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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나그네의 울릉섬 걷기
(1)
출구 찾아 떠나는 섬 길, 이 배는 안전한가?
관계당국자들이 하는 짓으로 보아 꽉 막힌 속을 뻥 뚫어줄 소식 들리기는 애시 당초
글러먹었는데도 TV 앞에 앉아 있는 몰골이 가엾지 않은가.
새 소식은 없고 고장난 레코드판 소리 듣고 있음에 다름 아닌 나날.
이런 때 내 출구는 배낭 메고 먼 길로 나가는 것이다.
먼 길을 마냥 걷다가 천막 집짓기를 반복하는 동안만은 절로 모든 것을 잊게 되니까.
현실 도피의 비겁한 짓이라 해도 억울하지 않다.
1970년대부터 뒤틀리기를 반복해서 아예 생각하지 않고 지내왔던 울릉도를 택했다.
나의 중, 장거리 섬 여행은 제주도 외에는 아무리 계획해도 실패를 거듭했다.
승선표를 사고 몇시간씩 대기하다가 출항 취소로 하릴없이 돌아서기 일쑤였으니까.
이번 울릉도 역시 마치 머피의 법칙처럼 말짱한 날씨도 내가 예약하면 기상 악화로
인한 취소 통보가 오기를 거듭한 끝에 성공했다.
아득히 멀기만 했던 섬인데.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소댕 보고도 놀란다"던가.
웬만하면 운항하던 여객선들이 세월호 참사 이후로는 웬만(걸핏)하면 결항한단다.
진즉 그랬으면 '세월호'라는 악귀가 태어나지 않았으련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지만 제대로 고쳐야 다시는 소 잃을 일 없으련만 고치는 척
하다 말기 때문에 미구에 같은 사고가 되풀이 되는 것이다.
2014년 5월 5일 강릉행 심야열차를 예약하였으나 출항시간 변경으로 취소하고 6일
이른 아침의 고속버스편을 이용했다.
강릉고속버스터미널~강릉항(안목항)의 4km가 넘는 거리를 남대천을 따라 걸었다.
잠수교 2개를 포함해 10개의 다리, 철교1개, 이색적인 인도교 솔바람다리 등이 놓인
강릉시내 구간 남대천은 서남동길 때 이미 걸었으나 거듭 걷고 싶은 천변길이다.
두 발로 걷는 것이 평생직업(?)인 내게 미리 도착해 출항을 기다리는 것보다 낫기도
하지만 강릉 시내버스 기사들의 상종 못할 불친절이 더 큰 이유였다.
모르기 때문에 묻는 것인데 왜 하나같이 볼멘소리일까.
강릉~울릉도를 운항하는 쾌속선은 씨스포빌(Seaspovill)이다.
선사(船社)인 (주)씨스포빌은 맹방해수욕장(삼척시 근덕면) 마을 주민들의 원성이
자자한 리조트 씨스포빌(메뉴 '서남동길'58번글 참조)의 소유자다.
리조트(콘도)로 시작한 관광사업체인데 여객선 운송사업으로 영역을 넓힌 회사다.
부도덕한 회사라는 이미지를 지울 수 없었건만 그 회사의 선박을 이용하고 있다니.
이 선박은 하자가 없을까.
이즈음에는 울릉도 바닷길이 강릉, 묵호(동해), 후포(울진) 등으로 늘어났지만 포항
단선이었던 때인 1980년 임원(삼척)~울릉 간에 쾌속선(코모도?)이 등장했다.
임원을 월1회꼴로 뻔질나게 다니던 때였기에 울릉도에 갈 기회가 오는 듯 했다.
그러나, 차일피일 미루는 사이에 운항이 중단되더니 미구에 영영 문을 닫아버렸다.
폐선 직전의 중고선박을 들여왔기 때문에 잦은 고장으로 결항이 많아, 결국 회사가
망했다는 후문이었다.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 망하였기 망정이지 세월호처럼 대형참사가 일어날 지도 모를
배가 아니었던가.
울릉도는 제주도의 1.5배(육지에서 최단거리 기준)가 넘는 거리에 있음에도 중간에
크고 작은 유.무인 섬들이 있는 제주길과 달리 망망대해다.
해난사고의 대처가 어려움을 뜻하며, 그러므로 운항선박의 안전점검과 구난체계의
철저한 관리 운영이 더욱 절실한 구간인데 현실은 어떠한지.
초행이기 때문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저동어화는 없고 기분 잡치게 한 관해정의 비
400석 넘는 좌석에 가뭄에 콩 나듯 앉아 있는 승객은 정원의 10%도 못되는 듯 했다.
황금연휴가 끝나는 날이기 때문일까 세월호 해일의 여파현상일까.
알뜰관광은 오히려 연휴를 피하거나 일정을 거슬러 잡는 것이 효과적이건만.
1월의 한라산(완도~제주~부산) 이후 처음인 뱃길은 순조로웠다.
동 ~ 서로 길게 자리한 산의 자락을 달리는 차량들이 마치 바다 위를 걸어가고 있는
듯이 보이더니 얼마 후 동쪽 끝 행남(도동)등대를 돌아 저동항에 입항했다.
출항한 시간 12시 20분에서 3시간 남짓 걸린 오후 3시 24분.
어린이날에 이은 석가탄일로 4연휴(근로자들에게는 징검다리6연휴) 기간에 오기는
했으나 기상악화로 발이 묶인 관광객들로 저동항은 몹시 북적였다.
하선자들이 이런저런 짝짓기를 하여 흩어질 때는 외톨이라는 느낌이 언뜻 스쳐갔다.
황량감을 털어버리려고 즉시 걷기 시작했다.
관광안내소에서 간단한 안내를 받고.
이 곳 저동(苧洞)에는 개척 당시 모시가 많이 자생하고 있었단다.
모시가 많은 갯벌이라 하여 모시개라 불렀는데 지명의 한자화 과정에서 한자의 훈을
따서 저동이라 했다는 마을에서 맨 먼저 간 곳은 관해정(觀海亭).
특별한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저동활어판매센터를 지나 촛대바위로 가는 길에 눈에
띈 아름드리 후박나무의 인력(引力)에 끌렸을 뿐인데 기분은 별로 였다.
(이 후박나무가 관해정인지 나무 옆에 정자가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저동항 앞바다가 관찰되는 관해정은 저동에서 출발하는 외지인들의 울릉도 여행의
시발점이라는데 옆에 서있는 한 비(碑) 때문이었다.
"대통령권한대행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육군대장 박정희장군순찰기공비"
장문의 직함을 적은 기공비(記功碑)다.
울릉도민들이 그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비를 세운 것을 시비할 까닭이 있는가.
다만, 그 비에 대한 터무니없는 믿음이 어이가 없어서다.
이 비가 때로 땀을 흘린단다.
그 땀은 "밀양 표충사 표충비가 국가의 중대사가 있을 때마다 땀 흘리듯 고 박정희
대통령이 나라를 걱정하고 근심하는 영적인 발로"라고 마을 주민들이 믿는다는 것.
그가 이룩한 공(功)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저지른 만인공노할 과(過)가 이 정도의 공으로 탕감받을 수 있는가.
어느 기초지자체장 후보는 그를 반신반인이라 했다던가.
하긴, 금남정맥 계룡산의 신들의 마을에는 맥아더 신, 관우 신, 장비 신 까지 있는데
박정희 신 하나 추가된 들 어쩌랴.
마소와 강아지 신들 사이에 낀다면 무슨 신인들.....
얼른 내려와 저동항 방파제의 촛대암으로 갔다.
현 저동마을에 아내와 일찍 사별하고 딸과 함께 살았다는 한 고기잡이 노인과 조업
나갔다가 심한 풍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상심한 딸의 이야기다.
어느 날, 돌아오는 중인 아버지의 배를 기다리다 못해 파도를 헤치고 다가가던 딸은
파도를 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선채 바위가 되어버렸다나.
촛대바위 또는 효녀바위의 전설인데 우가항(울산광역시북구 강동사랑길/메뉴'서남
동길'42번글사진참조)의 '망이'를 연상하게 하는 전설이다.
울릉도 오징어잡이 어업전진기지(1966년 지정), 국가어항(1971년지정) 저동항.
바다의 꽃, 바다에 떠다니는 반딧불이라는 오징어배들의 집어등.
울릉8경의 하나인 저동어화(苧洞漁花)는 어차피 관광할 수 없다.
오징어철의 밤바다 모습이기 때문이다.
신비로운 저동~도동 명품 해안산책로
저동항을 뒤로 하고 저동해안산책로에 들어섰다.
"울릉도 초기 화산활동 당시에 만들어진 화산암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는 해안이다.
울릉도는 군 전지역이 인증받은 국가지질공원인데(제주도 전지역,부산 일부지역과
청송군, 강원도 평화지역 등도) 나는 지질학에 순 백지다.
그래서 단지 오묘하고 신비로운 자연에 탄성 외에는 나올 것이 없다.
자연이야 인간의 영역 밖에 있지만 이 자연을 감상할 수 있도록 다양한 안전 구조물
(構造物)들을 설치한 울릉도 관계자들의 노고는 평가받을만 하다.
특히, 스테인리스 스틸(STS)로 된 57m라는 수직 나선계단은 그 중에도 일품이다.
안전시설 공사는 진행중인데 시각적 효과는 물론 견고성과 내구성, 안전성과 이용
편리성 등에 역점을 두는 것 같아 갈채를 보내며 걸었다.
"기암절벽과 천연동굴의 곁을 따라, 때로는 바위와 바위 사이를 잇는 무지개다리를
건너 울릉도의 포구와 해안을"
실적 위주의 신속성에 집착할 뿐 미래가 없는 다른 지자체들에 비해 돋보인다.
일명 소라계단인 수직계단을 오르면 저동항은 가려서 보이지 않으나 촛대암과 뒤로
내수전일출전망대, 아래로는 북저바위, 죽도와 멀리 관음도까지 눈에 들어온다.
촛대암 이후 수직계단 앞까지의 산자락, 검푸른 바다 위로 난 구름다리들이 걸을 때
긴장했던 것과 달리 이채롭고 로맨틱하게 보였다.
소라계단 정상의 정자에 배낭을 내려놓고 행남등대까지의 바위를 타다가 중지했다.
칼날 암릉인데 아쩔한 천인단애(千仞斷崖)의 공포에 백기를 든 것.
결국, 산책로를 따라서 행남등대(도동등대)로 갔다.
울릉도 남동쪽, 도동과 저동간 해안을 끼고 있는 마을 어귀에 큰 살구나무 1그루가
있었다 하여 살구남(杏南)이라 했다는 행남마을의 행남등대(도동 항로표지관리소).
마을 끝. 해발108m에 무인등대로 임무를 시작하여(1954년) 1979년에 유인등대로
승격해서 신비의 섬 울릉도 뱃길의 길라잡이 노릇을 다하고 있단다.
2005~7년의 종합정비공사를 통해 소공원과 전시실을 갖춘 자연친화적인 해양문화
공간으로 거듭났다고.
등대의 데크 전망대에서는 소라계단 상단에서 보이지 않던 저동항은 물론 울릉도의
상징인 선인봉도 선명하게 다가왔다.
청명한 날에는 87km 정동의 독도도 보인단다.
해변의 등대는 야릇한 향수의 자극제 구실을 한다.
국내의 서남동길에서 홀로 우뚝 서있는 등대들이 그랬거니와 대서양 땅끝, 유럽 최
서단인 파초산( monte del Facho247m)의 남단 등대(faro de Finisterre)도 그랬다.
행남등대~도동항은 행남해안산책로다.
저동옛길, 울릉군청길 분기점을 지난 울창한 해송과 활엽수, 산죽 숲길은 행남해안
산책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바닷가로 내려선다.
횟집 '해뜨는 파라다이스'가 성질 급한 회 마니아들의 파라다이스?
저동쪽 해안산책로가 비교적 단순한데 반하여 1km쯤의 도동 해안길은 해식동굴을
비롯해 변화무쌍한 바위들이 지질 박람회장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굴곡과 기복이 심해서 긴장을 풀 수 없으며 바위들의 붕괴 위험이 상존하기
때문에 안전시설의 안전도를 간단없이 체크해야 할 구간이다.
이해되지 않는 것은 돌풍과 파도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들의 방비가 허술하기
짝 없다는 점이다.
"안전을 생각하고 위험에 대비"하라는데 산책자들이 이 정도의 당부를 따르겠는가.
돌풍에 휘둘려 추락하였고 파도에 휩쓸리는 사고도 있었다는데 더 큰 사고가 날 때
까지 기다리고 있는가.
무거운 배낭을 메고 집을 떠나는 이유
도동항 여객터미널에 당도했다.
갖가지 층암단애, 위태로운 갯바위 가장자리, 공포의 칼바위와 해식애, 해식동굴이
아른거렸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꿔어야 보배라"잖은가.
신비로운 자연에 대한 파괴와 보존이 충돌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파괴가 불가피하지만 최소화를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역력한 점 높이 평가하고 싶다.
저동항이 어업전진기지라면 도동항은 울릉도의 관문이다.
육지와의 바닷길이 저동항과 사동항 등 3파로 분산돼 있는 오늘날과 달리 예전에는
울릉도의 유일한 여객항이었던 도동항.
군청, 경찰서를 비롯해 모든 관청과 공공기관이 집중되어 있는 울릉도의 심장이다.
도동 유래판에는 도동의 옛 이름이 도방청(道方廳)이었단다.
도방청의 '도' 자를 따서 도동(道洞)이라 했다는데 번화한 곳(길가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을 뜻하는 말이라면 도방처(道傍處)의 와전이거나 선인들의 오기(誤記)?
이조 고종때(1882) 공도정책(空島)을 버리고 울릉도개척정책에 따라 농지개간권과
면세의 특혜를 줌으로서 입도(入島)자들이 늘어났다.
당시, 울릉도를 답사한 검찰사 이규원(檢察使 李圭遠)의 검찰일기에 적힌 도방청포
(道方廳浦)가 근거가 된 듯 한데 옛 서책들에 오기가 적지 않음을 주시해야 한다.
18시가 넘은 시각,
집(천막) 지을 터를 탐문, 탐색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항가에 정자가 있으나 관광객 집결지라 곤란하다는 것이 파출소 경찰관의 견해다.
해안을 따라 사동으로 가려 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막혔다.
해안산책로 개설공사가 진행중이기 때문이다.
억겁에 걸쳐 관문을 드나드는 중생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 망향봉도 휴면에 들어
가는 어두워진 시각.
수소문해서 망향봉 허리의 약수공원으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빈혈,생리장애,류머티즘 질환,습진 등에 효과가 있다는 탄산철천 약수터 공원이다.
예전에 일본과 싸웠던 한 장군의 쇠로된 갑옷이 이 땅에 묻혔는데 그 갑옷이 삭아서
흘러내리는 쇳물이 약수가 되었다나.
독도박물관, 독도전망케이블카, 약수공원 안내판을 따라서. 약수공원 안의 정자를
겨냥하고 오르다가 불이 환한 엘리베이터 건물을 발견했다.
주간에는 향토사료관과 박물관,케이블카 이용객을 위한 시설이며 공원 산책객들도
자유로이 이용하는 엘리베이터인 듯.
이 승강기를 이용하면 5개층 정도의 높이를 한결 편히 오를 듯 싶었다.
엘리베이터와 넓고 긴 구름다리 복도가 역(逆)ㄱ자로 된 구조다.
이 시설을 이용하여 박물관과 케이블카 앞으로 가게 되어 있는데 밤이기 때문인지
내가 유일한 이용자였다.
가로등의 안내를 받으므로 불편 없이 정자를 찾아갔으나 여간 아닌 고지대의 바닷
바람에 시름이 커갈 때 문득 생각난 길고 넓은 복도.
꺼내던 천막을 배낭에 도로 넣고 달리듯 엘리베이터 복도로 내려갔다.
밤 8시가 넘은 시각에 30여분간 동정을 살폈으나 엘리베이터 문도 복도의 출입문도
모두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의 내왕이 있다 해도 폭이 넓어서 거치적거리지 않을 방부목 복도 한 쪽 창쪽에
천막을 쳤다.
고지대라 서늘한 바람이 힘을 쓰는 듯 해서 출입문을 닫고 옆 창문들도 닫았다.
아늑하기 그지없는데다 밤이 깊어가면서는, 안면(安眠)을 훼방놓기 마련인 가로등
불빛들마저 사라졌다.
수시로 천막생활 하기 반c 넘은 세월에 이처럼 명당중 명당은 처음이다.
울릉도의 몇날이 마냥 행복할 것이라는 메시지에 다름 아니다.
서울 집 대문을 나선 새벽 5시 이후 밤 9시가 넘어 울릉도의 잠자리에 들 때까지 16
시간 동안 어떤 생각도 할 겨를이 없었다.
심각하게 고장난 몸의 중요한 부분들이 괴롭히는 고통마져도 느낄 겨를이.
이것이 무거운 배낭을 메고 집을 떠나는 이유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