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 많이 돌아다니고 있으니 그 사실여부야 각자의 판단에 맡긴다 치더라도 - 솔직히 이런 잡스런 이야기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 - 도코 헤이하치로가 이순신에게 배운 바가 전혀 없다는 것은 그의 전략사상에서도 드러난다. 도고 헤이하치로가 러일전쟁 이후 일관되게 주장한 것이 바로 함대결전이거든. 태평양전쟁 당시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해군전력을 가지고도 삽질 끝에 패망하게 만든 바로 그 함대결전전략이 도고 헤이하치로에게서 나온 거다.
이순신의 위대함은 두 가지다. 하나는 철두철미한 원리원칙주의자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전략적인 사고를 할 줄 아는 인물이엇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농담 가운데 그런 게 있다. 이순신 휘하에서 적군과 싸우다 죽은 병사보다 이순신에게 죽은 병사가 더 많았을 것이라고. 나태하면 죽이고, 도망치면 죽이고, 군율을 위반하면 죽이고, 법을 적용하기가 이렇게 엄격할 수 없었다. 또한 조정의 명령에도 그것이 옳지 않다고 여기면 거부하는 그런 뚝심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순신은 전쟁을 전략적으로 볼 줄 알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협수로통제다.
협수로 통제가 무엇이냐면 배가 쉽게 왕래할 수 있는 연근해의 협수로를 제압하고 지배함으로써 상대의 전략적 의도를 원천적으로 봉쇄한다는 것이다. 원래 수군 - 아니 해군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육군을 지원하기 위해서다. 병사를 실어나르고 보급물자를 실어나르기 위해 해군은 존재한다. 그런데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면? 해군은 있어도 해군이 병사도 물자도 제대로 실어나르지 못한다면? 그것으로 해군의 존재가치는 사라진다.(이 비슷한 근대해전이론을 주창한 사람의 이름이 갑자기 생각이 안 난다. 어딘가 찾아보면 있을 텐데. 귀찮으므로 패쓰. 나중에 생각나면 추가하겠다.)
제해권도 사실 그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바다를 지배한다는 건 언제든 바다를 임의로 이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배에 병력을 실어 원하는 곳에 부리고, 병력을 전개하고는 필요한 물자를 바로바로 공급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바다를 통해 전개되는 군사작전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제국주의시대 이후 바다가 더욱 중요하게 된 것은 바다 건너 식민지를 경쟁적으로 건설하면서 바다에서의 우열이 식민지 개발에 있어서의 우열로 나타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순신의 협수로통제는 바로 이러한 연장선상 - 아니 그러한 뿌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어차피 육로로 물자를 수송하는 것이야 그 양이 얼마 안 된다. 당시의 교통상황에서 대량의 물자와 인력을 실어나르기 위해서는 배를 이용하는 것이 훨씬 쉽고 빠르다. 그런데 그 통로를 이순신이 틀어막고 있으면? 일본군은 북쪽으로 전개한 자국의 군대에 인력과 물자를 보급하지 못하고, 결국 일본군의 행동반경은 극도로 위축되어, 끝내 조선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말하자면 싸워서 이기는 전략이 아니라 싸우지 않고 이기는 전략이었다. 23번 싸워서 23번 이겼다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처럼 싸우지 않고서 이기는 전략을 추구했다고 하는 것이 사실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인 것이다.
그러한데도 이순신에게서 배웠다고 하는 - 우리나라 사람들만의 일방적인 주장이겠지만 - 도고 헤이하치로와 그 후예인 일본 해군은 철저히 함대결전만을 지향했다. 적의 주력함대를 대양으로 끌어들여 그것을 격멸함으로써 해상에서의 주도권을 쥐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본의 군함들은 동급의 다른 나라 함정들에 비해 각개 함정에서의 전력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과무장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세계최대의 전함이라고 일컬어지는 야마토 역시 그러한 전략사상 아래에서 만들어진 전함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일본해군의 그러한 의도와는 달리 미국 해군은 쓸데없는 함대결전으로 힘을 뺄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미 오래전에 근대적인 해양전략을 구축하고 있던 미국해군으로서는 그보다는 필요한 곳에 필요한 인력과 물자를 공급하는 것이 최우선이었고, 그와 더불어 일본군의 수송함대를 격멸함으로써 일본군의 전쟁수행능력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일본군 함대가 아닌 일본군의 전력 자체를 분쇄함으로써 장차 일본과의 전쟁에서도 주도권을 쥐고 승리를 쟁취하겠다고 하는 것이 그 기본전략이었다. 바로 여기에서 전쟁의 승패는 결정되었다. 일본이 진 것은 단순히 물량에서 뒤져서가 아니라 이미 전략 자체에서 뒤지고 들어간 것이었다.
일본군이 기껏 수송선을 만들어서 병력과 물자를 실어보내면 미군 구축함이나 잠수함에 포착되어 목적지에 도착하지도 못하고 라앉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일본군은 미군의 수송선은 내버려두고 엄한 미국의 주력함대만을 쫓아 싸움을 걸다 그나마 갖고 있던 함대마저 축차적으로 소모당하고 정작 전선에서는 일본군 병사들이 보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동료병사들을 잡아먹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그러다가는 끝내는 함대결전을 대비한다며 당당하게 짱박아두고 있던 야마토를 적함대 유인용으로 내보내 레이테만에서 바다물고기들을 위한 어초로 만들어 버리고 있으니 도대체 뭘 위한 해군이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진짜 뭐하자는 해군이었는지. 제대로 근대적인 해양전략에 대해 이해나 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와 비교되는 것이 같은 추축군이던 독일이다. 독일의 해군이야 다들 아는 바대로 한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전함이라고 있는 비스마르크나 티필츠는 규격 이하였고, 샤른호스트나 그나이제나우, 도이칠란트 등 중순양함급 이상의 주력함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물론 그 성능도 영국이나 미국의 신형전함들에 비하면 손색이 있었다. 그럼에도 독일은 보유하고 있던 잠수함과 이들 원양항해가 가능한 순양전함 및 포켓전함을 활용해서 철저히 영국의 해양수송로를 말리는 통상파괴작전을 수행함으로써 전략적으로 영국에 큰 부담을 안겨주었다. 비록 영국 해군과는 감히 싸울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빈약한 함대였지만 그래도 그들이 벌인 통상파괴전의 전과는 영국은 한때 심각한 위기로까지 몰아넣었었다. 한참 차이가 나는 해군을 가지고서도 누군가는 적의 주력함대를 격파하겠다 헛힘만 쓰는가 하면, 누구는 주력함대따위는 내버려두고 중요한 수송함대만 부수고 다니겠다고 아예 말리기 작전을 쓰는 큰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태평양전쟁 당시의 일본과 이순신의 차이다.
물론 이순신은 이같은 전략적인 큰 그림만 짜는 그런 모사형 장군만은 아니었다. 명량해전 당시를 보더라도 12척의 배로 300척 넘는 일본군의 대함대에 맞서 다른 전선들이 겁먹고 뒤로 물러나는 상황에서도 홀로 대장선을 몰아 일본군 함대 전체와 대장선 단 한 척으로 싸우고 있는데, 그것은 가히 조자룡이 당양에서 조조의 100만대군을 휘몰아치던 이상의 용기요 기백이었다. 아마 악비가 5백의 악가군으로 1만의 금군을 물리칠 때도 이와는 같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순신의 선전에 용기를 얻은 안위나 김억추등이 합류함으로써 명량에서 적의 함대를 막아냈으니, 이것이 이름도 유명한 명량해전이다.
그런데 이 명량해전의 가치도 결국은 앞서 말한 것과 같다. 명량 - 즉 울돌목은 한양으로 통하는 수로 가운데 조선수군이 통제할 수 있었던 마지막 협수로였다. 울돌목을 지나고 나면 물길이 넓어져 조선수군으로서는 그 물길을 모두 통제하기에 힘에 버거웠다. 말하자면 이순신 장군이 추구하던 협수로통제라는 전략에 있어 마지막 저지선이었다는 것인데, 그래서 이순신 장군은 장군답지 않게 무모할 정도로 저돌적인 공격으로 소수의 함대로 다수의 함대와 맞서 싸우는 모험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일본군은 더 이상 조선에서의 전투수행을 포기하게 된다. 일본군의 전략의도가 이로서 완전히 좌절된 것이다. 그리고 이후 조선 남부에 웅크린 채 철수명령만 기다리던 일본군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을 계기로 모두 본토로 철수하고 만다. 그 과정에서 벌어진 것이 마지막 싸움인 노량해전이다.
사실 야전지휘관이 전략적 사고를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이라는 게 눈앞의 상황을 앞에 두고 나면 크게 넓게 보는 것이 쉽지 않은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바둑을 두는 사람보다 훈수두는 사람이 수가 높다지 않던가. 나폴레옹이 따로 참모부를 두어 보다 넓게 전장을 파악하고 전략과 전술을 수립하도록 한 것도 바로 그러한 때문이다. 군에 대한 문민통제가 필요한 것도 싸우는 것은 군인이 전문이지만 군인에게만 맡겨두었을 경우 싸워서 이긴다는 그 한 가지 집착으로 더 큰 국면을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싸우는 것은 군인이지만 싸움을 통해 이익을 얻는 것은 문민관료들이다. 그것이 될 때 전쟁에서 승리한다.
그런데 장군은 야전지휘관으로서 눈앞의 적을 쓰러뜨리는 것만이 아니라 더 크게 어떻게 하면 전체의 전쟁에서 보다 최소한의 손실로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까지 보고 있었다. 23번 싸워서 23번 이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초반의 승리를 이용해 바닷길을 완전히 제압함으로써 적의 전략적 의도를 분쇄하고 궁극적으로 승리를 거두는,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손자가 말한 가장 좋은 벌모伐謀의 상지상上之上의 싸움법을 선택했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 이순신의 위대함이 있다.
한 마디로 도고 헤이하치로 따위는 이순신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후 일본의 해군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의 전략사상은 기껏해야 배끼리 부딪혀 상대의 배를 나포하고 적의 목을 베어야 공적으로 쳐주던 임진왜란 이전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바다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적의 배를 쓰러뜨리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전투에서 적 개인에게 승리하는, 원시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세계사적으로 보아 쓰시마해전에 비해 한산도 해전이나 명량해전이 크게 주목받고 있지는 못하지만, 결코 그들이 이순신에 미치지 못하는 이유다.
사실 도고 헤이하치로가 이순신을 칭찬했다네 뭐네 하는 건 단지 "설"일 뿐이지 확실한 건 아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도고 헤이하치로가 이순신을 실제로 추앙했었다고 하더라도 이순신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점일 것이다.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랬기에 해양전략에 있어 제해권이 갖는 가치를 이해하지 못한 채 오로지 함대결전을 통한 적주력의 결멸이라는 시대착오적인 전술에 집착했었던 것이다. 그것이 결국 대본영일본의 해군을 하는 일 없이 말아먹었고. 감히 이순신과 연관지을 만한 인물은 아니라 할 수 있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중요한 건 무기가 아니다. 병사의 훈련도나 병종의 강함도 아니다. 그보다는 전술이고, 그보다는 전략이다. 물론 최상위에는 정치와 사회가 존재한다. 얼마나 바르고 얼마나 체계적인 정치적 사회적 제도가 갖추어져 있는가가 가장 중요하고, 그 다음에 주어진 자원을 활용해서 최소한의 피해로 궁극적인 승리를 얻어내기 위한 전략이 존재한다. 싸우고 이기는 것이야 그 다음 문제다. 내가 이순신을 무척이나 존경하는 이유다. 그것을 직접 몸으로 실천한 이이기에.
이순신을 이야기하면서 23번 싸워 한 번도 지지 않았다는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우장춘 박사를 이야기하면서 씨없는 수박만 이야기하는 것이나 같다. 선조가 이순신의 전략을 이해못했다 욕할 것 없다. 당장 수 백 년이나 지난 지금도 사람들은 그저 해전에서 싸워 이긴 것만을 생각하는데. 하물며 싸우지 않고도 이길 수 있다는 한 차원 다른 전략을 당시 사람들이 이해하기를 바라기란 무리일 것이다. 하긴 그러니 이순신이 대단하다는 거겠지만. 그래서 충무공이 성웅이라 불리는 것 아니던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