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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시
13-14p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 Es irrt der Mensch, solang' er strebt.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 괴테가 60년을 쓴 그 작품, 『파우스트』 전체를 한 줄로 요약하라면
누구든 서슴없이 택하는 구절입니다.
지금까지는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라고 번역되어온 문장이지요.
그러나 이 번역은 노력'에 너무 치우쳐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노력한다'는 말에는 땀냄새가 배어 있습니다.
여러 해를, 아니 수십 년을 두고 고민했지만 괴테가 말하고자 한 원래의 뜻이 그런 '노력'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굳어진 번역을 부러 바꾸었습니다. ...
독일어 동사 'streben'이 불철주야, 일로매진 같은 뜻도 없지 않으나 못지않게
마음속의 솟구침을 담은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시물이 빛을 향하듯, 탑이 하늘로 치솟듯이요.
어찌되었건, 『파우스트』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라면 이렇습니다.
30-31p
"그대 '선'에 대하여 보답을 받았던가?" Hat man das Gute dir erwidert?
나의 화살은 고운 깃 달고 날아갔다오.
온 하늘 열려 있었으니
어디엔가 맞았을 테지요.
화살 하나, 고운 깃이 달린 화살 하나의 은유가 눈부셔서 시어詩語의 힘을 확인하게 되는 짧은 시입니다.
시와 지혜의 어울림이 부드럽고도 참 힘있습니다.
단도직입적인 물음으로 시는 시작됩니다. "선에 대하여 보답을 받았던가?
" 제아무리 대가를 생각하지 않았더라도, 제아무리 마음을 비운다 해도 범인인 이상
뭔가 좋은 일을 하고 난 사람의 마음 바닥 어딘가에는 남아 있게 되는 보상심리의 잔재를
이 물음은 정조준합니다.
그러나 부드럽게 풀어냅니다. 그 열림과 너그러움이 읽는 사람의 마음속에 깊이 남습니다.
영롱한 오색 깃털을 단 화살이 방금 눈앞으로 날아가는 걸 본 것 같기도 합니다.
은유의 힘이 참으로 큽니다.
80p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이 Wer nie sein Brot mit Tränen aß
근심에 찬 여러 밤을
울며 밤을 지새워보지 않은 이
그대들을 알지 못하리, 천상의 힘들이여
참 유명한 시구입니다.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에 나오는 것인데요.
흔히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야만 나중에 빛을 볼 수 있다는, 교훈적인 의미로 인용되곤 하지요.
대부분은 괴테의 시구인지도 모르기도 하지만, 그저 그 깊은 함의만으로 널리 알려진 훌륭한 문장입니다.
... 그런데 다음에 나오는 말이 조금은 낯설게 느껴집니다.
울며 밤을 지새워보지 않은 이 "천상의 힘들"을 알지 못한다니,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천상의 힘들"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면 '신'이라고 바꿔볼 수 있겠이를 '섭리'라고 과감히 의역해볼 수 있겠습니다. 진정으로 감사하고 섭리까지 헤아려볼 수 있는 힘.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얻는 것 같습니다.
101-102p 괴테 오솔길을 지날 때, 방문객이 젊은이라면 숨겨진 듯 놓인 시비들 중에꼭 그 앞에 잠깐 멈추어 서는 시비가 둘 있습니다.
올바른 목적에 이르는 길은
그 어느 구간에서든 바르다
Jeder Weg zum rechten Zwecke
Ist auch recht zu jeder Strecke.
처음 것 앞에 멈출 때는 늘 말합니다.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큰일나죠"라고.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는 말은
우직한 제가 가장 싫어하는 말 중 하나입니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말 아닌가요.
세상이 어찌 되라고 그런 무책임한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글귀 앞에 멈추었을 때는, 조금 떨어져 있는 다음 시비에도 다시 잠깐 멈춥니다.
바르게 행하려는 자, 늘 기꺼이 뜻에, 가슴에 진정한 사랑을 품어라.
사실 세상을 살다보면, 뭐가 바른 것인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부단히 노력하여 겨우 바른 신념을 가지더라도 때에 따라 이를 지키기도 어렵고
꾸준히 그 길을 가기는 더욱 쉽지 않습니다.
사태를 파악한 듯, 부러 다짐을 놓는 듯한 말이 괴테의 노년기 경구에 참 많습니다.
198-199p
"맑은 사람들을 위한 책의 집." 제가 가꾸고 이는 여백서원이 꿈꾸는 이상입니다.
서원을 감싸고 있는 얕은 산 능선을 따라 작은 오솔길이 나 있습니다.
작지만 참 아름다운 길인데, 그 길을 조금 걸어 만나게 되는 전망대에 오르면
아득히 펼쳐진 주변 사방의 산과 숲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그 전망대 위에 종잇장만한 자그마한 석판 두 개를 비스듬히 세워놓아는데
그중 하나에 아래의 시구를 새겨놓았습니다.
꿈꾸고 사랑했네, 해처럼 맑게
내가 살아 있는 것, 알게 되었네
Ich träumt' und liebte sonnenklar,
Daß ich lebte, ward mir gewahr.
긴 생애의 끝머리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생애는 어떤 것이었을까, 늘 묻게 됩니다.
이 시구는 어떤 청년이 젊은 날 가볍게 한 혼잣말이 아닙니다.
이름만으로도 무겁게 다가오는 거장이 생애의 끝머리에 운韻을 맞추어, 정교히 다듬어 한 발언입니다.
그래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긴 노역의 삶 끝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성취의 어느 지점쯤에서 이런 말은 나올 수 있을까.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 라는 번역이 '논란'이 되었다고 묘사한 인터뷰 기사도 있던데
이게 논란거리인지 잘 모르겠다(https://blog.naver.com/spinate/222553214751 ).
나는 독일어를 잘 모르지만 괴테가 『파우스트』의 핵심 구절을 쓰면서 그저 노력만 하면 된다는 뜻을
의도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전영애의 번역에 동의한다.
한 거장에 대해 전 인생을 들여 연구한 학자가 찾아낸 뉘앙스를 믿는다.
『우리읍내』의 리뷰에 적었듯이 우리나라의 소설, 영화 자막 번역은 처참한 수준이라(https://blog.naver.com/spinate/222412541928 ) 평생토록 괴테를 연구한 학자 전영애의
괴테 전집이 괴테를 읽는 후학들의 길잡이로 큰 역할을 해줄 것이라고 생각된다.
정도무우(正道無憂), 나의 좌우명 격으로 생각하는 사자성어이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바르게 사는 사람은 사실 굉장히 강한 사람이다.
살다보면 바르게 살기가 정말 쉽지 않기 때문이다.
편법으로 눈속임하며 위기를 모면하며 살기는 쉽지만, 고민이 될 때마다
바른 길을 선택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바르게 살려 노력하는 사람은 왜 그런 수고를 하며 살고 있을까?
바르게 살면 돈을 더 많이 벌기 때문일까?
누구나 알다시피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러면 바르게 사는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EBS에서 제작한 책 『아이의 사생활』(2009)을 읽고 해답을 찾았는데
도덕성이 높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행복하기 때문이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도덕적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면 더 행복해진다.
사회적인 영역에서 바르게 사는 게 도움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고
개인적인 영역에서 찾을 수 있는 바르게 살아야 하는 명료한 이유이다.
'올바른 목적에 이르는 길은 그 어느 구간에서든 바르다'라고 권면했던 괴테를 보라.
그는 인생 마지막에 '꿈꾸고 사랑했네, 해처럼 맑게. 내가 살아 있다는 것, 알게 되었네'라고 노래할 수 있었다.
이 시구 "꿈꾸고 사랑했네 해처럼 맑게"를 전영애는 이 책의 제목으로 선택했다.
이 책 전체를 한 마디로 요약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시구이다.
괴테의 시와 전영애의 삶을 보고 독자는 무엇을 느끼는가?
전영애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당신의 삶에는 꿈과 사랑이 있나요?
당신의 삶에는 '지향'이 있나요? 있다면 그걸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요?"
3. 단상
37-38p 그렇게 민요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주목한 괴테는 그걸 토대로 자신의 시를 썼습니다.
민요의 소박한 어휘를 기저로 삼되, 거기에 민요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자신만의 어휘구사를 더합니다.
예컨대 "아침처럼 고왔네"로 떼어서 번역한 한 단어인 조어 "morgenschön" 같은 어휘를 보세요.
갓 피어난 꽃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묘사해야 할까요.
그냥 아름답다, 곱다로는 부족합니다. 그렇다고 꽃을 꽃처럼 곱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아침아름다움'이라고 신조어를 만들어냅니다.
... 이 시는 하인리히 베르너('웬 아이가 보았네, 들에 핀 장미화'로 시작되는 우리에게 익숙한 멜로디입니다
슈베르트(슈베르트 작곡은 우리 가사에서 '아름다운 월계꽃 한 송이 피었네'라고 시작됩니다.
들장미가 월계꽃으로 번역되었습니다) 등 여러 작곡가의 마음을 사로잡아 수많은 곡으로 탄생했으며
또 그만큼 많은 성악가들에게 불렸습니다.
그중에도 특히 '세기의 성악가'로 불리는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의 명징한 딕션은
세계인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져 오랫동안 남아 있습니다.
133p 사실 『서‧동 시집』 안에는 마리아네의 시도 몇 편 들어가 있습니다.
별도의 표시가 없는 이 시들 중 두 편을 괴테의 충직한 비서 에커만이, 그 많은 시들 중에서
가장 좋은 시로 꼽기도 했지요.
바로 그 시에 슈베르트가 곡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그 시들이 「동풍시」와 「서풍시」입니다. 앞서 인용한 구절이 바로 제목이 없는, 속칭 「서풍시」의 일부지요.
즉, 괴테의 시가 아니라 마리아네의 시입니다.
독일어는 여러 개의 단어를 이어붙여서 새로운 단어를 만드는 게 가능하다고 한다.
그래서 torschlusspanik (문이 닫히는 것에 대한 공포) 같은 단어가 유머의 소재가 된다.
슈만은 하이네의 시를 빌려 연가곡 '시인의 사랑'을 썼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제1곡의 제목이
"아름다운 5월에" (Im wunderschönen Monat Mai) 이다.
그런데 이 제목의 번역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독일어 schön은 아름다운 이라는 뜻인데, wunder는 궁금하다는 뜻이다
(영어 'wonder'에 상응하는 단어인 것 같다).
그러니 'wunderschönen'이라는 독특한 단어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정도로 번역해야 한다고 한다.
이건 독일어를 공부한 적이 없는 내가 느낄 수 없는 뉘앙스이다.
나는 클래식 음악을 취미로 듣지만 슈베르트와 슈만의 아름다운 가곡을 들을 때 이게 무슨 뜻인지
번역을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 아쉬울 때가 많다.
언젠가 취미로 독일어를 좀 공부해봐야겠다.
그러면 전영애가 소개한 슈베르트의 가곡
월계꽃/들장미(D.257), 서풍시(Suleika II, D.717), 동풍시(Suleika I, D.720)를 더 깊게 감상할 수 있겠다
(근데 슈베르트는 자기가 가락을 붙인 시를 쓴 사람이 실은 괴테가 아니라 마리아네였다는 걸 알았을까?).
26p "무엇이 세계를 그 가장 깊은 내면에서 지탱하고 있는지", 그것이 알고 싶다.
이 구절은 작품 『파우스트』에서 주인공 파우스트의 인물과 성격과 그의 인생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구절입니다.
세계를 그 가장 깊은 내면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 『파우스트』는 그것을 알고 싶다는 지식욕으로
법학, 의학, 신학, 즉 중세 대학의 4대 학부 전체 분야를, 그러니까 모든 학문을 섭렵한
노 지식인이 회의에 빠져서 독배를 들기에 이르는 상황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그 아름다운 지식욕이 너무 일방적으로, 삶과 동떨어진 곳에서 발현되는 극단적 상황이 보여집니다.
오로지 지식뿐, 삶이 결여된 불균형 현상이기도 합니다.
... 그 좋은 추동력을 극대치로 펼쳐보는, 실수도 방황도 많지만 참으로 독보적인, 다시 찾아보기 어려운
삶의 이야기이고, 바로 그침 없는 추동력의 근저에 있는
"선"의 뿌리로 인하여 최종적인 구원의 실마리가 찾아지는 아름다운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눈부시도록 방대하게 전개되는 추동력의 이야기지요.
203-204p
괴테는, 그 어느 연령에서든, 자연과 세상과 사람을 놀라워하며 바라보았습니다.
사람을 사랑했고,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소박함이 아마도 그의 위대함의 핵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봅니다.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놀라워함, "전율"이 "인간의 가장 양질의 부분"이라고 말합니다.
긴 생애의 끝까지 괴테에게서는 이 놀라움, 경탄의 능력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논설이, 문학이, 시가 결정結晶처럼 서서히 맺혔지요. 깨어 있었습니다.
혹은 그렇게 살아 있었습니다. 생애 끝까지 말입니다.
세상 무엇이든 더이상 놀랍지 않을 때, 그 무감각은, 생물학적 연령이 어떻든
이미 실질적인 삶의 종말인지도 모릅니다.
너무 두꺼워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는 괴테 평생의 역작 『파우스트』(1832).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을 알았지만
공허한 파우스트 박사가 악마와 계약을 맺고 인생을 다시 살기 시작해, 욕망을 채우며 온갖 추한 일을 했지만
결국 자유로운 사람들의 공동체를 보고 기뻐하며 만족하는 내용이다.
『파우스트』의 세세한 내용까지 알려면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이 책에 소개된 파우스트의 줄거리만 보아도
우리는 괴테가 깨달은 인생의 진리 몇 조각을 읽어낼 수 있다.
지향이 있는 인생을 사는 사람의 방황은 아름답다.
무언가에 놀라워하며 사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111-113p
큰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 서른 살 청년이 말했습니다.
책을 일주일에 한 권밖에 못 읽으면, 앞으로 잘해야 3000권 겨우 읽겠다고 말입니다.
3000권이나 읽겠다니! 한 수레만 읽어도 인생이 달라진다는데, 쉬이 짐작하기 어려운 양입니다.
"3000권밖에 못 읽으면 잘 골라서 읽어야겠지요.
컴퓨터와 스마트폰 들여다보는 시간은 좀 줄여야겠고요.
" 그런 청년 앞에 펼쳐진 50년을 떠올려보자니, 저절로 마음이 설레어
저는 그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습니다.
마음속으로 박수를 치면서도, 혹시 그 귀한 초심이 지치게 될까 덧붙여봅니다.
"10년 정도만 생각합시다. 10년은 내다보고 살아야겠지요.
10년 후의 자기 모습은 마음에 있어야겠지만, 단순히 역할이 아니고 사람 됨됨이면 좋겠습니다.
사람이 있어야 무언가 하지요." 청년이 다시 묻습니다. "그러자면 무얼 해야 할까요?"
그 미더운 얼굴을 보며, 다른 사람에게라면 하기 힘들었을 말이 나옵니다.
"꿈을…… 일상의 삶 속으로 적절히 조제해넣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꿈과는 까마득히 거리가 먼 삶을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꿈을 실현하겠다고
물불 안 가려선 무리가 따르는 법입니다.
좋은 꿈이라고 해서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을까요.
삶에다, 마치 조제약에다 한 가지를 첨가하듯 꿈을, 어떻게든 조금씩이라도 섞어가면
삶이 견디기 낫고 사람도 반듯해지고 꿈도 단단해지겠지요.
" 그런 선생 티 날 얘기가 청년 앞에서 저절로 나온 건, 농촌에 와서 오래 살다보니
주변에서 가끔, 이제는 드디어 "꿈을 실현하겠다"고 작정한 사람들을 마주치기 때문입니다.
3000권의 책을 읽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인생은 어떤 면에서 달라져 있을지 궁금하다.
돈을 더 많이 벌고 있을까? 또는 더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을까? 아님 별 차이 없을까?
최근에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읽은 책이 몇 권이나 되는지 세어본 결과 천 권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사실 지금 나의 전공, 나의 본업은 내가 지금까지 읽었던 수백 권의 책과 전혀 관계없는 것이다.
아마 전혀 읽지 않았어도 사는 데 별 지장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지금 내가 책을 읽고 있는 이유는 뭘까?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보면서도 들었던 의문이다(https://blog.naver.com/spinate/222481979288 ). 최소한 이렇게 말할 수는 있겠다.
3000권의 책을 읽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자신의 꿈에 더 가까이 가 있지 않을까?
본업을 하면서도 나는 틈틈이 책을 읽고 또 이렇게 내용을 정리해놓는다.
지금은 큰 의미 없이 즐거워서 하는 일이지만, 나중에 이 독서가 나에게 어떤 일을 가져다줄지
나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전영애의 말처럼 꿈을 가진 사람이 전혀 준비 없이 살다가 갑자기 그걸 이루려고 작정하고 덤비면
그건 마음처럼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지향이 있는 한', 지금 방황할지라도 조금씩 길을 모색하며 준비해놓고 있어야 한다.
4. 전영애
195p
이제 책 같은 건 없어도 살 듯한 세상이지만, 저는 책이 있어 산 것 같습니다.
책을 통해, 달리는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며 사는 사치까지 누렸습니다.
글을 읽다보면, 좋은 글을 찾아 읽게 되고, 그런 글을 쓴 큰 사람을, 시공과 무관하게 만나게 됩니다.
잠깐 차 한 잔을 나누어도 가까워지는데, 누군가가 온 힘을 쏟아, 때로는 인생을 다 바쳐 쓴 책 한 권을
읽는다는 건 실로 엄청난 일입니다.
이 책 『꿈꾸고 사랑했네 해처럼 맑게』를 읽으면 읽을수록 전영애라는 사람이 점점 크게 다가온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우연히 집어든 책에서 만난 독문학자, 괴테 연구가 전영애는 수십 년간 한 우물을 파서
세계적인 학자가 된 명인이었다.
내가 읽은 이 책은 지금까지 전영애가 쌓아올린 학문적 업적과 일반인 대상 해설서들에 비할 수 없는
아주 작은 단상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것만 읽어도 전영애가 어떤 사람인지, 왜 공부를 했는지, 괴테 포함 독문학을 들어
우리에게 무슨 말을 전하고 싶은지를 대강 알 수 있었다.
82p
제가 젊었던 시절에도 세상에는 그 무엇도 쉬운 일이 없었고, 무엇 하나 단순 명쾌한 것이 없었습니다.
특히 석사과정을 마칠 때쯤부터 10년쯤 세상은 늘 캄캄했던 것 같습니다.
다만 무얼 좀 배우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나라 사정이 어려운 시절이라
대학교에서 수업을 진행하는 날이 진행하지 않는 날보다 오히려 드물었고, 시간이 지나 졸업을 하려 하니
너무도 배운 게 없어서 참혹한 기분이었습니다.
정치적, 사회적으로 설 곳도 앉을 곳도 마땅치 않은 좌불안석의 어려운 시기였지요.
더구나 국민학교 때부터 혼자 서울에 와서 살다가 이제 가족도
서울로 이사를 와서 잠시 집의 안정을 찾았는가 싶었는데, 제가 대학에 입학할 즈음에
아버지께서 실직하셨습니다.
그래서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를 쉬어본 적이 없습니다.
졸업하면서부터는 고등학교에 강사로 취직했고, 그러면서 대학원 석사과정을 다녔습니다.
너무도 좋은 장학금을 받았건만, 집안이 워낙 불안정하다보니 아르바이트나 일을 계속해야 했습니다.
더구나 당시의 보수적인 분위기에서
여자인 제가 공부를 열심히 하려 한다고, 어떤 교수님은
제게 웃지도 않고 "너는 비극의 씨앗"이라고 말하기도 했지요.
긴 세월 동안, 그 말이 얼마나 옳은 말씀이었는지 실감을 하며 살았습니다.
87p
그렇게 5년이 지났을 때, 어느 날 학교에 한번 가보았습니다.
관악산 밑으로 옮겨간 학교는 제게 더없이 낯선 곳이 되어 있었습니다.
학과 사무실이 낯설어 사층의 교수 연구실 쪽으로 올라가보았습니다.
익숙한 명패들이 있었으나 그 어느 문도 두드릴 수가 없었지요.
복도 끝의 작은, 살벌한 베란다에 한참 동안 서 있었습니다
(나중에, 20년 가까이 지나서 서울대학교에 부임하게 되었을 때 맨 먼저 그 베란다에다 꽃을 심었습니다.
그날의 저처럼 이상한 생각이 드는 사람이 없도록, 꽃이라도 보고 돌아가도록 말입니다.)
170p
오래전 아말리아 대공비 도서관에 갔다가
관장인 크노헤 박사를 찾아가 인사를 할까 어쩔까 하는 참에 마주쳐서, 좋은 말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감사하고
이 도서관 분위기 좀 가급적 오래 유지되게 해달라고 그러고, 너무 그렇게 늦게까지
일하지 말라고 이야기했었습니다.
늦게 나오다보면 다 불 꺼진 도서관에 관장 방에만 불이 켜져 있곤 했기 때문이지요.
나중에 도서관 문 닫을 때 허겁지겁 가방과 우체국에서 사둔 짐 꾸릴 종이 박스를 챙겨들고 있는
그 사물함 앞에서 관장님을 또 마주쳤습니다.
서로 쳐다만 보다가 둘 다 말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요.
그러다 그 사람이 "마지막 일 초까지……"라고 해서 웃고 말았습니다.
전영애의 성실성은 아마도 어린 날부터 어려운 환경에서 혼자 공부하며 습득되었을 것이다.
전영애는 이 성실성을 독문학에 쏟은 결과 바이마르 괴테 학회에서 금메달을 받는 성과를 거두었다.
뭔지 모르지만 대단하다. 무언가를 깊이 공부해본 사람은 안다.
그것이 내 것이 되려면 '나 혼자'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제일 좋은 방법이라며 가르쳐주는 인터넷 강의를 백날 들어봐야 소용없다.
맨땅에 헤딩하듯이 시행착오를 거쳐 가며 공부해야 진정한 전문가가 될 수 있다.
전영애가 공부를 시작한 1970년대에 그만한 전문가가 한국에 있었을 리 없으니
그녀는 짧은 유학을 지렛대로 삼아 혼자 연구할 수밖에 없었을테고 그것이 그를 전문가로 만들었을 것이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며 공부하는 그간의 과정이 얼마나 눈물겨웠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는 것은 그 자리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는 뜻이다.
다행히 그만큼 능력이 있어 고생한 만큼의 열매를 얻었다.
어떤 원인으로든, 현재 상태의 자신의 주인은 자기입니다. 그것을 고치든 고수하든 상승시키든 개선시키든
그 모든 것은 원인제공자가, 설령 백 번 개심을 한다 하여도 이제 와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당사자의 자기연민이나 분노가 해결할 일도 아닙니다. 오롯이 자기 자신의 몫입니다.
자신을 빚어나가는 일을 할 사람은, 자기밖에는 세상에 그 누구도 달리 없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일로 걱정하지 말라고, 지금이 제일 중요한 때라고 말하고 싶어요.
저는 과거 어느 시점으로도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사느라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갑니까.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합니다.”
“괴테의 가장 큰 매력은 지금 가장 중요한 것에 모든 것을 쏟는 집중력이었다”고 했다.
몰입의 세계에선 시간의 흐름이 멈춘다. 내면 속에 온전한 자아가 활짝 꽃피운다.
살아있는 사람들과 전면적으로 관계를 맺고, 살아있지 않은 사람들은 흔적을 탐구하여 결국 그의 영혼을 만나고 마는 게 몰입적 생활양식이다.
정년퇴임을 하던 2016년 6월 ‘마지막 수업’에서 “노후 직업은 ‘박수부대’”라며 “바른 걸음으로 큰 길을 가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박수를 쳐주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날이 갈수록 비판은 잘하고, 남의 눈에 티는 너무나 잘 보고 그렇게 점점 분위기가 가는 것 같아서 조금 격려해주고 싶다는 생각은 정말 많이 했어요.
제 느낌이 벼랑에 매달려 있는데 누가 새끼손가락 하나만 내밀어도 올라갈 것 같은데 늘 그냥 눈앞이 캄캄하기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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