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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比스님이 읽어주시는 화엄경(2020.09.28.PM2시)
세주묘엄품(世主妙嚴品)2
화엄회상 대중들의 득법(得法)과 게송
벌써 많이 들어오셨다.
3일 쉬었다 하니까 기다려지고 더 반갑다.
오늘은 새로운 꽃을 모셔놓고 공부하게 되었다.
‘염화실 TV개국을 축하합니다’
KBS TV를 개국한 것이나 진배없는 입장이다. 저에게는 염화실 TV가 KBS보다 더 중요하고 값진 방송국이다.
문수선원에서 공부하는 원각반에서 이 꽃을 똑같은 화분 두 개를 가져왔는데 두 개를 다 올릴 수 없어서 한 개만 여기 올렸다. 원각반 보살님들 고맙다.
이렇게 축하를 받으니까 책임이 더 무거워지는 것 같다. 모두들 반갑고 감사하다.
장난 비슷하게 출발한 방송국이지만 그래도 명색이 방송국이라고 하고, 실시간에 이렇게 불자님을 뵙게 되니까 뭔가 새로운 이야기를 준비해야겠다 그런 생각이 든다.
공중파 방송에서 뉴스거리를 준비하는 데 상당히 애로가 많다는 것을 이해하겠다.
실시간이니까 꼭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고 인사도 이렇게 서로 나누고, 채팅방에서 많은 분들이 서로 인사도 나누고 하는 상황들을 제가 감지해보니까, 준비를 해서 매일매일 새로운 이야기가 좀 있었으면 하는 느낌을 받는다.
오늘은 새로운 이야기를 좀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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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불교계에 숨은 인재들이 많은데 인재가 제대로 인재 노릇을 하려면 자신이 실력도 좋아야 하는 것이 첫째 중요하다. 그런데 그 실력을 가지고 활동을 해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일이 더 중요하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불교계에 어떤 득이 되는 활동을 못한다면 혼자 아무리 인재라 하더라도 인재인지 어쩐지도 알 수 없다.
실력있고 총명하고 공부를 많이 하신 분들은 좀 밖으로 나와서 표현도 하고, 활동을 많이 해서 자신의 능력을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고 세상에 덕이 되는 일을 많이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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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근래에 발견한 불교계 인재 한 분을 소개하겠다.
문광스님이라고 해서 요즘 바짝 활동을 아주 잘 한다. 몇 년 전부터 했는데 저하고는 최근에 인연이 되었다.
이분이 책을 두 권 부쳐왔다.
우선 이 책부터 소개하겠다.
『한국과 중국 선사들의 유교 중화 담론』(문광 저/ 불광출판사)이라고 하는 책인데 이 스님이 동양학에 대해서 공부를 많이 하신 스님이라 이러한 내용을 묶어서 논문으로 냈다.
중화(中和) 라는 문제는 유교에서는 상당히 무게 있고 뜻이 깊고 사상의 중심이 되고, 수행의 중심이 되는 낱말이다. 글자는 딱 두 자인데 가운데 중(中)자 하고 화합한 화(和) 자다.
가운데 중(中)자 화합할 화(和)자.
중용(中庸)에 집중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는 내용인데 말이 났으니까 말씀드리면 중화(中和)를 중용에서 뭐라고 했는가 하면
‘희로애락지미발(喜怒哀樂之未發)을 위지중(謂之中)이오 발이개중절(發而皆中節)을 위지화(謂之和)니라’
그래서 중화(中和)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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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는 누구에게 희로애락이 있다. 기쁜 일이 있으면 기뻐하고 화낼 일이 있으면 화내고 슬퍼할 일이 있으면 슬퍼하고 즐길 일이 있으면 즐긴다.
슬플 애(哀)자, 즐거울 락(樂)자.
그것이 사람에게 다 있는데 그것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미발(未發) 아직도 그것이 밖으로 표현되기 이전을 중(中)이라고 한다. 가운데 중(中)자.
그러니까 우리가 한 생각 일어나기 이전 본래마음자리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한생각도 일어나기 이전 본래 마음자리,상당히 뜻이 깊은 내용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데 그 다음이 문제다.
본래 마음자리는 다 가지고 있어서 그것을 우리가 본래부처, 본래성불, 본각, 참마음자리 여러 가지로 표현한다.
모든 사람이 공히 가지고 있는 그 마음자리다. 희로애락이 드러나기 이전자리다.
그런데 ‘발이개중절(發而皆中節)을 위지화(謂之和)라’
기쁠 때 기뻐하고 슬플 때 슬퍼하고 울 때 울고 웃을 때 웃는다 하더라도 중절(中節), 이때 중절이라는 말은 절도에 맞아야 된다는 뜻이다.
그것이 아주 어렵다.
절도에 맞는다. 절도에 맞는 것을 위지화라 화합할 화(和) 융화할 화(和)자, 화목할 화(和)자, 화(和)자처럼 좋은 글자가 없다. 중국사람들도 좋아하고 일본사람들은 더 좋아하는 글자다.
평화라고 할 때도 그 화(和)자. 화목이라고 할 때도 그 화(和)자, 화합이라고 할 때도 그 화(和)자 참 좋은 글자다.
그래서 발이개중절(發而皆中節), 우리가 희로애락을 다 표현할 때 표현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절도에 맞아야 된다.절도에 맞지 않고 너무 치우친다든지 지나친다든지 그것이 너무 개인적인 데로 흐른다든지 하면 화(和)가 못되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 따라서 희로애락을 일으키는 것은 누구나 다 있다. 성인도 있고, 범인도 있고 다 있는데 그것을 우리가 제대로 절도에 맞게 표현하지를 못한다.
그래서 ‘낙이불음(樂而不淫) 애이불상(哀而不傷)’이라는 말이 있다. 즐거운 일이 있을 때 즐거워하되, 빠지지 말라. 실컷 즐거워하더라도 거기에 너무 도취되지 말라. 빠지지 않는 것이 낙이불음(樂而不淫)이다.
애이불상 부모가 돌아가시고 아주 가까운 사람이 돌아가시고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 불상사가 생겼다 그러면 다 슬퍼한다. 아주 나의 일 같이 슬퍼한다 그러나 불상(不傷)이라. 상처받지 않는다. 우리는 상처받기 일쑤다. 좋지 아니한 일이 있어도 상처받고 좋은 일이 있어도 상처받고 슬픈 일이 있어도 상처받는다.
내가 그 전에 탄허스님 밑에서 공부할 때 백운도사라고 하는 분이 주역에 밝고 사주에 뛰어났다.
그 도사분이 가끔 한 번씩 탄허스님에게 오시는데 오면 며칠씩 계시다가 간다. 우리가 소주 한 병을 사드리면 그것으로 좋아서 사주도 봐주고 손금도 봐준다.
그런데 그분은 볼 때마다 항상 목이 쉬어 있어서 우리가 탄허스님께 물었다.
‘평생 목이 쉬어 있다. 왜 목이 쉬었는가 하니 아들을 잃었다’는 것이다. 젊어서 아들을 잃고 하도 슬퍼서 한 달을 울고 나니 그만 목이 돌아오지 않더라.
그것이 애이불상(哀而不傷)이 아니라 애이상(哀而傷)이다.
너무 슬퍼한 나머지 그렇게 깊이 상처를 받았다.
그다음부터 그분은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해서 늘 술에 취해 있고 그 좋은 실력을 가지고도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한 채 여기저기로 떠돌았다.
탄허스님에게 와서 우리가 소주 한 병씩 받아드리면 그것에 좋아하던 분이다.
사람이 살면서 즐거운 일도 있고 슬퍼할 일도 있다. 그래도 즐거운 일에 너무 빠지지 말고 슬퍼할 일이 있다 하더라도 거기에 상처받지 마라.
상처받을 정도로 그렇게 슬퍼하지 마라.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 떠났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좀 정신 차리고 다시 깨어나는 회복의 능력이 있어야 할 줄 믿는다.
그런 문제를 여기서 한국과 중국의 선사들의 유교 중화담론, 중화(中和)에 대해서 이야기 한 것이다.
그 다음에, 책을 두 권이나 부쳐왔는데 이거 아끼면서 저녁에 또 할 것 없다. 그다음 또 한 권은
『탄허 선사의 사교회통 사상』(문광 스님/민족사) 이라고 하는 책이다. 탄허선사의 사교회통 사상
문광스님은 탄허스님을 연구해서 박사학위를 받은 분이다. 탄허스님을 연구한 1호 박사다.
사교회통(四敎會通)이라.
사교(四敎)는 유교 도교 불교 기독교까지 해서 네 개의 종교다. 이 네 개의 종교를 사상적으로 회통시켰다는 내용이 사교회통이다.
탄허스님께서 언급하신 것을 정리해서 이렇게 책으로 냈다. 아주 중요한 책이다.
문광스님은 지금 50대 중반쯤 됐을까 한데 탄허스님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니까, 탄허스님 공부가 어느 정도인가를 심성으로서 수양으로서는 그 경지를 못따라간다 하더라도 이론적으로 환하게 알고 있다.
그러면서 여기에 제 이야기도 한 구절 실었다.
이왕 이야기도 났고, 책에도 실린 내용이니까 읽어보도록 하겠다.
‘탄허스님의 법맥을 전강해 주시고 마음을 다해 부촉해 주셨던 통광 큰스님’ 저의 사형이다. ‘스님께서 남겨주신 말씀을 한마디도 잊지않고 가슴 속에 새기고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항상 칭찬해 주시고 용기를 북돋워 주셨던 무비 큰스님’ 그랬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여쭤볼 수 있었던 각성 큰스님 이 세분 탄허삼걸 큰스님들께 아낌없는 사랑을 받은 것을 보니 나는 참으로 복이 많은 것 같다. 앞으로 열심히 정진해서 큰스님들께 누가 되지 않는 후학이 되고 싶다.’
이런 말을 자기 책의 서문에 썼다.
저에게 책을 부쳐 오기도 했고 또 이렇게 한 구절 저를 언급한 부분이 있어서 전해드린다.
우리는 공부하는 TV, 공부하는 방송이니까, 공부거리와 관계되는 뉴스가 있으면 공부시간에 이렇게 전해드리겠다.
뉴스치고는 아주 적절한, 우리 염화실 방송에 잘 맞는 적절한 뉴스고 좋은 뉴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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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공부에 앞서 방송국 같이 뉴스거리가 있었다.
사실 방송은 뉴스가 위주다. 그 외는 스포츠고 오락은 들러리다. 그런데 우리는 공부가 위주고 혹 이런 뉴스거리가 있으면 뉴스도 전해드리고 할 것이다.
오늘은 화엄경 2권 가애락광명천왕의 게송 부분을 할 차례다.
2) 게송
이시(爾時)에 가애락광명천왕(可愛樂光明天王)이 승불위력(承佛威力)하사 보관일체소광천무량광천극광천중(普觀一切少光天無量光天極光天衆)하고 이설송언(而說頌言)하사대
그때에 가애락광명(可愛樂光明) 천왕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모든 소광천(少廣天)과 무량광천(無量光天)과 극광천(極光天)의 대중들을 두루 살피고 게송을 설하셨습니다.
아념여래석소행(我念如來昔所行)이 승사공양무변불(承事供養無邊佛)이시니
여본신심청정업(如本信心淸淨業)을 이불위신금실견(以佛威神今悉見)이로다
내가 생각하건대 여래가 옛적에 행하신 것은
한량없는 부처님을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신 일이니
본래대로의 신심과 청정한 업을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지금 다 보도다.
참 좋은 게송이다.
내가 생각하건대 여래가 옛적에 행하신 것은
한량없는 부처님을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신 일이다
부처님께서 과거생에 성불을 하기 위해 수많은 수행을 했다. 화엄경에 보면 그 수많은 수행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모든 생명, 모든 사람을 전부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고 예배하고 공양하고 찬탄했다고 하는 내용이다.
참선한다고 죽치고 앉아서 그렇게 세월을, 물론 그런 세월도 보냈을 것이다. 또 염불도 하고 경전도 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효과적인 수행은 모든 사람, 모든 생명을 부처님처럼 받들어 섬기고 위해 주고 존중하고 찬탄하는 것, 이것이 가장 주된 수행이다.
정말 화엄경다운 표현이다.
모든 사람을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고 존중하고 찬탄하는 일보다 더 훌륭한 수행이 무엇이 있겠는가? 최고가는 수행이다. 참선을 아무리 오래 해도 남을 위하는 실천이 없으면 크게 좋은 수행이 못 된다.
하루종일 ‘이뭣고’ 하고 앉았다가 주변에서 무슨 공사한다고 예를 들어서 소리가 좀 난다. 그러면 훌쩍 뛰어나가서 ‘누가 이렇게 공부하는데 시끄럽게 하느냐’고 화를 뭣같이 내고 그런 경우들을 우리가 많이 본다.
저도 선방에 있을 때 그랬다. 그것이 무슨 공부가 되겠는가? 그런 수행이 무슨 수행이 되겠는가?
사람을 위하고 존중하고 받들어 섬기고 하는 것, 그것이 가장 훌륭한 수행이다. 여기 첫 게송이 이렇다.
여래가 옛적에 행하신 것은
한량없는 부처님을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신 일이니
본래대로의 신심과 청정한 업을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지금 다 보도다
불신무상이중구(佛身無相離衆垢)라 항주자비애민지(恒住慈悲哀愍地)하사
세간우환실사제(世間憂患悉使除)케하시니 차시묘광지해탈(此是妙光之解脫)이로다
부처님의 몸은 형상이 없어서 온갖 더러움을 떠났으나
항상 자비와 애민의 땅에 머무시며
세간의 근심들을 모두 제거하게 하시니
이것은 청정묘광 천왕의 해탈이로다.
부처님의 몸은 형상이 없어서 온갖 더러움을 떠났으나
불신은 형상이 없다고 했다.
불신은 형상이 없다. 형상이 없는 몸이 부처님의 몸이다. 그래서 법신이라고 한다. 진리의 몸, 법의 몸이다.
항상 자비와 애민의 땅에 머문다.
항상 자비와 중생을 위해서 불쌍히 여기고 중생에게 사랑을 베푸는 경지에 머문다.
세간의 근심들을 모두 제거해 준다.
어떻게 하더라도 세간의 근심들을 다 제거해 준다.
불법광대무애제(佛法廣大無涯際)하야 일체찰해어중현(一切刹海於中現)하사대
여기성괴각부동(如其成壞各不同)하시니 자재음천해탈력(自在音天解脫力)이로다
부처님의 법은 광대하여 그 끝이 없어서
일체세계가 그 속에 다 나타나되
이루어지고 무너짐이 각각 같지 않나니
자재음 천왕의 해탈한 힘이로다.
부처님의 법은 광대하여 그 끝이 없다.
부처님의 법이 어떻게 끝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일체세계가 그 속에 다 나타난다.
부처님의 법속에 일체 세계, 저 우주 공간에 있는 드넓은 세계들도 부처님의 법 속에 다 나타난다.
이루어지고 무너짐이 각각 같지 않나니
우리 몸만 하더라도 세포가 끊임없이 바뀐다. 일주일 안에 세포가 다 바뀐다는 것 같다.
백 조의 세포가 있는데 백 조의 세포가 일주일 안에 다 새 몸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모든 이치가 그렇다.
그와같이 저 드넓은 우주공간에 있는 별들도 끊임없이 성주괴공 성주괴공 끊임없이 성주괴공을 반복하고 있다.
지금 우리 눈에 보이고, 허블망원경으로 찍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별들은 이미 성주괴공해서 사라졌고, 새로운 별이 또 생겨났다.
그것은 시간을 좀 길게 가질 뿐이고, 우리의 세포는 작은 부위에 있다 보니까 또 빨리 생주이멸하고 성주괴공한다.
우리가 사는 사철이라고 하는 것은 춘하추동이다.
365일 전부 한 번 다 바뀐다.
그 원리를 보면, 우리 안에 있는 가장 작은 세포들도 그러한 원리로 바뀌고 이 지구상의 사계절도 그렇게 바뀌고, 저 우주공간에 떠있는 많고 많은 세계들, 별들 그것도 또 그런 원리로 바뀐다는 것이 참 신기하다.
그러한 것을 이 화엄경에서 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불신통력무여등(佛神通力無與等)하야 보현시방광대찰(普現十方廣大刹)하사
실령엄정상현전(悉令嚴淨常現前)케하시니 승염해탈지방편(勝念解脫之方便)이로다
부처님의 신통력은 같을 이가 없어
시방의 광대한 세계를 널리 다 나타내되
모두 다 엄정하게 항상 앞에 나타나게 하시니
최승염지 천왕의 해탈한 방편이로다.
부처님의 신통력은 같을 이가 없어
시방의 광대한 세계를 널리 다 나타내되
부처님의 신통 안에서 시방의 광대한 세계를 다 나타낸다. 시방에서 광대한 세계가 온갖 변화를 일으키면서 명멸해 가는 것은 전부 무엇인가?
전부 부처님의 한량없는 신통이다.
모두 다 엄정하게 항상 앞에 나타나게 하신다.
여제찰해미진수(如諸刹海微塵數)한 소유여래함경봉(所有如來咸敬奉)하야
문법이염부당연(聞法離染不唐捐)하니 차묘음천법문용(此妙音天法門用)이로다
모든 세계의 미진수와 같이 많은
여래께 다 공경하고 받들어 섬겨서
법문을 듣고 번뇌를 여의어 헛되이 하지 않으니
이것은 가애락정묘음 천왕이 법문으로 활용함이네.
모든 세계의 미진수와 같이 많은
여래께 다 공경하고 받들어 섬겨서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모든 세계의 미진수와 같이 많은, 작은 먼지수와 같이 많은 여래를 다 공경하고 받들어 섬긴다. 모든 사람, 모든 생명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고 존중하고 찬탄한다.
법문을 듣고 번뇌를 여의어 헛되이 하지 않으니
거기에서 다 느낀 바 있고 깨달은 바가 있고 눈을 뜨게 된다.
이것은 가애락정묘음 천왕이 법문으로 활용함이네.
가애락정묘음천왕은 그런 이치를 가지고 법문을 했다는 것이다.
불어무량대겁해(佛於無量大劫海)에 설지방편무륜필(說地方便無倫匹)하사
소설무변무유궁(所說無邊無有窮)하시니 선사음천지차의(善思音天知此義)로다
부처님은 한량없는 큰 겁의 바다에서
지위와 방편을 설하심이 짝할 이 없으시며
설하신 것이 끝이 없고 다함이 없으시니
선사유음 천왕이 그 뜻을 알았도다.
부처님은 한량없는 큰 겁의 바다에서
아주 오랜 세월동안
지위와 방편을 설하심이 짝할 이 없으시며
화엄경에서 52위(五十二位)지위점차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 등각(等覺) 묘각(妙覺) 등등 그런 지위점차를 위시해서 그 하나하나 단계마다 또 수많은 지위가 그 안에 있고, 그 안에 또 수많은 지위가 있다. 그 또한 무엇인가?
사람은 이 육천단구 오척단구의 몸을 가지고 있지만 이 안에 백 조의 세포가 있고 백 조의 세포 안에 또 백 조의 세포가 있고, 그 안에 또 백 조의 세포가 있고, 도저히 우리는 헤아릴 수 없다.
육신 뿐만아니 세계에 있는 모든 물질이 다 그렇다.
물질의 최소단위인 원자를 아톰이라고 해서 나눌 수 없다는 뜻이지만, 그것은 나눌 만한 기술이 안됐을 때 나온 말이다. 그 외 여러 번 쪼개고 나눠서 별별 이름이 다 요즘은 등장한다. 신기하다.
그러한 것을 화엄경에 2600년 전에 깨달음의 안목으로 이렇게 밝혀 놓았다.
그래서 ‘깨달음, 깨달음’ 하는 것이다. 제대로 깨닫기만 하면 모든 원리를 한꺼번에 다 꿰뚫어 안다고 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한량없는 큰 겁의 바다에서 지위와 방편을 설하심이 짝할 이가 없다. 많다는 말이다.
설하신 것이 끝이 없고 다함이 없으시니
선사유음 천왕이 그 뜻을 알았도다.
여래신변무량문(如來神變無量門)이여 일념현어일체처(一念現於一切處)에
항신성도대방편(降神成道大方便)하시니 차장엄음지해탈(此莊嚴音之解脫)이로다
여래의 신통 변화 한량없는 문이여
한 생각에 모든 곳에서
탄생하고 성도하는 큰 방편을 나타내시니
이것은 연장엄음 천왕의 해탈이로다.
여래께서 신통 변화가 한량없으셔서 한 생각에 모든 곳에서 태어나시고 수행하고 성도하고 설법하고 중생제도하고 열반에 들고 사리탑을 세우고 하는 그런 일들을 다 나타냈다. 그런 방편을 다 나타냈다.
여기는 한정이 있기 때문에 그런 설명은 없지만 사실 내용은 그러한 내용이 다 포함되어 있다.
위력소지능연설(威力所持能演說)하며 급현제불신통사(及現諸佛神通事)하사
수기근욕실영정(隨其根欲悉令淨)케하시니 차광음천해탈문(此光音天解脫門)이로다
위신력을 가져서 연설하시며
모든 부처님의 신통한 일을 나타 내시사
그 근기와 욕망을 따라서 모두 청정케 하시니
이것은 심심광음 천왕이 해탈한 문이로다.
위신력을 가져서 연설하시며
한 분 한 분 마다 당신이 아는 부처님, 당신이 깨달으신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을 한 편 한 편 한 조각 한 조각 표현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게송이 늘 그렇다.
위신력을 가져서 연설하시며
모든 부처님의 신통한 일을 나타 내시사
부처님, 우리에게 다른 어떤 방법으로써 우리에게 와닿는 것은 없다. 그저 부처님의 설법이 있을 뿐이다.
참 이치, 진리의 말씀으로써 우리에게 일깨워 주신 그 설법이다.
그 근기와 욕망을 따라서 모두 청정케 하시니
그 설법으로써 사람들의 근기와 욕망에 맞춰서 다 훌륭한 삶을 살도록 한다.
이것은 심심광음 천왕이 해탈한 문이로다.
여래지혜무변제(如來智慧無邊際)하사 세중무등무소착(世中無等無所着)하사대
자심응물보현전(慈心應物普現前)하시니 광대명천오사도(廣大名天悟斯道)로다
여래의 지혜는 끝이 없으시며
세상에서 같을 이도 없고 집착도 없어
자비한 마음으로 중생에게 맞춰서 널리 나타나시니
광대명칭 천왕이 이 도를 깨달았네.
여래의 지혜는 끝이 없으시며
부처님은 그 지혜가 끝간 데 없다. 부처님의 지혜가 어디까지인지 도저히 범인으로서는 짐작이 안간다.
세상에서 같을 이도 없고 집착도 없어
같을 사람은 더욱 없고 거기에 집착도 해당되지 않는다.
자비한 마음으로 중생에게 맞춰서 널리 나타나시니
그것이 부처님이 하신 일이다.
광대명칭 천왕이 이 도를 깨달았네.
불석수습보리행(佛昔修習菩提行)하사 공양시방일체불(供養十方一切佛)하고
일일불소발서심(一一佛所發誓心)하시니 최승광문대환희(最勝光聞大歡喜)로다
부처님이 옛적에 보리행을 닦으사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낱낱 부처님 처소에서 서원을 세우시니
최승정광 천왕이 듣고 크게 환희하도다.
부처님이 옛적에 보리행을 닦는다.
깨달음의 행을 닦는데 뭐라고 했는가?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 공양했다.
시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부처님으로 섬기고 공양했다.
그것이 보리행이다. 깨달음의 행, 자비행, 자비와 지혜의 행이다.
낱낱 부처님 처소에서 서원을 세우시니
최승정광 천왕이 듣고 크게 환희하도다.
5. 대범 천왕과 그 대중들의 득법과 게송
1) 득법
부차시기범왕(復次尸棄梵王)은 득보주시방도량중설법(得普住十方道場中說法)호대
이소행청정무염착해탈문(而所行淸淨無染着解脫門)하니라
다시 또 시기범왕(尸棄梵王)은 널리 시방의 도량 중에 머물면서 법을 설하되 행하는 바가 청정해서 물들거나 집착하지 않는 해탈문을 얻었습니다.
혜광범왕(慧光梵王)은 득사일체중생(得使一切衆生)으로 입선삼매주해탈문(入禪三昧住解脫門)하니라
혜광(慧光) 범왕은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선(禪) 삼매에 들어가서 머물게 하는 해탈문을 얻었습니다.
선사혜광명범왕(善思慧光明梵王)은 득보입일체부사의법해탈문(得普入一切不思議法解脫門)하니라
선사혜광명(善思慧光明) 범왕은 일체 불가사의한 법에 널리 들어가는 해탈문을 얻었습니다.
여기는 범왕 범천왕들이 법을 얻은 내용들이다.
보운음범왕(普雲音梵王)은 득입제불일체음성해해탈문(得入諸佛一切音聲海解脫門)하니라
보운음(普雲音) 범왕은 모든 부처님의 일체 음성의 바다에 들어가는 해탈문을 얻었습니다.
관세언음자재범왕(觀世言音自在梵王)은 득능억념보살(得能憶念菩薩)의 교화일체중생방편해탈문(敎化一切衆生方便解脫門)하니라
관세언음자재(觀世言音自在) 범왕은 보살이 일체중생을 교화하는 방편을 기억하는 해탈문을 얻었습니다.
보살이 일체 중생을 교화하는 방편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을 기억하는 해탈문을 얻었다고 했다.
보살이 일체 중생을 교화하는 방편이 많다. 여러 가지가 있다. 다 우리는 넓은 가슴과 넓은 아량으로 다 수용해야 된다.
공부 좀 한다고 하면 마음에 드는 것은 불교라고 하고 그렇지 아니한 것은 아니라고 배척을 하고 비판을 가하는 것, 저도 잘하는 일인데 그것이 다 잘못된 생각이다.
일체 중생을 교화하는 이런 방편 저런 방편이 한 두 가지겠는가? 너무 방편에 떨어셔 방편 일변도로 가는 것은 아주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또 방편을 그렇게 배척할 일도 아니다.
적정광명안범왕(寂靜光明眼梵王)은 득현일체세간업보상각차별해탈문(得現一切世間業報相各差別解脫門)하니라
적정광명왕(寂靜光明眼) 범왕은 일체세간 업보의 모습이 각각 차별함을 나타내는 해탈문을 얻었습니다.
세간 업보의 모습이 각각 차별하다. 왜 아니겠는가?
사람마다 업보의 차별이 너무나도 많다.
보광명범왕(普光明梵王)은 득수일체중생(得隨一切衆生)의 품류차별(品類差別)하야 개현전조복해탈문(皆現前調伏解脫門)하니라
보광명(普光明) 범왕은 일체중생의 품류가 차별함을 따라서 모두 그 앞에 나타나서 조복하는 해탈문을 얻었습니다.
변화음범왕(變化音梵王)은 득주일체법청정상적멸행경계해탈문(得住一切法淸淨相寂滅行境界解脫門)하니라
변화음(變化音) 범왕은 일체법의 청정한 모습과 적멸한 행(行)의 경계에 머무는 해탈문을 얻었습니다.
광요안범왕(光耀眼梵王)은 득어일체유(得於一切有)에 무소착(無所着)하며 무변제(無邊際)하며 무의지(無依止)하야 상근출현해탈문(常勤出現解脫門)하니라
광요안(光曜眼) 범왕은 일체 존재[有]에 집착할 바가 없으며, 끝이 없으며, 의지(依止)가 없어서 항상 부지런히 출현하는 해탈문을 얻었습니다.
열의해음범왕(悅意海音梵王)은 득상사유관찰무진법해탈문(得常思惟觀察無盡法解脫門)하니라
열의해음(悅意海音) 범왕은 다함이 없는 법을 항상 사유하고 관찰하는 해탈문을 얻었습니다.
2) 게송
이시(爾時)에 시기대범왕(尸棄大梵王)이 승불위력(承佛威力)하사 보관일체범신천범보천범중천대범천중(普觀一切梵身天梵輔天梵衆天大梵天衆)하고 이설송언(而說頌言)하니라
그 때에 시기대범왕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모든 범신천(梵身天)과 범보천(梵輔天)과 범중천(梵衆天)의 대중들을 두루 살피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불신청정상적멸(佛身淸淨常寂滅)하사 광명조요변세간(光明照耀徧世間)하사대
무상무행무영상(無相無行無影像)이여 비여공운여시견(譬如空雲如是見)이로다
부처님의 몸은 청정하고 항상 적멸하시나
세간에 두루 하게 광명을 비추시도다.
형상도 없고 행위도 없고 그림자도 없는 것이
마치 하늘의 구름처럼 그렇게 나타나도다.
좋은 게송이다.
게송마다 다 좋은데 특별히 열 게송 가운데 첫 게송이 좋다. 거기에는 사람 이름을 뺐다. 사람 이름 없이 완벽한 네 구절 한 게송을 만들었다. 아무래도 사람 이름을 표현하면 그 사람 이름 때문에 뜻을 표현하기가 조금 여의치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첫 번째 게송은 우리가 그동안 공부해 왔듯이 보면 늘 완벽한 게송이다.
부처님의 몸은 청정하고 항상 적멸하시나
청정하고 적멸하시나
세간에 두루 하게 광명을 비추시도다.
부처님은 실체가 없다. 우리는 눈에 비치고 귀에 들리고 그런 것만 늘 기다리는데 없다.
그러면서도 세간에 두루 하게 광명을 비추시도다.
이 순간 이렇게 화엄경을 앞에 놓고 공부하고 있는 이 사실이다. 이 사실이 무엇인가?
세간에 두루하게 광명을 비추시도다.
이것 외에 부처님 광명이 또 어디 있는지 우리가 생각해 보면 아니다. 바로 이것이다.
이보다 더 뛰어난 부처님의 광명은 없다.
형상도 없고 행위도 없고 그림자도 없는 것이
어디 눈에 잡히는 것이 있는가? 귀에 잡히는 것이 있는가? 그림자가 있는가? 어떤 행위가 있는가?
그러면서 이 화엄경이라고 하는 뛰어난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들의 마음을 이렇게 환하게 열어준다.
마치 하늘의 구름처럼 그렇게 나타나도다.
하늘에 구름이 동동 떠가듯이 가서 붙잡아봐야 구름이 잡히는가? 실체가 없다. 금방 나타났다가 금방 흩어지고 나타났다가 흩어지고 하듯이 그렇게 나타난다.
아 참 부처님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들은 표현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정말 제대로 표현하기는 해야겠는데, 제대로 표현하려니까 여기 걸리고 저기 걸리고 제대로 표현이 어렵다. 그래서 이렇게 표현한다.
부처님의 몸은 청정하고 항상 적멸하시나
실체가 없다. 그러면서
세간에 두루하게 광명을 비추시도다.
세간에 두루하게 광명을 비추시도다.
형상도 없고 행위도 없고 그림자도 없는 것이
마치 하늘의 구름처럼 그렇게 나타나도다.
이 첫 게송이 너무 좋다.
우리는 이러한 게송을 깊이 마음에 새기고 되뇌면서 나의 안목, 내가 부처님을 이해하고 불교를 이해하는 한 수준으로 삼아서 좀 안목이 넓어져야 되겠다.
집착에서 ‘이러이러한 것이 부처님이다. 왜 부처님은 내 소원을 들어주지 않을까’ 하는 그런 좁은 마음에서 좀 툭 터져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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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문광스님의 책 두 권을 소개해서 괜찮은 뉴스가 됐고 마지막 게송 화엄경 내용이 아주 좋은 게송이었다.
오늘 공부 여기까지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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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일증휘(佛日增輝) 법륜상전(法輪常轉)
불일증휘(佛日增輝) 법륜상전(法輪常轉)
불일증휘(佛日增輝) 법륜상전(法輪常轉)
부처님의 태양은 더욱 더 밝아지고
진리의 수레바퀴는 쉬지않고 굴러가서
온 천하 만중생 지혜의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성불하십시오.
첫댓글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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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方廣佛華嚴經 大方廣佛華嚴經 大方廣佛華嚴經... 고맙습니다. _()()()_
혜명화님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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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이불음(樂而不淫) 애이불상(哀而不傷)’이라는 말이 있다. 즐거운 일이 있을 때 즐거워하되, 빠지지 말라.
모든 사람을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고 존중하고 찬탄하는 일보다 더 훌륭한 수행이 무엇이 있겠는가? 최고가는 수행이다. 참선을 아무리 오래 해도 남을 위하는 실천이 없으면 크게 좋은 수행이 못 된다.
혜명화 님,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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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而不淫 哀而不傷 즐거운 일에도, 슬픈 일에도 너무 빠지지 말라.
可愛樂光明天王의 得法 ㅡ 모든 사람, 모든 생명을 부처님처럼 받들어 섬기고 존중 찬탄하는 일. 이것이 가장 훌륭한 수행이다.
부처님의 한량없는 신통으로 시방에서 광대한 세계가 온갖 변화를 일으키면서 명멸해 가고 있다.
慧明華보살님, 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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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일증휘 법륜상전
불일증휘 법륜상전
불일증휘 법륜상전
감사합니다 🙏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_()()()_