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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악산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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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스크랩 예조참판 김공 비명(김세균)
모악산아래 추천 0 조회 61 17.10.05 15:0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承文院參校 贈禮曹參判金公 碑銘

승문원 참교[1] 증 예조참판 김공 비명(김세균)


同中樞 李希輔 撰(동지중추부사 이희보[2] 지음)

[1] 승문원 참교; 승문원(承文院)은 이조 때, 사대(事大). 교린(交隣)의 문서를 맏아 보던 관부(官府)이니, 괴원(槐院)이라고도 하였다. 소속 관은 판교(정3품), 참교(종3품), 교감(조4품), 교리(종5품), 교검(정6품), 박사(정7품), 저작(정8품), 정자(정9품), 부정자(종9품)이 있었다.

[2] 이희보(李希輔); 자는 백익(伯益)이요, 호는 안분당(安分堂)이요, 관향은 평양, 벼슬은 대사성에 이르렀다. 서기1473년에 출생하여 서기1548년에 졸함.


金, 東國大姓 其出盆城者多, 首露王之裔 首露有隱德不食報 國除 故天酬以祚胤 世出名公偉人

김(金)씨는 동국의 대성인데, 그 분성(盆城;金海)에서 나온 사람이 많으니, 수로왕의 후예이다. 수로왕은 숨은 공덕이 있었으나, 보답을 받으시지 않아, 나라가 없어져도 하늘이 후손에게 복록을 주어 갚았으니, 세상에 명공(名公). 위인(偉人)이 나타나게 되었다.


在高麗 有諱普 大秉用 爲門下侍中 績紀麗史中 卽公之鼻祖 入 本朝 有諱孝芬 爲瑞興都護府使 贈兵曹參判 於公爲曾祖

고려 때에 있으신 휘 보(普)는 크게 병용(秉用;등용)되어 「문하성 시중」이 되었다는 사적은 고려사 중에 기록되어 있으니, 곧 공의 선조이시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휘 효분(孝芬)이 있어서 「서흥도호부 부사」를 지냈고 병조참판을 증직받았으니, 공에게 증조가 되신다.


瑞興生諱震孫 爲承文院校理 贈戶曹判書 校理生諱永貞 早捷科 歷大司憲. 知敦寧府事卒 諡安敬 卽公之考 追爵三代. 蔭後昆 皆以安敬公故

서흥공은 휘 진손(震孫)을 낳았으니 「승문원 교리」를 지냈고 호조판서를 증직받았고, 교리공은 휘 영정(永貞)을 낳았었다.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 지돈녕부사」를 역임하시고 세상을 여의셨다. 시호는 안경(安敬)이시니, 곧 공의 부친이시다. 3대의 벼슬을 추존케 하고, 후손에게 음덕을 베풀게 한 것은 다 안경공의 덕택이었다.


安敬娶交河縣監李盛東之女於 成化{天順}壬午生公 外豊端而內警穎 於學問透徹融貫 靡課督而自奮勵 年卄二中司馬科 聲名益芳馨 業進而時不諧 累失解 爲親舊所强俯 就門蔭 選補內師傳 歷主簿 遷至掌隸院司評

안경공께서는 「교하현감」이성동(李盛東:全義人)의 따님을 맞이하여, 천순임오년(1462년)[3]에 공을 낳았으니, 밖으로는 풍체가 단정하고, 안으로는 조심하고 뛰어나서, 학문에 투철하고 관통하여, 해야 할 일은 독촉하지 않아도 스스로 기운을 내어 힘썼다(奮勵). 나이 22세에 사마시(司馬試)를 합격하니, 명성은 더욱 꽃향기가 났고, 학업은 전진하였으나, 시운이 고르지 못하여, 여러번 장원의 기회를 놓치게 되었었다. 친구의 권유로 문음(門蔭)[4]에 나아가 「내사부」에 선임되어 「주부」를 역임하고 「장예원 사평」[5]에 이르렀다.

[3] 성화임오(成化壬午); 기미보(己未譜)에 『성화임오』라고 기록한 것은 천순임오(天順壬午:1462)의 잘못임.

[4] 문음(門蔭); 이조 때, 공신 또는 현직 당상관(堂上官)의 자손은 과거에 의하지 않고, 관리에 임용하던 일이다. 문음으로 채용되어 음사(蔭仕)하는 관원을 일컬어 음관(蔭官) 또는 남행(南行)이라고 부른다.

[5] 장예원 사평(掌隸院司評); 이조때, 문서 및 결송(決訟)관계의 일을 맡아 보던 관아이니, 소속 관은 판결사(정3품) 사의(정5품), 사평(정6품)이 있었다.


丙寅擢第 選拜兵曹正郞 兵天曹之亞 地重而望高 非文武大幹局 莫敢擬 公用新恩 卽調發軔之豁 世共占 秩滿陞 奉常僉正 未旣丁內憂

병인년(1506년)의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정랑」에 선임되었다. 병조(兵曹)는 이조(吏曹)의 다음이니, 지위가 무겁고 명망이 높은 자리라서, 문무(文武)의 큰 그릇이 아니면, 감히 기대할 수 없었으나, 공은 임금의 새 은혜로 벼슬길을 시작(發軔)하는 길이 열리니 세상이 함께 점쳤던 것이다. 재임기간을 마치고 「봉상시 첨정」[6]에 승진되었다가, 얼마 후 내우(內憂:父喪)[7]를 당하였다.

[6] 봉상시 첨정(奉常寺僉正); 이조 때, 제사(祭祀)와 시호(諡號)에 관한 사무를 맏아 보던 관아이니, 혹은 태상시(太常寺). 전의시(典儀寺)라고도 하였다. 소속 관은 정(正:정3품). 부정(副正:종3품). 첨정(僉正:종4품). 판관(判官:종5품). 주부(主簿:종6품). 직장(直長:종7품). 봉사(奉事:종8품). 부봉사(정9품). 참사(종9품)가 있었다.

[7] 정내우(丁內憂); 일반적으로 모친상을 내우(內憂)라고 칭하나, 여기서는 부친상을 지칭한 것.


制畢出守金山 金 嶺南之劇郡 公以侃侃和易 代箠楚 不繁敎條 而郡稱治 遷守廣興 尋陞副正 以疾辭退 出爲延曙察訪 歷<守>通川 槐山兩郡 字撫一如治金陵而 栽割有加焉

상제(喪制)를 마치고 금산(金山:金陵)[8]군수가 되어 나갔으니, 금산은 영남의 중요한 고을이었다. 공은 엄정하고 강직하게 화합으로서 매질을 대신하였으니, 교화하는데 필요한 법은 복잡하지 않았건만 고을에서 <그의> 정치를 칭송하였다. 광흥창수(光興倉守)[9]로 나갔다가 얼마 후 부정(副正)으로 승진 되었으며, 질병으로 사퇴하였다가 「연서역[10] 찰방」이 되어 나갔었고, 통천(通川). 괴산(槐山) 두 군수를 역임하였다. <백성을> 어루만지는 것이 한결 금릉(金陵)을 다스리는 것과 같았지만 정치의 사리 판단은 더 나았다.

[8] 금산(金山); 지금 경상북도 금릉군(金陵郡)

[9] 광흥창(廣興倉); 이조 때, 경상. 전라. 충청도에서 올라오는 세미(稅米)중에서, 백관의 녹봉(祿俸)으로 줄 것만을 맏아, 따로 저장 관리하던 관부이니, 한강변(漢江邊)의 마포구 와우산(臥牛山)에 있었다.

[10] 연서역(延曙驛); 양주(楊州) 서쪽 60리에 있었다.


壬辰遷相禮 轉承文參校 甲午卒 于明哲里第 享年七十三

임진년(1532년)에 「통례원 상례」로 옮겼다가 「승문원 참교」직에 전보되었으며, 갑오년(1534년)에 명철리(明哲里) 사제(私第;개인 집)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은 73세 이었다.


是年仲春 嗣子添壽等 以禮葬于原州 公有庄墅 在原界 嘗龜得不食 大崗爲身後福葬計 以夫人姜氏先焉 今以公祔 從公顧言也

이 해 2월에 사자(嗣子;대를 잇는 아들) 첨수(添壽)등이 원주(原州)에 예장(禮葬)하였다. 공의 농장이 원주 근방에 있어서, 일찍이 구해 두고 사용하지 않았으며, 큰 언덕은 죽은 후의 묘터로 삼았었다. 부인 강씨(姜氏:晋州)의 장례를 먼저 치르고, 이제 공이 합장되니, 공의 유언을 따른 것이다.     


先事之月 添壽等 杖以請銘 希輔駭辭曰 銘當出名公鉅手 可取信永久 今三郞益壽公 名重當世 所與友 皆握文柄銘 不徵於彼 而徵於老褪澁文熖者 豈非以希輔 接芳隣. 祥世德 不虛美以諛墓也 玆不强拒

장례를 치른 달에 첨수(添壽) 등이 상장[11]을 짚고 와서 비명(碑銘)을 청하므로, 희보(希輔;본 비문을 쓴 사람)는 놀라며 사양하기를 “비명은 마땅히 이름 높은 대가의 손에서 나와야 영구히 남에게 믿음을 줄 수 있고(取信), 지금 3남 익수(益壽)공은 명망이 당세에 높고, 사귀는 친구들이 모두 비문이나 비명을 잘 짓는 분이다. 그 분들 한테 청하지 않고, 이처럼 늙어 퇴색하고 글마저 깔깔하고 서투른 자에게 청하는 것은, 어찌 희보가 꽃다운 이웃을 접하여, 세덕을 자세히 알고 있어, 허장된 아름다운 글만으로, 유묘[12]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하고, 이에 강하게 거절하지 못하였다.

[11] 喪杖; 상제가 상례나 제사 때 짚는 지팡이

[12] 유묘(諛墓); 비문이나 비명을 짓는데, 과장된 글로써, 무덤에 아첨하는 것.      


公以子益壽公. 追恩 贈嘉義大夫禮曹參判 夫人 贈判書姜利行之女 生五男一女 曰添壽 漣川縣監 曰增壽 宣務郞 曰益壽 登第兵曹參判 曰從壽 司贍寺僉正 曰末壽 靑陽縣監 女歸忠義衛閔億千 公諱世勻{鈞} 字和叔 有賢德而官不稱云 銘曰

공은 아들 익수(益壽)공의 추은[13]으로써, 「가의대부 예조참판」에 증직되었고, 부인은「판서」를 증직받은 강이행(姜利行)의 따님이니, 5남 1녀를 낳았다. 첨수(添壽)는 「연천현감」이요, 증수(增壽)는 「선무랑」이요, 익수(益壽)는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참판」이요, 종수(從壽)는 「사섬시 첨정」이요, 말수(末壽)는「청양현감」이요, 딸은 「충의위」민억천(閔億千:驪興人)에게 출가하였다. 공의 휘는 세균(世鈞)이요, 자는 화숙(和叔)이니, 어진 덕행이 있으므로  벼슬은 말하지 않았다. 새긴 글은 다음과 같다.

[13] 추은(推恩); 조선 시대에, 시종(侍從)‧병사(兵使)‧수사(水使) 등의 아버지로서 70세가 넘는 사람에게 품계를 주던 일.


羅王鼻先錫自天 國絶慶存世多賢 公實後之公續似 積厚享薄其有意 不於身兮乃於後 瞥榮電貴執若久 土中有慊天實厚

가락국 시조왕은, 하늘이 내려 주었으니. 나라는 없어져도, 남은 경사가 있어, 대대로 어진이가 많았다. 공은 실제로 그 후예로서, 공의 사적도 <시조왕과> 비슷하니, 두껍게 쌓아서 얇게 누린 것은 그 뜻이 있었도다. 생전에 누리지 않고, 이에 후손에게 끼쳤으니, 갑작스러운 부귀영화와 더불어, 누가 영구할 것 같은가. 지하의 성심을 하늘이 후하게 채워줄 터이다.


萬曆七年立石

만력7년(1579년) 비를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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