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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 기원에 대한 연구(퍼온글)
1. 서 론
생일(生日)은 어느 사람이든지 자신의 태어남을 기억하고 일 년에 한 번 때를 정해 생일을 맞은 사람과
그리고 이 생일 자와 관계있는 모든 사람들이 모여 축하하는 날이다.
생일을 축하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태어남을 축하하는 것 뿐만 아니라 앞으로 험난한 삶에 힘이 되어 주겠다는 의미도 있다.
그러나 정확한 생년월일(生年月日)을 모르면 그 사람이 현재 살고 있다는 사실만 확인한 채
그 사람이 어떠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알 길이 없다.
봄인지, 여름인지, 가을인지, 겨울인지, 양력(陽曆)인지, 음력(陰曆)인지 구체적으로 물어야만 그
사람에 대한 이해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연후에 부모님은 누구이며,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가훈(家訓)은 무엇인지 점차로 알게 되는 것이다.
어렸을 때 어머님들께서 곧잘 "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 왔어! "라고 하시는 말을 듣고 아이들은 고민에 빠진다.
우울해진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밤 늦게 집에 들어와 울음을 터뜨리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옆집 누나가 그러는데, 내가 맨날 오줌만 싸고 엄마 말을 안 들으니까 주워 왔다고 하는 거래! 맞지! "
며칠이 지난 후 이 오줌싸개 어린이는 새로운 고민에 빠지게 된다. 엄마에게 달려와 무릎에 얼굴을 파묻으며 묻는다. "
애들이 그러는데 엄마들은 배꼽으로 아기를 낳는다고 하던데..."
아이는 어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아주 우스꽝스러운 질문을 통해 성장해 간다.
사춘기에 이르러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민을 하게 된다. 이성이라던가, 학교성적이라든가, 나의 꿈은 무엇인지...
기독교의 기원을 살피는 것은 이와 같이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먼저 성서의 이야기로 돌아가고자 한다. 야훼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자식을 주신 때가 100세였는데,
세상 사람들은 모두 불가능하고 해괴망칙한 일이라고 놀려댔다.
그러나 기적의 역사는 일어났고 이를 전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주어졌다.
1984년은 천주교(천주교) 200주년, 개신교(개신교) 100주년을 맞는 해로 대대적인 행사를 했다
{1984년을 기점으로 각각 200, 100년을 감하면 천주교는 1784년, 개신교는 1884년이 기원이 된다.
그러나 이글에서 살피려는 것은 이 기원의 근거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살피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 기록된 것은 개신교 100주년이 아니라 기독교 100주년이었다.
천주교 측과 개신교 측은 종교개혁(1517년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을 기점으로) 이후의 분열을 아직도 간직한 채
이삭의 아들 에서와 야곱처럼 남아있다. 야곱은 지금 불과 10살일 뿐이다.
이 짧은 글에서 살피고자 하는 것은 야곱이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을 한 후 그가 새롭게 변화되었고,
후에 이 두 형제가 상봉했을 때 평화롭게 만났다는 성서적 근거로부터 출발한다.
2. 본 론
2-1.천주교의 기원문제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문제에 대한 두가지 주장이 국내,외에서 새롭게제기되고 있다.
{< 가톨릭 교과교육자료집 {국사 - 제1장. 한국 천주교의 기원문제(1)} 한국사목연구소 1991 p 10 >}
그 중 하나는 천진암(천진암)에서 강학회(강학회)를 열었던 해 1779년 설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임진왜란(임진왜란)
{임진왜란은 1592년 4월에 왜군이 부산에 상륙함으로써 시작되었고
유재란(丁酉)은 1597년에 시작되어 1년간 지속되다 토요토미의 죽음으로 끝났다.
< 한국민중사연구회 {한국민중사 1} 풀빛 1986 p 298-303 >} 중
일본군의 종군 사제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가 웅천(웅천)에 발을 내딛은 1594년 설이다.
그러면 1799년 설 { 1777(정유)년을 강학회의 시초로 삼는 것은 1784년 파리에서 간행된 달레(Dallet)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 근거한 것인데,
문제는 달레가 기록한 사료가 다산 정약용{조선복음 전래사에 관한 비망기}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며
정약용의 녹암권철신묘지명에서는 1779(기해)년을 소개하고 있기에 1779년이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 최석우 {한국천주교회의 기원문제 - 한국기독교와 역사 창간호}1991 p 16-17>,
< 가톨릭 교과교육 자료집 {국사 - 제2장 한국천주교회의 기원문제(2)} 한국사목연구소 1991 p 32-33 >}을 먼저 살펴보자
천주교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리기 위한 최초의 형태는
조선사회의 내부적 모순을 타개하고자 했던 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진 서학(서학)이었다.
어느 민족, 국가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형태, 즉 학문으로서 받아 들여진 것이다.
청과 조선을 정기적으로 왕래하던 외교사절단 부연사행(부연사행)은 중국의 수도 연경(또는 북경)을 방문했다.
그 중 일부는 그 곳의 천주교회당에 가 선교사들과 만나기도 했는데,
우리 나라에 전래된 최초의 서학 물품인 곤여만국전도(곤여만국전도)를 가지고 온 사람은 이광정(이광정)이었다.
서학연구의 근거가 되었던 한역서학서(한역서학서)와 서양기물의 조선 유입은 이미 17세기 초에 시작되었다.
{< 한국기독교사연구회 {한국기독교의 역사 1} 기독교문사 1991 p 65 >}
서학을 연구했던 초기의 양반들은대부분 실학자(실학자)였다.
실학은 공리공론(공리공론)을 논하기보다 유학(유학)의 본질, 즉 선진유학(선진유학 또는 원시유학)에 충실하여
진정한 학문을 하기 원했다는 데서 유래한다.
이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하나는 농업중심의 개혁론을 주장하는 근기학파(근기학파)였고
또 다른 하나는 상업중심의 개혁론을 주장하는 북학파(북학파)였다.
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은 농촌문제였으며 토지제도의 개혁을 구체적으로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 실학의 선구자인 유형원(유형원)은 {
반계수록(반계수록)}에서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고 그 토지를 모든 백성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균전론(균전론)을 주장했고,
이익(이익)은
{성호사설(성호사설)}에서 균전제를 대폭 수정한 개혁안, 즉 토지소유의 하한선을 설정하는 한전론(한전론)을 주장했고,
실학의 집대성자 정약용(정약용)은 3
0호 안팎으로 여(여)라는 공동농장을 구성하여 이 여를 단위로 여장(여장)의 지휘하에 토지를 골고루 나누어주고
공동으로 경작, 분배한다는 여전론(여전론)을 주장했다. <한국민중사연구회 {한국민중사 1} 풀빛1986 p 335-336 >}
이들 실학자들 중에 서학의 이(理)적 측면을 강조하는 부류는,
기(氣)적 측면을 강조했던 북학파
{ 북학파는 서양과학과 기술을 적극 도입함으로써 부국유민(부국유민)을 위한 이용후생(리용후생)에 기여하려는 의도를 가졌지만
종교적인 면에서는 서교에 대해 폐쇄적이었다.< 한국기독교사연구회 {한국기독교의 역사 1} 기독교문사 1991 p 67-68 >와는 달리,
조선 서학이라는 하나의 집단을 형성해 갔다.
기호(畿湖)지방의 남인계(南人係) 학자들이며 이익의 제자들이주축 되어 생긴 성호학파(성호학파)
{권철신(권철신), 권일신(권일신), 정약용(정약용), 정약전(정약전), 이가환(이가환), 이 벽(이 벽), 이승훈(이승훈),
이기양(이기양) 등이 그들이다. < 위의 책 p 68 >}에서는
학문으로서만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신앙실천 운동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게 되었다.
1770년에 이르러서는 이 벽(이 벽 1754-1785)의 제자 홍유한(홍유한)이 7일마다 하루씩 노동을 금하고
기도와 금욕생활을 함으로써 신앙실천운동의 최초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성호 좌파(성호 좌파)의 영수이며 유명한 학자인 권철신이 정약전 등 소장학자들과 함께 서울에서 100여리 떨어진 어떤 외딴 절에서 모임을 가졌다.
이벽은 이 모임을 뒤늦게 알고 눈 덮힌 험한 길을 걸어서 강학에 참가했다.
여기서는 보통 강학에서처럼 유교 서적이 연구 검토되었으나 한문으로 쓰여진 천주교 서적들도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이 연구에서 그들은 읽은 것만으로도 마음이 변하기에 충분하여 즉시로 새 종교에 대하여 실천하기에 이른다.
{ 이 벽은 천주공경가(천주공경가)를, 정약전은 십계명가(십계명가)를,
이가환은 경세가(경세가)를 지어 불렀고 매월 7.14.21.28일에는 안식을 취하고 육식을 피하며 이 모든 것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극히 비밀리에 실천하였다. < 달레 / 안응렬, 최석우 {한국천주교회사 상}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P 300-303 >}
이러한 사실을 기초로 하여 볼 때
1779년은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연도이며 천진암은 창립성지이고, 강학회에 참석한 자들은 창립성조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1779년설을 무턱대고 인정하기에 앞서 살펴보아야 할 여러 가지가 문제가 있다.
첫째는 강학의 성격이고,
둘째는 강학에 참가한 자들이 강학 이후에 어떻게 변하였는가 하는 회심의 차원이고,
셋째는 강학의 개최지이다.
강학에서는 한역 천주교 서적 뿐만 아니라 유교서적도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보편적 감정이지만 서양의 모든 것은 거대한 힘이었다.
이러한 힘의 원천을 받아들여 조선사회가 가지고 있는 내부적 모순을 타개하려고 했다면 지나친 비약인가?
그렇지 않다. 강학에 참가했던 자들은 권력에서 밀려난 기호지방의 학자였으며 이들은 성호학파 중에서도 좌파였다.
그들이 천주교에 대한 종교적 욕구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종교적 욕구만으로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을 삼는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러나 그들이 강학 후에 신앙을 실천하는 데 있어 조심스럽게 해나갔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강학에 참가한 자들은
성호좌파의 영수인 권철신의 문하생이였고 이들과 교우 관계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다.
강학에 참석한 자들은 권철신, 정약전, 김원성(김원성), 권상학(권상학), 이총억(이총억), 이벽 등 여섯 명을 들 수 있는데,
1779년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윤하(이윤하), 이승훈, 정약종(정약종), 정약용을 포함시키고 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들은 창립 성조이다.{< 가톨릭 교과교육자료집 {국 사 - 제2장 한국천주교회의 기원문제(2)} 한국사목연구소 1991 p 32-34 >}
그러나 위의 인물 중 김원성이라는 사람은 초창기 교회의 역사를 전해주는 어떤 기록을 보더라도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다. { < 위의 책 p 34-35 >}
강학에는 참석했으나 그 후에 전개된 신앙실천운동에는 참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강학회는 조선 서학파의 실질적 구분을 가능케 했다고 볼수 있다.
학문적 연구로, 또는 혈연, 지연으로 관계를 맺어왔던 자들은 전통적인 유교적 생활습관을 바꾸는 데서 반감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1779년을 한국천주교의 기원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
강학을 했던 장소는 구체적으로 어디일까? 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첫째는 주어사(주어사)이고,
둘째는 천진암이다. 달레는 강학을 열었던 절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는데, 이 문제는 간단한 것 같다. 이 열었던 곳은 한 절 뿐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정약용의 {선중씨묘지명}에는 분명히 강학이 열린 곳을 주어사라고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권철신의 {녹암권철신묘지명}에는 천진암 주어사라고 표기되어 있다.
1779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천진암의 주어사라고 여기지 않고 천진암과 주어사라고 여기는 것이다.
{ < 최석우 {한국천주교회의 기원문제 - 한국기독교와 역사 창간호} 1991 p 19>,
< 가톨릭 교과교육자료집 {국 사 - 제2장 한국천주교회의 기원문제(2)} 한국사목연구소 1991 p 26, 36-42 >
그러나 개신교 측에서는 천진암과 주어사를 모두 강학장소로 인정하고 있다. < 한국기독교사연구회 {한국기독교의 역사 1} 기독교문사 1991 p 69 >}
1779년을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으로 삼아야 된다는 주장은 1970년대에 이르러서 였다.
{ 1779년 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천진암 성지 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변기영 신부이다.
< 변기영 {무영의 순교} 한국 천주교회 창립사 연구소 1990 p 114-116 > }
1779년을 기원으로 삼는다면 한국 천주교는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천주교회의 영세 받지 않은 예비자들을 한국 천주교회의 신자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최석우 신부 등은 그들의 영세 이전 이유로 1779년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카톨릭의 교회법 제204조 2항에 보면
" 교회는 이 세상에서 하나의 사회로 구성되고 조직되어 베드로의 후계자 및
그의 친교 안에 있는 주교들에 의하여 통치되는 가톨릭 교회 안에 존재한다."고 명명하고 있다.
그러나 법적인 제도 조차 마련되지 않은 선교지에서 문제는 이 법칙의 효용성이 문제시 된다.
1784년 9월 경 이승훈이 이 벽에게는 세례자 요한, 권일신에게는 프란체스코 사베리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준 것은 분명히 카톨릭 측에서 인정하는 바와 같이 가성직제(가성직제 또는 가교계제도 1786-1788)이다.
그러나 국내의 교회사학자 최석우 신부와 이원순 교수 등이
1784년을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1779년을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해도
한국 천주교의 신앙전통은 이 때부터 이어진다고 보아야 하고
1770년부터 1784년에 이르는 기간을 요람기(요람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 김웅태 {한국 가톨릭 신앙의 현실 - 한국 그리스도 사상 1집}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1993 p 26 > }
1592년설은 1779년에 비해 논할 가치가 별로 없으나, 국외에서 주장된 것이라 간단히 살피고자 한다.
1592년설이 국내에서 문제가 된 것은
1889년 12월 서강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에서 펴낸 메디나(Juan G. Ruiz de Medina)
{ 1927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출생하여 1940년에 예수회에 입회하고 8년 후 일본으로 파견되었으며 1961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1974-79년까지 일본 야마구찌시의 사베리오 자료관에서 근무하고 1981년 로마 예수회 역사 연구소로 전속되어
일본 기리시단 연구부 책임자로 있다.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를 로마 예수회 역사 연구소로부터 16-17세기에 걸쳐
예수회와 한국과의 관계를 밝혀주기를 요청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 가톨릭 교과교육자료집 {국 사 - 제1장. 한국 천주교의 기원문제(1)} 한국사목연구소 1991 p 10-11 >}
신부의 저서 {한국천주교 전래의 기원(Origenes de la Iglesia Catolica Coreana)} 때문이었다.
메디나는 " 신학의 입장으로 말할 때 1592-1593년은 유아의 교회라 할 한국교회의 탄생의 해임을 부정할 수 없다."고 하고,
1784년을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으로 설정하는 한국 교회사가들은 " 자국의 교회를 위해 거짓 칭호와 영광을 조작 "했다고 감정적 언어로 서문 8면 7행에서 밝히고 있다.
그가 주장하는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일본 예수회 성직자가 활동했다는 것,
둘째, 임진왜란 후 납치된 포로 중 기리시단 조선인 신자가 많이 생겼고 순교자도 있었다는 것이며,
셋째, 전후에 조선으로 돌아와 계속적인 신앙활동을 했다는 것과,
넷째, 일본 예수회나 또는 중국 예수회에 의한 조선 왕국 전교활동이 있었다는 일 등이다.
그러나 이것은 굉장히 심각한 문제이다.
그는 이 책을 기술함에 있어 놓치지 않는 편협성(편협성)을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회의 활동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의 요청에 의해
예수회 일본 부관구장 고메스(P.Gomes)신부가 파견한 스페인 출신 예수회 신부 세스페데스가
종군 군목제(종군 군목제)의 형식을 띠었음을 간과하고 오직 한국 땅에 발을 내딛었다는 사실에만 관심하는 것이다.
{ 19세기의 독일황제 빌헬름 2세는 " 선교사의 피 한방울이 흐르는 곳에 제국의 영토가 늘어난다." 고 했다.
일본을 무력으로 개화시킨 서양열강의 제국주의적 모습을 볼 수 있다. < 조 광 {한국천주교회 200년} 햇빛출판사 1989 p 28 >}
더구나 그가 참고한 사료는
예수회의 온갖 서신(통신문 형식)이 주(주)이고 한국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발간물은 오직 이기백의 한국사신론(한국사신론)과
민경배의 한국 기독교회사(한국 기독교회사) 뿐이고,
박 철(박철)의 연구논문 2편, 이진희(이진희)와 윤민구(윤민구)와 이성일(이성일)의 논문 1편 뿐이다.
그리고 덧붙여지는 간단한 한국인의 증언이 있을 뿐이다. 한국 교회사의 중요한 문제를 논하면서
그 무대인 한국 땅의 일체 기록을 제외하고 올바른 진상이 가능한 것인가?
또 하나의 문제는 조선인 포로들이 기리시단이 되었고 순교(순교)까지 했다는 사실인데,
이것을 한국 천주교와의 연장선에서 생각할 수는 없다.
이는 영국인 청교도(청교도)들이 메이 플라워(May Flower)를 타고 신천지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 교회를 세우고
신앙생활을 했던 것이 영국교회사의 일부분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 가톨릭 교과교육자료집 {국 사 - 제1장. 한국 천주교의 기원문제(1)} 한국사목연구소 1991 p 15, 17-18 >}
차이점이 있다면 청교도들은 자신의 결단에 새로운 삶을 개척했으나
조선인 포로들은 강제성을 띤 상황에서현질서의 아픔을 달래려고 새로운 삶을 개척한 점이라는 것이다.
2-2. 개신교의 기원문제
만주(만주)는 한국 개신교가 이 땅에 들어오는 경로가 되었고 역사의 한장이 되었다.
한국 개신교사에 첫 순교자 { 제네럴 셔어먼(General Sherman)호는 미국 프레스톤(preston) 소유의 중무장상선으로
1866년 9월 2일 양각도(양각도)에서 불타고 이 배에 탔던 사람들은 평양 군민들에게 타살되었다.
이 사건은 신미양요(신미양요 1871)의 계기가 되었다.
< 한국기독교사연구회 {한국기독교의 역사 1} 기독교문사 1991 p 137-141 >} 의 영광을 얻은
토마스(RobertJeremian Thomas) 목사가
1865년 만주 땅 고려문(고려문 corean gate) { 청(청)은 만주 일대를 청 태조의 발상지라 하여 이를 성역으로 정하고
거주민의 유입을 금지하는 한편 조선 측과의 분쟁과 교류를 막기 위해 6개문을 연결하는 장책을 설치했는데
조선의 사신과 상인의 왕래통로를 고려문에 한정시켰다.
이만열 {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 지식산업사 1991 p 36 >} 이란 곳에 가서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도 했다.
본격적인 기원을 논하기 위해서는 스코트랜드 선교사인 존 로스(Jhon Ross 나약한 1841-1915)와 매킨타이어(John McIntyre 마근태 1837-?)를 들어야만 한다.
{ 로스 목사는 한국인 상대의 전도를 위해 1874년 첫 번째로 고려문을 방문했고, 1876년에 두번째 방문을 서간도 한인촌(Corean Villige)은 1884,85년에 방문했다.
김양선 목사는 로스의 열정적 활동에 힘입은 서간도한인촌교회(서간도한인촌교회)가 최초의 교회임(1884년 - 세례교인 75명)을 지적한다. < 위의 책 p 35, 41-52, 57 >}
한국개신교의 기원은 개신교인으로서 세례를 받은 최초의 사람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논한 후에야 가능한 질문이다.
최초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청년{ 세례를 준 매킨타이어는 그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기에, 한국개신교의 첫세례자의 이름은 알 수가 없다. < 위의 책 p 42 >},
백홍준(백홍준)이다. {로스의 제1차 고려문 방문 때(1874) 로스에게서 성서(한문 신약성서)와 훈아진언(훈아진언 Peep of Day)을 받은 상인들은 친구와 자식들에게 나누어 주고 읽게 했다.
백홍준은 아버지가 준 성서를 읽고 종교적 욕구에서 매킨타이어를 찾아 온 것이다.
뒷날 그는 한인촌에서, 의주에서 전도활동을 하였고 투옥(1889-91년 사이로 추정. 1889년에 언더우드가 의주에 갔을 때 33인의 집단세례를 가능케 했다)의 핍박에도 굴하지 않는 전도인의 모습을 지키며, 선교사의 도움없이 의주교회를 이끌어 나갔다.
< 이덕주 {백홍준} 한국기독교사연구회 제19호 1988.4 > } 이때가 1879년이다.
{ 전택부는 {한국교회발전사(한국교회발전사)} p 83에서
1876년 백홍준, 이응찬을 비롯한 4인(이성하(이성하),김진기(김진기))이 1879년에 서상륜(서상륜)이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로스가 1890년에 쓴 {The Christian Dawn in Korea}를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세례를 준 사람은 매킨타이어이고 그가 1880년 10월 1일자 {United Presbyterian Missionary Record}에서는 1879년을 보고하고 있으므로 더 믿을 만하다. < 위의 책 p 28 >}
그리고 이들의 수세에 용기를 얻은 이응찬(이응찬) {이응찬은 이미 1876년에 로스를 만났었다.
그가 압록강에서 물건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었을 때 로스는 그에게 한글성서 번역을 위해 어학선생이 되어 달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 한국기독교사연구회 {한국기독교의 역사 1} 기독교문사 1991 p 144 > } 이 7월에 세례를 받았다.
12월에는 이응찬을 따라왔던 한의사 출신의 친척 청년 이 세례를 받고 의주로 돌아갔다.
이로써 1789년에는 4명의 세례인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들의 세례 후의 활동이다.
이미 김양선 목사는 1884년에 한국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인 서간도 한인교회가 존재 했음을 밝혔다.
{{ . 김양선 목사의 언급은 이미 1884년 전 자생적 신앙공동체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한 셈이다.
확인의 시기는 로스의 방문을 기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885년에 이르러서는 한인촌의 자생적 신앙생활을 반란음모로 이해한 중국인 지주들에게 박해를 받은 후
조선 여러 등지로 흩어지게 되었다. 이로써 한국교회 사상 최초의 디아스포라(diaspora)가 발생했다.
< 이만열 {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 지식산업사 1991 p 52 >}
그러나 이에 감추어진 뒷이야기 1879년부터 1884년 까지의 기간에 한국 개신교의 주춧돌 역활을 한 인물이 올바로 밝혀져야 하는 것이다.
1879년에 세례를 받은 4명은 로스와 매킨타이어를 도와 계속 성서번역을 하면서,
한문에서 한글성서 {최초의 국역성경의 효시는 1882년 3월 만주 심양에서 출판된 <예수셩교 누가 복음젼셔>이다.
< 김중은 {한국어성경 번역의 역사} 기독교사상 1993. 2 P 25 >
로스가 채택한 성서 번역방법은
1) 한국인 번역자가 먼저 한문성서를 한글로 번역하면
2) 그 원고를 그리스어 성서 및 영어성서와 대조하여 수정하고
3) 그리스어 성구사전 및 주석을 참조하여 어휘의 통일을 가한 후
4) 수정된 원고를 정서하여 마지막으로 그리스어 성서와 대조하며 다시 읽어가는 방법이었다.
그리스어 성서나 성구사전을 참조하는 것은 로스의 안식년휴가 기간 중 매킨타이어가 참여하면서 시작되었다.
< 이덕주 {한글성서 번역에 관한 연구 - 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이만열 편저} 종로서적 1992 p 121 >
신약성서의 번역은 예슈강셰쳔일쳔팔빛팔십칠년에 {예수셩교젼셔}이고 발행부수는 5천부 총 339쪽이었다. }로 발간을 하는가 하면,
지방 사투리를서울 표준말로 바꾸어 나가기 시작했다.
일단의 성서가 완성되면 성서를가지고 전도활동을 시작하였다.
홍삼 팔러 갔다가 성경 팔러 돌아온 서상륜(서상륜 1849-1925)은 만주의 스코트랜드 선교사인 로스(J.Ross)를 만나 거듭나는 체험을 했고
1879년 {서상륜의 세례년도는 1962년 이래 김양선의 1879년이 정설이었으나
1985년 이덕주의 1881년 설과 로스의 글에서 근거를 둔 1882년설이 있다. < 이만열 {한국 기독교와 민족의식} 지식산업사 1991 p 66-68 >
자세한 것은 < 이만열 {서상륜의 행적에 관한 몇가지 문제} 한국기독교사연구회 제19호 1988 p 4-25 >를 보라. }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데, 우리는 서상륜의 권서활동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상륜을 살핌으로써 1789-1884년 간의 자치기간(자치기간)
{자치기간이라 함은 선교사(목사)가 없이 평신도 중심, 회중적 성격을 가지고 있던 시기를 말함이다.
실제로 1879년 이후 세례교인들을 중심한 신앙공동체는 매킨타이어 목사를 방청객으로 둔 채 주체적인 신앙집회를 가지고 있음을
매킨타이어의 글 "North China-Newchang"에서 알 수 있다.
< 이덕주 {한국기독교 초기 신앙공동체 형성과정 - 한국기독교와 역사 창간호} 기독교문사 1991 p 35 > } 의 모습을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서상륜 자신은 1874년에 동생 경조(경조)와 함께 홍삼 장사 차 영구에 갔다가 열병에 걸렸는데
매킨타이어의 도움으로 살아났고, 이듬해 1785년 영구 중국인 교회에서 로스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고 증언한다.
{서상륜 자신의 증언은 자신의 고백처럼 '그 때를 자세히 기억하지 못하나 짐작'한 것으로 신빙성은 다소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병을 고쳐준 사람은 의사 헌터(J. M .Hunter)였다. < 위의 책 p 7 >}
그러나 그가 세례를 받은 해는 치료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온 1879년 5월 이후 라고 추정할 수 있는데
이응찬의 경우처럼 그도 세례를 받기까지는 훈련의 기간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이는 바
{ 그가 성서번역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 고향에는 몸을 의탁할 곳이 없게 되매
모든 옛일을 다 떨치고 한 해 후에 다시 그 곳에 갓나이다."(셔선생 상륜의 경력, P 306)라는 고백으로 알 수 있다. 그
는 1881년 5월 만주로 귀환했다.}
로스는 확고한 신앙인으로 성장할 때 까지 기다리라고 충고했던 것이다.
그가 세례를 받은 것은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를 번역한 1882년 3월 이후가 적절한 것 같다.
{ 자료의 한계성으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1882년 봄(5월)이라고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때 <예수셩교요안다복음젼셔>가 3천부 간행되었다.
자세한 것은 < 위의 책 P 7-10 >을 보라. < 이만열 {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 지식산업사 1991 p 66-68 > 참조
.
이 번역 작업에 참여한 이가 또 있었는데, 김청송(김청송)이다.
그는 심양문광서원에서 1881년 9월부터 번역일에 참여하였는데, 그의 역활은 식자공이었다.
여기서 한글로 인쇄된 '최초의 기독교문서'라고 할 <예수셩교문답>, <예수셩교요령>이 10월초에 간행되었다.
김청송은 최초로 완성된 복음서를 가진 전도자로 한인촌을 대상으로 권서를 했다. 이것은 성경인쇄를 위한 시험인쇄였다.
그러나 이것은 각각 수천권이 인쇄되어 이듬해 만주와 일본을 거쳐 한국에 반포되었다.
< 한국기독교사연구회 {한국기독교의 역사 1} 기독교문사 1991 p 150 > 김청송은 1882년 3월경에 세례를 받았다.}
1882년 10월에 그는 로스 부부와 " 함께 엎디어 주께 도와주시며 보호하심을 기도하고 서로 작별"하고 권서인의 일을 시작했다. 그는 전도인의 활동을 통해 한국 최초의 교회 중 하나인 황해도 장연군 소재의 소래교회 { 소래교회는 서상륜에 의해 1883년에서 1884에 설립된 것으로 인정되고 있으나 그는 이 시기에 서울에 전도활동 중이었다. 설립 시기는 1884년 이후인 1885년이 적절한 것 같다. 동생 서경조의 개종시기가 1884년 가을 이후이고, 소래교회초기에 귀중한 일을 경조가 맡았기 때문이다. 서상륜이 소래에 정착하기 시작한 1885년 3월 이후가 설립시기로 추정된다. < 이만열 {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 지식산업사 1991 p 81-84 >} 를 건립한 인물이라고 알려진다.
한국기독교의 뿌리는 만주에서만 발견되지는 않는다.
일본에서 활동한 이수정(이수정)은 성경번역 사상 놀라운 일을 하였다.
1882년 9월에 수신사(수신사) 박영효(박영효)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그 이듬해 1883년 4월 29일에 세례를 받음으로써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세례받은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요한복음 15장을 유교의 감응(감응) 이론의 논리를 빌어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다.
이 신앙고백은 문서로 남아있는 한국 개신교 최초의 신앙고백서이다.
이수정의 갑작스런 일련의 행동은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모색하던 재일 미국 선교사들과 일본 교회에 큰 자극을 주었다.
성경번역은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처음에는 한문성경에 토(토)를 다는 작업을 하다가 1885년 2월에는 <마가복음>을 미국성서공회에 의해 요코하마에서 6천부가 간행 했는데,
일본을 걸쳐 한국에 입국한 아펜젤러, 언더우드 손에는 이<마가복음>이 쥐어져 있었다.{< 한국기독교사연구회 {한국기독교의 역사 1}
기독교문사 1991 p 157 >, <이만열 {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 지식산업사 1991 p 176, 447 >}
그가 일본에서 한 활동은 성서번역 이외에 전도와 선교사 초치 운동이었다.
이수정의 노력에 의해 김옥균이 데리고 온 유학생들 사이에서도 신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1883년 말에는 7,8명의 한국인 수세자가 있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요리문답반 주일학교 모임을 열었고 후에
성경연구회로 발전하다가 주일마다 설교자를 초청하여 정기적으로 예배를 가지게 되었다.
이것이 토오쿄오에서 세워진 최초의 한인교회였다.
그런데 어떠한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미국 선교사에게 {그는 맥크레이(R. S.Maclay)를 김옥균과 연결시켜
한국을 방문케 하였으며 맥크레이는 고종에게서 교육과 의료선교 실시의 윤허를 받아내었다.
< 채현석 (이수정론) 한국기독교사연구 제17호 1987 >
이 때 윤치호가 통역을 했고 윤치호는 후에
1891년 미국신학생해외선교연맹(Inter-Seminary Alliance for Foreign Missions)에서 강사로 참석했는데,
그는 이 때 밴더빌트 대학에 재학 중이었다.
< 한국기독교사연구회 {한국기독교의 역사 1} 기독교문사 1991 p 188 > } 한국선교를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갑작스런 변절은 그의 이전 활동에 비교할 때 주변사람들을 당혹케 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1884년말이 되면서 일반 사회와 정치적인 일에 관심을 두게 되더니
1886년 6월 귀국하기 전까지는 루미스(Henry Loomis)의 표현을 빌린다면 " 그는 항시 그리스도인으로 행동을 취하지 않았습니다."가
그의 적절한 생활이었다.
이는 조선 내의 갑신정변(1884년)의 여파였으며 그의 마음 속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요소가 되었을 것이다.
{ < 한국기독교사연구회 {한국기독교의 역사 1} 기독교문사 1991 p 159-166 >
그의 귀국은 그에게 불리했다.
갑신정변의 실패는 정부와 민중에게 수구.보수적 태도를 취하게 하였고 온건.개화파는 감시,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 이덕주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개종 이야기} 전망사 1990 p 95-96 >,
자세한 것은 < 채현석{이수정론} 한국기독교사연구 제17호 1987 >을 보라.}
1885년{ 미감리회에서는 아펜젤러(Henrt. Gerhart. Appenzeller 1858-1902) 목사 부부가 언더우드와 같은 날,
같은 때에 발을 조선에 내딛었고 5월 1일에 스크랜톤(Wm.B. Scranton)이, 6월에 스크랜톤(M.F. Scranton)이 합류했다.
< 한국기독교사연구회 {한국기독교의 역사 1} 기독교문사 1991 P 185-186 > 그
러나 이들 선교사보다 먼저 한국 땅에 발을 내딛은 사람은 의료선교사 알렌(H. N. Allen)이었다. }
4월 5일(부활주일) 오후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한 북장로회 선교사 언더우드(Horace.Grant. Underwood 1859-1916)에게서
한국 선교사로서의 솔직한 고백을 들을 수 있다.
" 그 무렵은 씨를 널리 뿌릴 시기였음에도 동시에 우리는 첫 열매들을 거둘 수가 있었습니다
."{ H.G. Underwood. {Call of Korea} New York, Fleming H. Revell Company,1908, p 136}
이는 이미 목숨을 건 한국인 교인들의 전도활동을 인정하는 증거이다.
선교사들의 기록 속에 언급되고 있지 않는 수많은 무명의 전도인, 매서인(Colporteur, 매서인),전도부인들의 활동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들에게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권서활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료배부를 절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쌀, 팥, 무, 감자 등의 물물교환을 하는 방법이 새로 등장했는데,
이는 조선사람들이 공짜로 받은 것을 귀중히 여기지 않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라고 홉즈(T. Hobbs)는 회고한다. {< 위의 책. p 61 >}
3. 결 론
한국에서의 기독교 선교는 능동적인 소수 한국인 구도자들의 활약에 힘입어 복음이 수용되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선교사들의 본격적인 선교활동이 전개되었다는 점을 특징으로 삼고 있다.
이것은 천주교나, 개신교회나 마찬가지 현상이었다.
한국 천주교는
1784년 9월
이승훈{ 이승훈의 아버지 이동욱이 동지사 서장관으로 임명되어 함께 북경으로 갈 때
이 벽의 부탁으로 이승훈은 북경 북천주당의 그라몽(J. J.de Gramont 가리몽) 신부에게서 베드로란 세례명을 받았다.
이 때가 1784년 정월 말경 귀국 직전이었다. < 한국기독교사연구회 한국기독교의 역사 1. 기독교문사 1991 P 71-72 >}
이 이 벽과 권일신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비롯되었다.
이벽에게는 조선 천주교회의 예비자라는 의미에서 세례자 요한으로, 권일신에게는 프란체스코 사베리오라는 세례명이 각각 주어졌다.
이 세례가 있은 이후로 자생적 신앙공동체가 형성되며 평의회적 조직을 지켜나갔다.
한국 개신교는
1879년을 기원으로
매킨타이어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은 4명, 즉 백홍준, 이응찬 등과 1882년에 로스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은 김청송,
서상륜이 권서 인으로서, 성경 번역인으로서 한국개신교의 기초를 닦았고
이들의 노력으로 1885년 { 민경배 교수는 소래(솔내)교회의 기원을 1884년으로 보고 순수한 우리 손으로 창립된 '선교지에서의 교회'로 부른다.
그러나 이 교회에는 세례, 설교가 없었고 설령 있었다 해도 치리나 성직적 권한의 것은 아니었기에 우리나라 교회의 시원으로 단정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의기원문제. 한국기독교와 역사 창간호. 1991.7 p 32 >
그러나 이덕주는 {한국 기독교 초기 신앙공동체 형성과정}에서 교회를 한국인 고백신앙인들이 조직한 공동체로 인정한다.}에는
소래교회가 탄생하였으며, 정확치는 않으나 1889년에 언더우드가 의주를 방문했을 때 이미 이 곳에는 자생적 공동체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887년 이후 { 1887년은 감리교, 장로교의 조직교회로서 정동장로교회(후에 새문안교회)와 정동감리교회가 생긴 해이다.
< 이덕주. 한국 기독교 초기 신앙공동체 형성과정. 한국기독교와 역사. 창간호. 1991.7 p 41 > }
국외에서 시작된 한국 기독교의 구심이 국내로 옮겨지며 한국교회는 한 교회를 형성하지 못하는 우를 범했다.
그것은 장로교와 감리교라는 두 교파로 나누어진 상황과 그리고 여러 교파의 선교과정에서 보인 지역 구분으로 인한 분파현상이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들의 주체적 활동이 올바르게 평가되지 못했다. {< 위의 책 p 48 >}
한국에 들어온 그리스도교 신앙은 여러가지의 모진 핍박과 박해 속에서도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면서 독특한 신앙전통을 이루어냈다.
이 신앙전통은 우리들의 마음 밭 속에서 이미 결실을 얻었다는 증거이다.
이 결실은 영아소동 후의 스크랜톤의 표현대로 '민중 시험기'(the time of probation with people)를 겪은 까닭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100세에 얻은 자식이 자랑스럽게 자라고 있구나' 하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걱정하며 자식을 산 제사 지내라는 야훼 하나님의 명령이 오늘도 저 멀리서 들려오는 듯하다.
| 참고도서 |
가톨릭교과교육자료집 {국 사}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1
김웅태 {한국가톨릭 신앙의 현실- 한국 그리스도 사상 1집}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1993
김중은 {한국어 성경 번역의 역사} 기독교사상 1993. 2
달레 / 안응렬, 최석우 {한국천주교회사 상} 한국교회연구소 1982
민경배 {한국기독교의 기원문제-한국기독교와 역사 창간호} 기독교문사 1991
변기영 {무영의 순교} 한국천주교회 창립사 연구소 1990
이덕주 {백홍준} 한국기독교사연구회 제19호 1988
이덕주 {한국기독교의 초기 신앙공동체 형성과정-한국기독교와 역사 창간호}
기독교문사 1991
이덕주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개종 이야기} 전망사 1990
이덕주 {한글성서 번역에 관한 연구-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이만열 편저)} 종로
서적 1992
이만열 {서상륜의 행적에 관한 몇가지 연구} 한국기독교사연구회 제19호 1988
이만열 {초기매서인들의 역활과 문서선교 100년} 기독교사상 1990.6
이만열 {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 지식산업사 1991
전택부 {한국교회발전사} 대한기독교출판사 1987
조 광 {한국천주교회 200년} 햇빛출판사 1989
최석우 {한국천주교회의 기원문제-한국 기독교와 역사 창간호} 기독교문사 1991
채현석 {이수정론} 한국기독교의 역사 제17호 1987
한국민중사연구회 {한국민중사 1} 풀빛 1986
한국기독교사연구회 {한국기독교의 역사 1} 기독교문사 1991
H. G. Underwood. {Call of Korea} New York Fleming H. Rev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