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가 주거지에 지혜롭게 심겨진 방풍나무 삐낭 : 삐낭 주(Negeri Penang)
15세기 경에, 삐낭 섬(Pulau Penang)섬은 빈랑서(B?nl?ngX? : 檳榔嶼)로 불려졌다. "삐낭"의 이름은 삐낭(Pinang : Palm 나무의 일종인 areca catechu)이라 불리는 팜 나무의 한 종류로부터 믈라유어로 뿔라우 삐낭(Pulau Pinang : 삐낭 섬)에서 유래했다. 뿔라우 삐낭(Pulau Pinang)으로 알려지기 전에, 이 지역은 또한 딴중 비다라(Tanjung Bidara)으로 불려졌다.
"삐낭 섬"(Pulau Penang)을 지리적 용어로 최초로 사용한 것은 아마도 15세기에 영락제(Yongle Emperor : 명나라 제3대 황제 : 재위 1402∼1424) 때, 영락제의 명을 받아 1405년부터 1430년까지 일곱 차례에 걸친 대원정을 떠나는 정화의 대항해 시기에 사용되었던 정화 장군의 항해지도일 것이다. 믈라유 원주민들의 해안가 거주지 주변에 방풍목으로 삐낭(Pinang) 나무들이 줄지어 심겨진 것에 유래했다.
1786년 8월 11에 프랜시스 라이트(Francis Light)에 의해 삐낭 섬이 “프린스 오브 웨일스”(Prince of Wales)로 명명된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이름은 오래가지 못했다. 단지 영국지도와 기록 속에 있을 뿐이다. 지역 주민들은 사용하지 않았다.
고고학적 증거는 삐낭(Penang 섬과 본토 지역)에 지금은 둘 다 사라진 문화들인, Juru와 Yen 혈통의 Semang-Pangan 족이 주거했다. '스망'(Semang)는 말레이시아 뻬락(Perak), 끄다(Kedah) 그리고 빠항(Pahang) 등지에서 사는 오랑 아슬리(Orang Asli)의 이름이다( Nik Hassan Shuhaimi Nik Abdul Rahman (1998). The Encyclopedia of Malaysia: Early History, Volume 4. Archipelago Press. ISBN 9-8130-1842-9.).
현재 삐낭(Penang)에 선사시대의 인간의 거주지에 대한 첫번째의 증거는 1860년에 George Windsor Earl(1813–1865)에 의해 스브랑 쁘라이(Seberang Perai : 현재Wellesley 지역)의 북쪽에, 구아르 끄빠(Guar Kepah)에 있는 산들 사이에, 한 동굴에서 발굴하면서부터다. 바다 조개 껍질의 더미, 돌로 만든 도구들, 깨어진 도자기들, 사슴 뼈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유골이 남겨진 음식들에 기초하여, 그 거주지는 3500년 전에서 4000년 전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어림잡을 수 있었다. 대력 70년 후에, 1936년에, 고고학자 및 역사학자인 삐에떼르 빈센트 반 스타인 칼렌필스(Pieter Vincent van Stein Callenfels : 1883 - 1938)에 의해 발굴작업을 착수하여, 더 구체적으로 41구의 인류 유골을 발굴했으며, 발굴을 통해 그들의 삶의 방식이나 매장 관례 등 5000년 이전 시기의 신석기 주거지들임을 밝혀냈다. 그러나 그들은 900년도 훨씬 전에 믈라유 부족에 의해 흩어졌다. 최종 기록된 삐낭(Penang) 안에 원주민의 주거지는 1920년대에 꾸방 스망(Kubang Semang)에 있었다(http://www.mandailing.org/Eng/rootsofpenmal.html. Retrieved 2011-01-03.).
메롱 마하왕사 사기(Hikayat Merong Mahawangsa) 또는 끄다 연대기에 따르면, 메롱 마하왕사(Merong Mahawangsa)라 이름하는 힌두 왕에 의해 끄다(Kedah)가 세워졌다. 얼마 동안 점유한 인도 남부에 있는 코로만델(Coromandel) 출신인 촐라 왕, 라젠드라 촐라(Rajendra Chola)에 의해 1025년에 끄다(Kedah) 도시가 정복되었다(A history of Malaya, Richard Winstedt, Marican, 1962, p. 36). 두번째 침범은 촐라 왕국(Chola dynasty)의 비라라젠드라 촐라(Virarajendra Chola)에 의해 일어났다. 그는 11세기 후기에 끄다(Kedah)를 정복했다. 11세기 후기에, 꿀로뚱아 촐하 1세(Kulothunga Chola I) 통치동안, 촐라(Chola) 봉건영지가 스리 위자야(Sri Vijaya) 끄다(Kedah) 주에 세워졌다.
마침내, 1136년에, 술탄 왕국이 시작되었는데, 9대왕 쁘라 옹 마하왕사(Phra Ong Mahawangsa)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술탄 무드자파 샤(Sultan Mudzafar Shah)이란 이름을 채택했다. 그 후에 끄다(Kedah) 지역은 15세기 믈라까(Melaka) 왕국이 이 지역을 점령하기까지는, 시암(Siam)의 지배 아래 있었다. 믈라까(Melaka) 통치 이후, 아쩨(Aceh)에 의해 점령되었다. 17세기에는, 끄다(Kedah)가 포르투갈(Portugis)에 공격을 받았다.
18세기 초에, 수마트라의 미낭까바우 족 이주자들인 다뚝 잔나똔(Datuk Jannaton), 낚호다 바얀(Nakhoda Bayan), 낚호다 인딴(Nakhoda Intan) 그리고 낚호다 끄찔(Nakhoda Kecil) 등이 삐낭(Penang) 섬에 주거지를 개척했다(Dr. A. Murad Merican (12 October 2006). "Sejarah dari sudut Timur". Utusan Melayu (M) Bhd. Retrieved 14 January 2014.). 1734년에, 하지 무하맏 살레(Haji Muhammad Salleh : Nakhoda Intan와 동인 인물임.)는 바뚜 우반(Batu Uban)에 정착하고 마스짇 자멖(Masjid Jamek)를 그의 해변가 주거자들을 위해 세웠다(Khoo Su Nin, Streets of George Town, Penang; 2007). 이후에 아랍인들이 삐낭에 이르렀고, 젤루똥(Jelutong)에 주로 정착했다. 그리고 아랍인들은 미낭카바우 족과 결혼하여 지역 말레이 사회에 동화되었다. 아랍인들은 페낭에서 가장 부유 한 부류에 있었다(Faridah Abdul Rashid, Research on the Early Malay Doctors 1900-1957 Malaya and Singapore, 2012).
18세기 후반인 1786년에, 원래 끄다(Kedah) 술탄국의 소유였던 삐낭(Penang)은 끄다(Kedah) 술탄, 무하마드 지와 에 의해, 끄다(Kedah)를 위협하고 있던 시암(Siam)과 버마(Burma) 군사력으로부터 영국의 군사적 보호를 얻어내기 위한 방편으로 영국의 동인도 회사 (British East India Company) 에게 삐낭(Penang)을 내륙의 스망 쁘라이(Semang Perai : 현재 Wellesley)와 함께 임대하기로 한다. 영국의 입장에서는 삐낭(Penang)은 편리한 해상무역의 보급창이었으며 인도차이나로 확장하는 프랑스를 막고 수마트라에 거점을 둔 네덜란드를 견제할 수 있는 이상적인 위치였다(Penang | Pulau Pinang – History. journeymalaysia.com. Retrieved on 11 August 2011.).
1832년, 삐낭(Penang), 믈라까(Malacca), 싱가포르(Singapore)로 해협식민지(Straits Settlements)가 구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