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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문화원에 가면 12 (마지막회) | ||||
신라최초 금관을 보관하던 ‘금관고’ 이야기(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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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고와 문화재 피난 이야기
광복 직전 태평양전쟁이 일본에 불리해지고, 미국의 일본열도에 대한 폭격이 시작되며 조선본토에도 폭격이 우려되면서, 서울에 있던 우리문화재의 대피에 비상이 걸렸다. 일부 중요한 것을 견고하게 지어진 경주 금관고에 이관키로 하고, 1945년7월10일 직원 3명이 내려와 지하격납고에 대피를 시킨다. 또한 7월25일 당시 경주박물관장과 경주군수는 경주박물관 방호와 금관고 진열품 보존에 대한 보안대책도 서둘러 강구하게 된다. 다행히 8·15해방이 되면서 금관고에 피난 왔던 유물들이 10월10일 상경, 서울 중앙박물관에 안착하게 되었다. 이 금관고는 위난 시 우리문화재의 은신처 역할을 하기도 했다. 6·25동란이 발생하면서 정부는 한국은행에 보관하고 있던 금덩어리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BOA(Bank of America)로 피난시키는 데, 이승만 대통령은 특별히 국방부장관에게 경주 박물관에 있는 금관을 비롯한 금제 유물도 함께 피신시키도록 명한다. 공식적으로 처음 우리유물이 해외로 피난을 가게 된 것이다. 이 유물들은 외국에 나갔던 참에 1958년부터 미국 8개 도시를 순회 전시되면서 우리문화의 우수성을 외국에 알리는 좋은 계기가 되었고, 또한 무사히 귀국하였다.
어린이 박물관학교로도 사용된 ‘금관고’
1954년10월 고 윤경렬 선생 중심으로 경주여중 교실에서 발족한 어린이박물관학교가 교실사정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는 데, 한국동란으로 마침 중요유물이 미국으로 피난간 사이에 이 건물을 교실로 사용함으로써, 어린이들이 경주 박물관을 산 교육장으로 삼아 신나게 들락날락 했었다. 이러한 애환과 사연이 깃던 금관고도 1978년에 헐리게 된다. 1975년 인왕동에 새 박물관이 지어져, 모든 유물이 이사를 갔음에 따라 금관고의 역할이 없어지게 됐다. 그리고 70년대부터 우리민족정기 중흥운동이 시작되면서, 우리 땅에서 차츰 일제강점기 때의 흔적들이 지워지기 시작했다. 경주시민의 자존심과 거액의 헌금으로 지어진 역사적인 이 건물이, 이유야 어떠하든 구 박물관 자리에서 사라진 건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끝)
이종기 문화유산해설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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