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임씨 창계가문은 숙종조의 문신·학자였던 임영을 현조로 하는 가계로서 15세기 이후로는 대대로 나주에 세거하며 정치적으로는 소론을 표방한 호남지역의 대표적인 양반가문의 하나였다.
나주의 토성으로 출발한 창계가문도 상대에는 사환·학문적으로 현달한 인물은 배출하지 못했고, 묘소나 배위의 실전 등 세계와 관련된 기록들이 매우 소략하게 남아 있다. 특히 시조에 대한 인식이 명확하지 않는데, 현존하는 나주임씨 족보류에서는 고려 충렬왕 때 활동한 林庇를 遠祖 또는 1世로 삼고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도 여기에 준하여 가계를 서술하고자 한다.
임비는 충렬왕 때 무장으로 활동한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1281년(충렬왕 7) 왕을 시종하여 부원한 공으로 이듬해인 1282년 시종보좌공신 2등에 책훈되고 전민을 하사받은 점에서 충렬왕의 친위세력을 형성한 엘리트 무장이었음을 짐작케한다. 족보에 따르면, 이후 그는 대장군으로 승진하여 충청도도지휘사, 판사재시사를 역임한 것으로 확인이 될 뿐 더 이상의 행적은 확인할 길이 없다.
【圖 1】〈羅州林氏 家系圖〉
임비 이후에도 나주임씨는 비록 무관 하급직에 그치기는 했지만 6-7대에 걸쳐 꾸준히 상경종사하고 있었다. 물론 현재로서는 기록의 미비로 인해 이들의 묘소의 위치나 혼인관계 등은 확인할 수 없지만 당시의 관행을 고려한다면 관향지인 나주를 떠나 개성 인근에 거주하며 벼슬하였고, 묘소 역시도 거주지 부근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러한 추정은 임비의 8세손 임탁의 행적을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족보에 따르면, 고려말 해남감무를 지낸 林卓은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일으켜 조선을 건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나주[姓鄕]으로 낙향했다고 한다. 즉, 임탁의 낙향은 임비 이래 7대에 걸쳐 지속된 京居를 철거하고 본관지로의 회귀를 의미했다. 이로부터 임탁의 자손들은 나주에 세거하게 되면서 개성 인근에 조성되었던 선대 8대의 묘소를 실전하게 된 것으로 이해된다.
【圖 2】〈羅州林氏 家系圖〉
고려 절신을 표방한 윤탁의 나주 이거는 자손들의 출처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고려조에 군기소윤을 지낸 아들 윤봉이 신왕조에서는 벼슬하지 않음은 물론 손자 始巢, 증손 碩柱, 현손 貴椽까지도 절신의 후손답게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음으로써「三世不仕」로 칭송되었던 것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나주임씨는 임탁의 5세손 林枰(1462-1522) 대에 이르러 서서히 기가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 시기는 조선왕조의 수성기로 절의파의 자손이라고 해서 불사이군의 의리를 고집할 필요가 없었고, 또 鄭夢周·吉再의 학통을 이은 김종직 등의 사림파가 중앙 정계로 활발하게 진출하고 있었다. 임평은 무과를 통해 전라도병마우후라는 顯職을 지냄으로써 임영의 직계 조상으로는 조선조에 벼슬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는데, 이는 윤봉 이후 4대만에 획득한 관록이기도 했다.
【圖 3】〈羅州林氏 家系圖〉
임평은 비록 문신은 아니었지만 그의 출사는 가문의 사회적 입지를 강화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우선 임평은 명문 집안의 사위로서 혼맥이 탄탄하였고, 그 연장 선상에서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靖國功臣 3등에 책훈된 李宗義와 사돈관계를 맺음으로써 그 기반은 더욱 견고해졌다. 이런 바탕 위에서 아들 林鵬이 문과에 합격하여 정경의 반열에 오르게되자 나주임씨는 종래의 무반적 색채를 일소하고 일약 한 시대가 주목하는 문신 가문으로 변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임붕(1486-1553)의 字는 仲擧, 號는 歸來堂, 임영의 직계 선조로는 최초의 문과 합격자였다. 그는 1510년(중종 5) 생원이 되었고, 1519년 기묘사화로 趙光祖 일파가 화를 입게 되자 관학유생을 대표하여 그를 신구하는데 노력하였다. 이후 1521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승정원·육조 등 중앙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전라·충청·강원 3도의 관찰사를 역임했다. 임붕은 정국공신 이종의의 사위라는 점에서는 훈구계열로 분류될 수 있지만 조광조의 구원에 노력한 것으로 보아 사림파와도 매우 가까웠음을 알 수 있다. 그는 丁玉亨·申光漢(企齋)·蘇世讓(陽谷)·宋純(俛仰亭)·林億齡(石川) 등 당대 일류의 문사들과 교유하였는데, 신광한이 임평의 묘갈을 찬하고 송순이 글씨를 쓴 것도 임붕의 교유관계에서 기인한다. 특히 그는 1520년(중종 15) 영산강변에 정자를 건립하여 귀래정이라 편액하고, 장수유식의 공간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이 정자는 1555년(명종 10)에 후손이 재건하면서 영모정이라 이름을 바뀌었고, 현재는 나주임씨의 종회소로 활용되고 있다.
임붕은 슬하에 4남[益·復·晉·蒙]을 두었다. 장자 임익은 현감, 2자 임복은 정자, 3자 임진은 병사, 4자 임몽은 첨지를 지냈다. 그의 아들 중 문과에 합격한 이는 2자 임복이 유일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임영에게는 고조부가 된다.
임복(1521-1576)의 字는 希仁, 號는 楓巖이다. 1540년 약관 20의 나이로 진사시에 입격하고, 1546년 증광 문과에 합격하여 아버지 임붕에 이어 양대 科慶을 누렸지만 벼슬길은 그다지 순탄치 않았던 것 같다. 그가 벼슬을 시작한던 명종조는 대윤과 소윤의 대립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윤복은 김안로 계열로 지목되어 삭판·유배되는 등 부침이 잦아 고관에 오르지 못하고 승문원 정자에 그쳤다. 이처럼 임복은 정치적으로는 곡절이 많았지만 학식이 뛰어나 朴淳(思菴)·許曄(草堂)·鄭宗榮(八溪君)·朴漑·朴民獻·金命元 등 당대의 명사들과 널리 교유하였고, 만년에는 孤松精舍를 지어 여생을 즐기다 1576년 5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圖 4】〈羅州林氏 家系圖〉
임복은 초취와 재취에서 자녀를 두지 못했고, 삼취 남평서씨와의 사이에서 2남[㥠·悏]을 1녀[洪澱]를 두었다. 장자 임서는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이 감사에 이르렀는데, 임서 자신이 현달했음은 물론 후일 이 가계는 다수의 현관·석학을 지속적으로 배출하며 창계가문과 더불어 나주임씨의 대표적 계통의 하나로 성장·발전하였다.
차자 임협이 바로 임영의 증조부 柳湖公이다. 임협은 천성이 효우하여 향당으로부터 칭송이 자자하였고, 또 남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는 관후한 인품의 소유자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사환가의 자제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호학하였으나 임진왜란이란 어수선한 시국에 직면하여 과거와 출사의 기회가 여의치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 1597년 정유재란 발발하여 호서로 피난하였다가 이듬해인 1598년 홍주의 촌사에서 26세의 나이로 병사하고 말았다. 金尙憲이 찬한 묘갈명에 행적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임협은 슬하에 아들 둘[단·위]을 두었는데, 장자 임단(1593-1664)이 임영의 조부 夢村公이다. 임단은 문과 출신은 아니었지만 1618년(광해군 10) 생원·진사 양시에 입격한 수재였다. 1623년에는 인조반정에 참가하여 정사원종공신에 책훈되었고, 벼슬은 통정대부 상주목사에 이르렀다. 그는 임붕(증조)→복(조)→협(부) 이래로 신장되어 온 가문의 입지와 외조 의 후광을 바탕으로 서인 기호학파의 중진으로 할동하였고, 사회적 위상도 매우 높았다. 당시 서인의 원로였던 김상헌에게 임협의 묘갈명을 촉탁하고 반남박씨·임천조씨 등 당대 굴지의 명가들과 통혼할 수 있었던 것도 임단의 사회적 위상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임단은 슬하에 3남[一儒·相儒·長儒] 1녀[金敏格]를 두었다. 이 중 장자 임일유(1611-1684)가 임영의 아버지이다. 임일유는 어려서부터 文詞가 탁월하여 巨儒의 기국으로 칭송되었으나 문과에 합격하지는 못했다. 1633년(인조 11) 진사시에 입격한 뒤에 벼슬길에 나아가 목릉참봉, 광흥창봉사, 장악원직장, 은진현감, 호조좌랑, 용안현감, 사헌부감찰, 공조정랑, 함흥판관, 한성서윤 등을 역임하고 임영 형제의 귀현으로 인해 첨지중추부사에 가자되었다. 그는 관료로서의 능력이 뛰어나 愛民과 束吏를 거관의 요체로 삼아 많은 치적을 남겼는데, 특히 은진현감 재직시에는 선정을 베풀어 왕으로부터 表裏를 하사받기도 했다.
이처럼 임일유는 벼슬은 한성부서윤에 그쳤지만 문명과 학행을 바탕으로 金壽恒(文谷)·金壽興(退憂堂)·李敏叙(西河)·趙聖期(拙修齋) 등 서인 명사들과 교유하며 羅州世家의 가성을 충실하게 유지하는 한편 반남박씨·임천조씨 등 서인 명가와의 혼맥을 통해 가문의 입지를 보다 강화하였다. 그는 박호의 딸을 초취로 맞았는데, 朴濠는 반남박씨의 중흥조로 인식되는 朴紹(冶川)의 증손이며 영의정을 지낸 申欽(象村)의 사위였다. 그리고 재취부인 임천조씨는 참판 趙錫馨의 따님으로 조부는 趙希逸(竹陰)이고, 외조는 김상용(仙源)의 아들 金光炫이었다. 반남박씨와 임천조씨는 뛰어난 관료·학자를 배출하며 안동김씨·연안이씨·동래정씨·덕수이씨·광산김씨·전주이씨·평산신씨 등과 더불어 서인 기호학파를 구성하는 핵심 가문으로서의 입지가 탄탄하였다.
한편 임일유는 성격이 호방하였고, 산수를 사랑하는 강호처사의 기질이 다분한 사람이었다. 1673년 양근군수에서 해직된 뒤에는 솔가하여 영동의 通川에서 4년이나 우거하였는가 하면 그 뒤에는 다시 호서의 白馬江 상류로 이거하여 세사를 잊고 자적하였는데, 그의 고종초도 바로 이곳이었다. 1684년 정월 20일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함평의 선영으로 반장하였고, 그의 행적은 이덕수가 찬한 묘갈명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임일유는 반남박씨와 임천조씨와의 사이에서 4남[渙·淀·泳·淨] 4녀[沈思渾·崔寔·梁大家·趙衡輔]를 두었다. 이 중 渙·淀 형제와 沈思渾에게 출가한 딸은 박씨 소생이고, 이 외에는 모두 조씨 소생이다. 임일유의 계배 임천조씨는 명가의 자녀답게 자질이 현숙하고 학식을 지닌 지성이었다. 치가에는 법도가 있었고, 근검하였으며, 특히 자녀들의 훈육에 남다른 정성을 보여 임영 형제가 학자·관료로 대성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임일유의 장자 임환은 문과에 합격하여 장령을 지냈고, 차자 임정은 처사였으며, 3자 임영은 곧 창계이며, 4자 임정은 남원부사를 지냈다. 막내 사위였던 趙衡輔는 인조조의 문신·학자로서 서화에도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趙涑(滄江)의 손자였다. 이 가계는 성혼(牛溪)의 학통을 계승하는 가운데 17세기 이후로는 반남박씨 서계가문 등과 혼맥을 구성하며 소론의 핵심가문으로 성장하였다. 조형보는 벼슬이 없었지만 그의 아들 세 아들[尙慶·尙命·尙行]은 문과에 합격하였고, 상정은 현령을 지내는 등 사환도 매우 혁혁하였다. 특히 조형보의 아들들은 외가의 일에도 적극성을 보였는데, 李德壽에게 임일유의 묘갈명을 부탁한 사람도 趙尙慶이었다.
한편 임일유의 3자로 태어난 임영은 임탁이 나주로 이거한 이후 나주임씨 집안에서 배출된 인물 중 가장 현달한 인물의 한 사람이었다. 물론 임영 이전에도 문과에 합격하여 고관을 지내거나 학식과 문장으로 명성을 날린 인물이 적지 않았지만 임영처럼 정치·사상·문학의 제분야에서 거적을 남긴 경우는 많지 않았다. 1649년(인조 27) 임일유의 3자로 태어난 임영은 1696년 48세라는 길지 않은 생애를 마감하기까지 관료·학자이자 시인으로서 화려한 삶을 살다간 인물이었다. 아려서부터 총명함이 탁월했던 임영은 과 종조부 임위의 문하에서 경사를 섭렵하며 학문의 기초를 다졌다. 이 과정에서 김장생의 문인으로 당시 서인 학계에서 명성이 있었던 임위는 “나는 너의 스승이 아니다”라고 하며 임영의 재능을 매우 칭찬했다고 한다.
【圖 5】〈羅州林氏 家系圖〉
이후 약관의 나이에 접어든 임명은 1665년(현종 6) 친명에 의해 이단상(靜觀齋)의 문하에 입문하는 한편 조한영(晦谷)의 사위가 됨으로써 당대 최고의 인사들과 학맥·혼맥으로 연결되었다. 이정구의 손자로 이른바 관동이씨「八相」의 한사람이었던 이단상은 효종조까지는 사환에 종사하였으나 효종이 승하하자 벼슬을 멀리하고 학자로 대성하였다. 저서에『靜觀齋集』 외에도 『大學集覽』,『四禮備要』,『聖賢通紀』가 있으며, 양주의 石室書院과 인천의 鶴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이단상은 서인 기호학파의 학통과 관련하여 매우 주목되는 인물이다. 이단상 자신은 특별한 사승관계 없이 월사 이래의 가학을 계승한 경우였지만 그로부터 발원하는 학맥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단상 문하의 우뚝한 인물로는 金昌協·金昌翕·李喜朝·林泳·李涬 등이 있다. 이희조는 그의 아들이며, 김창협과 이행은 사위였다.
【圖 6】〈李端相의 學脈〉
물론 이단상의 학통은 김창흡을 통해 면면히 계승되어 위정척사파의 학문적 연원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노론학통으로서의 속성이 강하지만 임영은 정관재 문하에서 김창협·김창흡·이희조 등 유수한 인재들과 교유하며 견문을 넓히고 학식을 쌓아 서인의 중진관료로 성장하는 토대를 강화할 수 있었다.
1665년(현종 6) 사마시에 장원한 임영은 동방의 제생들과 함께 이이·성혼의 문묘종사를 상소하여 기호학통의 현양에 노력하여 명성이 날로 높아졌지만 문장보다는 주자서를 탐독하는 등 유학자 본연의 자세에 충실하였다. 이 무렵 임명은 석학 박세채의 문하에 나아가 제자로서의 예를 다하게 되는데, 박세채는 그의 博聞强記함을 칭찬하며 재목으로 기대해마지 않았다고 한다. 박세채와의 사제관계는 창녕성씨 晦谷家門과의 혼인관계와 더불어 후일 나주임씨 창계가문이 소론으로 활동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1671년(현종 12) 정시문과에 급제한 임영은 병조좌랑, 사간원정언, 홍문관부수찬, 사헌부지평 등 중앙의 요직을 역임하는 한편 경연관으로서 국왕을 보도하고 상소를 통해 시폐의 개선을 요청하는 등 經世家로서도 크게 활약하였다. 이후 그는 모든 문신이 선망하던 湖堂에 선발되어 사가독서의 특전을 누렸으며 이조좌랑·정랑, 의정부검상·사인, 사간, 승지, 부제학, 대사성, 황해도관찰사 등 내외의 요직에 두루 임명되었으나 사직한 것이 많았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서남간에 정권교체가 일어나 인현왕후가 폐비되자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였다가 1694년 갑술환국이 일어나자 다시 기용되어 공조참판, 대사성, 대사헌, 부제학, 개성유수 등에 임명되었다. 이 과정에서 숙종의 예우도 지극하여 1695년(숙종 21) 부제학 재임시에는 왕으로부터 약물을 하사받기도 했다. 이러한 조야의 신망과 왕의 지우에도 불구하고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았던 임영은 1696년 2월 6일 서울의 태廟坊 주택에서 생을 마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 48세였다. 이에 숙종은 예관을 파견하여 애도를 표하는 한편 부의를 보내 장례 비용을 돕는 등 마지막까지 예우를 다하였다. 임영은 경사는 물론 제자백가의 글에도 두루 통달하였으며, 시문에도 뛰어났다. 특히 시는 전아하여 고인의 체격을 얻었다는 평이 있었다. 나주의 滄溪書院, 함평의 水山祠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조선중기 이래 사환가로서, 기호학파의 명가로서 탄탄한 입지를 다져온 나주임씨는 임영 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구가하였으나 임명 이후로는 고관이나 석학의 배출이 이전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게 되었다. 우선 임영의 외아들 임동이 벼슬도 없이 30대 중반에 조졸함으로써 가세가 위축되었고, 손자 적하도 중하급직인 주부에 그쳤다. 그러나 이 시기만해도 혼반은 그대로 유지되어 임동은 소론의 명가 해평윤씨 윤두수가문, 파평윤씨 尹昌世 가문과 혼인하였다. 임동의 초취 부인의 처부 尹濩는 선조조의 명신 尹斗壽(梧陰)의 5세손으로 이 가계는 斗壽→昉→新之→墀→世興→濩로 이어지는 당대 유수의 명가였다. 윤두수와 윤방은 父子領相으로 명성이 높았고, 윤신지(海嵩尉)는 선조의 부마로서 왕실과도 연고가 깊었다. 그리고 윤지는 문과 급제 후 湖堂을 거쳐 이조참의에 이른 엘리트 문신이었다. 그리고 재취 부인의 처부 尹採 역시 소론의 명가 파평윤씨 출신으로 그의 조부 尹흡은 한성서윤을 지냈고, 아버지 尹海擧(不憂堂)는 이른바 파평윤씨 8擧의 한사람으로 학식이 높았다. 윤흡은 파평윤씨 노성 입향조 尹暾의 손자로 성혼의 사위였던 중형 尹煌(八松)은 곧 윤증(明齋)의 조부였다. 주지하다시피 노성의 파평윤씨는 반남박씨 朴世堂·世彩 가문, 파평윤씨 尹趾完 가문, 창녕조씨 曺漢英 가문, 의령남씨 南九萬 가문, 수원최씨 崔錫鼎 가문, 전주이씨 李景稷·景奭 가문 등과 함께 소론의 핵심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임영의 증손자 林弘遠은 학문과 사환에 있어 창계 이래의 세업을 충실하게 계승한 인물이었지만 이 대를 기점으로 창계가문도 점차 鄕儒化 되는 경향이 있었다. 임홍원은 학식이 높았고, 벼슬도 양천현령을 지내는 등 어느 정도의 사회적 기반은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 위상에 있어 창계 대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이를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바로 문과 급제자의 부재와 혼반의 격하였다. 창계가문은 임붕이 문과에 합격하면서부터 임영에 이르기까지 직계로 4명의 문과 합격자와 다수의 사마시 입격자를 배출하며 사환가로서의 입지를 다졌으나 임영 이후로는 문과는 물론 단 한명의 생원·진사도 배출하지 못했다. 물론 임영의 손자 임적하는 주부, 증손 임홍원은 현령, 현손 임정진은 현감을 지냄으로써 사환은 지속되었지만 문과 출신과는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문과 합격자의 부재와 사환의 부진은 혼인관계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쳤다. 종전까지는 경화사족을 대상으로 혼맥이 형성되었음에 비해 임홍원부터는 제주양씨, 행주기씨, 문화유씨, 평해황씨, 연일정씨 등 나주·영광·창평·고창 등 호남일원의 양반가문으로 축소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먼저 林弘遠의 처가 제주양씨는 조광조의 문인으로 기묘사화에 피화되었던 梁彭孫(學圃)의 후손으로 추정되는데, 이 가계는 己卯名賢의 후손으로서 호남의 영암·능주·광주·창평 등지에 세거하며 재지사족으로서의 탄탄한 재지적 기반을 구축해 왔다. 둘째 매부였던 奇泰一은 金麟厚(河西)의 문인 奇孝諫(錦江)의 7세손이며, 송시열의 문인 奇挺翼(松菴)의 증손이었다. 이 가문은 기호학파의 학통을 충실히 계승하며 영광 일원에 세거하였다. 세째 매부 柳煥經은 창평에 세거한 문화유씨 출신이었으며, 네째 매부 黃一漢은 정조연간 호남의 대표적인 학자였던 黃胤錫(頤齋)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둘째 사위였던 鄭在洙는 창평 출신으로 鄭澈(松江)의 8세손이었으며, 아들 鄭凞는 문과에 합격하여 교리를 지냈다. 물론 이들의 대부분은 조선중후기 기호학파 중진들의 후손이었고, 황윤석 같은 경우는 김원행의 문인으로서 경향간에 학행이 자자한 인물이었지만 창계 대를 전후한 시기의 혼반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圖 7】〈羅州林氏 家系圖〉
한편 임홍원의 아들 임정진은 가학을 계승하여 당시의 유림사회에서 명성이 높았고, 학행을 바탕으로 용안현감을 지냈다. 호학의 선비답게 상당한 분량의 일기를 남겼는가 하면 본서에 수록된 고문서 중에도 그와 관련된 자료가 많다.
임정진 이후로는 아들 임택수가 순릉참봉을 지낸 것을 제외하고는 단 한 명의 관리도 배출되지 않았고, 혼반도 울산김씨, 장흥고씨, 안동권씨, 행주기씨, 연일정씨, 문화유씨, 풍천노씨 등 호남의 재지사족 가문에 한정되어 있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창계가문은 나주의 토성으로 출발하였으나 고려중기에서 후기에 이르는 7-8대 동안의 상경종사기에는 개성 일대에 거주하였다. 그러다 여말선초의 격변기에 역성혁명에 반대했던 임탁이 관향지인 나주로 이거하게 됨으로써 다시금 세거의 기반을 조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창계가문은 임형·이붕 이래 임정진·임택수에 이르기까지 누대에 걸쳐 사환에 종사하면서도 지역적인 기반은 나주에 두고 있었다. 이런 정황은 분묘의 현황에서도 확연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표】〈나주임씨 분묘 현황〉
대수 | 성명 | 분묘 소재지 | 묘도문자 | 비고 |
9세 | 林卓 | 羅州 文平面 玉堂里 林乙山 | 表石 | 羅州 歸鄕 |
10세 | 林鳳 | 羅州 多侍面 佳雲里 信傑山 | 墓碣(林象德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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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 | 林始巢 | 羅州 文平面 玉堂里 林乙山 | 表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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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 | 林碩柱 | 羅州 多侍面 佳雲里 信傑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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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 | 林貴椽 | 羅州 多侍面 佳雲里 信傑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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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 | 林枰 | 羅州 多侍面 佳雲里 信傑山 | 墓碣(申光洙撰, 宋寅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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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 | 林鵬 | 羅州 多侍面 佳雲里 信傑山 | 墓碣(尹光啓撰) 墓誌(林㥠撰) | 文科 |
16세 | 林復 | 羅州 多侍面 佳雲里 信傑山 | 墓碣(趙希逸撰,李潚書,金尙容篆) | 文科 |
17세 | 林悏 | 羅州 多侍面 佳雲里 信傑山 | 墓碣(金尙憲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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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 | 林단 | 咸平 新光面 福峙 | 墓碣(林象德撰, 曺允亨書) | 外鄕安葬 |
19세 | 林一儒 | 咸平 新光面 福峙 | 墓碣(李德壽撰,徐命均書,趙顯命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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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 | 林泳 | 羅州 金卞面 傑底店 | 神道碑(李德壽撰) | 滄溪 |
21세 | 林董 | 羅州 金卞面 傑底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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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세 | 林迪夏 | 羅州 金卞面 傑底店 | 表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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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세 | 林鴻遠 | 羅州 金卞面 傑底店 | 表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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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세 | 林正鎭 | 羅州 金卞面 本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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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세 | 林宅洙 | 淳昌 福興面 大角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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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세 | 林胤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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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세 | 林琮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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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계가문의 직계 선대 중 족보상에서 분묘 위치가 확인되는 것은 나주 입향조인 임탁부터이다. 임탁의 산소는 나주 문평면 옥당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자손들의 산소도 다시면 가운리, 금변면 걸저점 등 나주 일원에 분포하고 있다. 단 임영의 조부 임단과 아버지 임일유 양대의 산소만 함평에 소재하고 있다. 창계가문에서 함평에 최초로 산소를 쓴 인물은 임협의 부인 죽산박씨였고, 이 연장 선상에서 아들 임단과 손자 임일유의 산소도 여기에 소재하게 된 것으로 이해된다. 임영 이전에는 주로 문평면·다시면 일원에 묘역을 조성하다 임영 대부터는 금변면의 걸저점과 본촌에 묘역이 집중 분포하고 있는 것도 작은 변화라 하겠다.
한 가계의 지역적 연고와 관련하여 분묘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거주지이다. 창계가문의 경우 나주에 기반을 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여기서는 호적류를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표】〈창계가문 거주지 현황〉
해당인물 | 호적형태 | 연도 | 호적상의 거주지 | 비고 |
林泳 | 戶口單子 | 1684(肅宗10) | 未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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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董 | 准戶口 | 未詳 | 未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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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迪夏 | 准戶口 | 1735(英祖11) | 錦城縣 侍郞面 書院村 | 滄溪書院 所在地 |
准戶口 | 1738(英祖14) | 羅州牧 侍郞面 書院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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准戶口 | 1750(英祖26) | 羅州牧 侍郞面 維山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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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聖觀 | 准戶口 | 1759(英祖35) | 綾州牧 上東面 金陵里 | 林鴻遠·林正鎭의 妻鄕 |
林翊夏 | 准戶口 | 1762(英祖38) | 羅州牧 侍郞面 維山村 | 林迪夏의 弟 |
准戶口 | 1768(英祖44) | 羅州牧 侍郞面 維山村 |
准戶口 | 1777(正祖1) | 羅州牧 侍郞面 維山村 |
林鴻遠 | 准戶口 | 1771(英祖47) | 羅州牧 侍郞面 維山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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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正鎭 | 准戶口 | 1819(純祖19) | 羅州牧 侍郞面 栢下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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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宅洙 | 准戶口 | 1840(憲宗6) | 羅州牧 侍郞面 栢下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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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炳鎔 | 准戶口 | 1891(高宗28) | 淳昌 下置等面 雲橋里 | 林炳鎔의 外鄕 |
현재 창계가문에는 호구단자·준호구를 합해 9대 13점의 호적류가 소징되어 있다. 시기적으로는 임영 대인 17세기 후반에서 19세기 후반까지 약 200에 걸쳐 분포하고 있다. 이 중 임영과 아들 임동의 호적은 문서가 불완전하거나 지명이 표기되어 있지 않아 거주지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거주지가 확인되는 것은 임영의 손자 임적하 부터이다.
임적하의 1738년(영조14)까지 호구상 거주지는 나주 시랑면 서원촌으로 나타나다 1750년(영조 26)에는 시랑면 유산촌으로 기재되어 있다. 서원촌에서 유산촌으로 거주지의 변동이 일어난 것이 거주지의 이동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동일한 동네의 명칭 변경에서 기인하는 것인지는 자세하지 않으나 전자의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된다. 이주가 확실하더라도 같은 면에서의 이동이라는 점에서 큰 변화라 할 수는 없었다. 서원촌은 임영의 제향처인 창계서원의 소재처로 추정되는데, 과거의 지명으로는 시랑면 가운리 신걸촌이고, 현지명은 다시면 가운리 3구 신걸마을이다. 창계서원은 1711년(숙종 37) 유림의 공의로 건립되어 임영에 대한 제향과 지방 유림들의 교육에 일익을 담당하다 고종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1871년 훼철되었다. 이후 약 50년이 지난 1928년에 복설되었으며, 향사일은 매년 9월 9일이다.
1771년 호적에 따르면 임적하의 아들 임홍원도 유산촌에 거주한 것으로 나타나다 임홍원의 아들 임정진은 백하촌에 거주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백하촌은 지금의 회진리 2구 백하마을로 오래전부터 나주임씨들의 세거지로 정착되어 있던 곳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창계가문은 나주의 서원·유산·백하촌 등지에 거주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2-3차례의 거주지 변화가 있었지만 시랑면(다시면) 내에서의 근거리 이동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호남 일원에서는 창계가문을 이른바 회진임씨라 부르고 있어, 회진이 대표적 세거지로 통용되고 있을 뿐 실제 거주지였던 서원·유산·백하 등의 명칭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이는 행정구역의 개편에 따른 결과였다. 나주군지에 따르면,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시랑면(侍郞面), 동강리(東江里), 누저리(樓底里), 사직리(士直里), 백하리(栢下里), 풍호리(楓湖里), 신정리(新丁里)를 합해 신정과 풍호의 첫 자를 따서 신풍리라 칭하다 1996년 3월 15일자로 회진리(會津里)로 변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결국 회진리는 창계가문의 대부분의 분묘와 거주지를 포괄하는 새로운 이름의 동리였던 것이다.
교령류에 속하는 8종 104점의 문서는 주로 滄溪 林泳에게 발급된 것이거나, 그의 관직생활과 관련이 깊은 문서이다. 그의 생원시 入格과 문과 급제를 알려주는 白牌, 紅牌를 비롯하여 총 93점에 달하는 관직임명장 告身은 조선 중후기 관료생활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고신이 포괄하고 있는 시기가 1680년(肅宗6)부터 1696년(肅宗22)이므로, 임영이 문과 급제한 1671년 이후 관직이 正四品에 오른 때부터 사망 직전까지 발급된 고신은 거의 전량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이전의 관직기록은 敎牌과 差定帖을 통해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임영에 관한 교령류 문서가 잘 보존된 까닭은 이것을 낱장으로 보관하지 않고 帖을 만들어 두었기 때문이다. 〈官敎帖〉이라는 제목 아래 고신, 교첩, 차정첩이 함께 묶여 있다. 하지만 전후 기록이 없어 첩을 만든 시기는 알 수 없다. 이 책에 실린 해당 문서는 편집과정에서 원래의 낱장 문서 형태로 복원한 것이기는 하나, 원형을 온전히 살리는 것은 불가능 하였다. 또 고신, 교첩, 차정첩에서 글자가 잘린 부분은 낱장 문서들을 〈관교첩〉으로 帖冊되어 있는 諭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소차계장류에는 총 10종 60점의 문서가 실려 있으며, 單子와 所志 등의 訴狀, 청원서 류의 문서가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다.
총 23점이 실린 單子는 주로 山訟 분쟁과 石材의 소유권을 다툰 소송사건과 관련이 있다. 1788년 林鴻遠 숙부의 산소가 소재하는 信傑鎭이 자신의 친족 무덤을 偸葬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를 알게 된 임홍원이 속히 이장할 것을 요구하여 양측간에 山訟이 발발하였으며, 폭력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임홍원은 임형진의 투장을 고발하는 單子, 임형진이 속히 이장하도록 조처해 줄 것을 요청하는 단자, 임형진 측의 폭력행사를 고발하는 단자 등을 작성하였고, 이 책에 실린 다수의 단자가 이와 관련한 것이다. 單子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은 滄溪 林泳의 무덤이 있는 會津江 가의 오래된 床石을 둘러싼 분쟁이다. 이 床石을 두고 임홍원의 族姪인 林海鎭과 柳德天이 소유권 분쟁을 일으켰는데, 나주관아에서는 양쪽의 주장 모두 근거가 박약하다고 하여 이 상석을 관에서 몰수하고자 하였다. 이에 임홍원은 자신이 이 상석의 소유자라는 단자를 나주관아에 올렸으나, 수령이 인정하지 않자 여러 차례에 걸쳐 소유권 주장과 자신의 결백을 알리는 단자를 작성하였다. 1793년과 1794년에 작성된 나주임씨 일가의 단자는 모두 이 석재를 둘러싼 분쟁 문서들이다.
다음으로 임영이 국왕에게 올린 상언 8점은 휴가요청, 묘제문 제출 명령에 대해 올린 것, 持平 金鎭龜의 避辭에 대한 의견 등 관직에 있으면서 사안사안에 따라 국왕에게 올린 것이다.
호적류에는 戶口單子와 準戶口가 함께 묶여 있다. 林泳 당대의 호구단자가 1점 남아있고, 그 후손의 호적 10점, 梁聖觀 준호구 1점이 실려 있다. 나주임씨 집안에 제주양씨 호적이 남아있는 이유는 임영의 曾孫 朴弘遠의 혼인 때문이다. 4조기록으로 보아 양성관은 임홍원의 장인 梁聖{忄+互}의 형제로 보인다. 이 호적에 가족원으로 나주임씨가 등재되어 있지 않아 자세한 내력을 알 수 없으나, 혼인으로 인해 제주양씨의 호적을 나주임씨 집안에서 소장하게 된 것이다. 이 책에는 실려 있지 않지만, 비슷한 예가 세계관련기록, 족보류 기록에서도 발견된다. 나주임씨 집안 家傳 고문서에는 혼인한 집안의 세계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나주임씨 호적에서는 죽은 처 혹은 전처의 기록이 잘 남아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재혼하여 후처가 호적에 올라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망한 전처는 四祖기록까지 동반하여 오랫동안 호적에 기록되고 있었다.
서원이나 향교에서 상관이나 해당 지방관에게 보고하가나 요청하는 문서인 稟目은 총 5점이 실렸다. 滄溪書院의 어려운 재정형편을 설명하고 소속된 陳田에 부과되는 세금을 면제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 주 내용을 이루고 있다.
소차계장류의 마지막에 실린 題辭는 독립된 문서가 아니라 주문서에서 떨어져 나온 단편문서이다.
총 6종 31점이 수록된 첩관통보류 문서에는 傳令, 書目, 文狀, 告目, 朝報, 甘結이 포함되어 있다.
관원이 관하의 관리, 면임, 民 등에게 내리는 명령서인 傳令은 4점이 수록되었다. 1844년 전령 3점은 임영의 산소에 투장한 자를 찾으라는 명령에 관한 것이다. 임영 산소 인근의 床石을 둘러싼 분쟁과정에서 나주목사가 風憲에게 상석의 값을 논의해 올리라는 것이 1793년 전령의 내용이다. 이 명령에 대한 보고문서가 1793년 書目이다. 같은 해 다른 서목에는 이 석재를 둘러싼 쟁송을 처리하기 힘들다는 풍헌의 보고 내용이 나타난다. 1798년 서목 3점은 모두 陽川縣令 林鴻遠이 올린 것으로 두 점은 산송에 관한 것이고, 한 점은 水原 初檢官의 직책을 맡았으나 병약하여 갈 수 없다는 보고이다. 방물에 관한 주의를 요구하는 정조연간의 서목 한 점은 단편문서이므로 그 내용의 전모를 알기는 어렵다. 서목은 이렇게 총 6점이 수록되었다.
1799년에 양천현령 임홍원이 임지에서 사망하여 고향인 나주로 運柩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대한 협조요청이 1799년 文狀 2점의 내용이다. 첩관통보류 마지막에 수록된 1799년 甘結 1점 역시 동일한 사건을 당하여 임홍원의 운구 행로의 각 지역 관에 편의제공을 지시하고 있다.
첩관통보류 중 가장 많은 양이 수록된 것은 告目으로 총 17점에 달한다. 下吏가 上官에게 공적인 일을 알리거나 문안할 때 올리는 문서인 고목 중 다수는 문안내용을 담고 있다. 이외에 1844년 고목 4점은 偸葬사건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官報의 성격을 지니는 朝報 1점이 수록되었다. 특유의 조보체로 쓰여져 있으며, 인사이동에 관한 내용으로 보인다. 문서상에 나타난 寧宜縣監 朴宗球의 관련 기사가 순조실록 순조8년 8월1일에 나타나 순조연간 문서로 파악된다.
證憑類는 7종 10점이 수록되었다. 영수증에 해당하는 尺文 1점이 맨 처음에 실려 있고, 임지에서 사망한 양천현령의 운구 과정에 편의를 제공할 것을 요청하는 1799년 路文 3점이 다음에 수록되었다. 이하로는 錢을 하사하는 내용의 行下 2점과 林正鎭의 小學 入格 증명서인 照訖帖 1점, 천역탈급에 관한 완문 1점, 한글로 된 상하계원 간의 完議 1점이 증빙류 문서로 실려 있다. 증빙류 마지막 문서는 無嗣早夭한 林容洙를 위해 그의 형제자매들이 양자를 들일 것을 임용수의 처 과부 羅氏에게 의론한 입후성문이다. 양자 입후를 위해서는 당사자와 관계자들이 所志, 緘辭, 條目 등을 禮曹에 올려 입안을 발급받아야 하나, 조선 후기에는 양가와 관계자의 합의, 그리고 간단한 成文으로 입후가 성립되기도 하였다. 이 문서 또한 이러한 합의 과정에서 작성되어진 것으로 예조에 올리는 문서는 아니다. 문서의 작성자 기록 맨 처음에 등장하는 林宅洙의 3자 彦父 임용수의 양자가 되었음을 족보에서 확인할 수 있다.
명문문기류로는 分財記, 明文, 牌旨 3종이 수록되었다.
분재기는 총 9점이 실려 있다. 1966년 趙景望 별급문기는 甥姪 임영의 생원시 장원 합격을 축하하며 노비 1구를 별급한 문서이다. 1669년 林一儒 별급문기 역시 같은 이유로 셋째 아들 임영에게 별급한 것이고, 1672년 임일유 별급문기는 임영의 급제를 축하하여 별급한 내용을 담고 있다. 임일유 사후에 형제자매간에 재산을 分執한 1686년 和會文記는 나주임씨가의 경제규모, 조선 후기의 상속의 형태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문서이다. 承重子를 위한 별도의 상속분이 있기는 하지만 임일유의 4남 4녀가 출생순위에 따라 기록되어 있으며, 아들과 딸, 장차 간에 균분상속하는 경향이 강하다. 1712년 분재기는 장자 林恒薵가 어려서는 질병에 시달려 근심스러웠으나 장성하여 두각을 나타내는 것을 기뻐하여 노비 11구를 별급한 문기이다. 分財記 5-1로 수록된 1721년 분재기 배면은 두 건의 입안문서이다. 앞면의 노비를 방매하고 인준받은 기록이다. 1739년 분재기는 종숙 林蘧가 종형이 일찍 사망하여 가세가 빈한해지자 종질자 林迪夏, 林翊夏 형제에게 토지를 허여한 것이다. 1741년 高氏 별급문기는 외동딸인 임적하의 며느리에게 전답을 상속한 문서이다. 연대를 알 수 없는 眞外邊 노비전답 화회문기와 한글 별급문서가 마지막으로 실려 있다. 서문 없이 별급내역만이 나열된 한글 분재기 역시 연대를 알 수 없다.
분재기 다음으로는 田畓 매매 문서인 明文이 9점, 매매를 奴에게 위임하는 牌旨가 6점 수록되었다.
서간통고류는 통문과 혼서만이 실려 있다. 창계선생 신도비 관련 正祖年間 통문과 공주 東學寺 관련 통문 각 1점 외에는 모두 혼서이다. 혼서는 총 11점이 수록되었다.
치부기록류에는 총 16종의 문서가 수록되었다. 稧관련 치부기록인 계안류 문서가 4점 수록되었다. 이 문서는 모두 성책고문서이다. 다음으로는 林弘(鴻)遠이 양천현령 재임 당시 민원내용, 소송내용, 지시사항, 존문 등을 기록해 둔 小錄이 10점 실려 있다. 문서에는 작성주체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이 없는 경우가 많으나 문서의 내용과 전후 상황을 고려해볼 때, 임홍원의 양천현령 재임 시절의 기록으로 판단된다. 이하로는 置簿類, 秋收記, 擇日記, 病錄, 初喪下記, 祭需記, 物目, 座目, 儒生案, 八高祖圖가 소량 수록되었다.
2점이 실린 世系單子 중 첫 번째 문서는 50×65㎝의 비교적 큰 종이의 상우단에 세필로 쓴 것이다. 공손함을 강조한 이러한 문서의 형식은 공신세계단자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형태가 이러하다 보니 전체 문서의 모양을 보여주면 글씨가 판독하기 힘들 정도로 작게 나온다. 그런 이유로 이 책에서는 있는 부분만을 확대하여 보여 주었다. 이미지 하단의 「出」字는 원래의 문서에서는 더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고, 세계 내용을 적은 글씨에 비해 훨씬 크게 쓰여 있다. 이 책에서는 판독을 위해 편의상 원문서를 편집하여, 두 글씨의 크기 비율은 원본과는 차이가 있다. 2점의 각 건으로 실린 서책목록은 하나의 문서일 가능성이 크다. 나주임씨 고문서 수집 당시 분리된 상태라 단정할 수는 없으나 형태상 하나의 문서가 훼손되어 분리된 것으로 보인다.
치부기록류의 마지막 수록 자료는 일기류이다. 임영의 〈政阮日記〉와 임홍원의 〈北征錄〉이 그것이다.
6종 21점이 수록된 시문류 자료는 임영이 직접 지은 것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1680년 詩文과 1680년 제문, 1688년 제문, 1679년 告由文이 그것이다. 또, 연대가 밝혀진 세 점의 試券 또한 임명의 것이다. 1666년 시권은 임영이 생원시 일등을 한 바로 그 시권이다. 임영과 그 四祖를 밝혀 적은 名紙는 분리되어 있다. 채점의 공평성을 기하기 위한 조처이다. 임영이 문과에 급제한 때에 작성한 답안지는 1671년 시권으로 수록되었다. 임영의 신도비 탁본 자료는 내용상의 연대가 1700년대 초반이다. 李德壽가 찬한 시점이 그 때 일뿐, 탁본한 신도비는 근래에 세워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