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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일시: - 1구간: 2024. 6. 20.(목), 음력(5. 15.), 일출 05:13~일몰 19:50
- 2구간: 2024. 6. 23.~24.(일,월), 음력(5. 18.~19.), 일출 05:14~일몰 19:52
●산행지: 식장지맥(食藏枝脈) 2구간 졸업
●산행코스: 간운리마을-금남정맥능선-식장지맥분기점-577m봉-513.9m봉-양회임도-진악산분기봉-열두봉재-월봉산(542.4m)-월봉(498.7m)-월봉재-382m봉-화림재-갈림길-323m봉-띄울재-324.8m-사갑재-305.7m봉-소라니재-301.5m봉-대정재-328.7m봉-만악골재-380.6m봉(TJB방송중계탑)-임도사거리-큰고개-326.1m봉-장령지맥분기점-당고개-336.6m봉-수리넘어고개-288m봉-달기봉-민족자주통일비-만인산갈림길-만인산(537.8m)-만인산갈림길-만인산휴게소-태봉재-363m봉-추부갈림길-정기봉(573.3m)-지봉산(503m)-502m봉-472.2m봉-508.2m봉-483m봉-마달령/머들령-388.1m봉-410.4m봉-명지봉-445m봉-국사봉(506.2m)-닭재-계현산성(324.9m)-꼬부랑재-340.8m봉-망덕봉-산내초교갈림길-379m봉-곤룡재-411m봉-사양리산성지(443.1m)-425m봉-팔각쉼터-426.4m봉-낭월임도-참호봉-427m봉-동오리재-고산사갈림길-구절사갈림길-원형참호봉-세천공원갈림길-580.7m봉-세천공원갈림길-해돋이전망대-식장산(596.7m)-식장루-개심사갈림길-302.1m봉-세천공원버스정류장-세천고개(128.1m)-201m봉-비룡배수지-줄곧고개-227m봉-갈고개-갈현성-비룡임도-군부대갈림길-274m봉-조망바위-솔랑산(313.8m)-옥정사갈림길-바탕골약수터갈림길-헬기장-길치고개-질현성-전망대-고봉산성-고봉산(334.7m)-391m봉-389m봉-가양임도-귀바위-374.4m봉-절고개-성재산(399.1m)왕복-계족산성갈림봉-367.9m봉-계족산(423.9m)-봉황정-쉼터-387m봉-216.5m봉-안부-와룡고개-새뜸고개-장동고개-방두고개-상서공장지대-상서교덕암삼거리-선바위정류장-경부고속도암거-장고개-목상초교후문-문평리사거리-한국타이어대전공장 정문-한국타이어 서문-갑천/금강합수점
●먹거리: - 1구간 생수3리터, 빵4, 사탕5, 케찹2,
- 2구간 생수 3리터, 버터롤클레식빵, 사탕6, 피자토마토케찹6, 갈릭소스3, 코울슬로2
●준비물: - 1구간: 스틱, 휴대용경광동, 전지가위, 머리띠, 햇빛가리개, 충전지, 충전짹2, 손수건, 면수건, 휴지, 물티슈, 팔토시, 안대, 귀마개, 구급약, 여분의류, 띠지11
- 2구간: 그물텐트, 1회용 우의, 헤드랜턴, 햇빛가리개, 충전지2, 충전짹, 머리띠, 손수건, 면수건, 휴지, 물티슈, 팔토시, 안대, 귀마개, 구급약, 보온의류, 여분의류, 띠지15
●거리: 약 71.1Km(21.6km+49.6km)
●소요시간: 29.47h(9.45h+20.02h)
●누구랑: 나홀로
●경비: - 1구간 경비: 기차23,700, 기차16,000, 편의점2,050원
- 2구간 경비: 기차23,700, 아침2,500원, 편의점5,100원, 저녁13,000원, 편의점6,600원, 찜질방14,000원, 아침5,400, 아이스크림4,000, 기차8,300, 뒤풀이1,1000
●날씨: - 1구간 18~32, - 2구간 20~30, 비 약간
●산행경과:
* 6. 20.(목) : 21.6Km
- 08:08 : 백암사 출발
- 09:15 : 바람골산(622.7m)
- 09:26 : 식장지맥분기점
- 10:25 : 열두봉재(도로)
- 10:40 : 열두봉재
- 11:02 : 월봉산(542.4m)
- 11:26~34 : 행동식
- 11:40 : 월봉(498.7m)
- 11:58 : 월봉재
- 12:13 : 문배나무(화림리)
- 12:23 : 350.7m봉
- 12:37 : 화림고개(245m, 수도)/ 순목마을
- 13:05 : 띄울재(275m, 수도)
- 13:15 : 324.8m봉
- 13:31 : 신동리재
- 13:41 : 305.7m봉
- 14:00 : 소라니재(235m)
- 14:13 : 310.5m봉
- 14:19 : 대정재
- 14:23~30 : 행동식
- 14:36 : 328.7m봉
- 14:48 : 두곡재
- 15:07 : 380.6m봉
- 15:23 : 큰고개
- 15:38 : 326.1m봉
- 16:00 : 금성산정상(437.8m)
- 17:00 : 성황당고개
- 17:26 : 326.1m봉
- 17:42 : 336.6m봉
- 18:14 : 수레넘어고개/ 오씨행단/ 세븐일레븐
* 6. 23.(일) : 27.1Km
- 09:08 : 수레넘어고개
- 09:50 : 달기봉(386.1m)
- 10:09~27 : 만인분맥분기점(460m)
- 10:17 : 만인산(537.8m)
- 10:54 : 태조대왕태실
- 11:30 : 정기봉(573.3m)
- 11:52 : 지봉산(502.1m)
- 1233~40 : 행동식
- 12:54 : 508.2m봉
- 13:19 : 483m봉
- 13:36 : 머들령
- 13:43 : 마달봉(375m)
- 13:48 : 388.1m봉
- 14:07 : 명지봉(408m)
- 14:11 : 406.2m봉
- 14:20 : 404.2m봉
- 14:44~56 : 국사봉(506.2m), 행동식
- 15:24 : 닭재(245m)
- 15:36 : 계현산성
- 16:16 : 망덕봉(439.9m)
- 16:39 : 곤룡재
- 17:04 : 411.1m봉
- 17:15 : 사양리산성
- 17:34 : 낭월임도종점
- 18:00~06 : 행동식
- 18:25 : 삼거리
- 19:00 : 식장산(596.7m, 해돋이전망대)
- 19:13 : 헬기장
- 19:16 : 식장루
- 20:34 : 세천공원
* 6. 24.(월) 22.5Km
- 05:55 : 세천공원
- 06:06 : 세천고개
- 06:40 : 비룡동 줄골
- 07:05 : 갈고개
- 07:45 : 능성(342m)
- 08:09~15 : 행동식
- 08:25 : 길치고개
- 08:40 : 326m봉
- 08:48 : 고봉산(334.7m)
- 08:58 : 질현산(422m)
- 09:06 : 387.5m봉/ 전망대/ 산불감시카메라
- 09:19 : 375m봉
- 09:31 : 팔각정(남도정)
- 09:42 : 373.4m봉/ 팔각정
- 09:48~10:07 : 절고개
- 10:19 : 성재산(399.1m)
- 10:35 : 절고개
- 10:46~55 : 행동식
- 11:15 : 계족산(423.6m)
- 11:18 : 봉황정
- 11:50 : 임도/ 정자
- 12:08 : 173.1m봉
- 12:23 : 와동봉(222m)
- 12:33 : 장동고개(165m)
- 13:00 : 상서행복주택편의점
- 13:40 : 덕바위
- 13:43~59 : 행동식, 휴식
- 14:54 : 갑천/금강 합수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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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부구간거리 52.2km(57km)
간운리마을-1.7km-지맥분기점(610m)-1.4km-583m봉-0.9km-513.9m봉-1.5km-월봉산(542.9m)-1.0km-월봉(499m)-2.4km-순목고개-2.7km-소리니재-2.1km-380.6m봉-0.8km-큰고개-1.3km-금성산(439m)-1.3km-성황당고개-1.2km-336봉-0.9km-수리넘어고개-1.9km-만인산(537m)-1.6km-태조대왕태실-1.3km-정기봉(580m)-1.14km-501m봉-2.5km-541.4m봉-1.2km-머들령-1.6km-명지봉(404.2m)-0.94km-국사봉(506m)-1.6km-닭재-1.8km-망덕봉(438.8m)-1.0km-곤룡재-1.6km-임도종점-1.6km-세천갈림길-1.4km-식장산(623.6m)-1.8km-302m봉-2.9km-비룡삼거리-1.4km-갈현성-1.3km-능성(314.7m)-1.5km-길치고개-0.8km-387m봉-2.1km-절고개-1.8km-계족산(423.6m)-1.8km-임도-1.5km-장동고개-1.9km-대창아파트-2.2km-경부고속국도-2.5km-덕암축구센터-3km-금강/갑천합수점
* 구간거리
- 접속: 오항리고개~지맥분기점 4.5km
- 상개직마을(백암사)~지맥분기점 2.4km
- 남이면 상금리 윗간운리마을~지맥분기점 1.7km
- 지맥분기점~닭재 33.3km
-. 지맥분기점~큰고개 14.3km
-. 큰고개~수레넘이고개 4.7km
-. 수레넘이고개~닭재 13.3km
-. 수레넘이고개~태봉재/ 만인산푸른학습원 3.2km
- 수레넘이고개~세천고개 26.9km
- 태봉재/ 만인산푸른학습원~세천고개 24km
-. 만인산푸른학습원~닭재 10.1km
-. 닭재~세천고개 13.6km
-. 식장산~세천고개 5.8km
- 세천고개~금강/갑천합수점 22.5km
-. 세천고개~계족산 9.5km
-. 계족산~지맥합수점 13km
* 식수 보충 및 참고사항
- 금산시내버스터미널 근처 여관: 세종장(35,000원), 세운장여관(33,000원)
- 화림고개: 화림리 순목마을 인가, 버스정류장
- 수레넘어고개: 다복한식뷔페, 편의점(세븐일레븐), 무인텔
- 태봉재/ 만인산푸른학습원: 물 보충 가능
- 닭재: 낙천약수터(좌측 100m)
- 닭재~덕산마을버스정류장 약 1.2km 0.30h소요
- 덕산마을버스정류장~대전역버스정류장(막차 22:30, 18분 간격): 501번버스, 1h소요
- 대전역광장 길건너에서 오른쪽으로 4분거리 대전역버스정류장 501번 탑승 삼괴동 덕산마을버스정류장 하차
- 식장루: 푸드트럭(야간)
- 새천고개: 음식점
- 킹스불가마사우나: 세천고개에서 611번 버스로 판암동 하차, 608번 환승, 판암역사거리에서 도보 10분, 동구청 옆
- 무더위쉼터 수도: 은진송씨 재실앞 비룡마을
- 길치고개: 보현사
- 계족산 절고개/ 임도사거리: 발씻기용 수도, 막걸리 장사
- 상서 행복주택: 편의점(gs25)
- 산막석재: 소머리국밥, 양념통닭
- 목상동: 편의점
* 식장지맥 분기점 가는 교통편
- 서울경부~금산터미널: 06:30, 08:05, 11:30, 13:30, 15:05, 18:40, 2.30h, 14,000~20,400원
- 서울역~대전역 ktx: 05:03, 05:13, 05:28, 05:38, 1h, 23,700원
- 대전역~대전복합터미널: 대전역 서광장 611번 버스, 0.10h
- 동서울~대전복합터미널: 06, 06:50, 07:40,~14:30, 15:10, 15:50, 17:10,~21, 22:10, 2h, 12,400~19,900원
- 대전복합터미널~금산행 시외버스: 06:30, 06:50, 07:20,~16:10, 16:40, 17:20, 17:50, 18:20, 0.54h, 5,000원
- 금산터미널~상금마을 택시: 23,300원
- 금산 시내버스 한일교통(주)정류장 610번버스: 윗간운리 08:10, 14:35, 0.40h, 1,200원
- 금산콜택시: 041)752-1122, 041)753-1000
- 태봉재 태조대왕태실~태실주차장~추부버스정류장
- 금산행 고속버스 마전터미널~501번버스~만인산휴양림입구버스정류장
- 닭재~삼괴동 덕산마을버스정류장~501번 버스~대전역: 22:30분 막차, 18분 간격, 1시간 소요
- 수레너미고개: 대전역~추부 501번 버스, 1h, 추부에서 도보 15분, 택시 이용 가능
- 대전역~501번~삼괴동 덕산마을 하차~닭재: 대전역 길건너 오른쪽으로 3분 대전역버스정류장
* 합수점에서 서울 올라오는 길
- 합수점~한국타이어정류장: 704, 705번 버스로 신탄진역 이동, 0.20h
- 금강1교~신탄진역 정류장 1.5km
- 신탄진역~서울역: 무궁화호(8,300원)
- 신탄진역~천안역(3,600원), 천안역에서 승차권 QR코드로 국철1호선 급행 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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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장지맥(食藏枝脈)이란
식장지맥은 금남정맥에 딸린 6개의 지맥 중 하나였으나 신 산경표에서는 금남기맥에서 분기한다. 주화산에서 부여의 낙화암으로 이어지던 산경표 금남정맥이 충남 금산군 남이면과 진산면의 경계선에 있는 대둔산 남동쪽 인대산(661.8m)과 622.7m봉 사이 무명봉(610m)에서 북동쪽으로 분기하여 월봉산(542.4m), 월봉(498.7m), 금성산(439m), 달기봉(386.1m), 만인산(537.8m), 정기봉(573.3m), 지봉산(503m), 망덕봉(439m), 식장산(596.7m), 고봉산(334.7m), 성재산(399.1m), 계족산(423m), 장녀봉(216.5m), 와등봉(221.8m)을 거쳐 대전 대덕구 문평동 갑천이 금강에 합류하는 지점에서 미호리의 대청댐으로 이어지는 도상거리 약 56.1km, 실거리 약 65km의 산줄기로 충남 금산군 남이면과 진산면 경계를 이룬 인대산 부근에서 분기하여 금산군을 지나고, 만인산에서 명지봉 구간에서 금산군과 대전광역시를 경계 짓고, 명지봉에서 식장산 구간까지 충북 옥천군과 대전광역시를 경계지은 후 식장산 이후 대전광역시를 통과해서 대덕구 문평동에서 갑천과 금강의 합수점까지 이어진다. 최고봉인 식장산의 이름을 가져와 식장지맥이라 하는데 금성산에서 금산, 영동 등 금강 서쪽 분수령인 장령지맥이 다시 분기한다. 왼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유동천. 갑천을 거처 금강에 들고, 오른쪽의 물은 봉황천 추풍천이 되어 금강에 든다. 지금은 만인산에서 부터 대전 둘레길과 함께하여 날머리까지 이어지는 산줄기이기도 한다.
* 식장지맥 개념도
* 식장지맥을 지나는 동네
* 금산군(錦山郡)
현재의 금산군이란 행정구역상의 명칭은 1914년 3월 1일부, 폐합으로 옛 금산군(錦山郡)과 진산군(珍山郡)을 병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옛 금산군(錦山郡)은 백제시대에는 진내군(進乃郡)또는 진내을군(進乃乙郡)이라 했는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경덕왕때 진예군(進禮郡)이라 고치고 고려초에 진예현(進禮縣)으로 하였다가 1305년(고려 충렬왕때 31년)에 금주군(錦州郡)으로 승격시키고, 부리현(富利縣), 청거현(淸渠縣), 무풍현(茂豊縣), 진동현(珍同縣)의 5현을 소속시켜 지금주사(知錦州事) 금주군(錦州君) 김신(金侁)을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였으며 오늘날 금산이라는 지명이 있게 하였다. (고려사제57권) 1413년(조선 태종 13년) 이에 따라 금주군(錦州郡)을 금산군(錦山郡)으로 개칭하여 조선말까지 이르렀다. 옛 진산군(珍山郡)은 백제시대에는 진동현(珍同縣)이였는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황산군(黃山郡)의 속현(屬縣)으로 하였다. 고려초에 옥계부(玉溪府)로 고쳤다가 1305(고려 충열왕 31년) 금주군(錦州郡)에 소속시켰다. 그 후 1390년에 다시 고산현(高山縣)의 속현(屬縣)으로 한 것을 조선에 와서 1393년(태조2년) 에 만인산(萬刃山:胎峰)에 태조의 태(胎)를 모신후 진주군(珍州郡)으로 승격시키고 지진주사(知珍州事) 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으며, 1413년(조선 태종 13년)에 이에 따라 진산군(珍山郡)으로 개칭하였다. 1896년 8월 4일 칙령 제36호 (則令 第36號)에 13도 실시에 따라 충청남도 공주부(忠淸湳道 公州府)의 금산군과 진산군을 전라북도로 편입되었다가 서두에 기술한 바와같이 1914년 3월 1일 부, 폐합으로 진산군을 병합하여 현재의 금산군(錦山郡)이라 칭하고, 금산면(錦山面), 금성면(錦城面), 제원면(濟源面), 부리면(富利面), 군북면(郡北面), 남일면(南一面), 남이면(南二面), 진산면(珍山面), 복수면(福壽面), 추부면(秋富面)의 10개면(面)으로 하였다가 1940년 11월 1일 부령 제221호(府令 第221號)에 금산면(錦山面)이 금산읍(錦山邑)으로 승격되어 1읍 9면으로 되었다. 그후 1963년 1월1일 서울특별시,도,군,구의관할구역변경에 관한 법률(법률 제 1172호)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전라북도에서 충청남도로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광복 이후 행정구역의 변동상황을 살펴보면은 1953년 12월에 내부리(內釜里)에 있는 군북면사무소(郡北面事務所)를 현재의 위치인 두두리(杜斗里)로 신축이전 하였으며, 1962년 5월 27년 군조례(郡條例) 제28호에 따라 군북면 내부출장소(郡北面內釜出張所)를 설치하였다.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大統領令) 제 6542호에 따라 복수면 용지리(福壽面 龍池里)가 추부면(秋富面)에 편입되었다. [통합포탈에서 발췌정리]
* 옥천군
충북 남부에 있는 군으로 대전광역시 남쪽에 위치하여 위성도시의 성격이 강한 지역이다. 삼국시대에는 신라의 고시산군인데, 통일신라시대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관성군으로 개칭하고 이산현·안정현을 영현으로 관할했다. 1018년(현종 9) 경산의 속현으로 병합되었다가 1143년(인종 21) 현으로 독립했다. 1313년(충선왕 5) 옥주로 승격되고 경산부 소속의 이산현·안읍현·양산현을 편입받았다. 조선초의 군현제 개편으로 1413년(태종 13) 옥천군이 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지방제도 개정에 의해 1895년 공주부 옥천군, 1896년 충북 옥천군이 되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에 의해 두입지인 양내면·양남면을 영동군으로 이관해 면적이 줄어들었다. 1914년의 군면 폐합에 따라 청산군이 폐지되어 편입됨으로써 면적이 넓어졌다. 이때 군면 폐합도 이루어져 옥천군의 이내면·안내면·안남면은 그대로, 이남일소면이 이남면으로, 군내면·군남면이 내남면으로, 이남이소면·군동면이 동이면으로, 군서일소면·군서이소면이 군서면으로, 군북일소면·군북이소면이 군북면으로 폐합되고, 청산군 남면이 청남면으로, 서면이 청서면으로, 동면·군내면·북면이 청산면으로 통합되어 옥천군에 폐합되었다. 백두대간과 호서정맥, 금남기맥의 영향으로 500m 내외의 산지로 둘러싸여 전체적으로 옥천분지를 이루며, 곳곳에 구릉성 산지가 분포한다. 동부에는 팔음산(八音山, 762m)·천금산(千金山, 465m), 서부에는 환산(環山, 581m)·용봉(龍峰, 437m)·망덕봉(望德峰, 420m), 남부에는 매봉·마니산(摩尼山, 640m)·월이산(551m), 북부에는 거멍산(494m)·덕대산(德垈山, 573m)·금적산(金積山, 652m) 등이 솟아 있다. 이들 산지 사이의 옥천읍·동이면·청산면·이원면 일대에는 산간분지가 발달했다. 금강이 군의 중부와 북부를 곡류하는데, 특히 이 군 일대에서 하천의 구배가 매우 크다. 그밖에 건천·서화천·월외천 등이 금강으로 유입한다. 금강 연안에는 평야가 거의 발달하지 못했으며, 경지는 주로 소하천 연안과 분지 내에 분포한다. 옥천읍 서산성 일대의 백제고분군을 비롯해 여러 개의 고분군이 있다. 이 지역은 백제와 신라가 다투었던 곳이어서 산성들이 많이 흩어져 있는데, 청성면의 산계리토성, 군북면의 고리산성(環山城)과 노고성, 이원면의 마니산성 등이 있다. 경부선이 군의 남서부를, 경부고속도로가 군의 중부를 각각 동서로 통과하고 있다. 그밖에 충주-남원, 음성-무주, 대전-대구를 잇는 국도가 지나며, 옥천-대전간 시내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생활권이 대전에 형성되어 있으며, 근교 농공단지로 발전해왔다. 대전·청주 등 대도시에 인접해 있고 교통이 편리해 최근 경제성 작물을 중심으로 채소 등 원예작물과 특용작물 생산에 주력함으로써 농가소득증대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특히 포도·딸기·상추·배추·토마토 등이 생산되는데, 옥천읍을 중심으로 포도·사과·감의 재배가 활발하며, 군북면에서는 토마토와 배추, 군서면에서는 딸기 재배가 활발하다. 이원면 묘목특화지의 묘목이 특산물로 알려져 있으며, 동이면 조령리에 있는 금강유원지와 1991년에 개장한 안내면 장계리의 장계국민관광지에는 여름철에 많은 관광객이 모여든다. 장령산자연휴양림·정지용생가·육영수여사생가 등이 주요 관광지이다. [통합포탈에서 발췌정리]
* 대전광역시(大田廣域市)
대한민국 중앙부에 있는 광역시로 서해안개발시대를 맞아 중부권의 중추기능을 담당하는 성장거점도시로 발전시킨다는 취지에서 1989년 직할시로 승격했으며, 이와 함께 유성구·대덕구를 신설하는 등 행정구역이 늘어나게 되었다. 1994년 광역시로 명칭이 변경되어 지금의 대전광역시가 되었다. 경부선·호남선, 경부고속도로·호남고속도로의 분기점이 되는 교통의 요지로서 지금까지는 소비도시적인 성격이 강했으나, 대덕연구단지 조성, 1993년 대전세계박람회 개최, 3군사령부 이전 등을 계기로 행정·과학 중심도시, 국토종합개발계획의 중핵도시로 발전했다. 대전광역시는 본래 침식분지인 대전분지에 발달한 도시이다. 분지의 남동쪽에는 식장산(食藏山,,598m), 동쪽에는 고봉산(古鳳山, 390m), 북동쪽에는 계족산(鷄足山, 423m)·응봉산(鷹峰山, 320m)이 있으며, 남쪽에는 보문산(寶文山, 457m)이 솟아 있다. 서쪽에는 관암산(冠岩山, 526m)·우산봉(雨傘峰, 574m)·도덕봉(道德峰, 534m)이 솟아 있다. 그러나 현재는 시역이 분지 범위를 넘어 확장되어 동쪽의 경우 분지 바깥 쪽에 위치한 대청호(大淸湖)가 시의 경계부를 이룬다. 대전분지는 다시 기복이 적은 잔구성 구릉인 마봉(馬峰:191m)·옥녀봉(玉女峰:120m)·우성이산(179m)·매봉(140m) 등에 의해 남동부의 대전분지, 북부의 탄동분지(炭洞盆地), 중서부의 유성분지(儒城盆地)로 구분된다. 대전분지는 대전의 중심지를 이루며 유성분지에는 유성구가 자리잡고 있다. 식장지맥(食藏枝脈)이 남북으로 뻗어 있는 동남부지역, 관암산·도덕봉이 솟아 있는 서부지역은 비교적 고지대이나 북부지역은 낮은 구릉지와 평야지대로서 저지대를 이룬다. 동북부지역을 흐르는 금강은 청주시와의 경계를 이룬다. 지금의 대전은 조선시대의 충청도 회덕현·진잠현 일원, 그리고 공주목의 동남부지역에 해당한다. 1895년과 1896년의 지방제도 개정으로 각각 충청남도 회덕군·진잠군·공주군이 되었으며, 1906년 월경지 정리에 의해 공주의 두입지였던 구즉면·탄동면·천내면·유등천면·사내면과 청주의 비입지(飛入地)였던 주안면, 그리고 문의의 비입지인 지평촌면이 회덕으로 편입됨으로써 회덕군의 면적이 크게 확장되었다. 오늘날 대전의 서부지역은 과거 공주에 속했던 곳인데 이때 회덕에 소속되었다. 20세기초까지 한적했던 '한밭'[大田]마을이 커지게 된 것은 1905년 경부선의 통과역으로 결정되고, 1910년 회덕군청이 이곳으로 이전되었으며, 1913년에 대전을 출발점으로 하는 호남선이 개통되어 영호남을 연결하는 교통상의 요지로 대두되면서부터이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진잠군의 북면(일부)·서면(일부)을 진잠면으로, 상면·하면·동면(일부)을 기성면으로, 회덕군의 천내면(일부)과 유등천면을 유천면으로, 천내면(일부)·공주군 현내면을 유성면으로, 내남면·현내면(일부)을 내남면으로, 탄동면과 공주군 명탄면을 탄동면으로, 구즉면·서면(일부)을 구즉면으로, 외남면·산내면(일부)을 외남면으로, 산내면(일부)을 대전면과 산내면으로, 북면(일부)·일도면(일부)을 북면으로, 일도면(일부)·동면(일부)·주안면을 동면으로 통폐합하여 대전군을 신설했다. 1931년에 대전면이 읍으로 승격하고, 1932년에 충남 도청이 이곳으로 이전하자 신도시 대전은 더욱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1935년에 대전읍이 부로 승격하면서 대전군은 대덕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49년 시제(市制) 실시에 따라 대전시로 바뀌고, 1963년 대덕군의 유천면 일원과 회덕면·산내면 일부가 대전시에 편입되었다. 1977년에 동구·중구 설치, 1983년에 유성읍과 회덕면을 편입, 1988년에 서구가 신설되었다. 1989년 대전이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대덕군 일원을 병합하여 유성구와 대덕구를 신설하고, 대덕군을 폐지했다. 1995년 <지방자치법> 개정에 따라 대전직할시에서 대전광역시로 명칭이 변경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1999년 시청소재지가 중구 대흥동에서 서구 둔산동으로 이전되었다. 2010년 관평테크노동의 명칭을 관평동으로 변경했다. 2012년 중구에 있던 충남도청이 내포신도시로 이전했다. 산성으로는 구성리산성(대전광역시 기념물 제6호)·월평동산성(대전광역시 기념물 제7호)·우술성(雨述城,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9호) 등이 있다. 경부선·호남선, 경부고속도로·호남고속도로의 분기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통영대전고속도로로 통영과 연결되어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뿐만 아니라 서울-목포, 서울-부산, 대전-장항간 국도와 공주·논산·부여·전주·청주·조치원·무주 등을 연결하는 지방도가 통과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대전지방철도청은 경부선·호남선·강경선·경북선·충북선·오송선·장항선·남포선·천안직결선·대전선 등의 노선을 관할하고 있다. 이 지역에 철도교통이 발달하기 전에는 육로(陸路)로서 천안에서 영남지방에 이르는 율봉로(栗峰路)가 있었으며, 회덕에서 옥천으로 지나는 도로가 있었다. 지금은 고속철도의 발달에 따라, 교통량의 효율적인 처리를 위해 그 업무를 대전역과 서대전역으로 분류하여 처리하고 있다. 대전역에서는 경부선 방면 KTX, SRT, ITX-새마을, 무궁화호, ITX-마음을, 서대전역에서는 호남선 방면 KTX, ITX-새마을, ITX-마음, 무궁화호를 이용할 수 있다. 신탄진역은 영호남 방면 열차를 모두 이용할 수 있으나 KTX, SRT를 운행하지 않는다. [통합포탈에서 발췌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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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읍 시내버스 한일정류장에서 남이면 상금리 간운리마을 들어가는 버스는 08:10분이고 간척리 들어가는 버스는 06시입니다. 고로 서울에서 간운리는 새벽에 출발하면 되고, 간척리는 전날 도착해야 합니다. 간척리는 금산읍에 찜질방이 있던 시절에 많이 이용했던 모양입니다. 어프로치가 더 길지만 어쩐지 상금리 간운리마을보다는 백령고개를 넘어 간척리 개직마을에서 출발하고 싶었습니다. 금산의 대둔산과 완주군 운주면 그리고 동상면 피암목재, 성치지맥의 솔치 등은 빨치산의 주요 활동 반경이자 이동로였습니다. 백암산 600고지가 있는 남이면 건천리, 역평리는 백령고개 전승탑의 기록대로 한국전쟁 직후 빨치산 해방구(소굴)가 있던 마을입니다. 금적과 장령지맥에 이어 발을 들여놓은 식장지맥입니다. 금북기맥이 금만봉에서 북상하여 600고지에서 대둔산 계룡산을 걸쳐 부여 구두레나루로 향하고, 각호는 무주에서 영동으로, 금적은 보은에서 옥천으로, 장령은 금산에서 옥천으로, 팔봉은 보은에서 청주와 세종으로, 팔음은 상주에서 영동과 옥천으로, 식장은 금산에서 대전으로 향하며 금강의 수위를 결정짓는 지맥들입니다. 금강을 최전선으로 하던 삼국시대는 나제동맹을 깨고 신라가 남한강을 따라 충주와 이천 여주를 뚫고 한강유역으로 북상한 시기입니다. 고로, 식장산과 고리산(환산)은 백제의 최전방이었고, 지금의 대청호는 나제간의 군사접경지대였습니다. 고로 식장을 직접 발로 밟아보니 합수점보다는 관방유적을 따라 금강을 둘러보는게 더 흥미를 이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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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읍 한일버스정류장에서 건천리로 향하는 06시발 버스를 타고, 바깥개직골, 중간개직골, 안개직골, 상개직골 백암사에서 금남정맥 능선으로 올라서서 식장지맥 분기점에 이릅니다.
♤ 금산군 남이면 건천리 개직마을/ 금남기맥 600고지 전승탑 서쪽
산이 많고 그 사이를 흐르는 하천에 돌이 많아 냇물이 돌 속으로 흘러 하천이 말라보인다 하여 부르게 된 이름이다. 산의 동남쪽 역평리와 북서쪽 건천리는 한국전쟁에서 패배한 후 퇴로가 막힌 빨치산과 그 동조자들에 의해 백암산을 중심으로 마을 일대가 요새화 되었던 땅이다. 특히 건천리는 지금도 북쪽으로 해발 350m의 오항고개를 넘거나 남동쪽으로 해발 360m의 배티재를 넘어야 마을로 들어갈 수 있는 천혜의 요새로 마을의 남쪽은 백암산과 선야봉이 연봉을 이루며 막아서고 그 나머지는 백암산 줄기가 마을의 동쪽을 병풍처럼 둘러치고, 선야봉 줄기가 마을의 서쪽을 둘러친 가운데 북쪽은 금남정맥이 흐르며 마을을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오항고개, 배티재 두 고개를 넘지 않고는 험준한 산을 넘어야 비로소 건천리에 닿을 수 있기 때문에 퇴로가 막혀 궁지에 몰린 빨치산과 그 동조자들에게는 이보다 좋은 곳은 없었을 터, 천혜의 요새와 같은 자연지형 덕에 백암산을 중심으로 건천리를 장악한 빨치산과 그 동조자들이 민간인과 경찰, 군인 합동토벌대의 공격을 피해 5년을 버틸 수 있었다. 1951년 5월, 마침내 우리 군은 민·경·군 300여명의 병력을 투입하는 것을 시작으로 백암산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빨치산과 그 동조자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시작한다. 해발 650m의 백암산을 중심으로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는 시작됐고 이듬해 6월까지 1년여의 지리한 싸움 끝에 양쪽 모두 많은 사상자를 내고 전투는 막을 내렸다. 이 전투가 바로 금산에서 벌어진 공비토벌 작전으로 민경군 호국용사들이 피 흘리며 격전을 벌인 육백고지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양쪽을 합쳐 모두 2,563명이 목숨을 잃어 씻을 수 없는 동족상잔의 상흔이 남고 말았다. 빨치산 2,287명이 사살되고, 1,025명이 생포되었으며, 경찰 184명·군인 20명·민간인 72명 등이 희생되었다. 1991년 3월 25일, 금산군은 배티재 고갯마루 언덕에 '육백고지전승탑'을 세우고 전승탑 앞으로 충혼비와 육백고지참전공적비를 나란히 세웠다. 건천리는 1789년에 발간된 ‘호구총수’에 처음 기록되었으나 이미 후백제의 견훤이 건천리 주변에 군사적 요충지로 삼았다. 조선시대에도 봉수대가 설치될 정도로 유서 깊은 곳이다.
보통 금산읍 한일버스정류장에서 08:10분에 출발하는 간운리발 버스를 타고, 여기에서 어프로치를 시작하는데 버스는 윗간운리버스정류장에서부터 걷고, 택시는 비포장도로로 조금 더 위쪽까지 올라가는 모양입니다.
♤ 금산군 남이면 상금리 간운리(看雲里) 마을/ 금남기맥 600고지전승탑 동쪽 위
마지막 민가에서 양회임도를 따른다. Y계곡에서 우틀로 진행하고 밭끝에서 정중앙에 밀양박공묘 뒤편으로 가파른 능선을 치고 오르면 금남정맥 능선에 다다른다. 우틀로 약 300M 진행하면 식장지맥 분기점에 이른다. 금산군 남이면 상금리에 있는 간운마을은 쇠내의 발원지 아래에 있는 마을로서 마을로 들어가는 길과 길 옆에 흐르는 냇물을 제외하고는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므로 구름과 산으로 둘러싸인 신선지라 하여 간운리라고 부른다고 하며 옛날에 간운사라는 절도 있었다고 한다. 마을 뒤에는 방애골이라고 부르는 골짜기가 있는데 옛날에는 충주박씨(忠州朴氏)가 많이 세거했던 마을이다.
♤ 남이면(南二面)
금산군의 서남부에 위치한 면으로 면소재지는 하금리이다. 지금의 명칭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남이면에 고산군(高山郡)의 건천리(乾川里)를 편입시켜 만들었다. 면적은 군내에서 가장 크고 산지면적도 가장 크다. 북쪽에는 진악산, 서쪽에는 험준한 고지(656m)가 솟아 있고, 남쪽에는 십이폭포가 관광지를 이룬다. 봉황천 상류지대로 건천리·대양리·구석리에서 발원한 계곡이 동류한다. 동쪽으로 200m 내외의 구릉에 의해 남일면(南一面), 서쪽으로 셋티재·선야봉(仙冶峰)으로 전북 완주군, 남쪽으로 선봉(仙峰)·성치산(城峙山)에 의해 전북 진안군, 북쪽으로 보티재·수리넘어재·진악산(進樂山)으로 진산면(珍山面)과 금산읍에 접한다. 10개리로 이루어져 있다. 군내에서 임야면적이 가장 넓으며, 밭과 논은 적은 편이다. 주요 농산물은 인삼·깻잎,등이 있으며 주로 고추, 콩, 전작이며, 약간의 논농사를 짓고 있다. 남이면의 동부를 지방도가 남북으로 통하여 금산읍과 주천(朱川)에 연결되며, 북서쪽으로 진산면과 연결된다. 남이면 관내에 보석사(寶石寺)·십이폭포, 자연휴양림 등 관광지가 있다. 특산물로는 누에고치·감자·인삼·철·버섯 등을 생산한다. 도로는 면의 동쪽 금산읍에서 주천면으로 가는 도로가 갈라진다.
♤ 식장지맥갈림봉(610m)/ 면계(남이면 - 진산면)/ 삼리봉(남이면 상금리, 진산면 오항리 → 삼가리)
금남정맥의 대둔산 남동쪽 인대산(661.8m)과 백령고개 사이에 있는 무명봉으로 금산군 남이면 상금리와 진산면 삼가리의 경계이다. 식장지맥은 여기에서 북동쪽으로 분기하여 대전 대덕구 문평동 갑천이 금강에 합류하는 지점까지 도상거리 약 56.1km의 산줄기가 이어진다.
♤ 583m봉/ 면계/ 삼리봉(남이면 상금리, 진산면 삼가리 → 엄정리)
바위 절벽을 우회하여 오른 봉우리로 지맥의 왼쪽이 진산면 삼가리에서 엄정리로 바뀌는 삼리봉 지점이다.
♤ 금산군 진산면 엄정리(嚴亭里)
진산면 엄정리는 월봉산과 인대산 사이 골짜기 안에 위치하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엄정이 위쪽에 자리한 마을을 상엄정이라고 부르는데 마을은 북서쪽 입구쪽을 제외하고는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로 엄나무정이 위쪽에 마을이 있으므로 상엄정, 상엄정리, 웃엄정이라고 부른다. 남서쪽으로는 하천이 흐르고 하천 주위에 덕정들이 조성되어 있다. 마을 동남쪽으로는 금성면 화림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월봉재가 있으며, 동쪽으로는 금성면 상가리로 넘어가는 순목재라는 고개 서쪽에 순목 마을이 위치한다. 엄정 마을은 산이 아기자기해서 풍수지리설에 의한 명당자리가 많다 하여 사람들이 많이 출입했던 마을로, 엄나무 정자가 있었다 해서 이름 붙여지게 되었다.
♤ 열두봉재/ 십이봉티/ 양회임도
이정표와 열두봉길 등산로 안내판이 있다. 금산군 진산면 상엄정리와 남이면 상금리 간운마을을 잇는 양회임도가 지나는 고개이다. 금산읍 양지리 와정리(왜정이)에서 진산면으로 넘어가는 열두봉우리가 있는 고개라 하여 열두봉재 또는 십이봉티라고 부른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에 비하면 열두봉은 겸손합니다. 산이 깊다는 의미이겠지요.
♤ 열두봉(489m)/ 삼읍면봉(진산면, 남이면 → 금산읍)/ 진악산갈림봉
준희선생님의 여기가 열두봉재입니다. 산패가 참나무에 매달려 있다. 지맥의 오른쪽이 남이면 상금리에서 금산읍 양지리로 바뀌는 삼읍면봉 지점으로 오른쪽으로는 진산면과 남이면의 면계를 따라 진악산으로 가는 능선이며 지맥은 좌틀하여 진산면과 금산읍의 면계를 따라 월봉산으로 오른다.
♤ 열두봉재/ 십이봉티/ 임도
조금 전에 헤어진 임도를 다시 만난다. 금산군 금산읍 양지리에서 진산면 엄정리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준희선생의 산패가 걸려있다. 이 고개 아래에서 발원하는 금산천(錦山川)은 열두봉재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양지리·아인리·상옥리 등 읍내 중심을 관통하며 상옥교(上玉橋)·금산교(錦山橋, 큰다리(大橋, 邑橋)·금천교(錦川橋, 쇠전다리)를 놓게 하고, 읍 남쪽의 원줄·원댕이·샛골·비실재와 남산 자락에서 발원하여 남산 아래 앞못둑에 모여 하옥리를 지나는 물과 만난 후, 수구처인 중도리에서 후곤천과 합하여 계속 동쪽으로 흘러 신대리의 여사 마을 앞에서 봉황천에 유입되는 하천이다. 군의 행정중심지인 금산읍을 관통하는 하천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보이며, 조선 시대에는 읍치의 명당수로 서금천(錦川)이라고 불려왔는데, 『여지도서』(금산)에 "금천은 성 남문 밖에 있다."고 하여 관련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동일 문헌의 지도에는 금천과 후곤천(厚昆川, 고천 古川)이 만나는 수구처에 동림(東林)이라는 커다란 비보숲이 있음을 표시하고 있다.
오름길에 나뭇가지 사이로 인대산과 진악산이 보입니다.
♤ 월봉산(月峯山, 542.4m)/ 장군봉
정상석은 없고 맨발대선배님, 대충산사, 인삼대장 산패 세개가 나무에 매어 있다. 충남 금산군 진산면 엄정리, 금성면 화림리, 금산읍 양지리에 걸쳐 있는 삼면봉으로 월롱봉(月弄峯)이라고도 하는데 진악산 서쪽 줄기이다. 읍치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어 달이 뜨는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추측한다. 일설에는 산의 모양이 달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또 산 아래 반월형(半月形)의 혈처가 있어 그렇게 불려졌다고도 한다. 나무가 웃자라 조망은 하나도 없이 그저 쉬어가기 좋은 정상이다. 대전광역시의 3대 하천인 유등천이 월봉산 기슭에서 발원한다.
♤ 금산에 있는 6개의 봉수
금산에는 여섯개의 봉수대가 있었음이 조사되었다. 여섯개의 봉수는 추부면 요광리 매봉재에 있는 매봉봉수(335.5m), 추부면 마전리 먹티재에 있는 만인산 봉수(537.8m), 진산면 엄정리 엄정마을에 있는 국사봉 봉수(496.4m), 진산면과 금성면과 금산읍의 경계에 있는 월봉산 봉수(542.4m), 금산읍에 있는 진악산 봉수(732.3m), 남이면 대앙리 백암마을에 있는 백악산 봉수(630m)이다. 여섯개 봉수터는 모두 온전히 그 모양이 전하는 것은 아니지만 봉수가 있었다는 흔적으로 돌무더기 등은 찾을 수 있다. 아울러 그 기록이 지리지 등에 전하고 있다.
♤ 월봉(月峰, 498.7m)/ 삼읍면봉(진산면, 금산읍 → 금성면)/ 삼각점봉
금산군 금성면 화림리와 진산면 엄정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지맥의 오른쪽이 금산읍에서 금성면으로 바뀌는 지점이다. 준희선생님 산패가 있으며 도엽명과 숫자가 식별되지 않는 삼각점도 있다. 정상 왼쪽에 움푹 파인 웅덩이처럼 보이는 곳도 있고 정상 아래쪽은 성곽 흔적으로 보이는 돌담이 있다. 기시천(麒嘶川)은 월봉 자락에서 발원하여 금산군 금성면 화림리 동쪽으로 흘러 화림저수지를 만들고, 상가리 새터를 지나 계속 동쪽으로 흐르다가 양전리 앞에서 동남쪽으로 방향을 바꾼 후 청룡안 앞에서 대암천과 합류, 군북면 남쪽 경계를 거쳐 제원면 명암리에서 봉황천에 유입되는 하천이다. 『여지도서』(금산)에 "기시천은 군 북쪽 7리에 있는데 동쪽으로 흘러 후천과 합친다."라 하여 관련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데 현대지도에는 기사천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잘못된 표기인 것으로 보인다. 급경사 내리막길을 조심하며 내려선다.
♤ 금산군 금성면(錦城面)
금성면은 동쪽으로는 군북면과 접하고, 서쪽으로는 진산면과 접하며, 북쪽으로는 추부면과, 그리고 남쪽으로는 금산읍과 경계를 나눈다. 북쪽으로 비단을 깔아 놓은 것처럼 곱다는 금성산(438m)이 서 있고 그 위쪽으로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밀어 붙이는 산악지대를 끼고 미륵재, 삽재, 성재 등 높고 낮은 고개가 북쪽으로 통하는 길을 조성하는가 하면, 동쪽으로는 달기봉을 주봉으로 그 위쪽과 아래쪽으로 산악지대를 조성하다가 계원봉 아래로 낮은 야산지대와 함께 서서히 들을 조성하는가 하면, 서쪽으로는 금성산을 기점으로 차츰 낮은 야산지대로 산이 낮아지다가 서남쪽 월봉산 부근에서 남쪽으로 흘러갈 높은 산악지대가 놓여지고, 남쪽으로는 비교적 야산지대와 들이 조성되어 있는 지역에 금성면은 자리한다. 북쪽으로는 금산읍에서 대전으로 통하는 국도가 있으며 서쪽으로는 금산읍에서 진산면으로 통하는 지방도가 있다. 그외 많은 도로가 여러 곳으로 놓여 있어서 교통은 편리한 지역이다. 역사적 명승지로 의총리에 칠백의총이 있다.
♤ 금산군 금성면 화림리(花林洞)
금산군 금성면에 소재한 화림리는 주위에 열두봉의 산이 둘러싸고 있어 계절따라 꽃이 피는 숲이 우거져 화림동(花林洞)이라 한다. 자연마을로는 화림, 월곡, 상촌, 서당말, 상탄 등이 있다.
♤ 424m봉
월봉에서 안부로 내려서고 다시 올라선 봉우리이다.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맥길을 이어간다. 잡목이 드센 등로 사이로 금성면 화림리 골짜기가 내려다 보이고 그 너머로 만인산과 금성산, 서대산이 아련히 보인다.
♤ 월봉재(月峰峙, 369m)/ 면계(금성면 - 진산면)/ 돌탑
맨발대선배님 "여기가 월봉재입니다" 산패가 참나무에 매달려 있다. 충남 금산군 진산면 엄정리와 금성면 화림리를 잇는 고개이다. 국사봉 봉수의 남쪽에 있는 금산읍에서 진산면을 잇는 주요 길목으로 이 월봉재는 예전에 금산과 논산을 오가는 사람들이 이용하던 이 지역에서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좌우로 고갯길이 뚜렷한 안부이며 서낭당의 흔적으로 보이는 무너진 사랑탑이 있다.
♤ 문배나무
잡목터널과 칡넝쿨지대를 헤쳐나오니 커다란 문배나무가 한그루 서있다. 문배란 중간 크기의 배를 말하며 왼쪽 계곡 아래로 보이는 평화사에서 관리하는 수령 200년의 금산군 보호수 문배나무를 지난다.
♤ 350.7m봉
문배나무 보호수에서 잠깐 올라선 봉으로 준희선생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순목마을로 내려서며 가정집마다 수도가 있습니다.
♤ 화림재(245m)/ 순목고개/ 2차선도로 4번군도/ 면계(금성면 - 진산면)
충남 금산군 금성면 화림리 순목마을에서 진산면 엄정리 상엄정을 잇는 화엄로로 고개 가까이 순목마을이 올라와 있다. 순목마을은 화림리 서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마을 앞에 상탄못이라 부르는 저수지가 있으며 마을지형이 목(項)처럼 생겼다고 해서 순목이라 부르며 경주이씨, 풍천임씨가 많이 산다. 오른쪽 옹벽이 끊어진 방향으로 오르면 묘지로 이어진다. 화림고개에서 지나온 350.7m봉 옆으로 진악산(732.3m)이 보이고, 올라선 벌목지에서 왼쪽 상엄정리 마을쪽으로 인대산(661.8m)이 국사봉 능선 뒤로 보인다.
♤ 금산군 진산면 만악리(晩樂里)
만악리는 평지와 구릉성 지대로 이루어져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백제 이전에 취락이 형성되었으며 백제 때는 진동현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처음에 황산군에 딸린 영현에 속했다가 그 뒤에 진례군의 영현에 속했으며 옛날부터 잦은 외적이 침범이 있어서 농성을 쌓고 마을과 재산을 지켰던 지역이다. 마을 동쪽에는 큰 고개가 위치하고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탱석동(괸돌), 초미동(재미개), 신동, 만악골, 띠울, 놋종골(놋쇠유점) 등이 있다. 마을 중심지를 가로지르는 냇물을 끼고 펼쳐진 만악골은 만악리의 다른 마을보다 마을 형성이 비교적 늦었고 샘물이 좋아 즐거움이 가득한 마을이라 하여 만악(滿樂)골이라고 부르다가 차면 기울게 되므로 만악(晩樂)이라 하였다. 또 풍류를 즐기는 선비들이 많으므로 만악(晩落)동이라 불렀는데, 그 후 만악골, 만악동(晩樂洞)이 되었다. 실제 만악동에는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샘이 있는데 물이 매우 좋아 사람들이 이를 보고 하나 둘 모여들어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띄울재로 내려서며 금성산(437.8m) 뒤로 서대산(904.1m)이 조망됩니다. 주택이 고개 정상까지 올라와 시원한 지하수 수도가 콸콸 나옵니다.
♤ 띄울재(275m)/ 면계/ 금성면 화림리 - 진산면 만악리
충남 금산군 금성면 화림리 순목마을에서 진산면 만악리를 잇는 고개이다. 순목마을로 이어지는 도로는 뚜렸하나 만악리쪽은 농장이 자리를 잡고있어 길이 잘 보이질 않는다. 지맥길 옆 축사 지붕이 태양열 판넬이다. 뚜렷한 고갯길이고 준희선생님 띄울재 산패가 근육자랑을 하는 서어나무에 매어 있다. 지명의 유래는 만악리 신동 아래쪽에 있는 신동리 마을을 띠울이라고 부르는데 잔디가 좋은 마을이라 띠울이라고 부르고 테를 두른 듯이 산으로 가려 있어서 띠울이라고 부른다고도 하는데 띄울마을 윗쪽에 있는 고개라고 하여 띄울재라 부른다. 띄울재를 가로질러 능선으로 오른다.
♤ 가장산(324.8m)
띄울재에서 잠깐 올라선 봉으로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잡목의 저항이 심한 가장산을 지나 이동통신탑 옆에 밭 위로 쇼파가 있는 움막을 지난다. 오른쪽으로 금산의 진산인 진악산(732.3m)이 가까이 조망된다.
신동리재로 내려서기 직전에 딸기나무, 찔레나무가 칡넝쿨과 엉켜 있어 전지가위가 없었다면 고생할 뻔 했습니다.
♤ 신동리재/ 만악재/ 사갑재
절개지를 우회하여 시멘트 도로에 내려서고 충남 금산군 진산면 만악리 신동마을과 금성면 상가리 사갑마을에서 화림리를 잇는 양회임도이다. 들머리는 도로 건너 곧바로 묘지로 이어지는 곳이다.
♤ 305.7m봉
잡목지를 지나 그물망이 쳐진 능선을 따라 301m봉에 오르고 다시 좌틀로 내려선 다음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는 305.7m봉으로 향한다. 잡목이 많으나 그런대로 진행할만 하다. 잡목지를 왼쪽으로 우회한다.
♤ 솔안이재(235m)/ 소라니재/ 68번지방도로/ 면계(금성면 - 진산면)/ 순목버스정류장
충남 금산군 금성면 소재지 상가리와 진산면 만악리를 잇는 2차선 도로(금산로)이다. 준희선생님 소라니재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교통량이 많으며 고개 정상에는 순목버스정류장, 이동통신탑, 민가가 있고, 대화약품 공장이 있다. 상가리 원터 서북쪽으로 소라니재라고 부르는 고개 아래에 있는 마을을 소라니재 또는 송현(松峴)이라고 부르는데 1894년(고종 31년) 갑오년 3월 8일에 금산군에 거주하는 동학교도 등 5,000여명의 인원이 금산을 습격하여 백성들을 사지로 몰아 넣었을 때, 정숙조 등 유림들이 주동이 되어 창의군(昌義軍)을 조직하여 금산에서 동학을 몰아 내는 등 큰 공을 세웠으나 전국적으로 봉기한 동학을 무찌르기 위해 창의군이 금산을 출발하여 공주쪽으로 향하던 중 이곳에 매복해 있던 동학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창의군이 참패를 당한 역사가 있는 고개이다. 도로에 내려서서 약간 왼쪽으로 진행하여 경계표지판이 있는 곳으로 오른다. 조금 오르면 인삼밭이고 가장자리를 지나 숲으로 들어선다.
♤ 310.5m봉/ 삼각점봉
인삼대장 310.5m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는 넓은 공터인 삼거리이다. 지맥은 오른쪽이지만 왼쪽으로 30m 거리에 있는 4등삼각점(금산 432/ 1980 재설)이 있는 309.7m봉을 다녀온다. 준희선생님 '그곳에오르고싶은산' 산패가 산벚나무에 매어 있다.
♤ 328.7m봉
준희선생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전후로 길이 임도 수준으로 좋다.
♤ 대정재/ 면계/ 금성면 두곡리 - 진산면 만악리
충남 금산군 금성면 두곡리 점촌마을과 진산면 만악리 만악골을 이어주는 양 옆이 뚜렷한 안부이다.
♤ 금산군 금성면 두곡리(杜谷里)
금성면의 서북쪽에 위치해서 많은 고개가 산발적으로 놓여있으나 평범한 농촌지대이다. 자연부락으로는 돌고개, 두곡, 성밑, 아랫말, 원두곡, 큰말이 있다. 성밑은 돌고개 서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은 산 중턱에 자리해 있으면 마을 뒷산에 돌성이 있고 그 성 아래에 마을이 있다 해서 성밑 또는 성저라고 부른다. 순흥안씨가 많이 산다. 돌고개는 둑실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성밑 동쪽에 있는 고개로써 마수리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그 고개 아래에 마을이 있으므로 돌고개, 석현이라고 부른다. 밀양박씨, 전주이씨, 경주최씨가 많이 산다. 두곡은 성밑 남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지형이 둑을 쌓은 것처럼 생겼다 해서 둑실, 두곡 이라고 부른다. 두곡의 원 마을은 원두곡, 두곡의 큰 마을은 큰말이라고 부른다. 아랫말은 두곡 아래쪽에 있는 마을을 아랫말이라고 부른다.
♤ 성밑고개/ 만악골재/ 두곡재
충남 금산군 진산면 만악리 만악골의 채석장과 금성면 두곡리를 잇는 고개로 지도에는 없으나 고개가 제법 뚜렷하다. 왼쪽 나무 사이로 도로와 집이 보이고 지도상에 오른쪽 아래로 성밑 마을이 있다. 빡신 오르막의 시작이다. 채석장 절개지를 오르는데 철조망을 왼쪽 개구멍으로 통과하고 절개지쪽으로 붙어 조심조심 진행한다.
♤ 학성산(380.6m)/ TJB 대전방송금산중계소
정상에 TJB 대전방송금산중계소 M/W철탑이 세워져 있고 준희선생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넓은 임도를 버리고 우틀로 우틀로 급하게 내려서면 다시 임도길을 만나고 큰고개까지 진행한다. 근거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누군가 인삼대장 산패에 학성산이라 적어 놓았다. 방송중계탑이 있고 숫자보다는 기억하기 쉽다. 임도를 따르다 좌틀하여 미라이후손관거 공장 입구에서 큰고개로 내려선다.
♤ 큰고개/ 면계(금성면 - 진산면)/ 3번군도 용천길/ 만악리버스정류장
여기가 큰고개입니다. 맨발대선배님 산패가 낙석방지철망에 매달려 있다. 충남 금산군 금성면 두곡리와 진산면 만악리를 잇는 제법 통행량이 있는 2차선 도로(용천로)이다. 도로를 건너 낙석방지용 울타리 끝나는 지점에 맨발대선배님 큰고개 산패가 있는 곳에서 오른쪽 옹벽으로 오른다.
♤ 326.1m봉
소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큰고개에서 30여분 오른 봉우리이다. 왼쪽으로 채석장이 내려다보이고 장령산분기점에 올라 빙돌아서 내려서며 다시 채석장을 바라본다.
♤ 금산군 복수면 용진리(龍進里)
채석장 너머로 바라본 금산군 복수면 용진리의 모습이 바라보인다. 완만한 구릉성 지대로 이루어져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로 마을 동쪽에 못골 저수지가 있으며, 남동쪽에 갱이밭골이 있는데 자연마을로는 용나루, 자라밭 마을 등이 있다. 용나루 마을은 용이 나온 자리가 있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며, 자라밭 마을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전씨(全氏)들이 피난을 와서 차츰 이룩한 마을이라 처음에는 자래전(自來全)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자라전(自羅全), 그리고 자라밭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직전에 다녀온 지맥이라 기억이 생생하여 장령지맥 금성산은 패스하려 했는데 가다보니 금성산 정상입니다. 내려서며 식장지맥으로 진행합니다.
♤ 405m봉/ 장령지맥분기점/ 삼면봉(진산면, 금성면 → 추부면)/ 채석산
준희선생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식장지맥은 좌틀하며 금성면을 벗어나 추부면으로 들어서는 지점으로 오른쪽으로 금성면과 추부면 면계를 따라 장령지맥이 분기하여 나간다.
♤ 장령지맥(長靈枝脈)이란
장령지맥은 금남정맥의 대둔산 남동쪽 인대산(661.8m)과 백령고개 사이에 있는 610m봉에서 분기한 식장지맥이 월봉산(543m)을 지나 금성산(439m)에서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한줄기는 북진하여 만인산(537m), 식장산(598m), 계족산(423m)을 지나 신탄진 금강/갑천합수점에서 그 맥을 다하는 식장지맥(食藏枝脈)이고, 또 다른 줄기는 동북으로 분기해서 미륵재, 삽재, 닭이봉분기봉(460m), 민재, 서대산분기봉(560m), 방화봉(放火峰 585m), 국사봉(國師峰 667.5m), 대성산(大聖山, 704.8m), 매봉(600m), 장령산(長靈山, 장룡산 655m), 도덕봉(407.3m), 함박산(250m), 퇴미산(249m), 돌남산(258.6m), 마성산(馬城山, 409.3m), 이슬봉(454.9m), 참나무골산(422m)을 지나 옥천군 군북면 장계리 장계관광지앞 금강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52.2km인 산줄기이다. 장령지맥 북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추풍천, 상곡천으로 흘러들어 금강에 합류 되고, 남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조정천, 봉황천으로 흘러들어 금강에 합류된다.
♤ 장령지맥 개념도
♤ 금성산(錦城山, 437.8m)/ 전망대/ 3등삼각점(금산 308/ 1980 복구)
정상에 나무데크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가야할 만인산과 서대산, 진악산, 천태산은 물론이고 덕유주능과 호남알프스능선도 조망이 가능하다. 충남 금산군의 금성면과 진산면 추부면 경계에 있는 산이다. 1914년 등장하는 금성면의 명칭이 유래할 정도로 이 지역에서 진산(鎭山)으로 인식되는 의미 있는 산이다. 『여지도서』에 "금성산은 금산으로부터 왔는데 군 북쪽 10리에 있다."고 하여 관련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조선 전체 사람이 사흘을 먹을 금이 들어 있다고 하여 이름 붙여졌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백두대간 영취산에서 들어온 금남정맥이 읍치 서쪽 장군봉에서부터 금성산을 지나 추부면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서 예로부터 여러 성들이 축조되었는데, 진산면 만악리와 금성면 둑실 사이 고개에 있는 지춘산성(芝春山城, 작은성재)과 진산면 초미동과 금성면 성밑 사이에 있는 학성산성(學聖山城, 큰성재) 등이 그것이다. 금성이라는 이름도 과거 이 산에 성이 있었던 것에서 유래된 곳이다. 또한 추부천 금성산의 복수면 쪽에서 발원하여 북동쪽으로 흘러서 추부면 중심부를 뚫고 충북으로 들어서서 충북 옥천군 군서면에 이르러 서화천(西華川)으로 흘러가며, 냇물 주변에 곡식이 잘된다하여 부천(富川)이라고 불렀는데 요즘은 추부면에 흐르는 긴 냇물이라 하여 추부천이라 부르고, 또한 관천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임진왜란에 백하지맥 기웃재로 금산에 진입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1만여 왜군이 일시(두달 여) 점거했던 산성이기도 합니다.
♤ 금성산성(錦城山城)
금성산성은 어원상으로 '금'은 크다, 위대하다, 으뜸이다. 신성하다는 뜻으로 사용한 순수한 우리말로써 한자로 '錦'으로 표기하였다. '금'이라는 말로는 '크다'는 뜻 말고도 '위대하다, '으뜸이다'라는 뜻도 있음을 볼 때 지금 금성은 아름다운 성이라기보다 '크고 위대하다'는 뜻으로 크고 위대한 성으로 해석할 수 있다. 금성산은 마한의 성 금현성에 비정되는 말로 산은 높지도 않지만 금산의 20여개 성을 조망할 수 있는 천혜의 요새이다. 임진왜란 때 고경명선생의 눈벌전투, 조헌, 영구대사의 연곤평전투, 변응전 선생의 횡당촌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칠백의총이 왜 이곳에 있는지 알 수가 있는 곳이 금성산이다. 금성산성은 조망권이 넓고 성내에 성이 있었으며 주변의 여러산성을 거느렸던 산성이다.
♤ 충남 금산군 추부면(秋富面)
금산군의 북부에 위치한 면으로 추부면의 동쪽은 군북면이, 남쪽은 군북면과 금성면이, 그리고 서쪽으로는 복수면, 북쪽은 대전광역시 동구 삼괴동과 접하며 면소재지인 마전리까지 대전광역시 시내버스가 수시로 운행 중이고, 충청북도 옥천군 군서면과도 접하며 경계를 나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금산군에 편입되었고, 진산군의 동일면과 동이면을 합한 것으로 지금의 명칭은 추동(秋洞)과 자부리에서 따온 것이다. 동쪽에는 충남에서 제일 높다는 서대산이, 북쪽으로는 도덕봉이, 서쪽으로는 만인산(337m)이 있으나 태봉재의 터널을 통해 대전과 가깝게 이어진다. 그리고 남쪽으로 서화천(西華川) 연안의 추부분지는 비교적 낮은 야산지대와 들이 트인 듯 위치한 지역에 추부면 마전리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있다. 추부면을 가리켜 속칭 마전이라고 부른다. 옛날에는 우리나라 농촌에 그리 흔하지 않았던 말을 사고 파는 장터가 있었으므로 그리 부르게 된 것 같다. 조선시대 말기까지도 금산방면에서 한양으로 오고 갈때 지나는 곳이 지금의 추부면이며 이곳에 이르러서는 마달령이란 재를 넘어서 대전을 통하고 한양길에 올라야 했다. 그 마달령이 높고 가파라서 이 고개를 넘을 때는 말이 넘어지는 사고도 있었다 하여 마달령재 넘기가 제일 어렵다 하였다. 또한 수려하고 풍수지리설에 따른 명당자리로 꼽는 만인산 기슭에 이씨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의 태를 묻고 태봉재라고 부른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추부면의 동북쪽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흐르는 추부천은 추부분지를 이루고 그 추부천으로 합류하는 여러 냇물 주변과 추부천 유역이 사람들이 사는 근거지가 된다. 도로는 대전과 연결되고, 마전리에서 동쪽은 옥천, 서쪽은 진산으로 가는 도로가 이어져 있어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장령지맥분기점에서 채석장 옆으로 내려서며 만인산과 정기봉이 바라다 보입니다. 칡넝쿨이 찔레가시나무와 함께 섞여있어 진행이 더딘 힘든 구간이 펼쳐집니다.
♤ 금산군 추부면 용지리(龍池里)
대통령령으로 1973년 복수면 용지리가 추부면에 편입되었다. 용지리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로 동쪽에 추정 저수지가 있으며, 북쪽에 못골 저수지가 위치해 있다. 자연마을로는 못골, 용골, 장바위 마을 등이 있으며 못골 마을은 용지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큰 못이 있었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며, 용골 마을은 웃못골 서쪽에 위치한 마을로 용이 난 굴이 있다 해서 용골 마을이라 불린다. 장바위 마을은 용골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장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다 해서 이름 붙여지게 되었다.
♤ 성황당고개/ 용지리임도
여름철엔 잡목으로 진행이 힘든 구간이다. 대단한 잡목지인 당산넘어골을 넘어 용지리 임도에 도착한다. 당산넘어골에서 묘지를 그물망으로 울타리를 쳐놓았는데 그물망 오른쪽 비탈로 내려서면 개고생이고 안쪽으로 들어서야 편하다. 금산군 금성면 용지리 아랫골에서 복수면 다복리 용골마을로 이어지는 고개로 과거 성황당이 있었던 모양인데 현재는 보이지는 않는다. 용지리쪽(왼쪽)으로 내려가다가 오른쪽 능선으로 올라서면 또 칡넝쿨지대가 기다린다.
오른쪽으로 서대산(904.1m)을 조망하며 진행합니다.
♤ 305m봉/ 면계(추부면- 복수면)
준희선생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금성산에서 추부면 내를 지나온 지맥이 추부면 용지리와 복수면 용진리의 경계에 올라서서 오른쪽으로 면리계를 따르는 지점이다. 우틀로 맥길을 이어가는데 잡목 저항이 심하다.
♤ 336.6m봉
전주이씨묘 뒤로 올라 준희선생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선답자님 띠지가 지키고 있는 326.1m봉을 지나고 만나는 봉우리이다.
♤ 322m봉/ 면계/ 삼리봉(복수면 용진리, 추부면 용지리 → 마전리)
지맥의 오른쪽이 추부면 용지리에서 마전리로 바뀌는 지점으로 이후 지맥의 오른쪽은 지봉산까지 길게 마전리의 경계를 따른다. 뚜렷한 등로를 따라 내려서다 좌틀하여 추부면 마전리 코스모산전 공장 쪽으로 수리넘어고개로 내려선다.
♤ 수레넘이고개(240m)/ 수리넘어고개/ 국도 17호선/ 편의점, 다복한식뷔페, 무인텔
지맥을 깔고앉은 공장지대를 통해 충남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와 복수면 용진리를 잇는 17번 국도(다복로)에 내려선다. 도로 건너서 수준점 확인하고 원 지맥은 복수면쪽으로 넘어가다가 협신기업(주) 공장 안으로 올라가지만 편하게 오른쪽 능선길을 따른다. 왼쪽 해주오씨 행정공, 오유정공 재실 오른쪽 행모재 옆으로 해주오씨 종중묘에 이르고 달기봉을 향하여 오름을 시작한다.
♤ 행모재
오씨(吳氏)는 중국 제나라 출신인 오첨이 신라 지증왕 때 함양지역에서 신라 김씨인 김종지의 딸과 혼인하면서 귀화해 살면서 시작됐고 이후 고려 병부상서를 지낸 수권(첨의 23세손)이 현보, 현좌, 현필 세명의 아들을 두게 된다. 수권의 아들 3형제는 고려 고종3년 1216년 북방에 침입한 거란족을 몰아낸 공적으로 현보는 해주군, 현좌는 동복군, 현필은 보성군에 각각 임명됐다. 현좌의 큰아들 영은 또다시 동복군에 임명되면서 본관을 동복으로하는 동복오씨의 시조가 되고 둘째아들 숙귀는 군위오씨의 시조가 된다. 동복(同福)은 전남 화순에 위치한 지명으로 동복면 모후산 재궁동에는 동복오씨의 시조 영부터 5세 선까지 단비가 마련돼 있고 3세 대승의 묘소가 위치해 있고 매년 음력 10일 초정일 전국의 후손들이 모여 조상에 대한 예를 올리고 있다.
♤ 달기봉(386.1m)/ 헬기장/ 면계/ 삼리봉(추부면 마전리, 복수면 용진리 → 목소리)
능선을 따라 오르는데 잡목 저항이 꽤 심하다. 헬기장에서 숲으로 들어서면 왼쪽 소나무에 맨발대선배님 달기봉 산패가 매달려 있다. 금산군 추부면과 복수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지맥의 왼쪽이 복수면 용진리에서 목소리로 바뀌는 지점이다. 봉우리 오른쪽 아래에는 중부대학교가 있다.
달기봉에서 내려서면 임도 옆에 있습니다.
♤ 민족자주통일비
임도에 내려서면 커다한 민족자주통일비석이 지송 정효순 년혁 기념비와 같이 세워져 있다. 2003넌 5월 8일에 제막된 이 통일비는 높이 220㎝, 너비 80㎝ 크기로 90㎝의 기단 위에 검은 돌로 세워지며 앞에는 `민족자주통일비"를 음각하고, 뒤에는 `7.4남북공동성명 중 조국통일 3대원칙"과 `6.15남북공동선언문 중 5개항"을 담고 있다. 총 2300만원의 제작비가 소요된 이 통일비 건립에는 정효순 범민련 고문 외 나창순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 도경호 민자통 의장, 한상열 통일연대 대표, 김원웅 국회의원, 신용관 범민련 대전.충남연합 위원 등이 추진위원으로 참여했다. 호서정맥을 하며 차령고개에서 만난 기억이 있는데 유독 충남 지방에 많이 세워져 있다.
만인산 오르는 중에 중부대학교로 내려서는 임도를 만나 가파른 급경사 능선으로 오릅니다.
♤ 중부대학교(中部大學校)
충남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4년제 사립종합대학이다. 1984년 2월 설립된 중부신학교(中部神學校)를 전신으로 하며, 1995년 지금의 교명인 중부대학교로 명칭을 변경했다. 교훈은 ‘자유·진리·창조'이다. 대학 본부가 있는 웰니스-바이오 캠퍼스는 금산군 추부면에 소재하며, 이노-미디어 캠퍼스는 고양시 덕양구에 소재한다. 2015년 3월 중부대학교 고양캠퍼스가 개교하여 2015년 현재 중부대학교 충청캠퍼스는 4개 대학원, 5개 단과대학, 29개 학과를 운영하고 있으며, 고양캠퍼스는 3개 단과대학, 22개 학과를 운영하고 있다.
만인산까지 거리는 왕복 660m, 여기부터는 보만식계와 대전시둘레길의 제도권 등산로로 진입합니다.
♤ 만인산갈림길(460m)/ 광군면계(금산군 추부면, 복수면 → 대전광역시 동구)
스텐레스 깃대와 경광등이 설치된 대전동부소방서 만인산5호 현위치번호 표지가 세워져 있다. 지맥 왼쪽이 금산군 복수면 목소리에서 대전광역시 동구 하소동으로 바뀌는 지점이다. 금산군을 지나온 지맥이 대전광역시와 만나는 곳으로 지맥은 오른쪽이지만 왼쪽으로 만인산을 다녀온다. 이후로 광역시군 경계를 따라 명지봉까지 진행한다.
정상에서 금성산에서 닭이봉과 철마산쪽으로 서대산으로 향하는 장령지맥 산줄기를 찾아봅니다.
♤ 만인산(萬刃山, 537.8m)/ 봉화대터/ 2등삼각점/ 태봉산/ 태실산(胎室山)
충남 금산군 추부면과 복수면 대전광역시 동구 일대에 걸쳐있는 산으로 정상석은 없고 2등삼각점(금산 22/ 2003 재설)이 있다. 이정목과 봉화대터 안내문 등이 세워져 있다. 금산군 추부면과 서대산 그리고 장령지맥 뒤로 천태산까지 주변 일대가 환하게 조망이 가능한 장소이다. 고조선 때부터 정상에 봉수대가 있었다고 전해지며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태실(胎室)이 있는 산이라고 해서 태실산(胎室山), 또는 태봉산으로도 부른다. 원래 태조의 태실은 함경도에 있었으나 무학대사(無學大師)가 만인산의 터가 명당이라 이곳으로 옮겨왔는데, 태실은 일제강점기 때 파괴되었다가 복원되어 만인산 동남쪽 자락에 위치 지명의 유래는 산봉우리의 모양이 만발한 연꽃 모양을 닮았다고 유래된 지명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진산군 편에 만인산에 관하여 '군의 동쪽 20리에 있다. 성봉(星峰)이 있는데 땅은 두텁고 물은 깊다. 봉우리가 우뚝 솟아 연꽃처럼 생겼다. 태조의 태를 묻었다'라 고 기록되어 있으며 『대동지지』 진산군 편에도 '동북 30리에 있다. 성봉, 땅은 두텁고 물은 깊으며 고스락이 뾰족뾰족 솟은 봉우리가 기이하고 빼어나다. 그 모습이 연꽃 같다.'라고 써있다. 이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동지지』가 만인산의 경관을 잘 설명하고 있다. 만인산의 한자 '인'의 뜻은 '깊다'의 뜻도 되고 한 길(=질, 사람의 키 정도)의 뜻도 있어서 만 길, 만 장(丈)이 되리 만치 높다는 뜻이다. 또 만인은 단애 즉 '깍아 세운 듯한 낭떠러지'의 뜻도 있다. 『여지도서』(진산)에는 "태실산(胎室山)은 군 동쪽 30리에 있다."고 하여 태조 이성계의 태실이 안치되어 있던 만인산을 '태실산'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1872년지방지도』(진산)에는 만인산 아래 태조대왕태실로 표기된 석실이 그려져 있으며 하소동에서 금산군 추부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태봉재라 한 것도 이에 연유한 것이다. 숲과 계곡이 아름다운 곳으로 등산로와 숲속 자연탐방로가 잘 정비되어 만인산 자연휴양림이 조성되어 있고, 동쪽 능선에 만인루(萬仞樓)가 있으며 남쪽 기슭에는 중부대학교가 자리하고, 동쪽에는 금산군 추부면이 위치한다. 대전천이 만인산 계곡에서 발원한다.
♤ 대전광역시 동구(東區)
대전광역시 동구는 대전의 동쪽에 있으며, 중앙동에 대전역과 철도기관 공동사옥이 동편에 위치하고, 용전동에는 대전복합터미널이 있다. 동부에는 대청호가 있다. 2012년 가오동의 신축 청사로 이전하였다. 동쪽으로는 충북 옥천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고, 서쪽으로는 대덕구와 중구를 접하고 있다. 남쪽으로는 충남 금산군과 접하고 있고, 북쪽으로는 충북 청주시와 옥천군의 북부와 접하고 있다. 1980년 인공적으로 형성된 대청호가 맑은 호수를 이루고 있으며, 대덕구와 충북 청주시·보은군의 경계에도 걸쳐 있는 대청호에 대청댐을 건설함으로써 대청호 인근의 일부 지역이 수몰되었다. 특히, 내탑동에 있던 내탑초등학교는 수몰로 인해 폐교되었다. 조선시대 이성계의 태를 묻었다는 해발 537m의 만인산이 우뚝 서서 남풍을 막고, 그중턱 동쪽으로는 597m의 식장산이 그 줄기를 이루어 북쪽 계족산까지 펼쳐져 있으며, 동구의 수계는 식장산에서 발원한 세류가 흐르는 대동천과 만인산에서 시작하여 식장산 세류와 합쳐지는 대전천이 북쪽으로 흐르고 있다. 경부고속도로와 통영대전고속도로, 대전남부순환고속도로가 지나간다. 판암나들목과 비룡분기점이 있다. 그리고 금산으로 이어지는 국도 제17호선과 옥천으로 이어지는 국도 제4호선이 지나간다. 경부선 및 경부고속선이 동구를 관통하며, 대전광역시의 중심 역이자 동시에 충북 제천시의 제천역과 함께 충청권 철도 교통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대전역이 동구에 위치해 있어 여객 수요가 매우 많으며(ktx, srt 이용도 가능), 대전 도시철도 1호선에서 같은 이름의 역과 서로 연결되어 있어 연계 환승이 편리하다. 그 이외에도 대전역과 옥천역(부산 방면) 사이에 세천역이라는 소규모 역이 있으나 영업을 하지 않는 역이다. 2016년 12월부터 강남 수서역에서 출발하는 srt가 운행되기 시작하였다. 동구에는대전도시철도 1호선이 통과한다. 판암차량기지가 있고 판암역, 신흥역, 대동역, 대전역이 자리잡고 있다.
♤ 보만식계란
보만식계는 보문산(457.3m), 만인산(537.1m), 식장산(597.5m), 계족산(423m)의 첫 글자를 딴 말이다. 대전의 남쪽에서 시작해 북동쪽까지 4개 산의 산줄기를 잇는 보만식계 거리는 65㎞이고, 종주하는데 드는 시간은 20시간 안팎이다. 산행 경로는 보문공원 입구(구 케이블카)~보문산 시루봉(458m), 봉화터, 오도산(337m), 목달산(376m), 돌탑봉(475m), 금동고개, 떡갈봉(493m), 얼갱이산(490m), 안산(424m), 505m봉, 먹티고개, 만인산(537.8m), 만인산휴양림(봉수레미골), 정기봉(573.3m), 541.1m봉, 머들령, 국사봉(506.2m), 닭재, 계현산성, 꼬부랑재, 망덕봉(439m), 곤룡재, 사양리산성, 동오리재, 580.6m봉, 해돋이전망대, 식장산(596.7m), 세천유원지, 갈고개, 갈현성(263m), 능성, 질현성, 절고개, 계족산(423.9m), 전망대, 와동주공아파트이다.
♤ 보만식계 지도
만인산 휴계소 갈림길에서 지맥길은 학습원, 태실쪽으로 이어지는데 직진해도 능선을 따라 내려가 휴양림에서 만나지만 좌틀 급내리막으로 만인산자연휴양림에 내려서면 물 보충 가능하고, 만인산푸른학습원에서 우틀로 된비알을 올라야 합니다.
♤ 태봉재(胎峰峙)
능선 아래로 대전광역시 남서쪽 동구 하소동에서 금산군 추부면으로 이어지는 17번 국도가 지나는 추부터널 위이다. 본래 이 지역은 전라도 진동현에 속했었는데 조선초 태조 이성계의 어태(御胎)를 모신 후 진산군으로 승격되었고 만인산은 태실을 만인산에 옮겨오면서 태봉산/ 태실산으로 불렸다. 이후 태조 태실이 금산 추부에서 대전 하소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위치하여 이 고갯길은 태봉재(고개)로 불렸다. 지금은 태봉재 아래로 금산과 대전을 잇는 추부터널이 뚫려 있다. 태봉재를 유격 줄사다리로 건너서면 지맥 오른쪽에 태조대왕 태실이 있다.
대전광역시 남서쪽 동구 하소동에서 충남 금산군 추부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오른쪽 아래 태조대왕태실을 다녀옵니다. 여기에서 구간을 끊는다면 중부대학교로 이어지는 임도로 약 10분 내려서면 태실 주차장이고 여기서 추부버스정류장으로 나가야합니다.
♤ 태조대왕태실/ 충남 유형문화재 제 131호
1989년 4월 20일 충남 유형문화재 제131호로 지정되었다. 충남 금산군 추부면(秋富面) 마전리에 있다. 태조대왕 태실은 조선조 제 1대 왕인 태조 이성계의 태(胎)를 봉안한 석실이다. 조선 태조 5년에 건축 되었으며 태조 이성계의 태를 처음에는 함경도 본궁의 용연(龍淵)에 안치하였다가 무학대사의 지시로 금산군 추부면 만인산에 옮겨 안치하고, 태실비를 세웠다. 1393년(태조 2)에 태조(1335~1408)의 태실을 마전리 태봉산(胎封山, 이전의 만인산)에 조성하였다가 1928년 4월 조선총독부가 태를 창덕궁 창경원으로 옮겼다. 이후 태실은 파괴되었고 1993년에 비석과 여러 석물들을 모아 복원하였다. 태실은 팔각형이며, 돌로 난간을 만들었으며, 그 안에 팔각원당형 구조로 되어 있다. 그 앞에는 귀부 위에 태실비가 있으며, 정면에는 비문 ‘太祖大王胎室’이 음각되어 있다. 이곳은 조선 초기에 한 시인이 만인산을 보고 산세가 깊고, 중첩한 산봉우리는 연꽃이 만발한 것 같고 99산의 물이 한곳으로 모여든다고 찬양한 곳이다. 이 소식을 들은 왕실이 이곳에 태조의 태실을 축조하였고, 옥계부사를 두어 관리하도록 하였다. 지금도 추부면 장대리에 ‘玉溪府使都’라는 고적이 남아 있고, 비례리(備禮里)의 이름도 그 지점부터 예를 갖추고 태실에 참배하였다는 데서 연유한다. 태봉산은 이전에는 만인산이라 불렀으나 태조의 태를 묻었다 하여 태봉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태를 묻었던 능선은 쌍봉낙타령으로 남향이며, 태봉산의 북풍을 막을 뿐만 아니라 햇빛이 잘 드는 곳이다.
♤ 351.2m봉
363m봉에서 왼쪽으로 내려선 휴식공간(장의자)이 있는 푸른학습원 갈림길이다.
♤ 추부, 마전(馬田) 갈림길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금산군 추부면소재지가 있는 마전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속칭 마전이라고 불리는 추부면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태실(胎室)이 모셔져 있는 지역으로 과거 한양과 금산을 오고갈 때 지나는 주요 교통로상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마전의 지명유래는 예전에 말을 사고 파는 마장터가 있었으므로 마전이라 불렀다는 설과 말채꾼이 매년 봄,가을에 제주도로 말을 몰고 가는 중 머들령(馬達領)을 지날 때 사용하였던 마방이 있던 마을이라 하여 마방의 馬자와 마방에 딸린 밭의 田자를 따서 마전이라 불렀다는 설이 있다.
마루금으로는 가파르고 길이 없어 왼쪽으로 우회해서 오릅니다. 지나온 만인산(537.8m)과 가야할 마루금 그리고 식장산(596.7m)과 서대산(904.1m)도 시원하게 조망이 가능합니다. 서대산 옆으로 환산(579m)도 찾아지네요.
♤ 정기봉(正起峰, 573.3m)/ 봉화대터/ 만인산 성봉(星峯)
정상에는 돌탑과 정기봉 봉화대터 안내판이 서 있고, 정상 이정목(식장산18.5km/연수원1.1km/태실1.4km/만인산3.1km/제1주차장1.1km)과 벤치 두개가 있다. 충남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와 비례리, 대전광역시 하소동에 걸쳐있는 산으로 서쪽에 있는 밋밋한 만인산보다도 훨씬 멋있고 높이도 40여m 더 높은 대전광역시에 걸쳐있는 산으로는 식장산에 이어 두번째로 높은 산인데 이름하나 얻지 못하고 국립지리원지도에는 무명봉이다. 정기봉 봉화터는 한성(서울)에서 보내온 신호를 받아 영남으로 보내는 역할을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동지지』에는 만인산의 정기봉을 성봉으로 기록하고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진산)에 "군의 동쪽 20리에 있다. 성봉(星峯)이 있는데 땅이 두텁고 물이 깊으며 봉우리가 기이하고 빼어나게 우뚝 솟아 모양이 마치 연꽃같이 생겼다. 우리 태조의 태를 묻었다."고 하여 관련 기록이 처음 등장하며 『여지도서』(진산)에는 "태실산(胎室山)은 군 동쪽 30리에 있다."고 하여 태조 이성계의 태실이 안치되어 있던 만인산을 '태실산'으로 기록하고 있다. 『1872년지방지도』(진산)에는 만인산 아래 태조대왕태실로 표기된 석실이 그려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런 기록으로 봐서는 지금 부르는 만인산이 아닌 이곳 정기봉이 만인산 성봉(星峯)으로 봐야 한다고 한다. 이 지역의 사람들도 이곳 정기봉이 성봉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있는데 정기봉으로 바뀐 이유는 이 산 아래에 조성된 푸른학습원에서 만인산 일대를 개발하고 개념도와 안내도를 만들 때, 근동(近洞)의 어느 노인이 정기봉이라 했다고해서 정확한 고증도 없이 모든 안내판에다 정기봉이라 기록하는 바람에 원래 지명인 만인산 성봉이 아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정체불명의 산 이름이 되었다고 이 지역 사람들은 주장한다. 우틀하여 급사면으로 줄을 잡고 내려선다.
정기봉을 내려서며 지맥의 왼쪽이 대전광역시 동구 하소동에서 상소동으로 바뀝니다.
♤ 대전광역시 동구 상소동(上所洞)
원래 공주군 산내면(山內面)에 속하는 지역으로 백제시대에는 우술군(雨述郡), 신라시대에는 비풍군(比豊郡), 고려 초기에는 회덕현(懷德縣), 1018년(현종 9) 이후에는 공주부,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편 뒤에는 회덕군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산적리를 합하여 상소리라 한 뒤 대덕군 산내면에 편입되었다. 1989년 대전시가 직할시로 승격함에 따라 상소동이 되어 대전직할시 동구 상소동이 되었고, 1995년부터는 대전광역시 동구 상소동이 되었으며, 행정동은 산내동이다. 동 이름은 하소마을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 산다는 뜻이라는 설과 원래 하소동보다 낮은 지역이었는데 권력자가 억지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설이 있으며 벌말·산적말(산직말)·큰골·상정말·소전골 등의 옛마을과 꽃재봉·떡갈봉·삼봉·여섯봉(형제봉) 등의 야산, 가마바위·장수바위 등의 큰 바위가 있으며, 보호수로 큰골에 수령 약 350년 된 둘레 5m, 높이 20m의 느티나무 1그루가 있다. 산적말은 산지기의 집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장수바위는 장수의 손바닥 자국이 남아 있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유적으로는 곡남산성(일명 골나미성:404m)이 전한다.
지봉산을 내려서면 지맥의 오른쪽이 추부면 마전리에서 비례리로 바뀝니다.
♤ 지봉산(止鳳山, 502.1m)/ 광군계/ 삼리동봉(대전광역시 상소동, 추부면 마전리 → 비례리)
대전광역시 상소동과 충남 금산군 추부면 비례리·마전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준희선생님 지봉산 산패와 반바지님 코팅지가 참나무에 매어 있고 선답자 띠지가 잔뜩하다. 지명 유래는 산의 생김새가 마치 자색의 봉황같이 빼어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또 옛날 봉황새가 울어서 지나가는 행인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는 전설 때문에 그렇게 불렸다고도 하는데 명성에 비해 산세나 높이로 보아서는 독립된 산이름을 가질 만한 봉이 못되는 볼품없는 산이다.
♤ 금산군 추부면 비례리 마음동(馬音洞)
마전(추부)에서 옥천으로 가는 지방도 북쪽으로 자리한 마을을 마랑골 또는 마음동이라고 부르며 마을에서 마전리 미사기마을로 넘어가는 덕고개가 있으며 북쪽으로는 듬바우라고 부르는 산도 있다. 마을 서쪽에 있는 골짜기는 바람이 세다 해서 바람골이라고 부르고, 마을 앞에 펼쳐진 들은 보리가 잘된다 해서 보리내라고 부르며 마을 앞에 있는 산이 말의 형국이라 하는데, 말의 입에 해당하는 둠벙가라는 곳에서 물소리가 꼭 "말이 우는 형국"이라 해서 마음동(馬音洞)이라고 부르다가 변하며 마랑골이라고 부른다 한다. 주민들에 의하면 마음동 앞산은 말의 머리에 비정되고 뒤쪽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말의 몸체에 해당한다고 한다. 말머리 앞에는 말의 입에 비정되는 둠벙이 있는데 흐르는 물소리가 마치 말의 울음소리와 같다는 속설이 내려온다. 실제 마을 뒤편에 마음동의 지세를 살피면 영락없이 한마리의 말이 물을 마시면서 우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예부터 마음동이라 물렀으니, 1789년에 편찬된 [호구총수]에도 지명이 등장한다. 옛날에는 반남박씨(潘南朴氏)의 집성부락이 있었던 마을이다.
비가와서 생략하고 진행했습니다.
♤ 464.7m봉/ 삼각점봉
준희선생님 '그곳에오르고싶은산' 산패가 밤나무에 매달려 있다. 지봉산에서 오른쪽으로 왕복 약 0.6km 다녀와야 한다. 4등삼각점(금산 419/ 2003 재설)이 있다.
♤ 501m봉
골냄이부락 갈림길을 지나 501m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왼쪽은 청소년수련관, 지맥은 오른쪽 닭재 방향으로 내려선다.
♤ 472.2m봉 갈림길
오른쪽 능선으로 가면 족보가 있는 472.2m봉으로 가는 길이고 맥길은 왼쪽 아래로 내려선다.
♤ 508.2m봉
묘지 한기와 장의자가 하나 있고 선답자님들 띠지가 소나무 가지에 엄청스리 매달려 있다.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뒤로 가야할 식장산(596.7m)을 조망한다.
♤ 541.4m봉/ 삼각점봉/ 무인산불감시카메라
준희선생님의 542m 옛날 산패가 소나무에 매달려 있다. 그 주위에 선답자 띠지도 주렁주렁하다. 부서진 4등삼각점(금산 420/ )이 있고 서대산(904.1m)의 위용이 대단하게 보인다.
♤ 496m봉/ 광군계/ 삼면동봉(금산군 추부면, 대전 동구 상소동 → 삼괴동)
쉼터 의자와 봉화대터인지 돌로 동그랗게 석축이 쌓여져 있는 곳을 지나 오른쪽으로 식장산 방향 갈림길 지점이다. 여기서 지맥의 왼쪽이 대전광역시 동구 상소동에서 삼괴동으로 바뀐다. 안내판과 식장산 12.9km 이정표가 서있다.
♤ 대전광역시 동구 삼괴동(三槐洞)
대전 동구 삼괴동은 동쪽으로 옥천군 군서면과 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소호동, 장척동과 접해있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상소동과 북쪽으로는 구도동과 이웃해 있다. 백제시대에는 우술군에 속했으며, 신라시대에는 비풍군에 속하였다. 고려초기에는 회덕현에 속했다가 현종 9년(1018) 이후에는 공주부에 속하였다. 이지역은 본래 공주군 산내면의 지역으로서,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개정에 의해 회덕군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의하여 소룡리, 마달리, 소호리 일부와 외남면의 덕산리를 병합하여 삼괴리라 해서 대전(대덕)군 산내면에 편입되었다. 그러다가 1935년 11월1일 대전부 신설에 따라 대덕군에 편입되고, 그 후 1989년 1월 1일 대전직할시 승격에 따라 대전직할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행정동은 산내동이다가 1995년 1월 1일 대전광역시 동구 삼괴동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예전에는 이곳에 세 그루의 느티나무가 정자처럼 한곳에 서 있어 나그네의 쉼터인 동시에 마을 선비들이 시를 읊으며 놀던 자리가 되었다하여 삼괴정 또는 뺏이라 부르던 지역이라 한다. 집건말·점말·송촌말 등의 옛마을과 국사봉(509m)·떡갈봉·소룡산(368m) 등의 야산,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 세그루가 있으며, 머들령 입구와 골짜기에는 각각 정자와 성황당이 있다.
트랭글 앱에서는 상소동산림욕장갈림길 표지판이 있는 봉우리를 마달봉(375m)이라고 합니다. 오른쪽으로 내려서면 마달령입니다. 대전통영간 고속도로와 국도 제37호선이 마루금 밑으로 지납니다.
♤ 마달령(馬達嶺)/ 머들령/ 이정목
대전광역시 동구 심괴동과 금산군 추부면 요광리를 잇는 고개로 충북 옥천군 군북면 증약리(增若里)에서 대전광역시 동구로 넘어가는 고개로, 고개 아래로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마달터널이 지나는 곳이다. 지명은 『1872년지방지도』에 '마달치(馬達峙)'로 기록되었다가, 이후 20세기 초반 『조선지지자료』에 마달령[머들영] 군북 일소면 증약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치(峙)'에서 '령(嶺)'으로 후부 지명소의 표기자가 변화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식장산 서쪽 대전시 방면은 산세가 완만한 반면 동쪽 옥천군 방면은 대부분이 급경사에 수직 절벽을 이루고 있다. 예부터 이 산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시 되었던 산이다. 백제가 이 산 북동쪽 능선상의 마달령(馬達嶺) 일명 탄현(炭峴)에서 신라군을 막지 못해 멸망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일제시대 초창기까지도 금산방면에서 대전을 통해 북쪽 한양으로 통하는 고개로 마달령(馬達嶺), 일명 머들령이라고도 불리며, 1946년 당시 일본인 금산 우체국장이 조선인들 고혈을 짠 돈이든 우편 행낭을 메고 넘다 의병들에 의해 피살되었던 현장이었다고도 한다. 마달령은 6.25 때에도 중요한 방어선 역할을 했다. 이 때 미군 제24사단장 딘 장군이 격전 중 후퇴하다가 이 고갯길을 찾지 못해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오른쪽으로 바위 사이에 협곡처럼 좁은 길도 보이고, 정훈 시인의 머들령 시가 세워져 있다.
요강원을 지나 머들령
옛날 이길로 원님이 내리고
등짐장사 쉬어 넘고
도적이 목 지키는 곳
분홍 두루막에 남빛 쫄띠 두르고
할아버지와 이재를 넘었다
뻐꾸기 자주 울던날
감장 개명화에
발이 부르트고
파랑 갑사댕이
손에 감고 울었더니
흘려간 서른 해
유월 하늘에 슬픔이 어린다
♤ 충북 옥천군 군북면 증약리(增若里)
증약리라 부르게 된 것은 이곳에 증약찰방역(增若察訪驛)이 있었기 때문이다. 증약찰방역은 전국 40개 주요 역 가운데 하나로, 조선시대까지 한양에서 동래까지 가는 길목에 위치한 마달령(馬達領)이라는 협곡을 지나야 했으므로 양산(양산) 순양역을 비롯, 이원 토파역, 옥천읍 가화역, 화인역, 회덕 전민역(대전) 등을 모두 관할하는 중요한 역이었다. 『 여지도서』의 기록에 의하면 군북면 증약리라 하여 1739년 군내에서 가장 많은 287호가 살았으며 이때는 이백리와 자모리까지 관할하였다. 이 마을에는 종6품인 찰방 외에 역리 3백55명이 근무를 했으며, 찰방비 및 선정비 8기가 마을 뒷편 산기슭에 보존되어 있다. 당시 마을이 컸었기 때문에 마을입구에는 장터거리라 하여 장이 섰던 자리가 남아 있고, 쇠마재비라 하여 조정으로 진상하던 말을 쉬게 했다는 장소도 현재의 증약초교앞 철로변쯤으로 파악된다. 또한 찰방이 거주하던 관사는 현재 증약성결교회가 있는 자리로, 교회안에 주춧돌과 말매기돌, 중수상량문 원본이 보관되어 있다. 옥천-대전간 국도변에는 증약찰방역유지비가 세워져 있다. 마을에는 660년 신라 문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전하는 유일한 다리 문화재인 청석교가 있었다. 청석교에는 이곳을 지나던 고려 강감찬 장군이 모기가 극성이라는 소리를 듣고 호통을 쳐서 모기를 쫓았다는 전설이 전한다. 청석교는 2001년 다리를 안내면 장계국민관광단지 향토전시관 앞으로 이전했다. 경부선 철로 증약터널과 관련해서는 터널옆으로 문같이 생겼다 하여 문바위라고 불린 바위가 있는데 터널이 개통되면서 문이 비로소 열렸다는 얘기와 함께 마을에 대사동(大寺洞)이라는 큰 절터에서 가져간 부도가 현재 옥천경찰서 앞마당에 보관되어 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기에는 증약일대에 1만3천명의 북접동학군이 일본군 및 관군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여 공주 우금치로의 진군을 며칠동안 막았으며, 한국전쟁 당시에는 미군 24사단과 인민군 3사단이 마달령 산악지에서 옥천읍 서정리에 이르기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939년 개교한 증약초등학교가 있으며, 상추 등 채소를 많이 재배해 대전권 채소값을 좌우할 정도로 근교농업이 활발하다.
♤ 금산군 추부면 요광리(要光里)
백제 때는 진동현 지역으로 고려시대 전후 마을이 생성된 것으로 보인다. 신라 때는 황산군에 딸린 영현에 속했다가 진례군의 영현에 속했다. 고러먈기 공양왕 2년(1390)에는 잠시 전라도 고산현감이 겸해서 다스리는 고을에 속했다. 조선시대 초기 태조 이성계의 태를 만인산에 안봉하고 고을이 승격된 지진주사의 고을인 옥계부에 속했다가 진주현에 속하여고 태종 12년(1412)부터 진산군에 속했다. 추부면 소재지인 마전에서 옥천군 군서면으로 이어지는 37번국도를 따라 3km 남짓 달려가면 요광리를 구성하는 검한이, 장산, 행정리 등의 자연마을이 400~500m 거리를 두고 도로변 양쪽에 옹기종기 모여있다. 요광리는 조선시대 제원역에 딸린 원집 요광원이 있었으므로 요광원, 요광원촌, 원촌이라고 불렸던 지역이다. 서북쪽에 위치해서 동쪽으로는 신평리와 서대리에 접하고, 남쪽으로는 비례리, 자부리와, 그리고 동북쪽으로는 대전광역시 동구 상소동, 삼계동과 경계를 나누고, 서북쪽으로는 완전한 산악지대이며 서쪽으로 길에 들이 조성되어 있는 지역이다. 일본 제국주의시대 초창기까지도 금산방면에서 대전을 통해 북쪽 한양으로 통하는 큰 길이 있어서 그 길의 고개로 마달령재, 즉 일명 머들령이란 고개로 널리 알려졌던 지역이 요광리다. 요광리 자연마을 가운데 가장 먼저 형성된 곳은 옥천전씨의 세거지인 검한리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요광리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성씨는 바로 뒤에 세거한 해주오씨이다. 연산군 때의 문신 오유종이란 인물이 입향조인데 당시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그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발단이 된 무오사화로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항(혹은 귀향)하여 요광리 행정마을에서 세거한 것으로 전해진다. 행정이란 지명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마을 내에는 천연기념물 84호로 지정된 은행나무 한 그루가 버티고 있는데 오유종이 이곳에 은거할 때 은행나무에서 자신의 호를 취해 행정이라 하였다. 이후 요광리를 비롯한 인근 마을에는 해주오씨가 널리 퍼져 예전의 추부면은 오씨촌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크게 번성하였다.
♤ 388.1m봉/ 장의자
373m봉에서 내려선 안부에서 능선으로 올라선 봉우리이다.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성터인지 봉화대터인지 다른 곳에서 이동해 온 돌무더기가 어지럽게 널려있는데 자료를 찾을 수가 없다. 정상에 장의자 두개와 국가지점번호가 있다.
♤ 406.2m봉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지맥의 오른쪽이 추부면 요광리에서 신평리로 바뀌는 지점이다.
♤ 명지봉(404.2m)/ 삼광군봉(대전광역시 동구, 금산군 추부면 → 옥천군 군서면)
맨발대선배님의 명지봉 산패가 소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고 선답자님들 띠지도 많다. 충남북과 대전광역시 경계봉인 명지봉은 정상부가 평평한 묵은 헬기장이나 공터였던듯 싶은데 지금은 잡목으로 가득차 있다. 지맥의 오른쪽이 충남 금산군 추부면을 벗어나 충북 옥천군 군서면 사양리로 들어서서 이후로는 대전광역시 동구와 옥천군 군서면의 경계를 따라 식장산까지 진행한다. 등로 오른쪽으로 도덕봉(447.3m)이 있지만 맥길은 왼쪽으로 이어진다.
옥천군 군서면은 돌메기산에서 장령지맥과 만나 장령산을 지나 장령정갈림길까지 함께 하기도 합니다.
♤ 옥천군 군서면 사양리(舍楊里)
옥천군 군서면 사양리는 원래 군서면 사음동리(舍音洞里)에 속해있던 마을로, 후에 사양리(舍楊里)와 상지리(上地里)로 나누어 현재에 이른다. 사양리라 부르게 된 것은 마을이 골짜기 안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마을은 분지로 산이 둘러싸여 있어, 마치 마당에 울타리를 한 것 같다 하여 마랑골이라 불렸는데 한자로 쓰면서 마음이라 하였으며 그 후 집사(舍), 사시나무양(楊) 자를 써서 사양이라 부르게 되었다. 북쪽으로부터 사양리산성, 망덕봉 망루, 계현산성, 국사봉 망루에 이르기까지 백제가 신라의 침략을 막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사양리의 대부분은 대전시 녹지공간을 훼손하지 않기 위한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있다. 함박골소류지와 마음소류지가 있다.
♤ 389.6m봉 삼각점봉 갈림길
오른쪽으로 약 0.3km 벗어나 있는 4등삼각점(427 금산/ 건설부 70. 9.)이 있는 389.6m봉을 다녀온다. 준희선생님 '그곳에오르고싶은산'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지맥은 좌틀로 내려선다.
♤ 국사봉(國師峰, 506.2m)/ 이정표
닭재 1.5km, 만인산 10.9km를 가리키는 이정표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장의자 두개가 있고 국가지점번호판에 매직으로 국사봉이라 표기하고 있고, 돌탑봉에 자연석 정상석을 세워 누군가 국사봉이라 적어 놓았는데 지워져 보이지 않는다. 대전광역시 동구 삼괴동과 충북 옥천군 군서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산의 모양이 관처럼 생겼다하여 국사를 논하는 국사봉이라 하며 검한이 뒤에 있는 산이다. 오록스맵 지도는 이 봉 북쪽 아래의 봉도 아닌 391.3m봉을 국사봉으로 적고 있는데 지도 작업상에 실수로 보인다. 도상 국사봉(391.3m)은 지맥에서 벗어난 오른쪽에 표시되어 있다. 왼쪽으로 내려선다.
왼쪽 100m 아래 낙천약수터를 모르고 지나면 안되겠죠. 닭재에서 구간을 끊고 좌틀하여 덕산마을로 내려서면 덕산마을 버스정류소까지 약 15분 소요됩니다. 501번 버스로 대전역으로 나갑니다.
♤ 닭재(鷄峴, 245m)/ 사각정자, 돌탑/ 성황당고개, 성황목
식장산 7.4km/ 만인산 12.5km/ 덕산말 1.2km를 가리키는 이정목과 돌탑 두개, 사각정자가 있다. 닭재는 예부터 신라-백제간 경계지역으로 영토수호를 위한 격전지로 알려져 있다. 대전광역시 동남쪽 동구 삼괴동 덕산말마을에서 닭재를 통하여 충북 옥천군 군서면 사양리 논골마을로 넘어가는 대전에서는 유명한 옛 고갯길이다. 근래에 이르러 대전-옥천(군서명), 대전-금사(추부면)간 주민 이동로로 이용되어 왔다. 닭산(닭이봉)에 있는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닭산은 풍수상 산세가 닭의 모양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 금계포란형의 명당지지가 있다한다. 일설에 의하면 옛날부터 마을에 경사가 있으면 닭재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흉사가 있으면 소나무가 울었다고 전한다. 고개 북쪽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계현산성(鷄峴山城)이 있다. 『동여도』에 '계현(鷄峴)'으로 수록되어 있다. 닭재 정상에 이르자 왼쪽으로 만인산과 오른쪽으로 식장산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서 있다. 식장산 방향으로 5분쯤 올라가면 성재산 정상에 있는 계현산성에 도착한다.
♤ 계현산성(鷄現山城, 324.9m)/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24호/ 성재산
계현성은 삼국시대 산성으로 대전을 거쳐 부여로 향하는 중요한 통로인 닭재를 지키려는 중요 기지가 계현산성이다. 닭재를 지키는 성임을 알 수 있고, 성안에는 지금도 토기편과 기와편 등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옥천군 군서면 사양리 논골과 대전광역시 삼괴동 사이 닭재 북쪽 100m 지점이고, 무너진 산성의 흔적이 있으며 계현산성 표지석이 있다. 계현산성(鷄現山城)은 대전광역시 동구 삼괴동 송촌마을에서 충북 옥천군 군서면 금양리로 넘어가는 닭재고개 위의 표고 324.9m의 봉우리에 축조된 둘레 약 262m의 테뫼식(성곽의 축조 지형이 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하여 산의 7~8부 능선을 따라 거의 수평되게 한바퀴 둘러 쌓은 방식) 석축산성이다. 이 성의 동남쪽은 완전히 무너졌고, 서북쪽만이 5.2m높이로 남아 있는데 사용된 석재는 할석(割石)을 전면만 다듬어서 사용하고 있다. 이 성의 네모통이에는 높이 3.3m, 너비 6m 정도의 돌출부가 부설되어 있는데, 아마도 치성(雉城: 성벽에서 돌출시켜 쌓은 성벽)이나 망대지(望臺址)가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 문지는 남문지만이 남아 있으며 백제시대 토기편을 수습할 수 있다. 비교적 잘 남아있는 북동쪽 성벽은 외벽 높이 4.2m, 내벽 높이 0.8m, 성벽의 하부 너비 4.5m이다. 이 산성의 특징은 소호동산성(所好洞山城, 일명 비파산성)과 마주보이는 위치에 있어 금산군 마전(馬田)방면의 추정리산성, 금성산성과 연결되어 있어 이곳에서 넘어오는 적을 방어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동쪽으로는 성치산성(城峙山城), 서쪽으로는 소호동산성·사정성(沙井城)·보문산성(寶文山城)과 연계되어 있는 산성이다.
장애자도 장애우로 부르는 판인데 늙기도 설워라커늘 꼬부랑할머니라니...ㅠㅠ
♤ 꼬부랑재/ 이정표
꼬부랑재라 쓰여있는 이정목이 식장산과 만인산의 거리를 가리키고 있다. 왼쪽으로 삼괴동1.2km 으로 내려설 수 있는 꼬부랑재에서 사각계단으로 올라서고 소나무 쉼터가 있는 무명봉에서 지맥의 왼쪽이 대전광역시 동구 삼괴동 → 구도동으로 바뀌는 지점이다.
♤ 망덕봉(望德峰, 439m)
망덕봉 오름길에 준희선생님 힘힘힘 산패가 힘을 보탠다. 대전광역시 동구 구도동과 충북 옥천군 군서면 사양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보만식계 종주 망덕봉 이정목이 세워져 있고, 이정목에 식장산 5.6km, 만인산 14.3km로 안내하고 있다. 조망은 나오지 않는다.
♤ 378.6m봉/ 도광군계/ 구면계/ 삼리동봉(옥천군 군서면, 대전광역시 동구 구도동 → 낭월동)
철탑과 산내초교 갈림길을 지나 올라선 봉우리로 지맥의 왼쪽이 대전광역시 동구 구도동에서 낭월동으로 바뀌는 지점이다. 산패도 없고 띠지만 몇개 날리고 있다. 대전시 동구에 있는 산내동(山內洞)은 본래 조선 시대 공주목 산내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여지도서』에 사한리 · 소전리, 『호구총수』에 대별리 · 삼괴정 · 낭월 · 장척리 · 소호리 등이 확인된다. 식장산 남서쪽 낭월동(朗月洞)은 옛날 이곳이 풍수상 마을 지형이 옥토끼가 달을 바라본다는 옥토망월형(玉兎望月形)의 형국이므로 망월낭이·망월랑리라 하던 것이 변하여 낭월이 되었으며, 아름다운 달이 강에 잠긴다는 미월침강(美月沈江) 형국이 겹친 명당자리라는 뜻에서 생긴 마을 이름이다. 이 봉우리 아래로 대전에서 옥천군 군서면으로 이어지는 곤룡터널이 지나간다.
♤ 대전 산내 골령골/ 6.25전쟁으로 인한 민간인 최대 학살사건
대전광역시 동구 낭월동 13번지 골령골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28일부터 1951년 초까지 3차에 걸쳐 대전형무소 수감자와 지역주민 등 최소 1천 8백 명에서 최대 7천 명이 군경에 의해 집단 학살당한 현장이다. 주한 미국대사관 육군무관 에드워드 중령이 1950년 9월 23일 작성한 보고서인 '한국에서의 정치범 처형'에는 '서울이 함락되고 난 뒤 형무소 재소자들이 북한군에 의해 석방될 가능성을 방지하고, 공산당 우두머리와 좌익 극렬분자를 처단한다'라는 것이 학살의 명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가해자인 충남지구 방첩대(CIC), 제2사단 헌병대, 대전형무소 교도관, 지역 경찰 등이 30m에서 180m에 이르는 각각의 구덩이 8곳을 연결한 길이가 무려 1km에 달하는 골령골에서 민간인 집단 학살을 자행해 골령골은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 됐다. 당시 M1소총은 형무소 특별 경비대, 카빈은 경찰, 45구경 권총은 헌병대가 사용해 좌익 인사들을 무차별 집단 사살했다. 그런데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의 현장 지휘 책임자였던 심용현(대전 2사단 헌병대 중위), 정재환(대전지방검찰청 검사장), 송요찬(2사단 헌병사령관, 대령)등은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우대받아 부와 명예를 누리며 행복하게 잘 살다가 죽었다. 반면에 골령골 민간인 집당학살 사건 유가족들은 오랫동안 좌익의 집안이라는 세상의 오해와 차별로 숨죽이며 상처를 쉬이 드러내지 못했다. 지난 2007년에 와서야 관련 법이 제정되어 비로소 진실화해위원회 주도로 골령골의 좌익인사 유해발굴을 해서 34구를 발견했고, 2015년 민간인으로 구성된 공동조사단이 18구의 유해를 발굴했으며, 2020년에는 대전 동구청과 공동조사단이 234구의 유골을 수습했다. 그런데 약 7천여 명으로 추산되는 희생자 중 그나마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508명에 불과하다. 앞으로도 관계 당국은 희생자 유해 발굴과 평화공원 조성을 적극 지원키로 약속했다.
♤ 곤룡재(昆龍峙)/ 골링이, 골롱이, 곤룡고개/ 산내초교갈림길
곤룡재는 대전광역시 동구 낭월동과 충북 옥천군 군서면 사양리를 경계로 하는 곤룡산(327m)을 남쪽과 북쪽으로 횡단하는 고개로서, 곤룡재, 곤룡티, 골링이, 곤룡고개라고 부른다. 낭월동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옛날 옥천군 군서면 사양리에서 곤룡재(골내미재)를 통해 나뭇짐을 지고 대전 낭월동 낭월마을로 넘어다니던 고개이다. 본래 이 곤룡재는 산의 형국이 마치 용과 같다는 데서 따와 붙여졌다고 하지만 지금 이곳에 사는 노인들에 의하면 6.25당시 양민들을 이곳에 데려와서 대량학살하여 죽은 사람의 뼈가 산처럼 쌓였었으니, 골롱이는 골령의 예언적 지명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현재 곤룡재 아래로는 왕복 2차선의 곤룡터널이 새로이 뚫려 곤룡재를 넘나드는 사람은 등산객을 제외하고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 411m봉
도상에는 이 봉우리 아랫쪽으로 경부고속철도(ktx)가 지나가는데 철로는 보이지 않는다. 오른쪽으로 충남의 최고봉인 서대산 아래에 자리잡은 사양리 마랑골은 '갈마음소(渴馬飮所,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곳)'라고 불린 명당이었다. 예전에 전쟁이 있을때는 피난민들로 북적였던 곳이라고 한다.
♤ 사양리산성지(舍陽里山城, 443.1m)
충북 옥천군 군서면 사양리와 대전광역시 동구 낭월동 사이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계 퇴뫼형 산성으로 산 정상 200m 둘레를 돌로 쌓은 석축산성이다. 사양리산성은 성의 남쪽에 있는 곤룡재와 성의 북쪽에 있는 동오리재를 경계하기위하여 축성한 것으로 보이며 또한 계현성과 동오리산성과 함께 식장산 남쪽 방향에 축성된 백제의 중요한 성으로 추측된다. 식장산의 남쪽줄기에 있는 주요 고개는 동오리재와 곤룡재 및 닭재(鷄峴)인데 동오리재와 곤룡재는 고개의 동쪽이 매우 급경사라 많은 인원이 넘나들기에는 힘든 고개이나 닭재는 경사가 완만하다. 사양리산성지는 군서면 사양리 서성골 마을 서쪽 500m 정도인 식장산 남쪽 줄기에 있으며 전체적인 지형은 남북으로 길며 동서로는 좁다. 옥천쪽인 동쪽 경사면은 매우 급경사로 거의 절벽에 가깝고 대전쪽인 서쪽 방향은 상대적으로 조금 완만하나 그래도 경사가 급하다. 성의 내부는 동쪽이 약간 낮게 형성되었는데 그 이유는 성의 내부공간을 확보하며 북서쪽의 찬바람을 막기위하여 서쪽 성벽을 원래의 능선에서 약간 아래쪽에서부터 높게 쌓아 올렸기 때문이다. 산성 흔적은 찾아볼 수 없으며 무명봉에 사양리산성 표지석이 있다. 산성터 아래로 내려서며 이후 지맥의 오른쪽이 옥천군 군서면 사양리에서 상중리로 바뀌어 진행한다.
♤ 옥천군 군서면 상중리(上中里)
식장산 자락에 위치한, 앞으로는 서화천이 흘러 경관이 빼어난 농촌마을로 능골(능곡,중동), 동오리(동오동), 새터말(신촌동,신대동), 아랫동오리, 윗동오리 등이 있는데 능골은 마을 뒤에 능자리로 잡았던 곳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새터말은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뜻이다. 아랫동오리는 동오리 아래쪽에, 윗동오리는 동오리 위쪽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유적지로는 구절사가 있으며, 구절사에는 바위에서 쌀이 나왔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 낭월임도/ 대전시 동구 낭월동(朗月洞)/ 대전둘레산길종합안내도
대전시 동구 낭월동으로 이어지는 넓은 임도가 왼쪽으로 이어진다. 대전시 동구에 있는 낭월동은 식장산(食藏山, 597m) 서쪽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옥천군 군서면, 서쪽으로는 대별동, 남쪽으로는 구도동, 북쪽으로는 대성동과 접하며, 백제시대에는 우술군(雨述郡), 신라시대에는 비풍군(比豊郡), 고려시대에는 공주부, 조선 초기에는 공주군, 1895년(고종 32) 행정구역 개편 이후에는 회덕군(懷德郡)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외남면 낭월리와 대성리 일부를 합하여 낭월리라 하고 대덕군 산내면에 속했다가, 1935년 11월 대덕군에 속하였다. 1989년 1월 대전시의 직할시 승격에 따라 대전직할시 동구 낭월동이 되었고, 1995년부터 대전광역시 동구 낭월동이 되었다. 행정동은 산내동이다. 갈미봉(361m)·곤룡산(327m)·호랩산 등의 야산과 옛마을인 산정말이 있다. 민속놀이로 해마다 대보름에 장군제를 지냈으며, 장승이 없는 마을에서는 동네 입구에 돌탑을 쌓고 탑제를 지냈다.
♤ 427m봉
가야할 식장산 능선이 바짝 다가와 있다. 맨 왼쪽(방송국 송신탑)이 있는 식장산과 중간에 있는 망경대 kt송신탑(574.0m봉), 맨 오른쪽의 독수리봉의 모습이다. 오른쪽으로는 장중저수지 뒤쪽으로 관산성이 있던 천성장마 장령산 아래 마성산과 용봉이 건너다 보인다.
♤ 동오리재(東五里峙, 423m)/ 둥그너미재
이정목이 만인산 17.8km, 식장산 2.1km를 안내하고 있으며 기둥에 동오리재라고 쓰여있다. 왼쪽 낭월동 산내주민센터 방향과 오른쪽 옥천군 군서면 상중리(=동오리) 방향의 길이 연결되는 십자로 갈림길 사거리 안부이다. 대전시 동구 낭월동의 장등골과 충북 옥천군 군서면 상중리 동오리 마을위에 있는 고개로 지명의 유래는 동오리 마을에서 따온듯 하며 이곳부터 식장산을 향한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된다. 상중리는 군서면 소재지 바로 못미치는 곳에 비교적 깊숙히 위치해 있는데 식장산의 정기를 받았다는 이곳은 옛부터 동오리라고 불렸다. 다섯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해서 동오리라고 불린 상중리는 본래 새터말, 아랫능골, 윗능골, 분터골, 안동오리 등 5개 마을로 형성되었다. 오른쪽 아래로 군서면 상중리에 동오(장중)저수지가 보인다.
옥천군 천성장마의 마성산(510m)과 용봉(436.7m) 사이에 있는 동평리 관산성을 정면으로 마주하는군요.
♤ 상중리산성지(上中理山城址)
상중리산성지는 옥천군 군서면 상중리 안동오리 마을에서 대전시 중구 낭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동오리재에 있으며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식장산 줄기에서 다시 남서방향으로 뻗어나간 능선에 있다. 독수리봉산성지와 사양리산성지의 중간지점에 있으며 성의 대부분은 옥천과 대전의 경계선에서 대전쪽에 치우쳐 있으며 성의 북쪽성벽만이 경계선에 살짝 물려 있다. 상중리산성지는 상중리에서 대전의 낭월동으로 넘어가는 동오리재를 경계하기 위하여 축성한 것으로 보이며 독수리봉산성지와 사양리산성지에서 보이지 않는 부분을 보완하기 위하여 축성된 망루 형태의 보루로 짐작된다.
오른쪽으로 독수리봉에는 백제계 퇴뫼형 석축산성인 독수리산성지(鷹峰山城址)가 있네요. 백골산과 환산(고리산)으로 이어지는 한때 나제간 최전선입니다.
♤ 구절사갈림길/ 도광군계/ 구면계/ 삼리동경계(대전광역시 동구 낭월동, 충북 옥천군 군서면 → 동구 세천동)
오른쪽은 구절사와 독수리봉으로 향하고 왼쪽은 식장산으로 이어지는 T자 삼거리에 쉼터의자가 있는 곳으로, 대전광역시 동구 낭월동 산내와 충북 옥천군 군서면 상중리의 경계를 따라온 지맥이 충북과 헤어지고 좌틀하여 완전하게 대전광역시 동구 내안으로 진입, 세천동과 낭월동의 경계를 따른다. 이정표가 식장산 1.4km, 구절사 1.9km를 가리키고 있다. 식장산의 사찰로는 1393년 조선 태조 2년에 무학대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진 작은 절인 구절사가 있으며, 산기슭에는 886년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고산사가 있다.
♤ 대전광역시 동구 세천동(細川洞)
대전광역시 동구에 있는 동이다. 행정동인 대청동(大淸洞)의 법정동 가운데 하나로, 대청동의 행정 중심지이다. 동쪽은 충북 옥천군 군북면(郡北面), 북동쪽은 신상동(新上洞), 서쪽은 비룡동(飛龍洞), 남쪽은 대성동(大成洞)과 접한다. 대전에서 충북 옥천과 보은군 회남면으로 갈 수 있는 접경지역으로, 북쪽에 대청호가 있다. 남쪽에는 식장산이 높이 솟아 있다. 삼국시대에는 백제 우술군, 통일신라 때는 비풍군, 고려 때는 회덕현과 공주부에 속하였다. 조선 초기에 다시 회덕현에 속한 뒤, 1895년(고종 32) 회덕군 동면 관할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사리(新寺里)와 세곡리(細谷里)를 합해 세천리라 하여 대전군 동면에 편입되었다. 1935년 대전읍이 대전부로 승격하면서 대덕군 동면에 편입된 뒤, 1989년 대전직할시 동구 관할이 되었다. 1995년 대전광역시 동구 세천동을 거쳐, 1998년 행정동인 대청동에 편입되면서 법정동이 되었다. 세천(細川)이란 지명은 식장산에서 흘러내린 잔 개울 마을이라는 뜻의 '가는골'에서 유래하였다. 자연마을로는 장계울· 쇠정골·새동네·줄골 등이 있다. 대청호의 상류지역에 위치한 곳으로 경부선 세천역이 있으나 영업은 멈춘 상태다. 식장산 입구에는 한국 고유 식물 800여 종을 포함해 6,000여 종의 식물이 자라는 세천공원이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식장산은 생태학습장 겸 등산 코스로도 인기가 있고, 천연 암반수를 끌어올려 만든 세천막걸리도 유명하다.
♤ 580.6m봉/ 1등삼각점/ 국가지점번호, 군벙커
소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쉼터 의자가 있는 구절사 갈림길에서 좌틀하여 올라서고, 세천공원 갈림길도 지나서 올라선 이동통신중계탑이 있는 식장산 망경대(574m)와 정상의 중간 쯤 되는 봉우리이다. 1등삼각점(대전 16/ 1992 재설)이 있다.
♤ 세천(細川)공원 갈림길
580.6m봉에서 내려서면 세천공원 갈림길을 또 만난다. 조망바위에서 남쪽으로 멀리 금남정맥 운장산까지도 아련하게 보인다. 동쪽은 서대산과 천태산 가운데로 장령지맥을 찾아본다. 능선으로 올라 식장산 정상과 제일 가까운 철문 울타리까지 접근해본다.
등로 오른쪽에 해돋이전망대 이정목에서 고산사 방향으로, 태극기 뒤에 정상석이 숨어 있습니다. 식장산 정상은 군부대(M/W 중계탑)와 방송국중계탑이 자리를 잡고 있어 외곽에 정상석이 세워져 있네요. 군시절 우리 운용대 대전파견지 훈련장이 있던 곳인데 이제사 와보는군요.
♤ 식장산(食藏山, 596.7m)
식장산은 대전광역시 동구와 옥천군 군북면, 군서면 등 세 지역에 걸쳐있는 산이다. 대전광역시의 최고봉으로 충남의 최고봉 서대산(904m), 옥천의 최고봉 대성산(705m) 등 인접지역의 명산들과 어깨를 견주며 동구의 남동부를 수놓고 있는 산이다. 그런가하면 동구의 남동부 외곽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인 동구 삼정동, 판암동, 대성동 등이 산의 자락에 기대어 발전하는 동구 구민의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있기도 한 산이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군사들이 성을 쌓은 뒤 군량을 많이 저장하고 신라의 침공으로부터 대전지역을 방어하던 군사전략적 요새의 기능을 담당하던 문헌의 기록을 근거삼아 식장산이라 불렀다는 유래와, 산꼭대기에 먹을 것이 쏟아지는 밥 그릇이 묻혀 있다 하여 식기산 또는 식장산이라 불렸다는 유래가 있다. 1934년 계곡을 막아 한 시대 대전시민의 식수를 담당했던 댐이 식장산 세천유원지의 초입에 위치하며, 세천저수지를 따라 등산로가 만들어져 있다. 대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보만식계로 불리는 보문산, 만인산, 식장산, 계족산 줄기를 모두 조망할 수 있고, 특히 활공장에서 내려다보는 대전 시가지의 모습과 야경은 가히 환상적이라 할 수 있다. 식장산의 또 다른 매력은 생태환경이 잘 보전되어 있고 대전에서 보기 드물게 시원한 계곡이 있다는 것이다. 세천 수원지 주변에 봄이면 벚꽃으로 가을엔 단풍이 유명해 많은 시민들이 찾고 있으며, 식장산 자연생태림은 대전팔경 중 하나이다. 이 산마루는 백제 멸망과 관계 깊은 곳으로 탄현(炭峴) 또는 숯고개·숯재라 불리었다. 즉 백제 때 성을 쌓고 군량(軍糧)을 많이 저장하여 신라를 방어하는 요새지였으며, 백제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백제 의자왕 때의 충신 성충(成忠)은 백제의 국운이 위태로움을 간하다가 옥에 갇힌 몸이 되었다. 성충은 옥중에서 상서하기를 “앞으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니 만일 적병이 오거든 육로는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로는 기벌포(伎伐浦)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의자왕은 이 말을 듣지 않고 황산벌과 백강에서 적병을 막았고 신라와 당나라 군사들은 탄현을 넘어 침공하여 결국 백제는 패망하였다. 식장산의 험난한 지형은 자연의 요새지로 백제 때뿐만 아니라 6·25 때에는 연합군과 괴뢰군의 격전지가 되었고 현재도 국방상의 요지이다. 이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양국의 길목으로 험난하지만 교통의 요지가 되었고 현재도 경부선철도와 경부고속도로가 통과하는 요지다. 이 구간은 경부선철도를 부설할 때 작업이 어려운 구간이었고 경부고속도로에서도 이 지역에 터널이 집중되어 있다. 서쪽으로는 보문산 북쪽의 계족산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백골산이 있다. 남쪽 만인산 너머로 아슴하게 보이는 호남알프스를 조망하고 지맥 등로는 해돋이전망대 표식에서 좌틀하며 내려서서 식장산 군부대 울타리를 따라 빙 돌아서 식장루로 다가간다.
대전시 야경 명소라고 하는데 부대시설이 아쉽습니다. 주차장이 좁아 세천공원 입구에서 차량을 통제하고 변변한 커피점 하나 없네요.
♤ 식장루(食藏樓)/ 삼동봉(세천동, 낭월동 → 판암동)
세천공원에서 식장루까지 올라오는 넓은 도로가 있다. 지맥의 왼쪽이 동구 낭월동에서 판암동으로 바뀌는 지점으로 대전광역시 조망이 한눈에 펼쳐지는 전망대이다. 대전 중구 문화동의 보문산(寶文山, 457.4m), 계룡산의 관암지맥도 정면에 펼쳐진다. 세천공원 지나 가야할 식장지맥 능선에 계족산(鷄足山, 423.9m)도 살펴본다. 왼쪽 산길로 접어들어 도로에 잠깐 내려섰다가 다시 산길로 접어들어 개심사갈림길 옆으로 내려선다. 천년고찰 고산사기 산록에 위치해 있고, 정상에서 누릴 수 있는 아름다운 야경과 웅도 대전의 힘찬 기상을 보고 느낄 수 있는 대전이 대표적 명소로 인정받고 있다. 이렇듯 오랫동안 대전시민과 함께 호흡해 온 명산에 모두가 행복하고 풍요롭기를 염원하는 시민의 뜻을 모아 2017년 9월부터 2018년 10월까지 전통한옥 양식으로 큰 마루 집을 짓고 ‘식장루’라 이름하였다. 식장루는 18개의 받침 기둥석이 무게를 지탱하고 있다. 가운데 6개를 뺀 12개의 받침 기둥석은 토끼를 상징하는 묘신장(卯神將)을 비롯한 12지신이 웅장한 식장루를 지상으로부터 받쳐 들고 있다. 정상에 오르면 멀리 호남과 경계를 이루는 대둔산, 옥천 금산의 서대산, 공주의 계룡산 그리고 대전시 계족산과 보문산이 한꺼번에 사방으로 조망된다. 또한 맑고 푸른 물결이 넘실대면서 반짝이는 대청호수를 장쾌하게 볼 수 있는 매력적인 산행지이다.
♤ 대전(大田)의 유래
대전의 본래 지명은 ‘태전’(太田)으로 오래전부터 한밭, 콩밭으로 불러왔다고 하며, 넓은 들판을 이루고 있어 한밭, 콩이 많이 나서 콩밭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원명인 한밭, 콩밭을 모두 아우르는 한자어로 표기하면 태전(太田)이 된다. 역사적으로 태전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은 경부선 철도의 개통과 함께한다고 볼 수 있다.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의 기사에 태전(太田)이라는 지명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이후 모든 공식자료(대한제국 정부의 공식문서)에 공식지명으로 태전(太田)이 기재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조선시대에 대전(大田)은 공주목 유성현, 회덕현, 진잠현에 속했다. 대전이 자연 마을을 벗어나 국가 통계의 기초 단위로서 등장한 것은 1895년인 고종 32년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회덕군 산내면 대전리’라는 행정리로의 개편 때가 처음이다. 그러나 100여 년 전만 해도 대전은 한가로운 아주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고 하는데 대전을 큰 도시로 탈바꿈하게 된 계기는 대전역이 들어서면서부터다. 1905년 경부선 개통에 맞추어 대전역이 세워지면서 하루아침에 도시적인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경부선에 이어 1914년 대전을 기점으로 하는 호남선까지 개통됨으로써 교통의 요지로 자리를 굳혔다. 1932년에는 공주에 있던 충남도청까지 옮겨오게 되었다. 1950년에는 한국전쟁으로 정부가 대전으로 임시천도(1950.6.28~7.14)를 한 적도 있다. 도시 전체가 파괴되었던 대전은 전후 복구와 급속한 인구 증가로 중부지방의 행정·문화·경제의 중심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전쟁 중에 불타서 1958년에 새로 지은 대전역과 충남도청 그리고 그 사이를 잇는 중앙로는 대전 시가지 발달의 중심이 되어왔다.
대전역에서 식장산을 바라보던 기억을 떠올리고, 대청호와 계족산 뒤로 아련하게 팔봉지맥도 찾아봅니다.
♤ 보문산(寶文山, 457.4m)
대전광역시중구 대사동, 부사동, 석교동· 문화동 · 사정동 등에 걸쳐 있는 산으로 『대동지지』(공주)에 "보문산은 동남 80리에 있다."고 하여 관련 기록을 확인할 수 있고, 『청구도』 · 『동여도』 · 『대동여지도』 등에서도 '보문산(宝文山)'이 확인된다. 일설에 보물이 묻혀 있다 하여 '보물산'이라고 불리다가 보문산으로 바뀌었다고도 하고, 나무꾼이 죽어가는 물고기를 살려준 후 은혜를 갚는 보물주머니를 얻었다고 해서 이름이 유래했다고도 전해지며 보문산 녹음(綠陰)은 대전팔경의 하나로 꼽힌다.
♤ 302.1m봉/ 삼동경계지점(세천동, 판암동 → 삼정동)
화장실이 있는 삼거리로 왼쪽으로 세천공원으로 내려가는 도로를 버리고 오른쪽으로 향하여 302.1m봉에 오른다. 간이 화장실이 있는 삼거리 왼쪽으로 내려서는 도로 지점에서 지맥의 왼쪽이 판암동 → 삼정동으로 바뀐다.
♤ 구정봉(228.6m)/ 삼각점봉
구정봉에서 다시 도로에 내려선다. 4등삼각점(대전 474/ 1992 재설)이 있고,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5m도 정도 지점에 또 하나의 대전 474 삼각점이 있다.
대전역을 지나 비래동을 왕복하는 611번 종점이 있군요. 공원입구 식당가는 일찍 문을 닫습니다. 원 계획은 좀 더 진행하여 정자에서 비박할려고 망사텐트와 보온의류를 배낭에 넣었으나 새벽 2시~5시에 비가 들어 찜질방을 찾았습니다. 세천공원 입구 식당가도 모두 문을 닫아 먹거리를 보충해야하는 문제도 있었구요.
♤ 세천(細川) 공원 입구
오른쪽으로 커피전문점이 맥길을 깔고 있다. 도로 왼쪽에 있는 세천공원은 식장산 등산로 입구로 넓은 주차장 주변으로 식당이 많다.
비룡삼거리를 지나 비룡마을을 지나는 길은 지맥을 한참 우회하는 길입니다.
♤ 163.6m봉/ 이동통신탑
세천공원버스정류장 위쪽으로 대전통영고속도로가 통과한다. 고속도로를 건너기전 오른쪽으로 올라간다. 고속도로 아래를 통과해 비룡삼거리로 가는 길은 지맥에서 한참 벗어나 163.6m봉을 우회하는 길이다. 정상에서 급경사 절개지로 내려서서 왼쪽의 고속도로 아래로 향한다.
♤ 세천(細川)고개(128.1m)/ 4번국도/ 식장산삼거리/ 동계(삼정동 - 비룡동)
대전광역시 동구 삼정동과 비룡동을 잇는 옥천로 4차선 도로이다. 우회하는 경로는 삼거리 횡단보도를 건너 왼쪽으로 조금 내려가 오른쪽으로 열부안인고흥류씨묘소 묘지석이 있는 2차선 도로로 들어서 비룡마을 복지회관으로 향한다. 163.6m봉을 지나오면 4번국도를 무단횡단하여 양회임도를 따르고 수로를 따라 오르거나 은진송공 묘지길 입구를 따른다.
♤ 201m봉
은진송공 묘지 뒤쪽으로 오른 봉우리로 좌틀로 내려서야 하는데 칡넝쿨이 장난이 아니다. 오른쪽으로 과수농가 철조망이 쳐져 있어 왼쪽 사면으로 조금 내려서서 우회하여 진행한다.
은진송씨 재실 앞에 있는 비룡마을 무더위쉼터에 수도가 있습니다.
♤ 대전광역시 동구 비룡동 비룡마을 줄골고개
비룡삼거리에서 대청호로 넘어가는 고개로 줄골마을은 연안박씨의 집성촌으로 장승이 있는 곳이라서 장승배기라 부른다. 대전시 동구 비룡동 줄골(비룡마을) 언덕 좌우에 동구의 미소라고 불리는 석장승이 세워져 있다. 천하대장군과 지하대장군의 석장승 2기가 마주 서 있는데 남장승은 북쪽을 향해 서 있고 여장승은 남동쪽을 향해 바라보고 있다. 10여년 전만해도 두 석상은 4~5m 간격을 두고 서 있었는데 대전과 줄골을 연결하는 도로를 확장하면서 여장승을 옮겨서 지금은 10m 간격을 두고 있다. 남장승의 외형은 전형적인 문관석 형으로 높이가 2m 정도이다. 여장승은 1.7m 정도의 길쭉한 화강암 기둥 상부에 사람의 얼굴을 새겨 놓았다. 줄골에서는 음력 정월 보름전날 1월 14일이면 거리제(장승제)를 지낸다. 제례후 짚으로 만든 주머니에 떡과 과일 등을 넣어 장승의 목에 걸어 두기로 한다. 줄골고개 장승까지 도로를 따르다 좌틀하여 여장승을 지나 왼쪽 마을 사잇길로 진행한다.
♤ 은진송씨 재실
절고개 이정표를 바라보면서 마을 가운데로 올라간다. 대부분 은진송씨재실 앞에서 왼쪽 임도로 내려가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보만식계 대전둘레길로 향하는데 은진송씨 쌍계당 재실 뒤쪽에 있는 인가 뒷밭으로 올라서서 대밭을 통과해 오른쪽 능선으로 올라선다.
♤ 227m봉
정상에서 대청호수질관리를 위한 경계표시 말뚝과 처음으로 마주한다. 227m봉 오른쪽 아래로 형제농장이 보이고 농장 철조망울타리를 따라 보만식계 둘레길로 내려선다.
♤ 갈고개(葛峴)/ 동계(비룡동 - 용운동)/ 서낭당고개, 돌탑/ 국가지점번호
대전광역시 동구 용운동과 비룡동의 경계에 있는 갈고개이다. 용운동에서 세천동으로 넘어가는 통로역할을 하던 고개이다. 돌탑과 갈고개 이정표가 서있고 대청호경계석도 보인다. 오른쪽은 줄골 0.63km, 왼쪽은 새울약수터 0.23km를 알리는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대청호가 살짝 보이고 그 오른쪽 옆으로 옥천의 환산(고리산)도 조망이 된다. 갈현성에서 바라본 고리산 능선, 고리산에는 백제 보루성이 즐비하다. 고리산 오른쪽으로 동쪽에는 신라의 관산성이 있다. 백제는 고리산을 중심으로 신라의 관산성과 대치했었다.
♤ 갈현성(葛峴城, 263m)/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 12호
갈고개 북쪽에 있는 해발 263m의 산 정상부에 축조되어 있다. 성의 둘레는 약 350m의 테뫼형(산 정상을 둘러쌓은 성) 석축산성이다. 성벽은 대체로 무너져 내렸으나 동쪽 성벽에 일부 남아 있는 부분이 있다. 높이가 약 5m 정도는 되었던 것 같으나 현재는 2m 가량 남아 있으며, 전면(前面)은 가공한 돌로 쌓았다. 서쪽 성벽은 자연지세를 이용하였고 부분적으로 석축에 의존해서 보강한 흔적이 있다. 성의 평면형태는 남북(南北)으로 긴 타원형의 모습이다. 이는 동남쪽 및 동북쪽의 모서리 부분 성벽이 곡선을 이루며 돌아가고 있는 점에서는 분명하다. 이 성에는 남문지(南門址)가 남아 있는데 너비가 약 4.8m 가량 된다. 성 안의 정상부에는 너비가 약 4m 가량 되는 움푹 파인 흔적이 있다. 이 웅덩이 일부에는 돌로 쌓은 흔적을 볼 수 있어 저장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동쪽 성벽 부분의 평지에서 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편(土器片)과 와편(瓦片)을 수습할 수가 있어 이 성의 축조연대를 짐작해 볼 수 있게 한다. 정상으로 올라서서 보문산과 대청호 그리고 가야할 고봉산을 조망한다.
♤ 비룡임도
대전광역시 동구 비룡동과 용운동을 잇는 비룡임도에 내려서고 대전둘레산길잇기 안내도가 세워져 있고 대전대학교 갈림길이 있다. 임도를 건너 이정목쪽으로 올라서고, 커다란 바위가 있는 274m봉을 지난다.
♤ 군부대갈림길/ 용수골약수터
군부대 훈련용 타이어를 고정했던 구조물 프레임 녹슨 파이프 기둥이 서있다. 왼쪽으로 갈림길이 보이고 용수골약수터를 알리는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능성 오르막이 시작된다.
♤ 능성(陵城, 342m)/ 대전광역시기념물 제11호
능성은 대전분지의 동쪽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계족산지의 동남부에 해당되는 대전광역시 동구 가양동 뒷산 비룡동 비름들 마을로 넘어가는 속칭 비름들 고개 위에 돌을 쌓아 만든 석성으로 표고 342m의 정상부에 축조된 테뫼식 산성이다. 성 전체 지세는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서고동저형(西高東低)이고 성의 둘레는 약300m이며, 성벽은 성안에 있는 남.북 두봉우리 지나고 있으며 그 가운데 동쪽 성벽은 표고 300m 부분까지 내려와 축조되었다. 성벽의 배부분은 무너져 내려 원상을 파악하기 어렵고, 성내에는 백제시대의 토기 조각이 일부 발견되었다. 동쪽 성벽에 남아 있는 치성의 흔적으로 보아 동쪽에서 침입해 오던 신라를 감시하기 위한 성으로 추정된다. 능성 정상에는 판독이 어려운 삼각점과 지적도근점이 있다. 성안을 출입할 수 있는 통로는 동문지와 서문지가 있다. 동문지는 너비5.1m, 성벽의 두께3.4m이고,남문지는 너비3m, 성벽의 두께 5.4m정도이다.
♤ 솔향산(313.8m)/ 삼동봉(동구 비룡동, 용운동 → 가양동)/ 삼각점봉
준희선생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대전광역시 대덕구 비룡동에 위치한 산으로 능성의 정상부를 말한다. 정상에는 헬스장을 옮겨 놓은듯 시민들의 다양한 운동시설이 갖추어져 있으며 대전둘레산길5구간에 속한 산이다. 지맥의 왼쪽이 용운동에서 가양동으로 바뀌는 지점이다. 왼쪽으로 대전 시가지가 조망된다. 식별불가 3등삼각점이 있다. 산스장이 가깝게 즐비하다.
차량이 터널을 통과하며 나는 소음이 상당합니다.
♤ 구계/ 삼동봉(동구 비룡동, 가양동 → 대덕구 비래동)/ 헬기장/ 경부고속도로
옥정사길림길에서 오른쪽 아래로 내려서서 계족산 방향으로 향한다. 구절사갈림삼거리에서 대전 동구 내안으로 진입한 지맥이 지맥의 왼쪽이 대전광역시 동구 가양동에서 대덕구 비래동으로 바뀌며 성재산갈림봉까지 동구와 대덕구의 구계를 따르는 지점이다. 아래로 새로 생긴 경부고속도로 대전터널이 지난다.
♤ 바탕골약수터갈림길
대전터널 위를 지나 오르면 해발 280m의 넓은 헬기장이 있는 봉에 닿는다. 바탕골약수터 안부 갈림길이다. 희미한 등로로 직진한다. 헬기장에서 약 6분 내려서면 양회임도가 지나는 길치/질치에 닿는다.
♤ 대전광역시 대덕구(大德區)
대전시 대덕구는 대전광역시 동북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대덕이라는 지명은 대전의 대(大)와 대전의 옛 지명인 회덕의 덕(德)을 합친 것이다. 이는 1935년 대전읍이 부로 승격됨에 따라 대전군을 대덕군으로 개편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회덕(恢德)은 대전 대덕구 일대에서 제일 오래된 지명으로 회덕이라는 이름은 논어 이인(里仁)편의 '군자회덕, 소인회토'(君子懷德, 小人懷土: 군자는 가슴에 덕을 품고, 소인은 가슴에 흙을 품는다)'에서 따온 유교적인 이름으로, 고려초 1000년도 경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북쪽은 충북 청주시·보은군, 동쪽은 계족산을 경계로 동구, 남쪽은 중구·서구, 서쪽은 갑천을 사이에 두고 유성구와 접한다. 구청 소재지는 대덕구 오정동에 있다. 북쪽으로는 금강이 흐르면서 대청댐을 막아 조성한 대청호(大淸湖)가 있다. 서쪽으로는 갑천(甲川), 중앙부에는 용호천(龍湖川)이 흐르고 있어 그 유역에는 비옥한 평야가 발달되어 있다. 근교농업이 발달하여 채소의 산출이 많다. 대덕구에는 경부선과 호남선이 분기하는 대전조차장역이 위치해 있고, 금강이 흐르는 대전의 관문으로 신탄진역이 있으며, 경부고속도로 대전 나들목, 신탄진 나들목과 경부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지선의 분기점인 회덕 분기점이 위치해 있는 교통의 중심지이다. 대전의 전 지역이 바라보이는 계족산과 대전시민의 젖줄인 대청호가 있는 청정 자연환경의 보고일 뿐만 아니라 대전산업단지와 대덕산업단지가 입지해 있는 대전 경제중흥의 거점지이다. 또한, 옛 회덕현의 주요부분에 위치하고 있으며 회덕향교·동춘당·계족산성을 비롯한 무수한 유·무형문화재를 보유한 한밭 정신문화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 대덕구 비래동(飛來洞)
대덕구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동구 비룡동, 남쪽으로는 가양동, 서쪽으로는 송촌동과 법동, 북쪽으로는 동구 효평동·추동과 접하고 있다. 백제시대에는 우술군, 신라시대에는 비풍군, 고려 초기에는 회덕현, 1018년(현종 9) 이후에는 공주부, 조선 초기에는 회덕현, 그리고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편 이후에는 회덕군 산내면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대양리와 신촌을 합하여 비래리라 하고, 대전군 산내면에 속하였으며, 1935년 11월 대덕군 회덕면에 편입되었다. 1983년 2월 대전시의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대전시 동구 비래동이 되었고, 1989년 1월 대전시의 직할시 승격에 따라 대전직할시 대덕구 비래동이 되었으며, 1995년부터 대전광역시 대덕구 비래동이 되었다. 행정동은 회덕2동이다. 동명과 관련해서는 마을 북동쪽에 비래암이라는 암자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꿩이 매에게 쫓겨 이곳으로 날아왔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 길치고개/ 질치(迭峙)/ 구동계(동구 비룡동 - 대덕구 비래동)
대전광역시의 동쪽 대덕구 비래동 댕이마을에서 동구 추동의 가래울과 주산동, 비룡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차량도 운행이 가능하다. 경부고속도로 대전터널 북쪽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회억)에 "질현은 현 동쪽 12리에 있다"고 하여 관련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이후 『여지도서』, 『충청도읍지』, 『호서읍지』, 『해동지도』, 『조선지지자료』 등에서는 질치(迭峙)로 기록되어 있다. 일설에는 땅이 유난히 질퍽거려서 질티고개라 했다고 하는데 고개가 길다 하여 길치고개 · 길티고개로도 불리고 있다. 과거의 경부고속도로 노선에서 이 부분을 지나는 터널을 길치터널이라고 하였다. 고개 위쪽에 백제 시대에 축조된 질현산성(迭峴山城)이 있고 동쪽 가까이 고봉산 정상에는 고봉산성(古鳳山城)이 대응하고 있다. 대전시 대덕구 비례동에서 대청호로 넘어가는 고개로 골이 깊은 고개에는 바리게이트가 처져있고 보현사 이정표가 보인다.
♤ 보현사(普賢寺)
지맥길은 보현사 왼쪽으로 올라선다. 지맥 마루금은 보현사 방향의 넓은 임도를 따르다가 왼쪽 산길로 들어서 조금 오르면 기념물 제 8호 질현성 표지석을 지나고, 왼쪽 고봉산으로 오르는 갈림길에서 오른쪽 질현성→ 0.1km을 들렸다가 고봉산으로 향한다. 약 300m 떨어진 곳에 질현성이 있어 질현성의 자성(子城)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여겨지며 또 고봉산성은 질티고개를 두고 질현성과 나란히 있어 이 고개를 감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쌓아졌다고 추측하고 있으며 동남쪽 경사면에는 13기의 소형 석실고분이 밀집되어 있는 주산동 고분군이 있다. 대청호가 조망되는 조망 명소다.
대청호를 바라보며 대청댐 이전에는 금강 줄기가 지금보단 가늘었을 것이고, 그쪽 또한 나제간의 최전선이었을텐데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 고봉산(古鳳山 , 334.7m)/ 돌탑/ 대전광역시기념물 제8호
대전광역시 대덕구 비래동에 소재한 산이다. 고봉산에서 지맥이 좌틀하면서 지맥의 오른쪽이 동구 비룡동에서 추동으로 바뀌는 지점이다. 보현사 석탑을 지나 조금 올라선 지점으로 허물어진 성터 흔적이 있다. 준희선생님 산패와 반바지님 코팅지가 산벚나무에 매어 있다. 봉우리처럼 보이지 않지만 내려서는 곳에서 바라보면 봉우리로 보인다. 이름은 용의 몸집에 봉황의 머리를 얹은 듯한 형상인데서 유래했다.
♤ 질현성(迭峴城, 422m)/ 삼구동봉(대덕구 비래동, 동구 비룡동 → 추동)
대전광역시 대덕구 비래동에 있는 질현성은 질티고개 북쪽 정상의 산세를 이용하여 돌과 흙을 섞어 쌓은 산성으로, 둘레는 800m이다. 모서리를 다듬은 사각형의 돌로 성벽을 쌓았는데, 아래에서부터 약간씩 안으로 들여 쌓았고, 군데군데에는 조그만 돌을 끼워넣었다. 동·서·남벽 3곳에 문터가 남아있는데, 이중 남문터는 너비 3.8m로, 성으로 드나드는 가장 중요한 통로로 이용되었다. 남문터 주변에 특별한 시설은 없지만 10m 정도의 땅에 항상 습기가 많은 것으로 보아, 전에 연못이 있었던 자리로 생각된다. 성 안에서 백제, 신라의 토기조각과 조선시대 자기조각이 출토되어 이 성이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계속해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을 중심으로 북쪽 능선에는 6개의 작은 성이 있는데, 이것은 질현성을 보완하기 위해 쌓아진 것으로 보인다. 학계에서는 이 성을 백제부흥운동군의 거점중의 하나였던 지라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보현사 뒤쪽으로 대청호가 조망되는 전망대가 나온다.
♤ 가양임도/ 가양공원갈림길
조금전 지나온 길치근린공원으로 내려설 수 있는 갈림길이다.
♤ 387.5m/ 전망대/ 산불감시카메라
봉우리마다 무너진 성터가 보이고 돌탑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산불감시카메라라가 있고 그 앞에 묘지 한기가 있다. 여기가 대청호 조망 명소인데 묘지 때문에 전망대 만들기가 난감한 모양이다. 조금 진행하면 남도정이라는 팔각정자가 있다.
♤ 대청댐/ 대청호
대청호는 대전광역시와 충북 청주시·옥천군·보은군에 걸쳐 있는 금강 수계 최초의 다목적 인공 저수지로 1975년 3월부터 1980년 12월까지 5개년에 걸쳐 4대강유역 수자원개발계획 일환으로 대전광역시 대덕구 미호동과 충북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덕유리 사이의 좁은 협곡에 높이 72m, 길이 495m의 필댐(fill dam)이 건설됨으로써 거대한 인공호수가 만들어졌다. 대청호는 대전광역시 대덕구·동구, 충북 보은군·청주시 사이에 건설된 복합형 댐에 의해 형성된 인공호수이다. 만수 면적은 72.8㎢이고, 저수지 길이 86㎞, 총저수량은 높이 76.5m에서 80m까지 홍수조절 용량을 합쳐 14억 9000만㎥에 이른다. 이 저수량으로 금강유역의 만성적인 홍수를 조절할 뿐만 아니라 대전광역시·청주·군산·전주 등 유역내의 인접 도시에 연간 13억㎥의 생활 및 공업용수를 공급한다. 댐 완공으로 댐 하류 지역의 홍수피해를 경감시키는 한편, 하류지역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또한 경제성장과 인구증가로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대전, 청주, 전주, 군산 등 충청 및 호남 지역에 생·공용수를 공급하고 있으며, 연간 2억 4000만㎾의 전기를 생산해 경제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이와 함께 대청댐 물홍보관은 중부권에 유일한 물홍보관으로서 연간 200만 명이 넘는 내방객들에게 다양한 전시기법을 통해 유한자원인 물을 아껴 쓸 수 있도록 홍보하고 체험하게 하는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인근 지역에는 대청댐 광장 맞은편인 북쪽의 구봉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현암사를 비롯하여 대청댐 물홍보관, 대청댐 전망대, 취백정, 청남대 등의 자연생태 및 문화관광자원이 있다. 한국에서 3번째 규모의 호수이며 호수 위로 해발고도 200∼300m의 야산과 수목이 펼쳐져 드라이브 코스로 잘 알려져 있다. 철새와 텃새가 많이 날아들어 여름에는 상류에서 백로를 쉽게 볼 수 있다. 청남대는 충북 청주시 상당구 대청댐 부근 1,844,843㎡ 의 면적에 지어진 대통령 전용별장으로 ‘따뜻한 남쪽의 청와대’라는 의미이다.
팔각정(봉화정)에 올라 대청호 조망을 좌우로 살펴봅니다. 식장지맥을 직접 밟아보니 저 대청호 주변 산봉우리에 산재한 성재산(城在山)을 모두 찾아 분포를 살펴볼 수 있다면 박사논문 하난 나오겠단 생각도 하게 되네요.
♤ 373.4m/ 삼구동봉(대덕구 비래동, 동구 추동 → 효평동), 팔각정
귀바위를 지나 올라선 봉우리로 지맥의 오른쪽이 대전광역시 동구 추동 → 효평동으로 바뀌는 지점이다. 대전광역시 동구 일대와 대청호 왼쪽으로 추동면 개머리산(357.3m), 오른쪽으로 군북면 백골산과 환산(579.3m)이 조망된다. 식장 다음으로 대청호 건너편 팔봉지맥을 준비 중인데 거기엔 또 어떤 역사가 묻혀있을까 벌써부터 궁금하다.
임도에 가끔 막걸리장사가 있다고.... 질치에서 동신고로 내려가며 지맥을 끊기도 하는데, 질치에서 이곳까지 대전둘레산길 5구간이기도 하군요.
♤ 절고개/ 정자, 각종 운동기구, 화장실/ 임도오거리
대전광역시 대덕구 비래동과 동구 효평동 경계에 있는 고개로 임도 오거리이다. 각종 안내판과 이정표가 있고 사통팔달로 이어지는 대전둘레길이 연결되어 있는 고개로 지명의 유래는 왼쪽에 있는 응봉산 아래의 비래암이라는 절집이 있는데 이 비래암 때문에 절고개라고 불렀다고 하며 비래암고개, 용자암고개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우는 고개이다.
♤ 구계/ 삼동봉(동구 효평동, 대덕구 비래동 → 대덕구 법동)
절고개에서 목책계단으로 잠깐 올라선 곳으로 지맥의 왼쪽이 대덕구 비래동에서 법동으로 바뀌는 지점이다.
♤ 대덕구 법동(法洞)
대덕구 동남부에 위치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읍내동, 동쪽으로는 송촌동·비래동, 서쪽으로는 대화동, 남쪽으로는 중리동과 인접해 있으며, 특히 동북쪽에 계족산·매봉이 솟아 있다. 동명은 계족산·매봉의 깊은 골짜기에 찬 샘물이 났다고 하여 범샛골·법천리(法泉里·法川里)라 불렸고, 법천사가 있었다고 하여 법적골·범적골이라고도 하다가 이후 법동(法洞)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대전군 내남면에 편입되었다가 1935년 대덕군 회덕면에 편입되었다. 1983년 대전시 동구에 편입되었고, 회덕2동과 통합되었다. 1989년 대덕군 폐지와 함께 신설된 대덕구에 편입되었고, 1990년 중리동과 통합된 후, 1991년 중리동에서 분리되어 법동이 신설되었다. 1995년 읍내동 일부 지역을 편입하였고, 1996년 법1·2동으로 분동되어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법정동인 법동은 행정동인 법1·2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법동은 경부고속도로를 중심으로 동북쪽 개발제한구역과 서남쪽 도시형 시가지 구역으로 구분된다. 남쪽 지역은 주로 논농사 지역이었으나 근래에 주택지로 개발되어 98% 이상이 아파트 단지로 조성되어 있다. 따라서 주거에 비해 임야가 차지하는 비율은 매우 낮은 편이다. 대전동부경찰서, 대전동부소방서, 대전지방국세청, 동대전세무서, 법동소방파출소, 법동보건지소, 법동우체국 등의 공공기관이 있다. 주요 간선도로로는 동쪽에 경부고속도로·중앙부를 관통하는 17번 국도가 있다.
♤ 구계/ 삼동봉(대덕구 법동, 동구 효평동 → 대덕구 장동)/ 헬기장/ 계족산/ 성재산 갈림봉
지맥의 오른쪽이 대전광역시 동구 효평동에서 대덕구 장동으로 바뀌면서 지맥이 완전하게 대덕구로 진입한다. 지도상으로는 법동쪽 아래 약 0.1km 거리에 계족산 샘물이 표시되어 있다. 절고개에서 산으로 오르는 나무계단 공사중인 곳을 지나 약 7분간 산길을 오르면 넓은 헬기장에 국기봉과 쉼터의자가 설치되어 있는 계족산과 성재산 갈림봉에 닿는다. 지맥에서 오른쪽으로 약 150m정도 떨어져 있는 성재산으로 향하여 성재산갈림길에서 직진의 계족산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성재산과 계족산성을 왕복한다. 성재산을 다녀와 헬기장에서 오른쪽으로 내려선다.
계족산과 성재산 갈림봉에서 약 50m 진행하면 만나는 "바위를 품은 부부나무"를 만납니다.
♤ 바위를 품은 부부나무
백제의 한마을에 사이좋은 부부 정유와 완이가 살고 있었다. 행복한 부부에게 불행이 찾아오게 되고 아내 완이는 원인 모를 병에 걸린 남편이 병이 낫기를 매일 간절히 기도 하였다. 남편의 병수발 도중 잠깐 잠이든 아내 완이는 꿈속에서 한 노인을 만나게 되고 그 노인은 이 바위에 정화수를 올리고 정성을 들여 100일간 먹이면 나으리라 라고 말하고 사라진다. 다음날부터 노인의 말처럼 100일간 정성을 들이니 정유의 병은 씻은 듯이 낫게 되고 부부는 행복하게 살게 된다. 이후 정유와 완이 부부를 닮은 팽나무가 두사람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지켜주듯이 바위를 보호하면서 자라났다고 한다.
성재산에서 계족산성까지는 약 2.2km 거리입니다.
♤ 성재산(城在山, 399.1m)/ 산불감시카메라/ 데크전망대/ 1등삼각점
성재산갈림길에서 왕복 50m 거리에 있으며 계족산성 남문지로 이어진다.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데크전망대가 있고 발아래 대청호 조망이 시원하게 트인다. 지나온 식장산도 아스라이 조망된다. 1등삼각점(대전 12/ 1959)이 있다. 1등삼각점을 확인하고 진행하여 계족산성 남문터를 지나 봉수대 정상에 올라 대청호 주변의 산군들을 조망한다.
계족산 오르막 등로가 시작되는 임도 삼거리에 닿습니다.
♤ 임도삼거리/ 쉼터, 체육시설, 화장실
각종 이정표와 안내판, 쉼터, 체육시설 등이 있으나 절고개와는 달리 사람들은 별로없다. 이곳 역시 사통팔달로 이어지는 대전둘레길인데 좌측으로 1.6km지점에 법동소류지가 있고, 우측 3.3km지점에는 장동삼림욕장이 있다는 이정표가 보인다. 임도 삼거리에서 능선을 약 10여 분 오르면 무명봉인 355m봉을 지나고 계족산 오름 막바지에 있는 마지막 돌계단을 오른다.
발씻는 용도의 수돗물이 있다는데 급할 땐 뭐 그거라도 감지덕지죠~
♤ 계족산 황톳길/ 임도삼거리에 있는 에코힐링 맨발코스 안내판
이곳 계족산 근처에는 이 지역출신의 기업가 조웅래 회장이 만든 계족산 황톳길이 유명하다. 대전지역의 지방소주 회사인 선양소주(현재명:맥키스컴퍼니:린 소주제조업체) 조웅래 회장이 만든 에코힐링 맨발코스이다. 이 계족산황톳길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주관하는 걷기여행 실태조사에서 ‘전국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걷기 여행길’ 2018년 11위, 2019년 8위에 각각 올랐다.
정상석과 함께 파평윤공 묘지가 있습니다.
♤ 계족산(鷄足山, 423.9m)/ 삼동봉(장동, 읍내동 → 연축동)/ 비수리/ 백달산/ 봉황산
대전광역시 대덕구 읍내동·연축동·장동에 걸쳐 있는 산으로 세종실록지리지에 "계족산은 현(縣) 사람들이 진산으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계족은 닭의 다리라는 뜻으로 산의 모양이 닭의 다리를 닮았다거나 닭발처럼 퍼져나갔다 하여 닭발산 혹은 닭다리산이라고 불려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동국여지지』, 『회덕읍지』 등에서도 "계족산은 현 동쪽 3리 에 있는데 현의 진산이며, 세상에 전하기를 가물 때에 산이 울면 반드시 비가 온다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여지도서』 충청도읍지 호서읍지에는 "계족산은 현 동쪽 3리 에 있는데 진산의 대둔산으로부터 와서 현의 주맥(主脈)이 되었다."고 하여 풍수상 회덕 읍치의 주산(主山)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듯 계족산은 회덕현의 진산이자 주산으로 그 실제적 · 상징적 의미가 남달랐던 산이다. 여지도서 충청도읍지 호서읍지의 회덕현지도 『해동지도』 1872년 지방지도 등 회덕현 관련 고지도에서는 계족산을 모신다는 의미로 보통 북쪽으로 인식되는 지도의 위쪽에 현의 동쪽에 위치한 계족산을 배치시키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송촌 일대에 지네가 많아서 지네와 천적인 닭을 빌어 지네를 없애기 위해 계족산이라 불렸다고도 한다. 봉황산이라고 불렸다고 전해온다. 서쪽에는 성재산(城在山, 399.1m)이 나란히 서 있다. 사방 원형의 산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금병산, 우산봉, 갑하산으로 산줄기가 이어진다. 정상 왼쪽 아래에 팔각정인 봉황정과 전망대가 세워져 있다. 능선을 따라 3km 거리의 계족산성이 축조되어 있는데, 백제와 신라의 격전지로 유명하며, 시에서 성곽을 복원하였다. 계족산성 외에 고분군, 절터, 가마터 등이 있고, 조선시대의 사찰인 비래암이 남아 있다. 대전 8경의 하나로 꼽히며 1995년 6월에 개장한 장동삼림욕장 등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가뭄이 심할 때 이 산이 울면 비가 온다고 해서 비수리 또는 백달산이라고도 한다. 장동고개 방향으로 내려선다.
♤ 계족산성(鷄足山城)
계족산성은 대전광역시 대덕구 장동에 있는 산성으로 둘레는 1,200m 정도의 백제시대 석축산성으로 1991년 10월 25일 사적 제355호 대덕계족산성으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11월 28일 대전 계족산성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삼국시대의 테뫼식 석축 산성으로 백제가 쌓은 것으로 알려졌다가, 1998년부터 1999년까지의 발굴로 신라가 쌓은 것으로 밝혀졌으나 여전히 논란이 있으며, 계족산과 식장산에 이르는 산지는 백제와 신라의 국경으로 백제의 산성이 많이 존재한다. 백제의 수도 웅진은 이곳으로부터 38km에 불과하여 이 산성들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였다. 백제가 멸망한 뒤 백제부흥군이 이 산성을 근거로 한때 신라군의 진로를 차단시키기도 하였고, 삼국시대의 큰 우물터 등이 발굴되었고, 성내 건물터에서 백제시대는 물론 신라·고려·조선시대의 토기와 자기 조각이 출토되고 있고, 조선 말기에는 동학농민군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여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계속 사용된 산성임을 알 수 있다.
계족산 정상석이 있는 곳에서 왼쪽으로 약 50m 떨어져 있는 봉황정을 다녀와 신탄진 방향으로 내려섭니다. 봉황정 옆에도 가끔 막걸리장사가 나타난다니...
♤ 봉황정(鳳凰亭)
계족산 정상에서 살짝 떨어져 있는 봉황정은 팔각정자로 이 정자에서 바라보는 계룡산 너머 해질녘의 저녁노을은 가히 장관이어서 대전팔경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계족산은 조선시대에 회덕현의 진산(鎭山)으로 가뭄때 산이 울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했다. 봉황정은 비록 현대의 건물이지만 고전적 건축미를 그대로 살리고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담한 자태를 보이고 있다.
♤ 387m봉/ 전망데크
아래로 우회하는 길이 있다. 지나온 계족산과 대전 시가지의 모습이 광범위하게 조망된다. 나무 사이로 갑천도 조망이 된다. 전망데크가 오래되어 낡고 허름하다.
♤ 와룡고개/ 화장실, 사각정, 운동기구, 안내판
사각정자와 운동기구가 있는 임도로 대전둘레산길 제6구간이다. 왼쪽으로는 죽림정사로 내려간다.
♤ 장녀봉(216.5m)/ 삼동봉(장동, 연축동 → 와동)
준희선생님 산패와 4등삼각점(대전 430/ 1992 재설)이 있다. 연축동 윗골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216.5m봉에서 50여m 지난 갈림길에서 직진으로 연축주공아파트로 내려가는 등로가 보이나 지맥길은 이곳에서 우틀하여 장동고개길로 향한다.
♤ 대전광역시 대덕구 와동(瓦洞)
대전광역시에 있는 법정동, 행정동 회덕동의 관할 구역이다. 와동은 지리적으로 대덕구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유성구 탑립동, 동쪽으로는 장동, 남쪽으로는 신대동과 연축동, 북쪽으로는 상서동과 접하고 있다. 와동 지역은 백제 때는 우술군(雨述郡)이었다가, 신라시대에는 비풍군(比豊郡)으로 개명하였고, 그 밑에 유성현과 적오현(뒤에 덕진현)을 그 속현으로 두었다. 고려 초기에는 회덕현으로 읍호를 바꾸었고, 이후 고려 현종 9년(1018)에 공주의 속현이 되었다. 그런데 고려 시대에 유성현과 덕진현이 공주의 속현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현종 9년의 군·현의 개편 시 유성현과 덕진현이 회덕의 속현에서 벗어나 공주의 속현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 회덕현은 고려 명종 2년(1172)에 처음으로 감무(조선시대의 현감과 같음)를 두게 되어 주현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조선 초기 태종 13년(1413)에 전국을 8도제로 개편하면서, 행정구역을 서울→도→주·부·군·현→면(방·사)→리(동·촌) 체제로 편성하였다. 이에 따라 회덕도 충청우도 공주목에 속하는 종6품의 현감이 다스리는 회덕현이 되었다. 이와 같이 8도제의 실시와 더불어 소현의 병합이 이루어졌는데 이때에 유성현이 폐지되면서 그 영역이 회덕현과 진잠현에 속하게 되었다. 와동은 예전에는 갑천의 동쪽 태악산 서쪽의 들판에 주로 농사가 활발하였던 마을이다. 와동이라는 지명은 이 지역에서 기와를 구웠기 때문에 왯골 또는 와곡이라 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와동이라 하였다. 현재는 경부고속도로, 17번국도, 경부선철도 등이 지나고 있으며, 경부선철도를 기준으로 동쪽은 산이고 서쪽은 마을과 들로 되어 있다. 그리고 경부선 철도 서쪽에 형성된 마을도 남쪽과 북쪽의 발전이 크게 차이가 난다. 즉 북쪽 마을인 동구말과 들말은 뒤로는 경부선철도가 앞으로는 대전·신탄진간 국도가 남북으로 지나가고 있다. 이곳에는 최근 대형차 매매소 등이 들어서 있으나 도시 기반시설이 취약하고, 현재도 폐가가 그냥 방치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하여 아직도 옛 마을의 자연취락의 모습을 아직도 많이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와동의 남쪽 연축동 지역에 인접한 마을인 남월·와골 등은 인접한 연축동에 K-water가 들어오고, 와동 주공아파트와 현대아파트가 건설되면서 도시화되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더 이상 옛 마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 와동고개(瓦洞峴)/ 2차선도로/ 동계(대덕구 장동 → 상서동)
대전시 대덕구 와동과 장동을 잇는 고갯길로 2차선 도로이다. 장동고개 버스승강장도 있다. 도로건너 양회임도를 따라 들어서다 철문이 나오면 철문 왼쪽으로 산으로 들어서고 갈림길 삼거리에서 좌틀하여 와동쪽으로 진행한다. 대전시 대덕구에 있는 와동(瓦東)은 예전에는 갑천의 동쪽 태악산 서쪽의 들판에 주로 농사가 활발하였던 마을로 와동이라는 지명은 이 지역에서 기와를 구웠기 때문에 왯골 또는 와곡이라 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와동이라 하였다. 현재는 경부고속도로, 17번국도, 경부선철도 등이 지나고 있으며, 경부선철도를 기준으로 동쪽은 산이고 서쪽은 마을과 들로 되어 있고, 경부선 철도 서쪽에 형성된 마을도 남쪽과 북쪽의 발전이 크게 차이가 난다. 즉 북쪽 마을인 동구말과 들말은 뒤로는 경부선철도가 앞으로는 대전·신탄진간 국도가 남북으로 지나가고 있다.
♤ 173.1m봉
청주한씨 묘를 지나 올라선 장의자가 있는 널찍한 봉우리로 준희선생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 대전시 대덕구 장동(長洞) 산디마을
산디마을의 지명은 계족산 뒤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붙혀진 지명으로 산디 또는 산북마을이라 부르고 있으며 북쪽 골짜기는 좁고 길어서 장동 계족산에서부터 용호동 하용호에 이르므로 열두산디라고 한다. 장동에는 장골(진골), 욕골, 새골(색골), 터골(텃골), 새뜸, 산디마을이 있는데 여섯마을 중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은 마을이 산디마을이다. 산디 마을에서 계족산의 전체 산군을 보면, 마치 별유천지호중천(別有天地壺中天)처럼 좁은 협곡 속에 대길복지 명당처가 원형 분지의 형세로 감추어진 땅임을 확인할 수 있다. 장동의 산디 민속마을은 사라져가는 우리 조상들의 전통민속문화 재현과 시민들의 생활체험 현장으로 만들고자 1997년부터 민속마을 조성사업을 추진 중에 있다. 물레방앗간, 대장간, 약재상, 민속전시관, 장승 등을 세워 계족산성, 삼림욕장과 연계한 관광명소로 가꾸고 있는 중이다. 마을 어귀를 향해 흐르는 개울 주변에 숲이 우거져 있고, 이 숲 속 좌우에 쌍탑이 있어 할아버지탑과 할머니탑으로 불리우는데 2기 모두 자연석으로 다소 거칠게 쌓았으며, 동쪽에 있는 할아버지탑은 높이가 약 2.3m 정도이고, 서쪽으로 30m쯤 떨어져 있는 할머니탑의 높이는 약 1.8m이다. 전체적으로 할아버지탑이 더 크고 안정감이 있으며 할머니탑은 이보다 작고 허술한 편이다. 탑제는 1998년 7월 21일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어, 보존·전승되고 있다.
♤ 새뜸고개/ 아스팔트 도로
삼거리 갈림길에서 오른쪽 장동고개 방향으로 내려서면 대전시 대덕구 장동 새뜸마을이 보인다. 대전시 대덕구 와동과 대전시 대덕구 장동을 잇는 새뜸고개에 내려선다.
♤ 대덕구 장동(長洞) 새뜸마을
고개 오른쪽 너머에는 대덕구 장동 새뜸마을이 있는데 오래전부터 새뜸 샘고사라는 산신제가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는 마을이다. 새뜸 샘고사란 마을의 한가운데 공동 우물이 하나 있는데,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물이 많이나고 동네 태평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샘고사를 지낸다. 이 마을에서는 매달 25일이면 반상회를 열어 마을의 대·소사를 의논하는데, 섣달 스무 닷새날 반상회에서 샘고사에 대한 전반적인 일을 의논한다. 이때 샘고사를 주관할 사람을 뽑는데, 마을에서 제일 덕망 있고 깨끗한 사람으로 정한다. 일단 선출이 되면 샘고사 지내기 사흘 전부터 외출을 삼가고 집안에서 찬물로 목욕하며 대문에는 금줄을 치고, 집 앞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황토를 펴 부정을 막는다. 제물은 제 지내는 사람이 마련하는데, 백설기, 명태, 포, 술, 삼색실과, 미역국, 밥 등을 마련한다. 제기는 따로 마련된 것이 없으므로, 제물을 준비하는 사람이 자신 집의 것을 깨끗하게 씻어서 사용한다. 제사 지내는 날 저녁에는 마을 사람들은 모두 우물가로 나와 샘고사를 지켜본다. 제의 순서는 일반 가정의 기제사와 비슷하며, 소지는 동네소지와 호주소지를 올리는데 이때 “올 한해도 물이 많이 나오게 해 주시고 동네 아무 병 없이 해 주소”라고 축원한다. 샘고사가 끝나면 모두 제를 주관한 사람 집에 가서 음식과 술을 나누어 먹고 윷놀이 등을 하며 재미있게 논다. 마을에서는 이 샘을 무척이나 신성시하기 때문에 지금껏 동네에서 부정한 일이 없었으며, 평상시에도 물 관리를 철저하게 한다. 또한 마을에 초상이 나서 상여가 나갈 때는 부정이 탈까 하여 우물을 덮어놓는다고 한다. 왼쪽 도로를 조금 따르다가 오른쪽 숲으로 들어가면 장동고개를 알리는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 와동봉(221.8m)/ 이정표
장의자가 있다. 나뭇가지에 선답자 시그널이 보이고 참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높이 매어 있다. 정상에서 오른쪽으로 갔다가 곧바로 왼쪽으로 내려선다.
♤ 장동고개(長洞峴)/ 대전 대덕구 장동
대전시 대덕구 와동에서 장동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장동 입구에서 시작하여 뒷산과 가마솥바위산을 연결하는 능선과 교차되는 곳까지를 말하는데 2차선의 도로에 차량들이 간간히 다닌다. 지명의 유래는 옛날에 이 고개를 이용하여 장을 다녔기 때문에 이를 장고개라고도 한다. 또 장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장동고개라고 한다. 장동(長洞)이란 ‘긴 동네’란 뜻으로 또 다른 지명으로 도장동(挑長洞), 긴골 또는 진골로도 불리는데 계족산 사이의 다른 골짜기보다 훨씬 긴 골짜기에 마을이 있다고해서 붙혀진 지명이다. 이 마을은 대덕구에서도 가장 오지에 속한 마을로 삼국시대와 한국전쟁의 잠깐을 제외하면 큰 변화없이 평화로움을 유지한 마을로 삼국시대에는 계족산성과 봉수대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와 백제와의 국경지대를 맞대고 있는 곳이라 늘 군사분쟁이 있었으며, 한국전쟁 이후에는 미군이 주둔하면서 기지촌으로 변한 적이 있었고, 그 이후 미군이 철수하고, 한국군 탄약지원사령부가 그곳에 주둔하고 있다. 고개를 가로질러 오른쪽으로 올라간다.
♤ 185m봉
직전의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신탄진정수장, 장동으로 가는 길이고 맥길은 와동방향인 내리막으로 향해 송전탑(NO.16)을 지나 올라선 봉우리이다. 왼쪽으로 내려선다.
♤ 방두고개/ 대전 대덕구 상서동 방두마을
이정표 없는 갈림길이다. 선답지 띠지가 오른쪽으로 안내한다. 대전시 대덕구 상서동 방두마을 위에 있는 고개로 지명의 유래는 고개 아래의 방두마을에서 따왔다. 방두마을(방두말, 방두마루, 방등)은 대창아파트에서 바로 북쪽에 있는 마을로 이 마을의 지형은 와우형(臥牛形)으로 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라 한다. 따라서 아래뜸은 소의 유방이고, 솔밭은 응치(엉덩이)라고 한다. 또한 마을에 있는 고가(古家)와 8대조 묘는 위치상 서로 맞짐을 실어놓은 형태라 하며, 이러한 이치에 따라 묘에 돌을 많이 세우면 무거워서 기운다고 하므로, 상석과 비석만을 세웠다고 한다. 이곳의 지형이 방둥이처럼 생겼다 해서 방등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방두마루·방두말이라고 부른다. 평촌동과 상서동의 자연 촌락 모두를 합하여 열두 방두마루라고 하였는데 옛날에는 여기에 호수가 있었고 이 호수에 그림처럼 아름다운 연꽃이 피었다고 하여 이 호수를 방호(芳湖)라 불렀으나, 그 뒤 호수가 메워지자 마을 이름이 변하여 '방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오른쪽 아래로 어느 집안인지 석물과 장명등이 서있는 잘 관리된 묘지가 엄청난 규모로 골짜기를 가득 메웠습니다. 지맥은 왼쪽으로 향하는데 트랙이 직진으로 안내하네요. 아마도 공장지대, 철길, 고속도로를 통과하여 합수점으로 가기위한 고육책 같습니다.
경부선철도와 17번국도를 상서교로 건너 오른쪽 도로를 따른다.
♤ 상서공장지대/ 선바위정류장/ 상서육교
지맥길을 공장이 점령하여 좌우 어느쪽으로든 내려서서 한동안 도로를 따른다. 대전시 대덕구에 있는 상서동은 지리적으로 대덕구 북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장동, 남쪽은 와동, 서쪽은 신일동, 북쪽은 덕암동과 평촌동과 인접해 있다. 옛날 이곳에는 지형상 위쪽과 아래쪽 두 곳에 서당이 있었는데, 이 중에서 위쪽에 있는 서당을 웃서당 또는 상서당(上書堂)이라고 하고, 아래쪽에 있는 서당을 아래서당(下書堂)이라 하였다. 상서당의 자연 촌락으로는 방두마을·산막·상서당·숫금때·다랑이·윗지수·선바위·새말 등이 있다. 상서동은 북에서 남으로 뻗어 있는 성재산을 뒤로 하고 서쪽으로 낮게 자리 잡은 구릉지역에 자연 촌락이 발달되어 있었던 곳으로 철도차량 정비창이 들어오면서, 정비창 관련된 직원들의 사택으로 대창아파트가 들어서 있고, 그 앞으로 예전의 상서동의 원주민이 이주하여 집단취락을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상서동의 집단취락의 주민들은 아직도 대부분 상서동과 평촌동의 원주민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의 상서동의 취락구조는 이곳이 준 공업지대로서, 공장들이 대거 들어와 공업단지에 의하여 포위된 것과 같은 형상으로 예전에는 서쪽으로 잘 발달된 들을 중심으로 밭농사와 논농사가 활발한 지역이었다 한다. 그래서 과수농사도 일부 행해지고 있었던 곳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준 공업지역으로 지정되어 대부분 공장이 들어서서 공업단지가 되었다. 선바위버스정류장 뒤쪽이 경부고속도로 신탄진휴게소다. 상서교(경부선철로/ 17번국도)를 건너 우틀하여 덕암로로 진행하고 상서육교(산업단지로)를 건너 좌틀로 진행하여 경부고속도로, 고속철도 굴다리를 연이어 통과한다.
뒤쪽이 경부고속도로 신탄진휴게소입니다. 길 건너편 상서동행복주택에 gs편의점과 유가네 김밥이 보입니다.
♤ 선바위고개 버스정류장
대덕구 상서동에 있는 선바위 마을은 산막과 와동 베룩산 밑 동쪽에서 시작하여 상서동 선바위 마을까지를 말하는데 신탄진 방향의 국도와 산막으로 들어가는 옛 국도 사이에 위치한 마을이다. 이 고개 옆에 바위가 많이 있고 마을 부근에 큰 바위가 서 있어 이를 선바위, 섬바위 또는 입바위라 부르며 이곳의 마을을 선바위 마을이라 한다. 현재는 이 도로가 4차선으로 확장되어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인도가 없는 도로를 따라 진행한다.
산막석재가 보이면 좌틀로 내려선다.
♤ 산막석재 입구/ 식당
대전시 대덕구 상서동 산막(山幕)마을에 마을 지명과 같은 석재공장이 있다. 산막은 새일초등학교 옆에 있는 마을인데, 옛날에 마을에 산막이 있었으므로 이를 산막이라 부른다. 이곳은 지대가 높고, 덕암리를 통해 서울로 향하는 길목으로 옛날에는 이곳에 노강정 나무가 있어 노강정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또한 조선시대에 선비들이 글을 배우기 위해 산에 막을 쳤다고 하는데서 산막이란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또 마을에 대나무 숲이 있었으므로 이를 죽림이라고 하였다. 현재는 대나무 숲은 없고 새로이 도로 4차선이 놓여 있으며, 예전에는 이 도로로 지나가는 부근에 조그만 방죽과 샘이 있었다고 하는데, 방죽의 소유자가 기살이라는 사람이라서 샘의 이름도 기살이샘이라고 하였다. 산막에 도로가 개설되기 이전에는 약 30호가 살았는데 특정 성씨가 집성하지는 않았고, 각성받이 마을이었다. 그 중에 보성오씨가 약간 있었고, 본관을 알 수 없는 설씨 등이 살았다.
♤ 경부고속도암거
산막석재장이 있는 건물에서 왼쪽으로 경부고속도로를 연거푸 지하도로 건넌다. 굴다리 지나 우틀~ 경부고속철도(ktx) 아래를 지나 왼쪽의 산업단지로 향하는 도로를 끼고 가다가 오른쪽 밭으로 향한다. 고속철도는 신부터널로 들어가고 지맥은 터널 위로 오른다. 등산로 이정표를 따라 다시 산으로 진입하면 덕바위정이란 사각정자와 운동기구들이 있는 곳에 도착한다. 103.5m봉에서 왼쪽 능선으로 내려서서 장고개를 지나고 산을 벗어나 다시 도로로 나온다.
♤ 덤바위/ 덕바위(덕암)/ 대전광역시 대덕구 덕암동
남월마을에서 동쪽에 있는 산인데 이 산 중턱에 덕암이라는 바위가 있어 덤바위산라 부르며 이 산봉우리는 와동과 장동의 경계가 된다. 새일초등학교와 경부고속도로 신탄진 매표소 중간으로 덕암우체국 서쪽에 있다. 덕암동·상서동·신일동이 삼동봉 산봉우리가 바위배기인데, 이 봉우리에는 큰 바위가 서 있고, 이곳에서 조금 떨어져있는 곳에 작은 바위가 덤으로 서 있다 하여, 덕암동에서는 이를 덤바위 또는 덕암(德岩)이라 하고, 상서동에서는 선바위 또는 입암(立岩)이라 한다. 또 하나는 덕암동은 지리적으로 대덕구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평촌동과 남쪽은 상서동, 서쪽은 목상동과 신일동, 북쪽은 석봉동과 인접해 있는 동(洞)이다. 덕암이란 지명은 옛날 한 노승의 일화에서 유래되었다. 노승은 이곳에 덕암사라는 절을 짓고 도를 닦으며 마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는데, 그 노승이 죽자 절 뒷편에서 바위가 솟았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이 바위를 덕바위라 하며 숭상하였으므로, 마을의 이름도 덕바위로 불리다가 이것이 변하여 덤바위/ 덕암이라고 하였다.
♤ 신탄진(新灘津)
신탄진이라는 지명은 1872년 지방 지도에 처음으로 신탄시(新灘市)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신탄시는 신탄진 장시(新灘津 場市)를 의미하며 근처에 있는 문평동에 '새일'나루터가 있는데 이 새일이라는 말이 신탄진 지명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조선지지자료에는 우리말로 '새일나루', '새일장', '신탄정거장'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에 대한 한자 표기가 '新灘津' '新灘市', '新灘停車場'이라고 병기가 되어 있고, 여기서 신탄진의 우리말 지명이 '새일'임을 알게 해 준다. 새일이라는 말은 새롭게 형성된 여울목, 즉 '새여울'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된다. 이것을 한자로 표현하면 자연스럽게 '신(새新) 탄(여울灘)'이 되며, 일설에는 쇠여울(쇠金, 여울灘)이라는 견해도 있으며, 현재에도 신탄진 일대에는 새일초등학교,새일고등학교(2006년 이문고등학교로 개명) 등이 있어 이를 뒷받침한다. 신탄진에는 KT&G 공장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국산 담배 ESSE를 비롯한 25여 종의 제품을 연간 25억 갑 생산하고 있어 우리나라의 담배 생산의 메카와 같은 곳이다. 지금도 16만 평의 부지에서 생산되는 초슬림 담배는 세계 최대의 초슬림 담배 제조 공장이다. 1960년대에 신탄진 담배 공장이 준공되고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1968년도에는 담배 이름도 '신탄진'이라는 브랜드로 출시한 적이 있다. '화랑', '아리랑', 'SUN', '은하수', '솔', '하나로', 'This', 'ESSE' 등에 비해서 오랫동안 인기를 얻은 장기 브랜드가 아니라 기억하는 사람도 많지는 않으나 분명 신탄진이라는 브랜드로 담배가 발매된 적이 있었다.
♤ 103.5봉/ 삼각점봉
덤바위유래비가 있는 지맥의 마지막 봉인 103.5m봉을 지나면 조망이 트이는 곳에서 덕암축구센터 철망 옆길 따라 축구센터 진입도로에 이르고 도로를 따라 진행한다. 왼쪽 능선으로 내려선다.
♤ 장고개
대전시 대덕구 서낭당에서 덕암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옛날에 신대리(신일동)의 장을 보러 넘어 다닌 고개라 하여 장고개라 하였다.
♤ 덕암야구장/ 동계(상서동 → 목상동)
상서동에서 경부고속도로 암거를 지나 덕암동 덕암축구장에서 목상동에 들어선다. 덕암축구센터 휀스를 따라서 무명봉에 힘들게 올라섰다가 내려서고 덕암축구센터 정문 앞을 지나 도로를 따른다.
마루금은 목상초교 교정을 통과합니다. 목상초교 앞 도로부터 먹자거리입니다.
♤ 대전광역시 대덕구 목상동(木上洞)
대덕구 서북단에 위치하고 있는 목상동은 도랜말·중리·위남해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마을인데, 각기 분산되어 거주하였던 자연 촌락으로 도랜말·중리·위남해 등의 촌락은 하나의 생활권이었고 한마을처럼 지냈다고 한다. 현재는 4공단에 편입되었고 일부는 다사랑아파트·상록수아파트 등이 들어서 있다. 북쪽으로 흐르는 갑천이 금강과 합류하여 청주시 서원구 현도면 양지리(구 청원군 현도면 양지리)와 자연 경계를 이루고, 동쪽에는 구릉이 뻗어 덕암동·석봉동과 접경을 이룬다. 서남쪽에는 갑천이 흘러 회덕1동, 유성구 구즉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서부의 대부분 지역은 대전 제3 산업단지가 들어서 있고, 제4 산업단지 부지가 조성되어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목중리(木中里)·목하리(木下里)·신흥리(新興里)의 각 일부 지역이 목상리(木上里)로 병합되어, 대전군 북면에 편입되었다. 1973년 문평리(文坪里)와 신대리(新垈里)를 통합하였고, 1989년 신설된 대덕구에 편입되어 목상동이 되었다. 1994년 유성구 봉산동 일부 지역이 신일동·문평동에 편입되었고,1995년 신일동 일부 지역이 문평동과 목상동에 각각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행정동인 목상동은 법정동인 목상동·신일동·문평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거에 비해 임야가 차지하는 비율이 약 10%로 적으며, 대전 제3·4 산업단지가 들어서 공업용지가 80%가 되었다. 대전북부경찰서, 목상동파출소, 대덕우체국, 문평소방파출소, 환경관리공단 대전사업소, 한국화학시험연구원 등 공공기관과 대전 제3·4 산업단지, 폐수종말처리장·폐기물매립장 등이 위치해 있다. 주요 간선도로로는 중앙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경부고속도로, 71번 국도가 있으며, 경부선 철도, 경부고속도로 신탄진 인터체인지가 있다.
♤ 문평리사거리/ 32번국도/ 동계(목상동 - 문평동)
덕암축구센터에서 목상동으로 들어서 다사랑아파트 정문을 지난다. 문평리유래비가 있는 사거리에서 길건너 주요소 이면도로로 들어서서 한국타이어정문을 향한다. 대전 드론공원을 찾아서~
♤ 대전광역시 대덕구 문평동(文坪洞)
대전 대덕구에 있는 문평동은 지리적으로 대덕구 서북쪽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목상동, 남쪽은 신일동, 서쪽은 유성구 봉산동, 북쪽은 충북 청원군 현도면과 인접해 있는 동(洞)이다. 문평동은 넓은 들이 있어 먼벌 또는 문평이라고 하였으며, 갑천이 금강 상류와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넓은 평지는 농경지로 이용하였으나 여름철 비가 많이 오면 금강이 범람하여 홍수 피해가 컸던 지역이다. 그래서 문평동은 옛날에는 주로 밭으로 농사를 하였고, 일제 때에는 배나무 밭이 많았다. 문평동의 들을 새알들이라 하는데 여기서 생산되는 무는 전국 최고의 품질로 유명했으며, 조선시대에는 임금님께 진상하였다고 한다. 해방 후 50∼60년대까지도 무 재배가 활발하였는데 그후 수리조합이 만들어지면서 점차 밭을 논으로 개간하여 벼농사를 많이 짓게 되었다. 문평동은 금강과 갑천이 만나는 지점이라서 비가 많이 오면 양쪽의 물이 합쳐지면서 역류하여 논과 밭, 마을로 범람하여 홍수 피해에 항시 노출되어 있었던 지역으로 마을에서는 평상시에는 강에서 나룻배로 사용하고 수해 때에는 피난용으로 100명 이상이 탈수 있는 배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산이 없는 넓은 들판이라 수해가 나면 대피할 곳이 마땅치 않아, 마을 앞뜸과 뒷뜸에 하나씩 인공적으로 토산을 높이 쌓았다. 토산에는 큰 건물을 지어 놓고 수해 때에는 가재도구·곡식 등을 운반하여 보관하는 곳으로 사용하였다. 토산의 건물은 앞뜸 것이 규모가 크고, 뒷뜸의 토산과 건물은 앞뜸 것에 비하여 조금 작았다. 예전에는 두레 활동을 통해 일 년에 한 번씩 토산제를 지냈다고 한다.
♤ 한국타이어대전공장 정문/ 한국타이어 서문
한국타이어 서문 옆 오른쪽 길따라 진행하면 잠시 후 금강변(대전드론공원)에 이르고, 자전거도로를 따라 합수점 방향으로 진행하여 지맥을 마무리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가 한국타이어 공장 앞 버스정류장으로 향한다.
♤ 갑천(甲川)/ 금강합수점
합수점을 기준으로 하면 관암지맥 오봉산에서 분기한 불무산(160.8m)이 갑천 뒤에 있다. 왼쪽 갑천이 금강으로 합수되는 지점에서 식장지맥을 졸업하고, 갑천방향으로 진행하여 도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왼쪽 뚝방에 설치된 전망대를 향한다. 전망대에서 한국타이어 방향의 뚝방길을 진행하여 서문을 지나 첫 번째 삼거리에 도착해 좌틀하면 오른쪽에 자리한 대덕경찰서 정문을 지나 32번도로 횡단보도를 건너, 사거리 왼쪽에 위치한 버스정류장에서 대전복합터미널로 운행하는 701번 버스를 이용한다.
♤ 갑천(甲川)
갑천은 전북과 충남의 경계인 대둔산(878m)에서 발원하여 충남 금산군·논산시와 대전광역시를 북류하여 금강으로 흘러드는 강으로 길이 62.75㎞이다. 금강의 제1지류이며, 수원(水源)은 충남 금산군 진산면 행정리 대둔산(878m) 북동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북서쪽으로 유하하다가 어곡천과 합류 후 북동류하며 논산시 벌곡면 일대를 지나 기성면 유역에서는 계룡산에서 흘러내리는 두계천(豆溪川)과 합류 후 계속 북동류하며 완만히 흐르다가 대전광역시 유역에서는 진참천(鎭岑川), 유성천, 탄동천 등과 합류하여 동북 방향으로 물줄기를 바꾸어 흐르면서 유역의 평야를 형성시키고, 대전광역시를 관류한 뒤 다시 삼천동 부근에서 대전천과 합류된 유등천과 합류하여 북쪽으로 흘러 신탄진 부근에서 금강 본류로 흘러든다. 중류에서의 강폭은 약 172m이다. 대전의 도시 공간 확장에 따라, 1980년대까지는 대동천, 대전천, 유등천 유역을 중심으로 생활공간 및 도시개발이 이루어졌으나, 1990년대 이후로는 갑천 유역을 중심으로 공간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1990년대 초 대전엑스포가 개최되고 둔산 신시가지를 개발하면서 짧은 기간에 하천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갑천의 자연하천 생태계는 대부분 파괴되거나 교란되었다. 갑천 유역에 나타나는 생태환경 및 인위적 간섭의 특징은 지역에 따라 다른데, 상류와 중상류 구간은 치수 중심으로 하천 정비를 한 뒤 더 이상 간섭이 없어 하천 지형과 생태계가 자연 복구되고 있고, 중하류 구간은 배후지역을 시가지로 개발하면서 배후습지를 매립하고 하천을 정비하여 하천생태계가 파괴되었다. 하도는 여가 공간으로 조성되었고, 인공하천으로 변화되었다. 하류 구간은 배후지역에 도시개발을 하면서 하천 정비가 이루어져 하천 지형과 생태계는 불안정한 상태이다. 옛날에는 상류를 정천·유남천·성천, 중류를 갑천·선암천, 하류를 신탄이라 했으며 강유역에는 유성온천을 비롯하여 계룡산국립공원·대둔산도립공원·보문산공원 등이 있으며, 한국수자원공사·육해공군본부·대덕연구단지 등도 위치한다. 국토지리정보원이 발행한 한국지명유래집에서 갑천에 대한 부분을 살펴보면 "갑(甲)은 '제일의' 또는 '첫 번째'라는 의미를 갖는 말로, 갑천의 자연적, 인문지리적 특징을 설명하는 구체적인 문헌은 영조 때 실학자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擇里志)인데 책의 제목에서 나타나듯이 살기 좋은 지역을 골라서 특징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이 책의 복거총론(卜居總論)편에 이르기를 "甲川則原野極曠(갑천은 들판이 아주 넓고) 四山淸麗(사방의 산이 맑고 수려하며) 三大川合注於中(세줄기 물이 하나로 합쳐) 而竝得灌漑(물대기 쉬우니) 土皆畝種(토지가 비옥하고) ...중략... 江景不遠(강경이 가깝고) 而前有大市(인근에 큰 장이 있으니) 可作永遠世居之地(가히 대를 이어 살만한 땅이다)"고 했다.
♤ 에필로그
1년 전부터 준비한 식장지맥인데 봉화동천선배님이 물코를 터주셔서 이제사 출발합니다. 요즘 스포츠클라이밍에 심취하다보니 아무래도 지맥 나서는게 쉽지가 않습니다. 7월에도 변산지맥 하나를 목표로 정했는데 친구의 택배로 갈재로 갈 것이고 중간 지원으로 찜질방을 이용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금산에서 출발하여 옥천과 대전광역시와 만나는 삼광군봉을 지나고, 옥천과 대전광역시의 경계를 가르며 식장산으로 향하는 식장지맥은 계족산에서부터는 굳이 대도시인 대덕으로 내려서지 않고도 계족산성쪽으로 대청댐을 향해 금강을 찾아가는 굵은 산줄기가 있는데 정맥처럼 합수점을 찾아 생활권을 따른것 같습니다. 이 경우 계족산이 들렸다 가는 봉우리가 되는군요. 주변에 성재산이 많은데 그곳에서 내려다 봤을 가느다란 금강 줄기가 대청호로 변한 모습이라니.... 은진송씨 재실 뒤로 오른 227m봉에서 처음으로 대청호 경계표시 말뚝을 만나고, 보현사 석탑 위 봉우리에서 아름다운 대청호를 조망합니다. 세천공원입구 음식점은 일찍 문을 닫아 611번 버스를 타고 판암동으로 나가 인근 동구청 옆 킹스불가마사우나(11,000원)를 이용할 수 있었고, 합수점에서 지맥을 마치고 되돌아 나와 704번 버스를 타고 약 20분 거리 신탄진역에서 상경하는 기차를 이용했습니다.
첫댓글 상세한 산행기가 후답자들이 많은 도움이 될것 입니다
보만식계 대전지방 사람들이 많이 종주하는 코스이기도 합니다
식장지맥 난이도는 상위건에 속하는 지맥입니다
계절탓에 등로는 그래도 괜찮지만 그래도 제법 업.다운이 이어지지요
군데군데 조망이 트이고 날씨가 좋았으면 많은 분들도 만나고 했을낀데
우중 산행도 있고 그래도 월욜날은 제법 사람들도 보이네요
대전을 감싸고 이어지는 식장지맥 좋은 코스로 생각 됩니다
요새 황토 맨발 계족산이 유명해져서 가이드 산악회도 많이 가는것 같습니다
식장지맥 더븐데 완주 축하 드립니다
다음 지맥 산행기가 그리워집니다
수고 많이 했습니다^)^
와룡산선배님!
보만식계보다 더 긴 대전둘레길 종주가 있던데 약 150km 되는가 봅니다.
J3클럽이나 무도, 등야, 감마로드 등 장거리산악회에서는 한번에 종주를 하는가보더라구요.
그나저나 계족산 정상에 파평윤씨 묘가 하나 있다던데 저는 못봤습니다. 우짠 일일까요?^^
그리고 성재산갈릶길에서 산줄기가 둘로 갈라지던데,,
하나는 계족산성으로 가구요. 하나는 계족산으로 가는 식장지맥이구요.
계족산성으로 가면 금강 대청댐으로 가는 산줄기이구요, 식장지맥은 아시다시피 갑천과 금강의 합수점이구요.
두 산줄기가 어등비등 하겠더군요. 그런데 식장지맥은 생활권을 따라 대덕구 도심지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끝지점 선바위고개 직전에서는 공장지대와 고속도로, 철길 등으로 지맥이 제대로 가는게 아니더군요.
식장지맥은 첫구간 잡목지대를 통과하기가 고단하였고, 수레너미재부터는 고속도로였습니다.
즐겁게 잘 하였고 덕분에 대전광역시를 좀더 넓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백암사에서 출발하는 퐁라라님.
민가같은 백암사
개직마을 입구에서 본 금남정맥 줄기
금남정맥 육백고지 전승탑과 백령성
덥고, 가시덤불 길에, 비도 맞고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
봉화동천선배님!
그 먼 거리를 택배를 해주셔서 건천리 개직마을에서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산행기를 찾아보니 요즘 잠수타신 천자봉선배님이 여기로 가셨더군요.
그런데 곧바로 오른쪽 능선으로 오르셨습니다.
저는 왼쪽으로 빙 돌아서 능선을 따라 편하게 갔더니
금남정맥 바람골산(622.7m)까지 1시간이 넘게 걸렸습니다.
개직마을 골짜기에 한 시대를 피눈물 나게 살았던 사람들의 역사가 묻혀 있는데
언젠가는 남부군처럼 영화 한편으로 이 세상에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지금도 여야가 국회에서 정쟁을 하는 꼬락서니를 보면
손에 무기만 들리지 않았을 뿐 그때나 별반 다르지 않게 보여집니다.
기득권 당사자들의 명을 받드는 똘마니, 그 아래 행동대들은 항상 준비되어 있구요.
너무 극명하게 좌우로 기울면 안되는데 상대를 허용할 입추의 여지가 없기로는 지금도 마찬가지 같습니다.
퐁라라운영자님의 식장지맥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세번으로 나누어 진행하였지만 한여름 진행에도 만만치않습니다.
저도 지난지 얼마 되지 않아 기억이 생생하지만 ~
대전의 주요 산군을 지나는 산줄기로 즐기고 추억을 새겼던 순간으로 남아있습니다.
갑천 합수점의 불어난 수량도 힘차게 흘러드는 느낌입니다.
봉화동천님께서도 수고해 주셨구요..
많은 우여곡절과 이야기 속에 한줄기 매듭지으시느라 수고많으셨습니다.~^
네, 방장님! 진행하며 계속 방장님이 작업하신 산패 확인하며 걸었습니다.
식장산, 능성, 계족산에서 대전광역시를 넓게 감상할 수 있었구,
대청호 조망지는 보현사 위, 산불감시카메라가 있는 무명봉, 절고개 직전 정자가 좋았습니다.
세천고개에서 저녁을 먹을려고 했는데 거기 식당가는 6시나 되면 문을 닫는가봅니다.
판암동에서 왜따로 떨어져 있는 세천공원 입구라
야간에 식장루 올라가는 차만 움직일 뿐 따로 외식하는 차는 오지 않는가보죠
물과 먹거리도 보충해야 하고, 요기도 해야하고...
계획상 더 진행해서 정자가 나오면 정자에서 모기장텐트를 치고 잘려고 했는데
마침 세천공원 입구에 버스 종점이 있어 식당을 찾아 판암동사거리로 나갔고, 거기서 찜질방을 찾았습니다.
거리상으로는 세천공원에서 출발해도 여유가 있어 계족산성에 다녀와도 될뻔 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