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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9(원종 10)∼1343(충혜왕 복위 4).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원로(元老), 호는 매운당(梅雲堂)·백화헌(百花軒). 농서군공(隴西郡公) 장경(長庚)의 아들이다. 1294년(충렬왕 20) 향공진사(鄕貢進士)로 문과에 급제하여 안남서기(安南書記)에 보직되고, 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를 거쳐 지합주사(知陜州事)·비서랑(秘書郎) 등을 지냈다.
1306년 비서승으로 왕을 호종하여 원나라에 갔을 때 왕유소(王惟紹)·송방영(宋邦英) 등이 충선왕을 모함하여 충렬왕 부자를 이간시키고 서흥후 전(瑞興侯琠)으로 하여금 충렬왕의 후계를 삼으려 획책하다가 충선왕의 세력이 커지자 처벌된 일이 있었다.
이 때 어느 파에도 가담하지 않고 최진(崔晉)과 단지 충렬왕을 보필하고 있었으나 그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그 뒤 귀양에서 풀려나와 13년간 고향에서 은거하면서 한번도 자신의 무죄를 호소하지 않았다.
당시 충숙왕은 5년간이나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었기 때문에 심양왕 고(瀋陽王暠)가 왕위 찬탈을 도모하자 홀로 원나라에 들어가서 중서성(中書省)에 그 부당함을 상소하여 이러한 음모를 분쇄하였다. 1325년(충숙왕 12) 왕이 귀국하자 감찰장령으로 발탁되고, 전리총랑(典理摠郎)으로 관동지방을 안무(按撫)하였다.
1327년 충숙왕이 원도(元都)에 있을 때 왕을 도운 공로로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서 이등공신이 되었으며, 이어 군부판서(軍簿判書)에 승진하였다. 이 때 충숙왕은 심왕당(瀋王黨)의 끊임없는 모략으로 왕위를 심왕에게 선양(禪讓)하려 하였으나 한종유(韓宗愈) 등과 함께 극력 반대하여 이를 저지시켰다.
1330년 충혜왕이 즉위하자 장령이 되었고, 그 뒤 여러 번 충혜왕을 따라 원나라에 내왕하였다. 1339년 충혜왕이 복위하자 그 이듬해 정당문학에 승진하였고, 예문관대제학이 되어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충혜왕의 음탕함을 여러 번 간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이듬해에 사직하였다. 1342년(충혜왕 복위 3) 성근익찬경절공신(誠勤翊贊勁節功臣)에 녹권되고 벽상(壁上)에 도형(圖形)되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시조 1수가 전한다.
뜻이 확고하고 할 말은 하는 엄격한 성품 때문에 경외시되었으며, 역임한 관직에서 많은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공민왕 때 성산후(星山侯)에 추증되고, 충혜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1308(충렬왕 34)~1374(공민왕 23).
고려말의 문신.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극례(克禮), 호는 초은(樵隱). 할아버지는 성산군(星山君) 조년(兆年)이며, 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포(褒)이고, 동생이 인임(仁任)이다.
백이정(白頤正)에게 성리학을 배웠다. 1326년(충숙왕 13) 문과에 급제하여 복주사록(福州司錄)이 된 후 춘추공봉(春秋供奉)에 발탁되었다. 1342년(충혜왕 복위 3)에는 기거사인(起居舍人)으로 원나라의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대녕로금주판관(大寧路錦州判官)의 벼슬을 받고 돌아와 기거주(起居注)로 승진했다.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한 후 우부대언(右副代言)·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승진했고, 서연(書筵)에서 진강했다. 이어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올랐다. 1352년(공민왕 1)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1354년 정당문학 겸 감찰대부(政堂文學兼監察大夫)가 되었고, 이어 성산군에 봉해졌다.
1356년 원나라가 기씨(奇氏) 제거와 변방 침범을 용서하자 사은사(謝恩使)로 원나라에 다녀왔고, 이듬해에 〈고금록 古今錄〉을 편찬했다. 1359년 수사공 상서좌복야 어사대부(守司空尙書左僕射御史大夫)를 거쳐 이후 참지중서정사(參知中書政事)·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첨의평리(僉議評理)·삼사우사(三司右使)·서북면도찰군용사(西北面都察軍容使) 등을 역임했다. 1364년 찬성사(贊成事)로 단성좌리공신(端誠佐理功臣)에 봉해졌고,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공민왕이 복위한 것을 알리고 돌아와 정동행성좌우사낭중(征東行省左右司郎中)이 되었으나, 왕에게 신돈(辛旽)을 멀리할 것을 간하다가 파직당했다. 이듬해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판삼사사(判三司事)를 거쳐 1371년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가 되어 이색(李穡)과 함께 〈금경록 金鏡錄〉을 증수했다. 1373년 검교시중에 이르렀다.
평생 성리학을 존숭하여 불교를 멀리했고, 성품이 강직하여 옳지 못한 일을 보면 노기가 얼굴에 나타났으나 함부로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문장을 짓는 데 말이 엄하고 뜻이 깊어 기롱하고 풍자하는 것이 많았다고 한다. 저서로는 〈초은집〉이 있다. 1375년(우왕 1) 충정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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