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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제4권 16
142독, 열반(涅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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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열반’에 대해서 말씀드릴 차례입니다. 흔히 정토불교는 왕생을 말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기는 합니다. 정토불교는 왕생의 불교라고 생각하는 이상, 정토불교 문헌 안에서 열반을 말하는 것을 만나면 의외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은 정토불교에서는 과연 ‘열반’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열반’이라는 말은 인도의 산스크리트 단어를 중국에서 소리로만 베껴 쓴 것임을 주의해야 합니다. ‘nirvāṇa(니르바나)’라는 말을 ‘열반’이라 음사(音寫)한 것입니다. 니르바나는 동사 어근 √vā(불다)에 부정의 의미를 갖는 접두어 nir를 합하여 형성된 명사입니다. 그러니까 (바람과 같은 것이) 불어서 (등불 같은 것이) 꺼진 상태를 말합니다.
불이 꺼진 상태를 니르바나라고 하는데, 이는 물론 비유표현입니다. 아함경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탐욕의 불이 꺼지고, 분노의 불이 꺼지고, 어리석음의 불이 꺼진 상태를 열반이라”고 말입니다.
세 가지 독(三毒)이 다 꺼진 상태를 열반이라고 할 때, 이는 불교라는 종교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경지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궁극적 경지를 흔히 해탈(mokṣa)이나 열반으로 말합니다만, 해탈은 다른 종교에서도 말하는 용어였습니다. 하지만, 열반은 불교에서만 말해졌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오히려 힌두교와 같은 종교에까지 영향을 끼쳐서, ‘브라만열반’과 같은 말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이런 정도의 배경 지식을 갖고서, 「정신게」에서는 ‘열반’이라는 말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즉 어떤 메시지 속에서 등장하는지 고찰해 보기로 합니다. 그 전에 ‘열반’에 주의를 하면서 「정신게」 독송을 해보겠습니다.
귀명무량수여래(歸命無量壽如來) ⟶
나무불가사의광(南無不可思議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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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장보살인위시(法藏菩薩因位時) ⟶
재세자재왕불소(在世自在王佛所)
도견제불정토인(都見諸佛浄土因) ⟶
국토인천지선악(國土人天之善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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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무상수승원(建立無上殊勝願) ⟶
초발희유대홍서(超發希有大弘誓)
오겁사유지섭수(五劫思惟之攝受) ⟶
중서명성문시방(重誓名聲聞十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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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방무량무변광(普放無量無邊光) ⟶
무애무대광염왕(無碍無對光炎王)
청정환희지혜광(淸淨歡喜智慧光) ⟶
부단난사무칭광(不斷難思無稱光)
초일월광조진찰(超日月光照塵刹) ⟶
일체군생몽광조(一切群生蒙光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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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원명호정정업(本願名號正定業) ⟶
지심신요원위인(至心信樂願爲因)
성등각증대열반(成等覺證大涅槃) ⟶
필지멸도원성취(必至滅度願成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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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소이흥출세(如來所以興出世) ⟶
유설미타본원해(唯說彌陀本願海)
오탁악시군생해(五濁悪時群生解) ⟶
응신여래여실언(應信如來如實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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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발일념희애심(能發一念喜愛心) ⟶
부단번뇌득열반(不斷煩惱得涅槃)
범성역방제회입(凡聖逆謗齊回入) ⟶
여중수입해일미(如衆水入海一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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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취심광상조호(攝取心光常照護) ⟶
이능수파무명암(已能雖破無明闇)
탐애진증지운무(貪愛瞋憎之雲霧) ⟶
상부진실신심천(常覆眞實信心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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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여일광부운무(譬如日光覆雲霧) ⟶
운무지하명무암(雲霧之下明無闇)
획신견경대경희(獲信見敬大慶喜) ⟶
즉횡초절오악취(卽橫超截五惡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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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선악범부인(一切善惡凡夫人) ⟶
문신여래홍서원(聞信如來弘誓願)
불언광대승해자(佛言廣大勝解者) ⟶
시인명분타리화(是人名分陀利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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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불본원염불(彌陀佛本願念佛) ⟶
사견교만악중생(邪見憍慢悪衆生)
신요수지심이난(信樂受持甚以難) ⟶
난중지난무과사(難中之難無過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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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서천지론가(印度西天之論家) ⟶
중하일역지고승(中夏日域之高僧)
현대성흥세정의(顯大聖興世正意) ⟶
명여래본서응기(明如來本誓應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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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여래능가산(釋迦如來楞伽山) ⟶
위중고명남천축(爲衆告命南天竺)
용수대사출어세(龍樹大士出於世) ⟶
실능최파유무견(悉能摧破有無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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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설대승무상법(宣説大乘無上法) ⟶
증환희지생안락(證歡喜地生安樂)
현시난행육로고(顯示難行陸路苦) ⟶
신요이행수도락(信樂易行水道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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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념미타불본원(憶念彌陀佛本願) ⟶
자연즉시입필정(自然卽時入必定)
유능상칭여래호(唯能常稱如來號) ⟶
응보대비홍서은(應報大悲弘誓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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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친보살조론설(天親菩薩造論說) ⟶
귀명무애광여래(歸命無碍光如來)
의수다라현진실(依修多羅顯眞實) ⟶
광천횡초대서원(光闡橫超大誓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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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유본원력회향(廣由本願力廻向) ⟶
위도군생창일심(爲度群生彰一心)
귀입공덕대보해(歸入功德大寶海) ⟶
필획입대회중수(必獲入大會衆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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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지연화장세계(得至蓮華藏世界) ⟶
즉증진여법성신(卽證眞如法性身)
유번뇌림현신통(遊煩惱林現神通) ⟶
입생사원시응화(入生死園示應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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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담란양천자(本師曇鸞梁天子) ⟶
상향란처보살례(常向鸞處菩薩禮)
삼장류지수정교(三藏流支授淨教) ⟶
분소선경귀락방(焚燒仙經歸樂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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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친보살론주해(天親菩薩論註解) ⟶
보토인과현서원(報土因果顯誓願)
왕환회향유타력(往還廻向由他力) ⟶
정정지인유신심(正定之因唯信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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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염범부신심발(惑染凡夫信心發) ⟶
증지생사즉열반(證知生死卽涅槃)
필지무량광명토(必至無量光明土) ⟶
제유중생개보화(諸有衆生皆普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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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작결성도난증(道綽決聖道難證) ⟶
유명정토가통입(唯明浄土可通入)
만선자력폄근수(萬善自力貶勤修) ⟶
원만덕호권전칭(圓滿德號勸專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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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불삼신회은근(三不三信誨慇懃) ⟶
상말법멸동비인(像末法滅同悲引)
일생조악치홍서(一生造悪値弘誓) ⟶
지안양계증묘과(至安養界證妙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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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도독명불정의(善導獨明佛正意) ⟶
긍애정산여역악(矜哀定散與逆惡)
광명명호현인연(光明名號顯因緣) ⟶
개입본원대지혜(開入本願大智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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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자정수금강심(行者正受金剛心) ⟶
경희일념상응후(慶喜一念相應後)
여위제등획삼인(與韋提等獲三忍) ⟶
즉증법성지상락(卽證法性之常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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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신광개일대교(源信廣開一代教) ⟶
편귀안양권일체(偏歸安養勸一切)
전잡집심판천심(專雜執心判淺深) ⟶
보화이토정변립(普化二土正弁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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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중악인유칭불(極重惡人唯稱佛) ⟶
아역재피섭취중(我亦在彼攝取中)
번뇌장안수불견(煩惱障眼雖不見) ⟶
대비무권상조아(大悲無倦常照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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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원공명불교(本師源空明佛敎) ⟶
연민선악범부인(憐愍善惡凡夫人)
진종교증흥편주(眞宗教證興片州) ⟶
선택본원홍악세(選擇本願弘惡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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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래생사륜전가(還來生死輪轉家) ⟶
결이의정위소지(決以疑情爲所止)
속입적정무위락(速入寂靜無爲樂) ⟶
필이신심위능입(必以信心爲能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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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대사종사등(弘經大士宗師等) ⟶
증제무변극탁악(拯濟無邊極濁悪)
도속시중공동심(道俗時衆共同心) ⟶
유가신사고승설(唯可信斯高僧說)
‘열반’은 모두 세 번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무량수경의 이역본인 『무량수여래회에 나오는 말을 인용한 것이고, 둘째와 셋째는 모두 담란스님과 관련한 내용입니다.
첫 번째 용례는 ‘성등각증대열반’입니다. 이는 읽을 때는 ‘성등각증/대열반’으로 읽을 수 있지만, 그 의미는 ‘성등각/증대열반’입니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편지 제4권 9, 필지멸도원(必至滅度願)」에서 자세히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중복을 삼가기로 하겠습니다.
필지멸도원은 법장보살의 제11원을 부르는 이름인데, 「정신게」의 ‘필지멸도원성취’는 강승개 역본 무량수경 제11원에서 ‘필지멸도’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때 ‘멸도(滅度)’는 ‘니르바나’라는 인도의 말을 뜻으로 번역하여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반과 같은 뜻의 말입니다.
신란스님은 「정신게」에서 제11원을 말하는 중 ‘필지멸도원성취’라고 해서 강승개 역본의 제11원도 인용하고 있지만, 바로 그 앞 구절에서 ‘성등각증대열반’이라고 해서 무량수여래회로부터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대조해서 읽어보겠습니다.
강승개 역본 : 設我得佛, 國中人天, 不住定聚必至滅度者, 不取正覺.
(설아득불, 국중인천, 부주정취필지멸도자, 불취정각)
무량수여래회 : 若我成佛, 國中有情, 若不決定成等正覺證大涅槃者, 不取菩提.
(약아성불, 국중유정, 약불결정성등정각증대열반자, 불 취보리)
강승개 역본에서 ‘부주정취필지멸도자’와 무량수래회의 ‘약불결정성등정각증대열반자’는 같은 뜻의 말입니다. 그런데 한문 해석이 어렵습니다. 인도의 경전을 번역하다보니, 한문의 문법과는 좀 달라져서 그렇습니다.
우선 강승개 역본에서 ‘부주정취필지멸도자’는 붙여야 합니다. 그 안에 ‘콤마’ 같은 것을 집어넣어서 읽으면 문제가 발생하고 맙니다. ‘부주정취’ 다음에 띄우게 되면, 아닐 ‘不’자가 걸리는(영향을 미치는) 범위가 ‘정취’에서 끝나고 맙니다. 그러면, ‘정취에 머물지 않고서 반드시 멸도에 이르게 된다면’이라는 뜻이 됩니다. (정)정취에 머물지 못한다면, 결코 멸도, 즉 열반에는 이를 수 없게 됩니다. 정정취에 머물지 못했는데, 열반에 이를 수 있다면 “깨달음을 취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은, 말이 안 됩니다. 중생이 열반에 이를 수 있는데, 왜 법장보살이 아미타불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실제로 현재 존재하는 번역 중에서는 ‘不’이 ‘정취’까지 걸린다고 본 뒤, 문맥의 불통을 해결하기 위하여 원문에 없는 ‘不’을 ‘필지멸도자’ 앞에 넣어서 해석하는 경우를 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오류를 피하고자 해서 나온 궁여지책입니다. ‘不住定聚, (不)必至滅度者’라 읽어서 번역한 것입니다. ‘정취에 머물지 않아서 반드시 멸도에 이르지 못한다면’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된다면, 뒤의 ‘정각을 취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말과 문맥은 통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원문에 없는 ‘불’을 한 번 더 넣어주어야 할 정당성은 없습니다.
‘불’을 넣지 말고서, 해결해야 합니다. 그것은, ‘필지멸도’로써 ‘정취’를 수식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실제로 범본에서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편지 제4권 9에서 범본의 번역을 제시하였습니다.) ‘반드시 멸도에 이르게 되는 정정취에 머물지 않는다면’이라고 해석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됩니다. 이런 것이 ‘불교한문’의 특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범어에서는 ‘필지멸도’의 의미가 ‘정취’를 수식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음으로 무량수여래회의 ‘若不決定成等正覺證大涅槃者’를 보겠습니다. ‘증대열반’은 강승개 역본의 ‘필지멸도’에 해당합니다. 문제는 그 앞의 선행사(先行詞)입니다. 강승개 역본에서는 ‘정취’라고 한 것을, 무량수여래회에서는 ‘결정성등정각’이라 했습니다.
‘정취’의 ‘정’은 ‘결정성등정각’의 ‘결정’과 같은 말입니다. ‘定=決定’입니다. ‘정취’의 ‘聚’는 ‘무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정취’는 ‘결정된 무리’라는 말입니다. 문제는 무엇에 결정된 것인가 라는 물음이 안 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이 바로 ‘정(正)’인데, 그 부분을 강승개 역본은 생략했습니다. ‘정취’는 곧 ‘정정취(正定聚)’입니다. 정정취는 ‘正에 결정된 무리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정’은 무엇일까요? 이에 해당하는 말이 무량수여래회에서는 있습니다. 바로 ‘성등정각’입니다.(범본에서는 ‘正性/samyatva’이라 하였습니다.) ‘등정각을 이룸’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정정취’라는 말을 무량수여래회에서는 ‘등정각,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것이 결정되어 있는’이라는 뜻으로 썼습니다.
일본에서도 어떤 분은 정신게의 ‘성등각증대열반’의 ‘등각’을 ‘등각 묘각’이라고 할 때의 ‘등각’, 즉 묘각 보다 한 단계 아래 지위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한 것을 보았습니다. 잘못입니다. 무량수여래회를 확인하지 않아서 그런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등각’은 ‘등정각’을 가리킵니다. 등정각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므로, 묘각과 다르지 않습니다. 또 대열반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등정각을 이루는 일이 곧 대열반을 증득하는 일이 됩니다. 그렇게 하기로 ‘결정되었다’고 하는 것이 제11원의 뜻입니다.
이 제11원은 극락국의 시민들에게, 즉 정토에 왕생하는 사람들에게 부여됩니다. 극락에 왕생하는 것은 왕생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는 대열반을 증득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것을 위하여 왕생하는 것입니다. 열반을 증득하는 것이 곧 성불이므로, 정토불교 역시 다른 불교와 마찬가지로 그 궁극의 목표를 성불, 즉 성등정각에 두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알 수 있게 됩니다.
두 번째 ‘열반’은 ‘부단번뇌득열반’에서 나타납니다. ‘번뇌를 끊지 않고서 열반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우선 생각나는 것은, “번뇌를 끊고서 열반을 얻는 것은 소승이고, 번뇌를 끊지 않고서 열반을 얻는 것은 대승이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누구나 경험하는 바이지만, 번뇌를 끊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번뇌라는 놈은 끊으려면 끊을수록 더욱더 치성(熾盛)해 지는지도 모릅니다. 그냥 놓아두고서, 아, 이 놈이 번뇌로구나, 라고 지나가는 것이 더욱 현명한 일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부단번뇌득열반’이라는 구절에는 굳이 정토불교 고유의 것이라고만 할 수 없는, 다른 성도문 불교와 공통되는 입장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러한 해석 역시 가능합니다.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라는 말도 있으니까요. 번뇌가 곧 보리라니? 번뇌가 곧 깨달음이라니 ---. 이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번뇌와 보리는 정반대의 의미를 갖는 말입니다. 그러한 상대적인 개념을 ‘즉’이라고 하는 등호(=)로서 연결하고 있습니다. 얼른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번뇌와 보리가 정반대이면서 상즉(相卽)한다는 것은, 그러한 상즉이 성립하려면, 사실은 번뇌는 번뇌가 아니며 보리는 보리가 아니어야 합니다. 번뇌는 번뇌가 아니고, 보리도 보리가 아니라는 이야기는 곧 번뇌도 공(空)하고 보리도 공하기 때문입니다. 공한 것이라는 말은, 실체가 따로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번뇌라는 것도 실체가 없는 것이고, 보리도 실체가 없습니다. 중생도 실체가 없고, 부처도 실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중생과 부처가 곧 하나라고 말해지며,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성도문 불교의 설명입니다. 정토문의 불교에서 ‘부단번뇌득열반’이라 말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설명 역시 그와 같은 것일까요? 그것과는 좀 다릅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담란(曇鸞)스님의 정토론주의 한 구절을 인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정신게」의 이 구절을 신란스님은 정토론주에서 가지고 옵니다.
정토론주라는 책은 천친(세친)보살의 정토론에 대한 주석서입니다. 천친보살의 정토론은 24송의 게송을 먼저 제시한 뒤, 그에 대한 주석을 써서, 양자를 합편(合編)하고 있습니다. 전자의 게송을 원생게(願生偈)라 합니다. 그 중에 “저 (극락)세계를 관찰해 보니, 삼계(三界, 욕계, 색계, 무색계)의 길보다도 뛰어나구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천친보살은 이 구절에 대해서 스스로 ‘장엄청정공덕성취(莊嚴淸淨功德成就)’라고 평가하였습니다. 이를 받아서, 담란스님은 이렇게 주해합니다.
이는(이상의 장엄청정공덕성취 – 인용자) 어찌하여 헤아리기 어려운가? 범부의 사람이라서 번뇌가 가득하더라도 역시 저 정토에 태어날 수 있어 서이다. 삼계에 묶이는 업이라고 하더라도 끝내 끌어당길 수 없다. 곧 이 러한 것은 번뇌를 끊지 않고서 열반을 얻는 것이니(不斷煩惱, 得涅槃分),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성도문에서 ‘번뇌즉보리’라고 할 때는 번뇌도 공하고 보리도 공해서 그렇게 말씀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자력문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토불교와 같은 타력문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번뇌가 가득하더라도, 번뇌를 갖고 있는 채로 정토에 태어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삼계에 태어날 수 있는 업을 지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업이 이 업을 지은 범부를 끝내 삼계의 윤회로 이끌고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아미타불의 타력이 작용해서입니다.
다만, 「정신게」와 정토론주를 비교해 보면, 정토론주에서는 ‘부단번뇌, 득열반분’이라고 해서 ‘分’이라는 글자가 하나 더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가능성은 둘입니다. 첫째는 게송에서는 7자이니까, ‘분’을 생략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뜻의 차이는 없어집니다. 다른 하나는 ‘분’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뜻의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분’을 부분이라는 뜻으로 본다면, 열반을 향해서 출발할 수 있는 정도를 의미합니다. 아직 완전한 열반이라고 보기 어렵게 됩니다. 그러나 ‘분’을 ‘분제(分際)’, 즉 하나의 범주로 본다면, 열반이라는 범주를 얻는다는 것이므로 열반과 다름이 없습니다. 전자의 해석은 시작에 초점을 두고, 후자의 해석은 도착점에 초점을 둡니다. 그 어느 경우라고 하더라도, 번뇌를 갖고 있는 범부들이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지함으로써 왕생하여 열반을 얻을 수 있게 된다는 의미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증지생사즉열반’에서 ‘열반’이라는 말을 만납니다. ‘생사가 곧 열반임을 깨달아 안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 ‘부단번뇌득열반’과 같은 논리입니다. 다르지 않습니다. 앞의 ‘부단번뇌득열반’은 담란스님의 정토론주로부터 직접 인용한 것인데, 이 구절은 신란스님이 담란을 찬탄하는 맥락에서 쓴 것입니다. 비록 ‘미혹에 오염된 범부라고 하더라도 신심을 발하기만 한다면’ 증지생사즉열반이라 했습니다. ‘부단번뇌득열반’의 앞 구절은 ‘능발일념희애심’입니다. ‘능히 한 번 희애심을 발한다면’ 부단번뇌득열반을 한다고 말합니다. 희애심은 신심의 뜻입니다. 신심을 한 번 발하기만 한다면, 부단번뇌득열반하며 증지생사즉열반한다는 것입니다.
이 뜻을 존가쿠(存覺)의 육요초(六要鈔) 제2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문 불교에서와 같이 – 인용자) 범부가 곧바로 이러한 이치를 깨닫 는다는 것이 아니다. 이제 (아미타불의) 명호는 만 가지 덕이 돌아가는 바이고 불과(佛果)의 공능(功能)이다. 믿는 자의 신심이 또한 타력을 일으 키는 것이니, 다시 범부의 자력에서 나오는 용심과 행동이 아니다. 그러 므로 믿음을 일으켜서 그 명호를 일컫는다면, 비록 번뇌를 끊지 않은 나 쁜 근기를 위해서이긴 하지만 법의 공능에 의지하여 이러한 이치(생사가 곧 열반이라는 이치 – 인용자)가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육요초는 교행신증의 주석서입니다. 그러므로 교행신증 제2권에 실려있는 「정신게」에 대한 주석 역시 담겨 있습니다. 정신게 주석이 후대에 많이 나오지만, 최초의 주석서는 존가쿠의 육요초입니다.
존가쿠는 ‘부단번뇌득열반’에 대한 담란스님의 설명과 마찬가지로, 같은 맥락에서 ‘증지생사즉열반’을 해석합니다. 즉 자력이 아니라 타력에 의지하기 때문에 번뇌를 갖는 범부들이 번뇌를 가진 채로 성불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신란스님의 「정신게」에서는 ‘신심’을, ‘희애심’을 발하기만 하면 그렇게 된다고 했음에 비하여, 존가쿠는 신심을 일으킨 뒤에 명호를 일컬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를 쓰는 맥락에서 그렇게 말할 여유가 없었을 뿐, 신란스님 역시 제17원(본원명호정정업)과 제18원(지심신요원)을 병치(竝置)하고 있음을 생각할 때, 존가쿠와 마찬가지로 신심 이후의 명호까지 감안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두 분이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일으키고 명호를 일컫는다면, 번뇌 중생인 우리 범부들도 열반을 얻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상으로 ‘열반’에 대한 이야기를 마칩니다. 다음 편지에서는 ‘석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오.
나무아미타불
(2021년 5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