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28일 조선일보마라톤 출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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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마는 코스가 천하제일(天下第一)이다!
봄春과 내川이 한껏 어우러져 자리한 춘천은 청춘열차가 드나드는 청정 마라톤의 도시다. 춘천 의암호에서 출발하여 경기도 양평을 경유해 서울의 한강까지 공사 중인 자전거도로가 올해 완공되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세계적인 달리기 명품도시가 탄생할 예정이다.
조선일보 춘천마라톤코스는 의암댐 위에 살짝 걸터앉은 신연교 다리를 건널 때 그 진가를 확인 할 수 있다. 그야말로 풍광이 압권이다. 갑자기 호리병처럼 좁아지다가 의암댐 좌우로 펼쳐지는 오색 창연한 광경은, 숨이 턱까지 차오른 마라토너들조차 시선을 빼앗겨버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형형색색의 단풍이 삼악산 기암절벽을 타고 내려와 의암호 속으로 풍덩 빠져버리기 때문이다. 그 강물 속에 또 하나의 가을이 그대로 청록색 빛깔로 가라앉아 탐스러운 구름으로 함께 맴을 돌기 시작한다. 숨 가쁘게 마라톤 행렬을 쫓는 헬리콥터의 파열음은 유별나게 이 곡선 주로에서 주자들의 가슴을 온통 출렁이게 만든다.
형형색색의 복장을 한 마라톤 행렬은 터널을 드나들 때마다 한 폭의 그림으로 펼쳐지는 인간 기관차가 된다. 호반의 배꼽에 자리한 공지천에서 출발하여 의암댐과 춘천댐을 돌아, 청춘열차의 종착지인 춘천역사 방향으로 골인하는 춘마는 말 그대로 환상의 마라톤 코스다.
춘마는 축제(祝祭)다!
마라톤 행렬을 향해 응원하는 군악대와 학생밴드와 함께 박사마을 농악대의 괭가리 장단은 춘마를 춤추게 한다. 마라토너들의 발은 신들린 듯 가벼워지고, 황금벌판 벼이삭은 묵직하게 여물어간다. 청정 가을 들판의 허수아비도 흥에 겨워 절로 신명이 난다. 정겹게 휘돌아간 시골길 아스팔트 한 복판 위를 구름에 달 가듯이 남녀노소가 함께 달리고 또 달린다. 달리는 건각들은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들이 못내 정겹고, 응원하는 시민들은 청춘들의 질주가 마냥 부럽다.
호반 유리쟁반 속 물고기들도 이날만큼은 마라톤 행렬과 함께 하루 종일 빙빙 따라 돈다. 인간과 자연이 함께 펼치는 거대한 축제의 한마당이다. 단풍마저 설렘으로 곱게 물들어 호반의 벤취를 곱게 단장한 채 길가에 늘어선다. 전국 각지에서 참가한 수많은 마라토너들이 춘천시민 그리고 근교 농민들과 함께 펼치는 춘마는 질펀한 가을 운동회다.
춘마는 감동(感動)이다!
출발선에 설 때마다 가을의 냄새가 긴장된 호흡으로 코끝에서 상쾌한 담금질을 해댄다. 주체 못할 설렘으로 내달리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묘한 매력에 빠져들게 만든다. 정말로 지독한 중독이 아닐 수 없다. 바야흐로 양쪽 종아리의 고통이 주변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상을 추월하기 시작 할 때 비로소 진정한 달리기가 시작된다.
하프지점을 지나서부터는 차마 바라보기에 안타까운 일들이 곳곳에서 일어난다. 안간힘을 쓰다가 중도에 포기하는 동료들, 절룩거리면서도 허공을 향한 질주를 결코 멈추지 않는 의지의 투혼들, 예외 없이 내 자신도 깊은 갈등의 분기점에서 오락가락 하기 시작 한다. ‘아! 여기까지가 내 체력의 한계구나! 맞아! 이 나이에 여기까지 온 것만도 대단하지. 뭔 소리! 결승선에서 기다리고 있는 식구들 얼굴은 어쩌고?’ 출발선에서의 다짐과 종아리에서부터 시작 된 통증 사이의 갈등으로 결심이 후들거리기 시작한다.
게다가 마의 구간이라는 춘천댐을 향한 긴 오르막 지점에 이르게 되면, 이 도전에 대한 후회가 사정없이 엄습해오기 시작한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가 결국 주저앉았던 몇 해 전 패배의 그림자가 얼핏 스쳐 지나간다. 낙오의 대열에 서서 걸을 힘조차 없이 패잔병처럼 버스에 올라 씁쓸해 했던 악몽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세상사 ‘마의 구간’에는 항상 구세주도 있게 마련인 법, 다름 아닌 5km마다 기다리고 있는 학생 봉사요원들이 그들이다. 건네주는 음료수보다 훨씬 시원한 그들의 열광적인 응원이야말로, 지친 달리미들에겐 엄청난 재충전의 원천이자 사막의 오아시스다. 그들이 없다면 분명 멈추고 말았을 바로 그 고비마다, 봉사요원들이 약속이나 한 듯 함성을 지르며 아우성을 친다.
한때 가졌던 나약한 생각이 괜스레 부끄러워 도저히 멈출 수가 없다. 다시 추스르고 서서히 힘을 내어 이내 또 달린다. 누가 요즘 아이들이 버릇없고 철이 없다고 했던가? 마치 제 식구들이 쓰러지기라도 하는 양 간절하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응원하는 그들의 순수한 눈망울을 한번 본적이라도 있는가? 어디 이들 뿐이랴? 쥐가 나면 고양이보다도 재빨리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나타나 스프레이를 뿌려 대는 응급치료 도우미들은 달리는 119 요원들이다. 풍선에 완주 기록을 매단 채 수도승처럼 질주하는 페이스메이커들의 평정심은 또 얼마나 감동적인가? 이들을 만나면 신기하리만치 혼미했던 정신이 다시 회복되고 완주라는 희망의 불씨가 다시 살아나고는 한다.
이때쯤이면 브라질의 반데를레이 리마 선수의 모습이 불쑥 떠오르기도 한다. 아테네 올림픽 마라톤 선두로 달리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방해꾼의 해프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완주했던 그 위대한 선수 말이다. 양팔로 비행기모양을 그리면서, 자랑스레 3위로 환하게 웃으며 결승선에 뛰어 들던 그 모습에 나를 오버랩하기 시작한다. 피식 웃음이 절로 나오기도 하지만 한계를 넘는 그 순간부터 감동은 전설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춘마는 인간승리(人間勝利)다!
처음 춘마에 도전했을 때 걱정 반 우려 반속에 광적으로 응원하던 아내가 용감하게 길 한가운데로 뛰어든 적이 있었다. 흑 빛 얼굴에 절룩거리며 달리는 나를 보자마자 기권하라며 막무가내로 내 앞을 막아서던 바로 그곳, 신병훈련소 지나서 신동삼거리 바로 그 지점이다. 그 때 아내의 표정을 난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권투 경기 중 KO 직전에 처한 선수의 감독이 수건을 던질까 말까 망설이는 바로 그 표정 말이다.
비몽사몽간에 그 고비를 넘기면 마음의 갈등 바로 저편에 삐에로처럼 웃으며 반겨주는 인형극장을 만날 수가 있다. 헛것이 보이는가 싶을 때는 남겨진 거리를 알려주는 표지판의 숫자가 한 자리로 카운트다운을 하기 시작한다. 길가에 시민들의 웅성거림이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하면, 마음 한구석에 ‘아! 중간에 그만 두지 않기를 얼마나 잘했는가!’하는 안도감이 들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시시각각 마음과 몸이 따로 노는 괴로움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춘천의 관문인 소양 2교가 마치 한강대교만큼이나 길게 느껴진다. 하지만 지금까지 달려온 것이 아까워서라도 멈출 수가 없다. 어느새 흐르다 소금처럼 허옇게 광대뼈 위에 말라 붙어있는 눈물이 얼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서럽다고 하기에는 차라리 뿌듯한 고통이다. 그래도 소양강 나루터 옆 옷고름 휘날리며 서있는 소양강처녀 동상을 스칠 때는 눈여겨 쳐다보기도 한다. 사경을 헤매는 순간에도 주책은 살아있는 법인가? 별 싱거운 사람이 붙여 놓은 ‘다 왔다!’라는 응원 팻말을 보는 순간 ‘이젠 정말 한 발짝도 더 못가겠다’ 라는 생각에 오히려 맥이 풀리기 시작한다.
우측의 춘천대첩을 기리는 전쟁 기념공원의 펄럭이는 깃발들을 보는 순간, ‘그래 이것은 전쟁이다. 전쟁!’ 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갑자기 서울에서 막 도착한 듯 시동을 켠 채 서있는 푸른색 눈의 청춘열차가 눈에 들어온다. 종착역을 향해 비틀거리며 달리는 완행열차 같은 내 몰골을 비웃고 있는 듯하다. 좌측 옆구리를 향해 어느새 춘천역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고개 돌릴 여력도 없어 앞만 보고 달리다가, 사시 눈을 한 채 한마디 건넨다. ‘이놈아 나도 너 같은 청춘이 있었어!’
오전 9시에 출발한 대장정이 한낮이 되어서야 이제 그 끝장을 보려고 한다. 중천에 떠서 계속 앞서가던 태양이 결승점 위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아스팔트 위에 반사 된 햇볕에 도로는 온통 신기루처럼 아롱거린다. 그 속에 포레스트 검프의 긴 수염이 보이는 듯하다. 마침내 눈이 부시도록 환한 꼭지점을 향해 달려 들어간다. 뜨거운 박수 소리와 함성 속에 울컥거리는 행복감이 가슴으로 밀려와 눈물까지 핑 돈다. 그 와중에도 흘끗 결승선 위 에 있는 시계를 확인해 본다. 2012 춘마의 전설이 빨간색 단풍으로 거기에 매달려 있다.
※ 참조 : 2012 조선일보춘천마라톤-홈페이지-만남의 광장-출사표 1000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