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노비의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나라가 약한 것도 이 때문이요, 백성이 가난한 것도 이 때문이다.”
노비제도를 바라보는 성호 이익의 시각이다. 성호가 살았던 조선은 양반의 나라였다. 조선시대 노비는
토지와 함께 양반의 중요한 ‘재산’이었다. 노비는 주로 세 가지 경로를 통해 만들어졌다. 전쟁에서 패하여 붙잡힌 포로, 반역 같은 중범죄를 지은 죄인, 빚을 갚지 못한
채무자가 그 대상이다. 노비도 여러 가지 부류와
이름이 있다. 주인과 함께 살며 일을 하는 노비를 솔거노비라 하고, 따로 살면서 제 가정을 꾸리며 공물을 바쳤던 노비를 외거노비라 불렀다. 관청에 소속된 관노비와 개인이 주인인 사노비로 구분하였다. 노비가 조선 인구의 절반을 차지했던 때도 있었다. 이처럼 많은 인구가 노비로 산 것은 주인에게 평생 신분이 예속되는 노비의 삶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농사를 지을 땅과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노비들이 잠시나마 ‘신분해방’을 꿈꿀 기회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임진왜란이다. 아래는《성호사설》<인사문>에 실린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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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도의 '단원풍속도' 중 '벼타작'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적이 입성하기 전에 난민들에 의해 여러 궁궐과 관청이 함께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이때에 먼저
장례원을 불태웠는데 장례원은 노비의 문서를 간직한 곳이다. 그런데 고려 때의 노예군들이 공모하여 먼저 그 장적을 불태웠으니, 이것이 또 고금(古今)의 한가지이다.”
왜란과 호란은 조선
사회를 뿌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앞에서 보았듯이 노비들은 전쟁과 같은 위기상황을 통해 신분 해방을 실현하려 했다. 노비들은 신분 해방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가장 많이 선택한 것은 도망이다. 자신이 살던 곳에서 도망쳐 외딴 섬이나 깊은 산중으로 숨어들었다.
양란 이후 도망가는 노비들의 수는 한결 늘어났다. 노비주인 양반들은 ‘추노(推奴)’를 벌였고, 나라에서도 도망간 노비를 잡기 위한 추쇄도감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노비들의 도망을 막을 수는 없었다. 노비들이 도망가는 방법만 선택했던 것은 아니었다.
성호가 세 살이 되던 1684년(숙종 10)에 있었던 일이다. 서울에 ‘검계(劍契)’와 ‘살주계(殺主契)’라는 비밀결사조직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들을 체포하여 심문한 포도청의 기록에 따르면 서울 청파 근처에 살주계가 있었고, 계원들은 모두 검을 차고 있었다.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던 것은 살주계의 행동강령이다.
그것은 “양반을 죽일 것” “양반 부녀자를 겁탈할 것” “양반의 돈과 재물을 빼앗을 것”이다. 체포되지 않고 도망친 살주계원들이 남
대문과 언관(言官)들의 집 대문에 “우리가 모두 죽지 않는 한 끝내는 너희들의 배에 칼을 꽂으리라”라고 쓴 방을 붙였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주인 양반들에 대한 노비들의
분노와 원한이 얼마나 컸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성호는 어떻게 노비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물론 성호의 집안에도 노비들이 있었다. 성호의 특별한 점은 노비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성호가 한동안 여염집에 기숙했는데, 이곳에서 노비들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성호사설》에서 밝히고 있다. 어느 날 성호가 방안에 있는데 벽 뒤편에서 여러 노비가 모여서 서로 원통함을 하소연하는 소리가 들렸다. 성호가 귀를 기울여 노비들의 이야기를 들어 본 결론은 “그들의 원통함은 다 까닭이 있다”는 것이었다. 많은 노비가 본래 양인이었으나 “흉년이 들어 떠돌 적에 혹 의탁하여 노역하다가 노비가 된 것”이었다. 거듭된 흉년과 양반 지주들의 고리대금업은 가난한 평민들을 노비로 내몰았던 것이다.
성호가 노비문제에 이토록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그가 청?장년기를 보낸 숙종시대에는 정권을 담당하는 정치세력이 한꺼번에 바뀌는 환국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성호는 하루아침에 사대부가 역적이 되는 경우를 숱하게 목격했다. 역적으로 몰리면 당사자는 사형을 당하지만,
부인과 자식들은 관청의 노비가 되었다. 당쟁으로 부친과 형을 잃은 성호 자신도 하마터면 노비가 될 수 있었다. 물론 이것 때문만은 아니다. 성호의 궁극적 바람은 부강한 조선의 건설이었다. 부강한 나라를 건설하려면 열심히 노력하고 일하면 누구나 성공하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러나 부자 양반들은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 노비들의 노동으로 편히 놀고먹었다. 성호는 이런 존재를 ‘좀’이라고 불렀다. 좀은 의복이나 귀중한 책을 파먹어 못 쓰게 만드는 몹쓸 벌레다. 성호는 이런 좀 같은 존재가 속히 사라져야 부강한 나라가 된다고 확신하였다.
성호가 농업 생산성을 가로막는 여섯 가지
좀벌레 중 첫째로 꼽은 것이 바로 노비문제였다. 또한, 그는 세상에서 가장 혹독한 법으로 노비법을 꼽았다. 한 번 노비가 되면 당대는 물론 후손까지 영원히 노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노비제도의 핵심 법안인 ‘종모법(從母法)’은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성호가 비판했듯이 “노비의 자식은 어미를 따르기로 하였다면, 항상 어미를 따르는 것이 원칙인데 이러한 원칙이 한결같이 적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노비를 바라보는 성호의 시각은 놀랍고 신선했다. 그것은 바로 “노비 중에도 성인(聖人)과 같은 인재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을 발굴해서 쓸 길이 없으니 불행한 일”이라며 탄식하던 그는 “양반은 귀하고 노비는 천하다는 선입견을 버려야” 하며, “사람은 누구나 학문을 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노비라는 이유로 이러한 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너무나 가혹한 일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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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매매명문 [奴婢賣買明文] 1718년(숙종44)에 이 생원댁 노 개금이 상전댁 노 1구를 윤 진사댁 노 춘망에게 방매하면서 작성한 명문.노비를 확보한 경우 관청에 신고를 해서 인증서를 받아야 했다. 신청서에 해당하는 소지, 노비가 된 원인을 기록한 명문, 노비주와 증인들의 진술을 기록하는초사를 제출하면 관청에서 사실관계를 확인한 뒤에 인증서에 해당하는 입안을 발급했다. |
성호는 구체적인 사례를 들었다. 노비의 신분이지만 재상인 주인의 배려로 아들 없는 양반의 양아들로 입적되어 과거에 급제해 한성판윤과 형조판서까지 지낸 중종시대의 반석평(?~1540)이란 인물이다. 개국공신인 정도전의 어머니나 세종대의 명재상으로 활약한 황희의 어머니 역시 노비였다. 성호는 이러한 우리 역사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노비에게도 똑같은 기회를 부여하고 평등하게 대우하여 자기가 타고난 재능과 노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지원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호는 노비들이 속전을 주고 풀려나는 방안을 제시했다. 만약 돈이 없는 노비에게는
연기해 주거나 관에서 대신 내도록 하자는 것이다. 노비제도의 개선을 임금의 명이나 관의 힘을 통해 이루기보다는 오히려 양자-노주(奴主)와 노비의 이해에 기초하여 실현 가능한 방법을 통해 개선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이었다. 한꺼번에 많은 노비를 해방하려 하면 양반들이 방해하여 성공하기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노비들을 풀어주더라도 생활대책을 먼저 마련해 주지 않으면 무의미했다.
성호는 몇몇 마음씨 좋은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제도를 마련하여 시행하는 것이 성공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노비를 해방하자는 성호의 개혁안은 제자들로부터 다산에게까지 퍼져 나갔다. 성호의 개혁안은 그의 사후 30여 년이 지난 뒤 국왕 정조가 상당 부분 받아들였다. 정조의 개혁안은 《홍재전서》<노비인>에 들어 있는데 “우선 노비 규정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대신 고용하는 법을 만들어서 대물림은 않고 자신에게만 한하도록 조처를 하고…그 영(令)을 발표하려고 생각했다”라는 구절이다. 노비제도를 폐지하려는 정조의 뜻은 분명했으나 급작스런 죽음으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1801년 1월 28일, 선왕 정조의 유지를 받들어 시행한다며 창덕궁 돈화문 밖에서 1,369권의 노비안을 불태웠다. 이때 중앙 관청에 속한 공노비 6만 6,067명이 해방되어 양인이 되었다. 물론 이러한 조정의 결정은 정조의 결단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사람
다운 대접을 받기 위한 노비들의 끈질긴 저항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그러나 노비 대다수를 차지했으며, 성호가 “이 땅에서 가장 불쌍하다”고 했던 사노비들은 이때로부터 93년이 지난 1894년 갑오개혁 때 비로소 해방되었다. 노비제도가 완전히 폐지되면서 노비는 조선에서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한국의 눈부신 경제
성장은 열심히 노력하면 누구나 출세하고 성공할 수 있는 풍토가 마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 때 “개천에서 용 났다”라는 말이 통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부귀를 대물림하려는 부자들의 욕망에 눌려 가난한 서민들의 살림은 갈수록 궁핍해지고 있다. 성호가 노비제도를 해결하는 방책을 마음씨 좋은 몇몇 사람들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나라가 나서서 제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처럼 정부는 가난한 서민들을 살리는 정책을 서둘러 마련해야 할 때이다.
김영호(한국병학
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