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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가면서 자기 능력의 한계를 느끼게 되는 것은 너무 흔한 경험입니다. 이럴 때마다 누구나 한번쯤 얻을 수 있길 희구했던 것은 초능력일 것입니다. 그것은 현상 세계의 물리법칙에 구속되지 않고 자기의 임의로 어떤 현상을 창출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입니다.
그러나 이런 능력은 자연의 질서 속에 있는 인간으로서는 쉽게 얻을 수 없는것 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아주 특별한 인간이나 신에게나 갖추어져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렇긴 하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해 왔습니다.
자연 법칙에 의해 생존하는 한 생물로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 온 것입니다. 인간이 고안한 부질없는 듯한 운동 경기도 바로 인간 한계의 갱신을 추구해 왔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역시 초능력을 향한 인간의 지속적인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초능력을 얻기 위해 아예 모든 것을 버리고 특별한 수행에만 전념할 수 없는 우리는 어떤 초능력자에게 의지하여 그의 초능력으로 감화를 받고자 하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중생들의 심리는 모든 종교적 성자에게서 초능력을 기대하게 되고, 또 그런 성자나 수행의 대가는 대개 자신에게 초능력이 구비되어있음을 과시함으로써 대중의 신뢰를 얻고자 합니다.
그런데 초능력을 결코 부정하지는 않는 불교의 초능력에 대한 입장은 매우 독특합니다. 초능력에 대한 일반인의 그릇된 인식을 교정하면서 진정한 초능력을 주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초능력을 神通이라고 합니다. 이 신통은 물론 초자연적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로 통용되는 것이긴 하지만, 그 본래의 의미가 흔히 말하는 초능력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불교의 독특한 입장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신통의 본래 의미는 '뛰어난 지혜'입니다. 이러한 이해가 계승되어 후대의 禪家에서는 크게 깨달은 사람이 보여 주는, 아무 것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활동을 신통이라고 합니다. 신통의 이러한 의미는 기적과 같은 불가사의한 현상을 창출하는 능력을 진정한 초능력으로 인정하지 않는 불교의 입장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실제 초기의 경전에 의하면 석가모니에게는 많은 신통력이었었다고 간주되었지만, 부처님은 그런 신통력에 아무런 중요성도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석가모니부처님은 대중 앞에서 신통을 과시했던 제자를 꾸짖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제자들에게는 사람들 앞에서 신통을 과시하지 말도록 지시했습니다. 보다 구체적인 입장은 장아함의 堅固經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한 신도가 부처님께 찾아와 모든 사람이 부처님을 믿고 공경하도록 신통을 보여 주길 청했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신통을 보이라고 가르친 적이 없으며, 다만 공덕이 있거든 안으로 감추어 두고 허물이 있으면 몸소 드러내 놓으라고 가르칠 뿐이라고 답합니다. 그럼에도 계속되는 간청을 거절하고서 신통에 대해 언급합니다. 변신술과 같은 초능력인 神足通과 남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신통력인 他心通. 많은 사람들이 특수한 주문을 외워 얻은 것으로 오해하여 佛法을 비방하는 결과를 초래하므로 부질없는 것으로 여겨 금지했다고 설합니다.
불교에서 그 가치가 인정되는 초능력이란 바른 지혜와 청정한 마음을 얻게하는 능력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를 터득하는 바른 지혜와 이 지혜를 실천하는 능력을 진정한 초능력이라고 간주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신통을 언급할 때는 흔히 6신통을 드는데, 바른 지혜를 성취함으로써 갖게 되는 초능력이 天眼通과 宿命通으로 나뉩니다. 천안통은 미래의 일을 알 수 있는 능력이고, 숙명통은 과거의 일을 알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인도 특유의 명상 즉 정신 집중의 논리에 의하면 수행의 깊이에 따라 이런 초능력이 가능하다는 점은 이해할 만합니다.
과학자가 현상계에서 발견한 법칙들을 근거로 하여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든가 현명한 사람들이 자신의 여러 가지 경험을 적용하여 앞일을 예견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세계의 진리를 깨달은 분이 미래의 일을 알 수 있다는 점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합니다. 또 선정이나 삼매와 같은 정신 집중의 상태는 자신의 잠재의식까지 관찰하여 그것을 제거할 수 있는 경지이므로, 이 경지에서는 잠재의식에 담겨 있는 과거의 상황을 알 수 있다는 점 역시 타당합니다. 불교에서 이러한 능력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은 결국 이를 통해 번뇌를 제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6신통의 궁극은 모든 번뇌를 제거할 수 있는 능력인 漏盡通이 됩니다. 아울러 6신통 중에서 천안통과 숙명통과 누진통을 진정한 지혜라고 인정하여 소위 三明이라고 칭하는 것입니다. 나머지 즉 타심통과 천이통과 신족통은 三明의 당연한 논리적 귀결로 부수되는 능력일 뿐입니다. 그런데 전통적으로는 천안통이 숙명통보다 중요하고 본질적인 초능력으로 간주됩니다. 이는 아마도 미래를 알 수 있다면 당연히 과거도 알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선업을 쌓은 사람이 사후에 하늘 나라에 태어난다는 사실을 天眼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합니다. 즉 경전에서 “'나는 청정하고 초인간적인 천안에 의해 중생들이 죽어서 변하고 태어나서 변해 가고 있는 것을 본다. 중생들은 그 행위에 따라 비천한 자, 우월한 자, 수려한 자, 추한 자, 좋은 곳으로 가는 자와 나쁜 곳으로 가는 자가 있음을 안다.”'라고 설하셨습니다.
또 도리천과 같은 낙원이 없다는 등으로 말하는 것은 선천적인 장님이 색채의 차이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지상 밖의 다른 세계는 이 肉眼으로는 볼 수 없고 天眼에 의해서만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진리 또는 진실을 깨닫는 데서 천안이 열리는 것이며, 바로 이 점에서 천안통 이야말로 인간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는 진실한 초능력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 와는 달리 석가모니부처님은 어떤 물질을 창조하는 초능력을 발휘하여 대중을 교화했다는 이야기는 거의 없습니다. 간혹 기적을 행사했다는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그릇된 견해에 빠져 있는 외도들을 바른 지혜인 신통으로써 제압하여 제도 했음을 신화적으로 묘사한 것일 뿐입니다. 모두들 어리석음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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