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만금 내의 상괭이 떼죽음이 주는 의미-
새만금 내에서 쇠돌고래 일종인 상괭이 223마리가 떼죽음 되었다.
우리에게 상괭이의 떼죽음이 주는 의미는 무었일까.
우선 이 상괭이가 어떤 동물인지 잠시 알아보자.
상괭이(영어명. Finless porpoise, 학명. Neophocaena phocaenoides)는 쇠돌고래과에 속하는 여섯 종의 고래 중 하나이다. 지역에서는 물돼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몸빛은 검은색에 가깝고, 몸길이는 1.5~2미터 미만 정도로 성인이 누워 있을 때의 크기이다. 국제적 멸종위기종으로 우리나라 황해에서 관찰되는 종이다. 바다와 강하구 등의 민물의 영향을 받는 곳도 목격 가능하다. 새만금에서도 방조제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만경강과 동진강 하구전역에서 관찰되어 왔다. 상괭이는 IUCN(국제자연보호연맹)과 CITES(멸종위기 야생동식물의 국제거래에 관한협약)에서 각각 멸종위기 취약 종 및 부속서 1에 지정한 해양생물로 지정하고 있다.
-인간만이 생명은 아니다.
인간만이 생명이라는 비윤리적인 생명경시는 우리에게 무었을 주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하는 사건이다. 생명을 생명으로 보지 않고 개발의 방해꾼으로 생각하는 지금의 풍조는 무분별한 개발이 주는 쓰디쓴 결과이다. 원인도 없고, 대책도 없는 이런 사건을 보며 우리가 어디까지 개발이라는 미명으로 눈 감아줘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정확한 원인 조사보단 개발 면죄부 논리만을 찾다보니 급히 처리하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다시는 이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조사와 대책이 필요한데도 불구하고 구제역의 살처분처럼 급하기 짝이 없었다.
분명한건 육지의 유기물이 배출되는 하구의 똥구멍을 막고 해수를 들이지 않아 생긴 일이라는 것은 누구도 반문 할 수 없다.
지금의 상괭이 사건은 원인은 없고, 결과만 있는 우리나라가 가지는 막가파식 개발논리의 현주소이다.
원인 없이 결론지어지는 경우는 참 허탈하기 짝이 없다.
작년 우리에게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되는 아까운 우리 천안함의 젊은 청년들은 차가운 바다에 생명을 남기고 떠나갔다. 여기에서 보듯 원인 제공자가 없으면 사고사이지만 원인 제공자가 있으면 전사자가 되는 건 누구나 알 것이다. 그럼 묻고 싶은 부분이 여기에 있다. 상괭이가 죽은 원인은 단순 질식사인가? ,누가 원인을 제공했나. 무었이 이들을 죽게 했는지... 아직도 단순 자연사라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새만금 외해에선 단 한 마리의 상괭이도 죽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신이 주신 생명의 강을 막은 결과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결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 만년을 흘러온 강을 막고 분위기에 따라 어느 때는 골프장 짓겠다 , 여론에 밀리면 다른 계획을 세우고, 이거 아니면 다른 것 만들면 되지라는 식은 이미 초창기 식량증산이라는 계획이 사라진체 인간의 욕심과 정치적 발상으로 새만금을 바라보는 이상 새만금은 친환경적인 것과 더 멀리 갈 수 밖에 없다.
하루빨리 해수를 유통시켜 지역민과 더불어 이곳의 생명들을 지켜내고, 합의된 논리로 새만금을 만들어 가야 한다. 우리는 생명의 희생으로 우리에게 주고 있는 메시지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지구를 살려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우리는 우리에게 물려온 강과 바다를 막아 단절시켜 수많은 생명들과 환경을 파괴하고 있다.
이제 이 상괭이 떼죽음을 교훈으로나마 우리가 자연에 대한 무지와 생명경시에서 비롯된 개발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아야 한다.
비슷한 예로 4대강의 생명선인 많은 모래사장과 자갈밭, 그리고 버드나무군락이었던 둔치가 잔디밭으로 바뀌어야만 공원이 된다는 우리의 비생태적인 관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 파괴를 위해 정치에선 많은 안전장치들을 개발을 위해 풀어버렸다.
생태적인 곳을 비생태적이고 인위적인 공원으로, 더욱이 소중한 세금을 들여서까지 탈바꿈시키려는 관점은 어디에서 왔을까.
우리에게 자연이라는 것이 무었인지를 알려주려는 상괭이 떼죽음에 우리는 무었을 생각하고 있는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