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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황금동(黃金洞),
황금빛 들판과 푸른 산림이 울창했던 마을
개관
황금동은 두리봉(212.8m)에서 서쪽으로 갈라져 나온 산줄기와 무학산(199.9m)에서 북쪽으로 갈라져 나온 골짜기를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이 골짜기 사이사이에 흩어져 있었는데, 밤나무가 많았다는 밤실, 천수답이 많았던 봉천, 범어천 가에 있었던 홈골, 소계내 등 주변 자연환경과 관련된 마을 이름이 많이 남아 있다. 산지가 많은 까닭에 개발제한 구역이 많아 자연환경이 잘 보존된 마을이기도 하다. 1980년대 초 대단위 황금 아파트 단지가 조성됐고, 지금은 재개발이 되어 새로운 아파트가 많이 들어섰고 쾌적한 생활환경이 조성됐다.
황금동은 본래 대구부 수북면(守北面) 황청리(黃靑里)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인근 소지천동(小只川洞)을 합쳐 황청동(黃靑洞)이 되어 달성군 수성면에 편입되었으며, 1938년 대구부에 편입됐다. 1963년 동구 황청동이 되었다가, 1977년 지금의 ‘황금동’으로 개칭했으며, 1980년 수성구 황금동이 됐다. 주요 공공시설로는 경북고등학교, 대구과학고등학교, 황금중학교, 대구성동초등학교, 대구황금초등학교, 국립대구박물관, 대구어린이대공원, 범어공원, 대구어린이세상 등이 있다. 유적으로는 조선시대 생활 유적이 발굴되었고 수성구 향토문화유산인 덕산서원, 청호서원, 영사재 등이 있다. 자연부락으로는 못안, 밤마실, 밤밭골, 봉천, 소기내, 주봉리, 홈골 등이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못안, 청호, 봉천에 대한 전설이 있다. 범어네거리에서 수성못에 이르는 동대구로는 1976년 지금의 폭 70m 도로로 확장됐다. 황금로는 1985년 제정된 도로명으로 ‘옛 황금아파트-경북고등-만촌네거리’ 구간인데, 지금은 ‘청수로-청호로(靑湖路)’로 불린다.
지명 유래
황금동 유래는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1553-1634)과 관련이 있다. 손처눌은 1592년(선조 25)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수성현 의병장에 이어, 대구지역 연합의병부대인 팔공의진(八公義陣) 의병장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그는 임란을 전후 한 시기에 황금동에 터를 잡았다. 그는 마을 주변 들판은 익어가는 곡식들로 황금빛을 이뤘고, 주변 산세는 푸른 산림이 울창해 마을 이름을 ‘황청리(黃靑里)’라 지었다. 하지만 황청리는 발음이 어려워 세월이 흐르자 ‘황천리’로 불리게 됐다. 결국 ‘황천’은 저승을 연상케 한다는 이유로 주민들의 마을 이름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다. 이에 1977년 지금의 황금동으로 동명을 개명했다. 당시 마을에 청호지(靑湖池)가 있어 청호동(靑湖洞)으로 바꾸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표결에서 부결됐다고 한다.214)
황청동 지명유래는 어원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황청동은 두리봉과 무학산에서 이어진 산자락이 넓고 길게 펼쳐져 있으며, 서쪽에는 범어천과 수성들이 있고, 북쪽에는 범어동이 있다. 황청동은 이러한 마을 주변 지형을 담은 동명으로도 볼 수 있다. 황(黃)은 뜻이 ‘누르다’로 ‘누르’는 경사가 거의 없이 ‘길게 늘어진 구릉성 지형’을 표기한 것이다. 청(靑)은 뜻이 ‘푸르다’로 ‘풀·펄·벌’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황청동은 큰 나무 없이 경사가 심하지 않은 구릉지를 중심으로 풀밭으로 이어진 벌판 모습을 표현한 동명으로 볼 수 있다. 황금동을 비롯한 범어동, 만촌동 지역의 구릉지는 대부분이 이암·사암·혈암 등 이른바 ‘대구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구층은 토심이 얕아 큰 나무가 자라기 어려울 뿐 아니라 농사에도 불리하다. 황청동은 이러한 자연환경을 표현한 동명이라고도 할 수 있다.
214) 하종성, 『역사 속의 달구벌을 찾아서』, 삼일출판사, 2008, 188쪽.
객실
객실은 임진왜란 당시 황금동에 터를 잡은 손처눌이 과객이나 손님을 맞았던 곳이라고 한다. 위치는 황금캐슬골드파크 5단지 뒤쪽 무학산 기슭에 있었던 옛 예비군교육장 부근으로 지금의 수성구립 무학숲도서관 인근이다.
당산(堂山)
무학산 정상부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지명조사철(1959)에는 당산에 대해 “옛날 이 곳 산에 이름난 당나무가 있어 이 마을 이름을 그대로 따서 ‘당산’이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덕산서원(德山書院)과 달성 서씨
덕산서원(황금동 258)은 우방신천지타운 북쪽에 있는 서원으로 조선 초 이조 판서를 지낸 남은(南隱) 서섭(徐涉)과 그의 아들 서감원(徐坎元)을 기리는 서원이다. 서섭은 달성 서씨 판서공파 파조로 세종 때 대과에 급제해 문종을 거쳐 단종 때는 자헌대부 이조 판서까지 지낸 인물이다. 그는 단종에게 상소를 올려 간신을 멀리하고, 집현전 학자를 가까이하는 등 국정 전반의 개혁을 주장했으나 오히려 유배를 당하기도 했다. 그 후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이때 호를 남애(南涯)에서 남은(南隱)으로 바꾸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은둔생활을 했다.
서섭은 달성 서씨 판서공파 파조임에도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00년이 넘도록 행적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인 1920년경, 그의 후손 서의곤이 낡은 가옥을 수리하던 중 천장에서 밀봉된 궤짝을 발견했다. 궤짝에서 그의 행적을 적은 기록과 유고가 많이 발견됐다. 이로써 후손들은 그동안 몰랐던 서섭의 행적과 단종에 대한 충절을 알게 됐고, 1926년 그의 묘소가 있는 황금동에 첨모재(瞻慕齋)를 세웠다. 그 후 1954년 첨모재를 중수할 때 신도비를 세웠고, 1995년 덕산서원으로 승격시켰다. 덕산서원은 현재 수성구 향토문화유산이다.
두리봉
두리봉(212.8m)은 황금동과 만촌동 경계에 있는 산이다. 태초에 세상이 모두 물에 잠겼을 때 산 정상이 두루미 한 마리가 앉을 정도만 남았다고 해서 두리봉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지명조사철(1959)에는 두리봉에 대해 “원형으로 둥근 봉이라 하여 두리봉으로 불린다.”고 기록되어 있다.
못안·모단·청호마을
1980년대까지 지금의 황금고가교 네거리 남쪽에 있는 힐스테이트 아파트와 청호로 일대에는 청호지(靑湖池)란 못이 있었다. 못안은 청호지 동쪽에 있었던 마을이다. 청호지 서쪽에서 바라보면 못 너머에 마을이 있어 ‘못안’ 또는 ‘지내리(池內里)’로 불렸다. 못안에는 일직 손씨, 추계 추씨가 많이 살았다고 한다.215) 1954년 항공사진에는 약 50호 규모의 못안 마을이 확인된다. 못안에서 남쪽으로 지산동 경계까지 길게 이어진 골이 있었는데, 못안골로 불렀고 주로 논으로 이용됐다. 청호지 북쪽에도 5호 규모 작은 마을이 보이는데 밤마실이라 불렸다.
215) 대구광역시, 『대구지명유래총람』, 택민국학연구원, 2009, 493쪽.
못안과 봉천(奉天) 이야기
작은 야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남쪽과 북쪽에 있는 '못안'과 '봉천'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못안의 손씨 집안 사람 중에 손 아무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늦게 아들 하나를 얻었다. 아들이 성인이 되자 이 마을 저 마을로 색싯감을 구하러 다녔다. 마침내 산 너머 봉천에 예쁜 딸을 가진 김 아무개라는 사람을 만나 혼례 준비를 했다. 그런데 혼례를 올리기 전 이상한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다. 색싯감이 일찍부터 낫지 못하는 병에 걸려 ‘오늘, 내일’ 한다는 소문이었다. 결국 손 아무개는 색싯집에 파혼 통지를 보냈고, 장가를 간다고 들떠 있던 아들은 그만 앓아눕고 말았다.
산 너머 색시 집안에서도 난리가 났다. 온갖 정성을 들여 딸자식을 시집보내려 했는데 일이 꼬여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파혼 이후 신랑감이 병이 들어 몸져누워 있다가 그만 마을 앞 못(청호지)에 빠져 죽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물에 빠져 죽은 손씨 아들을 위해 못가 느티나무 아래에서 굿을 해주었다. 신랑감이 죽은 후 못은 온통 흙탕물로 변해 있었는데, 굿을 해주고 나니 못물이 깨끗해졌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못 이름을 ‘청호(靑湖)’로 하고, 못안을 ‘청호 마을’이라 불렀다.
한편 파혼당한 처녀는 신랑 될 사람이 못에 빠져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마을 뒷산에 올라가 하늘을 쳐다보며 서글프게 울다가 못(봉천못)에 빠져 죽었다. 혼례를 치르지 못한 처녀가 하늘을 보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다 죽었다고 해서 '하늘을 우러르다'라는 의미로 마을 이름을 봉천(奉天)이라고 했다는 것이다.216)
216) 향토사교육연구회, 『대구역사기행』, 도서출판 나랏말, 1996, 193-194쪽.
밤마실·반마실·밤골·밤실
밤마실은 과거 청호지 북쪽에 있었던 마을로 지금의 황금고가교 네거리 부근이다. 옛날에는 이 지역이 야산이어서 멀리서 보면 뒷산 모양이 마치 밤송이처럼 생겼으며, 집집마다 밤나무가 있어 '밤마실' 또는 '밤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일부 자료에는 “반마실은 마을 규모가 다른 마을의 절반 정도여서 붙은 이름이다. 평산 신씨들이 이 마을에 살았는데 집이 일곱 채였다고 한다”217)고 되어 있다.
217) 황금1동 행정복지센터 홈페이지.
밤밭골
밤밭골은 밤나무가 많아 생겨난 마을 이름이다. 현재 대구시노인종합복지관 북쪽으로 수성구청소년수련관과 황금주공3차 아파트가 있는 골짜기다. 예전에 성산 배씨들이 살았다고 한다.218) 1954년 항공사진에는 10호 정도가 마을을 이루고 있다. 대구시노인종합복지관 옆에는 성산 배씨 배석봉(裵錫鳳)과 배영(裵泳)을 추모하기 위한 재실인 영사재가 있다. 1979년 지도에는 밤밭골과 지금의 대구과학고등학교 사이 야산에 밤나무단지가 표기되어 있다.
218) 대구광역시, 『대구지명유래총람』, 택민국학연구원, 2009, 494쪽.
봉천(奉天)
봉천은 지금의 경북고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못 이름이자 마을 이름이다. 옛날 이 마을에는 내(川)도 없고 수리시설도 나빠 물이 귀해 흉년이 잦았다. 그래서 이 마을 사람들은 농사를 지을 때 늘 하늘을 받들고 살았다고 ‘봉천(奉天)’이란 마을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마을 동쪽 골짜기에 못을 조성하고 ‘봉천못’이라 이름했다. 지역에서는 봉천못에 봉황이 내려앉는다는 전설이 전한다. 1954년 촬영된 항공사진에는 7호 정도의 마을이 보인다. 1979년 지도를 참고하면 현 경북고등학교 교문 앞 청호로 일대가 봉천골이었다. 하지만 1979년 당시만 해도 봉천에는 봉천못과 골안못이 있어 봉천 일대는 대부분 논농사를 지었다. 봉천에는 김해 김씨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한편 지역에서 전해져 오는 이야기로 현 경북고등학교 동편 두리봉 터널 일대에 말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말 무덤은 조선시대 때 범어역에서 기르던 말이 죽으면 묻었던 무덤이라고 한다. 지명조사철(1959)에는 봉천에 대해 “이 마을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유래에 의하면 이씨 학자가 주위 산이 하늘을 뚫을 듯이 높다 하여 이 마을을 봉천이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소계내(小溪川)·소지천(小只川)·소기내
현재 황금네거리 북동쪽에 있는 어린이대공원 일대에 있었던 마을이다. 동네 앞으로 작은 냇물인 범어천이 흘러 ‘소계내(小溪川)’라 했다.219) 조선시대에는 소지천동(所只川洞), 소지동(所只洞)이라고 불렀다. 1954년 항공사진에는 10호 정도가 마을을 이루고 있다.
219) 하종성, 『역사 속의 달구벌을 찾아서』, 삼일출판사, 2008, 189쪽.
안골
안골은 지금의 황금네거리에서 동쪽 끝 황금고가교 네거리에 이르는 긴 골짜기를 말한다. 안골을 중심으로 서쪽에 홈골이 있었고, 북쪽에 주봉리·밤밭골, 남동쪽에 못안, 북동쪽에 봉천이 있었다. 안골 일대는 청호지와 봉천지가 있어 주로 논농사가 활발했다. 과거 황금 아파트가 있었던 안골은 현재 캐슬골드파크 1-5단지 등이 들어서 옛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영사재(永思齋)
영사재(황금동 474-1)는 성산 배씨 모재(慕齋) 배석봉(裵錫鳳)과 공천(孔川) 배영(裵泳·1810-1852)을 추모하기 위해 1928년 후손들이 세운 재실로 수성구 향토문화유산이다. 배석봉은 병석에 누운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아버지에게 피를 드린 효자다. 배영 또한 어머니가 병이 들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려 3일을 회생케 하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죽만 먹고 3년상을 마쳤다.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제삿날 솔개가 날아와 제물로 올린 고기를 물고 날아갔다. 배영이 자신 탓이라며 가슴을 치며 통곡하니 솔개가 물고 간 고기를 다시 가져왔다고 한다. 또 배영은 천연두에 걸려 온 가족이 죽은 집을 위해 자신의 가재도구를 팔아 장례를 치러주기도 했다. 이곳 성산 배씨 문중 선영은 본래 현 경북고등학교 자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성주군 용암면 사곡동으로 옮겼다.
영모재(永慕齋)220)
영모재(황금동 산119)는 조선 영조 때 학자인 지촌(池村) 양달화(楊達和·1694~1756)를 추모하기 위해 1913년 건립된 중화 양씨(中和楊氏) 재실이다. ‘영모’는 양달화를 영원히 흠모한다는 의미이며, 영모재 북쪽에 양달화 묘소가 있다. 영모재에는 많은 편액과 시문이 걸려 있는데 ‘永慕齋’는 석재(石齋) 서병오(徐丙五)가 썼다. 돈목당(敦睦堂)은 양달화의 6세손 양재호(楊在湖)가 썼는데, 후손들이 조상의 제사를 잘 받들면서 돈독하고 화목하게 지낸다는 의미다. ‘먼 조상을 추모하는 집’이란 뜻의 ‘추원재(追遠齋)’ 편액도 있다. 양달화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지런히 학문을 닦아 향리에서 명성이 높았으며, 지산동 무학산 아래에 학산서당을 열고 후학을 양성해 향리 교화에 크게 이바지했다. 예전에는 영모재 뒷산을 괘명산(掛椧山)이라 불렀고, 영모재가 자리한 마을을 산 이름의 ‘홈통 명(椧)’ 자를 사용해 홈골이라 불렀다.
220) 향토문화전자대전
주곡지·지실못·쌍둥이못221)
주곡지는 대구국립박물관 북쪽에 있는 태왕아너스 아파트 자리에 있었던 두 개의 못으로 일명 ‘쌍둥이 못’이라고도 불렸다. 1980년대 초 매립됐는데 매립되기 전 주곡지 곁에 덕원중고등학교가 들어섰다. 2002년 덕원중고등학교가 욱수동으로 이전하고 그 자리에 지금의 태왕아너스가 들어섰다.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경남타운을 거쳐 달구벌대로로 연결된다. 이 길은 예전에 ‘주일골(注日谷)’로 불렸고, 경남타운 일대에 ‘관골’이란 마을이 있었다. 1954년 항공사진에는 지실못 주변에 5가구 정도의 가옥이 흩어져 있다.
221) 범어동 '주일골' 참고
주봉리
주봉리는 과거 밤밭골과 봉천 사이에 있었던 마을로, 지금의 청원아파트 일대다. 주봉리란 지명은 마을 북쪽에 있는 산봉우리가 뾰족하게 생겨 주봉리라 했다. 주봉리에는 평산 신씨가 살았다고 한다.222) 1954년 항공사진에는 산 남쪽 자락에 동서로 길게 형성된 30호 이상의 주봉리 마을이 보인다. 지명조사철(1959)에는 “이 마을에서 보면 산 너머 산봉우리(주봉)가 보인다는 뜻으로 주봉리로 불린다.”고 기록되어 있다.
222) 대구광역시, 『대구지명유래총람』, 택민국학연구원, 2009, 494쪽.
청호서원(靑湖書院)과 일직 손씨(一直孫氏)
청호서원(황금동 산79-4)은 조선 중기 대구를 대표하는 대학자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1553-1634)을 기리는 서원으로 일직 손씨 참봉공파 종중 서원이다. 손처눌은 계동 전경창과 한강 정구의 제자로 학행과 효우로 이름이 났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는 대구연합의병대장으로 활약했다. 그는 평생의 한이 있었다. 바로 임란 중 부모상을 당해 상례를 예법대로 제대로 치루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임란이 평정된 직후 자신의 거처를 ‘죽을 때까지 어버이를 잊지 않겠다’는 뜻에서 영모당(永慕堂)이라 이름했다.
임란 후 손처눌은 후진 양성에 전념해 그의 거처인 영모당은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뤘다. ‘영모당통강제자록(永慕堂通講諸子錄)’에 제자 202명의 명단이 적혀 있어 당시 영모당 강학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임란 후 그는 조정의 모든 논공행상을 사양하고, 오직 학문 진작에만 힘썼다. 특히 대구향교 재건에 앞장섰으며, 대구향교 최고 책임자인 도유사(都有司)를 12년간 맡았다. 또한 그는 마을 앞에 청호지를 만들어 영농에도 힘썼다.
청호서원은 1685년(숙종 11) 영모당 자리에 건립된 청호사(靑湖祠)로부터 시작됐다. 1694년(숙종 20) 청호서원으로 승격됐고,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 때 훼철됐다. 1904년 유허비가 세워지고, 1930년 청호서당을 건립했으나 1971년 화재로 소실됐다. 1972년 서원을 복원해 지금에 이르렀다. 청호서원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정면에서 바라봤을 때 가운데 두 칸은 대청이며, 좌우 각 한 칸은 방이다. 왼쪽 방은 ‘산택재(山澤齋)’, 오른쪽 방은 ‘풍뢰헌(風雷軒)’이다. 사당 이름은 ‘상인사(尙仁祠)’이고 정문은 ‘집의문(集義門)’이다. 정문 앞 동쪽에 일제강점기 의병대장 척암 김도화가 지은 ‘모당손선생유허비’와 비각이 있고, 서쪽에 관리사가 있다. 현재 청호서원은 손처눌을 비롯해 격재 손조서, 사월당 류시번, 양계 정호인 4위를 모시고 있다.223)
223) 향토문화전자대전.
청호지(靑湖池)·황청제(黃靑堤)·황청못
청호지는 지금의 황금고가교 네거리 남쪽에 있는 힐스테이트 아파트와 청호로 일대에 걸쳐 있었던 못이다. 정확한 내력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부 자료에서는 조선 중기 대구를 대표했던 대학자 모당 손처눌이 축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손처눌은 황금동의 본래 동명이었던 황청동(黃靑洞)을 작명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손처눌은 임진왜란 후 청호지 동쪽 못안 마을에 살면서 농업용수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주민들을 위해 청호지를 축조해 주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옛 지도를 참고하면 청호지는 1983년에서 1986년 사이에 매립된 것으로 보인다. 청호지는 옛날에는 지명을 따 ‘황청제’로 불렸는데 대구부읍지(1899) 제언조(堤堰條)에 “황청제는 수동(守東)에 있다. 둘레가 852척(258m)이고 수심이 6척이다”고 기술되어 있다. 청호란 이름은 못 물이 맑고 푸른 것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홈골·명곡(椧谷)
현재 황금네거리 삼성스토어 동쪽 산자락에 있었던 마을로 ‘홈골’ 또는 ‘명곡(椧谷)’이라 불렀다. 홈골에는 두 가지 유래설이 있다. 하나는 과거 지산동에 있었던 둔덕못(屯德池)으로 들어가는 물줄기에 홈을 파 마을 앞으로 물길을 돌려 농사를 지었다고 ‘홈통 명(椧)’ 자를 써서 홈골이라 했다는 설이다.224) 다른 하나는 황금동이 황청동으로 불릴 당시 오곡이 풍성한 들판 한가운데로 지산동과 두산동에서 유입되는 내(川)가 흐르고 있었는데, 마치 널따란 판자에 홈을 낸 것처럼 보여서 홈골이라 불렀다는 설이다. 한편 홈골에는 중화 양씨 문중 재실인 영모재가 있다. 영모재 뒷산을 괘명산(掛椧山)이라 부르는 것으로 보아 홈골은 이 산 이름과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954년 항공사진에는 산자락에 붙어 20여 호가 남북으로 길쭉하게 마을을 이루고 있는 홈골이 보인다.
224) 하종성, 『역사 속의 달구벌을 찾아서』, 삼일출판사, 2008, 1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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