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9 : 36 - 43절
“다락에 뉘우니라”
지난주에 봤던 말씀 35절에 보면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어쩌면 베드로는 예루살렘을 떠나 룻다까지만 갈 계획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욥바의 사람들이 룻다에 베드로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는 베드로를 부르러 사람을 보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룻다에는 자발적으로 갔던 반면에 욥바에는 타의에 의해서 가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욥바의 사람들이 룻다에 있던 베드로를 오라고 했냐면 오늘 말씀을 통해 보면 가까운 거리였기 때문입니다. 실제 거리는 18km 정도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욥바까지 55km이니까 55에서 18를 빼면 37km가 나오는데 그 거리가 예루살렘에서 룻다까지의 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18km가 가까운 거리인 줄을 모르겠지만 강남에 있는 선릉역을 쳐 보니까 18km 정도가 나옵니다. 차로는 1시간 거리지만 도보로 확인을 해 보니까 4시간 42분 정도가 나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 거리를 가깝다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욥바 사람들은 가깝다고 생각을 해서 룻다에 있던 베드로를 데리고 오도록 했던 것입니다.
거리로 보면 가깝다고 할 거리는 아닌데도 불구하고 욥바 사람들이 그 거리를 가깝다고 느낀 것은 다급했던 심리적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굉장히 보고 싶은 사람을 초청했는데 멀다고 핑계를 대면 “뭐가 멀다고 핑계냐?”고 반박하지 않습니까? 그 정도의 거리면 가깝다고 설득을 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욥바 사람들의 심리 상태가 바로 그런 상태였던 것입니다.
욥바 사람들이 18km의 거리를 가깝다고 생각을 하면서 베드로를 급하게 오라고 한 것은 다비다 때문인데 성경은 다비다를 아주 특별하게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일단 이름부터 정리를 하면 다비다가 본명입니다. 히브리식 이름이 다비다이고 그 이름을 헬라식으로 부르면 도르가였던 것입니다. 사울이 히브리식 이름이고 바울이 헬라식 이름인 것과 똑같다고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성경에서 유일하게 표현을 하고 있는 단어인데 36절에 보면 다비다를 소개하면서 “여제자”라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여제자라는 단어는 성경을 통틀어서 유일하게 여기서만 나오는 단어입니다. 다비다가 열두 사도들처럼 예수님을 쫓아다니면서 예수님을 가까이 했던 사람도 아닙니다. 정황상으로 보면 다비다는 욥바에 살면서 선행과 구제하는 일에 일생을 바쳤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성경에서 단 한 번 사용된 여제자라는 단어를 통해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선행과 구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데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를 우리는 곱씹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교회는 빠지지 않고 나오는데 선행과 구제를 멀리하는 사람과 교회는 가끔 나오는데 선행과 구제에 대해서 헌신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놓고서 단순 비교해 보면 후자가 오히려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 제자의 모습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선행과 구제에 대해서 우리는 특별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강아지 똥, 몽실언니” 등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아동 문학가이자 베스트셀러를 집필한 권정생 작가의 유언을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내가 쓴 모든 책은 주로 어린이들이 사서 읽는 것이니 여기서 나오는 인세를 어린이에게 되돌려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권 작가는 1937년 도쿄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조국의 해방을 맞아 가족들과 돌아왔지만, 그래도 여전히 가난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19살에 가슴막염과 폐결핵에 걸렸는데 더 이상 집안에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 집을 나왔고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빌어먹으며 살았습니다. 때로는 깡통에 밥을 꾹꾹 눌러 담아주던 아주머니도, 길바닥에 쓰러져 있을 때 물을 길어다 준 할머니도 있었습니다. 자신은 죽을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그에게 어떻게든 살라고 다독여 주었습니다. 그렇게 평생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따뜻하고 가슴 시린 기적 같은 동화를 쓰신 작가였습니다. 특히 그가 쓴 동화 중에 '강아지 똥'은 남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것, 냄새난다고 인상을 찌푸리게 만드는 것,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을 것 같은 것, 이름도 없는 흰둥이 개가 싸질러 놓고 간 똥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강아지 똥'에서 말하고자 했던 내용은 가난한 사람, 약한 사람, 별 볼 일 없는 사람, 버려진 사람, 고통과 고독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이었습니다. 같은 마을에 살던 사람들은 작가님이 몹시 가난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할 정도로 평생을 산골의 단칸방 흙집에서 단벌 신사로, 일생을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권정생 작가가 2007년 5월 세상을 떠났는데 선생님의 장례를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혼자 사는 노인으로 생각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조문하며 눈물 흘리는 걸 보고 놀랐고, 10억 원이 넘는 재산과 해마다 수천만 원의 인세 수입이 있는 작가라는 사실에 또 놀랐다고 합니다. 선생님의 유산은 현재 유언에 따라 “권정생 어린이 문화재단”에서 관리하며 남북한과 분쟁지역 어린이 등을 돕는 활동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이런 선행과 구제의 삶을 살아간다면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여호와를 인정하는 사람들로 우리나라는 가득 찰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비다를 보면서 우리는 과연 얼마나 선행과 구제의 삶을 통해 예수님의 제자다움을 보여 주고 있는지 점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과부가 죽은 다비다를 살려달라고 할 정도로 선행과 구제에 온 힘을 쏟았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어느 정도 선행과 구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뜻 깊은 교훈 말고도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더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하는데 있어서 확신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서 우리는 다비다의 이야기를 통해 절실하게 느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기도하면서도 확신을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기도하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기도하면서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어디서 차이가 나냐면 감사하는 언어나 모습을 보면 확신의 기도인지 아닌지를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가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 말씀에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는 확신을 가지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렇게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시는 것이지 확신 없이, 감사함 없이 기도하게 되면 그 기도는 능력 있는 기도, 응답 받을 만한 기도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전쟁의 영웅이었던 나폴레옹이 갑옷을 사기 위해 시내에 나와서 유명한 갑옷가게에서 갑옷을 주문을 하고 돌아갔습니다. 이 당시 갑옷은 총알을 막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갑옷의 무게가 무거울 수밖에 없었는데 갑옷을 만드는 사람은 나폴레옹에 대한 충성심이 매우 강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좀 더 가벼우면서도 튼튼한 갑옷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온갖 심혈을 다 기우려서 멋진 갑옷을 만들어 냅니다. 며칠 후에 나폴레옹이 갑옷 가게에 와서 주문한 갑옷을 달라고 하니까 갑옷을 주는데 아무리 봐도 총알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은 갑옷인지라 총알이 뚫을 수 없도록 두꺼운 갑옷을 다시 만들라고 다시 명령을 했습니다. 그러자 갑옷을 만드는 사람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갑옷은 절대 총알에 뚫리지 않습니다. 그래도 못 믿으시겠다면 지금 이 자라에서 시험을 해 드리겠습니다.” 이러고는 자기가 갑옷을 직접 입고는 총을 주면서 쏴 보라고 나폴레옹에게 요청을 합니다. 너무나도 당당한 그 사람의 모습을 보고서는 나폴레옹이 그 갑옷을 기쁜 마음으로 가져갔다는 것입니다.
사실 기도하는 사람들도 이런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한 기도가 반드시 하나님께 상달될 것이고 반드시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믿음으로 감사함으로 기도를 했을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지켜주시는 큰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이지 확신 없이 기도하면 나폴레옹이 확신을 가질 수 없을 때 다시 갑옷을 만들라고 명령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라고 명령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다비다가 죽었을 때 사람들이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냐면 다비다가 죽게 되자 일단은 장례 절차에 따라 시체를 씻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다비다를 다락에 뉘여 놓고서는 사람들을 보내서 베드로에게 빨리 오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왜 베드로에게 빨리 오라고 간청을 했겠습니까? 장례 예배를 주관할 사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냐면 실제 베드로가 도착했을 때 이 과부들이 울면서 다비다가 만들어 준 속옷과 겉옷을 베드로에게 보여 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가 무슨 의미였겠습니까? “이와 같이 우리에게 선행과 구제를 열심히 한 사람이니 기도해서 다시 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런 의미로 울면서 간청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베드로에게 급히 사람을 보냈던 사람들이 바로 이 사람들이었는데 이 사람들이 얼마나 확신에 찬 모습이었냐면 다비다의 시체를 장례의 절차에 따라 씻어 놓고서는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시체가 쉽게 썩지 않도록 다락에 시체를 놓았던 것입니다. 다시 살아나야 할 육체가 조금이라도 훼손되지 않도록 급하게 베드로 사도도 데리고 왔던 것입니다.
사실 기도자라면 이런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설사 죽어서 끝난 사람이고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다 끝난 문제라도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주장하시면 반드시 회복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무덤에 놓는 것이 아니라 다락에 놓는 확신을 가지고 믿음으로 기도를 해야 그 기도가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것이지 이미 모든 소망과 기대를 무덤에 두고서 기도해서는 회복시켜 주시는, 다시 살려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몸이나 가정, 자신의 간절한 소원이나 직장의 문제,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나 세계의 복음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 안에서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 제목이 다락에 놓여있는 기도 제목이 되어야지 무덤에 놓여 있는 기도제목이 되어서는 하나님의 큰 능력과 은혜를 경험하는 복된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미 죽어 버린 다비다일지라도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다락에 뉘여 놓고 기대했던 욥바의 사람들처럼 확신과 기대를 가지고 오늘부터 전심으로 기도하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고 다비다처럼 선행과 구제의 삶으로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어 살다가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