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조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몇십 년 전에 돌아가셔서 보지 못했다.
증조할머니는 1966년 84세, 내 나이 열네 살 때 뇌졸중으로 돌아가셨다. 증조할머니는 고조부모 슬하 4형제의 맏며느리, 슬하에 3형제, 손자가 열하나, 손녀가 여섯이었다.
서른여섯에 남편(증조할아버지)이 돌아가셨다.
증조할머니는 뇌졸중으로 거동을 못 하고, 말문을 닫은 마지막 2년을 제외하면 건강하셨다.
굶주리는 친척들에게 양식을 나눠주셨고(받은 분들에게 직접 들었음), 자애로우면서 엄격하셨고, 여장부다우셨다. 그런 분도 뇌졸중으로 쓰러지니 한낱 환자였다. 식사는 본인 손으로 겨우 하셨고, 대소변은 장남인 나의 할아버지가 받아내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2년 동안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이 대신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1974년 3월 초, 내가 대학에 입학하던 날 73세에 돌아가셨다. 그 당시 73세는 살 만큼 살았다고 할 수 있는 나이였다. 할아버지는 목소리가 크셨고, 친구가 많았고, 얘기를 잘 하셨고, 잘못이라고 판단되는 일에 그냥 지나치지 않았고, 술도 잘 하셨으며, 주사(酒邪)도 좀 부렸고, 일을 싫어했다. 이런 할아버지를 증조할머니와 할머니는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할아버지는 장손으로 태어나 공부 못 배운 것에 대한 한이 많으셨다. 할아버지의 4촌 동생(동갑) 한 분은 머슴 둘을 데린 부잣집 장남이라 평생을 글깨나 읽으면서 일이라고는 하지 않았고, 8촌 형 한 분도 그랬다.
할아버지는 서당에 몇 달밖에 다니지 않았지만 웬만한 한자는 아셨고, 내가 30대 중반부터 고대 중국 고전을 공부하며 안 것인데, 할아버지는 사기, 여씨춘추, 논어, 소학, 효경, 회남자, 등 이런 중국 고전에 나오는 얘기들을 많이 알고 계셨다.
나는 외모가 할아버지를 많이 닮은 것 외에는 할아버지를 별로 닮지 않았다. 외모 외에 다른 면들을 반의반이라도 닮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할아버지는 건강하셨다. 오복 중의 하나인 치아도 돌아가실 때까지 이상이 없었다.
내가 대학 입학을 위해 진주로 떠나던 날 인사를 드렸더니
“너 이제 앞으로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한다. 이게 마지막이 될 것이다.”라고 하셨다.
나는 할아버지가 평소처럼 보여서 그런 말씀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입학식 날 밤 9시쯤 우체부가 전보를 갖다 주길래 받아보니 “할아버지 별세”였다. 알고 보니 감기에 걸려 폐렴으로 갑자기 돌아가신 것이다. 돌아가시는 날도 거동하셨다.
할머니는 1990년 86세에 돌아가셨다.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비교적 건강하게 사시다가 감기에 걸려 폐렴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슬하에 남매, 한국전쟁 때 사위의 전사, 미망인인 딸(52년생인 유복녀 딸이 있다.)이 서른아홉으로 죽는 불행을 겪은 것 외에는 인생을 비교적 편하게 사셨다.
증조할머니도 나를 무척 사랑하셨지만, 할머니의 나에 대한 사랑은 유별났다.
아버지는 1929년생 어머니와 동갑으로 2012년 84세에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점심을 잡수신 후 경로당에 놀러 가셨다가 경로당 앞에서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져 약 20시간 뒤에 숨을 거두셨다. 뇌출혈이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처럼 건강하지 못했다. 큰 병은 없었지만, 잔병이 많았다. 아버지는 보통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당에 다녔고, 한학을 공부했다. 아버지는 한글보다는 일어와 한문을 더 잘 하셨고, 성실하고, 빈틈없고, 지극한 효자였고, 엄격한 선비였다. 체질상 술을 못 하셨고, 쌍스러운 말과 허튼소리는 전혀 하지 않았다.
내가 ‘자유롭게 살기 위해’ 귀농했다가 아버지와 사고 차이로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아버지는 70대 말이 되자 죽음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했고, 받아들였다. 나름대로 죽음에 대한 철학을 가지셨다. 그리고 죽음을 예지했다. 돌아가시기 50일 전에 재산을 증여하셨고, 한 달 전에 예금을 어머니 앞으로 돌려 앉혔고, 하루 전에 대중목욕탕에 다녀오셨다.
어머니는 현재 96세로 생존하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일 년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몸과 마음이 눈에 띄게 나빠져, 이러다가는 돌아가실 것 같아 건넛마을 본가에서 농장 집으로 모시고 와 현재 12년째 모자(母子)가 함께 살고 있다.
어머니는 70 중반까지는 감기 한 번 안 걸릴 정도로 건강하셨는데, 70대 말이 되면서 몸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했다. 큰 병이 아닌 잔병이었다. 그러다 4, 5년 전부터 건강이 나아지더니, 올해 초부터 다시 나빠지고 있다. 변비, 치통(痔痛), 허리와 팔다리 결림, 가려움증, 등 여러 증상이다.
여태까지는 정신은 괜찮았는데, 최근에 와서 날짜, 사람 이름, 물건 둔 곳, 한 일을 자꾸 잊어버린다. 거의 매일 짜증을 내고, 한탄하고, 원망하고, 걱정한다. 아플 걱정, 손자 손녀 결혼 걱정, 날씨 걱정, 농사 걱정, 참으로 걱정이 많다.
외갓집은 우리 마을에서 7Km 떨어진 밀양 변 씨 집성촌으로 큰 마을이다. 어머니는 위로 3녀 아래로 3남, 6남매 중 맏이다. 두 여동생(93세 90세)은 보통학교를 나왔지만, 어머니는 학교에 가지 못했다. 외할머니가 젊을 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어머니는 열 살이 안 되어 밥을 짓고 빨래하고, 가사 일을 하셨다. 어머니는 학교에 다닌 적이 없지만, 한글은 잘 읽는다. 외할아버지가 마을의 글 모르는 사람들을 모아 한글을 가르칠 때 어머니도 함께 배워서 한글은 어릴 때 깨쳤다. 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일은 한글을 전혀 모르는 마을 할머니들보다 더 무지하다.
어머니는 본인이 반드시 가야 하는 의무사항이 아니면 면사무소나 농협 등에 가지 않았다. 그나마 가야 할 때는 반드시 아버지가 데리고 갔다. 시장 보기는 아버지가 많이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는 내가 대신 한다.
외할아버지는 지덕체(智德體) 인격을 갖춘 선비셨다. 자랑하지 않았고, 차별하지 않았고, 배려심과 공감력을 지니셨고, 소통되셨다. 외할머니와 여러모로 달랐다. 건강하셨고, 80세쯤에 별 고생 안 하시고 돌아가셨다.
외할머니는 경주김씨, 무남독녀로 아버지 되시는 분이 60리 떨어진 곳에서 선산김씨 집성촌의 최고 부잣집이고 위세 있는 집에 장가들어 처가 동네에서 살다 돌아가셨다.
외할머니에 대한 나의 기억은 내가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이나 1990년도 초 80대 중반에 돌아가시기 전이나 “아야, 아야” 하는 앓는 소리와 탄식, 그리고 옛 소설책을 쌓아두고 읽으시던 모습이다.
외할머니는 사시사철 버선을 싣고 계셨는데, 나는 한 번도 외할머니의 발을 본 기억이 없다.
시부모를 시집와서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모신 막내 외숙모(75세)가
“너의 엄마, 늙으니 꼭 너의 외할매 같다”라고 하셨다.
외숙모가 그렇게 말씀한 지 불과 한 해 전이었는데, 외숙모는 현재 치매가 심해 요양원에 계신다.
병들고, 죽는 것은 자기 의지와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닌 것 같다.
운이 크게 작용한다.
개인의 소득 결정 요인은 운이 80%, 자기 노력이 20%라고 한다. ‘당신의 소득의 80%는 태어난 순간부터 이미 정해졌습니다(홍콩과학기술대 김현철 교수). ‘태어난 나라(50%), 부모의 교육 수준과 경제적 능력, 유전이 30%.’
건강 또한 소득과 같다고 한다.
‘건강의 결정 요인은 우연(돌연변이) 50%, 유전 30%, 환경이 20%다’
‘암에 걸리는 것도 80%가 운에 달렸다.’라고 한다.
나는 추하게 늙지 않고, 덜 아프고, 큰 고통 없이 죽기 위해 노력은 조금 하겠지만, 노병사(老病死)는 운에, 그리고 우연에 맡긴다.
다만 병들고 죽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날까지 자유롭게 살고, 배려심과 공감 능력을 기르고, 자연 훼손과 공해 배출을 최소화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