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 계절의 문제작 ■ 계간평 <열린시조 1998년 겨울호>
한 벌 뿐인 목숨과 불 켜든 단청
이 재 창 (시인)
최근 시조단에는 ‘껍데기論’이 무성하다.
아직까지 시조의 형식은 견고하다. 그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한 견고함 속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며 발전하는 것은 모든 문학장르의 특성과 동일하다. 그러나 그 고정된 형식의 한계를 뛰어 넘지 못할땐 시조의 발전은 이제까지와 같이 정체된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다.
시문학 98년 10월호에 실린 전원범의이달의 시조, 무엇이 문제인가에서자유시 흉내내기의 경계의 월평은 시조단의 전체를 도외시한 단편적 이론에 불과하다고 생각된다. 그가 말한 율독시로서의 형식적 특성은 시조를 창작하는 시조시인에겐 물어볼 필요도 없는 기본사항이며 전제조건이다. 형식적 과제의 긍정과 부정은 그가 말한 것처럼 아직도 다양한 실험이 필요하며 금기와 고정화된 관념의 해체 과정을 통해서만 시조의 발전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단시조 연시조 엇시조 사설시조 등의 변화와 시대적상황의 수용을 통하여 아직까지 그리고 몇천년동안 이루어 질지 모를 형식적 실험과 시도를 매도하면서 전위적 또는 진보적 자세 운운한 것은 아직까지 시조에 대한 다양성의 몰이해와 지식인 문학의 소시민적 발상을 가진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을 그 누구에게도 강요할 그 무엇도 없다. 모두다 일정한 관문을 통과한 시인임에 틀림없다. 그가 말한 자유시적 발상법이 무엇인지, 그가 말한 시조의 현대화가 무엇인지 다시 물어보고 싶다. 시조에 있어서 행기술은 시인 자신의 몫이다. 그리고 이제는 보편화된 양식이다. 자유시인지 시조인지 구분하기 어려울만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의 시조에 대한 무지의 소신일 따름이다. 진정 프로정신이 결여된 시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밖에 해석할 수가 없다.
전원범의 그의 작품도 그러한 형식적 문제를 따지면 결코 자유로울 수 없으며, 시조시인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다. 최근에 발간된 그의 시집맨몸으로 서는 나무에 실린 10여편의 시조도 자유시처럼 보이려고 노력하는 하나의 부류에 속할 것이며, 관념으로 덧칠된 일부의 작품도 본인이 말한 것처럼 비시조적 특성을 보이는 시조문학의 자존적 입장에서 간과할 일이 아닐 것이다. 그의 작품 <이제 남은 것은>의 1연 //강이 떨리며/다가오고 있다/하늘이 흔들리며/다가오고 있다/혼자서 들길을 갈 때/가만가만/다가오는 가을.// 또다른 작품인 <금강초롱꽃> 1연 //풀빛 무늬에/생각이 닿아/가을날 호올로/오솔길을 가다가/가만히 울리는 소리/방울 소리를/듣는다.//을 볼 때 우리는 그의 작품에 확연히 드러나는 자유시 흉내내기의 전형과 율독시로서의 비시조적 특성을 한 눈에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고 시대성을 반영한 것도 아니다. 작품 그대로 서경시에 불과하다. 또 그가 말한 행배열에 있어서는 한미자 시인의 <밤비>를 지적 했는데 그것은 정말 터무니 없는 억지에 불과하다. 그의 인용작보다 훨씬 시조답게 보인다. 시조인지 자유시인지 구별 못하며 창작하는 그가 시조단에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가만히 앉아 있는게 차라리 낫지 않았을까 하는 염려마저 든다.
그가 말한 일정부분의 일탈행위도 나름대로의 보편성를 띠면서 시조단의 창작문화 속에 점차 자리매김이 되는 현상은 시인 자신의 패턴의 다양성과 그 분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충분히 설명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나의 패턴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시도되는 시조시인들의 창작의 자율성은 하나의 경직된 체계와 흑백논리적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현 시조단에서 중요한 역할을 분명히 하리라고 믿는다.
지금 필자가 쓰려고 하는 것은 이 좁은 지면에 그와 왈가왈부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진정 중요한 화두는 시조라는 그릇에 무엇을 담느냐는 데 있다. 옛시조도 대부분 당대적 상황을 인식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21세기를 눈앞에 두고서 시대적 현실을 외면한다는 것은 문학인으로서의 복무자세가 아직까지 미흡하다고 생각되어 진다. 하지만 이 글이 그에 대한 인신공격은 아니라고 밝혀 둔다. 그가 말한 시조의 단편적 생각들에 대한 필자 또한 단편적 사고일 수 있지만 그의 생각이나 필자의 생각 또한 다를 수 있다는 점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회가 있다면 다시 한번 이야기 할 수 있는 자리가 있을 것이므로 이젠 접어두고 지난 계절의 작품을 살펴보자.
▲이한성, 「아파트 1」(《열린시조》가을호)
옆집 노인 기침에도 술잔처럼 흔들렸다.
문명의 이기 속 병든 도시 절정에서
이제는 퇴화해 버린
감각을 깨운다.
눈만은 언제나 멀미를 앓고 있다.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우기의
쥐처럼 무너짐을
예감하는 것일까.
공중에 떠서 사는 발바닥은 젖어있다.
무등산 흙빛으로 애써 밟아 보지만
자꾸만
기우는 세상
온몸에 힘이 든다.
현대인들은 새장처럼 갇혀 아파트 문화에 익숙해 산다. 그러나 산업화된 도시에서 인간과 자연의 호혜적인 상호작용과 그 조화로운 끈이 끊어진 지 오래이다. 생산력 수준이 높은 사회일수록 자연전유의 방식이 더 집단화․사회화되어 있어,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자연과 직접 접촉하지 못한채 도시생태계의 인공적 환경에 둘러 싸여 생활하게 된다. 옆집 노인의 기침에도 술잔처럼 흔들리는 아파트의 세계, 병든 문명 속 이제는 퇴화해 버린 감각은 아파트의 프라이버시 욕구에 적절하게 부응하는 주거양식으로서 각 방을 단위로 프라이버시가 확보되는 구조이지만 실제로 우리가 사는 아파트는 그에 대한 보장을 해주지 못한다. 대부분이 부실투성이 인 까닭에 좌우 옆집이나 위 아래층에 사는 사람들은 매우 조심스럽게 행동할 수 밖에 없다.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자리를 옮기며 멀미를 하는 눈. 공중에 떠서 사는 발바닥과 자꾸만 기우는 세상은 온몸에 힘이 들 수 밖에 없다. 위 시는 시인이 느끼는 문명 이기의 생활적 느낌과 그 대상에 대한 외적 체험을 아파트라는 그 좁은 환경에 대비 시킴으로서 세상을 직시하는 법을 터득한 것처럼 보인다.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느끼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본모습을 보여주는 실감나는 좋은 작품이다.
▲이해완,「담쟁이」(《열린시조》가을호)
내 삶이 아닌 것들은 왜 저리 찬란하냐
한 점 바람에도 나는 늘 위태로운데
백목련
이 봄에 벌써
절정에서 타는구나.
오늘도 나는 나를 딛고 스스로 올라서서
아무도 손내밀지 않는 빗장걸린 이 세상을
실핏줄 터진 손으로
부단히 열고 있다.
피터져 얼룩진 삶 밑그림으로 깔아두고
초록, 생명의 빛깔 찍어 암각화를 새긴다
내 잠시 머무는 지상,
한 벌뿐인 목숨으로.
위 시에서 담쟁이는 시인 자신의 모습이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의지의 표출로 보인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의 구체성 속에서 인간을 이해하고자 할 때, 삶의 도정에 승차한 자신의 부단한 인식의 세계를 던짐으로써 스스로를 만들어 나가는 것 외에 다른 존재방식은 없을 것이다.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에 대한 대비를 통한 자신의 위태로움, 그리고 피터진 얼룩진 삶과 생명의 암각화를 새기는 지상에서의 한 벌 뿐인 목숨은 시인의 내면에 각인된 절실한 삶의 의지와 아무도 손내밀지 않은 그림자를 간직하고 있다. 이해완의 시는 사르트르의 말처럼 이러한 자신의 삶에 대한 그림자를 갖는 일은 자아가 세계속에서 엄존하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며, 그림자를 보여주는 일은 세상을 지배하는 세력 앞에서 자아의 존재를 떳떳이 드러내는 것이다. 위 시의 3연에서 나타나는 시인의 의식은 오히려 역설적인 밝고 희망적인 분위기를 환기 시킨다. 이지적인 상황 판단과 담쟁이라는 식물에 생명의 혼을 불어 넣은 진지한 시적 태도는 모두 본받을 만한 잘 정돈된 삶의 사색이며 활력이다.
▲문희숙,「홍수」(《중앙일보》1998, 8, 27)
가던 길 끊어지고 망설임도 떠내려갔다
세상의 골짝에서 숨어 살아온 분노들이
황토빛 목젖을 열고 마을을 점령했다
플라스틱 꽃들이 잠시 이국어로 위로할 동안
새로 그린 지도 위엔 종기처럼 섬이 떠돌고
그 상처 걷어내려는 송사리떼 분주했다
나는 밤새 기슭을 주억거리는 종이배였다
쓸쓸히 나를 세우던 들판도 집도 사라진
확성기 위험경보만 출렁이는 생애의.
인간의 꿈은 본질적으로 물질적인 것이다. 올 여름 중부지방의 대홍수는 수백여명의 인명 피해와 엄청난 재산피해를 가져왔다. 물의 힘, 자연의 위대함 앞에 인간이 무릎을 꿇는 순간이었다. 문희숙 시인은 이러한 물의 상상력의 절대적인 힘을 발견하게 됨으로써 세상의 분노들이 마을을 점령한 시의 물질화에 성공하고 있다. 위 시에서 나타나는 물의 이미지는 물질적 상상력이 무의식의 세계에서 그 상상력을 지배하는 물질에 머무르지 않고 더 능동적이 되어 인간의 의지력을 지배하게 되는, 인간의 의지력에 대한 적 또는 그 대립자로서 나타난다. 뚝이 터진 들판은 종이처럼 섬이 떠돌고, 무엇인가 정복하고 넘어서고자 하는 자연의 인간의 의지력에 대한 도전으로서 나를 세우던 들판도 집도 사라진 물로 표현하고 있다. 국가라는 카테고리 안에서의 시인의 간접 체험은 자신의 내면에 깊숙히 인식된 존재의 깊고 어두운 심연, 즉 죽음과 파괴라는 명상의 이미지로서 확성기 위험경보만 출렁이는 생애로 나타난다. 우리 어릴적 고향에서 보았던 시냇물이나 강물에서 물고기 잡던 시절의 원초적 감정의 물의 이미지가 아닌 시대적 현실과 물질화에 성공한 물의 이미지가 어떤 공격 의지에역동적으로 결속되어 시적 현장감을 더해 준다.
▲정순량, 「클릭」(《현대시조》가을호)
마주 앉아 속삭이며
속 마음을 풀어 내고
생각도 색깔 입혀
지구촌을 떠돌다가
광대한
정보의 바다
요지경 속
엿본다.
현대인들은 익숙하고 재빠르게 자판 위에서 손가락을 운용한다. 지구상의 모든 정보들이 텔레비젼보다 더 작은 화면속에서 자막으로 떠오른다. 이러한 컴퓨터 언표들의 공간 속에는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속마음이나 생각들이 색깔처럼 다양하게 광대한 공간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그 공간의 세계는 균열, 빈틈, 교차, 엇갈림, 중첩 등을 포함하고 있는 복잡한 공간이다. 클릭되는 순간마다 변화무쌍한 현대사회의 인식의 깊이가 가져오는 고양과 소외, 인식의 팽창이 가져오는 풍요로움과 분열을 동시에 경험한다. 자판위를 반자율적 부유상태로 움직이고 있는 손가락들은 몸과 마음이 혼융된 모습을 가장 전위에서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으론 무한에 가까운 세계와 철학이 현실을 도배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론 정보체계, 대중매체 등을 통해 전지구적 코드화가 이루어지는 새로운 바로크 시대를 살게 된 것이다. 이십일세기엔 생각의 사유를 넘어선 새로운 미디어시대의 사유를 할것이라고 주장한 어느 학자의 말처럼 우리 현대인들은 그 포로로 잡혀 있는 셈이다. 정순량 시인의 시는 짧은 시적 긴장감 속에서도 그 모든 것을 적나나하게 말해 준다. 쉽게 느낄 수 있는 시 이면서도 정보화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박기섭,「춤」(《열린시조》가을호)
그대 앞에 나는 늘 새벽 여울입니다
그 여울 소리 끝에 불 켜든 단청입니다
다 삭은 風磬입니다, 바람입니다, 춤입니다.
위 시는 필자가 올해 발표된 시조중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감히 말하고 싶다. 아니 90년대 들어서 이만한 작품은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위 시가 독자를 사로 잡을 수 있는 특징은 깔끔한 이미지의 사생과 돋보이는 비유법이다.
모든 물질적 상상력의 기본이 물이라는 액체에서 출발한다고 가정할 때, 새벽여울은 춤의 투영된 상징작용을 통해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받아 들이는 하나의 분력같은 힘을 느끼게 해준다. 책갈피 사이사이에 들어와서 그득히 배어있는 햇살의 감촉을 느끼듯이, 사랑과 공감의 감정이 은유로 나타나면 나타날수록 독자의 근원적 감정 속에서 어떤 보이지 않은 힘을 길어 올리는 힘이 나타나듯이 박기섭 시인의 시는 참으로 다양하고 미묘한 상상력으로 독자들을 매료시킨다. 그 내면에 깔려있는 잔잔하면서도 무거운 침묵이 산처럼 쌓여있는 듯한 그의 시는 불 켜든 단청과 다 삭은 風磬, 그리고 바람이며 춤으로 형상화된다. 박기섭시인이 보여주는 어떤 사물이나 대상에 대한 이미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어떤 대상에 대한 사랑으로 빛을 비추는 시적 年代記처럼 작용한다. 그리고 그의 시에 깔린 침묵의 이미지는 너무도 단아하고 깔끔하다. 자간과 행간 곳곳의 깊은 상상력의 도약은 독자들의 심리에는 씌어지지 못한 삶과 세계의 난잡함을 침묵 속에 삭이고 또 삭임 속에서 시의 틈새와 침묵, 깔끔하고 잔잔한 감동을 선사해 주고 있다. 참으로 대단한 작품이다. 지면이 할애 된다면 이 미묘하고 변화무쌍한 박기섭시인의 시의 틈새를 다시 논의 하고 싶다.
▲윤우영,「가을 숲」(《열린시조》가을호)
어느 뉘
畵幅인들
저리 어찌
色 고우랴
산
산
산자락마다
불꽃처럼 타는 갈숲
가진 것
후울훌 털고
빈손으로 돌아섰다.
한 폭의 수채화를 연상케 하는 작품이다. 자연미의 시적 형상화는 보편적인 동일성 속에서 사물이 지니는 비동일적 요인의 흔적이다. 인간 내적 요인을 넘어서는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자연미는 산만하고 불확실 하지만 미를 접할 때 느끼는 시적 고통은 자연 체험에서 가장 절실하게 느껴진다. 윤우영의 가을숲은 관찰자로서의 원하거나 의식하지 않더라도 작품이 말을 할 수 있도록 작품에 순응할 한 점의 화폭으로 묘사되어 있다. 색 고운 화폭 산자락마다 타는 갈숲은 단지 타자에 의해서 혹은 미를 파악하는 의식에 대해서만 아름다움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가진 것 털고 빈손으로 돌아선 자연미의 훌륭한 수용자세에서 시인의 자신을 자연에 내 맡기는 순수함은 참으로 예사롭지 않은 표현법이다. 이러한 시적 표현은 쉽게 쓰여질 것 같으면서도 어렵게 포착되는 밝은 울림과 세상을 견디는 시인의 내면세계를 간명하게 보여준다. 이렇게 상징되는 종장의 빈 손은 자연미 속에서 살아가는 세월의 폭력앞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시인 자신의 버거운 싸움으로도 생각될 수 있어 또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제까지 가을에 발표된 작품을 대상으로 간략하게 나마 살펴보았으나 현대시조 가을호에 게재된 문무학의 근작시선과 박현덕의 이계절의 시인편, 그리고 민병도 시화집「梅花 홀로 지다」는 많은 지면이 할애되어야 할 것 같아 다루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것은 지금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우리시를 사랑하는 모임」이 앞으로 우리 시조시단에 커다란 활력소가 되리라 믿는다. 시조문학의 대중적 기반을 넓히고 창작열정을 수용하기 위한 <열린시조>의 우리시 운동은 위기의 문학으로 불리는 현상황에서 다시 소생할 수 있는 한 줌의 불씨라고 여겨진다. 많은 시인들과 독자 제현들의 참여를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