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덕촌마을 빨래터 江川 : 김용진님 글
함안군 군북면 신창마을..원효암 찾아가는 길목이다.
지금은 초라한 시골마을 이지만 번화했던 추억이 담긴 마을이다.
그 증거로. 이발소. 새마을운동 문구. 담배 가게 흔적. 들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여기에도 만만찮은 사람들이 살았나 보다.
신촌마을 지나 덕촌 마을에 이른다. 어디선가 늙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호기심에서 다가 가 본다. 할매 셋이서 빨래를 하고 있다.
동내 빨래터..요즘보기 드문 풍경이다..오랜만에 다시 보는 것이다.
나그네도 아무거리낌 없이 빨래터로 내려선다.
날씨는 하도 따뜻해서 초여름처럼 덥다..남도의 봄은 절정인 것을
체험 한다..안녕 하신교~ 인사를 하자 어디서 왔는지를 묻는다.
"여기보다 훨씬 좋은 데도 많은데, 이런 빨래터가 멋지다고예?"
"하모, 그렇기도 하겠제" 하면서 웃어 덴다.
"여기 빨래터는 오래되었어. 모르긴 몰라도 백 년은 더 됐지 싶어.
내가 시집 온 지가 벌써 오십년이 넘었는데 그때도 동네에서 이
빨래터를 이용했거든. 물이 땅에서 펑펑 솟아 참 깨끗했는데 지금은
물도 잘 솟지 않고 저짝 아래로 물이 잘 빠져나가지도 않아“
“아줌씨 올해 몇 인교? 세 사람 중에 누가 더 나이가 들어 보이냐?
고되 묻는다.. 머뭇데며 대답하기 곤란하다. 할매지만 여자들이라
나이가 많아 보인다고 지적되면 곤란한 인상을 받을것 같아서..
그레서 뜸을 들이는데 한 할매가 서열을 정해 준다..
금방 뽂은 머리 스다듬 어며 "저기 할매가 올해 팔순이라. 나는 일흔셋
이고. 칠학년 삼반이제. 근데 이녁은 올해 우찌되는지 모르겠네."
윤기 나는 머리카락의 할머니가 건너편 푸근한 인상의 할머니에게 물었다.
"나요? 거기가 일흔셋이모 나하고 갑장(동갑)이네. 뱀띠니께."
"아, 그라요. 진짜 동안이네. 나보다 어린 줄 알았드만. 내가 조금 늙어
보이긴 하지. 그럼 월성댁이 우리하고 갑장이니 전부 동무네."
일단 서열은 정해지고..내가 보기에는 60대 후반으로 봤는데 전부
나이가 만만치 않다..저 얼굴이 칠학년 삼반 이라니..
이들은 덕촌마을에 거주하며 빨래터 사용은 자주하시는 편이 아니고
간혹 한번씩 다녀간다고 한다. 오늘은 유난히 볕이 좋아 나왔다나..
그런데 물은 맑지 못하다..비누물이 흐릿하다. 배수로는 아예 없다.
진흙더미가 막아서고 있어서 물이 빠지지 않는다.
원인은 경지정리. 기차역공사. 등으로 인해 배수로가 막히고 배수가
시원치 않아 이젠 빨래터도 수명이 다 된 거다.찌든 때만 지우고
집으로 가서 세탁기에 다시 행궈야 한다고 한다. 볕이 좋아 심심풀이로
빨래를 하는 거지..."예전에는 물도 펑펑 솟고 배수도 잘 되었는데“
웃으며 쉬지 않는 손길들..오래된 장인들처럼 옷을 문댄다. 첨벙첨벙.
흔들어 덴다. 아주 익숙한 손놀림..숙달된 세월의 솜씨다.
오랜만에 보는 정겹고 살가운 그리고 흐뭇한 풍경 이다.
아낙들의 걸죽한 입담들 에 봄은 점점 깊어저 가고 있는 듯하다.
2. 경전선 800리 답사중.지게
여행이라 기에는 뭣 하지만 비교적 이리 저리 지향없이 잘 돌아
다닌다..이러하다고 해서 유유자적 할 만큼 팔자 좋은 신세도
아니다..그러나 돌아다님 이 주는 즐거움과 일종의 행복감? 같은것
들이 정신적인 유혹을 보네며 나는 이에 따른다.
길을 가면서 펼치는 여러 상념. 추억. 자연과 사물들 과의 친교.
그리고 지난 자욱들에 대한 깨우침..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소득이
생겨나고 피폐해진 영혼에 새살을 돋게 하기도 한다.
늘 산지사방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살아간다.
수없이 밟으며 지난 길이지만 항상 반가움과 정다움이 길에 칠해
지고..이름 모를 흥 들이 장단을 친다..그레서 여행을 한다.
태생이 촌놈이라서 그런지 나는 농촌이나 사찰. 그리고 버려진
경치 같은 것에 더 애착을 느끼는 편이다.
경전선 군북역에서 신창. 덕포. 마을을 지나다가 돌연 옛 생각이
밀려든다..늘 하는 데로 추억에 잠겨 이길을 걷는다.
이 길 신작로. 논둑길. 밭둑길. 골목길.길 길 길들의 이야기가
솟아오른다. 자갈길. 산길. 들길. 들의 이야기가..
국민학교(초등학교) 때..나는 학교 소재지인 읍내동에 살았지만
10리 20리 달음박질을 하며 학교를 다니던 친구들이 많았지..
그 때는 화수에서도 오고 매성 연계동 신덕. 파전 ..멀리서 들
다녔지..책보를 허리나 어께에 단단히 두르고 ...
다름 박질을 할양이면 필통 속 연필 굴러다니는 소리가 달그닥
요란을 떨며 걸음 장단을 맞춰 주었지..그리고 그 벤또 젓가락 소리..
6.25전만 해도 고무신은 고급품이고..개다(나무신)를 많이 신었다.
이런 신발로 그 멀리서 다닌 친구들이 참 용한 사람들이다.
이런 상념에 젖어 길을 가는데 .. 빈 지게를 진 늙은이 하나를 발견
한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탄성을 발하며 발길을 멈춘다..
참 오래만에 지게 진 모습을 보는 것이다..경운기 시대인데 지게를
진 노인..넋을 놓고 바라본다..따라 간다.
산으로 들어선 노인은 나무를 한다..재래식 부엌 아궁이..까만 동솥
큰솥. 가마솥. 이 보이는 듯 눈가를 오락가락 한다.
“하이고 지금도 나무를 땝니까?”“야 그러니더”
보일러 가스렌지 안 쓰고 불 때어 밥하고 군불 덮인다고 하는 늙은이..
받쳐둔 지게를 어께에 져 본다..한순간 나는 젊은 한시절로 달려간다.
친구들 중에는 지게다리가 땅에 닿아 질질 끌리던 그 키 작은 어린 시절
부터 지게를 진 친구도 많이 보았지..앙증맞은 어린이 용 지게도 있었고..
하루도 빠짐없이 한시도 쉴 틈이 없던 그 시절의 지게,,,
촌놈은 대계가 인내심. 책임감. 이해심. 이 강한 편이다.
이는 지게에서 배운 교훈 이요 인생길 이란 것이다.
짐을 지고 다리가 아프며 어께가 아파도 목이 말라도 참아야 하고
곡식짐을 지고 넘어져서 버리면 책임은 전부 지게 진이가 져야 한다.
남의 일에 무관심 하다가도 십릿길 짐을 지고 가본 사람은 짐을 지고
가는 사람의 심정을 이해하게 된다..이걸 易地思之 라는 거다.
무거운 짐 져 보지 않은 사람 인생의 무거움도 그 무게도 잘 모른다.
촌놈은 지혜로우나 지혜 없어 보인다..이런것이 人生事 다..
지게를 본 감격스런 다시 만남의 즐거움...
어린 시절 젊은 시절 지난 묵직한 세월 되 씹어본다.
지난 수많은 세월을 되씹으며.
저 지게에 새겨진 내 모습을 본다..
3.군북면 '솥바위(정암)
군북면 신창마을은 예전에 정부양곡보관창고가 있어서 "창고가 있는 마을"
이라 부르게 된 것 이다. 마을 우측 들판너머로 고래등 같은 기와집? 들
이 보인다..옛러운 제실. 토담..이 예사동네가 아님을 말해 주는 듯하다.
예사동네가 아니겠다 싶어서 기와집을 찾아 간다.
스마트 폰을 꺼내들고 검색을 한다..여기가 효성그릅 창업주 조홍제 회장
의 생가가 이곳일대에 있는 걸로 나온다. 파랗게 물오른 탱자나무 울타리.
높이 쌓은 토석담. 탱자나무 울타리에 개구멍보다 조금큰 출입구가 생겼
고.. 이 집은 함안의 대 지주 엿던 집다운 규모다.
생가 마당으로 허락도 없이 용감하게 들어선다. 문득 이 지방에 전해오는
이야기 하나가 생각난다.. 의령 정암진에 가면 남강변의 강물에 둥실 떠
있는 '솥바위(정암)'가 있다. 솥 모양의 바위 물 밑으론 솥 다리처럼 세
개의 발이 받치고 있는데 그 발이 가리키는 쪽 '주변 20리 내에서 큰 부자
3명이 난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이씨 조선말 이름모를 도인의 예언
이라 한다...공교로운 것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재벌창업주 3인이 솥바위
인근에서 태어난 것이다..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회장, 효성그룹 창업주 조홍제 회장이다.
이병철 생가는 솥위에서 8km 북쪽..구인회 생가는 남쪽 7km, 조홍제
생가는 동남쪽 5km .. 이처럼 솥바위 반경 20리에 모두 위치한다.
예언이 현실로 된것이다. 더 흥미로운 일은 솥바위를 별자리로
보는데..삼성(三星), 금성(金星·LG, GS그룹의 옛 이름), 효성(曉星)
등 이들이 세운 기업 이름에 모두 별(星) 이름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홍제의 생가는 인간의 온기가 사라지고 문이 굳게 닫혀 있다.
지금은 조씨네 재실로 쓰인다고 한다..마을은 효성그릅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효성 창원공장과 자매결연을 하고 있다는 표지석도 있었다.
신창마을과 이어진 덕촌마을 을 지날적에 비석하나가 눈에 들어 온다.
들여다 본다..채산 조용균 이라는 사람이 1935년 심한 가뭄으로 소작인..
이웃..할것 없이 보릿고개 배고픔에 허덕일 적에 곳간을 헐어 도움을 주고
구휼 했다는것..이런 행동으로 말미암아 다른 지주들 에게 미움을 받고..
그 이듬해(1936) 소작인 들이 그 은혜에 감사하며..어려운 형편중 임에도
이를 무릅쓰고 뜻을 모아 이 선행비를 새운것 이라는것..
지주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비석앞에서..욕심에 절은
내 모습을 비춰 보면서 수치심을 느낀다..
또 다른 안내문 하나..들여다본다.. 고인돌이 있다는 안내문 이다.
고인돌 수십기가 있다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싶어 굳게 잠긴 대문 넘어로 고개를 들이밀어 본다.
흑~~마당에 고인돌이 있다..흠칫 놀란다.
마당 한 구석에 평평한 너럭바위 사람 너댓명은 족히 앉을 만한 크기..
얼마전 전라도 부안에서 고인돌이 집 마당에 있어서 평상처럼 사용
하는것을 보았는데..고인돌..옛 사람들의 무덤..
사람들은 이 돌 아래서 순간을 살고 죽어..영원한 안식을 취하리라..
그런데 인가마당에 있는 이 고인돌은 '함안군북지석묘군' 중 제26호로,
덮개돌에 무려 398개의 '알구멍(성혈性穴)'이 있단다.
이 구멍들을 연결해보면 별자리 처럼 보이는 데 아마도..다산과..풍년
을 기원하는 신앙적인 표현 인가 싶다.
깸발 딛고 애를 쓰며 사진을 찍어 보려 하나 쉽지 않다..마침 지나가던
할머니가 소리친다."그 집 빈집이요. 주인이 어디 가고 없어요. 고인돌은
저기 덕촌마을 뒤로 가면 더 있어요“
이 고인돌은 <함안군북지석묘군> 중 제26호로,지정 된것..
함안 군북지역은 경남지역에서 고인돌이 가장 밀집 분포된 지역 중에
하나이며, 특히 동촌리 고인돌군은 함안 지역에서 고인돌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이 일대에는 동촌리 27기, 덕대리 5기 등 많은 수의
고인돌이 무리지어 있다.
고인돌..죽어 잠들고 후손은 절하며 안녕 다복 풍년 을 빌고
사람 사는 길에 솟아나는 모든 바램들이 녹아든 고인돌..
이것이 신앙이요 이것이 소원성취를 가져다 줄 것으로 여기던
소박 하고 단순한 조상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4. 폐역과 시장
군북면 소재지는 장꾼들이 오간다..꼬부랑 할머니 지팡이 짚고.
장바구니 흔들어 덴다. 햇늙은 이 반백머리에 까만 비닐봉지 달랑
매달고 자전거를 타고 간다..노곤한 봄볕은 아물아물 눈을 어지
럽히고..나물케는 아낙들이 가금씩 보인다. 평화와 권태?가 흐른다.
군북 오일장 가는 길목에 3.1 운동 기념탑이 있다.야트막한 산과 절집
사이로 기념탑이 솟아있다...이 기념탑에 얽힌 기막힌 사연을 들어본다.
1919년 3월5일 유림을 중심으로 군북 독립만세 시위 계획을 세웠고 3월 10일
서산서당에서 주동자들이 모여 군북 장날인 3월 20일(음력 2월 19일)에
총 궐기하기로 했다. 시위가 일어난 날은 3월20일 학생50여명이 독립선언문
낭독. 대한독립만세. 장터에서 출발 냇가에서 무려 5000명이 집회하고
독립 선언식을 하고..군북 주재소 포위..경찰의 발포. 애국지사사망 22명.
부상18명 일본군경 사상자 13명..치열한 항쟁이 였다고 한다.
3.1운동당시 전국에서 다섯번 째 치열했으며 희생자는 삼남지방 에서는
제일 많았다.이를 기념하여 이 탑이2004년에 건립되고 매년 3.20 에는
시가행진을 하면서 그날의 의거를 기념하며 재현하고 있다.
지금은 작은 농촌도시??나 그 당시는 대처로 치던 곳임을 알수 있다.
옛 군북역은 거목 향나무 한 거루만 남기고 폐역이 되고..주위가 쓸쓸
해 보인다. 역사의 건물은 임대가 되어'구자운의원' 병원이 되었다.
지금은 타고 내리는 객이 10여명 체 안되는 신역이 지어지고..
광장은 무지 넓다..옛날 사람북적 대던 시골역 시대는 지나 간듯 하다.
얼씨년 스런 승강장. 녹슬어 기억 넘어로 묻혀져 가는 철로..대합실은
굳게 잠겨있고..빛 바렌 모텔 간판..이것이 군북역의 풍경 이다.
“빠앙”“덜커덩” 기차는 이제는 오지 않는다..
폐선된 철로에는 봄 햇살만 지루하게 내려앉고 있다.
오일장이 형성돼 북적댔던 옛 군북역은 허허
벌판에 새로 생긴 역사건물에 90년의 긴 세월을 넘겨주고 쓸쓸히 퇴장했다.
간이역 들의 특징은 작은 건물 한 채와 나무 한 거루다.
왠지 스산한 풍경 한 조각 떠오르게 하는 간이역의 추억이다.
내가 가본 정동진 의'고현정 소나무'화순역의 소나무 한 그루도 기차
여행자에게 아름아름 알려져 있다.'기차와 소나무'는 노래의 단골 소재..
이렇듯 간이역과 나무는 어느 순간부터 기다림과 그리움의 대상이 된
듯하다. 향나무 한 그루 남기고 퇴장한 옛 군북역의 쓸쓸함이여..
이제는 시장조차도 골목 안으로 들어가 선다..골목길 좌 우 로 널어서
펼쳐진 난전들..소박한 모퉁이 점들..“정이 오가는 군북시장”글씨만
크다..이 오일장은 너무작고 한산하여 쓸쓸 하다..몇 안되는 장꾼들
손님 기다리는 봄나물들이 애닲아 보인다..
5.원효암과 의상대
군북역 광장에서 택시를 타고 원효암 까지 간다. 차비는 1만원.
빈 바람 살금살금 불어오고 구불구불 오르막길 달린다..
겨울에는 빙판이 져서 다닐 수 없는 길..봄이 되어서야 차가
다닐 수 있다고 한다.
인기척도 없는 암자..애 햄 헛기침을 해보니 늙으 수레한 할머니
보살 한 사람이 요사채 에서 나온다..목이 말라 약수터로 가서
약수를 들이킨다..그런데 이 약수는 집으로 가져가서 술을 빚어
면 발효가 되지 않은 신비의 약수란다..
암자는 고요하고 물맛은 시원했다. 삼층석탑. 요사채. 대웅전.
칠성각. 나란히 있으며 끄터머리 의상대가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 그 아래로 요사채와 해우소..살포시 앉아 있는 모습이
자못 경건해 보인다.
산 능선이 멀리서 포근하게 감싼 부채꼴 모양의 전각들의 배치..
"오늘이 제일 따뜻한것 같어요. 볕이 너무 좋아."
보살님이 커피를 권한다..스님이면 차를 권할 것인데..
몇 마디 대화를 하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툇마루에 길다랗게 늘어진 햇살..개으름이 피어나는 따분하고
포근한 봄의 침묵에 빠진다. 봄물이 오르는 산자락. 그리고 맑은 하늘
함안 사람들은 원효암을 ‘의상대절’이라고 부른다. 의상대는 1370년에
세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중건기록은 없고 근래에 보수했다.
고려시대 석탑이 있던 자리..석탑은 사라지고 넓다란 공터를 이루고 있다.
예전에는 종이 그기에 있었는데 돌연 없어 졌다고 한다..
꽃술처럼 우뚝 솟은 의상대..산자락은 꽃잎처럼 암자를 둘러싸고 있다.
의연한 의상대..가파른 산비탈에 이 전각은 의연하다고 해야 하나?..
조용히 법당문을 열어본다..의상대 안에는 두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원효와 의상.두 대사의 영정이다. 당나라 유학길에 해골바가지 물을
마신 이 두분의 인연이 이곳에 까지 이어진 것이다.
이 두분 수도자는 속세로 말 한다면 오래된 벗인 것이다.
그윽히 중생을 내려다보시는 눈길을 받으며 몸은 문밖 풍경을 본다.
의상대사가 지팡이를 꽂아 소나무가 되었다는 노송은 고사한지 오래
된것 같고 남아있는 둥치의 모양이 허허롭게 보인다.
노송이 고사하고 얼마 지나 삼층석탑도 도난당했다나..
암자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칠성각이다..
칠성각은 1370년에 건립되었다고 하며 1935년 중건된 기록이
남아 있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건물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됐다.
어느 사찰이나 칠성각은 경내의 뒷편(후면)에 배치되어 있는데
여기는 경내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고..팔각지붕을 올려놓고 있다.
화려하고 웅장해 보인다..법당에도 칠성탱화가 조성되어 있고..
좌우로 독성탱화 산신탱화..한 때는 칠성각을 법당으로 사용 했다고 한다.
불교와는 무관한 칠성신..이는 민간신앙의 대상이며 종교성은
없는 것이나 불교가 포교되면서 받아 들여서 부처님과 함께 모신
것.. 원효암 툇마루에 앉아 빈 바람 소릴 들어며 텅빈 암자에는
풍경소리 가득히 들린다..
원래는 원효암 이고 벼랑끝은 의상대 이다..스님은 출타중이고
고요가 넘실대는 사찰에 내가 하는 일은 봄볕을 감상하는것
뿐이다. 멀리서 들리는 개 짖는 소리..닭 우는 소리..
무료한 암자 마당에는 새한마리 날아들고..
산과 암자를 뒤로하고 발길을 돌린다. 이 암자를 오기전 길을 물으니
"거기가 어딘데 걸어가요? 택시 타고 가도 겁나게 가팔라요."
역에서 만난 시골 할머니 치던 손사래가 생각나서 피식 웃어본다.
시름시름 역에 도착하니 막 기차가 도착해서 돌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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