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학동자 카페에서
김 선 구
소학동자하면 한훤당 김굉필 선생을 말한다. 학문이 높은 성리학자요 도학자이면서 소학을 중시하고 이를 널리 보급코자 노력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소학은 인간교육의 기본바탕을 강조한 책이다. 효도와 윤리도덕 그리고 자기수양 등 인간이 가야 할 길을 담고 있다. 주로 아동들을 교화시킬 목적으로 펴낸 책인데도 그 내용을 중히 여기고, 그 가르침대로 실천하려했다.
지난 봄 달구벌수필문학회에서 골목투어의 일환으로 대구 현풍지역 일대를 답사하였다. 현풍향교와 상리공원, 쌍계마을에 이어 솔례마을에서 현풍곽씨 12정려각을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못곳마을에 자리한 한훤당종택을 방문하였다.
한훤당종택은 불천위 김굉필 선생을 모시는 공간이다. 원래 달성군 구지면 도동에 있었으나 11세손이 현풍으로 이주 하면서 다시 세웠다. 마을 모습이 나비형국이라 하여 논 20마지기의 땅을 파서 못을 만들어 자손의 번창을 꾀하면서 못골마을이라 불리었고, 누대에 걸쳐 서흥 김씨 혈통을 이어오는 집성촌이 되었다.
종택에서 서북쪽으로 우뚝 서있는 산 하나가 보였다. 산 이름이 대니산(戴尼山). 공자의 가르침을 받들어 모신다는 의미이다. 지금은 한훤당의 묘소가 있고, 도동서원의 주산 역할까지 한다하니, 한훤당의 학문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소년 김굉필이 이 산 아래 머물면서 학문과 심신의 수양에 힘썼다. 그 때 부쳐 준 이름이라한다. 도동서원과 종택 사이를 연결하는 구심점으로 주요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듯 했다.
종택으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400년이 된 은행나무가 서 있고, 그곳을 지나자 寒暄宗宅(한훤종택)이라 새긴 돌비석이 우리들을 맞이했다. 이어서 솟을대문을 지나자 너른 공간이 나타났다. 왼쪽에 사랑채와 안채로 이어지는 주거공간이 자리하고, 오른쪽에 카페건물이 있었다. 옛날 행랑채로 쓰던 별채공간을 현대적으로 리모델링하여 활용한 것이다. 격조 높은 사대부 댁을 개조하여 카페를 열다니 시대의 조류에 편승함인지, 한훤당의 올곧은 소양을 널리 펴려고 함인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색다른 모습에 호기심이 컸다. 카페에서 차 한 잔으로 하루의 일과를 소화하며 한훤당의 삶에 대한 회고를 이어갔다.
한훤(寒暄)이란 무슨 듯일까? ‘춥고 따뜻하다‘의 의미다. 매일 접하는 일상생활이 곧 도학을 실천하는 공부로 여겼다는 뜻이다. 선생이 결혼 후 처가 주변에 조그만 서재를 지어 한원당이란 당호를 달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어려서부터 기질이 호방하고 정의감이 강하여 그런 뜻을 세웠는지 모른다. 훗날 점필재 김종직을 만나면서 마음을 더욱 굳히게 된다. 점필재가 소학을 건네주며 “진실로 학문을 한다면 이 책부터 시작하라”고 했다. 한훤당은 이때부터 소학공부에 몰입했다. 남효은은 그의 저서 “추강집”에서 김굉필은 손에서 소학을 놓지 않았고 홀로 실천하는 공부가 대단했다고 했다.
그는 사서와 삼경을 읽기에 앞서 소학을 통해서 천도의 이치를 깨달았다고 한다. 한원당이 소학에 주력한 이유이다. 그리고 학문에서 뜻을 이룬 후 대중교육을 펼쳤다. 고향에 서실을 열고 도학을 생활화 하며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신분을 가리지 않고 양반관료들, 중인들, 양인들의 자제를 가르쳤다. 이러한 노력이 조선 성리학의 학통을 잇고, 훗날 동방오현의 한사람으로 추앙받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현풍읍 솔례리 용두산 정상에 있는 정자 대양정(戴陽亭)이 당시의 교육장이었다. 오늘날에는 역사의 현장이며 관광명소로 탈바꿈하였다.
한원당은 벼슬하고는 인연이 없었던 모양이다. 성종 25년 41세라는 늦은 나이에 출사 하였지만 불과 2년 정도 관직에 몸을 담았다가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을 뿐이다. 그것이 불운의 씨앗이었을까! 훗날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한훤당은 김종직의 제자였다는 이유로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 되었다가 전남 순천으로 옮겨진다. 연산군 10년 다시 사화가 일어나자 무오당인(戊午黨人, 무오년에 파당을 지었던 무리)이라는 죄명으로 극형에 처해졌다. 향년 51세때 일이다. “목은 베일지라도 수염까지 베일 수 없다” 하여 수염을 입에 물고 형 집행을 받아들였다. 군자다운 의연한 모습이다.
선생이 떠난 지 2년.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신원이 복권되어 승정원도승지에 추증되고, 광해군 2년에는 동방오현의 한사람으로 문무에 종사하는 영예를 안게 된다.
낙동강이 크게 용트림을 하고 다시 평온을 찾는 곳,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그곳에 도동서원이 있다. “유학의 도(道)가 동쪽으로 왔다“는 의미를 지닌 이 서원은 김굉필 선생의 도학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중심건물인 중정당(中正堂) 여섯 기둥 위에는 상지(上紙)라는 백색의 띠가 둘러있다. 한훤당이 동방 오 현 중 제일 웃어른임을 알리는 표시다. 상지가 주는 의미가 대단했던 모양이다. 옛날에는 상지를 보면 말을 타고 지나던 과객들이 말에서 내렸고, 강상의 뱃사공들이 노 젓기를 멈추고 예를 표시했다 한다.
종택의 사랑채에는 광풍제월(光風霽月)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맑은 날의 바람과 비개인 날의 달”이라는 뜻이다. 선생의 고결한 인품과 무욕의 삶이 엿보였다. 따스한 봄바람이 종택의 정원을 가득 채우고, 대니산에 부는 바람 또한 종택과 도동서원을 넘나드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