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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밀성박씨 성손 만남의 장소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화
○유리왕 9년 봄, 6부의 이름을 고치고 성을 하사하였다. 양산부는 양부로 고쳤으며 성은 이씨이고, 고허부는 사량부로 고쳤으며 성은 최씨, 대수부는 점량부[모량이라고도 한다.]로 고쳤으며 성은 손씨, 간진부는 본피부로 고쳤으며 성은 정씨, 가리부는 한기부로 고쳤으며 성은 배씨, 명활부는 습비부로 고쳤으며 성은 설씨로 정하였다. 또한 관직에 다음과 같은 17등급을 두었다. <삼국사기>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내용을 종합해보면 6촌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차이점이 발견되는 것이다. 1. 이(李)씨의 조상인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의 알평(謁平)---양부(梁部) 2. 최(崔)씨의 조상인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의 소벌도리(蘇伐都利)---사량부(沙梁部) (삼국유사에는 정씨의 조상으로 되어있으며 진주소(蘇)씨도 소벌도리를 시조로하고 있다.) 3. 손(孫)씨의 조상인 무산 대수촌(茂山 大樹村)의 구례마(俱禮馬)---점양부(漸梁部) (삼국사기에는 4번 진지촌을 먼저 소개하고 있다) 4. 정(鄭)씨의 조상인 취산 진지촌( 山 珍支村)의 지백호(智伯虎)---본피부(本彼部) (삼국유사에는 최씨의 조상으로 되어있다) 5. 배(裵)씨의 조상인 금산 가리촌(金山 加利村)의 지타(只他)---한기부(漢祇部) 6. 설(薛)씨의 조상인 명활산 고야촌(明活山 高耶村)의 호진(虎珍)---습비부(習比部)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내용에 차이가 있고 박혁거세와 왕비 알영이 신화로 처리됨으로서 일제에 의해 부정되어 왔던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그동안 많은 수정을 거쳤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전히 그 신빙성 문제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게 사실이다. 홈페이지 운영자도 신라 초기 기록에 많은 의문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글을 보자! <신화의 내용이 황당무계 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현실의 세계에서는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사건들이 신화의 세계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전개된다. 신화는 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닌 상상속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치부되어 왔다. 그러나 그렇게 볼 일이 아니다. 신화의 내용은 현실적으로 분명히 존재하지 않는가. 신들이 만들었다는 세계가 있고 인간이 있으며 산천초목도 있다. 제도가 있고 풍습이 건재한다. 따라서 신화의 내용이 황당하다고 부정할 수 만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왜 신화를 신빙성 없다하여 무시하면 않되는가? 다음 신문 기사와 방송내용을 보면 그 대답은 자명해 진다. |
"박혁거세는 실존인물" 신라초기 유적 발견 |
[조선일보 2004-03-25 03:32]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실존 인물이라고 쓴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뒷받침하는 유적이 발견됐다. 중앙문화재연구원(원장 윤세영)은 지난 2002년부터 박혁거세의 탄생 신화가 깃든 경북 경주시 탑동 700의 1번지 나정(蘿井·사적 245호)을 발굴조사한 결과 신라 초기 우물과 건물의 흔적인 구상유구(溝狀遺構·고랑 모양 유적) 등의 유적을 발견했다고 24일 밝혔다. 이번에 발견된 유적은 직경 14m, 너비 2m, 깊이 2m로 훌라후프처럼 한 줄로 연결된 원형 유구와 이 유구 바깥을 두른 목책의 흔적 유구보다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8각 건물지와 우물지 부속건물·우물의 흔적 등과 두형(豆形) 토기 등의 토·자기류, 기와, 철기류 등의 유물이다. 원형 유구에서는 우물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건물의 흔적으로 보이는 기둥 구멍이 발견됐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기원전 69년 사로국의 6촌장이 나정 근처에 하늘로부터 신기한 빛이 비추고 있는 것을 보고 그곳으로 가니 큰 알이 하나 있었고, 알을 깨고 사내아이(박혁거세)가 나왔다”고 기록돼 있다. 또 제2대 남해차차웅 3년(서기 6년)조에는 “시조의 사당을 세웠다”, 제21대 소지마립간 9년(487년)조에는 “시조의 사당에 제사하고 나정에 신궁(神宮)을 세웠다”고 적혀 있다. 연구원측은 “원형 우물과 건물은 나중에 세워진 제사시설인 8각형 건물보다 앞서 지어진 것”이라며 “출토된 두형 토기가 1~2세기에 만들어진 것임을 볼 때 ‘삼국사기’ 초기 기록인 박혁거세 사당·신궁의 건립 내용과 일치하는 것으로 생각된다”고 밝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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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건국의 수수께끼 나정(蘿井)은 알고 있다. KBS HD 역사스페셜[ 2005년 6월 24일 방송] - 대 본 - |
신라건국신화가 사실로 밝혀지고 있다. 알에서 태어났다는 박혁거세 신화 이것을 사실로 믿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존재와 신라건국역사를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지면서 학계를 깜작 놀라게 하고 있다. 박혁거세의 탄생지로 알려진 경주 나정(蘿井)이 발굴되면서 신라건국의 미스터리가 풀리기 시작한 것이다. 나정에서 출토된 대형 건물터와 수많은 유물들로 그 비밀을 풀어 본다. |
1.신라의 건국신화가 사실로 밝혀지다. 문화재정비사업차 시작한 나정(사적 245호) 보수공사중에 뜻밖에 놀라운 발굴이 이루어 졌다. 깊은 도랑과 날카로운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또 하나의 우물지, 그리고 신궁으로 추정되는 90여평의 대형 팔각건물지가 그것이다. 유적의 모습과 유물연대를 분석한 결과 삼국사기 초기 기록과 거의 일치하였다. 그동간 삼국사기에 기록된 박혁거세의 건국신화는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나정발굴 성과를 토대로 묻혀져 있던 건국신화의 역사적 사실을 재현했다. |
2. 박혁거세 어떻게 왕이되었나. "말이 우는 소리가 들려서 가보니 큰 알이 있었다"는 박혁거세 신화 , 그런데 기원전 1세기 조양동 고분에서는 철제무기와 기마관련 유물이 다수 발굴, 박혁거세 집단이 철기와 기마의 선진 문화를 갖고 온 이주민 세력이 아닐지 추정케 한다. 그렇다면 신화에 나오는 말은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것인가. 이와 관련 국제관에서는 로마의 건국신화를 살펴보면서 신화와 역사의 관련성을 조명한다. |
3.최초확인 박혁거세 왕국 삼국사기기록에 따르면 박혁거세는 6촌장의 추대로 왕이된다. 실제로 경주에는 6촌의 지명이 남아 있고 6촌자의 후손들은 지금도 제를 올리며 조상을 기리고 있다. 경주지역 위성사진을 통해 신라의 모태가된 6부의 실체를 확인, 그 규모와 인구를 추정해 본다. 또한 박혁거세의 왕궁이 있었다고 전하는 창림사터에서 출토된 명문기와를 분석 그곳이 박혁거세 왕궁의 터였음을 최초로 확인했다. |
4.나정발굴은 사건이다. 나정발굴 결과는 삼국사기 초기기록의 신빙성 논쟁에 새로운 불씨를 제공하고 있다. 6월초 한국고대사학회 정기모임에서 이미 논쟁이 시작 학계에 일파만파의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일제에 의해 부정되어 왔던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그동안 많은 수정을 거쳤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전히 그 신빙성 문제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게 사실이다. 그런점에서 나정의 발굴은 풍납토성과 함께 일제가 부정한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복원하는 계기가 되어 한국고대사를 다시 써야할 획기적 사건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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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근거자료 처럼 박혁거세왕과 왕비 알영은 실존인물이며 선진 문물인 철기 문화를 가진 집단으로서 철기의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박혁거세는 청동기 문화를 가진 지배 세력들을 통합하고 신라를 건국했다. 혁거세 집단이 경주에 이주했을 때 6촌 사람들처럼 이런 지석묘를 축조하는 세력이랄까 권력 구조가 없었다면 아마 나라를 세울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권력 구조 위에 혁거세 세력은 한단계 더 높은 권력 구조를 만들고 최고의 권력 구조를 혁거세의 이주민 세력이 장악함으로써 국가가 탄생하게 됐던 것이다. <kbs자료 인용> * 이부분에 대하여는 홈 운영자의 주관적 견해를 최대한 배제하였음. |
나정발굴 사진자료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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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왕의 어머니 선도성모(仙桃聖母)
천년 고도 경주 서쪽에는 선도산이 있다. 해발 381m로 그리 높지 않은 산이나 오악산왕(五嶽山王)의 응감을 위해 신라에서 제사를 지낼 때 서악(西嶽)의 지위에 있었고 여러 신이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산이다. 서악 주봉의 큰 바위 아래 마애삼존불이 있고 사소(娑蘇)라는 별명을 지닌 성모(聖母)를 배향하는 성모사(聖母祠)가 있는 산이기도 하다. 성모사(聖母祠)는 성모(聖母)를 모신 사당인데 성모는 바로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의 어머님 이시다. 다음은 삼국유사에 있는 성모에 대한 기록이다. <삼국유사 -제5권 감통 7> 선도성모(仙桃聖母) 수희불사(隨喜佛事) 진평왕(眞平王) 때 지혜(智惠)라는 비구니(比丘尼)가 있어 어진 행실이 많았다. 안흥사(安興寺)에 살았는데 새로 불전(佛殿)을 수리하려 했지만 힘이 모자랐다. 어느날 꿈에 모양이 아름답고 구슬로 머리를 장식한 한 선녀가 와서 그를 위로해 말했다. "나는 바로 선도산(仙桃山) 신모(神母)인데 네게 불전을 수리하려 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여 금 10근을 주어 돕고자 한다. 내가 있는 자리 밑에서 금을 꺼내서 주존(主尊) 삼상(三像)을 장식하고 벽 위에는 오삼불(五三佛) 육류성중(六類聖衆) 및 모든 천신(天神)과 오악(五岳)의 신군(神君; 신라 때의 오악五岳은 東의 토함산吐含山, 南의 지리산智異山, 西의 계룡산鷄龍山, 北의 태백산太伯山, 중앙中央의 부악父岳, 또는 공산公山이다)을 그리고, 해마다 봄과 가을의 10일에 남녀 신도들을 많이 모아 널리 모든 함령(含靈)을 위해서 점찰법회(占擦法會)를 베푸는 것으로써 일정한 규정을 삼도록 하라(본조本朝 굴암지屈弗池의 용이 황제皇帝의 꿈에 나타나 영취산靈鷲山에 낙사도장樂師道場을 영구히 열어 바닷길이 편안할 것을 청한 일이 있는데 그 일도 역시 이와 같다). 지혜가 놀라 꿈에서 깨어 무리들을 데리고 신사(神祀) 자리 밑에 가서, 황금 160냥을 파내어 불전 수리하는 일을 완성했으니, 이는 모두 신모(神母)가 시키는 대로 따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 사적은 남아 있지만 법사(法事)는 폐지되었다.
신모는 본래 중국 제실(帝室)의 딸이며, 이름은 사소(娑蘇)였다. 일찍이 신선의 술법(術法)을 배워 해동(海東)에 와서 머물러 오랫동안 돌아 가지 않았다. 이에 부황(父皇)이 소리개 발에 매달아 그에게 보낸 편지에 말했다. "소리개가 머무는 곳에 집을 지으라." 사소는 편지를 보고 소리개를 놓아 보내니, 이 선도산(仙桃山)으로 날아와서 멈추므로 드디어 거기에 살아 지선(地仙)이 되었다. 때문에 산 이름은 서연산(西鳶山)이라고 했다. 신모는 오랫동안 이 산에서 살면서 나라를 진호(鎭護)하니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이 매우 많았다. 때문에 나라가 세워진 뒤로 항상 삼사(三祀)의 하나로 삼았고, 그 차례도 여러 망(望)의 위에 있었다. 제 54대 경명왕(景明王)이 매사냥을 좋아하여 일찍이 여기에 올라가서 매를 놓았다가 잃어버렸다. 이 일로 해서 신모에게 기도했다. "만일 매를 찾게 된다면 마땅히 성모(聖母)께 작(爵)을 봉해 드리겠습니다." 이윽고 매가 날아와서 책상 위에 앉으므로 성모를 대왕(大王)에 봉작(封爵)하였다. 그가 처음 신한(辰韓)에 와서 성자(聖子)를 낳아 동국(東國)의 처음 임금이 되었으니 필경 혁거세(赫居世)와 알영(閼英)의 두 성군(聖君)을 낳았을 것이다. 때문에 계룡(鷄龍)ㆍ계림(鷄林)ㆍ백마(白馬) 등으로 일컬으니 이는 닭이 서쪽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성모는 일찍이 제천(諸天)의 선녀에게 비단을 짜게 해서 붉은빛으로 물들여 조복(朝服)을 만들어 남편에게 주었으니, 나라 사람들은 이 때문에 비로소 신비스러운 영험을 알게 되었다. 또 <국사(國史)>에 보면, 사신(史臣)이 말했다. "김부식(金富軾)이 정화(政和) 연간에 일찍이 사신으로 송나라에 들어가 우신관(佑神館)에 나갔더니 한 당(堂)에 여선(女仙)의 상(像)이 모셔져 있었다. 관반학사(館伴學士) 왕보(王보)가 말하기를, '이것은 귀국의 신인데 공은 알고 있습니까' 했다. 그리고 이어 말하기를, '옛날에 어떤 중국 제실(帝室)의 딸이 바다를 건너 진한(辰韓)으로 가서 아들을 낳았더니 그가 해동의 시조가 되었고, 또 그 여인은 지선(地仙)이 되어 길이 선도산(仙桃山)에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여인의 상입니다.' 했다." 또 송나라 사신 왕양(王襄)이 우리 조정에 와서 동신성모(東神聖母)를 제사지낼 때에 그 제문에, "어진 사람을 낳아 비로소 나라를 세웠다."는 글귀가 있었다. 성모가 이제 황금을 주어 부처를 받들게 하고, 중생을 위해서 향화법회(香火法會)를 열어 진량(津梁)을 만들었으니 어찌 다만 오래 사는 술법(術法)만 배워서 저 아득한 속에만 사로잡힐 것이랴. 찬(讚)해 말한다.
서연산(西鳶山)에 와서 몇십 년이나 지냈는가. 천제(天帝)의 여인 불러 예상(霓裳)을 짰었네. 길이 사는 법도 이상한 일 없지 않았는데, 금선(金仙) 뵙고 옥황(玉皇)이 되었네. 성모사 ☞ 클 릭 |
박씨 신라 선원세계(璿源世系)
박씨의 세계(世系)는 시조왕 4세인 일성왕과 파사왕대에서 큰 줄기로 갈라졌다. 파사왕계(破娑王系)는 뒤에 영해(寧海),면천(眄川),강릉(江陵),해주(海州),비안(比安),이산(尼山),구진(邱津),계림(鷄林),노성(魯城)으로 분적(分籍)되었다. 일성왕계(逸聖王系)는 시조왕 5세 아달라왕(阿達羅王)에서 28세 신덕왕(神德王)에 이어진후 29세 이르러 경명왕계(景明王系)와 경명왕 동생 경애왕계(景哀王系)로 갈라졌으며 이중 밀성박씨는 경명왕계에 속한다. 박씨 신라 선원세계(璿源世系)는 신라 시조왕부터 29세 경명왕에 이르기까지 계보를 말한다. 즉 신라 건국 시부터 신라 56대 경순왕(김부)이 나라를 들어 고려에 귀부함으로서 신라가 멸망하기 직전 까지이다. 시조왕(朴赫居世)이 서기전 57년에 13세의 나이로 6촌장들에 의해 왕위에 추대된 이래 신라 초기에는 박씨들이 왕위를 세습했다. 2세 남해왕(신라2대왕), 3세 유리왕(신라3대왕)까지 세습되다가 유리왕이 유언으로 석탈해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탈해가 신라 4대왕이 되었는데 그는 유리왕의 여동생 아효부인의 남편이기도 하다. 5대왕에는 다시 박씨인 유리왕의 둘째아들 검(檢)이 오르니 바로 파사왕(시조왕 4세)이다. 6대왕에는 파사왕의 아들이 올라 지마왕(시조왕 5세)이 되고 7대왕에는 유리왕의 장남이 올라 일성왕이(시조왕 4세) 되었으며 8대왕에는 일성왕의 아들이 오르니 바로 아달라왕(시조왕 5세)이다. 왕위에 오른 순위가 뒤바뀌어 있음에 유의하여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시조왕 6세부터 27세에 이르기까지는 박씨가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고 석씨에 이어 김씨가 왕위를 이어나갔다. 비록 오랜 기간 박씨가 왕위를 있지 못했으나 22대에 걸쳐 모두 신라의 왕손으로서 왕실과 혼인관계를 유지하는 등 관위(官位) 내지는 작위(爵位)를 받았다.
신라 52대 효공왕이 후사 없이 죽자 시조왕 28세손이요 아달라왕(阿達羅王)으로부터 24세손인 휘(諱) 경휘(景輝)께서 912년에 53대 왕위에 추대되니 바로 신덕왕(神德王)이다. 이때부터 다시 박씨계보가 역사에 명확히 나타나며 신라왕위가 타성으로 넘어간지 728년 만이다. 왕비 의성왕후(義城王后)는 효공왕과 남매지간이었고 신덕왕은 아버지를 선성왕(宣聖王)으로 추존하였다. 신덕왕 때는 신라의 말기로서 후삼국이 난립하여 국운이 극도로 쇠퇴 한 시기였다. 신덕왕이 국운을 만회하지 못하고 917년에 붕어하자 아들 휘(諱) 승영(昇英)께서 왕위에 오르니 시조왕 29세손이요 신라 54대 경명왕(景明王)이시다. 경명왕은 918년에 왕건이 고려를 세우자 이를 기존국가로 인정하였으며 쇠잔한 국운을 돌리려고 중국 후당(後唐)에 원조를 청하는 한편 견훤의 대야성 공격을 격퇴하는 등 심혈을 기우렸으나 끝내 국세를 회복하지 못하고 붕어 하니 동생 위응(魏膺)이 55대 왕위에 올랐다. 이분이 경애왕인데 927년 10월 포석정에서 연회를 베풀고 취흥 할 때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고 자결하였다. 견훤은 족제(族弟) 김부(金傅)를 신라 56대왕에 앉히고 철군하니 그가 마지막 왕 56대 경순왕이다. 경순왕은 국토가 줄고 민심이 고려로 향하자 마지막 화백회의를 열어 국토를 고려에 귀부(歸附)할 것을 결정하고 고려의 서울 개경으로 가서 절차를 밟았다. 박혁거세 시조왕이 신라를 건국한 이래 신라는 BC 57년~AD935년 까지 56대 992년간 계속되었으며 박(朴). 석(昔), 김(金)의 3성씨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박씨(朴氏)는 10왕이 233년간 왕위에 있었고 석씨(昔氏)는 8명의 왕이 162년간을 김씨(金氏)는 38왕이 587년간을 왕위에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