章百世可式
(생석흘흘소각명장백세가식)
歲乙丑元節(세 을축 원절)
巨昌 愼思範 謹撰 (거창 신사범 근찬)
宜寧 南大熙 謹書 (의령 남대희 근서)
(풀이-남원윤씨대동보 자료를 일부 수정해서 옮김)
난리를 무릅쓰고 임금을 모셔 충성을 다하고 상소를 드려 폐모를 직간하다가 마침내 축출까지 당하되 후회하지 않고 신하된 직분을 다한 분은 바로 승정원 좌승지 윤공으로 이름은 길이고 자는 여명이시다.
공의 선대 세계는 본래 파평이시다. 휘 위께서는 남원 적을 평정한 공으로 남원백을 봉하니 그로 말미암아 남원이 본이 되었다. (2세)휘 극민은 문과 급제하여 호부상서에 이른 시호 문평이다. 이 분이 휘 돈을 낳으시니 문과로 시중이요 이 분이 휘 영찬을 낳으니 문과로 전서요 이 분이 휘 수균을 낳으니 문하평리요 이 분이 휘 황을 낳으니 전서라. 고려가 망하자 당진으로 내려가 이씨 조정에 벼슬을 아니 하니 시호가 충간이고 송곡서원(서산)에 배향되었다. (그 아드님)휘 임은 함길도 관찰사로 청백리에 선발되니 공의 6세 조다. 고조는 은이니 좌승지요 증조는 시영(時英)이니 문과로 예조참판이요 조는 청이니 판관이요 부친은 민신이니 아들 오형제를 가르쳐 다 문과에 오르니 나라에서 해마다 식료를 내렸다. 모친은 전주 이씨니 충의위 경종의 딸이다. 명종 갑자(1564년) 2월 7일에 5형제 중에 3남으로 출생하였다. 출중한 자품과 영특한 재주로 5형제가 다 같이 학업에 열중하여 높은 기세 연해서 일어나니 사람들이 삼소 와 8용에 비유하였다.
선조 계사에 전주 분조의 시험에 갑과 장원에 뽑혔다. 이에 앞서 꿈에 과장에 들어가니 공의 성명을 金자로 쓰고 시제를 현판을 아니하고 원주에 걸려 있었다. 마음에 괴이하게 여겼더니 이제 광해가 세자로 전주에 분조를 차리고 난중에 초창으로 시제를 객사의 기둥에 거니 완전히 꿈에 보던 바라 시제는 비켜 진상서(晋尙書)가 조협(刁協)을 시켜 낙의(洛議)를 돌려 교(郊)에 제사하라는 표였다.
오죽남 준과 김남창 현성이 동연의 벗으로 공의 글을 보고 각필하여 말하기를 “금일 장원은 여기 있다” 하였다. 바로 난리에 달려가 호성원종훈에 참여하였다. 한림으로 지제교 시강원필선에 이르고 승진해서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가 되었다.
성품이 워낙 강직하여 바른 말로 권관들에게 거슬려 진급의 길이 좌절 되고 말았다. 임인년(1602)에 왕자의 일을 항론하니 선조가 진노하여 긴소매에 춤도 잘 춘다는 말씀을 하고 중강 수세관을 임명하니 이때에 당나라 장수가 우리나라에 불만이 있어 세관을 잡기로 하므로 사람들이 공을 위태롭게 여겼으나 공은 바로 가서 변리(辨理)를 잘 하니 당 나라 장수가 공을 풀어 주어 공을 돌려보냈다.
광해 을묘년(1615)에 흉도들이 인목대비를 폐하기로 할 때에 공이 승지로 유생인 조직의 상소를 받아 올려 저지하려 하니 적당 허균이 “조직의 상소가 공의 수중에서 나왔으니 국문을 하자”는 장계를 올렸으나 임금(광해)이 오히려 망발이라 하여 파직만 하고 말았다.
그러나 충직의 정성이 자주 언론에 발표되었다. 그해 10월 25일에 병으로 집에서 돌아가셨다. 수는 52세니 서울 신림동 검지산 사좌(巳坐)
에 장사하였다.
공은 천분이 심히 방정하고 곧아서 바라보면 엄하나 나아가면 온화하였다. 생업에 마음이 없어 가난을 달게 여기고 효우가 출전하여 어머니의 병에 단지가 무효함을 종신토록 슬퍼하였다. 거처를 항상 정숙히 하여 망령되이 출입하지 않았다. 일찍 말하되 사람에게 아부하여 벼슬을 얻는 것은 사대부가 할 일이 아니라고 하였다.
계해년(1623) 인조반정에 자헌대부이조판서겸지경연양관대제학세자좌빈객의 벼슬을 특명으로 증직하니 위로의 은전이 지극하도다.
배위는 전주 이씨이니 참판 세량의 따님이시다. 4남2녀를 출생하여 남자 형정은 이조참의요 형각은 인조반정공신에 참여하여 성주목사를 지냈고 형지는 문과 급제하여 직장이요 형성은 문과 급제하여 목사요 여자는 목사 박병과 현감 홍유일의 처가 되었다. 손자 박은 이조참의요 책은 군수요 휘는 효행이 세상에 나타났고, 당과 실은 현감이요 엽은 공조참판이다. (형각의 장남)빈은 문과로 이참이니 우암 송시열선생을 구하려는 소를 올렸다가 남해로 귀향 갔었다. 무(楙)는 통덕이요 권운과 영상 김수흥의 처는 이남(형각)의 출생이며 매는 부사요 백은 통덕이요 송은 군수이니 삼남의 출생이다. 뇌(耒)는 참봉이니 우암의 문인이요 내(來), 柬(간), 동(東)은 통덕이니 사남의 출생이요 외손 박세기는 군수요 세지는 현감이요 세주는 참판이요 세봉은 군수요 홍재형 지형은 진사라. 증손 현손이하로 지금 십여세에 문학과 벼슬이 대를 이어 끊이지 않았다.
오호라! 공이 돌아가신지 300여년이 지났다. 묘전의 비문은 공의 아들 목사 형각이 글을 작성하고 윤석호 문거와 오죽남 준이 전후면 쓴 글이 수백자가 되나 돌이 변질되어 도저히 알아 볼 수 없어 벼슬의 서차와 행적의 사실을 자세히 알 수 없다. 오직 상소를 드려 직간한 사실이 족보에 나타나 있다. 대절이 높이 들어나니 자세한 것은 다 말하지 않아도 된다.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하는 날에 군흉들의 기세가 충천했다. 한음과 백사 둥 수명 외에 능히 상소를 올려 직언하여 죽기로 작성한 이가 몇 사람이나 되는지 오직 공이 하나의 승지로 능히 사람이 행하지 못하는 일을 행하여 사생을 도외시하여 시정의 책임을 다함은 충의의 깊은 본성이 아니고는 행할 수 없는 일이다. 이제 후손 평섭, 흥섭, 재흥이 나에게 현각(비석)의 비명을 부탁함에 있어 사람과 글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사양치 아니하고 즐거이 명을 쓰는 것은 나의 존모하는 마음에서 이다. 명에 이르기를
오직 공의 세계는 남원의 높은 가문이네/ 외훈과 석덕들이 역사에 빛이나 있네/ 오자의 대과는 세상의 따를 바 없네/ 높이 솟은 공이여 영명 걸특한 분이네/ 임금을 모시고 국모를 폐하는데 충성과 직간을 다했네/ 축출을 당해도 후회하지 아니하고 신하의 직책을 다 했네/ 인조께서 가상히 여기시고 특히 높은 벼슬을 증직 했네/ 대절이 높았으니 소덕은 줄이네/ 신림의 산소 높은 비석일세/ 밝게 이 글을 새기니 백세에 법이되리라./
을축원절에(1985년 1월)
거창 신사범 근찬
의령 남대희 근서
첫댓글 올려주신 자료에 고개숙여 감사를 드립니다.늘 행복하십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