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원이 병을 만든다(Medical Nemesis)》
병원이 병을 만든다
Limits to Medicine, Medical Nemesis : The Expropriation of Health.
이반 일리치 / 박홍규 / 미토 / 1975(2002)→2004 / 320p / 13,000원
의료의 한계, 의료의 복수 : 건강의 착취... 산업의 과잉성장은 전문가가 통제하는 기술과학의 독점으로 나타난다. 이 책은 의료로부터 발생하는 질병이 더욱 복잡한 의료를 발생시키는, 현대의 유행병인 의료를 '반생산성'으로 정의하며, 그러한 전문가에 대한 한계설정을 요구한다. 임상적 병원병, 사회적 병원병, 문화적 병원병이라는 세 가지 차원에서 산업적 서비스 제도의 구조적인 의미를 묻고 서양 문명을 첨예하게 비판한 책이다.
이반 일리치(1926~2002). 오스트리아의 빈生. 로마그레고리안大學 신학/철학, 찰스부르크大學 역사학박사. 1951년 도미. 뉴욕의 아일랜드-푸에르토리코 교구 보좌신부. 1956~1960년 푸에르토리코 가톨릭대학교 부총장. 1969년 교황청과의 마찰로 사제직 포기. 서독 캇셀大學/괴팅엔대學 유럽중세사 강의. 저서『깨달음의 혁명』『학교 없는 사회』『공생공락을 위한 도구』『에너지와 공정성』『그림자 노동』『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과거의 거울에 비추어』등.
박홍규. 영남대 법대. 同대학원 석사. 오사카시립대학 박사과정 수료. 영남대 법대교수. 저서『베토벤 평전 - 갈등의 삶, 초월의 예술』『자유인 루쉰 - 위대한 지식인의 초상』『카프카, 권력과 싸우다』『우리는 사랑하는가 - 에리히 프롬의 생애와 사상』등. 역서『오리엔탈리즘』『감시와 처벌』등.
역자 일러두기 - 박홍규
.
2002년 타계하기 10년 전에 암에 걸린 이반 일리치는 의사의 치료제안을 일을 못하게 한다는 이유로 거부하고, 스스로 아편을 먹으면서 10년을 일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세상을 떠돌며 모든 권위와 제도에 저항하는 삶을 살았다. 청빈한 생활과 더불어 무한한 자유와 평등만이 지배하는 대화를 통해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다. 그의 투병과 죽음은 이 책에서 쓴 그대로를 실천한 것이다.
그는 세상 모든 일에 대해 항상 가장 근본적으로 사색했으며,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했다. 그가 비판한 현실은 바로 발전의 종교를 섬기다가 본래의 자율성을 잃고 타율화된 인간의 세상이다.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말인 iatrogenesis은 의학에서 사용되는 의인병(醫因病)이나 의원병(醫原病)으로 바꿀까 고려했으나, 초기 번역서에서 사용한, 병원이 만드는 병이라는 뜻의 병원병(病院病)이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했다. ☞ 의인성 질환.
저자서문
의료제도는 건강에 중대한 위협이 되어왔다. 전문가의 의료통제가 낳은 파괴적 영향은 이제 유행병이 되기에 이르렀다. 병원병(病院病,iatrogenesis)이란 것이 이 새로운 유행병의 이름이다. 그것은 의사를 뜻하는 그리스어인 iatros와 원인을 뜻하는 genesis란 말을 합한 것이다. 진찰과 치료가 도리어 병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 관계자들이 주목하고 있으며, 건강문제 전문가는 전에 없었던 숙청운동에 직면하고 있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현대의 병원에서 비롯되는 유행병을 저지하기 위해서, 의사가 아닌 일반인이 가능한 한 넓은 시야와 유효한 힘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의료에 관한 비전문가도 혼자 힘으로 의료가 건강관리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는 능력을 획득할 수 있다. 현대의 모든 전문가 중에서 의사야말로 이렇게 긴급히 필요한 작업에 최고수준의 전문가 바보로 훈련되고 있다.
최근 건강관리에 대한 의료의 독점은 한 번도 점검되지 않고 확대되어 왔으며, 우리의 몸에 관한 자유를 침해해 왔다. 사회는 무엇이 질병을 구성하고 있는가, 누가 환자이고 환자일 수 있는가, 환자에 대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배타적인 권리를 의사에게 양도하고 말았다. 사회가 모든 시민에 대해 의료체계로부터 거의 무제한적인 치료를 받도록 관여할 때, 지속적인 자율적 치료라고 하는,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환경적,문화적 조건은 언제라도 파괴될 우려가 있다. 이러한 경향을 역전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의료에 대한 제한은 전문가의 자기규제와는 다른 것이어야만 한다. 건강이라는 것은 개개인이 자신의 내부상태와 환경조건이라는 양자에 투쟁하는 경우의 강도를 나타내기 위한 일상어에 불과하다. 건강수준은 환경이 자율적인 개인의 책임있는 대처능력을 발휘하게 할 때 최고가 될 수 있다.
현대의 의료가 민중의 건강에 가하는 위협은, 교통량과 그 강도가 민중의 기동성에 가하는 위협, 교육과 미디어가 민중의 배움에 가하는 위협, 도시화가 민중의 자기 집을 짓는 능력에 가하는 위협과 유사하다. 어떠한 경우에도 주요한 제도적 노력은 反생산적인 것으로 전환된다. 교통에 있어서 시간소비의 가속화, 전체적으로는 무능력한 전문가 바보가 되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교육, 이는 의료에 대한 병원병의 생산과 지극히 닮은 현상들이다.
사회관계 속에 내재된 병원병은 현재 모든 사회관계에 영향을 준다. 그것은 풍요에 의해 자유가 내부적으로 식민지화한 결과이다. 부유한 국가에서 의료의 식민지화는 혐오스러울 정도로 진척되고 있다. 가난한 국가에서도 급속히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위기적 한계를 넘어 성장한, 전문적이고 의사에 기반을 둔 건강관리제도는 세 가지 이유에서 질병을 만들어 낸다.
1) 그것은 잠재적인 임상적 이익 이상의 임상적 손해를 반드시 낳고,
2) 그것은 심지어 사회를 건강하지 못하게 변화시키는 정치적 조건을 애매하게 만드는 것과 같이 더욱 악화되지 않을 수 없으며,
3) 스스로를 치료하고 그 자신의 환경을 스스로 형성하는 개인의 힘을 신비화하고 착취한다는 것이다.
현대의 의료제도는 이러한 허용될 수 있는 한계를 넘어 성장해왔다. 위생의 방법과 기술을 의료가 독점하는 것은 개인의 성장보다는 산업의 성장을 강화하는 과학적 성과의 정치적 오용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현저한 사례다. 그러한 의료는 병들고 지친 사람들이 회복을 필요로 할 때 찾아야 하는 것은 자신들 뿐이라는 점을 납득시키기 위한 기도에 불과하다. 돈이 많이 들고 위험성이 높은 의료가 효율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현재 광범위하게 논의되고 있는 사실이다.
제1장. 임상적 병원병
1. 현대 의료라는 유행병
과거 3세대에 걸쳐 서양사회를 괴롭혀 온 여러 가지의 질병은 극적으로 변화되어 왔다. 소아마비,디프테리아,결핵은 사라지고 있다. 항생물질의 주사로 폐렴이나 매독도 완치된다. 이러한 변화는 질병을 감소시키는 것과 동일시되고, 의학적 치료가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향상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러한 질병의 변화와 소위 의료의 진보 사이에는 아무런 직접적인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아가 과거 15년 동안 새로운 질병이라고 하는 무서운 현상의 대부분은 병을 앓는 사람들, 또는 병을 앓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의료가 개입한 결과라고도 말할 수 있고, 그 비율은 점차로 높아지고 있다. 그것이 의사가 만드는 병, 즉 병원병(iatrogenesis,病院病)이다.
의료 유토피아를 추구한 지 1세기가 지났으나, 현재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과는 달리, 의료서비스는 실제로 나타나는 평균 예상수명에 변화를 줄 정도로 중요한 역할도 수행하지 못했다. 현대 임상치료의 대부분은 질병치료에서 우연한 것에 불과함에 비해, 의료가 개인 및 집단의 건강에 미치는 피해는 엄청나다. 이러한 사실은 분명한 것으로 충분히 실증되었으나, 또한 충분히 억압되고 은폐되어왔다.
의사가 용하다는 것은 거짓이다. 과거 1세기 사이에 의사들은 사제들이 끼친 정도의 영향 이상으로 유행병에 영향을 주어 온 것은 아니다. 의사나 사제 모두 유행병을 저주했을 뿐이고, 그것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었다. 건강치료의 장래에 관한 논의는 이러한 사실의 인식 없이는 유효하게 행해질 수 없으리라.
예컨대 뉴욕에서의 결핵 사망률이 1812년에는 1만 명당 700명 이상의 비율이었으나, 독일의 세균학자 코흐가 처음으로 결핵균을 분리,배양했던 1882년에는 1만 명당 370명까지로 저하되었다. 최초로 요양소가 설치된 1910년에는 1만 명당 180명까지 저하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항생물질의 사용이 일반화되기 이전에 이미 사망원인으로 제1위에서 제11위로까지 떨어졌고, 사망률은 1만 명당 48명으로 되었다.
콜레라,이질,장티푸스 등도 이와 유사하게 의사의 통제와 무관하게 정점에 이르렀다가 차차 감소해왔다. 그러한 질병은 병원(病原)이 이해되고 특수한 치료법이 발견되기 이전에 독성의 대부분을 상실했고, 따라서 사회적 중요성도 대체로 잃고 말았다. 성홍열,디프테리아,백일해,홍역의 사망률은 1860년부터 1965년까지 15세 이하의 어린이의 경우 거의 90% 정도 감소되어 왔는데, 그것도 항생물질이 보급되어 예방접종이 광범하게 행해지기 이전의 일이다.
이러한 감퇴의 원인으로서는 주택의 개선과 미생물 유기체가 갖는 독성의 감퇴 등을 지적할 수 있으나, 가장 중요한 요인은 영양이 개선된 탓으로 숙주(인간)의 저항력이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低영양 상태라면 의학적 치료가 충분하든 충분하지 않든 간에 사망률은 더욱 증가한다.
이러한 질병이 쇠퇴한 뒤에 나타난 현재의 유행병은 관상동맥의 심장질환, 기관지염, 비만, 고혈압, 폐암, 관절염, 당뇨병, 정신장애 등이다. 아무리 치밀하게 연구해도 우리는 이러한 변화의 원인을 완전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두 가지는 확실하다.
1) 의사의 전문적인 치료행위 때문에 낡은 형태의 사망률,유병률이 감소된 것도 아니고,
2) 새로운 질환으로 고통받아 가면서도 늘어난 평균수명의 연장도 의료행위 탓으로 돌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1세기 이상에 걸쳐 질병의 경향을 분석해 알 수 있는 점은, 환경이야말로 일반적으로 사람의 건강상태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점이다.
낡은 질병의 원인이 쇠퇴함에 따라, 새로운 종류의 영양결핍증상이 가장 급속히 확산된 유행병이 되었다. 옛날에는 치명적이었을 低영양의 수준에서도 인간의 1/3은 생존할 수 있었으나, 보다 부유한 사람들은 식사를 통해 더욱 많은 독물과 돌연변이를 초래하는 원인을 흡수하고 있다.
현대적인 기술 중에는 일반적인 건강에 영향을 주는 것도 있으나 그 비율은 낮다. 의료에 속하지 않는 건강조치들로 물의 처리, 배설물처리, 조산부가 사용하는 비누와 가위, 약간의 항균성 물질과 살충과정 등이 포함될 수 있다.
전체 인구에 대한 의사의 비율, 이용할 수 있는 의료기구와 병원의 침대 수 중의 그 어느 것도 질병구조의 현저한 변화의 원인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악성빈혈이라든가 고혈압을 발견하고 치료한다든가, 수술에 의해 선천성 기형을 정형하는 새로운 기술은 확실한 것이지만, 유병률을 감소시키지는 못한다.
의학적 치료는 소용없다. 사람을 겁주는 의료기술이 평등주의라는 미사여구와 결부되어, 고도의 유효성을 갖는다고 하는 위험한 망상을 만들어 내고 있다. 급상승하는 의료비의 대부분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그 효과가 의심되는 진단과 치료를 위해 소비되고 있다. 이 점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나는 전염성 질병과 비전염성 질병을 구별하고자 한다.
전염성 질병 - 폐렴,임질,매독의 제압에는 화학요법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예방접종은 문명국의 질병인 소아마비를 정복했고, 백신은 백일해와 홍역의 감퇴에 공헌했다. 하지만 다른 전염병의 대부분에 의해서 의료는 그것과 비교할 정도의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다.
비전염성 질병 - 비전염성 질병과의 싸움에서 의료의 유효성에 관해서는 더욱 의문이 남는다. 암환자의 90%를 차지하는 일반적인 암환자의 생존율은 최근 25년간 불변이었다.
의사는 도리어 손해를 끼친다. 불행하게도 의학적 치료는 무익하다. 의료기술이 개입한 결과로 생기는 고통,마비,불구,번민 등은 오늘날에는 교통사고,산업재해,전쟁에 의한 유병률에 필적하고, 의료의 영향을 가장 급속하게 만연되는 현대 유행병의 하나로 만들었다.
임상적 병원병이란 치료,의사 또는 病院이 곧 병원(病原), 곧 병을 발생시키는 인자가 되고 있는 모든 임상적 상태를 포함한다. 이같은 과도한 치료적 부작용을 임상적 병원병이라고 부른다.
약물은 언제나 잠재적으로 독성을 갖는 것이었다. 그리고 약물의 바람직하지 못한 부작용은 약물의 효력 및 광범위한 사용과 더불어 증가되어 왔다. 매일 미국,영국의 성인 증 50~80%는 의사가 처방한 화학물질을 삼키고 있다. 중독되기 쉬운 약도 있고, 인체를 손상시키는 약도 있으며, 유전자 변이를 초래하는 약도 있다.
의사라는 전문가의 무감각,태만,무능력 등은 낡은 형태의 의료적 과오다. 의사가 기능인에서 과학적 전문가로 변모함에 따라, 의료과오는 의사 개인의 이름에 오점을 남기지 않고, 거의 존중받다시피 하는 일이 되었다. 과거에는 도덕적 결함이었던 것이 현재에는 장치의 부족으로 합리화되고 말았다. 복잡하게 기술화된 병원에서 태만은 우연한 인간적 오류, 시스템의 고장으로 미화되고, 무감각은 과학적 냉정함으로 호도되며, 무능은 전문적 장치의 부족으로 합리화되고 있다. 진단과 치료의 비인간화는 의료과오를 윤리적 문제에서 단순한 기술적 문제로 변모시켜왔다.
미국에서 보고된 병원사고의 빈도는 탄광이나 고층 건축공사를 제외한 모든 산업의 사고빈도보다 높다. 의료사고는 미국 어린이들의 중요한 사망원인이다. 입원한 50명의 아이들 중 1명이 특별한 치료를 필요로 하는 사고를 입는다. 대학병원은 다른 병원과 비교해 더욱 빈번한 질병을 발생시킨다. 병원이 병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전형적인 연구병원에 입원한 5명 중 1명은 병원병을 얻으며, 그중 30명에 1명은 사망까지 이른다. 이러한 병례(病例)의 반수는 약물치료에 의한 합병증 때문이지만, 놀라운 것은 10명 중 1명이 진단상의 처리, 곧 검사에 의한 것이란 점이다. 이같은 기록이라면 군대 지휘관은 직위에서 파면될 것이고, 식당은 경찰의 손에 의해 폐쇄될 것이다. 보건산업이 희생자들에게 일어난 피해의 책임을 떠넘기려 하고, 다국적 제약사가 "병원병은 거의 언제나 신경성이다'라고 떠벌리는 것도 다지고 보면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환자들은 보호받지 못한다. 의료기술체계와의 접촉에서 생기는 바람직하지 못한 부작용은 病原을 만드는 의료의 제1차원에 불과하다. 이같은 임상적 병원병 중에는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거나 착취하고자 환자에게 끼치는 손해만이 아니라, 환자가 의료과오를 이유로 제소할 가능성에 대항해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의사의 노력으로부터 생기는 여타의 불법행위도 포함된다.
病原을 만드는 의료의 제2차원에서의 의료는 사람들을 치료적,예방적,산업적 그리고 환경적 의학의 소비자로 삼아 병적인 사회를 강화해 질병의 촉진제가 된다. 제2차원의 병원병은 건강의 착취라 할 수 있는 사회적인 過의료화 현상이라는 증세를 통해 표현된다. 이러한 제2차원의 의료의 영향을 사회적 병원병이라 부른다.
제3의 차원에서는 소위 건강에 관한 전문적 직업이 자기 나름의 자연적인 방법으로 처리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능력을 파괴해 감에 따라, 문화적인 건강 否定의 효과를 차츰 깊게 하는 것이다. 현대의학의 손에 맡겨져 있는 환자는 현대의 악질적인 기술의 손에 잡힌 인류의 삶의 한 보기에 불과하다. 이 문화적 병원병은 위생발전의 궁극적인 반동이고 고뇌,상해,사망에 대한 건강한 반응이 마비된 가운데 존재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기계화된 모델에 근거한 건강관리를 받아들일 때, 죽음 일보 직전의 질병까지 고도로 관리해 생명을 유지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곧 스스로 증강되어 가는 병원병의 악순환을 만들어 내는 경향이 있다.
나는 스스로 강해져 가는 이 제도적인 부정적 피드백의 고리를 고전 그리스어의 동의어에 따라 의료의 네메시스(nemesis)로 부르고자 한다.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는 신의 속성을 얻고자 하는 인간의 교만에 대한 신들의 복수를 상징한다. 현대의 위생상의 교만함이 새로운 의료 네메시스의 병상(病狀)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의료의 네메시스는 의학적 치료에 저항한다. 그것은 일반인 사이에서 자기치료의 의지를 회복해야 역전될 수 있고, 이러한 권리에 대한 법적,정치적,제도적인 인식을 통해 역정시킬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이 의사의 직업적 독점을 제한할 수 있는 것이다.
제2장. 사회적 병원병
2. 생활의 의료화
병원병은 사회적으로도 만들어진다. 의료는 단지 개인에게 직접적인 손해를 주는 것만이 아니라, 사회적 조직체가 전체환경에 주는 영향을 통해 건강을 침식한다. 개인의 건강에 대한 의료적 손해가 사회적,정치적 전달양식에 의해 산출될 때, 나는 그것을 사회적 병원병이라고 부른다. 이 말은 건강관리제도가 더욱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기능하며, 필연적인 것이 된 사회적,경제적 변모에 의해, 건강에 미치는 모든 손해를 가리킨다.
사회적 병원병은 의료의 관료성이 스트레스를 증가시킴에 따라, 불능을 초래하는 의존성을 배가시킴에 따라, 새롭고 괴로운 요구를 낳음에 따라, 불쾌와 통증에 대한 인내의 정도를 저하시킴에 따라, 개인이 고통받을 때에 사람들이 양보할 여지를 저하시킴에 따라. 심지어 자기관리의 권리마저 포기함에 따라 불건강을 낳을 때, 건강관리가 표준화된 항목과 특색이 되었을 때, 모든 고통이 입원되어 가정이 출생,병,죽음에 대해 적합하지 않은 것이 될 때, 사람들이 자기의 신체를 체험하면서 사용하는 언어가 관료적으로 빙빙 둘러서 하는 것이 될 때, 고통,비통,치유가 환자의 역할 밖의 것이 되고 일탈로 규정될 때 융성하기 시작한다.
병원은 의료를 독점한다. 생물의학의 개입강도가 결정적으로 시작될 때, 임상적 병원병은 단순한 오류,사고,실수에서 실천적으로 의료의 악용으로 변질되고, 그것은 시정될 수 없는 것이 된다. 마찬가지로 전문가의 자율성이 타락해 완전한 독점으로 전환되고, 사람들이 환경과 싸우는 힘을 상실했을 때 사회적 병원병은 의료조직의 중요한 생산물이 된다.
교통수단으로 붐비는 도시가 건설되면, 인간의 다리에 대한 평가는 낮아진다. 학교가 학습을 점유하게 되면 독학자의 가치는 낮아진다. 위기상태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병원이 맡게 되면 병원은 사회에 새로운 죽음의 형식을 강요한다. 독점은 보통 시장을 매점하나, 근원적 독점은 사람들이 스스로 행위하고 스스로 만드는 능력을 빼앗아 버린다.
상업상의 독점은 상품의 유통을 제한한다. 그리고 독점이 집요하게 되는 만큼, 비시장적인 사용가치는 마비된다. 근원적 독점은 나아가 자유와 독립을 침범한다. 그것은 환경의 형태를 바꾸고, 사람들에게 스스로 싸우는 힘을 주었던 환경의 여러 특징을 상품으로 바꿀 것을 강요한다.
집약적 교육의 결과 독학자는 고용되지 않고, 집약적 농업은 자작농부를 파괴하며, 경찰의 배치는 지역사회의 자기통제를 좀먹는다. 의료의 유해한 확대도 마찬가지 결과를 가져온다. 곧 상호치료,자기투약을 중죄로까지 만들어 버린다. 사회적 병원병은 전문가 지배를 없애는 정치적 행동에 의해서만 역전될 수 있다.
근원적 독점은 스스로 증식된다. 의원성(醫原性) 의료는 병적인 사회를 증강시킨다. 그것은 장애자를 부적격자로 분류하고, 언제나 병자의 새로운 범주를 길러 낸다. ☞ 나는 병원을 멀리한다. 그렇다고 병원과 담을 쌓는 것은 아니다. 단지 병원이 나를 필요로 할 때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병원을 필요로 할 때만 가는 것이다.
가치와 무관한 치료인가? 의료는 어떤 사람의 호소에 질병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호소도 하지 않는 타인을 병자라고 선언하거나, 또 다른 타인이 호소하는 고통,불구,사망조차도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는 권위까지도 갖는다. 법관은 무엇이 합법적이고 누가 유죄인가를 결정한다. 사제는 무엇이 성스러운 것이고 누가 금기를 부수는가를 선언한다. 의사는 무엇이 증상이고 누가 아픈가를 결정한다. 의료는 모든 십자군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진단기준을 만들 때 새로운 아웃사이더의 무리도 만들어 낸다.
오늘날에는 의료가 전문가에 의해 행해지고, 그들은 관료제도란 수단을 통해 다수의 사람들을 통제한다. 미국에서 의학이라고 하는 전문직은 제1차 대전 직전에 의과대학(대학원과정)의 개혁으로 인해 엄청난 권위를 획득했다. 의학전문직이란 대학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이 획득한 계급구조를 통제하는 힘이 표현된 것이다. 노동조합과는 달리 이러한 전문직의 자율성은 싸움에서의 승리보다도 신뢰의 승인에 관련된다. 의료와 도덕의 분리로 인해, 의료의 범주는 법이나 종교의 그것과는 달리 도덕적 평가로부터 면제된 과학적 기초 설정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나르시즘적인 과학주의의 기념비로 바뀐 병원은 그 초석이 놓여진 때에는 자못 현대적인 것이었으나, 이후에는 자주 시대에 뒤떨어진 전문가의 편견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되었다. 의사의 기술적인 사업은 가치와 무관한 힘을 요구한다. 이렇게 해서 사회적 병원병의 문제점을 회피하는 것은 분명히 쉬운 일이다. 가치와 무관한 치료와 관리라고 하는 주장은 분명히 사악한 난센스이고, 무책임한 의료를 보호해온 금기는 바야흐로 약화되어가기 시작했다.
예산이 의료화된다. 1950년 이전 미국의 경우 연간 수입 중 한 달 수입 이하를 의료에 지출했다. 1970년대 중반에는 노동자 표준수입의 5~7주 분이 의료서비스를 위해 소비되고 있다. 그것은 1962년에는 GNP의 4.5%였으나 1975년에는 GNP의 8.4%로 상승했다. 과거 20년간 미국의 물가지수는 74% 상승했으나, 의료관리 경비는 330%나 급상승했다.
이러한 경향이 의사를 부자로 만들어 왔지만, 프랑스혁명 때까지 의사는 장인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즐겁게 죽는 변호사 하나 없고, 즐겁게 사는 의사 하나 없다"고 하는 속담은 유럽의 어느 나라에나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의사는 경제적으로 상류층에 속하고 자본주의 세계에서 최상이다. 증가의 상당부분은 1950년대부터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기 시작해 간호관리학석사,병원행정학박사 등 자격을 갖춘 의료관계 사무 전문가들 때문이기도 하다.
병원은 고객이 실제로 욕구하거나 희망하는, 또는 직접 지불하고 싶은 것보다 값비싼 생산물을 제공한다. 가격이 비싼 질병치료를 위한 보험은 의료공급자에게 더욱 많은 수단의 통제를 부여하는 자기 강화적 과정이다. 모든 국가의 국가예산 의료화는 계급구조 중의 착취와 관련된다.
돈의 부정적인 기능은 팔 수 없는 상품과 서비스의 평가절하를 표시하는 것이다. 복지가 징발될 때 가격표시가 높아질수록 개인적 건강을 착취하는 정치적 위신은 더욱 커진다.
약제가 침략한다. 오늘날 약물은 더욱 풍부해지고 더욱 강력해지며 더욱 위험해지고 있다. 의사와 상의하라는 경고는 구매자로 하여금 자신에게 경계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게 한다. 의료전문가들의 자기통제는 결코 기능한 적이 없다. 미국에서는 1950년대에 감독기관에 의한 약품규제는 거의 쇠퇴했고, 자기규제는 이름 뿐인 것으로 변했다. 미국에서는 제약산업의 규모가 20세기에 1백 배나 성장했다.
모든 나라에서 의사는 두 종류의 중독자를 치료한다. 하나는 의사의 처방에 따른 중독자들, 다른 하나는 그 결과로부터 고통받는 자들이다. 사회가 풍요로워질수록 이 두 종류의 무리에 속하는 사람들의 비율은 상승한다. 그러므로 처방된 약에 의한 중독 때문에 제약산업을 비난하는 것은, 마피아를 불법적인 마약 사용 때문에 비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적절한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환상하는 것이 무엇이든 구입하고자 노력하는 것을 배워 왔다. 곧 인간은 교통과 교육이 없으면 어디에도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환경은 인간이 스스로 걷고 배우며 자신의 신체를 통제함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느끼지 못하게 했다. 어떤 이유에서든 간에 어떤 약을 먹는다고 하면, 약을 먹는 것으로 인해 자기에 대한 통제를 주장하고 타인으로부터 간섭받지 않고 자신이 자기의 신체에 간섭할 기회를 잃고 만다. 약의 침략이, 자기 또는 타인에 의한 투약에로 인간을 이끌어, 아직까지는 스스로 돌볼 수 있었을 자신의 신체와 투쟁하는 능력을 상실케 한다는 것이다.
진단은 제국주의다. 의료화된 사회에서는 의사의 영향력이 사람들을 구분하는 분류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자동차 운전이 가능한 자, 일을 해서는 안 되는 자, 감금되어야 하는 자, 군인이 될 수 있는 자, 국경을 넘어도 되는 자, 요리해도 되는 자, 매춘해도 되는 자, 미국부통령에 출마할 수 없는 자, 사망자, 범죄를 범할 가능성이 있는 자, 범죄를 범할 가능성이 있는 자 등이다.
1766년 11월 5일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명령을 내려 궁정 의사들에게 정확한 증언을 보장하도록 하기 위해 피의자가 고문에 이길 수 있는가 어떤가를 증명할 것을 요청했다. 이것은 명령에 의해 의학적 증명서를 설정한 최초의 법이었다. 이후 형식을 충족시킨 보고서를 작성하고 진술서에 서명하는 것이 점점 다수의 의사로 확대되었다.
옛날에는 불가피하게 사람들이 자율성을 어느 정도만 치료자에게 위임해왔다. 새로운 것은 그 과도한 의료화이다. 일생을 통한 의학적 감시가 더해졌고, 그것은 인생을 위기의 연속으로 변화시키며, 언제나 특별한 보호를 요구한다. 모든 연령층은 자신들의 건강을 규정당한다. 현대의 대성당인 병원은 건강광신자의 신성한 환경으로 군림하고 있다.
광범위한 병적 상태에서는 치료를 가장 적게 받은 자가 제일 먼저 회복되기 쉽다. 히포크라테스(BC.460~377)는 "병자에게는 최소가 최선이다"라고 말했다. 학식과 양심이 있는 의사가 권하는 최선의 것이다. 의료의 신비화에 압도되어 무능력하게 되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그 사실을 벌써 오래 전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예전에 노년은 결코 질병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는데, 최근에는 의사의 지시 하에 놓여지게 되고 말았다. 노인치료에 대한 요구는 증가하고 있으나, 그것은 생존하는 노인이 더욱 많다는 이유에서보다는, 노년은 치료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노인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수명의 최고한도는 변하지 않았으나 평균수명은 변했다. 의료는 노화와 관련된 질환에 대해 더 큰 기여를 할 수도 없고, 노화 그 자체의 과정과 경험에 대해서는 더욱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미국 의료예산의 28%가 인구의 10%인 65세를 넘는 사람들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 더욱 많은 노인들이 전문가의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함에 따라, 스스로 독립해 늙을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시설 속으로 도피하고자 한다.
전문가의 서비스에 의존하는 노인이 증가함에 따라, 노인을 위한 특별한 시설에 가두어지는 노인의 수도 증가된다. 반면 이웃 사람은 짐이 되는 사람들에게 더욱 냉담하게 된다. 엄청난 부자와 확실한 독립성을 가진 인간만이 의료화되지 않은 자기인생의 끝을 선택할 수 있다.
유아사망률은 분명히 저하되었다. 선진국에서의 기대수명은 18세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35세에서 70세까지로 연장되었다. 이는 주로 유아사망률이 저하된 덕이다. 예컨대 잉글랜드와 웨일즈에서 1천 명의 출산아에 대한 사망유아 수는 1840년에 154명이었으나 1960년에는 22명으로 저하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구출되어진 생명 중의 하나라도 의사의 치료적 개입 덕택이라고 보는 것은 전적으로 부정확하며, 빈곤한 국가에 있어서 유아사망률이 높음을 의사가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도 망상이다.
예방이라는 낙인을 찍는다. 의료는 예방을 시장화하기 시작했다. 병적 상태라는 개념은 예후(豫後)의 위험성에까지 확대되었다. 질병치료와 함께 건강관리가 상품화되었다. 건강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구입하는 것이 되었다. 사람들은 건강진단에서 이웃에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한다. 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검사받는 병자가 되고 만다. 이리하여 예방의 의료화는 사회적 병원병의 또 다른 중요한 증상이 된다. 그것은 장래에 대한 개인의 책임을 대리인에 의한 관리로 변화시키는 경향을 갖는다.
의사의 진단은 환자에게는 일시적 또는 영구적인 역할을 결정할 수 있다. 수의사가 소의 전염병을 진단해도 그것은 소의 행동에까지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의사가 인간을 진단하면 환자의 행동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의사의 진단은 환자와 가족의 명예까지도 죽을 때까지 손상시킨다. 개인에게 영원한 낙인을 찍는다. 심지어 상태가 좋더라도 전문가의 의심은 낙인을 합법적인 것으로 만든다.
의사는 첫 진단으로 환자가 어떤 질병에 걸려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더라도, 안전장치(fail safe)의 원칙에 의해 환자에게 질병이 없다고 말하기보다는 언제나 어떤 질병이 있다고 말하는 쪽으로 행동한다. 의학적 결정의 규칙이 의사를 압박해 건강하다기보다는 질병이 있다고 진단하는 것으로 안전함을 추구하게 한다.
이같은 왜곡의 고전적 실례는 1934년에 행해진 실험에서 나타났다. 뉴욕시의 공립하교 1천 명의 11세 아동에 대한 조사에서 61%가 편도선을 제고하도록 요구되었다. 나머지 39%는 다시 의사그룹의 진단을 받았는데, 그중 45%가 편도선 절제를 받아야 하고 나머지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필요없다고 했던 아동이 다른 의사그룹에 의해 재진단을 받게 되어, 남은 아동의 46%가 편도선 절제를 권고받았다. 또 다시 필요없다고 밝혀진 아동이 제3회의 진단을 받아서 거의 같은 비율의 아동이 편도선 절제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 결과 3회의 진찰 후 편도선 절제를 받지 않아도 되는 아동은 단지 65명에 불과했다. 그들이 다시금 다음 진단을 받지 않은 것은 오직 의사의 손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이 테스트는 무료진료소에서 행해졌기 때문에 재정적 고려가 왜곡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질병 쪽으로 기우는 진단의 왜곡은 자주 오진과 연결된다. 예컨대 영국의 한 대학병원에서 심장마비라는 진단으로 사망한 환자의 반수 이상의 사인이 상이한 것이었음이 부검에 의해 나타났다. 동일한 흉부X선 사진들을 동일한 전문가 집단에게 다른 날 보여 주었더니 그중 20%의 진단이 바뀐 일도 있다. 병원의 간단한 검사라도 같은 샘플을 두 개의 검사실에서 검사할 때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경우가 1/4 정도나 된다. 기계에 의존하더라도 마찬가지다. 83개의 골반수술을 권유받은 증세 중 병리소견에 의하면, 인간과 기계 모두가 옳았던 것이 22개, 그리고 37개의 예는 컴퓨터가 옳았고 의사의 진단은 틀렸으며, 11개의 예에서는 의사가 컴퓨터가 틀렸음을 입증했고, 10개의 예에서는 의사도,기계도 모두 틀렸다.
대체로 검사에 의해 치료의 선택이 결정된다. 불행하게도 검사가 점점 복잡해지고 그 수가 증가하면, 검사결과는 환자를 반드시 돕는 것이 아니라, 환자가 살아남을 수 있는 개입의 형식을 선택하는 지표 밖에 되지 않는다. 가장 나쁜 것은, 해를 입든 입지 않던 간에, 환자가 복잡한 진단을 통해 이번에는 불쾌하고 고통스러우며, 불구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는 고가의 치료를 받아야 하는 높은 위험과 마주치게 된다는 것이다. 의사들이 자기가 직접 다른 의사에게 치료를 받아야 할 일에는 보통사람들보다 더 꾸물거리고, 몸의 상태가 더욱 나빠지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커다란 인구집단에 대해 조기진단을 위한 검사를 일상적으로 행하는 것에 의해, 의학자는 치료설비에 적합하거나 연구목적에 가장 유용한 환자를 선택하는 기반을 확대할 수 있다. 환자의 고통을 줄이거나 높이거나 상관할 바가 아니다. 이같은 과정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기계이고, 자주 수리공장에 가지 않으면 오래 살지 못한다고 하는 신앙을 강요받으며, 의료조직체를 위한 시장조사와 판매활동의 비용을 언제나 지불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도록 압력까지 받는다.
진단은 언제나 스트레스를 부과하고, 불능을 정의하며, 비활동을 부과하고, 불치와 불확실과 미래의 의학발견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그리고 자기규정의 자율성을 상실하게 한다. 또한 진단은 사람을 특별한 역할 속에 고립시키고, 정상적인 자나 건강한 자로부터 분리시켜 전문가의 권위에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최후에는 통계적 인간을 생물학적으로 유일한 인간과 등치시킴에 의해 탐욕스런 요구가 창조된다. 개인은 전체의 요구에 종속되고, 예방조치는 강제적이 되며, 환자는 진단에 복종해야 한다고 의사가 논할 때, 환자가 치료에 대해 동의를 유보하는 권리는 사라지고 만다.
종말은 의식화된다. 위기의 의식화는 병적인 사회에 일반적으로 보이는 특징이다. 죽음을 통제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자는 보통사람이 아니다. 전상자를 치료하는 우선순위를 선택할 수 있는 지휘자로, 그의 살인은 정책적으로 은폐되고 만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의 모든 행위가 위기의 분위기 속에서 나타난다는 점이다.
병원에서의 죽음은 이제 풍토병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의료없는 죽음이라고 하는 현대의 공포 때문에, 개인의 독자적인 자기확신을 잃고 말았다. 그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때가 왔다는 것을 인식하고 자신의 손으로 죽음을 맞는다는 자율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환자는 자기에게 스스로 죽는 능력(그것은 건강의 마지막 표출이다)이 있다고 하는 신념을 상실했고, 전문가에 의해 살해되는 권리를 중요한 문제로 만들어 왔다.
가정에 머물게 되면 환자는 추방된 기분이나 고독감을 느끼지 않는다. 입원생활에 따르는 모욕으로 고통받는 것도 가정에 머무는 경우에는 없다. 병원의 기술에 의해 도움을 받기보다는 도리어 금방 죽는 사람이 많다.
보건시스템은 수요의 한계가 없는 곳에 생산을 집중한다. 즉 죽음에 대한 방어라고 하는 점에 생산물이 향해진다. 세금에 의한 기금 중에 최종단계의 환자를 연명시키기 위한 기술에 할당된 비율은 더욱 상승하고 있다. 병원에서 기계적 치료의 도움을 받은 자들의 높은 사망률은 보통 공포 탓이다.
의료는 黑魔術이다. 현대 의사는 치료나 진통(鎭痛)을 행하는 사람이라기보다도 도리어 병원(病原)이 되고 있다. 산업사회에서는 세속적 제도가 중요한 신화 만들기의 의식을 진행하고 있다. 교육,교통,매스커뮤니케이션 등 각각의 제식(祭式)이 별도의 이름으로 같은 사회적 신화를 만들어 간다.
신비적 지식의 세계관과 그 제식(祭式)에는 여섯 가지의 특징이 있다.
1) 그것은 세계가 본질적으로 빈약하게 조직되어 있다고 하는 이유에서,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불만을 갖는 사람들의 운동에 의해 행해진다.
2) 지지자들은 세계로부터 구원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던가,
3) 적어도 선택된 자에게는 그것이 가능하고,
4) 현 세대가 지나기 전에 그것은 초래된다고 믿고 있다.
5) 나아가 신비적 지식인들은 구원이 기술적 행동에 의한 것이고,
6) 행동은 그것에 대한 특별한 공식을 독점하고 있는 자격자에 의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같은 종교적 신념의 모든 것이 기술적 의료의 사회적 조직체에 저류(底流)로 존재하며, 그것은 또한 19세기의 진보라는 이상을 의식화한 제사다.
지금 우리가 의사라 부르는 말에 포괄되어 있는 뜻의 범위를 대부분 포함하는 공통의 이름은 14세기 이전의 유럽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스에서는 노예였고, 로마공화국에서는 전문적 치료자란 창피스러운 일에 종사하는 작자로 간주되었다. 줄리어스 시저가 기원전 46년에 아스클레피우스의 사도들에게 최초의 시민권을 부여하기까지는 그리스의 의사, 치료를 하는 승려에게는 아무런 특권도 주어지지 않았다. 아랍인들은 의사를 존경했다. 유대인은 건강치료를 빈민굴 사람들에게 맡기거나 떳떳하지 못한 마음으로 아랍인 의사를 데려왔다. 건강치료를 독점한 최초의 직업은 20세기 말의 의사라고 하는 직업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어떤 암 치료 분야에 더욱 많은 돈을 쏟는다면 생존율을 향상시킨다는 증명이 낮아질수록 더욱 많은 돈이 그 의료분야에 쏟아지게 된다. 미국에서 행해진 편도선 제거의 90% 이상은 기술적으로 불필요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아동의 20~30%는 아직 이 수술을 받고 있는데, 이 경우 귀중한 면역장치가 상실되었다. 곧 환자 자신의 치유노력을 지탱해주는 전통적인 치료의 무해한 백마술은 의사의 흑마술로 변하고 말았다.
사회적 병원병은 부정적 위약효과, 즉 노세보(nocebo) 효과로서 상당한 정도까지 설명 가능하다. 생의학적 개입의 비기술적인 부작용은 압도적으로 건강에 커다란 장애를 미친다. 노세보 효과는 플라시보 효과와 마찬가지로 의사의 행위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의료처치가 흑마술이 되는 것은, 그것이 환자에게 스스로 치유하는 힘을 부여하는 대신에, 병자를 불구자로 만들어 자신에게 가해지는 치료를 훔쳐보는 자로 신비화시키는 때이다. 의료처치가 병든 종교로 변하는 것은, 그것이 병자의 모든 기대를 과학적 기능에 집중시키고, 병자가 자신의 곤경에 관한 해석을 구하거나, 고통을 당해본 사람들의 존경할 만한 모범을 발견하는 것을 잊게 하는 의식으로서 나타날 때이다. 환자를 전문적인 의료환경 속에 격리시키고 말았을 때에 도덕적 퇴폐에 의해 질병을 증가시킨다.
과거 의사들은 자신들의 기술적 한계를 알고 있다는 이유에서 돌팔이 의사나 승려로부터 자신들을 구별했다. 오늘날 의료조직은 다시금 기적을 낳는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의학은 病原이 불확실하고 예후가 좋지 않으며, 치료가 실험적 성격을 갖는 경우에도 환자를 요구한다. 현대의 의사가 요구하는 건강관리에 대한 근본적인 독점은 이제 의사들에게 사제의 기능 및 왕의 기능을 취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환자가 늘어난다. 의료의 권위를 반영하는, 권한을 부여받은 직업의 증가는 병자의 역할에 대해 전적으로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 내었다. 각각의 문명은 자신의 고유한 질환을 정의한다. 모든 사회에는 최소한의 공통적 특징이 있다고 하면서 비정상이라고 하는 특수한 질병의 형태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위험한 시도다. 현대 병자의 역할부여는 유례없는 것이다. 현대의 의사가 환자에게 병자의 지위를 할당할 때, 어떤 점에서 그들은 마법사와 닮은 행위를 한다.
20세기 초에는 일정한 한계를 지키며 비정상자를 어르고 달래 주는 것이 산업사회의 응집력을 강화했다. 그러나 임계점을 넘게 되면, 진단을 통해 무제한의 요구에 대한 사회적 억제는 스스로의 기초를 파괴하고 만다. 이제 건강하다고 증명되기까지 사람들은 질병에 걸렸다고 추정된다. 압도적인 치료사회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은 치료자가 될 수 있고, 타인을 자신의 환자로 삼을 수도 있다.
의료의 권위는 이제 관리된 건강치료,조기발견,예고치료, 나아가 치유불능자에 대한 치료로 확대되어 간다. 이전에 현대의료는 극히 제한된 시장을 통제할 뿐이었으나, 현재에 이르러 이 시장은 모든 경계를 잃고 말았다. 병을 앓지 않는 사람들은 장래의 건강을 위해 전문적 치료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 결과 보편적 의료화를 요구하는 병적 사회와 보편적인 병적 상태를 증명하는 의료적 시설이 생겨났다.
병적 사회에서는 정의되고 진단된 비건강 쪽이 다른 어떠한 부정적 낙인 또는 전혀 낙인이 없는 경우보다 훨씬 더 바람직하다고 하는 신앙이 유력하다. 산업화 사회의 의료화는 그 제국주의적 성격을 궁극적으로 성취하고 있다.
제3장. 문화적 병원병
의료화된 건강치료가 성행하면 건강한 생활에 장해를 초래한다. 장해의 세 가지 모습은 다음과 같다.
1) 임상적 병원병 - 유기체의 투쟁능력이 타율적인 관리로 변해버린 결과다.
2) 사회적 병원병 - 환경이 개인,가족,이웃에게서 스스로의 내부상태와 상황에 대한 통제력을 부여한 조건을 빼앗은 결과다.
3) 문화적 병원병 - 의료에 의한 건강부정의 차원이다. 이는 의료기업이 현실에서 인내할 수 있는 인간의지를 서서히 약화시키는 데서 시작된다.
전문적으로 조직된 의료는 산업확대를 모든 고통에 대한 투쟁으로 선전하는 거만한 윤리적 시도로 기능한다. 그 때문에 개인이 현실에 직면해 자기의 가치를 표현하고, 대체로 치유되지 않는 고통,상해,노쇠,사망을 불가피하게 받아들이는 능력이 훼손되고 있다. 건강하다는 것은 단지 현실과의 싸움에서 성공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성공을 누리는 것도 의미한다. 곧 그것은 기쁨과 아픔 속에서 생명을 느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인간의 건강은 본능적 행위에 솔직함을 부가한다. 모든 전통적 문화는 각 개인이 고통을 참을 수 있고, 질병이나 부상을 이해할 수 있게 하고, 죽음의 그림자를 의미있게 하는 방법을 갖추게 하는 능력으로부터 그 위생적 기능을 끌어낸다.
치유한다는 것의 대부분은 사람들이 치료받는 이들을 위로하고, 배려와 안락을 부여하는 전통적인 방법이며, 병자치료의 유전적 특성,역사,환경 그리고 경쟁하는 이웃들의 집단들로 대표되는 특유한 도전에 대해 존속 가능한 규약을 부여하는 문화만이 살아 남는다. 현대의 세계적인 의료기업에 의해 고취되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이와 같은 기능에 거역하는 것이다. 이는 개인적인 도덕적 행위를 맥 빠지게 만든다. 그러므로 도시에서 의료문명의 목표는, 식민지화의 진행과정에서 직면하는 개별 문화의 건강계획과 대립한다.
3. 고통의 말살
범세계적인 의학문명이 전통문화를 식민지화하면 고통의 체험도 변모된다. 의학문명은 고통을 기술의 문제로 변모시켰고, 고통의 고유한 개인적 의미를 빼앗는 경향이 있다. 전통문화에서 고통,상해,죽음의 직면은 역경에 대한 개인이 대응할 방법을 구하는 도전이라고 해석된다. 의학문명은 그것들을 개인의 경제에 대한 요구로 변모시켜 실존의 바깥에서 관리되거나 생산될 수 있는 문제로 변모시키고 말았다.
문화는 의미의 체계이고, 문명은 기술의 체계이다. 문화는 고통을 의미있는 체계 속에 통합시켜 그것을 참아 낼 수 있도록 만들고 있으나, 문명은 고통을 無로 만들기 위해 주관적 또는 상호 주관적 맥락으로부터 그것을 단절시키고 만다. 문화는 고통의 필연성을 해석함에 따라 참을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곧 고칠 수 있다고 인정되는 고통만이 참기 어려운 것이다.
전통적 문화는 신체적,정신적 고통에 휩싸여도 인간이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지도록 가르쳤다. 고통이란 언제나 그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그것에 대한 자신의 의식적 반응에 의해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자기의 신체에 관한 주관적 현실의 결여될 수 없는 일부라고 생각되어졌다. 사람들은 자신의 편두통,장애,슬픔을 어떻게 취급해 스스로 고쳐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고통은 이제 자연스러운 것 또는 형이상학적인 해악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적인 저주이다. 대중이 고통으로 타격받고 있을 때, 산업시스템은 대중에게 의료적인 진통제들을 부여한다. 의사가 고통을 조절하는 방법은 요구되지만,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이 자기체험에 책임을 지는 것에 도움이 되는 연구는 요구되지 않는다.
고통을 객관화하는 능력의 진보는 철저한 의사교육의 결과 중 하나다. 훈련에 의해 의사는 외부인들에 의해 관리될 수 있는 측면에만 초점을 두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관심은 전체적인 존재의 관리에 한정된다. 그리고 그 존재는 단지 조작적 입증만으로 가능한 문제이다. 고통의 의료화는 곧 기술에 의한 처리만을 비대화시켜 다른 모든 것은 쇠약하게 해 왔다.
인간은 고통에 괴로워하는 능력만이 아니라 그것을 다루는 기술과 함께 진화해왔다. 석기시대 중기에 양귀비가 재배되었고, 그것은 거의 곡물재배에 앞선 것이었다. 마사지,침술,침통향은 역사의 여명기부터 알려졌다. 고통에 대한 종교적,신화적인 논리적 근거는 모든 문화에서 나타난다. 회교도의 경우 그것은 키스멧(kismet, 선의의 운명)이고, 힌두교도의 경우 카르마(karma, 전생으로부터의 업)이며, 기독교도의 경우 죄를 씻기 위한 정화다. 요컨대 문화는 고통을 맞이할 때의 행동이 모범이 될 수 있는 본보기를 언제나 부여해왔다. 그것이 석가모니,성인,용사,희생자였다. 그러한 가장(假裝) 속에서 고통을 참는다고 하는 의무는, 그렇지 않으면 모든 감각이 거기 쏠리게 했을 주의를 분산시키고, 수난자가 고통에 대해 위엄을 갖고 참도록 촉구한다.
반면 고통의 의료화는 이러한 양식 중의 단 하나, 곧 기술에 의한 처리만을 비대화시켜 다른 모든 것은 쇠약하게 해 왔다. 특히 그것은 참는 기술이야말로 고통을 취급할 때 가장 효과적이고 보편적으로 수용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이해하기 힘든 것 또는 충격적인 것으로 변환시켜 왔다. 의료화는 모든 문화로부터 고통을 취급하기 위한 프로그램의 통일성을 빼앗고 있다.
미국의 시인,소설가,수필가,의학자 올리버 웬델 홈즈(1809~1894)와 같이 고통에 대해서는 약품보다 자연 쪽이 좋은 치료법을 부여한다는 것을 알고 있던 선량한 의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동명의 연방대법원판사 올리버 웬델 홈즈(1841~1935)는 그의 아들이다.
"아편은 창조주께서 스스로 처방하신 것처럼 보이다... 고통이 있는 곳에도 반드시 위로가 있다고 예언하는 듯 옥수수 밭에서 자라나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우리 의사들의 기술로 발견하지 못한 몇 가지 특효약이 있다... 포도주는 식품이고 마취의 기적을 만들어 내는 증기이다... 나음 다음과 같이 확신한다. 곧 만일 현재 사용되고 있는 모든 의약품이 바다 밑에 가라앉는다고 한다면 바다의 고기에게는 불행한 일이겠으나 인류에게는 더없이 좋은 일이라고." - 올리버 웬델 홈즈(1809~1894). 의학자.
현대 의료종사자들의 제1의 방향설정은 치료이지 치유가 아니다. 그리스인들은 스스로의 역사 속에서 고통을 느끼지 않고서 행복을 누린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고통이란 혼의 진화를 경험하는 것이었다. 반면 유대인들에게 고통은 언제나 저주였다. 고통이 바람직한 경험이라는 시사는 기독교 경전에도 탈무드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신약에서는 고통이 죄와 밀접히 관계된 것으로 생각된다.
개인문제로 이해하고 인내해야 하는 것으로서의 고통에 반대하는 캠페인은 데카르트가 육체와 영혼을 분리했을 때에야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신체의 이미지를 기하학,기계,시계제조,기술자에 의해 수리될 수 있는 기계로 구축했다. 신체는 영혼에 의해 소유되고 지배되는 장치가 되었으나, 신체와 영혼 사이의 거리는 거의 무한이라고 생각되었다. 살아 있는 신체의 경험은, 영혼이 관찰할 수 있는 메커니즘으로 저하되어졌다.
1853년 고통 말살자(pain-killer)라고 하는 상표를 붙인 최초의 진통제가 위스콘신의 라 크로스에 나타났다. 문명의 진보는 고뇌의 총체를 감소시키는 것과 동의어가 되고 말았다.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더욱 저하되면 인생의 소박한 기쁨과 즐거움을 경험하는 능력도 줄어든다. 마취된 사회에서 사람들에게 살아 있다고 하는 감각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더욱 강렬한 자극이 필요하게 된다. 광범위하게 미치는 마취는 그것들이 어느 정도 파괴적인 것이라고 해도 소리,속도,폭력에 의한 흥분에의 요구를 높이고 있다.
위엄이 있는 고통에 대신되는 새로운 경험은, 인공적으로 도출된 불투명한 비개인화된 유지이다. 고통을 없애는 것으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점점 썩어져 가는 자아를 무감각하게 바라보는 사람들로 변화하고 있다.
4. 질병의 창조와 제거
프랑스혁명은 두 가지 신화를 만들어 냈다. 하나는 의사가 사제를 대신하게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적 변화와 함께 사회가 본래의 건강한 상태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질병은 공공의 사건이 되었다. 진보라는 이름 아래 질병은 이제 병든 사람만의 관심대상이 아니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천문학에 부여한 우아함을 의료에도 부여하고 싶다고 하는 희망은 갈릴레오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데카르트는 이 목적의 실행을 위해 좌표를 설정했다. 그의 교묘한 표현에 의해 인체는 시계의 움직임이 되었고, 영혼과 신체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환자의 호소와 의사의 눈 사이에 새로운 거리를 설정했다.
이러한 기계적인 구조의 범위 내에서 고통은 위험신호가 되었고, 질병은 기계적 고장이 되었으며, 질병의 분류가 가능하게 되었다. 광물과 식물이 분류되는 것과 같이 질병은 의학분류자에 의해 분리되어 각각의 범주를 부여받게 되었다.
통계를 사용한 임상테스트는 1721년 미국에서 행해졌고, 1722년에 런던에서 출판되었다. 그것은 천연두가 메사추세츠州를 위협했고, 종두를 맞은 인간은 그것의 엄습으로부터 지켜진다고 하는 분명한 자료를 제공했다. 이 테스트는 카튼 매터 박사에 의해 행해졌다. 그는 종두에 의한 천연두 예방활동보다는 살렘 마녀재판에서의 열렬한 심문 때문에 더 유명하다.
5. 죽음에 대한 죽음
죽음은 상품이 되었다. 모든 사회에는 죽음에 관한 어떤 지배적인 이미지가 있고, 그것이 건강에 관한 일반적인 관념을 결정한다. 어떤 사회의 죽음에 관한 이미지는 그 사회구성원의 독립성,상호관계,자립심,활동성의 수준을 보여 준다. 죽음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삶의 본질적인 부분이며 자율적인 것이 되었다. 죽음은 자연현상이 되었다. 자연사, 곧 건강한 노년기에 찾아온 죽음의 이미지는 극히 최근의 전형이다.
교황 우르반8세(1568~1664)는 후계자에 의해 독살되었으나, 무덤이 파헤쳐져 성직매매자라고 엄격한 판결을 받아 오른쪽 손을 절단당하고 티베르江에 버려졌다. 당시에는 시체도 살아 있는 인간과 마찬가지의 취급을 받았다. 법이 시체의 지위를 인정했다. 곧 죽은 사람도 또한 소송을 제기했고, 산 사람에 의해 제소당할 수도 있었으며, 죽은 사람에 대한 형사소송도 일반적으로 행해졌다.
르네상스 시대 대학의 교실에서는 시체가 교재로서 최초로 나타났다. 처음으로 허가된 공적 해부는 1373년 몽뻬리에에서 행해졌으나, 이 새로운 학문적 활동은 추잡한 것으로 선언되고, 이후 수년 동안 행해지지 않았다.
은퇴라는 것을 없애 사회적 죽음을 제거하는 여유를 누리게 된 부르주아의 번성과 함께 죽음에서의 평등은 끝났다. 곧 여유가 있는 자는 죽음을 멀리하기 위해 돈을 지불하기 시작했다.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이야말로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이 의사의 새로운 일이라 말한 최초의 사람이다. 베이컨은 의학의 직무를 3가지로 나누었다. 1)건강유지, 2)질병치료, 3)생명연장이다. 특히 생명연장은 새로운 역할이며, 결함은 있으나 세 가지 중 가장 고귀한 일이라고 격찬했다.
자연사는 이제 사전에도 실리게 되었다. 독일의 한 백과사전의 1909년 판에서는 그것을 대조적인 방법으로 정의하고 있다. "비정상적 죽음은 자연사와 반대된다. 왜냐하면 비정상적 죽음은 질병,폭력, 기능적,만성적 장애로부터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사는 그것에 선행하는 질병도 없고, 명확하게 특이한 원인 없이 발생한다."
죽음에 대한 우리의 새로운 이미지는 산업적 에토스에 정확하게 부합한다. 훌륭한 죽음은 결정적으로 의료치료의 표준적인 소비자의 죽음이 되고 말았다. 오늘날 사람들은 출생 시부터 환자라고 하는 낙인이 찍혀져, 바르게 살고자 한다면 모든 종류의 치료를 필요로 하게 된다. 의료소비는 건강하지 못한 노동, 오염된 도시, 신경을 어지럽히는 교통을 완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의사가 생명을 구하는 자로서 산업적인 설비의 도움을 빌어 행동하고 있을 때, 도대체 살인적인 환경을 걱정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결국 강제적인 치료 하의 죽음은 죽음의 원인에 관한 유치한 망상의 재등장을 촉구하는 것이 된다.
집중치료장치 아래서의 죽음. 의료화된 죽음은 도덕적 질서로부터 기술적 질서로 죽음이 이전되었음을 의미한다. 병원에 기초를 둔 의료는 필연적으로 제국주의적 개입의 한 형태를 형성한다. 곧 사람들은 건강과 죽음에 관한 전통적 비전을 박탈당했다. 이제 문화적 일관성을 가진 자기의 이미지는 해체되고, 뿔뿔이 개체화된 개인은 고도로 사회화된 건강소비자의 국제적 민중으로 통합될 수 있다.
의료화된 죽음에의 기대는 부자를 무한한 보험료 지불에 구속하고, 빈민을 도금된 죽음의 올가미로 꾀어낸다. 부르주아 개인주의의 모순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현실적 태도를 갖고 있으면서 죽을 능력이 없다고 하는 것에 의해 확인된다. 국제적으로 서술된 좋은 죽음을 추구하도록 농부들에게 독촉하는 것은 그들을 언제까지라도 소비자로 삼기 위한 것이다.
죽음의 의료화에 의해 건강치료는 일체화된 세계종교가 되었고, 교의는 의무교육에서 가르쳐지고, 윤리적 규칙은 환경의 관료주의적 재편성에 적용되고 있다. 사회의 의료화는 자연사에 종언을 초래한다. 서양인들은 죽는다고 하는 스스로의 행위에서 주체적인 권리를 잃고 말았다. 건강 또는 질병과 싸우는 자율적인 힘은 최후의 숨은 뿌리까지 뺏고 말았다. 기술적인 죽음은 죽는 것에서 승리를 얻었다. 기계적인 죽음이 모든 다른 죽음을 정복하고 파멸시킨다.
제4장. 건강의 정치학
6. 특수한 반생산성
만일 병원병이 反생산성의 보기로 이해될 수 있다면 그것은 통제될 수 있을 것이다. 질병을 만들어 내는 의료는 인간의 자율적 행동을 마비시키는 산업적 과잉생산의 결과이다. 反생산성이라는 것은 제도가 본래는 사회에 주어야 하는 것을 거꾸로 사회로부터 빼앗을 때에 언제나 존재한다. 현대 의료기업의 의원적(醫源的) 강도는 좌절된 과잉생산이 보여 주는 참혹한 보기에 불과하다. 이 특별한 反생산성은 산업생산의 바람직하지 못한 부작용을 만들어 낸다.
가장 가치있는 학습,신체운동,자기치유는 GNP에 나타나지 않는다.
反생산적인 제도화에 의해 가장 크게 상처입는 사람들은 산업에 의해 부유하게 된 환경 속의 무력한 사람들이다. 사람을 무능력하게 하는 의존성은 그들을 현대적인 빈곤에 빠뜨리고 만다. 자율성을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생산물을 약속 받는 것에 의해 그들은 무능력화와 관계되는 의존성을 더욱 강요당할 것이다.
개인의 수요에 대한 인식이 전문가의 진단결과일 때, 의존성은 고통스러운 무능력으로 변한다. 미국 노인들이 그 사례다. 미국노인은 서비스의 과도한 전문화가 초래할 수 있는 빈곤의 특수한 보기이다. 미국노인들은 높은 비용을 들인 수탈에 의해 진척된 고통의 극단적인 보기다. 노년을 질병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은 보통 유효하지도 않은 끝없는 치료비를 지불하기 위해 한정도 없는 경제적 수요를 발전시켜 왔고, 자주 지나친 요구를 하거나 고통을 받는다. 그리고 특별한 환경 속에 은거하고 싶다는 기분을 갖게 된다.
젊어서 죽는 사람이 감소한 만큼 만성병의 유병률은 증가한다. 자신의 환경과 문화 속에서 자신의 고통과 타협하는 데 도움이 되는 수단은 더욱 적어지고, 그리하여 사소한 것에까지 의료서비스의 도움을 요청하도록 강요한다. 의료의 과도한 진전은 건강치료에 도움이 되어야 할 것이 특수한 형식의 건강부정으로 되고 말았다.
7. 정치적 대응책
1960년대 초 영국의 국영의료서비스는 여전히 세계적으로 평판이 높았다. 비버리지가 창설한 이 서비스는 다음과 같은 추정에 기초를 두었다. 곧 모든 사람이 평등한 조건 하에서 치료된다면 궁극적으로는 사망률이 지극히 낮은 정도까지 감소하리라는 것이었다. 보건입안자와 복지경제학자들이 예상치 못한 것이 있다. 무료서비스로 의사를 찾은 사람들의 1/4은 치료가 불필요한 단순한 감기이리라는 점을 예견할 수 없었다.
의료인 조직은 비능률과 특권을 영속화시키고, 반면 전문가에게 전문가로서의 면허를 주는 것에 의해 질병에 관한 더욱 좁은 전문적 시각이 양성된다. 따라서 의사에 대한 통제를 환자의 이익과 결합시키는 것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문적 의료의 범람은 스스로 살고 치유하는 시민의 자유를 부인하고, 대신 전문가에 의한 치료라고 하는 더욱 현저한 사회적 특권을 부여한다.
중독자에 대한 소비자 보호. 사람들은 자신들이 의료산업에 의존하고 있음을 의식하기 시작하면, 이미 절망적으로 걸려 들었다고 하는 믿음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자동차나 버스가 없으면 움직일 수 없다고 느끼는 것과 같이 의사가 없는 질병의 삶을 두려워한다.
영국의 사회학자 리처드 티트머스는 의료의 비용이익을 계산하기 어렵다고 결론지었다. 의료치료는 불확실하고 예견할 수 없다. 다수의 소비자는 자신이 어떤 의료치료를 받을지 알지도 못한다. 얼마나 돈이 들지도 미리 알 수 없다. 그들은 경험으로부터 배울 수 없다. 의료공급업자를 믿을 수 밖에 없다. 서비스를 파는 사람에게 되돌리거나, 서비스를 개선하고자 할 수도 없다. 의료서비스는 다른 물건의 경우와 같이 선전되지 않으며, 생산자는 비교를 싫어한다. 일단 구입하게 되면 소비자는 치료도중에 마음을 바꿀 수도 없다. 한마디로 의료서비스에는 정상적 소비자가 존재하지도 않는다.
의사의 청구서와 건강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하는 믿음은 현대의 미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의료경제학자의 기본적인 기술적 추정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복지국가에서는 건강관리의 시장조직화에 정부가 법과 정책을 통해 개입하나, 오직 미국에서만은 생산자위원회가 자유시장에 제공하도록 결정하는 법적인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1973년 말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공법92-603호에 서명했다. 의료산업분야의 세금에 의해 유지되는 부문, 곧 장해인 의료보장제도(Medicaid)와 국민의료보장제도(Medicare)에서의 필요비용과 질의 관리를 제도화했다. 의료산업은 1970년 이래 군산복합체에 이어 최대규모가 되었다. 현재까지 의료건강관리의 생산에 대해 합리적인 정치적 통제를 가하고자 하는 시도는 언제나 실패로 끝났다. 그 이유는 오늘날 의료라고 불리고 있는 생산물의 본성에 있다. 그것은 화학물질,장치,건물,전문가로 만들어진 꾸러미로 고객에게 배달된다.
불법행위에 대한 평등한 접근. 건강에 관해 가장 흔하고 명백한 정치적 쟁점은 의료에 대한 접근이 불평등하고, 부자가 빈자보다도, 유력자가 힘없는 사람들보다도 은혜를 입는다고 하는 고발에 기초를 둔다.
공평과 공정의 싸움은 교육에서 다루어진 것이나, 이제는 의료분야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건강에 대해서는 자유와 권리라고 하는 두 개의 측면이 있다. 무엇보다도 건강한 사람이 자신의 생물학적 상태와 주변의 환경조건에 대해 통제를 가할 수 있는 자율성의 영역을 결정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건강은 살아가는 자유의 정도와 같게 된다.
말할 자유, 배울 자유, 병을 고치는 자유를 전멸시키는 하나의 확실한 방법은, 시민의 권리를 시민의 의무로 변화시킴에 따라 그것을 제한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가르치는 자유는 교육과잉의 사회에서 감축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건강관리의 자유가 과잉의 약물사용에 의해 질식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경제의 어떤 부분은 더욱 값비싼 평등의 수준을 위해 자유가 압살될 정도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
의료가 공공적인 유용성의 문제인 한, 두 가지의 제한에 우선권을 주지 않는다면 어떤 개혁도 유효하다고는 할 수 없다.
1) 누구도 그가 받는 치료 때문에 타인이 그것보다 돈이 들지 않는 치료를, 같은 사회자원으로부터 받는 기회를 뺏기지 않는 한도에서만 서비스를 받는다는 것이다. 전문가의 판단에 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에 의해 타인이 상당한 긴급성을 갖고서 요구하는 치료의 기회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 거꾸로 어떠한 치료도 자신의 의지에 반해 가해져서는 안 된다. 즉 누구라도 자신의 동의없이 건강이란 미명 아래 붙잡히고 갇히며 입원당하고 치료당하며, 또는 다른 방법에 의해 방해받아서는 안 된다.
2) 건강서비스의 모든 생산량을 의원성적(醫原性的) 한계 내, 곧 보건생산의 자율적,타율적 양식의 공동작업을 최대로 만드는 한계 내에 제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민주적 사회에서 이러한 제한은 공평의 보장없이, 평등한 이용없이 달성될 수 없으리라. 그러한 의미에서 공평의 정치학은 건강에 대한 유효한 프로그램의 필수적인 요소가 되리라. 거꾸로 만일 공평에 관계되는 것이 모든 생산량의 제한에 연결되지 않는다면, 또 만일 그것이 시설에 의한 의료관리의 확대를 보상하는 것으로서 이용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것이 되리라.
전문적인 마피아에 대한 공적 통제. 병원은 고도 기술사회의 노동경제를 반영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꼭대기에는 국제적인 전문가, 중간에는 관료제, 밑바닥에는 이주민과 전문화된 고객으로 구성된 새로운 종속 프롤레타리아가 있다. 만일 그것이 건강관리의 일반모델이 되어 버린다면 그것은 의료에서의 마벨(Ma Bell, 전쟁의 신, 군대의 신)의 창조와 마찬가지 것이 될 것이다.
생명에 대한 과학적 조직. 의학이 응용과학이라고 하는 신앙은 필연적으로 건강전문가의 무책임한 힘과 의학이 미치는 파괴성도 증강시킨다. 과학의 우상화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의학이 일반 과학과 같이 행해지는 연구이고, 환자가 마치 자율적 인간이 아니라 특수한 증례인 것처럼 행해지는 진단이며, 위생기술자에 의해 행해지는 치료라는 세 가지 사실이야말로 현재의 건강부정의 풍토를 형성하고 있다.
과학으로서의 의학은 경계선 위에 있다. 과학적 방법은 모델실험을 요구한다. 그러나 의학적 실험은 모델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주체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한다. 그럼에도 의학은 치료,고통,죽음이라는 의미있는 행위에 관해 마치 화학분석이 도자기의 미적 가치에 관해 가르쳐 주는 정도로 밖에 가르쳐 주지 않는다. 이 사실에 의하면 의학에는 과학연구의 정직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응용과학의 길을 추구함으로써 의학전문직은 과학의 법칙을 교리로 삼고 기술자를 조수로 부리는 사제의 역할을 연기하는 자가 되었다. 기술에서 과학으로 전한됨에 따라, 의사단체는 실제적인 기술을 안내하기 위해 확립된 법칙을, 병든 인간을 위해 응용하는 직인조합의 성격을 상실했다. 의사단체는 과학의 법칙과 방법을 의학적 증례의 모든 범주에 적용하는 관료적 관리자의 정통적인 단체가 되었다.
개별의사에게 실험은 과학의 방법이고, 그가 보존하는 기록은 과학적 사업을 위한 자료의 일부이다. 모든 치료는 통계적으로 성공확률이 알려져 있는 실험의 반복이다. 의료요법이 치료에 결부되든, 죽음을 초래하든, 환자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든 간에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의료요법은 통계표에 의해 합법화되고 어떤 빈도를 통해 세 가지의 결과를 모두 예견한다.
인식의 부조화에 대한 고도의 관용을 갖는 것만이, 치유자임과 동시에 과학자이기도 한 상이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그에게 허용하리라. 그들은 정치적 판단의 가치를 저하시키기 위해 과학주의라고 하는 종교를 사용한다. 순수하고 정통적이며 확실한 의과학에 대한 요구는, 과학에 의해 측정될 수 없는 실체를 공적으로 인식함을 거부하는 것에 의해, 이러한 실제적 응용을 모든 정치적 평가로부터 보호한다.
의료의 비전문화는 신화의 가면을 벗기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민중을 신비화하는 것에 반대하고, 의료단체와 의료제도에 공적 지지를 부여하는 것에 반대하고, 그것들에 이로운 법적 차별에 반대하는 경향을 뜻한다. 의료의 비전문화는 의료단체 구성원의 처방이나 통제 하에 공공자금을 지불하는 것에 반대하는 경향을 뜻한다.
의료의 신화는 노동전문화의 증대와 비밀조작의 증대를 통해 이익은 증대된다고 하는 신화이고, 인간이 비인격적 제도에 접근하는 권리에 의존하는 것이 서로 간에 신뢰하는 것보다도 좋다고 하는 신화다.
플라스틱 자궁의 공학. 의료산업복합체와 의료관료제는 건강관리를 치료의 계획과 기술의 한 형태로 취급하기 때문에, 민중을 의료관료제에 더욱 의존하게 만들었다. 이는 병든 사람들과 질병에 위협받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에 외과적,화학적,행동적 개입을 하고자 하는 전략을 보여 준다.
건강관리 시스템은 인간의 감정과 인간의 건강에 대한 관심 없이 파탄을 최저한으로 하는 시스템공학에만 집중되고 있다.
8. 건강의 회복
인간은 수많은 고난을 스스로 만들어 왔다. 인간의 역사는 노예화와 착취의 긴 목록이었고, 보통 정복자의 서사시, 또는 피정복자의 엘레지(서정시)로 얘기되어 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소위 평화산업의 바람직하지 못한 물리적,사회적,심리적 측면의 효과가 파괴력에서 전쟁과 경쟁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침략자와 자연력에 굴복하지 않았다고 해도, 인간은 같은 종류의 인간에 의해 이용당하고 학대당하는 것과 싸워야만 했다. 인간의 경우에만 의식적인 것이 되고, 인간은 자연과 이웃에 대한 자신의 관계를 계획할 수 있으며, 이것이 부분적으로 실패한 때에도 살아남을 수 있다. 인간은 인내심을 가지고 시련을 견딜 수 있고, 그것을 이해함으로써 배울 수 있는 동물이다.
오늘날까지 신화는 탐욕스럽고 질투심 깊은 파괴적인 꿈의 실현에 한계를 부여하는 기능을 수행해왔다. 또 신화는 일반인들에게 만일 자신의 행동이 한계를 넘지 않는다면 제3의 전선에서도 자신은 안전하다고 하는 확신을 주었다. 신화는 신들에게 선수치고자 시도하는, 극히 소수의 몇몇에게 재난을 보증했다. 일반인들은 질병이나 폭력에 의해 멸망했다. 곧 인간의 조건에 반항하는 자만이 네메시스, 곧 신들의 질투에 의해 희생되었다.
산업화된 복수. 프로메테우스는 영웅이었다. 곧 누구라도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근원적인 탐욕에 이끌려 그는 인간의 한계와 중용(mesotes)을 넘어 무한한 교만 속에서 천국으로부터 불을 훔쳤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네메시스(복수)를 자초했다. 그는 코카서스 산맥의 바위에 동여매어졌다. 희망도 없고 끝도 없는 고난이, 이 영웅을 피할 수 없는 우주적 보복의 영원한 경고로 만들었다. ☞ 중용(mesotes)을 아는 실천이성의 능력이 실천적 지혜(pronesis)다. Pronesis가 없다면 다른 덕들(용기,절제,정의)도 불가능하다.
복수의 사회적 성격은 오늘날 변화하고 있다. 욕망의 산업화와 그것에 대응하는 의례적 반응의 기술화와 함께 교만이 확대되었다. 끝없는 물질적 진보가 모든 사람들의 목표가 되었다. 산업의 교만은 비합리적인 환상에 대한 신화적인 한계의 구조를 파괴했고, 미친 꿈에 대한 기술적인 해답을 합리적으로 보게 만들었으며, 파괴적인 가치에 대한 추구를 조달자와 의뢰인 사이의 공모로 변화시켰다.
민중에 대한 복수는 오늘날 산업진보의 불가피한 반동이다. 현대의 복수는 과도하게 확대된 산업의 꿈에서 생겨난 물질적인 괴물이다. 그것은 보통 교육, 대량수송, 산업의 임금노동, 건강의 의료화와 마찬가지로 널리 확대되었다. 상속되어온 신화는 이미 행동에 한계를 설정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산업발전에 대해 정치적으로 확립된 제한이 신화에 의한 경계를 대신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압도적인 고뇌,절망,불공정은 대부분 더욱 좋은 교육, 좋은 주택, 좋은 식사, 그리고 좋은 건강을 요구하기 위한 전술의 부수효과이다. 현재 초래되고 있는 기아는 부유한 국가, 그리고 빈곤한 국가의 토양이 비옥한 지역에서 산업화된 농업이 필연적으로 집중되는 것의 부산물이다. 기근은 부자를 위해, 빈민에 의한 자본 집중적 식량생산의 경향이, 새로운 종류의 집약적 노동에 의해 지역적,지방적 자율성의 농업을 대체하는 것으로까지 이어지게 할 것이다. 산업의 교만이 어떤 수준을 넘으면 반드시 보복이 시작된다. 왜냐하면 진보는 마녀 제자들의 빗자루와 같이 더 이상 추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산업의 진보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만일 그들이 진보의 가격을 계산할 수 있다고 자부한다면, 맹목이거나 부패한 것이다. 보복의 결과인 불법행위는 결코 보상될 수도, 계산될 수도, 청산될 수도 없다. 산업화된 복수는 전통적 신화나 합리적 자기억제에 의해 체크되지 않은 꿈을 기술적으로 추구하는 데에 의무적으로 참가한 것에 대한 보복이다.
복수는 아직도 근본적으로 잘못된 이데올로기에 대한 사회적 반응의 물질화로서 인식되고 있지 않다. 또한 복수는 아직도 현대의 중요한 산업제도가 갖는 비기술적인 의례적 구조에 의해 길러진 만연된 망상으로 이해되지 않고 있다. 마치 갈릴레오와 같은 시대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지구중심 세계관이 뒤흔들린 것을 두려워했다는 이유에서 망원경으로 목성의 위성을 보는 것을 거부한 것과 같이,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복수에 직면함을 거부함은, 자신들의 사회적,정치적 구조의 중심에다 생산의 산업적 양식보다도 자율적 양식을 둘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상속된 신화로부터 경건한 절차까지. 신앙에 대한 의존은 믿는 이에게 도피처를 제공할 것이나, 그것은 윤리적 정언의 기초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거기에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하는 둘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믿는 사람은 믿지 않는 이를 비난할 수 없다.
더욱 좋은 학습의 기회는 세계에 관한 정보가 더욱 잘 분배되고 있는 것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흥미로운 노동조건을 위해 자본이 집약되는 생산을 제한하는 것에 의존한다. 더욱 좋은 건강관리는 새로운 치료기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관리에의 의욕과 능력의 수준에 의존한다. 이러한 힘의 회복은 현재의 망상을 인식하는 것에 달려 있다.
건강에의 권리. 현재의 전반적인 산업확대는 증가하는 회복불능의 손해가 동반된다. 의료에서 이러한 손해는 병원병으로 나타난다. 병원병은 고통,질병,죽음이 의료관리의 결과로서 생겼을 때에는 임상적인 것이나, 건강정책이 불건강을 초래하는 산업조직을 강화할 때에는 사회적인 것이 된다. 시민의 신체적,정신적 완전함을 더 많은 감시인에게 굴복시키는 대신, 새로운 입법화는 각자가 자신의 건강을 정의하는 각자의 권리를 인정하게 할 것이고, 이웃의 권리에 대한 존중에 의해서만 그것은 제한될 수 있을 것이다.
德으로서의 위생. 건강은 적응의 과정을 나타낸다. 그것은 본능의 결과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현실에 대해 자율적이고 문화적으로 형성된 반응이다. 그것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성장하고 나이를 먹으며, 부상을 입었을 때 치유하고, 고생하고, 죽음을 평화 속에서 기다리는 능력을 명시하고 있다. 건강은 미래는 물론이고 나아가 함께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고뇌와 내적인 위로를 포함하고 있다.
의료의 개입이 최저한으로, 우연적으로 밖에 행해지지 않는 세계가, 건강이 가장 좋은 상태에서 널리 행해지는 세계이다. 건강한 사람들은 결혼,출산,인간조건,죽음에 대한 관료적 간섭을 최소한으로 요구한다. 자율적으로 싸우는 능력은 그의 건강에 근본적인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본질적인 것을 관리되도록 맡길 때, 그는 자율성을 포기하고 그의 건강은 쇠약하게 되지 않을 수 없다.
현대의료의 참된 기적은 악마적인 것이다. 그것은 단지 개인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개인적 건강의 비인간적인 低차원에서 생존하도록 한다. 의료의 복수는 각자가 자율성 속에서 싸우는 기회를 개선하고 평등화하기 위해 출발했고, 그것을 파괴하는 것에 의해 끝나는 사회조직의 소극적 피드백이다.
역자 해설
이반 일리치(1926~2002)는 평생 현대 산업사회에 대한 고정관념을 파괴하고자 한 사상가였다. 학교는 교육 장해물이고, 병원은 건강 장해물이며, 근대화가 빈곤을 없애기는커녕 빈곤을 근대화하고, 국가교육에 의해 국민의 언어능력은 쇠퇴한다고 주장했다.
이반 일리치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카톨릭교도인 크로아티아인으로 왕가의 후예인 토목기사였고, 어머니는 포르투갈계 유대인이었다. 소년 일리치는 프로이트의 손을 잡고 산보하면서 정신분석학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도 했고, 어린 시절부터 反나치저항운동에 참여했다.
그의 가족은 1941년 나치의 인종법 시행에 따른 유대인 박해를 피해 피렌체로 건너갔다. 일리치는 피렌체대학에서 자연과학, 특히 생물조직학과 결정학(結晶學)을 공부하고, 사제가 되기 위해 로마의 바티칸 그레고리안대학에서 신학,철학을 연구했으며, 1951년 신학학사를 받았다. 이후 오스트리아 찰스부르크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토인비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리치는 바티칸의 국제부에 들어갔으나 곧 사퇴하고, 1951년 도미해 맨하탄의 아일랜드-푸에르토리코 교구에서 보좌신부로 일했다. 이후 일리치는 1956~1960년 푸에르토리코의 카톨릭대학 부총장으로 보냈다. 이후 라틴아메리카에서 서구의 많은 성직자,지식인과 토론했다.
1967년 <에스프리>에 발표된 논문을 통해 미국을 맹주로 하는 '진보를 위한 동맹'과 바티칸의 라틴아메리카 정책을 비판했는데, 그 결과 1968년 바티칸에 의해 종교재판에 가까운 심문을 받았고, 결국 1969년 초 '정치적인 부도덕'을 이유로 사제직을 떠났다.
일리치는 <학교 없는 사회>(1971)을 통해 68 학생운동 이후의 사회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교통을 비판한 <에너지와 공정>(1973, 한국어번역본은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기술사회를 비판한 <공생의 사회>(1973), 의료제도를 비판한 <병원이 병을 만든다>(1976)를 발표했다.
1976년 일리치는 서독으로 갔다. 캇셀대학,괴팅겐대학에서 유럽중세사를 강의했고, 베를린고등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일했다. 서독에서 일리치는 노동의 환상을 비판한 <의미있는 실업에 대한 권리와 그것에 적대하는 전문가>(1978), <그림자 노동>(1981), 여성문제를 다룬 <젠더>(1982), 물질의 역사성을 다룬 <H2O와 잊혀진 물>(1985), 독서능력을 다룬 <ABC, 민중 마음의 알파베트화>(1988), 지식이 책으로 획득되는 기원을 다룬 <텍스트의 포도밭에서>(1993) 등을 발표했다. 이후 저술,강의활동,반핵운동 등 각종 사회운동에 참여하다가 2002년 독일에서 사망했다.
<자각의 축제>(1971). 일리치와 그의 친구인 에리히 프롬의 공통적인 사상인 인간적 근원주의(humanist radicalism)는 하나의 태도,접근방법으로 '모든 것은 의심될 수 있다'란 말로 요약된다. 이는 근원적인 회의로, 일상적으로 자명한 것으로 되어온 관념(신화)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제도혁명을 뜻한다. 학교,교회,폭력,기술원조 등 다양한 과제에 걸쳐 제도기관의 체계 자체가 갖는 인간성에 대한 파괴적 측면을 논한다.
<학교 없는 사회>(1971). 이 책에서 일리치는 학교탈출이 아니라, 제도교육에 숨어 있는 학교화(學校化)를 들어 산업적인 서비스 제도의 생산양식으로 분석하고자 시도했다. 교육을 제도화하는 학교사회는 인간의 자율적인 배움의 양식을 교육의 필요로 바꿔 놓음에 따라, 제도화된 가치를 산업적으로 부가한다. 이 책은 교육개혁론으로 오해받기도 했다.
학교교육이란 필연적으로 사회계급을 낙인찍고 소비자를 양산하는 것에 불과하므로, 스스로 배우는 고유한 능력을 키워 주는 상호교유의 전달과정이 필요하다. 그러한 과정이 12세기까지 존속했으나, 대학의 성립과 함께 무너졌다.
<자율적 공생을 위한 도구>(1973). 일리치가 꿈꾸는 사회는 자율적 공생의 사회다. 그것은 산업사회의 생산성에 대립된다. 산업사회에서 자율적 공생사회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과학숭배를 非神話化하고, 일상언어를 회복하며, 나아가 법적 조치를 회복해야 한다고 하는 3가지 차원에서의 도구가 고찰된다.
<에너지와 공정>(1974). 에너지의 양적확대, 발전이 생산을 향상시키고, 생활을 산업화시키고, 물질적 풍요를 이룩해 인간을 행복하게 한다고 하는 것은 산업사회의 신화이며 오류다. 그것은 사회적 공정에 반하는 것이다. 대량의 에너지 소비는 필연적으로 자연환경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환경, 나아가 인간의 자유와 자율적 능력까지도 파괴한다. 자동차가 이동을 독점하고, 걷는다고 하는 자율행위가 자본집중에 의해 상실된다.
<병원이 병을 만든다>(1976). 의료의 신화는 관료적 프로그램 하에 구성되어 고통,질병,죽음에 대한 인간의 정치적인 자율행위를 불능으로 만들었다. 산업의 과잉성장은 자율성이 제도를 수용하고 결국은 제도에 의존하는, 곧 타율성이 승리하는 편제를 만든다. 그것은 전문가가 통제하는 기술과학의 독점으로 나타나고, 나아가 사람들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필요치 않은가를 결정하는 힘을 갖게 한다. 일리치는 그러한 전문가에 대한 한계설정을 요구한다.
<불가능의 전문가>(1977). 학교,교통,의료,방송,사법,노동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문가의 권력이 일반인을 불능에 빠뜨린다.
<창조적 실업의 권리>(1978). 산업사회는 인간의 자율성과 함께 자존적인 활동을 빼앗아, 사람들은 고용되고 소비에 참가하지 않으면 무용한 것이 되어 버린다. 인간이 자신의 세계를 상실하고,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 일하고, 자신이 느끼고 있는 기분과 일치하지 않는 상태에 있는 것은 단지 욕구불만을 북돋우는 것일 뿐이다.
풍부한 상품 자체가 사용가치의 자율적인 창조를 마비시키는 시장집중 사회, 전문적 서비스가 사회의 필요를 만듦에 따라 행하는 전문가의 은폐된 역할 등 모든 종류의 환상을 폭로해 시장의존을 영속화시키는 전문가 권력을 분쇄하는 전략을 제안한다.
산업사회는 규격화된 제품으로 오염시키고, 인간이 혼자 힘으로 이루는 것과 자신의 손으로 만든 것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다. 인간은 생산자와 소비자로 분열되고, 그러한 의미에서 자조는 아무런 문제해결이 되지 않는다. 전문가의 기준에서는 측정 불가능한 자율적이고 유용한 노동을 위한 비고용 실업상태를 구하는 것이 산업사회에서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림자 노동>(1981). 산업화의 진전과 함께 여러 활동이 시장경제에 매몰된 결과 단지 지불되지 않는 노동으로서의 그림자노동으로 변질되었다. 임금노동의 배후에 숨은 여성에 의한 가사로 대표되는 그림자 노동이 재조명되어야 한다.
<젠더>(1983). 이 책은 종래의 여성해방운동과는 맥락을 달리하는 것으로, 심지어 보수반동이란 비난까지 받았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모든 문명에는 남녀의 구별이 있었고 앞으로도 그렇다면 남녀의 위치를 제자리에 바로 돌리고자 하는 일리치의 논의는 보다 현실적인 것일 수도 있다.
<과거의 겨울 속에서>(1992). 10년 전 의료제도가 건강을 위협한다고 말했으나, 이제는 건강한 신체의 추구가 병을 낳는다.
일리치의 사상. 일리치는 하나의 범주로 구분될 수 없는 사상가이다. 그의 관심이 미치지 않는 분야가 없고, 그가 정통하지 않은 학문이 없다. 그는 신부였으나 일찍이 카톨릭을 문화제국주의로 비판해 파문당했고, 교육론은 현대의 산업문명비판이라고 하는 그의 일관된 주제의 지엽일 뿐이다. 그는 우리 시대의 우상화된 모든 이념과 제도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비판자이다.
굳이 그를 분류한다면 그는 자본주의는 물론 사회주의에도 반대하는 아나키즘의 지도적인 현대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모든 분야에서 민중의 자율을 주장하며 국가,자본,전문가에 의한 지배에 철저히 반대한다. 통치기구로 민중 위에 군림하는 국가법을 부정하나 민중의 법으로서 자연법을 신봉하는 아나키스트이다.
몸은 병원, 배움은 학교, 이동은 교통에 맡기는 것을 우리는 진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제도나 기관에 대한 의존욕구가 마치 인간의 권리인 양 법제화된다. 그러나 그것은 노예가 되는 권리, 마비환자가 되는 권리일 뿐이다. 그것은 현대의 빈곤이다.
현대의 경제발전은 자율적 생존주체였던 민중이 그들의 고유한 기술을 박탈당해 건강을 의사에게, 학습을 교사에게, 교통을 자동차에, 놀이를 TV에, 생존을 임금노동에, 고유한 성차를 중성화된 경제적 섹스에 의존하게 된 과정으로 본다. 경제발전은 수요에 대한 노예화이지 희소성으로부터의 자유화가 아니다.
일리치는 경제발전이 인간에게 더욱 큰 자유를 부여한다는 명제를 근본적으로 부정해 1968년 학생운동 이후 서구의 소비풍요사회, 더 중요하게는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에 의해 생겨난 잘못된 수요로부터 원주민의 자율적 능력을 지키고자 한 제3세계의 발전전략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일리치의 反제도론. 인간의 자율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상실하게 만든 산업문명구조에 대한 일리치의 비판은 우리 사회의 제도와 이념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를 요구한다. 그의 비판은 제3세계 중에서도 유달리 서구지향성이 절대적이라고 할 정도로 강력한 우리 사회에 대한 경종이다.
學校化에 의해 스스로 배우는 것을 잊고 사는 사회, 가속화에 의해 스스로의 발로 걷는 것을 잊고 있는 사회, 의료화에 의해 스스로 낫는 것을 잊고 있는 사회가 현대사회다. 오로지 시장을 매개로 해서 산업적 제도화만을 추진하는 전문가 권력을 포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反인간적 기계를 그 산물의 정점으로 하는 시스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