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더이상 작가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는 매일 뭔가를 쓰고 산다. 하루에도 수십통의 문자 메세지를 보내고, 학생이면 보고서를 쓰고, 직장인은 기획안을 작성한다. 영상 세대에겐 문자가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란 예언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마치 텔레비전의 보급이 라디오의 종말을 가져올 것이란 예언처럼 그것은 허언이었다.
최첨단 미디어인 블러그엔 사람들의 개성 가득한 문장들이 넘쳐난다.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문자로 표현하고 타인과의 소통에도 적극적이다. 현대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대접받는 사회이기도 하다. 글쓰기는 사회 모든 분야에서 아주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능력이나 기술이 되었다. 사실 이것은 오래된 전통이기도 하다. 근대 이전의 중국과 한국의 관리 등용시험인 과거(科擧)란 글을 짓고 글을 쓰는 시험이었다. 글을 잘 짓고 쓰는 사람이 관리가 되었고, 세상을 지배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작년에 나는 아주 짜릿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사내에서 주최한 본사 글짓기 공모전이 있었다. 큰 뜻 없이 응모한 글 한 편이 우수상을 받았다. 그 상 때문에 내가 소속된 지사는 그 해 경영평가에서 가점을 받게 되었다. 사장표창과 상금을 받았고 지사장님과 점심을 함께 먹는 시간이 주어졌다. 내 생애, 그렇게 비싼 공짜 점심은 처음이었다. 거기서 보태 내가 쓴 글이 오랜시간 지사의 영업창구에 내걸렸다. 사내 체육행사에서 처음 본 직원들도 아는 체를 했다. 짬을 내서 써내려간 A4용지 2장 정도의 글 한 편으로 나는 작년 팔자에 없는 호사를 누린 것이다.
그 일은 글쓰기를 통해 얻은 가장 황홀할 성취다. 살면서 내가 글을 잘 쓴다고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고, 글을 잘 쓰는 `평범한' 이들을 항상 부러워했다. 상을 받아서 기분은 좋았지만 그건 글 못쓰는 자신을 되돌아본 기회도 되었다. 요즘 글쓰기에 관한 책을 읽을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이유다. 내가 글을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고, 글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무지하면 용감한 법. 아무래도 용감한 덕분에 상을 받은 것 같아 지금도 머쓱하다
경희대출판국에서 펴낸 <글쓰기의 최소원칙>은 14명의 달인들이 글쓰기에 관한 특수한 비방(秘方)을 유포하는 알차고 다채로운 글쓰기 책이다. 책의 표지엔 제목 정도의 크기로 14명의 저자 이름이 강조돼 나왔다. 이름을 대충 훑어봐도 우리 시대의 글쓰기 달인들이다. 도정일, 김훈, 최재천, 이문재, 김영하 등이 특히 눈에 들어온다. 이 책은 2007년 경희대 교육대학원에서 진행된 글쓰기 특강을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것이다. 책은 작가들과의 대담과 강의형식으로 돼 있다.
도정일은 고교 논술 교육의 허점을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논술이란 본래 글쓰기 가운데 가장 어려운 영역에 속한다. 그런데 현재 고교의 글쓰기 교육은 일기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아이들을 앉혀놓고 논술을 가르치려 하는데, 이것은 아이들이 글쓰기와 평생 작별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대학 입시를 위해 기계적인 논술을 가르치고 있으니, 아이들에게 창의적인 글쓰기 교육이 될리가 만무하다. 이럴게 아니라, 아이들의 글쓰기에 숨통을 터주는 것이 중요하단다. 즉, 책 한 권을 읽고 느낀점을 자유롭게 써보라든가, 논술형식이 아닌 수필, 등 신변잡기적인 글들을 쓰는 연습을 먼저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미국의 경우를 살펴보면 그들은 논술을 먼저 배우고 쓰는 것이 아니라 보다 가벼운 에세이를 쓰는 일부터 시작한다. 일어서지도 못하는 아이에게 달리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는 우리 교육의 실태를 교육 현장에 있는 이에게 직접 듣는 일은 반갑고도 몹시 씁쓸한 일이다.
"글쓰기가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가장 효과적이고 좋은 방법이 있다면 글을 쓴다고 하는 일 자체를 학생들이 즐거운 일, 기쁨을 경험하는 일, 해보니까 재미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그런 작업으로 바꿔야 합니다." 도정일, <무엇을 쓸 것인가>, p.15
소설가 김훈은 시인 이문재와의 대담에서 인간의 언어를 네 가지 범주로 요약한다. 말하기, 읽기, 듣기, 그리고 쓰기. 말하기와 쓰기는 같은 것이고 그것은 자신을 드러내는 형식이다. 듣기와 읽기는 같은 것으로 우리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그런데 김훈에 따르면, 요즘 사회의 언어 풍경에선 듣는 자들이 없다는 것이다. 히어링은 안하고 채팅만 하고 있는데 이것은 "마치 담벼락에 대고 혼자 독백을 하는 것 같은 언어의 풍경이 벌어진다"며 그는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일방통행식 `불통'을 꼬집는다.
글쓰기의 기술적인 면에서 그는 문학적인 글이란 동어반복의 지옥에서 벗어나는 일로 규정하고, 우리 모국어의 본질을 조사(助詞) 활용의 미묘한 차이에 두고 있다. 또한 문학적 글쓰기란 표현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그것은 설명하는 글과 문학적인 글이 갈리는 지점이다. 문학적 글쓰기의 본질은 표현을 극한으로까지 끌고 가는 것이며, 그것이 작가가 도달해야할 궁극의 경지라고 주장한다. 김훈이 소설을 쓸 때 조사 하나의 쓰임까지 고심했다는 고백에선 글쓰기의 달인이 도달한 매서운 엄격성이 전해온다.
"<칼의 노래>라는 소설의 첫 문장을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라고 썼는데, 그 전에는 `꽃은 피었다'라고 써놨어요. 다 써놓고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서 고심참담한 끝에 `꽃이 피었다'로 고친 거예요. `꽃은 피었다'와 `꽃이 피었다'가 어떻게 다른가? 이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는 것이죠." 김훈, <문학적 글쓰기는 하나의 전략이다>, p.55
최채천 이화여대 교수는 좋은 글의 특성을 "정확성과 경제성 우아함, 치열성"을 갖춘 글로 설명한다. 신문사에 기고할 때 그는 글을 미리 써서 보내는 걸로 유명하다. 대개 2,3일 전에 써서 보내지만 여기엔 조건이 하나 따른다. 자신의 글을 수정할 때 반드시 토시 하나까지 자신과 협의해야 한다는 점이다. 자신의 글에 대한 완벽성과 자신감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김훈 작가는 아직도 원고지에 글을 쓴다는데, 자신은 컴퓨터가 없으면 글을 쓰지 못한단다.
"컴퓨터가 없었으면 저는 글 못 썼을 겁니다. 컴퓨터에서 고치고 또 거치고 수십 번을 고치는 과정에서 소리내서 읽어보며 입에서 굴러야 만족합니다. 안 굴러가면 다시 고치고, 또 안 굴러가면 다시 고치고, 거짓말 조금 보태면, 수십 번을 고친 다음에 보냅니다. 저는 글을 잘 쓰는 것이 아니라 치열하게 씁니다." 최채천, <정확성과 경제성과 우아함, 그리고 치열성>, p.113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소설가 김영하와 문학 평론가 김수이의 대담이다. 이 대담은 김영하가 충분히 매력적인 작가라는 사실을 독자에게 알리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글쓰기 방법론에 대한 성찰에 덧붙여 한 작가의 삶과 철학, 글쓰기의 태도, 견해를 듣는 매우 재밌고 유익한 대담이다. 14명의 글쓰기 달인들의 대담과 강의가 묶여져 있지만, 중간 부분에 삽인된 대담과 강의는 사실 지루하고 일반적인 글쓰기와 특별히 관련이 없는 듯한 느낌도 든다. 그러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김영하와 김수이의 대담은 이 책의 값어치를 제자리로 돌려놓기에 충분했다.
김영하는 글쓰는 인생으로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매우 전복적인 이야기들을 쏟아낸다. 글쓰기의 본령을 자기 즐거움에서 찾는다는 것이나 작가로 성장한 것이 전문적인 훈련에 있지 않았다는 점을 밝히는 부분은, 의외였다. 더구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때도 합평같은걸 하지 않는 자신의 스타일에 대해서는, 글쓰기 자체가 즐거운 일이여야 하고 의욕과 용기를 북돋워주었을때 더 좋은 글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라고 나름의 소신을 밝힌다. 젊은 작가인 그가 지금껏 상당히 많은 문학상을 타왔고, 그 상들이 자신이 계속해 글을 쓸 수 있는 동력이 돼 주었다는 점을 언급한 부분에선 특히 공감이 갔다. 주위의 상찬을 독이 아니라 약으로 받아들이는 그의 태도는 문학상이 줄 수 있는 긍정적인 면을 맘껏 향유한 자의 여유가 묻어난다. 특히 글쓰기 자체를 자신의 허무주의적 세계관에 빗대, `삶의 무의미에 맞서는 일'로 풀이한 것이 인상적이다.
"결국 나라는 것은 글이라는 것을 적어 사람들에게 전하는 하나의 도구인 것이고, 일종의 펜이라는 것. 그렇다면 내가 경험한 것들, 보고 들은 것들을 기록해야겠구나 생각했죠. 기록한다는 것은 조수간만처럼 끊임없이 침식해 들어오는 인생의 무의미에 맞서는 일이기도 하죠." 김영하, <존재,삶,글쓰기> p.311
이 책의 저자들은 글쓰기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그것은 그대로 응용가능한 교훈이며 가르침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는 단지 피상적인 조언에 그칠 수밖에 없다. 실제 글을 잘 써야 하는 것은 우리들이다. 그들은 이미 글을 잘 쓰고 있다. 이미 달인의 경지에 도달한 이들에겐 글쓰기의 비방(秘方)이란 하나의 형식으로 공식화할 계제(階梯)가 못되는 듯 했다. 그들의 사례란 공감은 갈 수 있을지언정, 그 방법대로 따라한다고 해서 글을 잘 쓸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오히려 모든 독자에게 그들 나름의 특수성이 존재한다고 보는게 옳다. 그것은 글쓰기의 능력이 될 수 있고, 목적이 될 수 있다. 그러니까 지금 독자들은 자신에게 먼저 물어야 할 점이 있다. "왜 글을 잘 쓰고 싶은가?" "글쓰기 시간이 기다려지고 행복한가?"
이 지점에서 공자님의 그 유명한 말을 다시 되뇌여보자. 논어 옹야 편에 나오는 말이다. 子曰[자왈] 知之者 不如 好之者[지지자 불여 호지자] 好之者 不如 樂之者[호지자 불여 락지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같지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같지 못하느니라.”
이 책을 읽고 깨달은 `글쓰기의 최소 원칙'이란 글쓰는 시간을 좋아하고, 사랑하며, 즐기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들 면면을 보면 자신의 분야를 좋아하고 그 경지를 넘어 그 분야의 일을 즐기는 경지에 오른 사람들이다. 글쓰기를 잘하고 싶은가? 잠자는 것, 티비보는 것, 노는 것, 먹는 것 보다 더 즐거운 시간이 글쓰고 있는 시간이라면, 당신은 이미 글쓰기의 비방 하나를 알고 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시간을 아껴 책을 읽을 것이고, 하얀 모니터 위에 무언가를 쓰기 위해, 초초히 앉아 있는 시간조차 행복할게 분명하니까. 그는 樂之者이기 때문이다.
첫댓글 요한님은 진정 글쓰기를 즐기는 경지에 오른분 같아요
행복하시지요?
별말씀을요. 카타리나님의 관심 한말씀에 시와산을 더욱더 기름지게 하고
신비의 씨들을 더 가져다 심고 싹 자란 환상의 풀과 꽃 그리고 나무들까지도 힘 닿는 한 돌보며
삼손의 정열로 더 씩씩하게 나아가는 굿보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