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잇, 할아버지는 바보야. 바보 할아버지!”
데이빗은 입술을 뾰족이 내밀고 할아버지 종수 씨를 빤히 쳐다 본다
“허허허”
그나저나 종수 씨는 데이빗 말에 개의치 않고 호탕하게 큰소리로 웃었다.
“그놈 참, 귀엽기만 하는구먼.”
종수 씨는 슬그머니 데이빗 머릿결을 빗질하듯 손가락으로 쓸어 만진다.
“싫다구!”
데이빗은 미국에서 태어났다.
데이빗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국 사람이었고 미국 유학 중에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일 년에 한두 번씩 우리나라에 왔다, 그리고 데이빗을 낳은 후 해마다 오긴 했지만 며칠 있다 떠나고 해서 데이빗과 종수씨 는 서먹했을 뿐이다.
첫 손자 데이빗이 우리나라 나이로 여섯 살이 되었다. 데이빗은 영어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나라 말을 제법 했다.
더구나 생각보다 데이빗은 한국을 좋아했고 할아버지를 만나러 간다는 것을 제일 큰 기쁨으로 알았다. 많이 좋아하여 한국에 오면 미국에 가기를 싫어할 정도였다. 종수 씨는 그것이 신기하고 기특하여 삶의 큰 보람으로 크게 기뻐하였다.
데이빗이 공항에 도착했을 때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다가 금방 웃음 띤 얼굴로 아빠 엄마의 손을 잡고 팔짝팔짝 뛰며 좋아하던 것이 눈에 선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처음 만났을 때 고개를 갸웃거리며 할아버지와 할머니 얼굴을 눈이 빠지게 쳐다보고 또 쳐다보고 혼자 뭐라고 중얼거리곤 했다.
데이빗은 종수씨의 하나밖에 없는 손주다.
“바보 할아버지!”
어느날 종수씨는 깜짝 놀랐다. 처음 그 소리에 데이빗이 누굴 부르는지 둘레둘레 하였다. 그런데 그게 자신을 부르는 거라고 알았을 때 웃음이 빵 터져 나왔다.
‘아니, 언제 쟤가 그런 소리를 배웠단 말인가!’
그저 귀엽기만 하였다. ‘바보 할아버지’라 불려도 그저 좋아하는 종수씨는 정말 자신이 데이빗 앞에만 가면 바보 할아버지가 되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였다.
데이빗이 할아버지에게 건넨 ‘바보 할아버지’의 뜻이 과연 어디 있나 종수씨는 얼마간 연구를 하기까지 하였다.
사실 바보 할아버지라고 부른 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바보’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진짜 할아버지를 낮추거나 업신여겨서도 아닐 것이다.
데이빗이 처음 배운 한국말 몇 마디 중에 ‘바보’라는 말이다. 흔히, 나쁜 말부터 배운다는 것을 아이들이 말투나 행동에서 알게 된다.
사실, 종수씨는 손자에게서 바보 할아버지라고 불리어도 괘씸하다거나 섭섭하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어찌나 손자가 예쁜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만 같았다.
종수씨의 딸 마루는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이었다. 공부도 잘하고 하는 매사 나무랄 데 없어서 키우는 동안 늘 기쁨을 주는 아이였다.
어느 날 다 자랐다 했더니, 유학하겠다는 거였다. 유난스레 공부하기를 좋아하던 딸아이의 유학을 말릴 수도 없고 반대도 못 한 채 그냥 보내게 되었다. 학비는 물론 어지간한 생활비도 본인이 다 벌어서 하겠다는 조건을 붙였다.
그러던 어느 해, 결혼하겠다는 남자를 데리고 한국에 온 것이다. 다행이라면 다행으로 한국 남자를 만난 것이다. 그러나 외모는 한국인인데 모든 행동은 미국인과 다름없었다.
미국에서 태어난 재미 교포 2세였고 서툰 한국말에 종수씨는 사위와 둘만 있는 자리는 되게 불편하였다. 서로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해 답답하여 그냥 웃는 얼굴로 앉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용케도 데이빗은 우리말을 꽤 잘하는 것이 기특할 따름이었다.
“바보 할아버지, 나 오늘 수학 배웠어, 할아버지에게 가르쳐 줘?”
종수씨는 가슴이 뜨끔하였다, 손자 데이빗이 수학을 배웠다는 게 왜 가슴이 뜨끔한지를 지난번 일에서 느낀 것이 있다. 지난번에도 수학을 배웠다면서 조금 서툴게 물었다.
“1+1은 답이 뭔지 알아요?”
그때 종수씨는 말했다.
‘아유, 어려워!’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것이다.
데이빗은 멀뚱히 종수씨를 올려다보며 자기의 머리를 좌우로 흔들흔들 흔들었다, 그리고 강하게 말하였다.
‘노, 노!’
종수씨는 그 뽀루퉁한 데이빗 입술이 얼마나 귀엽던지, 얼굴에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데이빗은 왼손을 들어 손가락을 두 개 종수씨 얼굴에 갖다 대었다. 그날 일이 떠올라 다시 얼굴이 붉어지도록 웃었다.
데이빗은 벌떡 일어서더니 종종걸음으로 나가더니 서재에서 얇은 스케치북을 들고 왔다.
“자, 할아버지 이거 봐.”
데이빗은 아주 서툰 말투와 서툰 글씨고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데이빗도 이젠 말로 해선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됐는지 글을 써서 가르쳐(?) 줄 생각이었던 것 같다.
종수씨의 얼굴에는 기쁨의 미소가 한 가득 떠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