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문장 4기 김수지입니다. 저는 소설반이구요. 아, 저는 원래 진지한 걸 잘 못쓰기 때문에 그냥, 하고 싶은 말 쓸게요.
어렸을 때부터 글을 쓰고 싶었던 것은 아닙니다. 초등학교 때 친구들끼리 노트에 돌려가며 쓰는 연애소설을 빼곤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글 한 번 써본 적이 없으니까요. 어쩌다 보니까 교내백일장에서 4등 (이건 뭐, 말이 4등이지. 전교생 중 50명에게 준 상이었어요.) 받고 괜히 신나서 글 쓰고 싶다고 설치고 다녔어요. (지금 생각해도 참......) 고2 땐 다른 학원에서 극작을 배웠는데 그 학원이 연기 중심 학원이라 실질적으로 배운 것은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뭐랄까, 학원에 대한 불신이 심했었죠. 아빠에게 ‘나, 글 쓰는 학원을 다니고 싶다. 이번엔 정말 열심히 하겠다.’라고 말을 했을 때, 정말 고맙게도 아빠는 다니라고 하셨어요. 네가 거기서 최선을 다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어떻게 막겠냐며,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한 달에 한 번씩 학원비 내는 것뿐이니, 이제 모든 것을 네가 책임져야 한다고.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났어요. 물론, 사람이 망각의 동물인지라 요즘은 아빠에게 신경질도 내고 싸우기도 하지만요. 어쨌건 아빠의 지원에 힘입어 다니게 되었습니다. 두둥 !
들어와서 받은 시제가 ‘봄날’ 이었는데 나름대로 신나게 글을 썼어요. 그렇게 원고지를 내미는데 선생님께서 첫 문장부터 빨간 줄을 좌악좌악 그으시더라고요. 와아, 그 창피함은 정말이지, 쥐구멍이 있다면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었어요. 빨간 줄이 제 맘에 스크래치를 팍팍 남겼죠. 어쨌건, 그렇게 2월 16일부터 학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저는 스토리만 나열하고 묘사라곤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는 글을 썼습니다. 선생님이 따로 묘사를 적어오라고 하실 정도로 좀 심각했었던 것 같아요. 그러던 2월 28일. 다음날은 만해백일장이 있는 날이었어요. 저는 항상 그렇듯 학원에 나와 글을 쓰고 검사를 맡았습니다. 솔직히 지금 제가 생각해도, 정말 못쓴 글이었어요. 정말 말 그대로, 못쓴, 아니 어디 가서 못써먹을, 아니 그냥 망한 글이라고 해야할까요. 결국 혼자 시제를 새로 받고 플롯을 구성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뒤에서 내일 대회 나갈 거냐고 물으시더라고요. 저는 의기소침해서 아니, 저는 그냥 안 나가려구요, 라고 말했는데 선생님이 웃으셨어요. 전 괜히 서러워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글 못 쓰는 게 창피했어요. 물론 지금도 그래요. 지금도 못써요. 그래서 아직도 창피해요.
Anyway, 저는 3, 4 ,5월 동안 학원에서 필사를 하고 글을 한 편 쓰고, 첨삭을 맡고 고치는 식으로 매일을 보냈던 것 같아요. 공모전 때문에 새벽에 집에 간 적도 있었어요. 그땐 정말 입에서 군내가 나는데, 물론 나름대로 피곤하긴 했지만 마냥 재밌더라고요.
처음엔 누구나 그렇듯 상을 받지 못했어요. 그런데 5월 둘째, 셋째 주에 갑자기 터졌어요. 아직도 미스테리에요. 왜 받았는지 모르겠어요. 학원에서 배운 것들이, 필사노트 속에 있는 몇 개의 문장들이 힘을 발휘했나봐요.
그렇게 금방 7, 8월이 됩니다! 이제부터 수시 실기 준비에 한창이죠! 각 대학에 넣을 수상실적확인서와 원본대조필을 떼러 지역 곳곳에 전화도 돌리고 찾아가기도 하고, 면접 준비도 하고, 모기들은 극성을 부리고, 덥고, 덥고, 또 더운 날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땐 무조건 하루에 한 작품 2000자 이상 2500자 이하로 만들 것, 이라는 무시무시한 스케쥴이 굉장히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요. 일상적인 단어부터, 문장, 혹은 이미지, 상황들이 시제로 제시되었고 나름대로 주제 살리려고 애썼죠. (하지만 잘 쓴 적은 한 번도 없죠. 저는 루져에요.) 곧 명지대 면접을 보러가게 되었고, 그다음은 서울예대 실기를 보게 되었습니다. 면접이야 면접후기방에 올렸으니까 생략하구요. 서울예대 실기는 대략 450명 정도가 지원을 했고, 그 중에 4배수만 뽑았어요. 최종합격자는 10명이구요. ‘찬 새벽 역전 광장에 버려진 구두 한 짝’ 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콩트를 완성하라고 하는데 우와, 어이가 없어서. 그냥 느낌 오는 대로 썼어요. 그리고 시험장을 나오면서 아무래도 예대는 안 되겠다, 생각했어요. (그리고 이쯤 그러니까 10월 23일에 서울산업대에 합격했어요. 생각지도 못해서 하루종이 멍.) 어? 그런데 1차 합격했다고 문자가 오는 거에요. 그때 친구랑 분식집에서 오징어튀김 먹고 있었는데 순간 입에서 오징어 튀어나올 뻔 했어요. 예대 1차를 합격했다는 건 합격해서 기분 좋은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있어서 그래도 읽어줄 만한 글이 된 건가? 라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기분이 좋았어요. (이런 깨알 같은 기분 !) 그리고 면접을 봤고, 너무 너무 너무 너무 정말이지 너무나 망해서 우와 이제 예대는 안녕. 김혜순 교수님, 한강 교수님, 모두모두 안녕 세이 굿바이를 외치며 안산을 떠났는데!! 원래 월요일날 발표나기로 되어있었는데 그 전 금요일날 발표가 났어요. 핸드폰 꺼놓고 6월 평가원 문제집 풀고 있었는데, 아이고, 서울산업대 최저등급은 맞출 수 있으려나, 하고 있었는데 핸드폰을 켜니까 합격했다고 문자가 와있는 거에요. 오마이갓, 지져스, 할렐루야, 유아마이선샤인. 저는 그날 평가원 모의고사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해설집을 친구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래도 수능은 봤어요.)
+) 서울산업대에 들어간 상
- 목포해양대 대상, 동국대 차하, 세종날 은상, 한작 차하, 다형 김현승 우수상, 농어촌 문학상 대상, 4.8 독립만세운동 은상, 연세대 차하, 바다사랑 공모전 장려상. 총 아홉 개입니다. 합격했다는 게 신기하네요. 내신도 40퍼센트를 본다고 하던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제가 합격했다는 게 미스테리에요.
+) 서울예대
다니는 언니들에 의하면 면접을 볼 때 교수님들은 학생들의 작품은 볼 수 없고 점수만 볼 수 있다고 해요. (예대는 한 교수님 당 150점 씩 만점, 4명의 교수님이 채점을 하시고 400점이 넘은 학생들이 1차에 합격했습니다.) 그러니까 점수가 높으면 면접으로 떨어뜨린다거나 그렇진 않는다고 해요. 제 생각에 저는 10명 중에서 10등으로 들어간 것 같아요. 어느 하나 만족시켜드리지 못했으니 가서 잘할래요.
anyway, 서울산업대와 서울예대를 붙었습니다. 서울산업대는 내신과 수상실적으로, 서울예대는 실기와 면접으로. 모두 다른 방식이었어요. 아직도 신기해요. 글 안 쓰고 공부했으면 전 지금 뭘 하고 있었을까요. 끔찍하네요.
글 써서 대학가는 건 쉬워요! 라고 말하면 그럼 네 년은 공부 열심히 하던 애들 등쳐먹는 짓거리가 아니냐, 혹은 재수없다, 라고 말할 것이고
글 써서 대학가는 건 어려워요! 라고 말하면 그럼 네 년은 그렇게 어려운 걸 열심히 해내어 역경을 이겨내었고, 그것은 너에게만 일어난 일이고, 남들은 넘보지도 못할 산이라는 것이냐, 혹은 자만하다, 라고 말할 것이 분명해요.
그러니까 뭐라고 말해야할지 모르겠어요. 저는 제 불평만 했기 때문에 항상 어렵다고만 생각했지만...... 아휴, 자꾸 비문이 생길 것 같아서 그만 쓸래요.
하고 싶은 말은!!!!!!!!!!!!!!!!!
굉장히 막연해도 좋으니까 글을 쓰고 싶다면, 펜을 잡으세요! 사람은 하고 싶은 거 하는 게 제일 좋은 것 같아요. 젊은이는 늙기 전에, 늙은이는 죽기 전에 해봐야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늙어서 후회하고 싶지 않았어요.
제가 단편소설을 쓸 때고 플롯이 엉망이라 항상 지적을 받곤 했는데, 여전하네요. 앞에 쓴 글이 두서가 없이 아주그냥 엉망이에요. 엉망. 여러분, 잘못된 것은 빨리빨리 고쳐야 해요. 안 그럼, 저처럼 돼요. 정말로.
(영신이는 잘 썼던데…….)
아우, 정말. 이 글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긴 할까요? 정말 죄송해요.
+) 전승재 글을 읽고 한 마디 더 붙여요.
저도 전승재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요. 저 같은 애가 합격한 걸 보니 모두 열정만 있다면 할 수 있을 거에요.
전 원래 의지박약이라
김박약이라 불리우던 녀성이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