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25. 덕산서원의 모태 첨모재와 400년 만에 밝혀진 비밀
송은석 (대구향교장의·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프롤로그
대구시 수성구 두리봉과 무학산 사이 황금동 모단[못안] 마을에 서원 두 개가 있다. 청호서원과 덕산서원이다. 이중 달성서씨 판서공파 덕산서원은 영화에나 나올법한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담고 있는 서원이다. 400년 세월 굳게 닫혀 있던 궤짝이 열리면서 남은 서섭의 비밀이, 조선왕조실록이 공개되면서 아들 서감원의 비밀이 세상에 알려진 것. 덕산서원은 이들을 기리던 재실 첨모재가 서원으로 발전한 것이다.
첨모재(瞻慕齋)에서 덕산서원(德山書院)으로
덕산서원은 수성구 향토문화유산으로 조선 단종 때 이조 판서를 지낸 남은(南隱) 서섭(徐涉)과 그의 둘째 아들 성균 생원 서감원(徐坎元)을 기리는 서원이다. 서섭은 세종 때 과거에 급제해 문종과 단종 조에서 벼슬을 하고, 수양대군의 단종 왕위찬탈 직전 그의 형과 함께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 대구로 낙향해 여생을 보낸 인물이다. 아들 서감원은 생원 신분으로 성종 임금에게 임금의 허물과 조정의 실정을 바로 잡아달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옥에서 죽음을 맞은 선비다.
덕산서원 출발은 1926년 현 위치에 세워진 ‘첨모재’라는 재실이다. 이후 1995년 지역 유림의 뜻을 모아 덕산서원으로 승격됐다. 서원 규모는 작지만 서원 건축의 기본요소를 모두 갖춘 효율적 공간 배치가 눈에 띄는 서원이다. 주요 건축물로는 외삼문 숭절문(崇節門), 강당 충정당(忠正堂), 동재 구인재(求仁齋), 서재 존성재(存誠齋), 내삼문 유현문(維賢門), 사우 경의사(景義祠), 전사청, 신도비각, 서원사적비 등이 있다.
400년 만에 밝혀진 서섭의 비밀
남은 서섭은 달성서씨 판서공파 파조(派祖)임에도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00년이 넘도록 행적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인 1920년, 그간 베일에 싸였던 그의 행적이 우연한 일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의 후손 서의곤이 집수리를 하던 중 시렁 위에 올려 두었던 궤짝이 떨어져 열렸고, 그 안에서 서섭의 유고(遺稿)가 나온 것. 유고 중에는 단종에 대한 충절을 밝힌 것이 여럿 있었다. 본래 서섭은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문종의 고명대신[顧命·임금이 유언으로 나라의 후일을 기약한 신하]이었다. 그는 단종 초 수양대군 일파의 움직임에서 정사의 위급함을 간파하고 단종 임금에게 ‘척간소(斥姦疏)’를 올렸다. ‘척간소’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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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왕께서 이르시기를 “정사는 집현전 신하들과 상의하면 나라에 걱정이 없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왕족이 비록 왕실을 보호하는 울타리이기는 하나, 옛날 주나라에 관숙과 채숙의 반란이 있었을 때 주공이 평정하였고, 한나라에 오초의 난이 있었을 때 범아부가 평정했습니다. 이처럼 간신과 충신은 흡사하니 충과 간은 실로 분간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이를 거울삼아 부디 어진 재상과 장수 뽑는 일을 급선무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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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단종에게 시사(時事)의 위급함을 전하며, 조속히 어진 이를 등용하고 집현전 학사와 더불어 정사 펼치기를 간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충심에서 우러나온 이 글은 왕실 종친들의 역린을 건드렸고 결국 그는 유배형을 받았다.
그 외 유고로는 단종에 대한 그리움과 충절을 밝힌 몇 편의 시, ‘격재 손조서에게 보낸 편지’, ‘백형인 현감 서제 제문’, ‘자손들을 경계하는 글’, ‘유배지에서 쓴 시’ 등이 있다. 달성서씨 판서공파 문중 구전에 의하면 이 궤짝은 오랜 세월 후손들에 의해 비밀리에 전해져 내려왔다고 한다. 개봉되면 후손에게 화가 미칠 수 있으니 때가 되기 전까지는 절대 열어서는 안 된다는 선조의 엄명과 함께···
조선왕조실록 공개와 함께 밝혀진 서감원의 행적
서섭은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다. 서섭의 자녀들은 단종에 대한 아버지의 절의행(節義行)으로 인해 세상에 나아가지 못하고 향리에 몸을 숨기고 살았다고 한다. 네 아들 중 특히 둘째 서감원은 아버지 서섭처럼 수백 년 세월 동안 행적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심지어 족보에조차 ‘성균생원’ 네 글자만 기재될 정도였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이 세상에 공개되면서 비로소 그의 행적이 드러났다. 그는 1484년(성종 15) 성종 임금에게 ‘상소’를 하나 올렸다. 임금의 허물과 조정의 실정을 언급하고 바로 잡을 것을 간하는 상소였다. “대구 사람인 생원 서감원이란 자가 봉사(封事)를 올렸다”라고 시작되는 성종실록 15년 갑진 8월 병진일 기사에 상소문 일부가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성종은 자신의 정사를 비판한 서감원을 국법으로 엄하게 다스리려 했다. 하지만 신하들의 의견은 둘로 나뉘었다. 한쪽에서는 시골 일개 서생에 불과한 자가 조정을 농락했으니 죽여야 한다고 했고, 다른 쪽에서는 상소를 올린 선비를 죄로 다스리면 언로가 막히게 되니 벌함은 절대 불가하다는 주장을 폈다. 결국 그는 이 상소로 인해 고문을 받고 옥에서 죽음을 맞았다. 하지만 이 일이 있은 후, 그는 성종실록에만 이름이 열여덟 번이나 등장하는 등, ‘선비의 언로를 막아서는 안 된다’는 사례의 대표적 인물이 됐다.
혼인으로 맺어진 400년 인연, 덕산서원과 청호서원
달성서씨 덕산서원과 일직손씨 청호서원은 서로 30m 정도 떨어져 있다. 이 두 문중의 인연은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 서섭의 장남 서진원의 딸이 일직손씨 집안에 시집을 가면서 시작됐다. 그 뒤 지금 위치에 청호서원이 먼저 세워지고 나중에 덕산서원이 세워졌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청호서원에 제향된 ‘격재 손조서’와 덕산서원에 제향된 ‘서섭’의 관계다. 1920년 발견된 서섭의 유고 중에 서섭이 손조서에게 보낸 편지가 있었던 것. 서섭과 손조서는 둘 다 단종 절의신으로 지금으로부터 560여 년 전, 서로 편지를 주고받던 사이였는데 지금은 서로 이웃한 서원에 모셔져 있다.
에필로그
수성구 황금동의 본래 이름은 ‘황청동(黃靑洞)’이었다. 임진왜란 때 이곳에 정착한 모당 손처눌 선생이 마을에서 바라본 수성들의 모습이 여름은 푸르고, 가을은 황금빛을 이룬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었다. 하지만 황청이 저승을 의미하는 ‘황천’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1977년 황금동이 됐다. 그런데 황청동에서 황금동으로 개명한 뒤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황금동이 급성장해 수성구를 대표하는 지역 중 한 곳이 됐기 때문이다.
“햇볕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전설이 된다”는 말이 있다. 서섭과 서감원 부자 스토리는 400년 긴 세월 달빛 아래 전설에서 이제는 햇볕 역사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