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발레단의 제4기가 1,2,3기와 크게 구분되는 것은 바로 "발레스타시대"가 열렸다는 점이다. 그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은 물론 최태지 국립발레단장겸 예술감독이다. 그 뒤를 이어 이원국, 김용걸, 김지영, 김주원 등 네명의 스타무용수가 따른다. 이는, 이 시기에 국립발레단에서 정책적으로 스타를 키우기 시작했고 언론 홍보에 총력을 기울였음을 뜻한다.
최태지. 96년 그녀가 국립발레단장겸 예술감독에 임명되었을 때의 나이는 37세. 국립극장 전속단체장으로서는 최연소를 기록하고 있다. 당시 최태지의 임명에 대해서는 의외라는 반응이 많았다. 왜냐하면 "한국어도 능숙하지 못한 재일교포 3세, 오로지 춤만 추던 발레리나가 어떻게 정부 기관을 상대로하는 복잡한 행정단체 운영을 감당하겠느냐"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임기 4년 후 그녀는 국립발레단을 일반 대중 앞에 우뚝 세운 공로로 "MBC 성공시대"의 주인공이 된다. 무엇이 국립발레단 제4기(최태지 시기)의 신화를 만들었을까? 두 가지 중요한 프로젝트가 있다. 바로 "스타 만들기"와 "해설이 있는 발레"다. 두 건 모두 무용계로서는 첫 시도였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사실 국립발레단의 "스타 발굴" 착수는 제3기 김혜식 시기부터였다. 그러나 97년과 98년 러시아에서 공부하고 입단한 김지영, 김주원이 김용걸, 이원국과 파트너를 이루자 최태지 단장은 정책적으로 "스타 만들기"에 착수한다. 그 정책에는 단원 해외저명콩쿠르 파견도 포함된다. 97년 모스크바 국제발레콩쿠르 남자 동상 (김용걸), 98년 U.S.A 국제발레콩쿠르 여자 동상 (김지영), 98년 파리 국제무용콩쿠르 듀엣 1등상 (김용걸, 김지영), 99년 룩셈부르크 국제무용콩쿠르 듀엣 3등상 (김창기, 김은정)이 그 결실이다.
국립발레단이 정책적으로 시작한 "스타 마케팅"은 새로운 문화 풍토를 만들었다. 그 중 하나는 이 해 2월, 월간 객석이 주최하여 국내 최초로 여러 발레단의 주역들만을 모은 "한국 발레 스타 갈라 공연"이다. 이 공연에서 관심의 초점은 물론 국립발레단이었다. 두 번째는 "주역무용수"에 따라 티켓이 향방이 결정되는 경향이다. 두 스타 커플의 개성을 비교하기위해 같은 작품, 다른 일자로 더블 구매하는 현상도 이 시기부터 생겼다.
해설이 있는 발레. 지금은 국립발레단의 고유 브랜드 처럼 된 이 공연의 당초 취지는 매우 소박했다. 무용수들에게 최소한 한달에 한번은 공연 기회를 제공해주자는 것. 그러나 이 공연은 97년 ~ 99년 기준 연 평균 객석 점유율 121%, 언론 보도 건수 년 평균 101건이라는 무용 공연 사상 초유의 기록을 올린다. 기왕이면 발레에 해설을 곁들이자는 아이디어가 적중했기 때문이다.
침체되어 있던 발레단의 해외공연에 불이 붙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다. 국립극장에는 무용단이나 창극단이 있어서 해외 공연 기회가 생기면 매번 전통공연물에 양보해야 했지만 "발레야말로 세계에 나가 경쟁력을 가질만한 장르"라고 믿고있는 최태지 단장은 97 이스라엘·이집트 순회공연과 98 일본 아시아아트페스티벌의 한·일 합동공연을 성공적으로 추진한다. 결과 한국발레는 국내외 관객들에게 "세계 무대에 나가 승부할 수 있는 장르"로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해외공연 때 마다 "전통공연물"을 고집하던 정부의 인식도 이때 바뀌기 시작한다. 이제 발레는 경쟁력 있는 한국 예술의 하나로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