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에는 모스크바 올림픽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방 자유진영 국가는 이 올림픽에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공식적인 이유는 소련의 아프간 침공에 대한 항의...
소련에서 처음으로 개최되는 올림픽에 서방국가의 대거불참...^^
소련으로선 완전히 김빠지는 올림픽이었죠..
우리나라도 당연히 참가하지 않았는데요...
여자농구의 경우에, 1979년 세계선수권대회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이때 아마 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하지 못했었던 것 같은데요..^^..
구기종목 중에는 여자핸드볼만 유일하게 출전권을 땄었다는..^^
1980년에는 또 제 8회 ABC 대회가 있었습니다.
박찬숙, 강현숙, 정미라, 박진숙, 김화순 선수 등이 출전해서 우승을 했죠..^^
센터 하나에 포워드 둘, 가드 둘.. 상당히 안정된 시스템이죠..^^
사실 이 당시에는 여자농구에서 가드 두명을 기용하는 경우가 많았죠..
그 당시에는 포인트 가드라는 포지션이 지금처럼 명확하게 구별된 것 아니었지만, 리딩가드라는 개념은 분명히 있었구요..
대체로 가드등 중에 슈터한명이 있었죠.. 강현숙 선수가 슈터였습니다.
1981년에는 특이사항을 찾을수가 없구요..^^
아... 삼성전자여자농구단(후에, 동방생명→삼성생명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죠)이 언제 창단했죠?
김화순 선수가 삼성전자로 입단하게 됩니다..
삼성전자는 동방생명으로 이름을 바꾸게되구요, 90년대 들어서는 삼성생명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지요..
1982년에는 제 9회 ABC 대회와 아시안게임이 있죠..
연초부터 신동파 대표팀 감독은 장신포워드 한 명을 찾는다고 광고(?)를 했다는군요..
80년 대회이후 강현숙 선수와 정미라 선수가 은퇴를 했습니다.
포인트 가드자리에는 박양계 선수가 있었지만, 나머지 한자리가 비는 거죠..
센터 박찬숙
포드 김화순, 박진숙
가드 박양계...
마땅한 장신 포드가 없다면
가드로서 홍혜란이나 전미애 선수를 기용하는 방안 대두되었구요..
포드로서는, 차양숙 선수가 낙점을 받게되고, 장신포드 권명희 선수가 주목을 받기도 하죠...
그래서 그해, ABC 대회에서 우승을 하게 됩니다..
아슬아슬한 역전우승...
전미애짱님.. 그 당시의 감격을 다시한번 재현해 주실 수는 없는지요?
그러나, 82년 인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는 우승을 놓치게 되죠..
중국(당시는 중공)의 장신벽, 특히 진월방 선수라는 괴물같은 선수가 나타나게 되죠...
남자농구는 금메달을 따죠... 이충희, 박수교, 임정명, 신선우, 신동찬..
주전중에 190cm가 넘는 선수가 가드인 신동찬 선수 한명 밖에 없었음에도, 2m대의 중국을 꺾었죠..
놀랍죠..
그 이후에는 2002년이 돼서야 아시안 게임에서 중국을 꺽죠..
한편, 그 당시는 태평양화학이 무적함대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는데요..
박찬숙, 권명희, 차선영, 홍혜란, 홍영순.... 최양임 선수가 후보로 뛸 정도죠..
그 자체로 국가대표팀이죠..^^
몇 연승을 했더라???
태평양 무적함대였죠..
그 외 1982년 당시 여고농구가 흥미를 끄는데요..
선일여고의 이미자 선수가 졸업을 하고 (동방생명 갔습니다)...
문경자(3), 임삼숙(3)이 버틴 수원여고,
최경희(2), 신기화(3), 염미숙(3), 박기례(2) 선수가 버틴 은광여고,
성정아(1), 박정숙(3)이 있는 삼천포여종고...
이런 학교들이 전국대회에서 자웅을 가리게 되죠..
그리고, 조문주(2) 선수가 있던, 성덕(덕성인가??)여고도 우승권이었구요...
수피아 여고에는 가드 이형숙 선수가 있었죠...
그래도, 최강은 삼천포랑 수원이었다고 생각하는데요...
삼천포에는 1년생 슈퍼센터 성정아가 있었구요, 3학년에 박정숙 선수가 있었죠..
박정숙 선수는 지금의 삼천포 농구단 감독님이시죠..
그리고, 수원의 더블포스트 문경자 임삼숙...
문경자 선수는 점프력이 좋았구요, 임삼숙 선수는 슛이 정확했죠..
문경자 선수는 동방생명으로, 임삼숙 선수는 태평양에 입단하죠..
당시 선일여고에는 190cm의 이은석 선수가 1학년에 있었고, 박찬미 선수도 있었죠..
그러나 번번히 삼천포에 무릎을 꿇었죠..
당시 이은석 선수는 고교 1학년생으로서 키가 190으로 아주 좋았는데요..
고등학교때 이 선수를 제대로 못키웠죠..
체력이랑 기본기가 많이 뒤쳐지는 걸 고등학교때 보강못한거죠..
나중에도 크게 빛을 못 보죠..
사실 선일여고 스타일은 개인기량을 키우기 보다는
당장 학교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선수로 키우는 시스템이라고나 할까요??
포지션이 중복된다거나, 당장 실전에 기용할 수 없더라도 장래 선수의 가치를 보고 선수를 키워줘야 하는데... 쩝..
선일여고 출신중에 성공한 케이스는 이강희, 전주원 선수정도 ??
오미숙, 서경화 선수도 제대로 못컸고, 이희주 선수도 아깝고, 조인현, 한현선 선수도 선수생명이 길지가 않았죠...
이런점에서 동주여상과는 대조적이죠..
그 당시 청소년 농구에서는, 2m2cm의 장신 김영희 선수가 있었구요..성정아, 이미자 선수등이 같이 뛰었는데요, 중국에게 졌습니다.
남자청소년 농구는, 유재학, 김유택, 허재, 강정수 등이 있었죠..^^
1983년에는 세계선수권대회가 있었습니다.
대규모 선수교체,, 신인선수들이 대거 등용되죠..
성정아 선수를 국가대표로 선발할 것이냐 말 것이냐가 논란이 되기도 했는데, 아직 어리기 때문에, 일단 청소년 대표로만 기용하기로 했다죠..
이듬해 올림픽에서 비밀병기로 키울려고 했나요??... 글쎄요..!!
주전들이 대거 은퇴를 해서, 고전이 예상됐었는데요,
그래도 4강에 들게 됩니다.
우승은 소련, 미국이 2위, 3위가 중국.. 한국은 4위를 하게되죠..
그 대회 3, 4위전에서 또다시 그 웬수같은 거인 진월방 선수를 만나게 되는데,
초반에 김영희 선수랑 권명희 선수가 이 선수를 잠깐 막기도 했지만,
박찬숙 선수의 부담이 너무 컸죠..
저는 개인적으로 83년 세계선수권대회 3, 4위전을 다시한번 보고 싶은데..^^
쩝...
이당시까지만 해도 한국 여자농구는 세계 4강에 드는 실력이었죠..
그리고, 1983년은 농구대잔치가 시작되는 해죠...
배구는 백구의 대제전이라고 했던가요?
82년에 축구와 야구를 프로화하고, 실내스포츠를 처음으로 리그화 했죠..
3차 대회랑 챔피언 결정전 까지 있는 대회 중에 이듬해 LA 올림픽에 대비해서 국가대표들은 1, 2차 대회만 참가했죠...
김영희 선수의 한경이 최다 득점기록인 52점, 54점의 기록 등이 이때 만들어지죠..
원년의 챔피언전은 동방생명과 코오롱의 대결이었는데요...
김복순, 정명희, 전숙, 우은경 선수 등이 뛰었던 코오롱이 우승을 하게되죠..
휴... ~~ 다 짚어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대략 역사만이라도 짚어봤다고 생각합니당..
보충할 것 있으면 보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