破産의 純粹文學(파산의 순수문학)
-새로운 문학을 위한 문단에 보내는 백서-
金宇鍾(김우종)
한국문학은 이제 새로운 전신을 요구한다. 순수의 가치 아래 수십 년간 걸어온 우리 문학은 이제 솔직히 그 맹점을 자인해야 할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대중과 대화가 끊어진 문학, 그렇다고 해서 지식층의 총애를 받는 처지도 못되는 문학, 그 어느 편에도 들지 못하고 다만 자신의 고독성만을 자부하고 자위하게 된 문학, 지금은 이것은 ‘고도’에 이상 더 집착할 아무런 이유도 서지 않게 된 것이다.
지난번 전국 ‘베스트 셀러’ 일람 속에는 한일 두 작가의 인기 쟁탈전이 나타났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그 같은 인기작가이면서도 거기까지의 등반 ‘코스’에서 상호간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었다. 이 시자까씨는 일본이란 인기배경과 출판업자의 막대한 선동선전에다 자기의 작가적 역량 하나만을 버텨서 등반한 사람이요, 박경리씨는 수년간 매일매일의 신문 독자로부터 평가받은 신망에만 거의 의지하고 동반한 작가였다. 그런데도 결국 일본 작가는 한국 독서계의 ‘넘버 월 스타’가 되어 한국문학 전체의 면목을 여지없이 깎아 버렸다. 이 해괴망측한 현상의 책임은 우선 출판업자들이 져야 할 일이지만, 그들이 자성해주지 않는 이상 아무도 그들의 ‘자유’를 막아낼 도리는 없는 것이다.
결국 문제의 근원은 우리 문학 자체의 자질 여하에 있는 것이다. 딴 서글픈 사정도 물론 많지만 우선 장사꾼들이 외국산부터 선전하는 것은 독자들이 그만큼 그것부터 찾기 때문이다. 독자들이 그것부터 찾는 것은 그만큼 국산문학이 열등하다는 암시임을 99%까지는 솔직히 자인해야 한다.
이같은 실패 책임을 추궁하자면 그것은 대부분이 과거 1930년대부터 전개된 순수문학에 귀착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문학은 그때부터 대중문학과 분가함으로써 숱한 독자와의 연결선을 절단해 버렸고, 한편 정치적 도구문학을 반대하던 나머지 정치적 문제와 관련되는 모든 당면 현실에 일체 외면하는 경향에까지 탈선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우리 문학은 유리병 속에 밀폐되고, 우리의 대부분은 그 투명한 ‘맹물’만이 지고의 예술이라고 신앙함에 이룬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흙탕물’속에서 사는 독자들이 이러한 ‘맹물’세계와 감정을 교환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한 일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이 유리병을 부수고 그 ‘맹물’에다 현실의 ‘흙탕물’을 섞어 넣지 않으면 안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우선 이 ‘순수’의 성벽부터 무너뜨리고, 저 민중의 광장, 현실의 광장으로 뛰어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현실에 외면하며 미래의 영원에만 살자는 문학, 또는 독자의 유무가 문제가 아니라는 문학, 또는 자연히 읊조려지는 배설행위만이 오직 예술이라고 고집하는 문학-이 모든 稚夢(치몽)에서 어서 각성해야 한다. 왜냐면 오늘날 절망의 장벽속에서 절규하는 군상들에게 그런 문학이 거의 아무런 의미도 전달하지 못한다는 것은 애써 여러 말로 설명할 필요조차 없기 때문이다.
결국 고민하는 이 땅의 주민들을 위한 문학은 딴 대중작가들처럼 그들의 ‘언어’부터 습득한 문학이요, 동시에 그들의 현실에 뛰어들어 일정한 목적의식 아래 조립해 나가는 문학이다. 이 나라에선 목적의식 운운하면 그 순간부터 문학 생명이 반드시 꺼지는 것처럼 인식되어 왔지만, 그러한 편견 때문에 우리 문단은 비극의 역사 속에 살면서도 그 주변만을 맴돌고, 핵심을 이탈하여 마침내 독자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기 시작한 것이다. 기아와 혹사와 불면과 모멸과 그리고 6․25의 슬픔 등 온갖 고통 속에서 오열하는 민중들에게 이 현실 문제의 상담을 거의 거부하고, 그것을 정객들만의 소관이라고 제쳐놓았던 우리의 ‘순수’,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오락이 될 만큼 흥미로운 문학도 못되고 또 그렇다고 해서 세계적인 수준에 올라서지도 못하고 있는 우리의 ‘순수’-이런 문학이 거의 모든 이 땅의 주문들 앞에서도 부도수표처럼 냉대받는 처지가 된 것은 지당한 결론이다. 그러므로 ‘순수’에의 결별과 그 방향 전환은 이제 불가피하게 된 것이다.
(《동아일보》. 1963. 8.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