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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탑이 위치한 봉우리이며 유봉지맥이 빠져나가는 동봉까지는 편도 0.44km이고 팔공지맥의 서봉까지는 0.79km입니다. 동봉까지 다녀와서 다시 팔공지맥을 이어가야 하는군요. 팔공지맥 대구광역시 구간은 팔공산에서 한티재 갈림봉인 삼갈래봉(834m)까지 약 5.4km입니다.
♤ 팔공산(八公山) 비로봉(毘盧峰, 1,192.9m)/ 제왕봉(帝王峰)/ 중봉/ 삼광시군봉(군위군 부계면, 영천시 신녕면 → 대구광역시 동구)/ 유봉지맥분기점/ 1등삼각점
팔공산은 낙동정맥이 남하하다가 대구쪽으로 뻗은 가지줄기를 금호강에 풀어놓은 대구의 진산이다. 신라 오악(五嶽) 중 중악으로 대구시뿐만 아니라 경산시와 영천시, 군위군, 칠곡군에 걸쳐 있다. 이 산은 본디 공산(公山), 혹은 부악(父岳)이라고 불렸다. 삼국유사는 물론 산경표(조선 영조 때 편찬)에도 그렇게 나와 있다고 한다. 「동국여지전도」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이 나오면서 비로소 팔공산이라는 이름이 보이는데 그 내력이 분분하다. 양산 천성산에서 1,000명의 제자를 이끌고 수도하던 원효스님이 8명의 제자만 데리고 팔공산으로 온 후 이들이 득도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과 싸우다가 대패하면서 신숭겸 등 8장수가 전사하여 생겨난 이름이라고도 한다. 이 이야기들은 어느 자료에도 보이지 않으니 꾸민 이야기로 보인다. 이밖에도 여덟 고을에 걸쳐 있어서, 혹은 여덟 봉우리가 우뚝해 보여서 라는 견해도 있지만 신뢰하기는 어렵다. 현재 도립공원이지만 인접한 다섯 개 지자체에서 국립공원으로 추진 중에 있다. 비로봉은 '모든 곳을 두루 비춘다'는 뜻의 범어(梵語)인 비로자나(毘盧遮那)에서 따왔다. 비로자나는 부처의 진신(眞身), 즉 법신불(法身佛)의 존칭이며 밀교 부처의 깨우친 진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팔공산에서 가장 높은 곳이니만큼 비로자나 부처님을 봉우리 이름으로 부른 듯하다. 팔공산의 산세는 중앙에 최고봉인 비로봉(毘盧峰: 帝王峰)이 솟아 있고, 좌우로 미타봉(彌陀峰: 동봉)과 삼성봉(三聖峰: 서봉)이 있어서 마치 본존불이 좌우로 협시보살을 거느리고 있는 형국을 이루고 있으며,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정한 정확한 높이는 팔공산 비로봉은 1,193m, 미타봉은 1,167m, 삼성봉은 1,150m이다. 1980년 5월 도립공원에 지정되었다.
- 방송통신시설이 즐비하다. 1등삼각점(군위 11/ 1979 재설)이 있다.
♤ 팔공산 제천단/ 조망데크
신라의 오악중에 중악이었던 팔공산. 신라에는 삼산 오악이란 나라 최대의 신산영악이 있어 숭배했다. 삼산에 지내는 제사는 신라 최대의 제전인 대사라 했다. 오악이란 신라가 중사를 제사지내던 신라 강역의 다섯 방위에 위치한 성산을 말한다. 동 토함산, 서 계룡산, 남 지리산, 중 공산(팔공산) 이 오악은 신라의 거국적인 숭배를 받았던 신산영악이었고 이 오악산신은 신라의 호국의 신으로 국운을 진호하고 있었다. 신라의 신령스런 명산 오악 중에서도 신라 국토의 중심에 위치한 중악은 가장 신령스런 영산이었다. 이 산위에는 산신 즉 천신에 제사지내던 제천단이 있어 국가에서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 산신에게 나라의 안녕과 시절의 조화와 풍요를 기원했던 것이다. 지금 오악 중에서 제천단이 완전하게 근래까지 남아있던 산은 북악 태백산 중악 팔공산 뿐이었다. 하늘과 땅이 맞닿은 제왕봉은 옛날 조상들이 국태민안을 기원하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성지이다. 조상들의 얼이 담겨있는 제천단을 자손만대 길이 보존하기 위해 표석을 세운다. 2004년 7월 24일 달구벌 얼 찾는 모임
- 비로봉 정상에서 내려서는 등로 바로 오른쪽 편에 팔공산 제천단 표석이 세워져 있다.
♤ 팔공산 갓바위/ 경산팔공산관봉석조여래좌상(慶山八公山冠峰石造如來坐像)
보물 제431호이다. 경북 경산시 와촌면 팔공산(八公山) 관봉(冠峰, 해발 850m) 꼭대기에 만들어진 5.48m 크기의 석조여래좌상이다. 불상의 머리 윗부분에 갓 모양의 모자가 얹혀 있다고 하여 ‘갓바위 불상’이라고 한다. 병풍석과 같은 여러 개의 바위로 둘러싸인 공간 속에 불상과 대좌를 하나의 돌에다 조각하였다. 갓으로 보는 머리 위의 자연 판석은 상당 부분 부서진 상태이다. 관봉석조여래좌상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 조성 배경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다만 불두(佛頭 : 불상의 머리) 위의 갓으로 불리는 자연 판석은 불상보다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 현위치 표시목
팔공산 구간에는 갓바위가 있는 관봉에서 001번이 시작되어, 동봉이 85번, 한티재가 150번, 팔공산 서쪽 끝에 해당하는 가산에 170번이 세워져 있는데, 대략 50~100m 구간마다 하나씩 세워져 있다.
♤ 유봉지맥이란(遊峰枝脈)이란
팔공지맥의 팔공산 주봉인 비로봉(1,192.9m)에서 동남쪽으로 분기하여 동봉(1,167m), 염불봉(1,042m), 신녕봉(997m), 봉화산(163.7m), 성동고개, 대왕산(166.1m), 월부령, 봉화산(291.1m), 우천고개, 봉화산(276.8m), 고수고개, 유봉산(245.2m)을 지나 영천시 오수동 신녕천과 금호강 합수점에서 기룡지맥을 마주보며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33.7km의 산줄기인데, 신녕천의 좌측 분수령이 된다.
♤ 유봉지맥 개념도
♤ 팔공산 동화사(桐華寺)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산인 동화사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승병군 사령부로 삼아 지휘한 곳이다. 동화사는 팔공산 남쪽 기슭에 493년(신라 소지왕 15)에 극달화상이 세운 사찰로 창건 당시 이름은 유가사였으나, 832년(신라 흥덕왕 7)에 심지대사가 다시 세울 때 겨울철인데도 경내에 오동나무가 활짝 피었다고 해서 동화사(桐華寺)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절 입구에는 수목이 우거져 있고 사철 맑은 물이 폭포를 이루며 흐른다. 경내에는 1727년에 중건한 대웅전, 염불암을 비롯한 여섯 암자가 있다.
팔공산마애약사여래좌상을 지납니다.
♤ 오도재(1,080m)/ 느지매재/ 수태골갈림길
팔공산 서봉과 비로봉 사이에 위치하며, 대구광역시 동구 공산동에서 경북 군위군 부계면을 잇는 경계상에 있는 고개로 수태골 주차장으로 내려서는 갈림길이다. 서봉까지는 0.4km 거리이다. 오도재는 옛날 큰홍수로 전세계가 물바다였을 때 까마귀 한 마리만 앉을 정도만 남기고 물이 다 차올랐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오늘날에는 해가 오도봉 상봉에 있을 때 한낮이 된다 하여 우두봉(牛頭峯)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른 이름으로 느지미재라고도 불리운다. 수태골(水台谷)은 대구시 동구 용수동의 자연부락으로 경주최씨들이 최초로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수태(受胎)의 유래는 불임의 여자가 아기를 갖게 해달라고 이곳에서 기도를 올린 끝에 임신에 성공했다고 해서 수태골로 이름붙여졌다고 한다. 항상 계곡에 물이 넘쳐 여름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 서봉 0.4km, 수태골주차장 2.9km, 동봉 0.7km 이정표가 서있다.
♤ 서봉/ 삼성봉(三聖峰, 1,150.2m)/ 북쪽에 헬기장
옛 대구직할시 시절에 세운 정상석으로, 뒷면에는 삼성봉은 신라시대 수태골에 위치한 삼성암에서 삼성인(성인 세분)이 득도하여 유래된 이름이라고 새겨져 있다. 삼성봉 정상석에서 약간 앞쪽으로 나가면 또 다른 오석 정상석이 세워져 있는데, 「팔공산 서봉/ 호산등고회· 비슬산악회 1991년/ 아름다운 우리강산 아끼고 가꾸어서 후손에게 물려주자/ ← 동봉 1.1km, →파계재 5.1km, 해발 1150m」라고 새겨져 있다. 동쪽으로 동화사까지 팔공산의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부터 파계봉까지 계속 톱날능선이 이어진다.
- 삼성봉 정상석에서 되돌아 나와 등로 초입에 있는 '부인사/삼성암 갈림길 이정표'(←파계재 5.1km, →갓바위 8.4km, ← 한티재 7.2km, →동봉 1.1km, ↓부인사 3.6km, 현위치번호: 096)를 지난다.
팔공산 톱날바위 능선은 서봉을 지나며 시작된다. 백운대를 지나 가마바위봉(1054m)~파계봉(991m)으로 이어지는 지맥 능선으로 기암괴석들로 이루어져 있다. 리지산행으로 지나야 하는 톱날바위 들머리에는 출입금지 푯말이 가로막고 있다. 파계봉까지 계속 톱날능선이 이어진다. 곳곳에 암릉으로 올라갈 수 없다는 주의 문구가 있으므로 암릉을 좌우로 우회하여 산길을 따라 진행해도 되고 약간 위험한 구간도 있지만 되도록 암릉길을 고집해도 재미있다.
가마바위봉(1,053.9m)에서 대구시내 조망이 가능합니다. 앞산, 청룡지맥, 비슬지맥을 알아본다면 좋으련만....
♤ 마당재/ 현위치번호 127
파계재로 가는 등로에서 대구시 동구 신무동, 부인사 내려가는 길이 왼쪽으로 나있다. 이 고개는 남사면의 부인사 일대와 북사면의 부계 남산리를 연결하는 재인데, '대구올레' 이정표가 세워져 있고, 위치표시목 127이 좌측에 세워져 있다. 현위치 표시목 113번이 세워져 있는 암릉 봉우리 백운대에서 로프가 있는 암릉인 가마바위봉(1,053.9m)에 이르기까지 톱날능선이 끝나는 지점이다. 마당재에서 다시 고도를 높인다.
♤ 신무능선분기봉(979.2m)/ 현위치표시목 128번
979.2m봉에서 남사면으로 중요한 가지 줄기가 뻗어 내려간다. 동쪽으로 휙 감아 내리면서 용수천골의 상층부를 거의 반분해 놓은 뒤 수태못 서쪽 못둑 역할을 하면서 신무동에서 달리기를 마치니, 거기에 적합한 이름은 신무능선일 터이다.
♤ 장꼬방말랭이(994m)/ 장꼬방봉
현위치 표시목 134번 맞은편에 서래야 박건석님의 장꼬방봉 994m이란 코팅지 정상표지가 있다. 이 봉우리를 주민들은 장꼬방 말랭이라고 하였는데, 장꼬방은 장독, 말랭이는 정상(頂上)이라는 뜻으로, 봉우리가 장독을 닮았다는 데서 따온 이름이라 한다.
- 현위치표시목 134에 팔공산 학생야영장 1.6km 이정표가 있다.
♤ 파계봉(把溪峰, 991.2m)/ 삼각점/ 물불봉
대구광역시 동구와 경북 군위군 부계면의 경계로 이 991.2m봉이 파계봉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공원고시에 파계봉으로 고시되었기 때문인데, 이 봉우리 남쪽 밑 무산마을 사람들은 이 봉우리 일대를 물불이로 불러왔기 때문에 물불봉 정도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이 봉우리는 신무동에 위치하고 있고, 파계사는 중대동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파계봉으로 옮겨 쓰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대구공산산악회에서 2008년에 설치한 '파계봉/ 991.2m' 오석 정상석이 있다.
- 삼각점(310 재설/ 78. 11. 건설부)과 현위치 표시목(135)과 이정표(←파계재 1.1km, →서봉 4.0km)가 있다.
♤ 들뫼능선 분기봉(935m)
물불봉과 파계재 사이의 935m봉 고도에서 매우 길고 우뚝한 가지 산줄기 하나가 내려가 남사면을 확연히 구분 짓는다. 754m봉을 거쳐 들뫼(거저산, 520m)로 흘러 내리면서 서편의 지묘천골과 동편의 용수천골을 나눠 놓는데, 들뫼능선이란 임시 이름표가 필요할 듯하다.
- 여기서 지맥은 오른쪽 아래로 내려서기 시작한다.
한티재까지 약 2.1km 남겨둔 거리로 군위 부계에서 대구 파계사를 넘나드는 고개로 파계사로 내려서는 150m 지점에 샘이 있으며, 파계사를 다녀오는데는 30분 정도 소요됩니다. 파계사입구에서 동대구역까지 버스(101-1)가 자주 운행하니(약 40분 소요) 교통이 불편한 한티재보다는 절도 구경하고 끊어가기에 적당합니다. 절 입장료 1,500원은 어떻게 하느냐고요. 글쎄 오토캠핑장 방향으로 우회하면 파계재로 오를 수 있다네요. ㅋ
♤ 파계재(把溪峙)
파계재는 북사면의 군위군 부계면 군위 제2석굴암 파계골과 남사면의 대구광역시 동구 신무동 파계사골을 연결하는 고리로 옛날에는 통행하는 이가 많아 재넘어 부계 쪽 수월정사 부근에 주막촌이 형성될 정도였으며, 부계에서 대구는 50리 길로 옛날엔 한티재나 파계재를 통해 대구의 학교나 서문시장을 넘어 다녔다고 한다. 파계사 뒤쪽 고개라 파계재인데 파계란 이름은 절의 좌우 계곡에 흐르는 9개의 물줄기를 모은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등로는 뚜렷하다.
- 이정표(↓갓바위 13.5km, ↑한티재 2.1km, ↓동봉 6.2km, →제2석굴암 5.0km, ←파계사 1.3km, 현위치번호: 141)와 천봉산악회에서 세운 오래된 사각 표지석(동봉 6.1k, 제2석굴암 5k, 파계사 1.4k)이 세워져 있다.
♤ 파계사(把溪寺)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의 말사이다. 영조의 출생 설화가 전해지는 사찰, [팔공산파계사사적비]는 파계사 사적비명이라 하여 파계사의 사적을 기록하고 있다. 신라 애장왕(800-808)때 심지왕사가 창건했으나 임진왜란으로 회진된 것을 1605년(선조 38년) 계관(戒寬)법사가 원통전을 시작으로 설선당 등을 중창하였으며, 1695년(숙종 21) 현응(玄應)이 삼창하였다. 또한 이 절에는 영조(英祖)의 출생과 관계되는 설화가 전해지는 파계사 삼병조사(三甁組師)인 현응대사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1693년(숙종 19년) 10월 5일 밤에 숙종의 꿈속에 현응이 나타났다고 한다. 이에 왕이 현응대사에게 왕자 낳기를 부탁하는데 숙종의 부탁을 받은 현응은 농산(聾山)과 함께 수락산(水絡山) 성전에서 백일기도를 하였고, 기도가 끝나는 날 농산이 숙빈(淑嬪) 최씨에게 현몽하였으며, 이듬해 원자가 탄생하니 이가 후일의 영조였다는 것이다. 숙종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파계사 주변 40리 이내의 조세(租稅)를 받아 쓰라고 하였으나 현응은 이를 거절하고 선대의 위패를 모시기를 청하였다. 이는 지방 유림(儒林)의 행패를 막으려는 것이었다. 숙종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파계사를 영조의 생전·사후의 복을 기원하는 축원당(祝願堂)으로 삼았다. 또한, 절 입구에 「대소인개하마비(大小人皆下馬碑)」를 세워 왕실 원당에 감히 말을 타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양반과 관료들로부터의 착취와 사역도 면하게 해주었다. 1979년 관음보살상을 개금할 때 불상에서 나온 영조의 어의(御衣)는 이 설화의 신빙성을 더해 주는 것이었다. 이곳은 동화사와 더불어 대구 지방의 유명한 풍치지구이며, 조계종 제9교구의 본산인 동화사의 말사로서 불상, 석등, 석불, 영조대왕의 어의가 보관되어 있다.
♤ 대구 파계사 원당봉산(願堂封山) 표석
팔공산 파계사 원당봉산 표석은 팔공산 파계재에서 한티재 방향으로 약 4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원당봉산은 원당과 봉산이란 두 단어를 조합한 것이다. 원당(願堂)은 왕실의 안녕이나 명복을 빌던 장소를 뜻하며, 봉산(封山)은 함부로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금지한 산을 뜻한다. 1806년 작성된 「파계사원당사적」에 따르면 파계사는 1696년(조선 숙종22년) 세자(영조)의 탄진을 기원하기 위해 왕실의 원당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1696년 이후 파계사가 원당으로 지정되면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 등로 오른편 공지에 '대구 파계사 원당봉산(願堂封山) 표석'이 세워져 있다.
♤ 한티재 갈림봉(834m봉)/ 삼광군봉(군위군 부계면, 대구광역시 동구 → 칠곡군 동명면)
지맥은 봉우리 직전에서 오른쪽으로 꺽여 간다. 이 봉에서 대구광역시가 끝나고 칠곡군 동명면으로 바뀐다. 834m봉에서는 남서쪽으로 긴 곁가지가 하나 뻗어 나가는데 법성능선이다. 법성능선은 대구시 경계로 이어지는 줄기로 이 법성능선은 일대 지형 구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먼저 남사면 공간을 구덕천골과 지묘천골로 양분하여 법성능선의 서북편으로는 구덕천골이 분포하고, 동남편으로는 지묘천골이 자리잡는다. 더구나 더욱 중요한 점은 법성능선의 548m봉에서 미약한 가지줄기가 또 하나 생겨 정남쪽으로 벗어난 뒤 대왕재를 지나 도덕산군을 일궈낸다는 점이다.
- 이정표(←한티재 1.7km, →파계재 0.4km, ↓파계야영장 3.1km, 현위치번호: 144)
♤ 칠곡군 동명면(東明面)
경북 칠곡군 동부에 있는 면으로 대구광역시의 북쪽 관문이며 영남대로의 요충지였다. 오늘날은 팔공산도립공원 가산지구의 관광 중심지이다. 가산산성(架山山城) 아래 기성계곡(箕星溪谷) 주변에 각종 식당과 숙박시설, 위락시설이 집중되어 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영남대로의 동명원(東明院) 이름을 따서 동명(東明)이라 하였다. 동명면은 칠곡군 동부의 산악지대로 가산(架山, 901.6m), 오계산(午鷄山, 466.3m), 백운산(白雲山, 713.4m)이 지형을 압도하고 있다. 동남쪽으로 도덕산(道德山, 660m)에서 대구광역시와 접하고, 서남쪽에서는 건령산(建靈山, 516m)에서 지천면과 접한다. 동명면은 팔공산 도립공원의 남서쪽 입구에 해당하며, 팔거천(八莒川) 수계에 속한다. 가산, 오계산, 백운산에서 발원한 군소 하천이 봉암리에서 합류하여 남쪽으로 흘러 금호강(琴湖江)에 유입된다. 팔거천 노선은 조선시대까지 영남대로의 중요한 일부였다. 팔거천을 따라 중앙고속도로, 대구와 안동시를 잇는 국도 5호선, 대구와 구미시를 잇는 국도 25호선이 나란히 위치한다.
한티재주차장 출구쪽 버스정류장이 비박지로 적합해 보입니다. 동명면 버스 17시 막차, 대구행 버스는 칠곡시장까지 나가야 자주 있답니다. 주차장에 약밤과 사과를 파는 트럭이 서있군요. 핸펀 충전도 할겸 오전 11시에서 19시까지만 문을 연다는 편의점에서 물과 먹거리를 보충하고 소주팩 한병과 오징어포도 하나 챙깁니다. 아쉽게도 카페만 있을뿐 식사를 제공하는 곳은 없습니다.
♤ 한티재(718m)/ 대현(大峴)/ 휴게소, 화장실
한티재는 팔공산에서 가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에 있으며,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와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를 잇는 79번 지방도가 지나는 고개로, 높고 큰 고개라는 뜻으로 한티(漢峙)라는 이름을 붙었는데, 한자로는 대현(大峴)이라고 표기하였다. 과거에는 칠곡과 군위를 왕래하는 주민들이 주로 이용하였으나, 현재는 팔공산을 찾는 관광객들이 많이 이용한다. 팔공산의 경치와 굽이굽이 휘감아 도는 도로의 굴곡이 아름다워 건설교통부에서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되었다. 주탐방로 안내도에 치키봉까지 3.2km, 가산산성 동문까지는 5.3km, 가산까지는 5.8km로 표시하고 있다.
- 휴게소 건물 왼쪽, 화장실과 자판기 사이 통로를 따라 들머리에 들어선다.
♤ 칠곡 천주교 한티 순교성지
한티성지는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에 있는 조선후기 천주교 박해를 피해 모인 신자촌으로 대구에서 북쪽으로 28Km에 위치한 깊은 산골이다. 천주교 전례는 봉건적 유교 도덕과 사회규범에 대항하는 사상적 반항이며, 이념적 도전이어서 수차례 박해가 있었다. 한티 성지는 조정으로부터의 박해를 피해 한티마을에 모인 수십 명의 신자들이 무더기로 처형된 비극의 현장으로 현재 군데군데 신자들의 묘가 산재해 있다. 한티마을에 언제부터 신자들이 살기 시작했는지 정확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인근의 신나무골과 비슷한 때인 1815년 을해(乙亥)박해와 1827년 정해(丁亥)박해 후 대구 감옥에 갇힌 신자들의 가족들이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기 위해 마을에 와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1837년 서울에서 낙향한 김현상[요아킴] 가정이 신나무골을 거쳐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를 피해 한티마을로 이주해 오면서부터 신도들이 모여들어 본격적인 교우촌을 형성하고, 옹기와 숯을 굽고 화전을 일구며 생계를 이어갔다. 움막집에 살던 신도들은 신나무골 공소와 서로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신앙생활을 하였고, 1845년에 조선에 입국한 다블뤼 주교와 1849년에 입국한 최양업 신부가 경상도를 순회·전교하면서 한티마을에 와서 판공성사를 집전하였다. 1860년 경신박해로 뿔뿔이 흩어진 신자들은 박해가 뜸하자 다시 모여들어 오히려 더 큰 규모가 되었다. 그리하여 1862년 배르뇌 주교의 성무 집행 보고서에는 “칠곡 마을의 굉장히 큰 산중턱에 아주 외딴 마을 하나가 있는데 이곳에는 40명 가량이 성사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수차례의 박해를 간신히 넘긴 한티마을은 마침내 1866년 병인년의 대박해로 ‘최후의 날’을 맞는다. 1868년까지 3년간 유례없이 혹독하게 이루어진 병인박해는 평화롭던 마을을 순식간에 피바다로 만들어 버렸고 수십 명의 신자들이 한자리에서 몰살을 당하는 비극을 남겼다. 당시 순교자로는 배정모[손아]의 부인 이선이[엘리사벳] 외 배도령, 서익순과 서태순, 조가를로 등이 있으며, 병인박해를 전후해 순교한 30여 기의 무명 순교자 무덤이 산재해 있다.
- 칠곡 억새마을 한티천주교순교성지가 가깝다.
♤ 부계봉(缶溪峰, 783.6m)/ 삼면봉(칠곡군 동명면, 군위군 부계면 → 칠곡군 가산면)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 경계에서 오른쪽이 칠곡군 가산면 응추리로 바뀌는 삼면봉(三面峰)으로 지맥이 완전하게 가산면 내로 들어서는 지점이다. 783.6m봉에서는 북사면으로 큰 산줄기가 하나 흘러내려 그 서편의 칠곡 가산면(사창천골)과 동편의 군위 부계면(남천계곡)을 가른다. 사창천골 음지마을 주민들은 이 봉우리를 큰골말랭이로 부르는데, 말랭이는 경상도에서 말래이, 만대이, 만디 등으로 부르는 말로 큰골 위의 봉우리라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부계봉(缶溪峰)이라 부르기로 하자. 부계는 팔공산 북사면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고을이기 때문이다.
- 4등삼각점(군위 465/ 2004 재설)이 있다. 좌로 도는 우회길이 있는데 우측으로 올라야 한다. 써레야님, 대구마루금산악회 故 한현우대장님의 코팅지가 나무에 걸려있다.
♤ 칠곡군 가산면 웅추리(鷹秋里)
조선시대 칠곡군 동북면(東北面)에 속하였다. 1914년 응봉산(鷹峰山)과 추동(秋洞)의 첫 글자를 따서 응추(鷹秋)라 하고 가산면에 편입하여 오늘에 이른다. 응추리는 가산산성과 치키봉(757m)을 등지고, 동쪽으로 시루봉(甑峰, 655.3m), 서쪽으로 두리봉(444m)과 선돌재에 둘러싸인 높이 400m 이상의 완사면에 자리하고 있다. 위천(渭川)에 유입하는 사창천(社倉川)의 상류에 해당된다. 가산로를 따라 양지가라골 마을과 음지가라골 마을이 들어서 있다. 두 마을을 적시고 흐르는 용수천은 용수리의 용계 마을 앞에서 사창천에 합류한다. 가라골에는 옛날 큰 가래나무가 있었다. 근처의 산이 아름답고 사냥하기에 좋아, 가을이면 사냥꾼이 몰려와 이 가래나무 아래에서 산수를 즐겼다고 한다. 지금은 사과 등의 과수 재배와 한우 사육을 많이 한다. 양지가라골 마을은 응추리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대구광역시를 왕래하는 교통의 출발점이다. 동쪽의 음지에 있는 음지가라골 마을은 특히 한우 사육을 많이 한다. 음지가라골 마을에서 남쪽으로 건드렁 바우골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득명재를 넘으면 동명면 득명리 찬샘이에 이르고, 동쪽으로 쉰재를 넘으면 경상남도 군위군 부계면 제2 석굴암에 이른다.
♤ 치키봉(757.3m) → 761m봉
치키봉은 경북 칠곡군 가산면과 동명면에 걸쳐 있는 가산(架山, 902m)의 동쪽 봉우리이다. 산세가 곡식을 까부를 때 쓰는 키와 닮아서 치키봉이라고 불렀다 한다. 서쪽으로 주능선을 따라가다 할아버지 할머니바위를 지나면 가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치키는 경상도에서 치 혹은 치이로 발음되는, 곡식을 까부를 때 쓰는 도구인 키를 말하는데, 그걸 엎어 놓으면 등이 평평하다가 끝에서는 직각으로 절벽을 이루는 형상이 된다. 그러나 이 757m봉은 전혀 그런 형상이 느껴지지 않는 봉우리로, 행정 당국의 부주의로 다른 봉우리를 이 봉우리로 적는 바람에 그렇게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즉 현지인들이 '치이봉'이라 불러온 봉우리는 757.3m봉이 아니라 그 아래 남쪽 방향으로 약간 떨어져 있는 700m봉인데, 현장을 보아도 700m봉의 등은 평평한 평지를 이루다 끝부분에서 절벽으로 떨어져 내려 남사면이 훤하게 살펴지며, 역으로 산 아래 마을에서 보았을 때 가장 두드러져 보이는 산도 바로 700m봉이다.
- 치키봉에는 마모되어 완전한 판독이 어려운 건설부가 새겨져 있는 3등삼각점(314)이 있다. 팔공지맥의 한 구간에 속하며 위치표시목(팔공 01-160)과 이정표(↓한티재 3.2Km, →동문 1.9Km, ↑진남문 2.7Km)가 있다.
정신없이 걷다보니 선돌이 어디에 있는지 보지 못하고 지났네요.
♤ 선돌재(立石, 690m)
선돌재는 선돌(立石)에 가까이 있는 재라는 뜻으로, 팔공산 20km 구간 중 가장 낮은 고도 690m 정도에 있는 재다. 북사면 주민들이 옛날 이 재를 넘어 동명장을 봐왔던 주 통로로, 지금도 남사면의 천주사 터 인근으로 내려가는 등산로가 유지되고 있으며, 다만 북사면의 산길은 분간이 불가능한 상태로 묵어있다.
- 선돌이 서 있는 곳을 지나 약 4~5분 정도 진행하여 잘록이 안부인 선돌재를 지나서 헬기장으로 오른다.
♤ 할아버지, 할머니바위
입석바위 두개가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곳이다. 바위의 형상을 따라 현지인들이 영감할망이 바위 혹은 할배할매바우로 불러온 입석인데, 지금은 표준말로 ‘할아버지할머니바위’로 불려지고 있다.
- ↓한티재 4.1Km, ←동문 1.0Km를 표시하는 이정표가 있다.
가산산성에 올라가지 않고 아래에서 비박을 하기로 합니다. 효령재까지 남은 거리도 얼마 되지 않고, 기왕이면 산성을 밤보다는 낮에 지나는게 나을것 같고, 산성 위보다는 아래가 더 바람이 없을것 같아서입니다. 낙엽을 모아 바닥을 다지고 언더그라운드 시트를 깔고 그 위에 텐트를 올려 놓습니다. 바람이 없어 굳이 팩을 설치하지 않아도 되겠더군요. 한티재에서 가져온 소주팩과 오징어 안주를 털어넣고 파곤한 심신을 누였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새벽에 무언가가 텐트 가까이 다가와 문을 열고 고함을 지른 기억이 남았습니다.
♤ 가산산성(架山山城)
가산산성은 경북 칠곡군 가산에 위치하고 있는 사적 제216호의 산성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잇따른 외침을 받은 후 이에 대비하기 위하여 쌓은 산성으로 난이 일어날 때마다 인근 고을 주민들이 피난했던 내지의 요새였다. 높이 901m의 산골짜기를 이용하여 10여km에 이르는 내·중·외성을 축조하였는데, 현재 4개의 문터와 암문·수구문터 등의 시설이 남아 있다. 내·중·외성은 시대에 따라 연차적으로 축성되었는데, 내성은 1640년(인조 18)에 관찰사 이명웅(李命雄)의 장계로 축성하기 시작하여 8년간의 공사를 거쳐 1648년에 완성하였다. 내성은 그 길이가 4,710보(약4km)로 동서북의 문지 및 8곳의 암문이 있다. 이후 숙종 26년(1700)에 외성이 확장 축성되었는데, 그 길이는 3,754보(약3km)이며, 남문 및 암문 3곳이 설치되어 있다. 이 성의 주 출입구는 외성의 남문이며, 성내의 건물들은 남아있지 않고 건물터만 남아있으나, 성벽 및 암문은 원형을 남기고 있다. 그 후 영조 17년(1741)에 관찰사 정익하(鄭益河)의 장계에 따라 602보(약460m)의 중성이 축성되었는데, 성문루와 위려각이 설치되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가산성은 만길이나 되는 산 위에 있으며 남북으로 통하는 큰 길을 가로 질러서 큰 요충지라 할 수 있다"고 썼다. 한국전쟁에 국군과 인민군의 치열한 교전지였으며 여기부터 다부동까지 이어지는 팔공지맥길이 낙동강의 최후 방어선인 셈이다.
- 동문갈림길을 지나 성곽 위 '825.6m봉'에 올라 성곽길을 따라 계속 가산 정상까지 갑니다.
♤ 가산(架山, 901.8m)/ 칠봉산(七峰山)
팔공산의 최고봉인 비로봉(1,192m)에서 시작된 산맥의 서북쪽 15㎞ 지점의 끝부분에 위치한 가산은 평정봉으로서 상당히 넓은 평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북쪽으로 천생산성과 유학산(遊鶴山, 839m)에 연결되고, 서쪽으로는 다부동에 접하여 있다. 가산이라는 명칭은 팔공산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의 끝자락에 위치하여 가사산 즉 갓(가장자리)산이라 하였고, 이를 한자로 가산이라 표기한 것이라 전해진다. 가산의 또 다른 이름으로 7개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여 칠봉산이라고도 불리며 칠곡군내의 최고봉이다. 7개의 봉이 7개의 골짜기를 이루어 칠곡(七谷)이라 한것이 오늘의 칠곡군이 되었다. 산의 골짜기 곳곳에 암괴류가 분포하며, 남쪽 사면에서 남원천이 발원하고, 가산바위 등 관광명소들이 있다. 산 정상부에는 1640년(인조 18)에 축성된 가산산성(사적 제216호)이 있다. 가산산성이 완성되자 칠곡도호부가 이 곳에 설치되었으며, 1819년까지 180년간 읍치 역할을 수행하였다. 현재도 성벽과 사대문지와 암문, 수구문, 건물지 등의 시설이 남아 있다. 가산은 「여지도서」에 처음 기록되어 있는데, "부성(府城)의 주산(主山)이다."라고 쓰여 있다. 「해동지도」에는 가산산성 내부의 시설까지 상세하게 그려져 있으나, 가산이라는 명칭은 기재되어 있지 않다. 「조선지도」에는 성곽을 묘사하고 가산성이라고 기재하였다. 한국전쟁에는 이곳에서 낙동강전투의 최고의 격전지가 된 곳이기도 하다.
- 가산 정상에는 직사각형 대리석 윗면에 용바위가 새겨진 정상석(측면 한면에 '한티재 5.4km →')이 있는데, 용바위는 이 곳 정상에서 북쪽으로 100m 정도 떨어져 있는 암릉봉을 말하기 때문에 용바위가 아니라 가산이어야 제격이다. 밑둥이 묻혀있어 도엽명을 확인하기 어려운 삼각점이 있고, 가산 정상에 이정표(← 용바위 0.1km / ←유선대 0.2km, / →동문 0.7km, ↓가산바위 1.4km)가 있다.
가산산성 내부 중문을 지나면 바로 삼거리 갈림길이 나오는데 보통은 직진길로 진행하지만, 좌측 성벽 길에 가까운 등로로 진행한다. 중문 위에 올라서서 좌측으로 공사가 완료된 성곽길을 따라 가산바위로 진행한다.
♤ 가암(架岩, 860m)/ 가산바위
가산바위는 가산의 정상부 가산산성의 서북쪽 성벽 사이에 약 10m 높이로 우뚝 솟은 바위로 가암(架岩) 또는 개산암(介山巖)으로도 불리는데, 바위의 윗부분 상면은 성층면을 따라 수평으로 쪼개져 표면이 평탄하여 넓이가 약 270㎡(80평) 규모의 넓은 평면으로 되어 있다. 사방을 훤히 전망할 수 있어 대구광역시의 전경을 한 눈으로 볼 수 있다. 바위 상면 동단의 한 가운데에는 폭 30㎝ 내외의 구멍이 동굴처럼 뚫려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신라의 고승(高僧) 도선(道詵, 827~898)이 산천을 편력하면서 지기(地祇)를 다스리기 위해 쇠로 만든 소와 말(鐵牛와 鐵馬) 형상을 넣고 묻었던 곳인데, 조선시대 관찰사였던 이명웅(李命雄)이 성을 쌓으면서 없애버렸다고 전해진다. 팔공산 신8경(新八景) 중 제5경으로 알려져 있다. 또 다른 전설로 힘이 센 가산장사와 바위 이야기가 전해 지고 있다. 옛날 가산 고을에 한 장사가 살고 있었는데, 모두들 가산장사라고 불렀다. 가산장사는 금강산 유람을 가서 주머니에 조약돌을 잔뜩 넣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가산에서 금강산에서 주워 온 조약돌을 실수로 하나 굴러 떨어뜨리게 되었다. 굴러 떨어진 조약돌이 바로 거대한 가산바위이며, 바위 한 가운데 있는 큰 구멍은 가산장사가 오줌을 누어 뚫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가산바위 서쪽 끝 지점에 전서체(篆書體)의 가암(架岩) 글씨가 새겨져 있다. 좌측 편으로 도덕산이, 멀리 앞산과 그 뒤 청룡산과 비슬산이 제법 또렷하게 조망된다. 남서쪽 아래로 계정사와 두무지, 학명리 마을이 보이고, 정면 멀리로 가야산 우두봉이 조망된다. 서쪽으로는 황학지맥 능선이 이어져 소야고개를 넘어 황학산이 보이고, 정면 다부동과 그 우측 유학산 줄기가 이어져 있으며, 가운데 멀리로 구미 금오산이 보인다. 북서쪽으로 황학지맥 분기봉(851.5m,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상 846.5m)이 우뚝 솟아있다.
- 경치를 감상하고 다시 가산바위 계단으로 내려와 왼쪽으로 등로를 이어간다.
♤ 가팔환초
가팔환초란 대구의 진신 팔공산 이어가기로 경북 칠곡군 동명면 학명리 다비암(구 계정사)을 들머리로 하여 가산(架山, 901.8m)과 팔공산(八空山, 1,192.8m), 환성상(環城山, 804.1m), 초례봉(醮禮峰, 636.7m) 등 대구와 칠곡, 영천, 경산시 경계를 이루다 대구시 동구 신서동에서 능선자락을 떨어뜨리는 4개 산을 차례로 순회하는 종주 코스를 일컫는다. 대구 북동부 지역을 병풍처럼 아우르는 종주코스로써 도상거리 35km, 실거리 약 45km이고, 가산바위,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가산산성, 팔공산의 기암괴석, 누구에게나 한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는 갓바위[관봉석조여래좌상(보물 제 431호)], 팔공산 자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환성산, 태조왕건이 피신하여 목숨을 보존했다고 하는 역사적 유래지인 초례봉 등을 차례로 관람할 수 있다. 서울지역의 불수사도북, 대전지역의 보만식계보다 난이도면에서 산꾼들 사이에 가팔환초를 한 수 위에 두는 극기의 산행코스이기도 하다.
황학지맥분기봉에서 성벽을 넘어 왼쪽으로 내려가면 황학지맥이고, 팔공지맥은 성벽을 따라 오른쪽으로 내려선다. 성벽을 따라 150m 정도 내려가면 오른쪽으로 북문가는 길이 나오고, 지맥은 성벽을 넘어 왼쪽으로 내려선다. 급하게 고도를 낮추면서 내려서면 임도가 나타나면서 모래재에 도착한다. 부계봉에서 부터 칠곡군내 동명면과 가산면의 면계를 따르던 지맥은 황학지맥분기봉에서 완전하게 가산면으로 진입하여 모래재로 내려서게 된다.
♤ 황학지맥 분기봉(851.5m)
가암에서 북쪽으로 성곽길을 따라 서문을 빠져나가기 전에 직진으로 북문을 표시한 이정표를 따라 약 10분여 올라 황학지맥 분기봉에 이른다. 팔공산 주능선은 그 끝 가산권의 마지막 851.5m봉에서 두개의 지맥을 낸다. 한 줄기는 서쪽으로 달려 잡사리등(466m), 오계산(356m)을 거친 후 소야재를 건너 또 하나의 커다란 산군을 형성한다. 그 곳의 대표적 높은 산봉들이 황학산, 소학산, 유학산 등이니 신 산경표상의 황학지맥이다. 다른 한 줄기는 북쪽으로 달려 응봉산(336m), 적라산(352m), 청화산(701m)을 거쳐 만경산(499m)에 이르러서야 멈추어 의성 단밀까지 내리 뻗는다. 위천이라는 큰 물길의 둑이 되니 신 산경표상의 팔공지맥 꼬리 부분이다. 팔공산 주능선의 서편 시종점은 가산이 아니라 그 서편에 있는 851.5m봉(황학지맥 분기봉)이 된다. 현장에서 보면 가산권이라는 한 권역이 완성되는 경계점이 851.5m봉이 너무나 명확한데, 이 봉우리를 경계로 더 서편 구간은 500m대 이하로 급락하는 것이다.
- 준·희님의 '황학지맥 분기점' 산패가 걸려있다.
♤ 황학지맥(黃鶴枝脈)이란
황학지맥이란 팔공지맥상의 가산(架山: 901.8m) 북서쪽 1.8km 지점 851.5봉(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서는 846.5m)에서 서쪽으로 분기하여, 칠곡군 가산면과 동명면 경계를 따라 오계산(466.3m), 백운산(713.4m), 황학산( 758m)을 지나 남진하면서 소학산(624m), 자봉산(427m), 장원봉(372m), 용산(244m), 마천산(274.2m), 죽곡산(195.8m)을 거쳐 금호강이 낙동강에 합수하는 달성군 다사읍 죽곡리 강정마을에서 맥을 다하는 41.6km의 산줄기다. 팔공지맥과 더불어 대구시민의 젖줄이라 할 수 있는 금호강의 북쪽 울타리가 되며, 합수점에서 강 건너편 비슬지맥에서 분기하여 온 청룡지맥의 끝점과 마주본다.
♤ 황학지맥 개념도
♤ 모래재(578m)/ 팔각정
모래는 경북 칠곡군 가산면 가산리에서 채석장, 금화광산의 금화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옛날부터 모래가 많아 모래재라고 하였다. 남쪽으로 4.3㎞ 떨어진 거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석축 산성 가산산성(架山山城)의 방어벽이 고개 아래 갈림길까지 이어진다. 동쪽에 금화계곡, 서쪽에 저수지 가산지(架山池)가 형성되어 있으며, 주변에 신라시대 사찰 대둔사(大屯寺)와 금곡사(金谷寺)가 있다. 오른쪽 가산리 사람들은 면에 나갈려면 이 길을 넘어야 하지만 실제 거리는 군위쪽이 더 가깝다. 물길은 효령면 수계에 속한다.
♤ 칠곡군 가산면 금화리(錦華里)
인근의 광산(鑛山)에서 사금과 중석이 많이 생산되어 금화(金華)라 이름 붙였다. 금화리는 오계산(午鷄山, 466.3m) 북쪽 산록에 자리한 마을로 갈정산(葛丁山, 748m), 소흘산(所屹山, 357.4m) 등의 봉우리가 이어져 둘러싸인 곳에 금화지(金華池)가 있다. 가산산성(架山山城)을 오르는 북쪽 입구 가운데 하나이다. 사금과 중석을 캐는 광산이 있었다. 금화지가 조성되면서 마을이 크게 번창하였다. 금화 마을은 소화 광산 아래에 형성된 마을로 6·25 전쟁 이후 쇠퇴하였다. 금화 계곡(金華溪谷)은 피서지로 유명하며, 금화지 주변에 방갈로, 식당 등을 갖춘 가산 금화 관광농원이 있다.
♤ 726.9m봉/ 군계(칠곡군 가산면 - 군위군 효령면)
한티재 이후 삼면봉인 부계봉(783.6m봉)에서 칠곡군 가산면 내로 진입한 지맥이 가산면 내를 통과하여 모래재에서 올라서서 다시 군위군 효령면 경계와 만나는 지점으로 왼쪽으로는 갈정산(741.5m)으로 향하고 지맥은 오른쪽으로 내려서는 갈림길 삼거리이다.
- 모래재에서 30분 거리이다.
♤ 갈매기산(740.6m)
암릉 위에 간이 돌탑을 쌓은 갈매기산(740.6m)에 오른다. 정상 나무에는 준희선생님의 '팔공지맥/ ▲745m' 정상 표시판과, 서래야 박건석님의 '갈매기산(746.0m)' 코팅 표지판이 달려있다. 국토지리정보원 온라인 지도상 740.6m봉이다. 이후로 718.3m봉, 565.6m봉, 연화바위산((502.7m), 전망바위, 금산(435.6m)을 지난다. 374.1m봉에서 좌측으로 유학산이 조망된다.
♤ 고지봉(565.6m)
무수히 많은 띠지와 함께 준희선생님 팔공지맥 566m 산패도 있다.
♤ 연화바위산(502.7m)
♤ 금산(435.6m)
여영님의 438m 팔공지맥 산패가 있다.
♤ 깃대봉(374.1m)/ 삼각점봉
식별이 어려운 삼각점( )이 있다.
갈비재에서 끊는다면 만남의휴게소에서 식사하고, 화성철강 앞 정류소에서 300번 버스를 이용하여 대구 북구 북부터미널로 나갈 수도 있고, 약 800m 이동하여 석우1리 정류소에서 구미역으로 나가는 885번 버스를 이용할 수도 있다. (전국버스앱 참조)
♤ 갈비재/ 석우재/ 알프스모텔, 주유소/ 5번국도
경북 군위군 효령면과 칠곡군 가산면을 지나는 5번국도이다. 갈비재는 중앙고속도로 가산IC를 빠져나와 군위 효령으로 넘어가는 5번 국도(경북대로)가 지난다. 높은 중앙분리대가 있는 4차선 포장도로로, 왼쪽으로 약간 진행하면 도로를 건널 수 있는 지하통로가 있다. 중앙분리대 넘어 왼쪽 가산IC 방면으로 1.2km(10분)지점에 만남의휴게소가 있고 더 가면 가산면에 다부동 전적지가 나온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넘어가도 편의점을 만날 수 있다.
- 들머리는 모텔 알프스 입간판이 세워져 있는 주차장 앞의 옹벽을 올라 도로가 묘지 위로 진행한다.
지맥이 구미시 장천면과 만나는 손바닥 만한 공터인데 그래도 명색은 삼시군봉입니다. 정상엔 아무런 인증할 만한 표식물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 224m봉/ 삼군봉(군위군 효령면, 칠곡군 가산면 → 구미시 장천면)
가산면과 군위군 효령면을 경계 지으며 이어 온 지맥길은 이 봉우리부터 왼쪽이 칠곡군 가산면을 벗어나 구미시 장천면으로 들어서는 지점이다. 이후 지맥은 장천면과 경계를 이어가며 지맥의 오른쪽이 효령면, 군위읍, 소보면으로 바뀌다가 구미시 산동읍으로 진입하고, 장천면과 곰재를 지나 문수봉/경수산에 오르며 장천면과 헤어지기까지 왼쪽은 줄곧 장천면 면계를 따른다.
- 갈비재에서 0.8km, 약 10분 거리로 삼군경계봉에서 지맥길은 우틀하여 진행한다.
♤ 효령재/ 906번 지방도로
구미시 장천면과 군위군 효령면을 연결하는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난다. 이 곳에서 명곡천(明谷川)이 발원하여 한천으로 유입되어 구미 낙동강으로 합류된다.
- 도로에 내려서서 좌측으로 약간 올라가면 가드레일 끝나는 지점에 「구미시/ 장천면」 교통표지판과 목장승 3개가 서 있는 곳이 들머리이다.
♤ 구미시 장천면(長川面)
구미시 장천면은 신라 초기에 상주와 더불어 국경 지대에 있어 백제와 분쟁이 잦았던 곳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선산에서 장천을 거쳐 인동, 군위, 안동에 이르는 도로가 발달하였고 임상역(林上驛)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는 이곳 출신인 황사중, 김윤부 등이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매복하였다가 왜적 10여 명을 죽인 곳이기도 하다. 1895년(고종 32) 지방 관제를 개편하면서 마을 앞을 흐르는 내(川)의 길이가 길다하여 장천이라 하였다. 1995년 구미시와 선산군 통합으로 구미시 장천면이 되었다. 구미시 최동단에 있는 지역으로 중앙고속도로가 장천면 동부에서 남북 방향으로 지나며, 대구와 상주 방면을 잇는 국도가 지나는 남서부 지역은 교통이 편리 하고 북동부 지역은 교통이 불편하다. 주로 벼농사가 이루어지며 이 밖에 고추, 마늘, 참외, 수박 등 특용작물 재배가 성하며 한우 사육도 활발하다. 특히 30년 전부터 재배해온 청양 풋고추는 친환경 농법으로 재배하여 소바자에게 인기가 높고, 점질토양에서 재배한 수박은 다른 지역 수박보다 당도가 월등히 높다. 한우는 270여 농가에서 1,700두 가량 사육하고 있는데, 맑은 물과 신선한 초지 공급으로 육질이 뛰어나다.
♤ 다부동전투(多富洞戰鬪)
6·25 전쟁 때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일원에서 벌어진 전투로, 다부동은 다부원(多富院)이라고도 한다. 곧 조선시대 출장 관원을 위한 국영 숙박 시설인 원이 있었으며, 다부원은 칠곡 고평역(高平驛), 선산 연향역(延香驛), 인동 양원역(楊原驛)과 통했다. 다부동은 대구 북쪽으로부터 22㎞, 남북으로 ‘대구-안동’ 국도, ‘대구-상주’ 국도가 지나고 있고, 서로는 ‘왜관-다부’ 지방도로가 이어져 있는 교통의 요지이다. 하지만 다부동은 60여 가구 밖에 지나지 않는 작은 마을이었다. 다부동은 대구 방어에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다부동을 중심으로 북서쪽에는 유학산이 북쪽에는 횡격실(橫隔室)을 이루고 있고, 동쪽에는 지역 내에서 가장 높은 가산(架山, 902m)이 있어 방어에 유리하였다. 반면 6·25전쟁 중 다부동 방어선이 돌파되면 10㎞ 남쪽의 도덕산(道德山, 660m) 일대까지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대구가 적 포병 사격의 사정권에 들어갈 수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6·25 전쟁 중 국군 제1사단이 맡은 ‘328고지(석적면)-유학산(839m)-741고지(가산면 금화리)-902고지(가산, 산성)’를 연결하는 약 20㎞의 방어선은 최후의 보루였다. 국군 제1사단은 사단 좌측에서 ‘왜관-낙정리’(의성군 단밀면, 다부 북방 43㎞)를 방어하고 있던 미 제25사단이 8월 1일 경남 마산으로 이동하게 됨에 따라 이 지역을 맡아 제11·12·15연대 등 3개 연대로 북한군의 남하를 막는 지연전을 펼쳐 왔다. 8월 12일에 주저항선인 낙동강 방어선으로의 철수 명령에 따라 이날 밤 8시 다부동 일대의 주저항선(‘Y선’)으로 철수를 시작하였다. 사령부를 동명 초등학교에 두고 예하 3개 연대에 대해 방어 지대를 부여하였다. 국군 제1사단은 이들 지형의 이점을 활용해 다부동 일대에 설정된 주저항선에서 대구를 공략하려는 북한군 3개 사단을 상대로 낙동강 방어 작전 중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다부동 일원에서는 대구를 놓고 피아(彼我) 간에 유학산 전투, 328고지 전투, 837고지전투, 674고지 전투, 볼링장 전투, 가산산성 전투 등 낙동강 방어선 상 뿐 아니라 6·25 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가운데서 837고지는 대구 사수의 최고 요충지였고, 유학산은 아홉 번, 328고지는 무려 열다섯 번이나 고지의 주인이 바뀔 정도로 피아간에 물러설 수 없는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국군 제1사단은 방어선을 지키기 위해 미 8군 사령부에 병력 증원을 요청하였고, 미 8군 사령부에서는 미 제27연대[마이켈리스 연대]를 신속히 지원하고, 이어서 미 제23연대를 추가 배치했으며, 육군본부도 1개 연대를 추가 배속시켰다. 이렇게 병력 증강을 지원받은 국군 제1사단은 낙동강 방어선 구축 이래 북한군의 ‘8월공세’와 ‘9월공세’를 방어하고 나아가 이를 격파함으로써 위기에 빠진 전황을 타개하였다. 이후 국군 제1사단은 신녕(新寧) 서쪽 지역으로 이동하여 팔공산-가산 전투를 수행한 후 유엔군의 총반격 작전에 가담하였다. 특히 다부동 전투는 55일간이나 계속되었으며, 북한군 2만 4천여 명과 국군 1만여 명이 죽거나 다치는 인명 피해를 냈다. 그 결과 당시 투입된 북한군 3개 사단에 치명적인 패배를 안겨 주어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6·25 전쟁사에서 다부동 일원에서 벌어진 전투는 국군의 위대한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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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진이 100장이 넘어 두개를 작성해 편집하였더니 사진이 사라져서 부득불 두개로 나누어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렇군요.
daum 산행기 편집 기능이 100장 넘으면 다시 올려야 하는 번거로움은 상존하니 불편하기만 합니다.
네이버의 편리함과는 확연히 차이납니다.
이번 장은 팔공산의 주봉들을 만나면서 이어집니다. 비로봉, 동봉, 서봉 등등...
비록 자욱한 안개 속을 헤메셨지만~
한티재에는 비실이부부님께서 기다리셨다는데 가산산성 진행으로 만남은 무산되셨다구요?..
다음 날 가산산성에는 축복이라도 하듯이 청정 하늘이 멋지네요.
다부동 전적기념관 모습도 즐감합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네 방장님!
한티재 도착시간이 정확하게 나오질 못했습니다.
우선 예정에 없던 동봉에 다녀오고,
칼바위를 대부분 리지로 진행하느라 한시간 연착 되었구요.
서두르면 모래재에서 비박하고 오로고개까지 갈 수도 있었지만,
1구간 최종 목표인 효령재는 변경하고싶지 않아서 전체적으로 조금 늦춰졌습니다.^^
2구간은 1구간보다는 쉽게 진행이 될거 같구요.
냉산(태조산)은 다녀오겠지만 불교 신자가 아니라서 도리사는 어렵겠네요.
여유가 있으면 좌베틀산에서 상어굴 염두에 둬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산패에다 낙서질 하는 사람이 팔공지맥에도 있군요.
제발 이런짓좀 하지말고 자기가 제작해서 갔다 걸엇으면 좋겠네요.
부뜰이성님!
그냥 그런 사람도 있구나 하고 넘어가는게 낫습니다.
그거 볼떄마다 화내면 부뜰이성님이 더 손해이니깐요.^^
갈정산이라고도 하고, 어디에는 갈증산이라고도 표기했더군요.
갈정산에 올라선다면 천평과 다부동이 더 잘 보일듯 했습니다.
천평 골짜기는 우리나라 최초의 전차전이 있었던 곳이랍니다.
상주에서 대구로 향하는 주요 길목이었구요.
지금은 구미시 선산읍이지만 예전에 낙동강에 다리가 없었을 때엔 구미보다 대구가 더 가까웠다네요.
낙동강 처녀뱃사공이라는 노래는 이 지역을 배경으로 한 노래랍니다.
사흘 동안 산과의 데이트가 오롯한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걸었던 거리나 시간이야 어디에든 존재하는 현상이지만
퐁라라님이 푹 빠졌을 팔공에서의 그것들은 함부로 논할 수 없는 진국입니다.
팔공마루금의 엑기스를 제대로 맛보신 구간이었네요.
다만 둘째날 오전 날씨가 좋았다면 더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었을 텐데.
그리고 화산산성의 옛모습이 제대로 남아있는 북문과 수구문터를 확인했다면....
화산과 705봉 사이에서 우측으로 빠지면 금방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텐데....
멧돌바위 세대? 원효굴 세대? 글쎄요.
멧돌바위 쪽 산길도 조금만 신경쓰면 멋진 풍광을 선물 받을 수 있고,
멧돌바위 - 산성봉 만물상 코스가 끝나는 지점에서
하늘정원으로 왕복 발품 팔면 원효굴까지 모두 둘러볼 수 있기는 합니다.
아마 계획한 시간과 거리의 제약이 있어서 한쪽 코스는 패스하신 것 같습니다.
지인들의 택배와 마중으로 더 값진 산행이 되고,
야생 염소들과 조우하는 행운도 겹치셨고,
서봉 지나면서부터는 날씨도 구름모자를 벗으며 협조를 했구요.
퐁라라님이 만들어가는 산줄기의 만물상 산행기가
많은 사람들의 좋은 길잡이가 되리라 확신합니다. 그 열정 부럽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범산선배님!
화산산성을 둘러보려 그곳을 다녀온 분의 포스팅을 찾아보긴 했습니다.
꽉짜여진 성벽과 수구문터를 사진으로 보기도 했고요,
하지만 팔공지맥과 연결시켜 다녀오는 방법을 알려주는 포스팅을 발견하질 못했습니다.
화산을 지나며 우측으로 유격장을 관리하는 군부대가 보였습니다.
그 부대 옆 봉우리가 화산마을에서 올라오 화산산성 북문일 수도 있겠단 생각은 했습니다.
아마도 풍력발전기 처음 만나는 곳에 연못을 지나 오르는 봉우리에서 우측으로 빠지는 듯 싶습니다.
화산을 지나며 화산산성을 볼 수 있다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공군부대 돔형레이다의 경치도 사진으로는 다 구경하였습니다.
왼쪽 멧돌바위로 우회하여 울타리를 따라 산성봉 공군부대 후문쪽으로 하늘정원에 가서 배낭을 내려놓고 아래로 원효굴을 다녀올 수는 있지만,,
멧돌바위로 건너가는 울타리 아래에 산사태로 깊게 패여 건너기 위험하고 윤형철조망까지 쳐놓아 거길 건너지 못하고 다시 돌아오는 경우가 많더군요.
저는 부피가 큰 배낭까지 있었으니 가지 않은게 나았습니다.
그래도 덕분에 원효굴과 장군바위 아래 청운대는 구경하였습니다. 오도암까지 내려갔다 오기엔 시간이 빠듯하게 느꼈구요.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