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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구 흥미로운 옛 지명들
(수성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송은석)
2025년 수성문화원에서 수성구 옛 마을 이야기를 발간했다. 수성구 23개 법정동을 대상으로 지명유래, 전설을 비롯한 마을에 전해지는 옛이야기를 정리한 책이다. 이 책에 소개된 옛 마을 이름이나 지명 중에는 흥미롭고 예쁜 이름은 물론 괴이하거나 외설스러운 지명도 있다. 지명(地名)은 말 그대로 땅의 이름이다. 대부분 지명은 작명자를 알 수 없다. 작명자를 알 수 없으니 언제 생겼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지명유래만 어림짐작할 뿐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수십, 수백 년 전 또 다른 누군가의 소중한 삶의 터전이었다. 그래서 옛 지명과 옛 마을 이야기 속에는 당시 사람들의 추억과 애환은 물론, 미래에 대한 희망에 이르기까지 그 지역 인문지리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이 글은 수성구 옛 마을 이야기에 소개된 수많은 지명 중 흥미로운 지명 일부를 소개한 것이다. 지역 사랑은 캠페인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알면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 지역 사랑이다. 더 많은 수성구의 흥미로운 지명을 알고 싶다면 수성구 옛 마을 이야기를 참고하기 바란다.
수성구 흥미로운 옛 지명들
가락골·가랫골--범물동(凡勿洞)
가락골은 약 4km에 이르는 진밭골 중간 지점으로 진밭2교 남쪽이다. 가락골에는 여러 지명유래가 전한다. 처음에는 경치가 아름다워 ‘아름다울 가(佳)’, ‘골 곡(谷)’, '가곡(佳谷)'이었는데 세월이 흘러 가락골로 변했다고 한다. 또 골짜기 주변에 가래나무가 많아 ‘가랫골’로 불리다가 가락골이 됐다고도 한다. 다른 유래설로는 좁고 긴 골짜기가 마치 베틀에 사용되는 가락을 닮아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 또 일설에는 가락골의 모습이 엿가락, 가락국수 같이 가늘고 긴 것에서 유래됐다고도 한다. 옛날에는 대덕지에서 진밭2교까지를 안골, 안골에서 진밭골 사이를 가락골이라 불렀다. 안골은 대부분 논이었고, 가락골은 논과 밭이 섞여 있었다. 과거 가락골에는 10호 규모 작은 마을이 있었다.
광역사(廣域沙)--가천동(佳川洞)
광역사는 가천동의 지명으로 지금의 가천역 부근으로 추정된다. 옛날 이곳에 커다란 못이 있었고 못에 살던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광역사는 남천과 금호강이 합수하는 지역으로 두 강의 범람으로 인해 모래가 넓게 쌓여 ‘넓은(廣域) 모래밭(沙)’이란 뜻에서 붙은 지명이다. 이곳에 경부선이 부설되고 금호강 제방이 만들어지면서 광역사는 논으로 활용됐다가, 지금은 가천역과 철도부지 및 수성구민 운동장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1980년대 지도에는 광역사 지역을 철로를 기준으로 북쪽을 ‘가천갯벌’, 남쪽을 ‘듬밑에들’로 표기하고 있다. 한편 토박이 구술에 의하면 마을 북서쪽 들판 가운데 작은 못이 있었고, 그 주변 들을 광역사라 불렀다고도 한다. 가천동 북쪽 금호강변에는 ‘안골들·개답·뚝밭’ 등의 들이 있었다.
개미마을--만촌동(晩村洞)
개미마을은 만촌2동 옛 지장골에 있었던 마을이다. 현 만촌 태왕리더스 아파트에서 무열로 건너편 골짜기 남동쪽 끝자락이다. 개미마을의 시작은 1968년 12월경이다. 카톨릭 노동청년회 김병수 씨와 장사익 씨가 넝마주이와 구두닦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그들의 복지를 위해 만촌동 산 358번지에 집을 짓고 산 것이 시작이다. 개미마을이란 이름은 1967년 설립된 자치생활집단인 ‘한국개미회’와 관련 있다. 부지런하고 근면한 개미의 습성을 본받자는 뜻이다. 지금은 당시 구성원들은 모두 마을을 떠나고 개미마을이란 이름만 남았다.
깃대봉--범어동(泛魚洞)
깃대봉은 범어4동에 있는 야산 봉우리로 KBS방송국 뒷산 정상으로 추정된다. 어느 때 일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통신수단으로 봉화를 이용하던 시대에 깃발로 신호를 전했던 곳으로 전한다. 조선시대 때 범어역이 있었던 범어동은 대구는 물론 영남의 관문과도 인접해 있었다. 그래서 외적의 침입이나 내란이 일어났을 때 신속하게 고을민과 인근 고을에 상황을 알리기 위해 이 산 정상에서 봉화 대신 깃발을 흔들어 신호를 보냈다고 한다. 지금은 깃대봉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구전으로만 범어동 일대 주민들에게 전해져 오고 있다.
고모령(顧母嶺)--고모동과 만촌동
고모령은 고모동과 만촌동을 잇는 고개로 형봉과 제봉 사이에 있다. 현재 고모동 쪽은 동대사 북쪽으로 일부 구간이 남아 있지만, 만촌동 쪽은 2군사령부로 인해 통행이 불가능하다. 수성구에는 두 개의 고모령비가 있다. 하나는 만촌동 영남제일관 인근에 있으며 다른 하나는 2군사령부 영내에 있다. 현재 대구 시민 대부분은 팔현고개를 고모령으로 잘못 알고 있다. 이는 영남제일관 인근에 있는 ‘고모령비’ 때문이다. 고모령과 인근 모봉·형봉·제봉에는 흥미로운 전설이 전한다. 대부분의 전설은 모자(母子) 간의 애틋한 정을 담고 있는데, ‘어떠어떠한 이유로’, ‘어머니(母)가 뒤를 돌아보았다(顧, 되돌아볼 고)’는 내용이다. 전설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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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가 자신의 아들과 딸이 산 쌓기 내기로 다투는 모습을 보고 속이 상해 집을 나갔다. 어느 고갯마루에서 아이들 걱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는데 그 고개가 바로 고모령이다.
○ 어린아이를 가마솥에 삶아 약으로 쓰면 중병에 걸린 홀어머니를 살릴 수 있다는 한 노승의 말이 있었다. 젊은 부부는 자신의 어린 아들을 삶기로 했다. 엄마가 아들을 가마솥에 넣고 솥뚜껑을 닫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들을 한번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 순간 가마솥에 있어야 할 아들이 난데없이 “엄마”하고 소리치며 사립문을 열고 들어왔다. 엄마가 가마솥 안을 보니 가마솥 안에는 아이 모습을 닮은 동삼(童蔘)이 들어 있었다. 젊은 부부의 효성에 감동한 하늘이 기적을 베푼 것이었다.
○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하다 대구 감옥에 갇힌 두 아들을 둔 홀어머니가 고산동에 살고 있었다. 매일 대구 감옥으로 아들 면회를 갔다가 돌아올 때, 이 고갯마루에 뒤돌아 앉아 해가 질 때까지 대구 쪽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넘어왔다.
○ 고모가 등장하는 전설도 전한다. 옛날 한 여인이 친정 조카를 데려다 키웠다. 세월이 흘러 조카는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로 길을 떠났다. 고모는 서울로 떠난 조카가 급제해 돌아오기를 이 고개에서 기다리다 지쳐 죽었다. 나중에 고향으로 돌아온 조카가 죽은 고모를 그리워했다고 ‘고모령’이란 이름을 얻었다.
참고로 일부 옛 문헌에는 고모령을 ‘소장현(小墻峴)’(작은 담장고개), 담티고개를 ‘장현(檣峴)·대장현(大墻峴)’(큰 담장고개)으로 표기하고 있다. 고모령은 가수 현인의 노래 ‘비 내리는 고모령’의 배경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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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孤山)--성동(城洞)
고산(95.3m)은 성동과 매호동 경계에 있는 작은 산으로 ‘성산(城山)’이라고도 한다. 주변에는 매호들이 펼쳐져 있으며 남천과 금호강이 감싸 흐른다. 고산이란 이름은 들판 가운데 홀로 서 있는 ‘외로운 산’이란 뜻이다. 고산은 높지도 크지도 않은 작은 산임에도 대구와 경산 사이 넓은 지역을 일컫는 ‘고산’이란 지명의 유래가 된 산이다. 이는 고산이 퇴계 이황이란 큰 인물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이황은 약 500년 전 이곳에 건립된 서당에 ‘고산’이란 이름을 지어주었고, ‘구도(求道)’란 문 이름을 친필로 써서 내려주었으며, 고산서당에서 강학한 사실이 있다. 이러한 사실은 고산서당 관련한 여러 기록에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과거 고산은 이 지역을 대표하는 명승지였다. 지명조사철(1959) “고산은 이 퇴계, 정 우복(정경세) 양선생의 유촉지지(遺躅之地)이며, 다른 산으로부터 이어진 맥이 없고 고립 돌출하여 옛날에는 수목이 무성하고 사방 경치가 좋아 관람객이 연속되어 고산면의 명승지임. 고산면의 면 이름도 본 명승지에 연유해서 고산면으로 지정되었음. 이상 연유로 고산이라 칭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고산은 야외박물관이기도 하다. 고산 남쪽에는 삼국시대 고분군이 있었으며, 산 정상부에는 고산 토성과 성산 봉수도 있었다. 옛날에는 고산이 마치 누에가 누워있는 모습을 닮아 ‘잠베산’으로 부르기도 했으며, 매호동 쪽에서는 고산을 우산(牛山·소산) 앞에 있다고 ‘소 여물통’으로 불리기도 했다.
꽁지·꿩지·꿩정--대흥동(大興洞)
꽁지는 대흥동 자연부락으로 지금의 수성TG와 달구벌대로 사이에 있었던 작은 마을이다. 꽁지 마을은 원래 ‘꿩지(雉地)’였는데, 발음상 꽁지가 됐다. 꽁지 마을에는 흥미로운 지명 유래가 전한다. 옛날 사월동에 살던 정씨(鄭氏)가 묏자리를 쓰려고 땅을 팠는데 땅속에서 돌판이 하나 나왔다. 이 돌판을 들추니 꿩 한 마리가 나와 날아갔다고 한다. 정씨는 꿩이 날아가 앉은 곳에 묘를 썼고, 꿩이 날아가 앉았다고 해서 ‘꿩정’이란 이름을 얻었다는 전설이다. 꿩정이 곧 꽁지 마을이다. 당시 일곱 묏자리를 썼는데 오랜 세월 꽁지 마을에 흔적이 남아 있었으며, 이곳에 묘를 쓴 후손들은 모두 잘살게 됐다고 한다. 또 다른 유래설로는 꽁지 마을이 대덕산에서 북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의 북쪽 꽁지에 있어 붙은 이름이라는 설이다. 1954년 항공사진에 들판 가운데 자리 잡은 10호 규모의 꽁지마을과 마을 동쪽 들판에 몇 기의 묘가 모여 있는 세 군데 묏자리가 보인다.
구름마을·구름골·구름지·구리지--삼덕동(三德洞)
구름마을은 범안로 삼덕TG 북쪽 골짜기 마을이다. 구름이란 이름은 이 마을에 있는 ‘구름지’라는 작은 연못에서 유래됐다. 구름지는 본래 못이 아닌 크고 아주 깊은 우물이었다고 한다. 이 우물은 비만 오면 우물 위에 몰려 있던 구름이 무지개를 만들어 ‘구름우물’로 불렸는데 일제시대까지 있었다고 한다. 구름지에 대해서는 또 다른 이야기도 전한다. 이곳은 지산동 쪽에서 불어오는 지산골 바람이 구름골로 넘어오는 고개 아래쪽이다. 신천의 습기를 머금은 지산골 바람은 이 고개를 넘으면서 ‘푄’ 현상을 일으킨다. 그래서 이 지역에는 항상 안개와 구름이 덮여 있어 구름지라 불렸다고 한다.
구름마을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전한다. 구름마을에 있는 운곡사 부근 계곡에는 소가 끼면 빠져나올 수 없는 홈이 있었는데 여기서 소를 잡았다고 한다. 소를 이 홈에 밀어 넣어 꼼짝달싹 못 하게 한 후 소를 해체했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종종 연호동에서 술에 취해 소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나중에 이 계곡에서 자신 소에 매달아 두었던 코뚜레나 표식을 찾았다고 한다.
구천지(狗泉池)·개심못·개샘·매호지--매호동(梅湖洞)
구천지는 매호동 들판인 매호들(개심들)에 물을 대기 위해 만든 못으로 ‘개심못’이라고도 불렀다. 구천지에는 두 가지 지명 유래설이 전한다. 하나는 옛날 이곳 주민들이 개심들에 물을 댈만한 물줄기를 찾아다녔는데 수원을 찾기 어려웠다. 하루는 함께 따라온 개가 땅에 주둥이를 대고 짖어댔다. 이상하게 여겨 그곳을 파니 많은 양의 물이 솟아나 못을 만들었다는 전설이다. 다른 하나는 못을 팔 때 개가 지나가는 꿈을 꾸었다고 해서 ‘개 구(狗)’, ‘샘 천(泉)’ 자를 따서 ‘구천지’라 불렀다고 한다. 구천지는 ‘개샘’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개샘을 다르게 풀이하는 설도 있다. 매호동이나 사월동 등 고산지역 들판은 대부분 선상지(扇狀地)로 형성되어 있다. 선상지 지형은 선정부에서 시작된 복류천(땅 밑으로 흐르는 물)이 선앙부를 지나 하단인 선단부에 이르면 샘이 되어 지상으로 솟는 특성이 있다. 개심들은 매호천 범람으로 모래, 자갈, 진흙 등의 ‘개흙’이 쌓여 형성된 선단부 들판이다. 따라서 이 들판에 있는 샘을 개흙으로 된 땅에서 솟기 때문에 ‘개샘’이라 부르고 한자로 구천(狗泉)이라 했다는 설이다. 일제강점기 때 못을 메워 논을 만들려는 계획이 있었으나 주민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2024년 ‘구천지’에서 ‘매호지’로 이름이 공식 변경됐다.
굴통 바위·굴뚝 바위--삼덕동(三德洞)
대덕산 정상 부근에 굴통바위라는 작은 바위굴이 있다. 굴통바위에는 몇 가지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옛날 이곳 굴통바위에 대덕산 호랑이가 살았다고 한다. 약 50년 전, 산 아랫마을에 사는 한 할머니가 가뭄이 심하면 굴통바위에서 초를 켜고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할머니는 새벽에 굴통바위에 올라갔는데 항상 호랑이가 앞장서 길 안내를 해주었다고 한다. 비슷한 이야기로 ‘내호댁’이라 불리는 할머니 이야기도 있다. 할머니는 아들이 없고 딸만 있어 아들 점지를 위해 새벽마다 굴통바위에 올라 기도를 했다. 그때마다 호랑이가 할머니 앞에서 길 안내를 했다고 한다. 또 약 45년 전 굴통바위 인근에 비행기가 충돌하는 사고도 있었다고 한다. 굴통바위에는 작은 샘이 있다. 옛날에는 대덕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목이 마르면 굴통바위로 가 이 샘물을 먹었다고 한다. 1980-90년대에는 무속인들이 굴통바위 앞에 움막을 짓고 기도처로 삼기도 했다.
꼬부랑 바위--노변동(蘆邊洞)
대구농업마이스터고등학교 남쪽에 선비들이 머리에 쓰는 유건(儒巾) 모양을 닮은 유건산(453m)이 있다. 유건산 기슭에 ‘꼬부랑 바위’라는 묘한 바위가 있었는데, 바위 밑에서 항상 맑은 샘물이 흘러나왔다. 샘물은 추운 겨울에도 얼지 않고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며, 누구나 마시면 늙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어 일명 ‘장수수(長壽水)’라 불렀다고 한다. 꼬부랑 바위라는 이름은 노인들이 많이 찾아오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그 덕분인지 유건산 아랫마을에는 장수하는 노인이 많았다고 한다.
대밭각(깍)단·웃각단·아랫각단·숲골각단·꽁지--대흥동(大興洞)
대흥동은 대덕산 심천골에서 발원한 실개천이 북쪽으로 다섯 마을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것이 마치 꼬치를 꿰는 모습을 닮아 ‘내관동·내곶동(內串洞)’이라 했다. 일제강점기 때 ‘내환동(內患洞)’이 됐다가 2001년 대흥동(大興洞)으로 개명했다. 과거 대흥동에는 다섯 자연부락이 있었다. 실개천 흐름을 따라 남쪽에서 북쪽으로 대밭각단, 웃각단, 아랫각단, 숲골각단, 꽁지였다. 제일 윗마을인 대밭각단은 대구스타디움 종합안내소와 대구광역시체육회관 사이에 있었고, 제일 아랫마을인 꽁지는 수성TG와 달구벌대로 사이에 있었다. 지금도 웃각단·아랫각단·숲골각단 일부는 월드컵로·미술관로에 둘러싸인 채 옛 모습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다.
담티고개·담티재·담티못·장현제(墻峴堤)--이천동·만촌동
담티고개는 만촌동과 고산동의 경계인 대륜중고등학교 북편 고개를 말한다. 황금동 두리봉에서 만촌동 형제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사이 고개로 1980년대 초까지 대구와 경산의 경계였다. 담티고개는 몇 가지 지명 유래설이 전한다. 지금의 담티고개가 생긴 것은 일제강점기 때로 많은 인부를 동원해 산을 뚫어 만들었다. 이때 산을 뚫은 것이 마치 담을 틔우듯 했다고 ‘담티’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또 다른 유래설은 명나라 장수 두사충과 관련된 설이다. 두사충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으로 조선에 왔다가 임란 후 조선에 귀화해 대구에 살았다. 그는 풍수지리에 밝았는데 이순신 장군을 비롯한 당시 많은 사대부의 묘터와 집터를 잡아준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자신의 묘터로 수성구 성동 고산서당 터를 미리 점지해 두었다. 만년에 아들과 함께 자신의 묘터를 살피기 위해 세 번이나 길을 떠났다. 하지만 매번 담티고개에 이르면 숨이 차고 가래가 끓어 고개를 넘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두사충은 고산서당 자리가 아닌 담티고개 직전인 지금의 모명재 뒷산 형제봉 자락에 묻혔다. 이후 두사충이 ‘담티가 나 넘지 못한 고개’라는 뜻에서 담티고개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담티고개 관련해 청도군지(1834)에 흥미로운 내용이 보인다. “新官到任時慶山仇火驛大馬一匹步從二名兵房色領率待候於慶山潭峴(신관 사또가 도임하면 경산 구화역의 대마(大馬) 1필과 보종 2명을 병방색이 거느리고 경산 담현에서 신관 사또를 기다린다)”는 기록이다. 지명조사철(1959)에는 담티고개에 대해 “옛날 성리당(城理堂)이 있었던 곳이므로 당제를 모셨다는데 일제 때 이를 헐어 버리고 대구와 경산을 통하는 도로를 만들어 지금은 흔적이 없어지고 당테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그 후 음이 변하여 당터고개라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댕대이못·매봉지·곶계지·천계지--범물동(凡勿洞)
댕대이못은 지금의 대구도시철도3호선 범물차량기지 자리에 있었던 못이다. 매 부리를 닮은 매봉 아래에 있는 못이란 뜻에서 ‘매봉지’라고도 불렸다. 댕대이못이란 이름은 못에 ‘댕대이’라는 수초가 많아 붙은 이름이다. 과거 지산동, 범물동 일대에 농업용수를 공급했던 중요한 수원지였던 댕대이못은 2000년 전후 매립되어 범물차량기지가 들어섰다. 옛 지도에는 ‘곶계지·천계지’로도 표기되어 있다. 댕대이못은 1927년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기존에 있던 못을 이 시기에 확장·개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돌암뱅이·다람뱅이--범어동(泛魚洞)
돌암뱅이는 범어3동에 있었던 지명이자 자연부락이다. 지금의 ‘한국전력공사 대구전력관리처’ 북동쪽 언덕 아래 지역이다.(범어동 2148) 돌암뱅이란 지명은 복개되기 전 범어천이 이 언덕 아래에서 물길이 돌아 흘러간다는 데서 유래됐다. 1954년 항공사진에는 현 한국전력공사 자리에 옛 ‘조선전업대구변전소’가 보인다. 변전소 주변에는 논밭만 보이고 민가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돌암뱅이 건너 언덕 위(배밀) 현 화성파크드림 아파트 자리에는 민가 8-9호가 보인다. 1980년을 전후한 지도에서는 돌암뱅이 주변이 이미 주택가로 바뀌었고 동쪽에 한전 아파트, 남쪽에 광명아파트, 한도맨숀 등이 나타난다.
두꺼비 바위, 이득심 송덕비, 수창군 치소유적--중동(中洞)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쯤, 지금의 수성구 중동시장 인근 삼거리에 특별한 공간이 있었다. 마을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냈던 마을 제단이다. 당시 제단에는 당산나무인 회화나무 한 그루가 있었고, 그 아래에 ‘두꺼비 바위’와 ‘정경부인 이득심 송덕비’가 있었다. 1980년대 초 이곳에 도로가 나면서 마을 제단은 사라졌다. 이때 회화나무는 베어졌고, 두꺼비 바위와 송덕비는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오랜 세월 중동 주민들의 기도 대상이었던 두꺼비 바위와 송덕비. 과연 그 정체는 무엇이었으며,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중동 두꺼비 바위
수성구청 정문 옆에 작은 돌덩이 하나가 놓여 있다. 이 돌덩이가 과거 중동 주민들이 마을 수호신으로 섬겼던 두꺼비 바위다. 크기는 대략 길이 80cm, 높이 50cm 정도다. 1980년대 초 도로 개설 때 수성구청 뜰에다 옮겨놓았다가 2021년 현 위치로 옮겼다. 두꺼비 바위는 언제 누가 무슨 목적으로 조성했는지 알려진 내용이 없다. 추측건대 두꺼비가 흉을 물리치고 길을 불러온다거나, 재물을 불려주고, 수해를 막는다는 등, 전통 민간신앙에 기원해 주민들이 조성한 것으로 보고 있다. 중동은 신천변에 자리한 마을로 지금처럼 튼튼한 제방이 있기 전에는 수해가 제일 큰 걱정이었다. 그래서 주민들이 나서 마을 수호신으로 두꺼비 바위를 모셨던 것 같다.
정경부인(貞敬夫人) 이득심(李得心) 송덕비(頌德碑)
중동행정복지센터 앞마당에 작은 비 2기가 있다. 조선 말 고종 때 궁중에서 상궁을 지낸 이득심이란 여인의 덕을 기리는 송덕비다. 그녀는 조선 말 국운이 기울자 상궁직을 사직하고 고향 중동으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녀는 주민들이 흉년과 조세 부담에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재산을 털어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었다. 이에 주민들은 그녀의 은혜에 보답하고 그녀를 기리기 위해 1923년 두꺼비 바위 곁에다 이득심 송덕비를 세웠다. 송덕비는 1980년대 초 도로 개설로 처음에는 중동경로당 앞으로 옮겨졌다가, 2016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2기의 비 중 하나는 1923년 세운 옛 비이고, 다른 하나는 옛 비의 글자가 마모되어 1980년에 새로 세운 것이다.
중동 수창군 관아 유적
지금의 수성구는 신라시대에는 위화군(喟火郡) 혹은 수창(壽昌)이었고, 고려시대에 와서 수성이 됐다. 통일신라 이전 대구에는 달구벌(대구도심), 수창(수성), 팔리(칠곡), 하빈, 화원이 있었다. 이 중 중심 세력은 달구벌이었다. 하지만 통일신라시대 신문왕 이후 대구 중심은 달구벌이 아닌 수창으로 바꿨다. 신문왕이 신라 수도를 경주에서 달구벌로 천도하려다 무산된 이후였다. 이 일로 경주 기득권 세력은 위상이 높아진 달구벌을 경계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기존 달구벌 아래에 있던 수창을 ‘수창군’으로 승격시키고, 대구현을 비롯한 팔리현, 하빈현, 화원현을 수창군의 속현으로 만들어 수창군이 거느리게 했다.
이러한 사실은 문헌자료를 통해서는 확인이 됐지만,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고고학 유물은 그동안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2019년 중동시장 북쪽 아파트 신축공사 현장(수성골드클래스더센텀)에서 의미 있는 유물이 발견됐다. 그중에는 연화문 수막새, 당초문 암막새, 귀면와, 치미편 등이 있었다. 이는 아무 곳에서나 출토되는 유물이 아니라 신라 수도 경주의 궁궐, 관아, 큰 사찰 터 등에서만 출토되는 매우 특별한 유물이었다. 이를 토대로 전문가들은 지금의 중동 일원이 옛 수창군의 중심이었고, 이 유물이 출토된 지역에 수창군 관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중동 수성골드클래스 아파트 서편 출입구 옆에 이런 내용을 담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두산·말뫼·독뫼·불뫼·불미·동묘산(洞墓山)·동막산(洞幕山)--두산동(斗山洞)
두산동이란 지명은 ‘말뫼산·독뫼산·동막산·동묘산(洞墓山)·두산’ 등에서 유래된 것으로 여러 지명 유래설이 전한다. 두산은 두산오거리 남쪽에 있는 해발 97.2m의 작은 야산이다. 옛날 한 여인이 빨래를 하다가 산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는데, 그 순간 움직이던 산이 들판 가운데 멈췄다. 이때 멈춘 산이 들판 가운데 홀로 서 있어 ‘독뫼산’이라 불리게 됐다는 전설이다. 다른 설로는 마을에 있는 산이 콩처럼 생겼다고 해서 두산동, 산이 됫박을 닮아 ‘됫박산’으로 부르던 것이 한자로 두산(斗山)이 됐다는 설 등이다.
한편 말뫼를 지금의 두산오거리에 있는 두산이 아닌 수성못 남쪽에 있는 법이산과 용지봉 전체를 가리킨다는 유래설도 있다. 이 산을 수성들에서 바라보면 마치 커다란 말이 갈기를 늘어뜨리고 앉아 있는 모습을 닮아 산 전체를 말뫼라 했고, 말뫼 아랫마을을 말뫼 마을이라 했다는 설이다. 말뫼의 ‘말’은 ‘머리·마리’의 줄임말로 말뫼산은 지역의 으뜸 산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또한 고분군을 ‘말무덤’이라 부른 예가 많은데 두산 역시 고분이 많아 말뫼로 불린 것 같다. 1980년대 지도에는 두산이 동묘산(洞墓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글자대로 풀이하면 ‘마을 공동묘지 산’이란 뜻이다. 두산은 산 전체가 청동기시대 유적으로 두산동 고분군이 있었던 곳이며, 지금도 두산 정상부 일대에는 50기가 훨씬 넘는 민간 묘가 있다. 최근 지도에는 동막산이란 표기가 보인다. 이는 ‘묘(墓)자’를 꺼려 비슷한 글자인 ‘막(幕)’로 바꿨거나 아니면 ‘묘(墓)’ 자와 ‘막(幕)’ 자를 혼동한 데서 나온 오류로 보인다.
묵넘어·묵넘이·물넘이·불막--두산동(斗山洞)
묵넘어는 두산오거리에서 지산·범물동으로 가는 지범로 초입 좌우 야산 사이에 있었던 마을이다. 묵넘어는 임진왜란 때 현풍에서 이곳으로 온 피난민들에 의해 형성됐다고 한다. 묵넘어에도 몇 가지 지명 유래설이 전한다. 묵넘어라는 동명은 가마를 타고 이 마을을 지나는 사람은 반드시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어간다고 해 '묵넘이'라고 한 것이 발음이 바뀌어 '묵넘어'가 됐다고 한다. 다른 설도 있다. 지산동에서 두산동 쪽을 바라보면 범어천이 이 지점에서 두산을 돌아서 흘러간다. 이를 물이 돌아 넘어간다는 뜻으로 ‘물넘이’라 했다는 설이다. 또 다른 설로는 새터(TBC대구방송국 서편) 마을에서 묵넘어를 보면 그 가운데로 범어천이 흐른다. 그래서 물 너머 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물넘이’라고 불렀다는 설이다. 일설에는 옛날에 이곳에 부처가 있었다고 해 ‘불막’으로 불렀다고도 한다. 대구부읍지에는 두천동(斗川洞)으로 표기되어 있다. 1954년 항공사진에서는 20여 가구가 묵넘어 마을을 이루고 있다.
들안길--상동·중동·수성동
본래 들안길은 수성못둑에서 지금의 수성네거리 교보빌딩 너머까지 수성들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약 4km 이르는 직선 길이다. 수성들 안쪽 한가운데 나 있는 길이란 뜻에서 들안길이라 불렸다. 1960-70년대까지 들안로 주변은 민가 없이 오직 수성들만 있었고, 1980년대 들어 서서히 도시화가 시작됐다. 당시 수성못둑을 시작으로 들안길 인근까지 간이식당이나 선술집 등이 밀집해 포장마차촌을 형성하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 들안길 인근에 아파트 모델하우스가 속속 들어서면서 식당이 급속도로 늘어났고, 1990년대 ‘토지초과이득세’ 도입으로 들안길에 본격적으로 대형 식당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현재 대구 시민들이 말하는 들안길은 ‘들안길 먹거리 골목’을 말하는 것으로 전체 들안길 중 상동·두산동에 있는 들안길을 말한다.
만촌동(晩村洞)
만촌동의 본래 이름은 '늦이·느지미·느짐' 또는 ‘각계’라 했다. 농사도 늦고, 사람도 늦고, 비 온 뒤 물 빠짐도 늦는 등 모든 것이 늦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늦이'를 한자로 ‘늦을 만’, ‘마을 촌’, 만촌 또는 ‘늦을 지(遲)’, ‘풀 싹 잉(芿)’, 지잉(遲芿)으로 표기했다. 만촌동은 임진왜란 전후 옥천 전씨가 처음 터를 잡았다. 이후 1650년경 달성 하씨, 달성 서씨가 터를 잡았다. 만촌동에 터를 잡은 세 성씨는 모두 대구 양반 가문으로 학문을 중시했다. 농사철이 되어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은 탓에 항상 이웃 마을보다 농사일이 늦었다고 한다. 그래서 농사일이 늦은 곳이라는 뜻에서 만촌동이란 동명을 얻었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만촌동은 산세가 높지는 않지만 여기저기 언덕이 느즈러져 있는 형국이어서 '늦이·느지미·느짐'이라는 동명을 얻었다는 설도 있다. 지명조사철(1959)에는 만촌동에 대해 “옛날에 촌락으로서 늦게 생긴 부락이라 하여 ‘늦지미’라 불렀으나 변하여 ‘늦임’이라 불리다가 한자로 고친 것.”이라 기록되어 있다.
못안과 봉천(奉天)--황금동(黃金洞)
못안(신천지타운)과 봉천(경북고등)은 황금동 자연부락이다. 작은 야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남쪽과 북쪽에 있는 '못안'과 '봉천'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못안의 손 아무개가 늦게 아들 하나를 얻었다. 아들이 성인이 되자 산 너머 봉천의 김 아무개 집과 혼례를 약속했다. 그런데 혼례를 앞두고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색싯감이 불치병으로 ‘오늘, 내일’ 한다는 소문이었고 결국 혼사는 깨졌다. 신랑감은 시름시름 앓다가 마을 앞 못에 빠져 죽었고, 이후 못 물이 붉은 흙탕물로 변했다. 마을 사람들은 못가 느티나무 아래에서 굿을 했고, 이후 못물이 다시 깨끗해졌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못 이름을 ‘청호(靑湖)’로 하고, 못안을 ‘청호 마을’이라 불렀다. 한편 처녀 역시 신랑 될 사람이 못에 빠져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마을 뒷산에 올라 하늘을 쳐다보며 서글프게 울다가 못(봉천못)에 빠져 죽었다. 혼례를 치르지 못한 처녀가 하늘을 보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다 죽었다고 해서 '하늘을 우러르다'는 의미로 마을 이름을 봉천(奉天)이라고 했다는 전설이다.
물어부리--고모동(顧母洞)
물어부리는 고모동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이천동·연호동에서 발원해 고모동과 가천동 사이로 흐르는 하천이 고모역 인근에서 금호강·남천과 합수하는 지점이다. 물어부리는 ‘물’과 ‘어불리다·어울리다’의 합성어이며, 위치는 고모역 동쪽 지금의 범안대교 인근이다. 1954년 항공사진에는 경부선 철로와 금호강 사이 넓은 들인 물어부리가 보인다. 1970-80년대 지도에는 논농사를 짓는 ‘안골들’로 표시되어 있다.
바리곧에골--만촌동(晩村洞)
바리곧에골은 만촌1동에 있었던 자연부락이다. 도시개발 이전 현 대구시립수성도서관과 메트로팔레스 아파트(옛 육군대구병원) 사이에 있었던 골짜기다. 바리곧에골은 ‘바로 올라갈 수 있는 골짜기’란 뜻이다. 하지만 바리곧에골이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954년 항공사진을 참고하면 지금의 메트로팔레스 1·2단지 지역에 북서에서 남동으로 거의 일직선에 가깝게 뻗은 길과 그 길 남동쪽 끝에 민가 3호가 보인다. 이곳이 바리곧에골로 추정된다. 조선지지자료(1910년대초)에 등재된 ‘진골(眞谷)·바린골’이 바리곧에골이다.
배내--이천동(梨川洞)
배내는 이천동의 자연부락이다. 배내는 ‘배나무 마을의 내(川)’라는 뜻이다. 이천동에는 두리봉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내(川)가 있는데 이름이 ‘배내’이고, 주변 마을 이름 역시 ‘배내'다. 배내는 옛날 이 마을에 큰 배나무가 있어, 혹은 배나무가 많은 것에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현재도 이천 내지(內池)를 기준으로 서쪽에 배내, 남쪽에 새청 마을이 남아 있다.
배밀--범어동(泛魚洞)
배밀은 범어3동에 있었던 자연부락이다. 복개되기 전 범어천이 이 일대 언덕(범어동 2148) 아래로 흐를 때 항상 조각배 두어 척이 드나들며 배가 닿았던 물가 언덕이라는 뜻에서 '배밀'이라 불렀다. 지금의 범어 화성파크드림 아파트가 있는 언덕 부근이다. 1954년 항공사진에는 범어 화성파크드림 자리에 8-9호 정도 민가가 보인다. 범어천을 가운데 두고 배밀과 마주 보고 있었던 동네가 돌암뱅이다.
범물동(凡勿洞)
범물동에는 몇 가지 유래설이 전한다. 옛날 이곳에 범이 많았고, 계곡 밑에 샘이 있어 범물이라는 설, 인근 용지봉(633.8m)에서 내려다본 계곡 형태가 '범(凡)' 자를 닮아 범물이라는 설 등이다. 다른 설도 있다. 임진왜란 때 밀양 박씨, 전주 최씨, 인동 장씨가 이곳에 피난해 정착했다. 당시 마을 뒷산은 나무가 울창해 범이 살았는데, 범이 출몰해 가축을 물어가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래서 주민들은 ‘범’이 오지 말 것을 바라는 뜻에서 마을 이름에 ‘없을 물(勿)’ 자를 써 범물이라고 했다는 설이다. 이 밖에도 마을 뒷산에서 범이 많이 울어 ‘범울이’ 또는 ‘범물리’라 불렸다는 설도 있다. 실제로 이 마을에는 1970년대까지도 늑대가 출몰해 가축을 잡아먹는 일이 있어 밤에 다니기가 조심스러울 정도였다고 한다. 지명조사철(1959)에는 범물동에 대해 “옛 수성현 수동면 범물리였으며 범물역이 있었다 함. 동 구역 개편 시 진밭골, 가랏골을 합하여 범물동이라 하였음. 옛날 뒷산에 범이 많이 나온다는 것으로 범물동이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범바우들겅이·봉창바우·샘바우·장군바위--범물동(凡勿洞)
범물동 용지봉 아래 급경사를 이루는 골짜기를 반대편에서 보면 여성이 누워있는 형상을 닮았다. 그래서 이 골짜기에는 좀 특별한 이야기가 전한다. 하나는 용지봉 정상에서 가까운 ‘범바우들겅이’란 계곡에 얽힌 전설이다. ‘범바우들겅이’는 ‘범바들게이’ 또는 ‘뱀다들거이’라고도 한다. 이 계곡 한가운데 여성의 음부를 닮은 곳이 있는데, 사람이 그곳을 만지면 산 아래 동네 처녀들이 바람이 난다고 한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다른 동네 사람이 이곳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감시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다른 하나는 용지봉 아래 여성의 자궁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는 넓은 바위 이야기다. 이 바위 주변에는 숲이 형성되어 있는데 숲이 무성한 해에는 아랫동네 여인들이 바람이 나지 않고, 숲이 무성하지 않으면 바람이 난다는 속설이다. 이 바위는 성인 5-6명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큰 구멍이 뚫려 있어 ‘봉창바우’라고도 하고, 바위 옆에 물맛이 좋은 샘이 있어 ‘샘바우’라고도 한다. 봉창바우는 옛날 어느 장군이 머리를 박아 큰 구멍이 생겼다고도 하고, 장군이 쏜 화살을 맞은 자리가 구멍이 났다는 전설도 있다. 장군이 쉬어 갔다고 해 ‘장군바위’라고도 한다.
상동(上洞)·중동(中洞)·하동(下洞)
상동·중동·하동은 수성못에서 동신교 일대까지 이어졌던 옛 수성들과 신천 접경지에 자리한 세 마을이다. 중동을 기준으로 수성못 쪽이 상동(윗마을), 동신교 쪽이 하동(아랫마을·수성동)이다. 1954년 항공사진을 보면 상·중·하동이 자리한 신천 동쪽 접경지에만 마을이 있고, 마을 동쪽 수성들은 집 한 채 없이 오직 넓은 들판만 펼쳐져 있다. 수성들은 1970-80년대 이르러 주거지로 개발이 시작됐다. 일제강점기 때 한 자료에 의하면 이들 세 마을의 형성 순서는 마을 감나무 수령을 근거로 ‘상동→중동→하동’ 순이라고 한다. 참고로 이 지역에는 “상동은 양반, 중동은 것들(별 볼일 없는 것들), 하동은 상놈들이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새매당·해매당·영동할매당·영등할매당--매호동(梅湖洞)
옛날 매호동에서 우산(牛山)을 끼고 가천동으로 가는 산모롱이에 ‘새매당·해매당’ 또는 ‘영동(영등)할매당’이라 불린 당집이 있었다. 지금의 ‘생각을 담는 정원’이 자리한 곳으로 추정된다. 영동할매 신화는 전국적으로 전하는 신화다. 영동할매는 음력 2월 1일이면 딸 혹은 며느리와 함께 지상으로 내려와 20일간 머물렀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고 한다.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딸, 며느리 중 누구와 함께 내려오는가에 따라 2월 한 달간 비바람에 차이가 있고, 한 해 농사의 길흉이 결정된다고 한다. 영동할매 신화는 주로 바닷가나 큰 강을 끼고 있는 지역에서 잘 나타난다. 매호들 북쪽에는 금호강, 남천, 매호천이 만나는 세물머리가 있다. 제방이 없던 시절에는 여름철이면 세물머리 지역에는 강물의 범람이 있었다. 그래서 매호동에서는 특별히 서낭신으로 영동할매를 모셨던 것 같다. 매호동 들 중 ‘새적개들’, ‘큰개들’은 금호강·남천·매호천 범람 지역에 있는 들로 ‘갯벌’이라고도 불렀다.
새청·샘천·연골--이천동(梨川洞)
새청은 이천 내지(內池)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새청 마을에 연실 한 꾸러미가 다 들어갈 정도로 깊은 옹달샘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샘을 연골샘, 골 이름을 연골이라 했다고 한다. 새청은 샘천이 변한 지명으로 추정된다. 이천 내지에 접해 있는 새청과 배내는 지금도 옛 모습을 간직한 채 남아 있다.
선창바우·이기둠·여기암--가천동(佳川洞)
선창바우는 가천마을 동쪽 산자락 끝에 있는 바위 절벽으로 금호강 쪽으로 돌출해 있다. 이 바위 아래에 배를 띄우던 선창이 있어 선창바우라 불렀다고 한다. 선창바우는 수십 명이 앉을 수 있을 만큼 넓어 길손이나 마을 사람들이 바위에 앉아 휴식을 취하곤 했다. 선창바우에서 바라보는 금호강과 남천, 매호천의 풍경이 아름다워 이 동네를 가천동이라 불렀다는 지명유래도 전한다. 선창바위를 다른 말로 ‘이기둠’ 또는 ‘여기암’으로도 불렀다.
솔정고개·송정고개·송정현(松亭峴)--연호동·시지동
솔정고개는 삼성라이온즈파크-월드컵삼거리 일대 고개다. 솔정고개를 경계로 서쪽이 연호동, 동쪽이 시지동이다. 과거 솔정고개는 대구-경산 간 관도(官道)에 있던 고개로, 고개를 중심으로 10리에 이르는 소나무 숲이 있어 ‘식송정(植松亭)’이라고도 불렸다. 「지명조사철」(1959)에 의하면 솔정고개를 중심으로 20호, 130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작은 송정마을이 있었고, 조선지지자료(1910년대초)에는 ‘송정주막’이 등재되어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지금부터 100여 년 전만 해도 이곳은 좁은 고갯길이었고 고갯마루에는 당나무 한 그루와 당집이 있었으며, 나그네를 위한 정자도 하나 있었다고 한다. 옛날 솔정고개는 울창한 소나무 숲 남쪽으로 매호천이 흘렀으며, 주위에는 높고 낮은 둔덕과 들이 펼쳐져 있었으며, 여름철이면 연호동 일대 연꽃 만발한 늪을 바라볼 수 있어 경치가 좋은 고개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솔정고개에 신작로가 생기면서 비로소 우마차가 넘나들 정도로 넓혀졌고, 정자는 활용이 적어 자연스럽게 사라졌다고 한다. 삼성라이온즈파크가 들어서기 전 이곳에 작은 연못을 낀 ‘구남산장’이 있었다.
쉬일목--만촌동(晩村洞)
쉬일목은 만촌1동과 동구 신천4동 경계에 있었던 고개 이름이다. 효신네거리(옛 동부정류장)에서 옛 MBC 방송국 네거리 쪽으로 가다가 제일 먼저 만나는 고개다. 과거에는 이 고개에 돌무더기를 쌓아 만든 서낭당이 있었고 나무가 우거져 있었다고 한다. 쉬일목이란 이름은 고개를 넘던 사람들이 이곳 나무 아래에서 쉬어 갔다고 해서 얻은 이름이다. 쉬일목에는 이곳을 지나던 한 나그네와 동네 처녀의 애틋한 전설도 전한다.
시지동(時至洞)
시지동은 조선시대 이 지역에 있었던 ‘시지원(時至院)’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지명조사철(1959)에는 시지동에 대해 “약 100년 전에 통행인이 이곳에 이르러 식사 또는 유숙 시간이 되면 식사 또는 유숙을 하는 원사가 있었으므로 시지동이라고 칭하게 되었다는 설과 옛날 신(申) 모 장군이 전쟁 귀로(歸路) 시 이곳에 이르러니 오시(午時)가 되었다 하여 시지동이라고 칭한다는 두 설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원(院)은 고려·조선시대 때 국내 주요 간선도로 상에 있었던 공적 시설로 주로 공무상의 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했다. 지금과 달리 옛날 대구-경산 간 통로는 대구성 남문-신천-지산·범물-대구스타디움-시지동-경산읍 남성현으로 이어졌다.
다른 지명유래설도 있다. 시지는 「지방지도」(1872)에 시지(時旨)로 표기되어 있다. 시(時)는 우리말의 ‘셋’을 나타내는 ‘시’로 볼 수 있으며, 지(旨)는 마을의 줄임말인 ‘말’의 한자표기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시지동은 세 집이 마을을 형성했다는 뜻의 ‘세집매기, 싯집매기’를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시지를 한자로 시지(時至), 시지(時知), 시지(時旨) 등으로 표기한 것은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다.
신천(新川)
대구 역사는 신천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천 발원지는 두 곳으로 알려져 있다. 최정산 자락에서 발원해 우록동을 관통하는 물줄기가 신천 본류이며, 비슬산 북동쪽에서 발원해 가창댐으로 흘러드는 용계천이 지류다. 두 물줄기는 용계리 가창교 남쪽에서 합류, 대구를 동서로 양분하며 북쪽으로 흘러 북구 침산동·산격동 일대에서 금호강에 합류한다. 전체 길이 약 28km에 이르는 신천 주변에는 선사시대 이후 이 지역을 살다 간 사람들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심지어 신천 바닥에는 1억만년 전 공룡이 남긴 공룡발자국도 남아 있다.(동신교 남쪽)
신천이란 이름에 대해 최근까지 여러 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신천이 대구부와 수성현 사이를 흘러 ‘사이천’, ‘새천’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로 표기할 때 음을 빌려 ‘새로울 신(新)’ 신천이 됐다는 것이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오래전부터 ‘이공제 향사’에서 불렸던 ‘이공제 격양가’에는 “새로 내어 신천”이란 가사가 보인다. 한편 상동 이공제비각에 있는 ‘군수이범선비’에는 신천을 동천(東川·새천)으로 표기하고 있다. 지명조사철(1959)에는 신천에 대해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옛날 대구 성책 당시 성내에 합류하는 각계급 또는 배수구를 통합하여 딴 곳으로 합류토록 하였으므로 신성천(新成川) 또는 새내라고 부르다가 그 후 신천으로 불리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애꼬재들·새적개들·큰개들·갯벌--매호동(梅湖洞)
매호동에 있었던 들이다. 경부선을 기준으로 남쪽을 매호들, 북쪽을 애꼬재들이라 불렀다. 또 애꼬재들 북쪽 남천변에 ‘새적개들’이 있었고, 남천과 금호강 사이에 ‘큰개들’이 있었다. 큰개들은 1970-80년대엔 주로 과수 농사가 행해졌고, 지금은 시설 원예작물이 주를 이룬다. 남천과 금호강에 접한 새적개들과 큰개들을 통칭해 ‘갯벌’이라고도 불렀다.
소바우·눈물바위·빤돌바위·지음바위·넙덕바위·붓돌바위·효자바위--욱수동(旭水洞)
소바우(욱수동 산 81-1)는 욱수골에 있는 방 8칸 크기의 커다란 바위다. 지명 유래에 따르면 옛날 이 바위에서 소싸움이 일어나 소 한 마리가 떨어져 죽었기 때문에 소바우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또 한 농부가 이곳에서 소에게 먹일 풀을 베고 있었는데,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났다. 이때 소가 풀 먹기를 중지하고 호랑이와 싸워 소가 이겼다. 그 후 이 자리에 큰 바위가 하나 생겼는데, 이 바위를 ‘소바위’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또 다른 유래설도 있다. 옛날 욱수골에 살던 한 여성이 소바위 근처에서 소 풀을 먹이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그때였다. 소가 바위 아래 암소를 보고 설쳐댔다. 여성은 소고삐를 당겼는데 그만 소와 함께 바위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오랫동안 소바위 맞은 편에 여성의 무덤 형태가 남아 있었으나 1970년 새길을 내면서 사라졌다고 한다.
욱수골에는 골짜기를 따라 재미있는 이름의 바위가 여럿 있다. ‘눈물바위’는 평평한 바위 표면으로 계속 물이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바위가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빤돌바위’는 골짜기 길을 사이에 두고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다섯 개 바위로 다섯 바위가 공기놀이를 일컫는 ‘빤돌놀이’ 공기돌을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지음바위는 고개를 넘다가 지겨울 때쯤 나타난다고 붙은 이름이다. ‘넙덕바위’는 바위가 넓적해서, ‘붓돌바위’는 바위가 불이 잘 붙어서 마치 부싯돌 같다고 붙인 이름이다. 이 외에도 봉암 북동쪽에 ‘효자바위’가 있다.
주일골(注日谷)·도둑골·주곡지·지실못--범어동(泛魚洞)
주일골은 범어4동에 있었던 자연부락이다. 주일골은 수성구청 남쪽 뒷산과 경신고등학교 남쪽 뒷산 사이 골짜기다. 이곳은 예전에 지대가 낮고 습했으며 숲이 울창해 산적이 자주 나타나 나그네를 괴롭혔다고 전한다. 주일골이란 이름은 낮에도 산적 출몰이 잦아 이곳을 지날 때는 산적을 주의해야 한다는 뜻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옛날에는 주일골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관골(경남타운 부근)이란 자연부락이 있었고, 더 내려가면 골짜기 끝에 주곡지(지실못)가 있었다. 주곡지 일대에는 한때 덕원고등학교가 있었다가 지금은 태왕아너스 아파트가 자리하고 있다. 지명조사철(1959)에는 주일골에 대해 “옛날 어떤 사람이 죽어 묘터를 구하였던바, 이 고을 한자리에 쓰게 되어 그 묘터의 혈이 ‘쥐혈’이었으므로 이를 따라 쥐혈이 주일로 변한 것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주일골 남쪽 끝자락을 ‘도둑골’이라고도 불렀다. 옛날 이곳에는 일본군이 파놓은 U자형 방공호가 5-6개가 있었는데, 소도둑이 남의 소를 훔쳐 방공호 속 몰래 잡아두었다고 해서 도둑골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지산동(池山洞)
지산동에도 여러 지명유래설이 전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인근 범물동의 ‘매봉’과 관련된 유래설이다. 매봉은 범물동 천주교 공원묘지 뒷산이다. 산 모양이 매의 주둥이를 닮아 매봉이라 부른다. 지산동의 본래 이름은 치산동(雉山洞)이었다. 그런데 꿩은 매 앞에서 꼼짝하지 못한다고 해서 ‘꿩 치(雉)’를 ‘못 지(池)’로 바꿔 지금의 지산동이 됐다고 한다. 이 외에도 마을이 경사가 급한 산자락 끝부분에 있어 ‘꽁지산’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 치산(雉山)이라는 설, 지역에 둔덕지·당외지·마산지·조일지 등의 못이 많아 지산동이란 이름을 얻었다는 설도 있다. 전설 같은 유래설도 있다. 옛날 어떤 사람이 마을에 못을 만들었는데 못에 물을 가둘만한 수원(水源)이 없었다. 못을 판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 못 이름을 ‘지산못’으로 부르도록 부탁한 뒤, 자신이 판 못에서 죽어 용이 되어 승천했다고 한다. 이때 용이 승천하면서 꼬리로 산허리 잘라 물길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후 못 이름을 따라 지산동으로 불렀다고 한다.
진밭골·물밭--범물동(凡勿洞)
진밭골은 대구도시철도3호선 용지역 남동쪽에 있다. 대덕산(603.7m)과 용지봉(633.8m) 사이의 좁은 골짜기 남동쪽 끝에 자리한 산골 마을이다. 진밭골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피해 경주 최씨, 전주 최씨 일가가 정착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진밭골 지명 유래설은 두 가지 정도가 전한다. 하나는 옛 대구부지에 기록된 이전동(泥田洞)이라는 동명과 관련이 있다. 예전 이곳에 큰 늪이 있어 마을 일대가 늘 질퍽해 논농사도 부적합하고 밭농사에도 마땅하지 않아 ‘수전(水田)’, 또는 ‘물밭’이라고 부르다가 ‘진밭’이 됐다는 설이다. 다른 하나는 ‘길다’의 지역 사투리인 ‘질다’에서 유래된 것으로, 골이 길고 완만해서 붙은 지명이다. 지명조사철(1959)에는 진밭골에 대해 “이 골짜기에 습기가 많다는 뜻에서 진밭이 많았으므로 진밭골이라 불리며 이를 한자로 진전리(眞田里)로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텃만당·리산(鯉山)·잉어더미--범어동(泛魚洞)
텃만당은 범어1동에 있는 나지막한 동산이자 자연부락이다. 텃만당은 현 천주교 범어대성당이 자리한 곳이다. ‘텃만당’의 ‘텃’은 ‘터·장소’를 의미하고 ‘만당’은 꼭대기·정상을 의미하는 경상도 사투리다. 텃만당은 글자 그대로 동산 정상의 넓은 평지다.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텃만당에 그들의 신사(神社·수성신사)를 건립했다. 수성 신사는 광복 후 잠시 천주교 ‘범어공소’로 활용됐다. 이후 1948년 2월 신사 자리에 새 범어공소가 건립됐다가 2016년 지금의 범어대성당이 세워졌다.
텃만당은 범어동 지명 유래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범어(泛魚)란 지명은 ‘뜰 범’, ‘물고기 어’, 물 위에 떠 있는 물고기란 의미다. 실제로 범어대성당이 있는 언덕은 남북으로 약 400m 정도 되는 길쭉한 언덕인데, 하늘에서 내려다보았을 때 남쪽으로 머리를 둔 커다란 물고기를 쏙 빼닮았다. 조선지지자료(1910년대초)에 ‘리산(鯉山)·잉어더미’란 산명이 등재되어 있는데 텃만당으로 추정된다. 범어대성당 내에 이러한 내력을 담은 물고기 조형물 범어동 유래비가 서 있다.
황금동(黃金洞)
황금동 유래는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1553-1634)과 관련이 있다. 손처눌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수성현 의병장에 이어, 대구지역 연합의병부대인 팔공의진(八公義陣) 의병장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그는 임란을 전후 한 시기에 황금동에 터를 잡았다. 그는 마을 주변 들판이 곡식들로 황금빛을 이뤘고, 주변 산세는 푸른 산림이 울창해 마을 이름을 ‘황청리(黃靑里)’라 지었다. 하지만 황청리는 세월이 흐르면서 ‘황천리’로 불리게 됐다. 결국 ‘황천’은 저승을 연상케 한다는 이유로 주민들의 불만이 높았다. 이에 1977년 지금의 황금동으로 개명했다. 당시 마을에 청호지(靑湖池)가 있어 청호동(靑湖洞)으로 바꾸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표결에서 부결됐다고 한다. 황청동 지명유래는 어원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황(黃)은 뜻이 ‘누르다’로 ‘누르’는 경사가 거의 없이 ‘길게 늘어진 구릉성 지형’을 표기한 것이다. 청(靑)은 뜻이 ‘푸르다’로 ‘풀·펄·벌’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황청동은 경사가 심하지 않은 구릉지 벌판을 표현한 동명으로도 볼 수 있다.
향나무 우물--만촌동(晩村洞)
만촌3동에 있었던 향나무 우물은 임진왜란 때 부산 동래에서 피난 온 동래 정씨 일가가 이곳에 자리를 잡으면서 판 우물로 알려져 있다. 우물가에 수령 500년 된 향나무 한 그루가 서 있어 향나무 우물이라 불렸으며, 물맛이 좋고 양도 풍부해 500년 가까이 마을 우물로 활용됐다. 향나무 우물은 1981년 상수도 공사 준공으로 없어지고 한동안 향나무만 자리를 지키다 지금은 향나무도 사라지고 없다. 향나무 우물 위치는 지금의 만촌3동 성당 부근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금의 성당은 본래 이 자리에 있었던 주택은행 사택을 성당으로 리모델링한 것이다. 아마도 사택 건물을 지을 때 향나무가 사라진 것 같다.
형제봉(兄弟峰)·모봉·형봉·제봉--만촌동·고모동
형제봉(193m)은 2군사령부 영내 남쪽에 있는 산이다. 형제봉은 두리봉-모봉-형봉-제봉으로 이어져 있는데 이중 두리봉(212.8m) 다음으로 제일 높은 봉우리를 형제봉 혹은 형봉이라 부른다. 모봉·형봉·제봉은 인근에 있는 고모령과 관련해 여러 전설이 전한다. 전설에는 봉우리 이름처럼 엄마·오빠·여동생이 주로 등장한다. 가장 대표적인 전설이 ‘힘센 오누이 산 쌓기’ 전설이다. 오빠와 여동생이 산 쌓기 내기를 했다. 저고리 앞섶으로 흙을 나른 오빠보다 치마폭으로 흙을 나른 여동생이 더 빨리 산을 쌓았다. 화가 난 오빠는 큰 바위를 들어 동생이 쌓던 산 정상을 눌러버렸다. 이 때문에 지금도 형봉 정상은 뾰족하고 제봉은 평평하다고 한다. 이를 지켜보던 엄마는 속이 상해 집을 나갔다. 어느 산 정상에 이른 엄마는 오누이가 화해했는지 궁금해 뒤를 돌아보았다. 그 봉우리를 모봉(母峯), 인근 고개를 엄마가 뒤를 돌아보았다는 뜻에서 ‘되돌아볼 고’, 고모령(顧母嶺)이라 한다는 전설이다.
과거 형제봉은 기우제 제단으로도 영험했다고 한다. 형제봉 동쪽 팔현 마을과 고모 마을 주민들은 비교적 최근까지도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제단은 형봉과 제봉 사이에 위치한 범굴이라는 커다란 바위 아래 샘이었다. 기우제 과정에서 봉우리에 암장(暗葬·남몰래 쓴 묘)된 묘가 발견되면 주민들이 다 함께 파묘(破墓)했다고 한다. 1954년 항공사진에는 지금의 2군사령부 영내에 해당하는 형봉과 제봉 사이는 대부분 구릉지로 이어져 있고 간간이 논밭만 보일 뿐 민가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