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말기 화백 정술원(두산)소개
정술원(鄭述源) 斗山(두산1885~1955) 정술원(鄭述原)의 출신지는 공주 탄천면 국동리(菊洞里) 182번지이며 향년 71세로 작고했다. 玄菴(현암) 鄭成源(정성원)과는 재종(再從)간이고 松齎(송재) 趙東旭(조동욱)은 조카사위이다. 이렇게 보면 斗山의 친인척은 모두 그림에 소질이 있었던 것 같다. 斗山은 평생동안 명절(名節)때를 빼놓고는 거의 집을 비웠다고 한다. 그의 방랑벽(放浪癖)이 단순히 현실탈출의 욕구 때문인지, 혹은 재능을 펼쳐보일 여건을 찾고자함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족적(足迹)따라 여기저기 작품을 남기고 있다. 斗山의 作品에 화제(畵題)가 있다.
水泡孤村遠 (물가 외로운 마을 멀기도 한데) 山圃一經斜 (山圃로 가는 길은 오르막 길) 不知深樹裡 (깊은 숲 속은 알지 못하지만) 還住幾人家 (몇 사람이나 돌아와서 살까)
斗山(두산)은 절지(折枝), 영모(영毛), 화훼(花卉), 인물(人物)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작품을 남겼으나 그 가운데서도 산수화(山水畵)를 가장 잘 그렸다. 초기 작품은 중국화풍이 많았는데 만년(晩年)에는 개성있는 그림을 그렸다. 누구 못지 않은 재능을 가졌으면서도 일제강점기 시절이라 충청도를 돌며 화가로서 일생을 마친 朝鮮末葉조선말엽의 화가 정술원! 그는 정태식부동산박사(재증손)가 탄천초등학교3학년때 운명하였는데 귀골이 장대(키 175cm 체중 80kg)하고 두상도 예쁘고 얼굴은 호남형으로 얼굴,눈,코, 입,귀가 매우크며 항상 남을 배려하였으며 성격은 아주 호탕하였다. 미식가이며 정태식 박사 조모인 조차순 족하 며누리에게 추석명절과 설 명절에 그림 한두점씩 주시였다. 부와 조부, 증조부는 조선시대 진사 시험에 합격를 하여 지방관리 벼슬을 하였으며,고조부는 과거시험에 알성급제한 형조판서 정조영 이다, 5대조는 진사합격, 6대조는 과거급제하여 영조때 속대전 편제 주도자인 정하언, 7대조는 공주목사 정무이다 선비집안에 태어나 글과 문장 그림을 즐기였다. 화판에 그림그릴때 붓도 큰붓 2개를 한손 오른쪽에 잡고 일필휘지로 산수화, 난초, 묵화, 다양한 민속화를 남기였다. 예산수덕사 대웅전 부처님 옆 보살들의 그림을 직접그리었다. 일제강점기에 선비가 그림과 글로 여생을 보내니 가세는 넉넉지 못하게 살며 여생을 마치였다. 충청 서울 지역에 많은 작품이 남아있다. 제자로 서울대학교 서세원교수(공주유구출신)가 있다.
가족을 소개하면 정술원화백은 조부는 정필현(1820년~1899년 80세, 통정대부)와 조모 여흥민씨(1830~1899, 70세)와, 아버지는 순(洵,진사,1855년생)와 모 파평윤씨 (1854년생)의 2남으로 1885년에 출생하여 1955년에 작고하였다(71세)부인은 해주오씨(1882~1929년,48세) 두딸을 나았고 둘째부인은 달성서씨(1905년생으로 1936년32세), 셋째부인은 파평윤씨(1904년~)1남 1녀를 두엇으며 조부모와 부모 , 두산의 묘소는 국동에 있다. 손자로 정수택(장) 등 오남이 서울 에 살고있다.
첫번째부인과 사별(자매), 두번째 부인(남매)과 사별후 셋째부인 윤尹석조와 슬하에 딸을 두었다. 현재는 그의 외손자 부여출신 이준호(李俊昊)가 용인지역에서 서양화가로 활동 중 이다.
0. 두산(정술원) 화백 정술원(1885~1955)은 정하언공의 고손으로서 충남 공주시 탄천면 국동마을에서 자란 영일정씨 23대손의 서화가이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오롯이 겪어왔다. 스승도 없이 스스로 그림을 익히고 그렸다.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었고 작품들은 태작(駄作)이 한 점도 없는 성실함의 산물들이다. 정술원은 일평생 공주 및 부여 등에서 그림을 주로 그렸으며, 거의 충청지역을 벗어나지 않았다. [사진 56] 정술원 화백
[사진 57] 국동리 다라티 고개 정술원 화백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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